광화문 年歌 - 시계를 되돌리다 | |||
|
2009-07-30 ~ 09-20 | ||
|
서울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
고궁을 바라 눈 감으니 옛날이 輝煌하다 풍악 소리마저 어디서 들릴 듯 들리는 듯…… 석벽인양 깎아지른 고층건물에 부딪쳐 물결 모양 부서지는 夢幻이여! (김동명, "세종로" 중 일부)
광화문 年歌 연가 : 시계를 되돌리다 展
광화문은 건물이자 네거리이며 상징이고 집단기억이다.
광화문 아래 지층 8미터에는 서울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굴곡이 각인되어 있다.
조선개국과 한양천도, 개항과 식민통치, 건국과 전쟁, 압축성장과 민주화의 질풍노도가
광화문에서 펼쳐졌고 그 장소의 형태와 기능을 바꾸었다.
광화문은 교차하는 국가와 시민의 삶, 의례와 일상의 과거사를 되돌아 볼 렌즈이고
현재를 성찰할 거울이며 미래를 내다볼 창이다.
이제 역사의 지층에 광화문 광장이라는 새로운 지층이 더해지는 시점에서 시계를 되돌려
이 특별한 장소가 겪어온 이력을 되짚어 보면서 우
리에게 광화문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할 것인가를 묻는 특별전을 개최한다.
|
|
|
발굴된 광화문 역사지층 |
한 양 도 |
광화문 사진엽서 |
조선의 주작대로, 육조거리를 거닐다
“활줄 같은 곧은 거리 넓기도 한데
별처럼 여러 관청이 나눠져 있다.“
육조거리는 광화문에서 황토마루(지금의 광화문 네거리)까지 길이 600m,
너비는 7궤(軌) 56척(尺)(약 17m)의 대로로 1395년 경복궁 건립과 함께 조성되었다.
육조거리는 궁궐의 어도(御道)와 연결되는 관도(官道)로서
조선왕조의 위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도로 좌우에는 의정부, 육조, 한성부 등 주요 관아들이 자리잡고 있어 ‘육조거리’라 하였다.
|
|
광화문 |
|
|
런던뉴스 |
|
|
|
|
| |
도염서 내자시 내수사 의영고 사역원 장예원 |
예조 중추 사헌 병조 형조 공조 |
육 조 대 로 |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 기로소 |
중학 제용감 사복시 순청 우포도청 |
개항 이후 서울로 들어 온 많은 서구인들은 자신들이 보고 듣고 느낀 점들을 글과 사진으로 남겼다.
이러한 기록들은 19세기 말 서울 사람들의 생활, 풍습, 경관들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해태 머리 위에 올라가서 노는 아이, 나무 시장이 열린 육조거리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서구인들에게 비친 광화문 거리는 위엄 넘치는 어가(御街)가 아니라 공원 같았다.
광화문 사라지고, 조선총독부 우뚝서니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1910년 식민지배 초기 남산의 통감부청사에 자리를 잡은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근정전 앞에 새 청사를 신축하기로 결정하고,
1916년 6월 공사를 시작하여 1926년 10월 완공하였다.
지상 4층의 철근콘크리트로 된 총독부 건물은 높이나 면적에서 근정전을 압도하였으며,
특히 경복궁의 중심축을 무시하고 건물을 근정전과 살짝 틀어 놓음으로써
조선역사의 단절을 상징화하였다.
또한 총독부의 위풍당당함을 보이기 위하여 광화문을 철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광화문 철거계획은 거센 반대 여론에 부딪쳤고
1926년 9월부터 1년 2개월에 걸친 이축공사 끝에 경복궁 동쪽 건춘문 북쪽으로 옮기게 됨으로써
이후 광화문 없는 광화문통이 되었다.
일제는 조선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고 근대화를 선전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동원하였다.
조선왕조의 궁궐인 경복궁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서 여러 차례 박람회를 개최하였으며
파괴된 궁궐을 관광명소로서 소개하였다.
또한 경복궁을 부수고 세운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의 활동구역에 세워진 근대 건축물들과 함께
관광명소로 가장 많이 소개되는 곳 중의 하나였다.
