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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조선왕릉의 비밀] ⑩ 선정릉(선릉, 정릉)

Gijuzzang Dream 2009. 9. 7. 12:57

 

 

 

 


 
사적 제 199호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131  

 


 
선정릉 가는길
선릉로 → 선릉사거리 → 선릉역 전에서 좌회전 (8번출구, 이정표)

 

 

 

 

 

 



 

 

 

선릉(宣陵)




성종 선릉의 정자각.

성종은 나라의 근간이 되는 국법인《경국대전》의 편찬을 완료하는 등

정치 · 경제 · 문화적으로 태평성대를 이뤘다.

조선 9대 성종(成宗, 1457~94)과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1530) 윤씨의 능이다.

성종은 추존된 덕종과 소혜왕후의 아들로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부친을 여의었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이 즉위 1년 만에 승하하자 정희왕후의 명으로 1469년 왕위에 오른 성종은

태조 이후 닦아온 모든 체제와 기반을 완성시켜 조선 초기의 문화를 꽃피웠다.

정현왕후는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가 폐출되자 이듬해 1480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현왕후의 아들 진성대군(중종)은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정현왕후가 잠든 봉분을 지키고 있는 석양.

봉분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상설이 성종 능과 비슷하다.




조선 초기 왕권이 강했던 시대상이 엿보이는 성종 능의 무석인.

선릉의 석물들은 큼직하고 조각선이 확실하며 사실적이다.

선릉은 유난히 많은 변고를 겪었다.

임진왜란 때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었으며,

1625년(인조 3)에는 정자각에 불이 나 수리를 했고, 그 다음해에도 능에 화재가 발생했다.

 

   

 선릉 - 성종과 정현왕후

 

조선 전기 문화의 꽃 피우고 강남 개발을 지켜봤다

  

 

① 하늘에서 본 선·정릉과 강남 지역.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엄청난 개발 압력 속에서도 능역을 보존해온 한국 국민의 정신이 세계 유산감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② 2010년의 선·정릉 주변. 점선은 정조 때인 1788년 발행한 ‘춘관통고’의 기록으로 추정해본 선릉의 능역이다.

 

선릉(宣陵)은 조선의 제9대 왕 성종(成宗, 1457~1494)과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1530) 윤씨의 능이다. 동원이강형으로 서쪽 능침에 성종이, 동쪽 능침에 정현왕후가 잠들어 있다. 선릉은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산131에 있다. 서울지하철 2호선 8번 출구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어 서울 시민에게는 매우 익숙한 곳이다.

 

성종은 추존왕 덕종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아무이며 1457년 7월 30일에 태어났다.

어머니 소혜왕후(인수대비)는 좌의정 한확의 딸이다. 정현왕후는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이며 중종의 생모다. 1479년 성종의 두 번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가 폐출되자 왕비로 책봉됐다. 성종의 능은 1495년 연산군이 조영했고, 정현왕후의 능은 1530년에 중종이 조영했다.

 

세조는 첫째 아들인 덕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둘째 아들인 예종이 왕위를 이은 뒤에도 자산군(성종)을 왕실에서 키웠다. 어느 날 갑자기 뇌우가 쳐 바로 옆에 있던 환관이 벼락을 맞아 죽자 모두 놀라 넋을 잃었는데, 자산군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슬기롭게 대처했다고 한다.

 

1469년 11월 28일 숙부인 예종마저 일찍 훙(薨)하자 왕실의 큰 어른으로 군림하던 정희왕후(세조의 비)는 성종을 주상의 자리에 앉혔다. 이날 성종은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곧이어 교서를 발표했다. 일반적으로 선왕이 승하하면 사군(嗣君 · 차기 왕)이 성복(成服 · 초상이 나서 상복을 처음 입음)을 한 뒤 즉위하나, 성종은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당일 즉위했다. 왕권 도전에 대한 위기감 때문에 서둘러 즉위했음을 알 수 있다.

