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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조선왕실의 비밀] ⑧ 동구릉 1편 (건원릉, 현릉, 목릉, 휘릉)

Gijuzzang Dream 2009. 9. 7. 12:54

 

 

 

 

 




사적 제 193호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2-1


         
동구릉 가는길
서울시내 → 내부순환도로 → 북부간선도로 → 구리IC에서 43번 국도로 진출 → 퇴계원 방향으로 U턴

→ 좌측에 이정표, 근처능으로는 홍유릉과 사릉이 있다.

 

 

 

 

 

 

       

                           




조선의 왕과 왕비 17위의 유택이 마련돼 있는 곳으로 동구릉(東九陵)은

‘동쪽에 아홉 개의 왕릉이 있다’ 하여 이름붙여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왕릉군이다.

1408년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자

태종의 명으로 파주, 고양 등지에서 좋은 묏자리를 물색하여 능지로 정해진 곳이다.

 

동구릉의 조성은 조선왕조 전 시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동구릉이라고 부른 것은 추존왕 익종의 능인 수릉이 아홉 번째로 조성되던 1855년(철종 6) 이후의 일이며,

그 이전에는 동오릉(東五陵), 동칠릉(東七陵)이라고 불렀다.

 

동구릉에는 검암산 중앙 북쪽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健元陵)을 중심으로

동쪽 언덕에 14대 선조와 그의 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穆陵),

그 남쪽 아래로 5대 문종과 그의 비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顯陵)이 있으며,

그 다음으로 23대 순조의 세자인 추존왕 익종과 그의 비 신정왕후의 능인 수릉(綏陵)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건원릉 서쪽으로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 휘릉(徽陵),

그 다음으로 24대 헌종과 그의 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景陵)이 있고,

그 아래로 21대 영조와 그의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元陵)에 이어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惠陵)이 있으며,

맨 왼쪽으로 18대 현종과 그의 비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崇陵) 등 모두 아홉 개의 능이 자리 잡고 있다.

 

동구릉은 능제의 변화와 조선왕조 500년의 부침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더욱이 능 전역에 우거져 있는 숲과 능역을 가로지르는 개울물 등 자연경관이 아주 빼어나다.

 

 

 


                              

건원릉(健元陵)

         




건원릉은 고려왕릉 중 가장 잘 정비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 제도를 따랐으나,

석물의 배치 등에 변화를 주고 봉분 주위로 곡장을 두르는 등 새로운 양식을 도입하여,

조선 능제의 표본이 되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능이다.

건원릉은 동구릉에서 가장 중앙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의 뛰어난 무장이었던 이성계는 1392년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왕위에 올라 새 왕조를 열었다.

태조는 7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정하는 등

조선왕조의 기틀을 이루어 놓았다.




건원릉 봉분은 푸른 잔디가 아니라 억새를 사초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죽기 전 유독 고향을 그리워하였기에 태종이 고향인 함흥에서 가져오도록 했다.

태조의 비는 신의왕후 한씨(齊陵, 북한)이고,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貞陵, 정릉동)다.

태종 8년 74세로 승하했으며, 묘호를 태조(太祖)라 했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에 자신의 묏자리를 축조해놓았다.

그러나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왕후의 정릉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했다. 보통 능호는 외자로 하지만 건원능만 두 자이다.




홍살문에서 바라본 정자각과 봉분.

건원릉의 봉분은 조선왕릉 가운데 가장 높게 조성되었다.

  

건원릉은 고려 왕릉 중 가장 잘 정비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玄正陵) 제도를 기본으로 조성되었고,

이후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 되었다. 기본 능제는 현정릉을 따르고 있으나

석물의 배치와 장명등석의 조형 등 세부적으로는 새로운 양식의 도입으로 일정한 변화를 주어

새 왕조가 시작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봉분 주위로 곡장을 두르는 방식은 조선시대의 능제에 새롭게 추가된 것이며,

석물의 조형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따르고 있다.

 

봉분 아래 부분을 12각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십이지신상이 새겨졌다.

봉분 앞 혼유석 밑을 귀면이 새겨진 고석 5개가 받치고 있으며

석물들의 형태는 우람한 편이다.

소전대는 능제를 마친 후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3대 태종왕릉(헌릉)까지만 있고 이후 예감으로 대치되었다.

홍살문 바로 오른쪽에 배위가 있고, 안쪽에는 정자각, 비각, 수복방이 있으며

비각 안에는 왕릉에 묻힌 왕의 행적을 새겨놓은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 일화 ★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태종)이

1,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신덕왕후 소생의 두 아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정치에 뜻을 잃어버린 태조는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2년 뒤 정종의 뒤를 이어 태종이 즉위하자 태상왕이 된 태조는 서울을 떠나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다.
이때 태종이 문안을 위하여 보낸 차사들이 가면 돌아오지 않아 ‘함흥차사(咸興差使)’란 말이 생겨났다.

한번 가기만 하면 깜깜소식이란 뜻으로, 심부름꾼이 가서 소식이 없거나 회답이 더디 올 때 쓰이는 말이다.

 


 

 건원릉 - 태조 이성계

 

수릉 대신 도성 밖 10리에 새 왕조 시작 의미 담아 조성

 

  

건원릉의 능침에는 이성계의 고향 함흥에서 가져온 억새풀을 심었다. 봉분 위의 억새풀은 태조의 유언에 따라 벌초하지 않고 4월 5일 한식 때만 한 차례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능호는 건원릉(健元陵)이며 단릉(單陵)이다. 건원릉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동구릉의 하나로 중앙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했다. 이 자리는 조선 개국의 실력자이며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왕권을 잡은 태종(이방원)이 결정한 곳이다.

 

원래 태조는 애첩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묻히고자 여러 차례 수릉(壽陵 · 생전에 미리 정해놓는 무덤) 자리를 물색했다. 신덕왕후가 승하하자 한양 도성 안 경복궁 서남방의 황화방(皇華坊)에 신덕왕후의 능침을 만들고 자신의 능침도 오른쪽에 조성했다.

 

그러나 태종은 부친이 잡아놓은 수릉 대신 도성 밖 동북방에 있는 양주의 검암산 아래에 태조릉을 조영했다. 도성 안의 수릉을 옮긴다는 명분을 앞세워 계모 신덕왕후의 능도 옮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후 태종은 도성 안에는 왕실이나 사가의 무덤을 쓰지 못하게 하고, 도성 10리 밖에 능역을 조성하도록 했다. 이 제도는 후에 ‘경국대전’에 법문화됐다.

그래서 지금도 도성 안에는 왕릉이나 무덤이 한 기도 없다. 현명한 도시계획이었다.

 

태조, 경복궁 서남방의 황화방에 능침 조성

 

태상왕(이성계)은 1408년 5월 24일 새벽 창덕궁 광연루 아래 별전에서 74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이성계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35년 10월 11일 함경도 화령부 흑석리에서 아버지 이자춘과 어머니 최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성계는 제왕이 되기 이전의 이름이며, 왕실에서의 이름은 단(旦 · 이성계가 왕이 된 뒤 왕실에서는 외자의 이름을 썼는데, 사가와 다른 이름으로 하여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다)이고 호는 송헌(松軒)이다. 송헌은 그의 친구 이색이 그의 사저에 있는 소나무를 보고 지어준 것이라고 전한다.

