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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주박물관] 금수강산의 삶과 문화

Gijuzzang Dream 2009. 9. 15. 02:11

 

 

 

 

 

공주의 국립공주박물관 기획특별전

 ‘금수강산의 삶과 문화’ (9월8일-10월18일)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전, 충남 지역 박물관과 미술관 22곳에서 간추려 출품한

고대~근현대 소장 유물 114건 180여 점이 나왔다.

 

특별전 “금수강산(錦繡江山)의 삶과 문화-대전・충남 박물관 미술관 명품전”

 

이 기획전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전시품으로

국립공주박물관의 수촌리 출토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의 발받침(국보 제165호), 왕비의 베개(국보 제164호)와 발받침이

기간 한정으로 특별히 공개된다.

국보로 지정된 무령왕의 발받침(足座)과 왕비의 베개(頭枕)의 경우

보존 문제 때문에 상설전시가 불가능해 보통 때는 '가짜(복제품)'를 전시한다.
왕의 발받침과 왕비의 베개는 90년대 초ㆍ중반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존처리를 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어 항온ㆍ항습 기능을 장착한 특수 장비에 항상 넣은 채로 수장고에서 보관했으며,

가끔 아주 잠깐씩 공개돼왔다.

 


더불어 수덕사 근역성보관 소장의 상교정본 자비도량참법(보물 제1543호),

수덕사 대웅전 연화대좌편(보물 제1381호), 삼길암 목조관세음보살좌상과 복장이 전시된다.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詳交正本慈悲道場懺法), 보물 제1543호
고려 1316년, 수덕사 근역성보관

 

 

자비도량참법은 경전을 읽으면서 죄를 참회하는 불교의식집이다.

이 책은 권말 기록에 의하여 1316년(고려 충숙왕) 8월에 보현사(普賢寺)의 비구 석연(釋連)과 문세(文世)

등이 참여하고 변산(邊山)에서 진오(眞悟) 등이 판에 새겨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의 본문에는 피휘자(避諱字)가 있어 고려시대 간행된 책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 목조연화대좌 편(修德寺 大雄殿 木造蓮花臺座片), 보물 제1381호
고려 14세기, 수덕사 근역성보관

 

연화좌와 수미단으로 구성된 수덕사 대웅전 목조대좌는 목조삼세불좌상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 중 연화대좌는 연꽃잎을 하나씩 별도로 만들고 잎의 밑부분을 못으로 고정하여

연꽃이 활짝 핀 형상을 의도하였다.
법은사(法恩寺) 소장 아미타삼존도(1330년)와 같은 고려후기불화의 대좌 문양이나

14세기 보살상의 영락장식과 상통하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목조대좌로 의미가 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윤증(尹拯, 1629~1714)의 초상(보물 제1495호)도 매우 주목되는 전시품이다.

 

윤증 초상 전신상(尹拯 肖像 全身像), 보물 제1495호

이명기필 구법(李命基筆 舊法), 조선 정조 12년(1788), 충청남도역사박물관(윤완식 기탁)

 

보물 제1495호인 ‘윤증 초상’ 6점은,

1744년 어용화사인 장경주가 그린 것부터 일제 강점기 때까지 그려진 것으로

국내 초상화 변천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조선시대 사상사에서 윤증이 차지하는 비중과 함께 현존하는 장경주와 이명기가 그린 '윤증초상'은

조선후기를 대표할만한 뛰어난 회화적 격조를 지니고 있어 중요성을 지닌다.

이들 작품 외에도 종가에는 1919년 및 1935년작 전신좌상 및 소묘초본이 여러 점 전하고 있다. 

초상화와 함께 전하는『영당기적』은

윤증 초상화 제작연대와 내용을 기록한 필사본으로,

초상화의 제작과 이모과정 그리고 세초의 전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1711년 卞良이 윤증의 초상을 처음으로 그렸던 사례부터

1744년 장경주, 1788년 이명기, 1885년 이한철이 모사할 때까지 4번의 제작사례를 기록하였다.

그 내용은 제작일정 및 제작된 초상의 수, 구본 및 신본의 봉안과정 등을 상세히 담고 있다.