 

25년 1개월 재위 경국대전 편찬

 

일설에는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와 왕실 실권자인 정희왕후의 정치적 야합이었다고 본다. 성종은 11세에 한 살 위인 한명회의 넷째 딸(공혜왕후)과 결혼했는데, 왕위에 오를 때는 13세였다. 왕이 너무 어려서 섭정이 필요하자 정희왕후는 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에게 수렴청정을 넘기려 했으나 한명회 등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7년 뒤인 1476년 1월 성종이 20세가 되자 정희왕후는 국가의 모든 정무를 왕에게 넘겼다. 이때도 좌의정 한명회가 반대했는데, 이에 대해 대사헌과 여러 대신이 매일 탄핵 상소를 올려 결국 3개월 뒤 한명회는 해임됐다. 3대에 걸쳐 권세를 휘둘렀던 한명회가 실권한 것이다.

 

성종은 25년 1개월의 재위 기간 동안 세조 때 시작한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등 태조 이후 닦아온 모든 체제와 기반을 완성시키고 조선 전기 문화의 꽃을 피웠다. 이 무렵 성종은 합리적이고 온건한 유교정치를 회복하기 위해 사림(조선 건국에 협력하지 않고 지방에서 학문과 교육에 힘써온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은 유학자들로 영남 출신의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가리킴)을 대거 등용해 주로 언론기관에 배치하고 기존 훈구세력의 정책과 횡포를 비판하게 했다.

 

1494년 12월 24일 성종이 위독해 종친과 신하들이 문안하려 하나 “번거롭게 문안하지 말라”고 물렸다. 그리고 여자 의원과 종기를 다스리는 의원이 진찰하고는 배꼽 아래 종기가 생겨 이를 다스리는 약을 써야 한다고 했으나 오시(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에 성종은 대조전에서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역사는 성종에 대해 “총명 영단하시고 관인 공겸하셨으며, 천성이 효우(孝友)했다. 학문을 좋아하고 무술과 서화에 정묘(精妙)했다. 대신을 존경하고 대간(臺諫 · 사헌부, 사간원 벼슬)을 예우하고, 명기(名器)를 중히 여기고 아꼈으며 형벌을 명확하고 신중하게 했다. 백성을 사랑하고, 문무를 고루 등용하고 백성의 생업을 편안하게 하셨다”고 평가한다.

 

이윽고 장례 절차가 시작됐다. 이조와 예조에서 빈전도감(왕과 왕비의 상여가 나갈 때까지 관을 모시던 전각의 일을 보는 곳)을, 좌찬성과 호조에서 국장도감(국장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임시 관아)을, 그리고 공조와 종친에서 산릉도감(왕과 왕비의 능을 만들 때 임시로 두던 기관)을 맡았다. 정부, 육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5품 이상이 시호를 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으로 하고 묘호를 성종(成宗), 능호를 선릉(宣陵)이라 했다.

 

3일 뒤 세자 연산이 왕위에 올라 이듬해 4월 6일 선릉에 장사 지냈다. 이때 연산은 성종의 묘호를 중국 황제와 같이 인(仁)자와 성(成)자로 논하고 그해 성종의 영정을 그리게 했다. 이것이 조선시대 최초의 영정이자 오늘날 제사상에 쓰는 사진 영정의 시초가 아닌가 싶다.

 

성종의 산릉간심사(山陵看審事)는 윤필상, 노사신 등이 산릉 사방을 살피고 복명해, 여러 후보지 중 광평대군(廣平大君 · 세종과 소헌왕후의 다섯째 아들로 소학, 사서삼경, 문학, 산수에 능통하고 서예와 격구 등에 능했으나 신덕왕후 소생인 방번의 봉사손으로 20세에 요절했다. 성종의 숙부뻘이다)의 묏자리로 정한다.