<조선안내> 경성관광안내서 경회루 관광기념엽서
전쟁과 혁명, “광화문으로, 광화문으로”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宗敎)”
36년 만에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을 맞았지만,
좌우이념의 대립으로 우리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남한에서는 1945년 9월 7일 미군정이 선포되었으며, 1948년에는 남한 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경성부는 서울시로, 광화문통은 세종로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한국전쟁이라는 불행을 겪어야 했고, 전쟁은 분단국가라는 아픔과 독재 정치라는 혼돈을 남겼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보도 신문 군정청 포고문
아치가 세워진 세종로
‘화려’와 ‘남루’ 사이에서
“굳어버린 껍질을 뚫고 따끔따끔 나뭇잎들 돋아나고 진달래꽃 피어나는 아픔
성난 함성이 되어 땅을 흔들던 날 앞장서서 달려가던 그는 적선동에서 쓰러졌다”
전쟁복구과정에서 시작된 독재와 권위주의는 4.19혁명으로 막을 내리는 듯 했으나
5.16 군사구테타를 거치면서 장기화되었다.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에 광화문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치와 퍼레이드였다.
일제강점기 식민통치의 선전수단으로 등장하였던 아치와 퍼레이드가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우남회관, 세종문화회관, 정부종합청사, USOM빌딩 등이 광화문 거리 양쪽에 들어서고
세종로 한가운데는 이순신장군동상이 들어서 광화문의 경관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러나 광화문 뒷골목은 소시민들이 술 한잔 걸치면서 생활의 애환을 푸는 술집이 있었고
옛 명문학교들과 대학 입시 학원들이 즐비하여 학생들이 북적북적한 원조 교육의 1번지였으며,
소설가, 영화가, 가수 등 대중문화 예술인의 아지트인 다방이 구석구석 자리한 시민의 공간이기도 했다.
6, 70년대 광화문 일대는
극장, 음악다방, 출판사 등이 자리하고 있었던 문화의 생산지이자 소비지이기도 하였다.
거리의 학생들 국제극장 개봉영화 리플렛
광화문의 주인은 누구인가?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과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1987년 이후 대한민국 정치 1번지이자, 시민의 다양한 목소리와 시위가 함께 하는 광장이 되었다.
자발적으로 모이고, 해산하는 시위는 가족 나들이나 콘서트 관람처럼 즐기는 시위로 바뀌어 나가고 있다.
태극기는 국가와 개인의 일체화를 표상하는 비장함을 버리고 축제를 포장하는 장식물로서 이용되었고,
붉은 옷을 입은 시민들은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승리를 기원하고자 광화문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광화문에서 함성과 축제의 분위기만 허용된 것은 아니었다.
2002년 온국민이 월드컵의 열기로 흥분 속에 있을 때
6월 13일 미선, 효순의 사망소식은 11월 30일 촛불 시위를 촉발하였고,
그날로부터 주말의 광화문, 시청은 촛불로 수만 단위의 인파가 집결하여 거대한 촛불 바다를 이루었다.
부모와 함께 거리에 나온 어린이들 외에도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거리시위에 나섰던 계기가 되었다.
시위를 통하여 사회 각계 각층에서 문제 인식이 대중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광화문은 “오 필승 코리아!”와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 물결,
못다 핀 여중생의 어린 넋을 달래기 위한 촛불 추모 행렬을 담아내었고,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여론의 진원지가 되었다.
한일월드컵 응원 2000년 지구의 날
'더듬어보고(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겸재 정선展 - 붓으로 펼친 天地造化 (0) | 2009.09.08 |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 심층탐구 - 조선 왕실 문화유산 (9/4-11/27) (0) | 2009.09.06 |
[서울역사박물관] 광화문 연가(年歌) - 시계를 되돌리다 展 (0) | 2009.08.01 |
[국립고궁박물관] 고려청자보물선 특별전 (0) | 2009.07.24 |
[국립고궁박물관] '숭례문현판’ 특별전시 (0) | 2009.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