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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조선왕릉의 비밀] ⑥ 태강릉(泰陵, 康陵)

Gijuzzang Dream 2009. 9. 7. 12:42

 

 

 




                     사적 제 201호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223-19번지


           

태강릉 가는 길
중부고속도로 동서울IC→서하남IC→강일IC→ 남양주IC→ 구리IC→ 서울방면 진입후

태릉이정표 방향으로 삼육대학교 · 태릉선수촌→500m전방 우측에 있음

 

 

 

 

 

 

 


                                          
                             

 태릉(泰陵)

               



중종 제2계비 문정왕후가 묻힌 태릉.

‘조선의 측천무후’ ‘철의 왕비’라는 세간의 평을 반영하듯 왕비의 단릉임에도 웅장하게 조영되었다.

 

조선 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65) 윤씨의 능이다.

문정왕후는 중종과의 사이에 명종을 비롯해 1남 4녀를 두었다.

명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을 한 문정왕후는

동생 윤원형을 내세워 을사사화, 양재역 벽서사건 등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처벌했다.

또 당대의 고승 보우(普雨)를 앞세워 불교 부흥을 도모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참도가 이어지고 정자각 뒤쪽 언덕으로 봉분이 엿보인다.

정자각은 한국전쟁 때 파손되어 석축과 초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94년 복원하였다.


왕후는 생전에 지금의 서삼릉에 있던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을

보우가 주지로 있던 봉은사 곁으로 천장하고 자신도 그 곁에 묻히고자 했으나

정릉의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어차는 바람에 중종의 곁에 묻히고자 했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명종은 모후의 시호를 문정으로 하고, 능호를 신정릉(新靖陵)이라 했다가 태릉으로 고쳤다.

 

태릉은 왕비의 봉분 한 기만 조성된 단릉으로

봉분에 구름무늬, 십이지신상을 새긴 12면의 병풍석,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봉토를 받치는 만석 중간에 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를 문자로 새겼는데, 자(子)는 북쪽을 뜻한다.

무인석은 얼굴이 크고 퉁방울눈에 유난히 큰 코와 우락부락한 표정이 특징이다.



   

 태릉 - 중종 계비 문정왕후

 

 

 조선 왕실의 측천무후 50여 년간 국정 쥐락펴락

 

 

1) 태릉은 능침과 정자각 사이가 길며, 기(氣)를 모으는 언덕을 약하게 한 것이 특이하다.

태릉(泰陵)은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中宗)의 제2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1501∼1565)의 능호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 산223-19에 있으며 사적 제201호로 지정돼 있다.

 

 훗날 사가들은 문정왕후를 중국 당나라의 측천무후, 청나라의 서태후와 종종 비교한다.

그는 중종, 인종, 명종 3대에 걸쳐 50여 년간 왕비와 대비로 있으면서 국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권력욕이 강하고 시기심이 많으며 표독하고 독살스러운 인물로 그려졌다.

그래서인지 문정왕후의 능은 일반 왕후의 능보다 화려하고 웅장하고 특이하게 조영됐다.

 

태릉의 능침은 양주 노원면 대방리(현 노원구 공릉동)에 종산을 수락산으로 하고 주산을 검암산으로 한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 형국에 자리 잡았다.

앞에 흐르는 공릉천이 명당수다. 능침은 북서에서 남동향하는 임좌병향(壬坐丙向) 언덕에 단릉(單陵)으로 예장돼 있다. 능역의 왼쪽에 태릉선수촌, 명종·인순왕후의 강릉, 삼육대가 이어지고 전면에는 육군사관학교, 오른쪽에 사격장과 놀이동산, 서울여대가 있다.

 

문정왕후는 1565년 4월 6일 아침 삼정승 등 조정의 대신을 모이게 한 뒤 언서유교(諺書遺敎 · 한글 교서)를 내리고 창덕궁 소덕당에서 승하했다. 보기 드문, 그러나 문정왕후다운 대왕대비의 교서였다. 문정왕후는 교서에서 명종이 허약하고 후손이 없음을 염려하며 자신의 상례에는 고기를 먹지 못하는 예를 무시하고 주상의 몸을 보양케 하라고 명했다. 중년의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걱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밖에 교서에는 왕실에 대한 충성과 그녀가 중흥한 불교의 보존, 자신의 친정 일가로 장경왕후 딸인 효혜공주의 제사를 모시는 윤백윤 일가의 면죄를 부탁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이 교서를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승하 당일 문정왕후의 정치적 간섭을 탓하면서 ‘서경(書經)’의 목서(牧誓) 편을 예로 들며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라고 비난했다.

 

왕릉을 능가하는 웅장한 능

 

문정왕후는 16세에 중종의 중전이 돼 28년간 왕비를 지내고 아들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이렇듯 50여 년간 왕실의 어른 노릇을 하며 국정을 쥐락펴락한 여장부였으니 중국의 측천무후나 서태후에 비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문정왕후는 1501년 영돈령부사 윤지임의 딸로 태어났다. 1518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은 지 엿새 만에 산후병으로 요절하자 급히 왕비로 책봉됐다.