 

이성계는 대대로 내려온 화령부의 무인 집안으로, 원나라의 쇠퇴기인 1356년 철령 이북의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쌍성총관부를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간 외적을 격퇴하며 전쟁터에서 산 맹장이었다.

 

위화도회군의 성공으로 고려(34왕 474년) 왕조를 무너뜨리고 1392년 7월 17일 조선을 건국했다. 1394년 10월 28일 한양에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천도했으며 즉위 직후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했다.

그러자 이성계 등극의 최대 공로자인 이방원은 이에 불만을 품고 이복동생 방번과 방석, 정도전을 제거했다.

 

이성계는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물려주고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냈으니 재위한 지 6년 2개월 만이다.

2년 뒤인 1400년 정월 이방원은 넷째 형 방간이 일으킨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세자로 책봉돼 그해 11월 왕위에 올랐으나 태조의 분노는 극에 달해 옥새도 물려주지 않고 고향 함흥으로 가버렸다. 이때 이방원이 문안을 위해 보낸 차사를 죽여 ‘함흥차사’라는 말까지 유래됐다. 이후 태상왕의 친구인 무학대사의 권유로 1402년 한양으로 돌아와 불도에 정진하다 승하했다.

  

“최고의 길지, 이제 근심 걱정 없어졌다”

 

건원릉의 진입 공간에서 제향 공간으로 이어지는 곳.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은 창덕궁 동남쪽에 있는 왕자의 독서실에 여막을 정하고 날마다 ‘주자가례’의 예를 보았다.

 

태조의 국장 총책임자인 총호사는 영의정부사 하륜(河崙)이 맡았다.

 

산릉(山陵·국장을 하기 전에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않은 새 능)의 자리는 하륜과 김귀인 등이 양주의 검암(儉巖)을 길지로 천거하고 건설은 당시 최고의 기술자 박자청(朴子靑)이 담당했다.

박자청은 왕실 내시 출신으로,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궁문 파수를 맡았다. 이때 세자인 방석(의안대군)이 소명(召命: 출입증) 없이 궁궐에 드는 것을 막다가 발길에 걷어채고 얼굴에 상처를 입었지만 굽히지 않았다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태조가 자청을 칭찬하고 상과 직급을 올려주었다. 이후 자청은 왕실 건설책임자로 문묘와 문소전을 짓고, 공조판서(건설부 장관)가 돼 제릉(태조의 첫째부인 신의왕후의 능)과 건원릉을 감독했다. 세종은 67세를 일기로 그가 죽자 국민장으로 하고 3일간 정사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산릉 건설에는 충청, 황해, 강원도에서 6000여 명의 기술자가 동원됐다.

건원릉의 석실은 회격실과 전실 등이 논의됐지만 석실로 최종 조성됐다.

유교를 국시로 했으나 태종은 산릉 재궁에 개경사를 세우고, 검암산 아래 지금의 재실 위쪽에 원찰을 조성했다.

 

승하 후 태상왕의 시호(諡號)는 생전 공덕을 칭송해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 했다.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묘호(廟號)는 왕으로서의 덕목을 나타내는 것으로 ‘태조(太祖)’라 하고, 능호(陵號)는 개국왕임을 고려해 세 글자인 ‘건원릉(健元陵)’이라 했다. 이후 모든 능호는 두 글자로 지었다.

 

태조의 조문으로 왔던 명나라 사신 기보(祁保)와 임관 등이 건원릉 능침 산세를 보고 “어찌 이와 같이 하늘이 만든 땅이 있을 것인가. 반드시 인위적으로 만든 산형 같다”

고 감탄했다. 풍수가들은 이곳을 “주산은 금수형(金水形)이며 용맥은 장유형(長乳形)이고, 형국은 청룡승천형(靑龍昇天形)”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 동구릉 입구에는 여의주형 방지원도의 연못이 2개나 조성돼 있다. 동구릉 왼쪽에 흐르는 물길의 이름은 왕숙천(王宿川)이다. 동구릉의 명당수로 명칭과 연계해서 해석할 수 있다.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왕권을 잡은 태종은 태조와 불편한 관계에서 아버지가 직접 잡은 수릉마저 옮기려 했으니 얼마나 근심이 컸을까? 태종은 검암산 아래 아버지 태조의 유택을 확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망우리 고개를 넘으면서 수행원들에게 “이제는 근심 걱정이 다 없어졌다”고 했다고 한다. 이것이 망우리(忘憂里)고개의 유래가 됐다. 태조가 조성한 수릉을 번복한 뒤 태종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인지 태조 승하 2개월 뒤인 6월 28일에야 산역을 시작했다.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5월 24일 승하한 태조의 장례는 9월 9일 치렀다.

 

건원릉은 고려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 · 정릉(玄·正陵) 제도를 기본으로 따랐으나 석물의 배치와 장명등의 조형 등은 새로운 양식의 도입으로 일정한 변화를 주어 새 왕조가 시작됐음을 시사했다. 봉분 주위로 곡장을 두르고 장명등이 사각에서 팔각으로 변하는 형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아울러 조선의 통치철학이었던 유교의 예에 따라 정자각 전면에 참도, 뒷면에 신도, 정자각 뒤편에 망료위 등을 설치했다.

 

건원릉의 비각에는 능상 측에 신도비와 정자각 측에 묘표가 있다. 신도비는 1409년에 세웠다. 비의 형식은 귀부와 비신, 이수를 갖추었는데 당대 최고의 조각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런 형식은 통일신라 이후에 계승된 전통이다.

비문 상부의 전액은 문신 정구(鄭矩, 1350~1418)가 쓰고,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권근(權 近, 1352∼1409, 조선의 개국공신)이 글을 짓고, 음기의 글은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이 지었다. 글씨는 성석린(成石璘, 1338~1423, 고려 말·조선 초의 서예가)이 썼다. 이를 태종이 극찬했다.

 

능침에서 내려다본 건원릉의 겨울 풍경.

신도비 앞에는 조선 개국의 업적과 치적을 새기고, 뒤편에는 개국공신들의 이름을 기록했다. 묘표는 500년 후 태조를 황제로 추존하면서 세운 것으로 고종이 친히 썼다. 형태는 신도비와 비슷하며 용의 조각상이 아름답다.

 

탁 트인 열린 경관, 신하가 읍조리는 능선

 

건원릉은 능침을 둘러싼 송림과 능침 앞으로 시야가 탁 트인 경관이 아름답다. 앞에 펼쳐진 능선들은 신하가 읍조리는 형상이라고 하며 여러 겹의 능선을 꽃잎, 능침을 꽃심으로 보았다.

 

병풍석을 두른 봉분 위의 흙과 억새풀은 이성계의 고향 함흥에서 가져다 조영했다. 봉분 위 억새풀은 태조의 유언에 따라 벌초하지 않고 4월 5일 한식 때만 한 차례 하는 것이 특이하다. 가을에 흰색 억새풀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마치 요동 벌판을 말 달리던 맹장 이성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태조는 74세를 향수하는 동안 2명의 왕후에게서 8남 3녀, 1명의 후궁에게서 2녀를 두었다.