 

여러 가지 풍수 논의 속에 옛 무덤의 이장을 걱정하나 당대 최고 원로였던 임원준이 “경성 근처에 건원릉, 현릉이라 할지라도 광평대군의 묘보다 못하다”며 대왕대비가 “광평의 묘는 그 자손이 병들고 요사했으며, 종친의 무덤이 주변에 많아(당시에는 선릉 지역에 태종과 세종의 후손의 무덤이 많았다) 예장(禮葬 · 예식을 갖추어 국가에서 장사 지내는 것)할 것이 많고 민가도 헐어야 해 민폐가 많으니 다른 곳으로 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윤필상 등이 “광평의 묘는 건해좌(乾亥坐)인데 수파(水破)가 장생(長生)하므로 흉하고, 선릉은 좌향을 임좌(壬坐)해 수파가 문곡(文曲 · 구불구불한 것)하니 길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다”고 아뢰었다.

결국 산릉의 금한(禁限 · 영역) 안에 있는 모든 무덤을 옮기되 예장과 이사를 할 때 후하게 대접하고 천장을 하도록 했다. 광평대군의 묘는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수km 떨어진 오늘날의 수서로 이장됐다.

 

엄청난 개발 압력 속에서도 능역 보존

병풍석을 두른 성종의 능침과 곡장.

 

정조 때인 1788년 편찬된 ‘춘관통고’에 따르면 선릉의 능역은 동으로 5리, 남으로 4리, 서로 3리, 북으로 3리로 둘레가 20리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곳은 1970년대 중반부터 강남 개발의 중심지가 됐다.

사가의 무덤과 마을이 없어 개발이 용이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오늘날 강남 개발의 초석은 연산이 만들었다고 하겠다.

 

세계유산 등재 신청을 준비하면서 국내 학자들 간에는 선릉 지역 등 일부 훼손된 능역을 제외하자는 의견이 다수였다. 그러나 2차에 걸쳐 국제학자들과 학술대회를 하고 이곳 선릉에 들렀을 때 강남 개발의 내용과 주변의 지가 등을 설명했더니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학자들이 “이와 같이 개발 압력이 많고 지가가 높은 지역의 문화재를 보존하고자 하는 국민적 정신이 세계 유산감”이라고 평하면서 조선시대의 모든 능을 등재 신청해 연속유산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이러한 격려에 힘을 얻어 국내 학자들과 주무부서인 문화재청은 사상 최대인 약 1885만㎡(570여만 평) 15개 지구의 조선 왕릉 모두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성공했다. 

 

성종의 대여(大輿 · 국상에 사용되는 큰 상여)가 한강을 건널 때 저자도(楮子島) 아래 배 4척을 연결했는데, 건너는 순간 강물이 줄었다가 건너자마자 다시 창일(漲溢)해 사람들이 탄복을 했다고 한다.

 

산릉도감의 인력은 다른 때에 비해 3000명이 늘어났다. 난간석을 쓰지 말라는 세조의 유시를 무시하고 만든 병풍석과 웅장한 석물조각들을 볼 때 동원된 인력이 1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산군이 자기 아버지의 무덤을 당대 최고의 능역으로 조성한 것이다. 그러나 성종의 묘지문(墓誌文)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연산군은 어머니(폐비 윤씨)와 외할아버지(윤기무)가 조모(인수대비), 한명회 등에 의해 폐위돼 죽은 것을 알게 돼 결국 폭군으로 돌변한 그의 칼바람이 조정에 몰아쳤다.

 

① 웅장하고 거대한 무석인. 조선시대 무석인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평가된다. ② 선릉 장명등의 옥개석과 상륜.

 

연산군이 아버지 무덤 최고의 능역으로 조성

 

성종이 떠난 지 36년(중종 25년)이 지난 1530년 8월 22일 대비(정현왕후)가 경복궁 동궁에서 승하했다. 정현왕후는 우의정 윤호의 딸로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숙의에 봉해졌고, 1479년 성종의 둘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친모인 윤씨가 폐출되자 왕비로 책봉됐다. 이후 1497년 연산이 폐위되고 아들 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자순대비가 됐으며 68세에 56년의 왕실생활을 마감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며느리인 단경왕후(중종의 첫째 부인) 폐비사건과 장경왕후(중종의 계비)를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장례는 정희왕후의 예를 따르도록 했다.

