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조선왕릉의 비밀] ⑤ 정릉

Gijuzzang Dream 2009. 9. 7. 12:28

 

 

 

 

 




                         사적 제 208 호 / 서울 성북구 정릉동 산87-16

 


           
정릉 가는 길

내부순환도로(또는 북악터널) → 정릉(램프) → 정릉삼거리(우회전)

 → 아리랑고개방향 진입 후 우회전(이정표)


 

 

 

 

 

 

 

 


                                      

 

 정릉(貞陵)




태조 계비인 신덕왕후는 본래 도성 안에 묻혔으나

태종에 의해 도성 밖인 현 자리로 이장되었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1669년 현종 때 송시열 등의 주장에 따라 현재의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조선 1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1396) 강씨의 능이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시대 풍습에 따라 향처(鄕妻), 경처(京妻)를 두었는데, 강씨는 경처였다.

강씨는 조선 개국과 함께 현비(顯妃)로 책봉되었다.

극진히 사랑했던 현비가 갑자기 승하하자 태조는 도성 안에 왕릉 터를 정하는 것은 물론

강씨 봉분 우측에 자신의 봉분인 수릉(壽陵)까지 정하고,

수릉의 능호를 정릉(貞陵)으로 정하였다(현재 영국대사관 자리).

조선 왕릉 첫 능호인 정릉에서 오늘날 중구 정동이 유래되었다.

 

잘 조성된 정릉은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의 다섯 번째 소생인 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

태종은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허락하여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고,

광통교(현재의 광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돌다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의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썼다.

 


현재의 청계천 광교(광통교)에 있는 옛 정릉 석물들.

태종은 즉위 후 정릉을 현재 자리로 옮기고,

광통교가 홍수로 무너지자 원래 정릉 능역에 있던 석물들을

다리 복구에 사용하였다.



태조 승하 후에는 도성 밖 양주(楊州) 사을한록(沙乙閑麓), 지금의 정릉 자리로 능을 옮겼다.

또 태종의 어머니 신의왕후를 유일한 정비로 태조와 함께 그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고,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그래서 정릉은 종묘에 부묘되지 않아

수백 년간 왕후의 능이라기보다 주인 없는 무덤으로 방치되다가

1669년(현종 10), 260년 만에 복구되었다.



 

신덕왕후라는 존호를 되찾아 종묘에 처음 배향되던 날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쏟아졌는데, 이때의 비를 신덕왕후의 원을

씻어주는 비라 하여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불렀다 한다.

 

조선 초대 국모의 능이라 할 수 있는 정릉은 다른 왕비의 능에 비해 상설의 규모가 작고 초라하다.

난간석과 병풍석이 없는 봉분의 모습이다.

현재 고려 공민왕릉 양식을 충실히 따른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두 개의 고석만

옛 능에서 옮겨온 것이고, 석물들과 정자각, 홍살문 등 머지는 현종 때 재조성된 것으로

정릉의 수난과 복원의 역사를 느끼게 한다.

 




- 일 화 -
이성계가 강씨 부인을 처음 만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호랑이 사냥을 나섰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에 물을 길러 나온 처녀가 있어 급히 물을 청하였다.

그러자 처녀는 물바가지에 물을 뜬 후 버들잎을 띄워 건네주었다.

의아하게 생각한 이성계가 그 연유를 묻자 처녀가 대답했다.  
"갈증으로 급히 달려오신 것 같사온데,

물을 마시다 탈이 나실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
이 말에 감탄한 이성계는 빼어난 미색에
갸륵한 마음씨까지 갖춘 처녀에게 반하고 말았다.
그 처녀가 바로 신덕왕후 강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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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에서 발간한 [조선 왕릉 답사 수첩] 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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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릉 - 태조의 경처 신덕왕후

 