태조의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능은 능호를 제릉(齊陵)이라 했고, 현재 북한의 개성군 판문면 상도리에 있다.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호는 정릉(貞陵)이며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제시설 - 장명등

 

명당 오래 밝힌다는 의미 … 팔각 또는 사각으로 화려하게 장식

고려시대 현정릉의 장명등과 조선시대 건원릉의 장명등. 사각형에서 팔각형으로 양식이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장명등(長明燈)은 능침 공간의 중심시설이다. 능침 혈 앞의 명당을 오랫동안 밝힌다는 의미로, 왕조의 영원성을 나타내는 듯하다.

사찰에서 볼 수 있는 탑, 석등과 유사한 형태로 유교적인 무덤 양식에 불교가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능묘의 혼유석 바로 앞 문인 공간에 설치했으나 후기에 와서 무인 공간에 배치하기도 했다.  

영조 이후에 문 · 무인 공간이 높낮이와 공간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가 됐는데 이런 흐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 신분제도의 변화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나타난 능제의 대표적인 변화가 장명등이다.

고려시대의 사각 장명등이 조선시대는 팔각 장명등으로 변한 것이다.

팔각 장명등은 보주가 있는 지붕돌 아래 가운데에 등을 넣을 수 있는 화창(火窓)이 뚫린 몸체가 있고, 그 아래에 안정적인 받침대가 있다. 팔각 혹은 사각의 외면에 각종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했다.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2010.04.06 730호(p74~76) 주간동아

 

 

 

 

 

 



                         

현릉(顯陵)

         



문종과 현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현릉.

현릉은 두 개의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이 각각 자리한 동원이강릉이다.

정자각 뒤로 보이는 것이 문종 능, 비각 뒤가 현덕왕후 능이다.

 

조선 5대 문종(文宗, 1414~52)과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41) 권씨의 능이다.

문종은 세종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이다.

1450년 왕위에 올라 언로를 열어 민의를 파악했고, 문무를 중용하고 군사제도를 개편하였다.

그러나 몸이 허약했던 문종은 재위 2년 4개월 만에 보령 39세로 승하하였다.

문종의 시호는 공순(恭順)이다.

 



현덕왕후 능에서 바라본 문종의 능.

현릉은 조선시대 오례에 관한 의식 절차를 기록한《국조오례의》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였다.


부왕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문종은

생전에 영릉 오른쪽 언덕(본래 세종의 영릉이 지금 헌인릉 오른쪽에 있었다)을 장지로 정했으나

그곳을 파보니 물이 나고 바위가 있어 취소하고 이곳 건원릉 동쪽에 안장되었다.

구 영릉이 조성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옮겨졌으므로

현릉은 『국조오례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가장 오래된 능이다.

현덕왕후는 왕후에 오르기 전 1441년에 원손(단종)을 출산하고 그 산후병으로 승하하여

경기도 안산군에 예장되었다.

1450년 문종의 즉위와 함께 현덕왕후로 추숭되었고, 능호를 소릉(昭陵)이라 했다.

 



선이 굵게 조각된 현덕왕후 능의 문 · 무석인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문종과 합장되면서 현릉으로 능호를 바꾸었고,

문종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봉안되었다.

그러나 1457년(세조 3) 현덕왕후 친정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현덕왕후는 추폐되어 종묘에서 신주가 철거되고 능은 파헤쳐져 물가로 옮겨지는 수난을 당했다.

그 후 1513년(중종 8) 종묘의 문종 신위만이 홀로 제사 받는 것이 민망하다는 명분으로 복위되어

현릉 동쪽 언덕에 천장되어 동원이강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 신주는 다시 종묘에 봉안되었다.

 

현릉은 동원이강 형식으로 왼쪽이 왕릉, 오른쪽이 왕비릉이다.

현릉의 형식은 <국조오례의>의 표본이 되는 영릉 제도에 따라

병풍석의 방울, 방패 무늬가 사라졌고,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고석도 4개로 줄었으며, 현덕왕후릉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다.

제일 아랫단에 장검을 두 손으로 짚고 서 있는 무인석은

머리부분이 지나치게 크고 주먹 만한 눈, 코로 인해서 위엄있게 보이지 않으며,

무인석도 튀어나온 눈과 양쪽으로 깊이 새겨진 콧수염이 이국적인 모습이다.

  

 

 릉 - 문종과 현덕왕후

 

무지개가 잡아준 왕릉터 우상좌하, 우왕좌비(왕=오른쪽, 왕비=왼쪽) 배치

 

 

‘국조오례의’ 양식을 따른 현존하는 최고의 왕릉인 문종의 능침.

현릉(顯陵)은 조선 제5대 문종(文宗, 1414~1452)과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1441)의 능으로 동원이강(同原異岡)형이다.

 

현릉은 구리시 인창동 산2-1번지의 동구릉지역 건원릉(健元陵)의 동남측 언덕에 있다. 서측 구릉에 병풍석으로 조성된 것이 문종의 능이고, 동측 언덕의 난간석 봉분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이는 우상좌하(右上左下), 우왕좌비(右王左妃)의 원칙에 따른 배치다. 이 원칙은 현재 민간 장묘문화에도 이어져오고 있다.

 

문종은 1414년(태종 14) 10월 3일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향(珦), 자는 휘지(輝之)다. 8세 때 세자로 책봉됐으며 각종 질병에 시달리던 아버지 세종을 대신해 37세까지 8년간 섭정을 하다 왕으로 등극했다. 세자로 있었던 기간이 무려 30년이나 정작 재위 기간은 2년 3개월밖에 안 됐다. 긴 준비 기간에 비해 매우 아쉬운 집권이었다.

 

효자였던 문종은 과로로 명 단축

 

문종은 효자였다. 세자 때 시선(侍膳 · 시식, 아침저녁으로 부모님의 진짓상을 돌보는 일)을 신중히 하고, 동궁 후원에 손수 앵두나무를 심어 열매를 세종에게 올리기도 했다. 이에 세종은 “외간에서 올린 것이 어찌 세자가 손수 심은 것에 비할 바인가?”라고 했다 한다.

 

문종은 성균관에서 특별교육을 받는 등 오랫동안 왕위 수업을 했는데 특히 학문을 좋아해 학자들과 자주 어울렸으며, 측우기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천문, 역술, 산술 등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문장과 서예에도 능했다. 언로를 열어 민의를 파악했고, 문무를 중용했으며 군사제도를 개편했다.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대학연의주석’ 같은 책을 정리 · 편찬하는 등 조선의 정치와 제도문화를 정비하는 한편 친히 과거 시험문제를 내기도 했다.

직언자를 좋아했으며, 형벌에는 신중을 기했고, 노인을 공경했다.