- 1744년작(전신) : 111x81cm(화면), 190.1x101.0cm(전체)
- 1788년작 1(전신) : 118.6x83.3cm(화면), 182.2x100.3cm(전체)
- 1788년작 2(전신) : 106.2x82cm(화면)
- 소상(2점) : 59 x 36.2cm(정면), 59 x 36.2cm(측면)
- 『영당기적(影堂紀蹟)』

 

‘崇禎紀元後再甲子四月摹’ 라는 묵서가 있는 윤증(尹拯, 1629∼1714) 측면전신좌상은 1744년 작품으로,

『영당기적』에 ‘崇禎紀元後, 再甲子四月, 影子移摹四本, 正面一仄面三. 畵師張敬周’라고 밝혀져 있어

장경주의 작품으로 확인된다.

 

‘崇禎紀元後三戊申二月摹’라는 묵서를 지닌 1788년작 윤증초상 2점은

『영당기적』의 내용을 통해 정조대에 이명기가 모사했음을 알 수 있다.

『영당기적』에 따르면 정면 1본과 측면 1본은 신법을 가미하여 그리고,

구본의 화법을 후대에 전하지 않을 수 없어 구법을 따라 측면 1본을 그렸다고 한다.

(故倣甲子正面點化之例, 略加新法, 摹出正仄各一本, 而舊本畵法, 亦不可不傳於後.

故又出仄面一本, 純用舊摸法)

이 초상은 장경주필 윤증상과 그 모습이 흡사한 구법에 따라 그린 측면상이다.

 

이명기가 제작한 현전하는 초상화 2점은

장경주 필 윤증상과 그 모습이 흡사한 구법에 따라 그린 측면상과

이명기의 개성적 화풍으로 그린 입체표현이 선명한 신법의 측면상이다.

정면과 측면의 흉상 2점은 화면에 묵서가 남아있지 않아 제작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정면상과 측면상은 같은 비단에 같은 화가의 솜씨로 추정된다.

측면상을 전신상과 비교해 보면 크기나 기법이 장경주가 그린 초상화와 같다.

  
 

충남역사문화원은 "7월7일 명재(明齋) 윤증가(尹拯 家)가 유물 1만 643점을 기증했다"고 밝혔다.

윤증 선생의 12대 종손인 윤완식(53)씨가 참석한 가운데 윤증 집안 유물 영구 기탁식을 가졌다.

윤씨가 이날 기탁한 유물은 8,999점으로

2007년부터 연차적으로 기탁한 1,644점을 합치면 모두 1만 647점에 이른다.

윤증 선생 11대손이 한국전쟁 때 이 유물 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하고,

멍석에 둘둘 말아 가장 가난한 사람 집 시렁에 매달아 보관했다고 한다.


올해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우리문화유산 찾기 운동’을 충남권을 대상으로 펼쳐왔다.

2004년 국사편찬위원회에 위탁했던 것을 수탁기간이 끝나자 충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 영구 기탁한

명재 윤증가는 보물로 지정된 초상화(보물 제1495호) 6점, 중요민속자료 제22호로 지정된 유품 54점,

윤증가(家)의 책판(논산시 향토문화유적 제12호) 1,039점과 고문서 6,000여 점도 포함돼 있다.

윤증 선생 등이 쓰던 상투관, 빗, 신, 합죽선, 인장 등으로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 초기 천문과학 형성과정과 우주관을 보여주는 해시계와 혼천의도 있다.

또 이미 보물로 지정된 17세기 종학당 운영규정에 해당하는 학규(學規)와

윤증 초상을 모셨던 유봉영당(酉峯影堂)의 첨배록과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ㆍ1543∼1605)의 간찰(簡札) 등 문화재급 유물도 이날 영구 기탁됐다.


7월에 기증받았던 윤증가의 유물들은 보수 중이다. 보물 1495호 윤증 초상은 8월에 보수를 완료했고,

나머지 유물도 문화재청과 보수내용을 협의하고 있다.  

명재 윤증가 고택 기증은 현재 법적인 절차만을 최종 단계로 남겨두고 있다.

 

   

▲ 보물 1495호 윤증 초상.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변평섭 원장은 “윤증가 고택 기증과 같은 사례가 2건 정도 더 나올 예정”이라며 “조속한 시일 내에 법적인 부분을 포함해 고택보호대책을 세우고,

윤증가 고택을 비롯해 앞으로 나타날 기증 유산을 관리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충남지역 고택은 총 12점으로 국가 중요 민속자료들이다.

변 원장은 “이들 모두 사유재산이었지만 윤증가 고택의 기증을 시발로 기증 문화재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이번 유물의 기증을 계기로 많은 중종과 고택 소유자들이 동참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한편, 윤증가 고택에서는 9월 12일 음악가 임동창 선생을 모시고 음악회를 개최한다.