태조 승하 후 파묘 이장 석물은 광통교 축조에 사용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자리한 정릉(사적 제208호).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지 4년 뒤인 1396년 4월 6일, 태조는 광주(廣州)를 지나다 수릉(임금이 생전에 장수를 기원하며 미리 만들어두는 가묘) 자리를 둘러봤다. 조선 개국을 같이 한 경처 신덕왕후 강씨와 영원히 함께할 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고려시대에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돼 개경의 부인을 '경처'라 하고, 고향에는 '향처'를 두었다.  태조와 신덕왕후는 우물가에서 만났다. 이성계가 장수였을 시절 목이 말라 어느 우물가에 급히 말을 세우고 마침 그곳에서 물을 긷던 한 여인에게 물을 청했다. 이 여인은 바가지에 물을 떠 그 위에 버드나무 잎을 띄운 뒤 그에게 권했다. 급히 물을 마시다가 체할까 그랬다는 여인의 설명을 듣고 이성계는 탄복해 청혼을 했다.

 

태조가 수릉을 조영한 지 4개월 뒤인 1396년 8월 9일 병세가 위독한 신덕왕후는 판내시부사 이득분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8월 12일 밤 태조가 지켜보는 앞에서 세상을 떠났다. 3일 후 태조는 백의백관을 대동하고 친히 안암동(오늘날 고려대 부근)으로 나가 능터를 물색했다. 이때 좌우 정승이 신덕왕후를 두고 “현비는 품성이 정숙하고 조행이 근신하며 평시에 늘 경계하는 마음을 두시고 위태할 때는 대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해 내조의 공이 역사에 빛나서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극찬했다.

 

8월 20일 태조는 행주에 거동해 능지를 살폈으나 길지(吉地)를 놓고 지관(서운관)끼리 다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진노해 이들을 매질하라고 명했다. 이후 태조는 안암동에 능지를 잡고 땅을 파게 했으나 물이 나와 중지했다.

 

열흘 뒤 태조는 취현방(聚賢坊·현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 부근)에 능지를 결정했다.

어렵게 결정한 능의 존호는 신덕왕후(神德王后), 능호는 정릉(貞陵)이다.

태조는 자신과 영원히 함께할 유택 조영 현장에 수차례 나와 진두지휘하는 등 온갖 정성을 들였다. 왕후 승하 5개월 뒤인 1397년 1월 3일 신덕왕후를 취현방 북녘 언덕에 묻었다.

장례 후에도 태조는 왕비를 잊지 못해 여러 차례 정릉에 거동하고 능침사찰인 흥천사를 세우고 법석(法席)을 베풀었다. 또한 현비의 외가가 있는 담양군을 담양부로 승격시키기도 했다.

 

 

현 정동 영국 대사관 부근에 능 조성

 

그러나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을 치르며 왕권을 잡은 이방원(태종)은 1406년 아버지 태조가 공들여 조성한 정릉의 능역이 너무 넓다며 능에서 100보 밖에 집을 짓도록 허용했다. 영의정 하륜이 앞장서 사위들을 거느리고 가 이 땅을 선점했고, 이곳 소나무를 베어 사가의 집을 지었다. 당시 태조는 병이 나서 사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다 1408년 9월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은 수릉이 아닌 건원릉에 모시고, 1409년 2월 23일 기다렸다는 듯이 계모인 신덕왕후의 정릉에 대해 “옛 도성 안에는 능묘가 없으며 사신이 묵는 관사(태평관)가 가깝다”는 의정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도성 밖 사을한(沙乙閑)으로 옮겼다. 오늘날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산 87-16번지로, 현재 국가 지정 사적 제208호다.

 

 

 

조선 최초의 병풍석과 영저, 영탁

 

 

2개월 뒤 태종은 정릉의 초장지(철거지)에 있던 정자각을 옮겨다 태평관의 누각을 짓고, 돌은 기초석으로 쓰고 봉분의 흔적도 없앴다. 일반적으로 왕실 초장지는 천장(遷葬) 후에도 사가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봉분을 남겨두지만 태종은 이를 무시했다.