또 우(虞)나라 빈객(고려의 왕족)을 대우하기도 했다. 이렇게 자정을 넘기며 일하고 새벽녘에 일어나 업무를 보고 국정계획을 세우던 문종은 세종의 3년상을 치르면서 음식과 약을 멀리한 데다 집권 초기의 과로까지 겹쳐 결국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1452년 5월 14일 오후 9시경 경복궁 강녕전에서 문종의 병환이 위급해지자 11세였던 세자(단종)는 당황해 “나는 나이가 어려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의정부 대신들이 급히 근정전에 모이고 궁궐 사문을 삼엄하게 경비하도록 시켰다.

그리고 세자를 통해 죄수를 석방하는 안을 내니 문종이 “불가하다” 했다.

이것이 문종의 마지막 집무였다.

 

문종의 아우인 수양대군이 왜 청심환을 드리지 않느냐고 탓하자 의관이 청심환을 올렸으나 왕에게 미치지 못하고 훙서(薨逝 · 세상을 떠남)했다. 대신들이 왕의 안부만 묻고 어느 한 사람 나아가 진찰을 종용하지 않음에 사람들이 분개 한탄했다. 특히 백성들은 어린 세자가 안쓰러워 세종의 상사 때보다 더 슬퍼했다.

 

                                     동원이강형의 현릉

    참도가 길게 궁(弓)자형을 이루며 배위가 홍전문 앞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승하 4개월 후인 1452년 9월 1일, 문종을 현릉에 장사 지냈다.

당시 총호사(장례위원장)는 영의정 황보인이 맡았다. 문종은 병으로 급사해 선대의 왕과 달리 수릉도 만들지 못한 데다 단종이 어리다 보니 장지 선정과 능역 조영에서도 우왕좌왕했다. 문종 승하 5일째인 1452년 5월 18일 경복궁 근정문에서 단종이 즉위했다. 일반적으로 선왕 승하 5일 이내에 새로운 왕이 즉위하고 선왕의 장례를 치른다.

 

수양대군과 종친, 총호사 등은 문종이 평소 희망했던 옛 영릉, 즉 세종과 소헌왕후의 초장지(서초구 세곡동) 터로 가서 현궁 자리를 물색하고 건좌곤향(乾坐坤向)의 터를 정해 공사를 했다. 그러나 전농사(典農寺) 스님인 목효지가 새 능의 터가 좋지 않다고 해 당황스러워했다. 과연 천광(穿壙 · 시신 묻을 구덩이를 팜)을 하니 물이 솟아났고, 다시 영릉 서혈을 파니 돌이 나왔다.

7월 24일 무지개가 구지에서 동구릉까지 이어지자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태조 건원릉의 동혈을 살펴보고 이곳에 자리 잡았다. 무지개가 현릉의 자리를 잡아준 것이다.

 

산릉도감에서 천광의 깊이를 10척으로 하고 장삿날을 9월 1일과 17일 중 하루로 결정했다. 천광은 주척(周尺)을 쓴다. 강북 노원구의 돌을 강남 헌릉 근처로 옮겨 제작하다가 장지를 건원릉 동측으로 옮기니, 역부 8000명을 동원해 한강을 넘는 도중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래서 발인을 위한 동원인력은 선대의 왕에 비해 반으로 줄였다.

 

문종 발인 때 ‘애책문(哀冊文 ·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글)’에는 “풍금(楓禁 · 궁중에 단풍나무를 많이 심어 궁궐을 풍금이라고도 함)의 깊숙함을 등지고 백성(柏城 · 소나무, 전나무, 측백나무 등 침엽수가 많이 심어진 능역을 가리킴)의 아득함을 지향했다”라고 했다. 이때 효자사왕(孝子嗣王 · 후임 왕, 단종을 일컬음)은 하늘에 부르짖으며 슬피 사모하고 서리를 밟으며 눈물을 흘렸다.

 

문종의 존시(尊諡)는 ‘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시호(諡號)는 공순(恭順)이며 묘호(廟號)가 문종이다.

 

궁에는 명기(明器 · 죽은 사람을 위해 광중에 묻는 그릇 따위의 총칭, 보통 때 것과 같이 만듦)와 복완(服玩 · 죽은 이를 위해 무덤 속에 넣는 의복과 완구의 총칭)을 넣고 ‘자선당’ ‘승화지당’ ‘만춘전’ 등 도서를 봉안했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조선 왕릉을 답사하면서 무덤의 내부를 공개하지 않는 것에 대해 지적했다. 우리 연구진은 조선 왕릉이 지금까지 후손들이 제례를 봉양하는, 효 문화의 살아 있는 문화유산임을 강조했다. 또한 ‘산릉도감위궤’를 비롯한 각종 실록에 내부 유물 등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을 들어 공개의 어려움과 그 정당성을 알렸다. 이를 통해 조선 왕릉은 내부를 공개하지 않고도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다. 조상의 기록문화가 남긴 업적이다.

 

수차례 옮겨진 현덕왕후의 무덤

 

승하 후 온갖 수난을 겪다가 복위돼 남편 문종의 능침을 바라보고 있는 현덕왕후의 능침.

 

 

문종 즉위 5개월 후인 1450년 7월 8일 의정부에서는 9년 전(세종 23년) 세손인 단종을 낳고 2일 만에 승하한 현덕빈(顯德嬪)을 추숭해 왕후라 하고 혼전을 경희전, 능호를 소릉(昭陵)이라 했다.

승하한 세자빈이 문종의 왕비로 추숭(追崇)된 것이다.

 

현덕왕후 권씨는 세종의 맏며느리로 안동의 세족, 즉 의정부 좌의정(화산부원군) 권전(權專)의 딸이었다.

남편 문종이 왕후 추숭 때 올린 글에 따르면 권씨는 성품이 단정하고 정숙하며 마음이 깊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러나 장손 단종을 낳고 산후 열병으로 죽고 말았다.

 

세종과 문종은 정성을 다해 능역을 조영했는데, 중국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능호인 소릉과 같은 능호를 쓴 것으로도 권씨에 대한 문종의 애정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문종이 현덕왕후 승하 후 12년간 세자와 왕으로 있으면서 새로 왕후를 두지 않은 것은 지나친 애정이 아니었을까. 그로 인해 문종 승하 후 어린 단종은 기댈 언덕이 없었다.

 

현덕왕후는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문종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봉안됐다. 그러나 1457년(세조 3) 현덕왕후 친정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자 현덕왕후는 추폐돼 종묘에서 신주가 철거되고 능은 파헤쳐져 안산 바닷가로 옮겨지는 수난을 당했다.

그로부터 56년 후 종묘 소나무에 벼락이 치고 제물용 소가 사당에서 저절로 죽자, 1513년(중종 8) 3월 3일 영의정 송일 등이 “종묘의 문종 신위만 홀로 제사 받는 것이 민망하다”는 명분으로 복위시켰다.

 

무덤은 세조 때 폐비하면서 안산 바닷가에 회삼물(灰-三物 · 석회, 황토, 가는 모래 세 가지를 섞어 반죽한 것)로 다지지도 않고 파묘한 것을 의녀(醫女)들이 수습해 4월 21일 현릉 동쪽 언덕에 천장해 동원이강으로 안장했다.