정현왕후는 아버지 윤호가 신창현감으로 있을 때 관아에서 출생해 이름을 신창의 창(昌) 자를 딴 창년(昌年)으로 했다 한다. 어머니 전(田)씨의 태몽에 ‘하늘의 채색 구름 속에서 천녀(天女)가 내려와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했다’고 언문에 전해진다. 또 ‘성종 섬기기를 소심하게 날마다 새롭게 하고, 조금도 질투하지 않고 모든 비빈의 자녀를 친자식 같이 대하고, 시할머니 정희와 시어머니 소혜를 공경함이 더할 나위 없었다’고도 전해진다.

시호는 원대한 생각을 잘 성취시킨 것이 정(貞)이고, 행실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 현(顯)이라 하여 정현이 됐다. 1497년 10월 29일 선릉에 축좌미향(丑坐未向)으로 모셨다.

 

왕의 능침 봉분은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이고, 왕비 능침은 12간의 난간석 봉분이다. 정현왕후의 능침을 조영할 때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심정 등이 병풍석을 치는 것은 세조의 분부와 맞지 않는다고 주장해 하지 않았다. 문무석인의 몸집이 크고 얼굴이 사실적이며 윤곽이 굵고 강직한 것이 특징인데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 같다. 특히 왕비 능침 문무석인의 조각이 아름답다.

 

성종은 12명의 부인 사이에서 16남 12녀를 두었다.

정비 공혜왕후 한씨는 세도가 한명회의 딸로 자식 없이 일찍 죽어 능호를 순릉(順陵)이라 하고 경기도 파주의 삼릉에 묻었다.

폐비 윤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연산군이 제10대 왕이며, 폐비 윤씨의 묘는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에 있다가 근래에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지구로 천장됐다.

큰아들 연산군의 묘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77에 있으며, 정희왕후와의 사이에 태어난 진성대군(중종)은 같은 능역의 동남쪽 언덕에 있다.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2010.06.14 741호(p80~82) 주간동아 [신의 정원 조선왕릉] 

 

 

 


 

 

 



                                 

 

정릉(靖陵)



중종이 홀로 잠든 정릉.

중종은 연산군 폐위 후 반정 세력에 의해 추대된 탓에 권력 기반이 약하였으며 정치적 혼란을 막지 못했다. 조선왕릉 가운데 왕만 단독으로 잠든 왕릉은 단종 장릉, 태조 건원릉, 중종 정릉뿐이다.

조선 11대 중종(中宗, 1488~1544)의 능이다. 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로 1494년 진성대군에 봉해졌다.

진성대군은 1506년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낸 뒤 왕으로 추대되었다.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으나

당파의 정치적 논쟁이 끊이지 않아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중종은 1544년 세자인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승하했다.




번잡한 도심의 빌딩 숲에 파묻힌 정릉



무석인과 석마. 정릉의 문 · 무석인은 그 높이가 3미터를 넘을 정도로 큰 편이다.

인종은 처음에 선왕을 고양(高陽)에 예장하고 묘호를 중종, 능호를 희릉(禧陵)으로 했다가

현재 서삼릉 능역 내에 있는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인 희릉 오른쪽 언덕에 정릉을 조영했다.

1562년(명종 17) 문정왕후에 의해 선릉 동쪽의 언덕인 현재의 정릉 자리로 옮겨졌다.


   

 정릉 - 중종

 

 3명 왕후 7명 후궁 거느렸지만 홀로 안장에 도굴 수모

 

   

400여 년 전 임진왜란의 아픔을 잊고 현란한 도심을 지키는 중종의 능침.