다만 문 · 무석인은 그대로 묻어두라고 명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조선 최초의 문 · 무석인의 조각물은 지금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저 주변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영국대사관저에 정릉의 유구가 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최근 외규장각 도서(왕릉 관련 기록이 많음)의 반환과 더불어 유구의 확인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왜냐하면 정릉은 태조가 온갖 정성을 들여 조성한 조선 최초의 조각물인 만큼 그 가치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1410년 8월 8일 큰비가 와서 청계천에서 백성들이 빠져죽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의정부에서 흙으로 만든 광통교(廣通橋)가 비만 오면 무너지니 정릉의 석물로 돌다리를 만들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석교(石橋) 광통교가 세워졌다.

 

최근 청계천을 복원해 조선 최초의 병풍석(屛風石·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감싸는 12방위의 돌)과 영저 영탁(靈杵 靈鐸) 조각을 확인할 수 있다. 다리 아래 음지에 가려져 있어서인지 아니면 태조가 자신의 수릉 조영에 최고의 돌만 골라 쓴 덕분인지 이보다 12년 후에 조영한 건원릉의 조각물과 비교해도 훨씬 잘 보존돼 있고 형상도 선명하다. 이 조각들은 612년이나 됐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조각들보다 100년 이상 앞섰다. 청계천을 지날 때 꼭 한번 볼만한 명품이다.

 

정릉을 성북동으로 옮긴 뒤 봄과 가을에 이품관을 보내 제례를 올렸는데 세종조에는 조정에서 직접 실행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족친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태종이 정릉을 파묘해 사가 무덤으로 조성했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다. 이때 옮긴 사각 장명등과 고석은 조선시대 최초의 석물로 평가된다. 혼유석은 원래의 것을 반으로 잘라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고석은 원래 5개였던 것을 2개만 가져다 올려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천장한 지 260년 후인 1669년 1월 4일 판부사 송시열은 현종에게 “정릉이 태조 첫 부인의 능인데 태종의 어머니인 제릉(齊陵)보다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신덕왕후를 종묘(태묘)에 배향하고 능도 다른 능과 같이 만들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송시열은 동성 간 결혼금지법을 제안했다. 또한 ‘왕자의 난’이 정도전 등의 모함으로 일어났다고 전했다. 이후 송시열계 서인들이 집요하게 상소해 결국 현종은 정릉의 보수를 명하고 재실을 중건하고, 수직수호(능역을 감시하고 보호하는 사람)를 둘 것을 명했다. 또한 송시열은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며 이는 ‘계지술사(繼志述事)’, 즉 자손이 번성하고 선함을 영원히 전하는 경사라며 선대가 좋게 평가하리라는 이유를 들었다. 이후 신덕왕후 강씨는 종묘에 태조의 계비로 추봉됐다.

  

 

 

 

(왼쪽) 조선 최초(1396)의 정릉 석물은 파묘 후 청계천 광통교 축조에 사용됐다.

 (오른쪽) 석축 병풍석이 뒤집어 사용되고 하단 우측에 영저와 영탁 조각이 보인다.

 

 

절선축으로 조성, 뛰어난 자연경관

 

이처럼 신덕왕후의 복권은 송시열의 작품이었다.

종묘에 추봉되던 날 성북동 정릉 일대에는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신덕왕후의 원을 씻어주는 비라고 해 ‘세원지우(洗寃之雨·원통함을 씻어준 비)’라 불렀다고 한다.

 

정릉의 공간 구성은 일반적 능제가 직선축을 이루는 것에 비해 자연 지형에 맞춰 절선축(折線軸·ㄱ자형으로 굴절하여 꺾어지는 것)으로 조성돼 있다. 능역 입구의 금천교에서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의 대표적 조형기술을 볼 수 있다. 정릉의 사각 장명등은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고려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상부의 주두가 사라져 원형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그러나 그 규모나 섬세하게 조각한 모습에서 사랑하는 현비를 위해 태조가 공을 들여 조영했음을 엿볼 수 있다.

 

2009년에 약수터 근처에 방치돼 있던 소전대(망료위라고도 함, 제례를 마치고 지방 등을 소각하는 곳으로 추정)를 찾아 원래의 자리에 상설했다. 600여 년 만의 일이다.