그리고 신주는 다시 종묘에 봉안했다. 이렇듯 현덕왕후 권씨의 능침은 여러 번 현궁을 옮긴 비운의 능묘다.

 

현릉의 문무석인은 머리 부분이 크고 눈망울과 코가 커서 이국적이며, 조각선이 굵은 것이 특징이다.

‘국조오례의’ 양식을 따른 최고의 무덤

 

예종(1469년) 때 서초구 세곡동에 있던 영릉(英陵)이 여주로 옮겨져, 현릉은 ‘국조오례의’ 양식을 따른 가장 오래된 능이 됐다.

 

현릉의 참도(參道 · 정자각 앞 신도와 어도의 총칭)는 굴절되어 궁(弓)자 형태다. 정자각은 중종 때 현덕왕후 능침을 동원이강으로 조영하면서 가운데로 옮겼다. 정자각 뒤의 참도는 왕후의 능침 아래까지 이어져 있다. 홍전문 앞에 참도와 배위가 있는 것이 조선시대의 왕릉으로 유일하다.

 

문종 왕릉의 병풍석은 구름무늬가 아름답다. 뒤편 건원릉과 비교하면 병풍석의 방울 및 방패무늬(영저와 영탁)가 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왕비의 난간석은 중종 때의 양식을 따랐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이 이보다 2년 뒤 조영됐으므로 최근 밝혀진 초장지 석물과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판단된다.

왕의 능침 공간에 있는 문무석인은 머리 부분이 크고 눈망울과 코가 커서 이국적이며, 조각선이 굵은 모습이 특이하다.

왕의 능침에 있는 혼유석 하부 고석은 5개에서 4개로 변한다.

현덕왕후의 혼유석은 특이하게도 반상 형태다. 현릉의 비석은 영조 때 조선시대 전체 능역을 정비하면서 능역을 찾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세운 것이다. 원래 기록에는 현릉의 신도비도 만들었으나 세조의 능역 간소화 정책으로 생략됐다.

 

문종은 현덕왕후 권씨와 두 명의 부인 사이에서 단종과 딸 둘을 두었다. 단종은 폐위된 후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영월에 묻혔다.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2010.05.04 734호(p78~80) 주간동아 [신의 정원 조선왕릉] 

 

 

 

 

 

 


 
                                               

목릉(穆陵)



 
선조,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이 세 개의 언덕에 따로 모셔진 동원삼강릉이다.

동원삼강릉 형식으로는 조선왕릉 가운데 목릉이 유일하다.
 

조선 14대 선조(宣祖, 1552~1608)와

원비 의인왕후(懿仁王后, 1555~ 1600) 박씨,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 김씨의 능이다.

목릉은 정자각 뒤로 세 개의 언덕이 보이는데, 동원이강의 형식의 변형이다.

제일 왼쪽에 보이는 것이 선조의 능이고, 가운데가 의인왕후,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선조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1567년 왕으로 즉위하였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은 선조는 전후 복구작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정자각 바로 뒤쪽이 선조, 가운데가 의인왕후, 그 옆이 계비 인목왕후의 능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참도가 꺾인 모습이 보인다.


처음에 건원릉 서쪽 다섯 번째 산줄기에 안장되었는데,

이곳에 물기가 있고 불길하다 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의인왕후 박씨는 건원릉 동쪽 셋째 산줄기에 안장되었다.


 

전형적인 조선왕릉의 상설 제도를 보여주는 선조 능.
 

인목왕후 김씨는 선조의 유일한 적통인 영창대군을 낳았으나

광해군에 의해 영창대군은 살해되고 자신은 서궁에 유폐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신분이 복위되어 대왕대비에 오른 인목왕후는 건원릉 동쪽 다섯째 산줄기에 안장되었다.

 

선조릉에는 삼면의 곡장이 둘러져 있고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가 조각된 병풍석이 있으며,

난간석과 혼유석 등 전형적인 상설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의인왕후릉은 병풍석이 생략된 채 난간석만 둘러져 있는데,

임진왜란 뒤라 석물의 크기가 클 뿐 사실적이지도 입체적이지도 못하다.

각 석물의 조형미가 떨어져 조선왕릉 가운데 가장 졸작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러나 망주석과 장명등대석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인조 장릉의 병풍석에까지 새겨지는 등 조선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편 후대에 조성된 인목왕후릉은 의인왕후릉과 같은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석물들이 좀더 숙련된 솜씨로 만들어져 있다.

 

  

 

 릉 - 선조,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

 

 임진왜란에 상처 난 王權 능침 조성으로 만회하려 했나
 
 

   

임란 직후임에도 선조가 정성들여 만든

의인왕후 능침의 석물들.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 7~1608. 2)와 원비 의인왕후(懿仁王后,1555~1600)

 나주 박씨,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 연안 김씨가 묻힌 목릉(穆陵)은 하나의 동원에 3개의 능침이 있는 동원삼강릉(同原三岡陵) 형태로 조영됐다. 정한 거리를 두고 3개의 언덕에 곡장이 둘러쳐진 능이 조성된 것은, 다른 능에서는 볼 수 없는 목릉만의 형식이다.

 

목릉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東九陵)에서 가장 깊숙한 곳인 건원릉의 동편 언덕에 자리했다. 왼쪽 정자각 바로 뒤쪽으로 보이는 것이 선조의 능침이고 그 오른쪽이 의인왕후, 비각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것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신로와 어로는 곡선형을 이루었다.

명종이 승하했으나 그를 이을 적손(嫡孫)이 없자,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군의 아들 하성군이 명종의 양자로 입적돼 왕에 즉위했는데 그가 선조다.

선조는 명종 7년(1552) 11월 11일 인달방(仁達坊) 덕흥군 사저에서 태어났다.

선조는 서손(庶孫) 출신으로 방계승통을 한 최초의 임금이다.

 

하성군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기백과 도량이 영특해 모두 비범하게 여겼다. 어느 날 명종이 하성군과 그의 두 형을 불러들여 자신이 쓰고 있던 익선관(冠)을 써보라 했다. 이때 하성군이 “군왕께서 쓰시던 것을 신자(臣子)가 어떻게 감히 머리에 얹어 쓸 수 있겠습니까”라며 사양하니 명종이 경탄하면서 “마땅히 이 관을 네게 주겠다”고 했다. 또 명종은 “임금과 아버지 중 누가 더 중하냐”고 묻고는 글로 답하라 했는데 하성군이 “임금과 아버지는 똑같은 것이 아니지만 충(忠)과 효(孝)는 본래 하나입니다”라고 하자 매우 기특해했다.

 

덕흥군과 하동군부인 정씨의 3남으로 태어난 하성군이 졸지에 왕위에 오른 것은 그의 나이 16세 때라 명종비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그러나 1년 뒤부터 친정을 했으니 조선 왕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시작한 것이다.