 

정릉(靖陵)은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中宗, 1488~1544)의 능으로 현재 서울 강남구 삼성동 131번지에 있다. 조선 왕릉으로는 드물게 왕의 무덤만 단출하게 있는 단릉 형식인데, 이렇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중종은 성종의 둘째아들로 계비 정현왕후 윤씨에게서 태어나 휘는 역( )이요, 자는 낙천(樂天)이다. 1494년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해졌다가 1506년 연산군의 폐위로 제11대 왕으로 추대됐다.

중종의 이복형인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선릉을 조영하다 생모가 폐비된 사실을 알고 폭군으로 돌변했다. 결국 12년 만에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중종은 38년 2개월간 재위하면서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문벌세도가들의 권력을 누르고자 현량과(賢良科)를 두어 조광조 등 신진사류(新進士類)를 등용, 새로운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했으나 당파싸움을 종식하지는 못했다.

 

1544년 11월 15일 중종은 죽음이 임박하자 마지막으로 폐위된 왕비 신씨(단경왕후)를 찾았다. 신씨는 왕비에 책봉되자마자 당쟁으로 7일 만에 폐위된 불운한 왕비였다. 신씨를 만난 뒤 중종은 유시(酉時 · 오후 7~9시)에 환경전에서 승하했다.

 

문정왕후의 압력으로 강 건너 천장

 

중종 사후 맏아들 인종(仁宗, 1515~1545 · 중종의 제1 계비 장경왕후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중종의 비 문정왕후는 사왕(嗣王 · 신임 왕) 인종이 병약하다는 이유로 내전에서 나와 의주(儀註 · 가례 서적)를 들여오게 하고 찬궁((欑窮 · 장례식까지 빈전 안에 임금의 관을 놓아두던 곳)을 내전 깊숙한 통명전에 설치하게 하는 등 남편의 국장을 주도했다. 심지어 재궁(梓宮 · 관)도 115번 옻칠한 것을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신하들은 ‘예의 문란함’을 지적하며 문정왕후를 성토했다. 문정왕후의 주도적이고 독단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중종의 능은 오늘날 경기도 고양 서삼릉(西三陵) 능역에 있는 장경왕후 윤씨의 능인 희릉(禧陵)에 동원이강으로 모시고, 능호를 정릉이라 고쳤다.

처음에는 시호를 국가 중흥의 공이 크다 하여 중조(中祖)로 하고자 했으나 폐왕 연산이 아니라 성종의 대를 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중종으로 결정했다.

 

인종은 중종이 위독할 때 늘 먼저 약을 맛보고, 잠자리를 살피는 등 효성이 지극했지만 병약했다. 결국 능역 조영 한 달 후 배알을 했지만 재임 8개월 만에 31세로 승하했다. 인종은 조선의 왕 가운데 가장 짧은 재위기간을 기록하고, 아버지 중종의 능 옆에 안장됐다.

 

인종의 뒤를 이어 동생 명종(明宗 · 중종의 제2 계비 문정왕후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명종은 중종이 묻힌 정릉 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일찍이 세조가 며느리 장순왕후의 공릉 터를 잡으면서 이 땅을 직접 보고 좋지 않다 했고, 당대 최고의 풍수가인 임원준도 불길하다고 했음을 이유로 정릉을 천장했다. 옮긴 곳이 오늘날 서울 강남구 삼성동이다.

 

이때 문정왕후의 압력에 못 이겨 명종이 억지로 능을 옮긴 것에 대해 백성이 한탄했다고 한다. 제2 계비였던 문정왕후가 사후 남편과 같은 유택에 묻히고자, 억지로 장경왕후의 희릉과 아들 인종의 효릉으로부터 강을 건너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옮겼다는 것이다. 이때 애달픔이 사림의 울음으로 변했고, 밤이면 경기도 고양에 있는 희릉 숲 속의 울음소리가 한강 건너 정릉까지 이르렀으며, 안개가 세 능을 감싸고 구름 속을 떠다녔다고 한다. 모두 정릉의 천장을 슬퍼하는 이야기다.