윤증가 고택은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번지에 위치하며, 조선 숙종 때 학자 명재 윤증(尹拯, 1629~1714)의 아들이 건립해 윤증이 잠시 기거했던 곳이다.

윤증 선생은 조선 숙종 때의 대학자로 관직을 포기하고 낙향해 평생 후학양성에 힘쓴 소론의 영수이다. 스승 송시열의 주자학적 조화론과 의리론을 비판한 진보세력으로 노론의 정국 전횡을 견제했다.

- 2009년 7월7일 

 

 

한편, 금강산 곳곳에 명필을 새긴 조선 전기 문인 양사언의 일필휘지 글씨,

1900년대 발이나 허리를 따뜻하게 하던 일본식 물난로(이른바 ‘유담포’) 등의 색다른 문화재도 있다.

 

 

 

 

- 무령왕의 발 받침(足座), 국보 165호 
- 무령왕비의 베개(頭枕), 국보 164호 
백제 (무령왕릉), 국립공주박물관

 

1500여년 전 만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베개는 무엇일까? 누가 베고 잤을까? 

1971년 극적인 무덤 발굴로 유명해진 백제 25대 임금 무령왕(재위 501~523)과 그의 왕비다.

박물관 전시실 들머리에서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나오는 진열장,

여느 곳보다 희미한 불빛 아래 빛나는 그곳에 무령왕의 나무 베개와 발 받침대가 있다.

 

고구려 침공에 밀려 웅진(공주)으로 천도해야 했던 왕조의 곤경을 잘 수습해 중흥 기틀을 놓았던 명군,

일본 규슈 섬에서 태어나 왕위에 오른 색다른 내력으로도 잘 알려진 무령왕의 안식틀인 것이다.

이 지고의 명품 베개에서 백제인들이 꿈꾸던 도교, 불교의 내세, 이상향에 대한 소망을

1500년이 지나서도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으며,

발굴 40년이 다 되도록 좀처럼 엿볼 기회가 없었던 무령왕릉 비장품을 볼 수 있다.

 

 

붉은빛이 감도는 직육면체 나무에 유(U)자형 홈을 파 망자의 머리를 놓게 한 왕비의 베개는

세계 어느 왕릉 보물에도 꿀리지 않는 고고한 자태와 우아한 색감이 눈빛을 빨아들인다.

망자가 유람했을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붉은빛 표면, 가장자리를 따라 금박으로 테두리선을 돌린 다음

그 안에 금박으로 육각형의 거북등 무늬(龜甲文)를 연속적으로 표현하였다.

거북등무늬 안에는 흰색, 붉은색, 검은색의 안료를

비천(飛天), 새, 어룡(魚龍), 연꽃, 인동(忍冬), 네잎 꽃 등의 그림을 그렸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의 발받침은 허세 없는 왕의 권위를 표상한다.

검은 옻칠을 두텁게 하고, 금판(金版)으로 6각형의 거북등무늬 (龜甲文)를 연속적으로 만들어 붙였다.

거북등무늬의 마디(結節点)와 그 안에는 달개가 달린 꽃모양의 장식을 부착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적잖이 훼손됐지만, 2003년 발굴된 공주 수촌리 수장묘의 금동 신발과 금동 관모도 명품 반열에 든다.

 

 금동관모(金銅冠帽) 공주 수촌리 출토, 국립공주박물관

 

백제지역의 관모는 대체적으로 한성기 말에서 웅진기에 걸치는 시기에 편년되는 것으로

지방의 유력지배자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다.

백제의 관모는 전체적인 형태가 역U자형, 관 상부에 대롱모양의 장식이 달리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금동신발(金銅飾履), 공주 수촌리 출토, 국립공주박물관

 

금동신발은 무덤에 묻힌 주인공의 권위와 위세를 나타낸다.

주로 왕릉 또는 이에 버금가는 지배자의 무덤에서 출토된다.

백제지역에서 조사된 금동신발은 바닥에 금동못이 박히고

표면에 凸자무늬, 마름모꼴무늬, 거북등무늬(龜甲文), 연꽃무늬, 용무늬, 인동당초무늬, 물고기무늬

등의 다양한 무늬가 표현되었다. 수촌리 출토품에는 초화문 또는 용봉문의 문양이 시문되었다.

이들 유물 표면에 촘촘하게 새긴 용틀임하는 용의 비늘무늬는

백제인의 공예적 상상력을 전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 국립공주박물관 (041)850-6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