세자교육을 받지 않은 선조는 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난세에 나타난 성군이랄까? 성리학적 왕도정치를 구현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인격이 훌륭하고 덕망이 높은 이황, 이이, 정철, 이덕형, 이항복 등 많은 인재를 등용해 사림이 중앙정치 무대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정국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림 내부의 분열로 동인과 서인의 붕당 간 대립이 심해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 인적 손실이 막대했을 뿐 아니라 황폐화한 국토, 문화적 손실 등의 상처가 오래도록 아물지 못하고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는 반성부원군 나주 박씨 박응순의 딸로 15세에 왕비에 책봉됐다. 1569년 어린 왕 선조가 친정할 때 이루어진 결혼이다. 착하고 어진 왕비로 알려져 있던 의인왕후는 1600년 6월 27일 임시 궁궐인 월산대군의 집에서 승하했다.

 

선조는 임란 때 피해를 본 선릉과 정릉 그리고 자신의 친아버지 덕흥대원군(大院君 · 왕이 자손 없이 죽어 종친 중에서 왕위를 계승했을 때 그 왕의 생부에게 봉하던 직위, 최초의 대원군임)의 산소까지 참변을 당해 부랴부랴 개수했는데 그 직후 의인왕후가 승하해 황망해했다.

전란으로 국력은 약해지고 능역을 조영하는 산릉도감의 인력 확보도 어려웠던 터라 조정에서는 선릉 개수에 쓰려던 지석을 그대로 써 민력을 덜기도 했다.

  

1) 목릉의 정자각 뒤로 연결되는 신로는 조선 왕릉 중 가장 길게 조영됐다. 인목왕후 능에서 바라본 목릉. 앞의 터는 인목왕후 승하 후 3년간 사용한 가정자각 터로 보기 드문 유적이다. 2) 임란을 겪고 조영된 선조의 능침.

 

 

“길지 찾아라!” 어명에도 4개월간 논란

 

이때 선조는 자신도 의인왕후와 함께 묻히고자 쌍분의 수릉(壽陵)을 만들려 했다.

선조 승하 8년 전의 일이다.

선조는 마침 왜란으로 폐허가 된 도성을 재건하고자 불러들였던 명나라의 풍수가인 섭정국(葉靖國) 등을 동원, 고양·파주를 비롯해 여러 터를 물색했다. 중추부사 이덕형, 영의정 이항복 등 많은 논객과 청오경, 금낭경, 칠요구성법, 지리신서, 정혈법, 호신순의 책 등을 보며 여러 차례 논의했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수개월 동안 우왕좌왕했다. 선조의 우유부단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심지어 포천과 교하 두 곳을 결정하고 5000여 명을 동원, 40일 동안 작업을 하다가 다시 터를 물색하게 한 일도 있었다. 전란이 끝난 뒤라 국고는 바닥이 났고 신하들은 자기 살길 마련에 바빠, 왕권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왕이 길지를 찾으라고 수차례 지시를 내렸으나 사대부마저 자신들의 선영을 선뜻 내놓지 않았다.

 

이처럼 4개월 동안 논란만 계속되자 이항복 등은 우리나라의 왕릉 인산(因山) 법도는 중국이나 사대부의 법도와 달라 “형세와 향배가 필수적일 뿐 아니라, 혈도가 광활해 석물을 놓을 수 있어야 하며, 명당이 넓게 있어야 하고, 제궁을 지을 수 있으며, 청룡과 백호가 분명하고, 마주보는 산이 법대로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미 200여 년 전 조성된 태조 건원릉이 있는 검암산을 지목하며 “이곳은 태조께서 무학과 함께 대대로 왕릉을 쓸 수 있는 곳으로 평가받았다”고 추천했다.

 

의인왕후 승하 5개월 만에 결정된 것이다.

결국 건원릉 동측 세 번째 언덕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안장하고 유릉(裕陵)이라 했다. 5개월의 국장 기간을 넘기고 승하 6개월 만에 안장했으나 이곳은 지금까지도 풍수가 사이에 길지냐 흉지냐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선조는 의인왕후 승하 후인 1602년 방년 19세인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을 계비(인목왕후)로 맞이했다. 그리고 55세인 1606년에 늦둥이 영창대군을 얻어 총애했다. 그러자 영창대군을 세자로 교체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당시는 이미 선조의 둘째 아들 광해군(공빈 김씨 소생)이 임진왜란 때의 공을 인정받아 세자로 책봉된 상태였다.

 

1608년 2월 1일 선조가 정릉동 행궁에서 점심에 찹쌀밥을 먹고 기(氣)가 막혀 급작스럽게 승하했다. 이때 어의는 허준(許浚)이었으나 손쓸 수가 없었다. 다음 날 33세인 세자 광해군이 곧바로 즉위해 상례를 주도했다.

 

광해군은 선조가 의인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했던 자리를 무시하고 이항복, 이원익, 이덕형 등과 논의 끝에 건원릉 서측 다섯 번째 능선에 모셨다. 현 경릉(景陵) 터로 추정된다. 선조의 휘호를 '현문의무성경달효(顯文毅武聖敬達孝)'로 올리고 묘호를 '선종(宣宗)', 능호를 '목릉'이라 했다. 후에 인조 때 선종은 '선조'로 묘호를 바꿨다.

 

이후 부실공사에 풍수적 논란까지 일자, 인조반정 후 인조가 직접 행차해 1630년 11월 21일 의인왕후 능침 좌측으로 천장했다. 건원릉 지역은 세조가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이후 꺼리던 자리였다. 선조의 능침을 이곳으로 선정한 것은 최초의 방계혈통으로 왕위에 올라 사림의 왕권 도전을 뿌리친 선조의 혈통이 태조의 음덕을 받아 길이 왕조의 발전을 기원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던 세력인 소북파는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에 의해 쫓겨났다. 영창대군은 강화로 쫓겨나 사사되고 인목대비는 폐서인돼 유폐됐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호돼 대왕대비로서 인조의 후견인 노릇을 했다.

 

인목대비는 어려서 총명하고 왕비가 돼서는 인자했으며 검소하고 글씨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인조 10년(1632) 6월 28일 인목대비 김씨가 인경궁(仁慶宮)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했다.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인목대비가 승하하자 인조는 정성을 다해 모셨다.

묘호는 인목으로 하고 능호를 '혜릉(惠陵)'이라 했다.

 

선조의 목릉은 이미 2년 전 의인왕후 오른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선조의 능침 오른쪽이 인목왕후 능침으로 추천되나, 우상좌하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해 의인왕후 능침의 왼쪽 두 번째 언덕으로 결정했다. 정자각은 그대로 두고 신로로 연결했으며 세 능침의 능호를 목릉으로 통일했다. 이때 산릉 책임자는 한음 이덕형이었다.

 

3) 드넓은 잔디정원을 가지고 있는 목릉. 정자각 뒤가 선조의 능침, 왼쪽이 의인왕후, 오른쪽이 인목왕후 능침이다. 의인왕후와 인목왕후의 능침은 숲으로 가려 서로 보이지 않게 했다. 

4) 눈을 감고 입을 꼭 다문 문석인. 임란을 거치면서 할 말을 잃었을까, 아니면 말하기 싫어서일까.

 

 

잔디정원이 가장 넓은 왕릉

 

선조의 능침에는 다른 두 왕비 능침에는 보이지 않는 병풍석이 둘러쳐 있다.