사림들은 “고금을 막론하고 유명을 달리한 남편의 무덤을 옮겨 전처의 무덤과 멀리 떨어지게 하는 투기는 듣지 못했다”며 문정왕후를 비꼬았다.

 

문정왕후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강을 건너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겨온 중종의 정릉.

천장을 할 때 한강을 건너는 데 비협조적이었던 수원 목사가 하옥되고 경기 감사는 파직됐으며, 선창(船槍)들도 협조하지 않아 벌을 받는 이가 속출했다. 그러나 사림과 중신들의 반대에도 중종의 능은 1562년 8월 22일 문정왕후와 봉은사 주지 보우가 은밀히 계획해 봉은사 곁으로 옮겼다.

구릉 터가 득수득파(得水得破)가 좋지 않아 옮긴다는 명분이었으나 사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와 문정왕후 후손의 번영을 위한 신후지계(身後之計 · 죽은 뒤 자손을 위한 계획)였다.

천장 후 문정왕후가 선릉과 정릉에 친제를 행하려 하나 조정에서 후비 단독으로는 할 수 없다 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임진왜란 때 옥체 훼손 변고

 

중종의 능을 어렵게 옮겼으나 지세가 낮아 장마 때마다 재실과 홍살문이 침수됐다. 3년 내 변고가 두 번이나 일어나자 명종은 또다시 천장을 하려 하나 이루지 못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그토록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으나 정릉이 물이 차고 변고가 끊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문정왕후는 태릉(泰陵)에 안장됐다.

중종은 3명의 왕후와 7명의 후궁을 거느렸으나, 죽어서는 홀로 안장돼 조선 역대 왕 중 태조의 건원릉과 함께 단 둘뿐인 단릉이 되고 말았다.

 

정릉의 상설은 아버지 성종의 선릉과 장경왕후의 희릉과 같이 ‘국조오례의’를 따른다. 석양과 석호의 자세는 선릉과 비슷한데 세부적인 표현에서 좀 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반면 전체적으로 형식화된 경향이 있다.

문 · 무석인은 높이가 3m 이상일 만큼 크고, 문·무석인 얼굴의 퉁방울눈이 특이하며,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임진왜란 당시 수난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석호의 익살스러운 입 모양은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한다.

 

주변 지역은 1970년대에 집중 개발되면서 고층 빌딩이 들어서 특히 야경이 아름답다. 세계문화유산 실사자도 빌딩 숲과 야경을 보고 감탄했다. 선 · 정릉은 특별히 저녁 9시까지 개장해 많은 관람객이 찾고 있다.

 

조선 왕릉은 오랜 세월을 이어온 한국인의 자연관과 장례문화, 40기의 왕릉을 보존한 점을 높이 평가받아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다른 나라 왕릉 관리인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왕릉 관리의 어려움으로 도굴을 꼽는다. 세계 학자들도 우리나라 왕릉에 대해 이 문제를 많이 염려했다. 그러나 조선 왕릉은 능역 조영 간소화와 회격실 구조 덕분에 지금까지도 온전히 보존됐음을 확인하고 우리의 보존관리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이곳 선 · 정릉만은 예외다.

 

1593년 4월 13일 선조 일행이 평안도 가산을 출발해 박천(博川), 안주(安州)에 도착했다. 왜군이 쳐들어와 임란 중이었다. 경기좌도관찰사 성영(成泳)이 선릉과 정릉이 파헤쳐져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다고 보고하면서 속히 경성을 수복하자고 했다. 1592년 8월 태릉과 강릉도 왜적 50명과 동원병 50여 명이 도굴하려 했으나 회격이 단단해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선 · 정릉은 왜군의 손길을 피해가지 못했다. 선조의 증조부모(선릉)와 조부모(정릉과 태릉) 등 직전 조상의 유택이 파헤쳐진 것이다.