다행히 정조 때 작성한 ‘춘관통고’(1788년 정조 때 국조 오례의 연혁과 실행 사례를 자세히 기록한 책)에 그 위치를 기록해놓아 쉽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소전대는 조선시대 초기의 건원릉, 정릉, 헌릉 세 곳에만 있다.

 

 

정릉은 북한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능선과 계곡마다 특색 있는 생태경관이 웅장하면서 아담하다. 재실 터 양옆으로 서 있는 느티나무 보호수, 유일하게 능역의 이름을 딴 정릉참나무는 역사학습을 함께 할 수 있는 자연경관이다. 정릉참나무는 두꺼운 코르크가 발달했고 잎은 길이 8~15cm의 긴 타원형으로, 뒷면에 회백색의 성상모가 밀생한다. 만주에서 처음 발견됐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의 정릉 참나무골에서 발견돼 정릉참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덕왕후는 태조와의 사이에 무안대군 방번과 의안대군 방석, 경순공주 2남 1녀를 두었다. 두 아들은 왕위계승권을 놓고 벌어진 ‘왕자의 난’으로 희생됐고 유택은 없어졌다. 그러나 앞에서 실록에 전하는 이야기를 추정컨대 정동 근처에 그 흔적과 얘기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스토리텔링을 찾는 일도 세계유산을 더욱 빛나게 하는 방법이다.

 

                    고려 양식을 따른 남한 유일의 정릉 사각 장명등(왼쪽)

  최근 발견한 정릉의 소전대(오른쪽)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2010.04.13 731호(p80~82) 주간동아 [신의 정원 조선왕릉] 

 

 

 

 

 

정릉은 왜 다른 왕릉에 비해 초라할까?

하천의 다리에 왕릉의 석물이 사용된 사연

 

 

정릉(좌), 다리 밑에 거꾸로 쌓은 병풍석(우)

 

“다리 밑에 왜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돌들이 사용되었을까?”

“그러게 말이에요. 여길 봐요. 여긴 그나마도 거꾸로 쌓았어요.”

나이든 산책 시민 두 사람이 청계천에 복원된 광통교 밑에서 나누는 대화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시민 한 사람이 알은체를 하고 나선다.

“아, 여기 문양이 새겨진 돌들을 말씀 하시는군요. 이 돌들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릉인 정릉에 쓰였던 돌들인데 태종 이방원의 미움을 받아 이렇게 다리 공사에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나이든 산책 시민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다리를 살펴보다가 하류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날마다 수많은 시민들과 전국에서 찾아온 국민들이 청계천 산책길에서 눈여겨보게 되는 유적 중 하나가 바로 복원된 광통교다. 청계천 상류 가까운 지점에 있기도 하지만 다리 아래 석축에 쓰인 유별난 돌들 때문이다. 여느 다리에 쓰인 밋밋한 돌들과는 달리 문양이 새겨진 이색적인 돌들이 섞여 있는 석축은 조금만 관심을 갖고 살펴보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다리 옆 벽면 안내판에는 정릉의 돌들이 이곳에 사용된 사연이 쓰여 있다.

 

광통교는 본래 광통방에 있던 큰 다리라는 뜻으로 대(大)광통교라 했으며, 광통교 또는 광교라고도 불렀다. 조선 태종 10년 7월에 큰 비가 내려 본래 토목교였던 광통교가 유실되었다. 마침 바로 전해인 태종 9년 2월 정동에 있던 태조의 계비 강씨의 묘를 성 밖 양주로 이장할 때 사용하지 않고 방치하였던 석물들로 돌다리를 세우자는 상주가 왕에게 올라왔다.

그때 태종의 허락으로 만들어진 다리가 바로 광통교인 것이다.

 

조선시대 최초의 도성 안 돌다리였던 광통교는 다리폭 15m, 길이 13m로 여느 다리보다 폭이 넓었다.

다리는 하천 가운데에 교각을 일정 간격으로 세웠는데 광통교는 하천 폭이 좁아 두 열의 교각만 세웠고 다리 폭이 넓어 교각 한 열에 8개씩의 다리발로 세워졌다.