병풍석 대석과 장명등 대석에 새겨진 연화와 모란의 꽃문양이 독특하다. 이것은 이후에 조성되는 왕릉 석물의 문양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말기까지 계속 사용됐다.

 

의인왕후 박씨 능침의 상설제도는 병풍석이 설치돼 있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선조의 것과 같다. 능선이 길지 않은 단유형(短乳形)이며, 선조의 능침보다 폭이 좁다.

석물은 조형미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왜란을 겪은 뒤여서 뛰어난 장인을 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왕후 김씨의 능침 역시 의인왕후의 것과 같은 형식을 따르지만 좀 더 숙련된 솜씨로 만든 듯하며, 전체적으로 생동감이 있다. 인조의 정성이 담긴 것이다. 그러나 문무석인의 허리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비율이 2대 1 정도로 상하의 균형이 맞지 않아 다소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인목왕후의 능침 아래에는 흉례로 모시는 가정자각 터가 그대로 남아 있어 보존 가치가 있다.

 

목릉에서 의인왕후의 능침은 남편 선조가, 선조의 능침은 광해군이, 인목대비의 능침은 인조가 감독한 것이므로 시대별 조영의 특징을 비교할 수 있다.

 

2007년 겨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국제학술대회 참가 학자들은 이곳 건원릉과 목릉을 답사했다. 필자는 목릉을 “조선 왕릉 중 가장 자연친화적이며, 중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우상좌하로 능침을 배치했음을 설명했다.

같은 유교 국가였던 중국, 베트남 등은 가운데 왕, 양쪽에 정비와 계비를 배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조선의 왕릉은 우측에 왕의 능침, 좌측에 정비와 계비의 능침을 순서로 배치했다. 이러한 특징은 동구릉 지구의 목릉과 경릉(景陵)에서 잘 나타난다. 이 우상좌하의 제도는 세종대왕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대왕이 우리만의 독특하고 우수한 문화 창달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또 목릉은 인류사의 많은 왕릉 중 잔디정원이 가장 넓은 왕릉이라 설명했다.

그리고 정자각 뒤 신로는 가장 길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조영된 것이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의인왕후의 능침과 인목왕후의 능침은 숲으로 가려 서로 보이지 않게 하고, 선조의 능침에서는 두 왕비의 능침을 마주보게 한 것이 특이하고 흥미롭다. 정비와 계비 사이를 고려한 후손들의 심리적 배려가 돋보인다.

 

세계 유산의 보존과 관리는 진정성이 요구된다. 조선 왕릉은 많은 기록물의 진정성 확보에 큰 도움이 됐다. 특히 상례를 자세히 기록한 각종 의궤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임란으로 많은 기록물이 소실돼 현재 남아 있는 도감은 의인왕후의 상례를 기록한 의궤가 최초의 것으로 왕릉 연구와 관리에 도움이 되고 있다.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2010.08.30 752호(p76~78) 주간동아 [신의 정원 조선왕릉]  

 

 

 

 

 

 


                                      

 

 

휘릉(徽陵)

 



삼면이 곡장으로 둘러싸인 봉분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렀다.


조선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88) 조씨의 능이다.

장렬왕후는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26세에 대비가 되었으며,

1651년 효종으로부터 자의(慈懿)라는 존호를 받아 자의대비라 불렸다.

  
 

정자각은 양옆에 익랑이 붙은 다섯 칸짜리로 규모가 크다.


10년 뒤인 1659년 효종마저 세상을 뜨자 대왕대비에 올랐다.

숙종 14년 자손 없이 승하하여 건원릉 서쪽 언덕에 안장되었다.

장렬왕후는 인조 계비에 이어 효종, 현종, 숙종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이 다섯 개이다.

태조 건원릉 때 다섯 개였던 고석이 세종 영릉 이후 네 개로 조정되었다가,

휘릉에 와서 다시 건원릉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이 시기의 붕당정치는 장렬왕후(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했다.

 

3면이 곡장으로 둘러싸인 능침에는 병풍석이 없고,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현종비 명성왕후의 숭릉을 조성한 5년 뒤에 조영한 능이라서 석물의 형식과 기법이 숭릉과 거의 비슷하다.

석양, 석호는 그리 크지 않으며 석양의 다리가 너무 짧아 배가 바닥에 거의 닿아 있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은 건원릉의 형식을 따른 5개로 되어 있으며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귀면이 새겨져 있다.

한 단 아래 중계에 있는 문인석은 이목구비가 크지만 마멸되어 윤곽만 남아 있으며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맨 아랫단에 있는 무인석은 목이 없이 얼굴이 가슴에 붙어 있고 이목구비가 지나치게 커서 답답해 보인다. 그러나 우직하고 우람한 무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릉 - 인조 계비 장렬왕후

 

 4대 걸친 왕실 어른노릇, 두 차례 예송논쟁 촉발
 
 

   

외롭고 힘없는 장렬왕후를 영원히 지키는 휘릉의 문 · 무인석과 석호와 석양.

  

휘릉(徽陵)은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 조씨의 단릉이다.

경기도 구리시 창인동 산2-1의 동구릉지구 내 태조 건원릉의 서쪽 능선에 자리한다.

정비 인열왕후가 죽은 지 3년 뒤, 15세인 장렬왕후가 44세인 인조와 가례를 올렸다.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 어른으로 지냈으나

자식 없이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시기 조정은 극심한 붕당정치로 정권다툼이 첨예화 돼,

특히 현종이 승하했을 때와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승하했을 때,

조대비(장렬왕후)가 입어야 할 복상(服喪) 문제를 놓고 두 차례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인조 16년(1638) 인열왕후가 승하하고 3년 되는 3월 어느 날,

인조는 중궁전이 빈 지 오래돼 중전 간택을 지시했으나 대신들이 적극적이지 않고

사대부들도 간택에 호응하지 않자 노여워했다.

좌의정 최명길은 당황하며 사대부가 협조하지 않아 간택에 어려움이 있다고 한탄했다.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2010.10.04 756호(p78~80) 주간동아 [신의 정원 조선왕릉]

  

 


 

휘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자의 아닌 타의로 예송논쟁 태풍의 눈이 된 자의대비, 정쟁의 중심에 서다

 

 

 

 
휘릉(徽陵)은 조선 제16대왕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의 능이다.
숭릉(현종 비 명성왕후의 능)이 만들어진 후 이를 참고로 5년뒤에 조영된 능이라서 석물의 형식과 기법이 숭릉과 거의 비슷하다.

 

조선시대의 '예송(禮訟)'은 궁중의례의 적용문제, 특히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크게 논란이 벌어진 두 차례의 사건을 말한다.

예송은 예(禮) 자체의 문제를 넘어선중요한 사건으로 권력개편 등 정국의 변동을 가져오게 된다.

 


당쟁의 격랑에 휘말린채 제왕 4대 천수누린 왕실의 여인

#왕실의 어른으로서 살았던 장렬왕후

 

조선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1624~1688)가 홀로 잠들어 있는 휘릉(徽陵)은

동구릉의 중심인 건원릉 서편에 위치해 있다.