전쟁 통에 일어난 변고라 조정에서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선릉 왕의 능침과 왕비 능침은 광중에 불이 나서 전소됐고, 정릉 현궁은 소실돼 훼손되고 소실되지 않은 옥체가 있어 중종의 옥체인지 가리고자 중종 때 신하와 궁인들을 동원해 확인하나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미확인 옥체는 관에 넣어 깨끗한 곳에 묻었다. 그리고 성종과 정현왕후, 중종의 유골은 소실된 유회와 재흙을 수습해 각각의 현궁에 봉안했다. 소실된 지석과 옥책은 전주 사고의 실록을 보고 재작성했다. 기록으로 남긴 사고의 중요성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문정왕후의 투기와 법석으로 천장을 하고 병풍석을 둘러친 정릉은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타는 변고를 겪었다. 만약 세조의 유시대로 회격실로 조영하고 난간석을 설치했다면 어땠을까? 때늦은 유감일 뿐이다.

 

정릉은 조선시대 왕릉 중 바로 옆의 선릉과 더불어 유일하게 도굴됐다.

특히 중종의 정릉은 천장해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문정왕후가 정성 들여 만든 능원이라 대단히 견고한데도 변을 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광주목사는 하옥되고 경기관찰사는 파직됐다. 변고 후 정릉을 옛 터(고양)로 다시 옮기자는 주장도 나왔으나 현장에 재봉안했다.

 

1 많은 개발압력에도 도심을 지켜온 조선 왕릉은 역사경관림으로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2 정릉의 석호는 퉁방울눈이 특이하다. 이전 석호와는 다른 형태의 조각이다. 3 임진왜란의 수난을 겪고 500여 년을 지켜온 중종 정릉의 문석인은 할 말이 많은 듯하다.

 

 

정릉 능침사찰 봉은사에서 두부 만들어

 

정릉의 원찰인 봉은사는 794년 연회국사가 견성사(見性寺)란 이름으로 창건한 이후 1498년(연산군 4년)에 중창하면서 봉은사로 개칭했다.

조선의 왕실에서는 국가 통치철학으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택했으나, 정작 능원을 조영할 때 선왕의 안식과 왕권의 영원성을 위해 사찰을 지었다. 이것이 능침사찰이다. 능침사찰은 조선 초기에는 능원마다 한 곳 이상씩 두었다.

태조 건원릉의 개경사, 신덕왕후 정릉의 흥천사, 세종과 소헌왕후 영릉의 신륵사, 세조와 정희왕후 광릉의 봉선사가 대표적이다.

 

특히 중종 때 문정왕후는 정릉을 삼성동으로 천장하고 두부를 만든다는 이유를 대서 봉은사를 중건하고 번성케 했다. 이때 봉은사 주지 스님을 병조판서에 앉히고, 조선시대 내내 시행하지 않던 승과시험을 부활했다. 그리고 승과시험을 봉은사 앞에서 행하기도 했다. 능침사찰은 두부를 만드는 '조포사(造泡寺)'라고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능원에 제사를 지낼 때 쓰는 두부는 스님 두 분이 만든다. 제례물 중 두부가 쉽게 변질, 부패해 능원 근처의 스님들이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종은 3명의 왕비와 7명의 후궁에게서 9남 11녀를 두었다. 정비 단경왕후 신씨와의 사이에는 후사가 없고, 그의 고모와 아버지가 연산군과 관련돼 폐위됐다가 영조 때 복위돼 능호를 '온릉(溫陵)'이라 하고 현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 있다.

 

중종의 제1 계비 장경왕후 윤씨는 1506년 후궁으로 들어와 1507년 왕비가 됐다. 1515년 세자 인종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25세에 승하해 능호를 '희릉'이라 하고,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지역에 묻혔다.

제2 계비 문정왕후의 무덤은 능호가 '태릉'이며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2010.07.12 745호(p78~80) 주간동아 [신의 정원 조선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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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에서 발간한 [조선 왕릉 답사 수첩] 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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