 

광통교의 석축인 교대에 사용된 석재는 장방형의 장대석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이 석재들이 바로 정릉으로 옮길 때 사용하지 않고 방치하였던 왕릉석물인 호석의 병풍석이 사용된 것이다. 특이한 것은 조선시대의 다리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리에 난간시설을 하지 않았으나, 이 다리는 세울 때에 정릉 둘레에 세워져 있었던 난간석(둘레석)을 그대로 옮겨와 설치한 것이다.

 

정릉 홍살문(좌), 청계천에 복원된 광통교(우)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정릉을 찾은 날은 희부연 안개가 자욱하게 뒤덮인 따뜻한 봄날이었다.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은 평일인데다 날씨가 좋지 않아 찾아온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경내에 들어서자 앞쪽 왼편에 서있는 홍살문이 고즈넉하게 홀로 서있다. 홍살문을 들어서자 정자각과 작은 부속건물 두 개가 서있는 왼편 높직한 언덕 위에 능침이 자리 잡고 있었다.

 

능침 주변에 세워져 있는 석물들은 다른 왕릉에 비해 초라한 모습이었다.

우선 능침 바로 앞의 장명등과 혼유석, 그리고 주변에 으레 서있는 대표적인 석물인 문인석과 무인석 중에서 무인석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무덤을 빙 둘러 세워져 있는 둘레석(난간석)과 뒤편에 타원형으로 능을 감싸고 있는 병풍석이 보이지 않고 곡장(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만 둘러쳐져 있었다. 신덕왕후의 정릉이 다른 왕릉에 비해 능침이 작은 것도 초라해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정릉이 본래부터 작고 초라했던 것은 아니었다.

 

 

태종 이방원과 신덕왕후 강씨의 권력다툼이 빚은 비극

 

신덕왕후는 고려말엽인 1356년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강윤성의 신천강씨 가문은 이성계의 가문과는 비교가 안 되는 막강한 권문세족이었다. 그런 신천강씨 가문과 당시 지방 토호가문이었던 이성계의 전주이씨 문중이 혼인을 하게 된 것은 양가의 필요에 따른 정략결혼이었다.

 

이성계는 공민왕 시절인 1361년 고려를 침공한 홍건적을 크게 토벌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전공이 많았지만 지방 토호라는 출신의 한계를 느낀 그는 개성의 권문세족 배경이 필요했다. 신천강씨 문중도 가문의 세력 신장에 도움이 될 인물로 이성계를 점찍은 강윤성의 주도로 양가의 정략적인 혼인이 이루어진 것이다. 정략결혼이 맞아떨어져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으로 즉위하자 강씨는 현비에 책봉되어 왕후가 되었다. 대담한 지략을 갖고 있던 강씨는 조선건국 과정에서 이성계를 위험에서 구하기도 했으며 지대한 공로를 세워 개국공신이 되었다.

 

신덕왕후는 태조와의 사이에 방번과 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야망이 컸던 신덕왕후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되도록 꾀함으로서 방원과 갈등이 깊었다. 신덕왕후는 태조의 측근 실세였던 정도전과 합세하여 둘째 아들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1396년 방원이 일으킨 소란으로 인한 화병으로 사망하여 태조 이성계에게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다.

 

신덕왕후의 정릉은 도성안 황화방 북원(지금의 정동)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398년 왕위를 노리고 이방원이 일으킨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강씨 소생의 두 아들 방번과 방석(왕세자)은 물론 사위와 정도전까지 살해당했다.

 

태조 이성계는 강씨 사망 후 깊은 슬픔과 실의에 빠져 직접 능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조석으로 찾았다.

또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1년여의 공사 끝에 1397년 흥천사를 세웠다고 한다. 그렇지만 태종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자 신덕왕후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시켰다. 묘를 도성 밖 지금의 장소로 이장하도록 했는데, 그때 능침의 규모를 줄이고 석물들의 일부를 사용치 않고 방치했다가 청계천 광통교를 세울 때 사용토록 한 것이다.

 

신덕왕후는 그 후 1669년(현종 10)에 왕비로 복위되었다. 정릉은 사적 208호로 지정되어 있다.

- 이승철, 2011.04.27 Hi Seoul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