장렬왕후는 1624년(인조 2) 인천부사이던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딸로 태어났으며,

15세의 나이로 인조의 계비로 간택돼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리고 왕비로 책봉됐다.

숙종이 직접 지은 행록기에 의하면 장렬왕후의 어머니는 딸을 가졌을 때

달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고, 딸을 낳던 날 저녁에는 상서로운 무지개가 방안에 가득 찼는데 

선의 음악이 땅을 울리고, 옥녀(玉女) 두서너 무리가 채복(彩服)을 입고 많은 향을 태우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와 "귀인이 이미 탄강(誕降)했으니, 옥책(玉冊)을 장차 열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장렬왕후는 1649년(인조 27)에 인조가 승하할 때까지 12년간 중전의 자리를 지켰다.

17대 효종이 즉위하자 26세의 나이로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됐으며,

1651년(효종 2)에는 '자의(恣懿)'라는 존호를 받았다.

장렬왕후는 어린 나이에 인조의 계비로 궁에 들어와 효종, 현종, 숙종 3대의 왕을 거치면서

자의대비라는 이름 아래 왕실의 어른으로서의 삶을 산 것이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복제와 예송의 대상이 돼 서인과 남인의 당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효종은 왕통 적장자? 차자? 1R는 1년 복상 주장한 서인의 승리

#1차 예송의 시작

1659년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게 된다.

장렬왕후는 대상(大喪)을 당한 슬픔을 채 가누기도 전에 자신의 복상기간(상복을 입어야 하는 기간)이

정치적 쟁점이 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주자학을 받아들여 예학을 발전시켜 나간 조선에서 발생한 예송은

표면적으로는 복상(服喪)기간의 문제였으나 그 이면에는

유교의 종법질서가 왕가에까지 미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가 핵심쟁점이었다.

   
         1차 예송논쟁의 주역 우암 송시열.


즉, 인조의 차자(次子)인 효종을 일반 사가와 동일하게 차자로 볼 것인지,

왕통을 계승한 적장자로 대우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예법의 적용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므로

각 정파 간에 양보할 수 없는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서인(西人)은 '천하의 예법은 같다'고 주장하며 1년 복상이 맞다는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했고,

남인(南人)은 '왕과 일반인의 예법은 달라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효종을 장자로 인정해 3년 복상을 주장한다. 이것이 1차 예송이며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논쟁결과 1차 예송에서는 송시열 등의 주장에 따라 1년 복상이 채택된다.

 


2R선 반전 남인 득세 정치와 결합한 禮學, 권력투쟁으로 비화

#2차 예송이 남긴 것

2차 예송은 1674년(현종 15)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가 서거하면서 발생한다.

인선왕후의 국상에서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은 효종보다 1단계 낮은 격식으로 치르게 돼

효종의 전례에 따르면 9개월 복상하는 것이 맞지만 현종의 생각은 달라져 있었다.

이 때 남인이 1년의 복상을 주장하고 나서자 서인은 9개월의 복상기간인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했다.

즉, 서인과 남인은 효종의 승하 때와 같은 논리를 주장했던 것인데,

현종은 김우명과 김석주의 의견을 받아들여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현종은 효종의 국상 때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으로 정한 것이 잘못되었다 하여

당시 예를 정했던 신하들의 죄를 물었으며 인선왕후의 국상때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으로 정했다가

임의로 대공으로 고친 예관(禮官)들의 죄도 묻고 남인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이처럼 자의대비는 효종과 인선왕후 승하 후 똑같이 1년간 상복을 입었으나

그 정치적 의미는 달랐던 것이다.

2차 예송이 끝난후 몇 달 뒤 현종도 승하하고 만다.

자의대비로서는 한해에 며느리와 손자를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는 슬픔을 당한 것이다.

그후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 마저 43세로 서거한다(1683년). 자신이 낳은 친자손은 아니지만

왕실의 가장 큰 어른으로서 손아래 사람들을 연달아 먼저 보낸 자의대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휘릉 정자각. <국조오례의>에 따라 3칸의 정전 옆에 익랑을 붙여 5칸을 만들고 배위청 3칸을 붙여 지었다.


숙종은 현종의 부묘(삼년상이 지난 뒤에 그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것)가 끝난 후

1676년(숙종 2) 자의대비에게 '휘헌(徽獻)'이란 휘호를 올린데 이어

1684년 대비의 회갑을 맞아 휘호를 더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자의대비는 명성왕후의 국상 기간임을 들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국상이 끝난 후 1686년 여름에 '강인(康仁)'이란 휘호를 받았으나

자의대비는 정작 휘호를 올리는 자리에는 친히 나아가 앉지 않았다고 한다.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꿋꿋하게 버텼던 자의대비는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4대에 걸치는 동안

왕실의 어른으로 지내며 천수를 누리다가 1688년(숙종 14) 65세로 소생 없이 창경궁 내반원에서 승하한다.

그가 사후에 받은 '장렬(莊烈)'이란 시호는 

행동이 바르면서 뜻이 화평하며, 덕(德)을 갖고 선업(先業)을 준수했다는 뜻이다.


석물의 기법 숭릉과 비슷… 정전에 익랑붙인 5칸 정자각 이채

#숭릉의 석물제도를 따라한 형식

휘릉을 돌아보면 능상과 정자각, 홍살문은 일직선축을 중심으로 동쪽에 비각, 서쪽에 수복방을 배치했다.

주봉에서 좌우로 퍼진 산줄기가 대칭을 이루고 있어 전체적으로 형세적인 안정감을 주고 있다.

능침은 3면의 곡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병풍석은 두르지 않았다.

18대 현종 비 명성왕후의 능(숭릉)을 조영한지 5년 뒤에 다시 조영한 능이므로

석물의 형식과 기법이 거의 비슷하다.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는 아담한 크기에 다리가 짧다.

석양은 다리가 너무 짧아 배가 바닥에 거의 닿을 정도이다.

한 단계 아래의 문인석과 무인석은 모두 2.4m에 이르는 큰 키를 자랑한다.

문인석은 이목구비가 마멸돼 윤곽만이 남아있으나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고,

무인석은 목이 없이 얼굴과 가슴이 붙어 있고 이목구비가 커서 답답한 느낌을 주지만

우직하고 우람한 무인의 모습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정자각은 '국조오례의'에 따라 3칸의 정전 옆에 익랑을 붙여 5칸으로 만들고

배위청 3칸을 붙여 지은 것이다. 기단부는 다른 능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게 조성돼 있다.

1674년 세워진 숭릉 정자각이 익랑을 갖춘 5칸 정전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14년 뒤에 세워진 휘릉의 정자각도 이를 참고해 건축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의외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아마도 1897년 정자각에 화재가 발생해 전체가 소실된 후

중건하면서 맞배지붕으로 만든 듯하다. 비각 안에는 1747년(영조23) 건립한 표석이 세워져 있다.

- 정해득 경기도문화재전문위원
- 2009.11.12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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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에서 발간한 [조선 왕릉 답사 수첩] 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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