왕실에 들어와 딸만 넷을 낳은 문정왕후는 어린 세자(장경왕후의 아들, 훗날 인종)를 기르며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그러다 왕비가 된 지 거의 20년 만에 중종과의 사이에 경원군을 낳자 생각이 달라졌다. 이제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 싶었다.

세자를 앞세운 윤임 일파(대윤)와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 일파(소윤) 사이에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대윤 쪽이 유리한 듯 보였다. 죽은 장경왕후의 아들인 세자가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2) 도성의 동쪽에 태산을 봉하면 국가가 안정된다는 이론에 따라 공릉동에 조영한 태릉의 전경.

 3) 큰 얼굴에 퉁방울눈, 우람한 코의 무석인이 ‘국태민안’을 지키는 듯하다.

 

그러나 몸이 약한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주도권은 소윤에게 넘어갔다. 일설에는 인종이 문정왕후가 전한 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 그토록 바라던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는 12세의 어린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동시에 윤원형 일파에 의한 ‘외척 전횡시대’가 도래했다. 이들은 정적을 제거하고, 부정축재를 일삼아 원성이 자자했다.

어린 명종은 어머니와 외척의 횡포에 시달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문정왕후는 동생 윤원형의 애첩 정난정의 소개로 봉은사 승려 보우를 만나 불교에 심취했다. 보우를 병조판서에 임명하고 승과제도를 도입하는 등 조선의 ‘억불숭유’ 정책을 무시하고 불교 중흥에 앞장섰다. 봉은사는 문정왕후 시아버지인 성종의 선릉과 남편 중종의 정릉의 능침 사찰이었다.

 

미약한 왕권을 이용해 조정 대신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사리사욕을 채우자 사회는 어수선해지고 병들어갔다. 설상가상 흉년마저 들어 굶주린 백성이 도적 떼가 되기도 했다. 양주의 임꺽정이 민란을 일으켰고, 이를 틈타 왜구가 쳐들어왔다. 이것이 을묘왜변이다.

 

명종은 민란을 평정하고 왜구를 퇴치하느라 곤욕을 치렀고, 백성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문정왕후 세력은 정적 제거에만 몰두해 1547년 음모를 꾸몄다. 양재역 부근에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들이 날뛰니 곧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벽서를 붙인 뒤 윤임 등이 역모를 기도한 증거라고 몰아세웠다. 이른바 '양재역 벽서 사건'이다. 이때 희빈 홍씨(중종의 후궁)의 소생인 봉성군이 반역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사사됐다.

 

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명종은 지금의 태릉 터에 모셨다.

당대의 지관이며 예언가였던 남사고(南師古)가 “동쪽에 태산을 봉한 뒤에야 나라가 안정될 것이다”라고 한 말에 따라 문정왕후를 태릉에 모시고 훗날 자신도 바로 옆 강릉(康陵)에 안장됐다.

 

문정왕후는 생전에 남편 중종(1488~1544)의 능을 옮겼다. 원래 중종은 고양시 서삼릉 내에 있는 희릉(장경왕후의 능)의 오른쪽에 묻혔으나, 1562년(명종 17) 중종과 같이 묻히기를 원했던 문정왕후의 뜻에 따라 현재의 강남구 정릉(靖陵) 터로 천장했다. 그러나 정릉의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어오고 세자가 죽는 일이 잇따르자 명종은 “천장 후 나라에 좋은 일이 없고 변고가 생기니 다시 가서 산릉을 찾으라”고 명령해 결국 공릉동에 안장됐고, 문정왕후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국가안정론을 이유로 1950년대 현 육군사관학교가 이곳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4) 태릉의 능침은 장엄하고 우람해 문정왕후 생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5) 정교하게 조각된 태릉의 무석인.

 

그래서인지 태릉은 왕비의 능이지만 웅장해서 여장부였던 문정왕후의 모습을 짐작게 한다. 능호도 크고 편안하다는 의미에서 '태릉'이라 했다. 특히 능침과 정자각의 거리가 조선 능원 가운데 가장 길며, 기를 모아 뭉치게 한다는 능침 앞 강(岡·언덕)을 약하게 한 것이 특이하다. 이것은 왕후의 정권욕을 잠재우려 했던 왕과 신하들의 뜻이 아닐까?

 

태릉은 명종의 명으로 ‘국조오례의’에 나타난 대비의 상례가 아닌 대왕의 상례를 따랐다. 봉분 아래는 운채(雲彩)와 12지신을 의미하는 방위신이 새겨진 병풍석으로 두르고, 주위를 난간석으로 다시 보호했다. 병풍석 위의 만석(滿石) 앞면 중앙에는 12간지를 문자로 새겼다. 12간지를 문자로 새기는 것은 세조 때 능역 조성을 간소화하면서 병풍석의 신상(神像)을 대체하기 위한 방편으로 등장했는데, 태릉에는 신상과 문자가 병용돼 주목을 끈다. 이 능역의 조성을 위해 상당히 많은 인력이 동원됐을 것으로 보인다.

 

정권욕 잠 재우려 언덕 약하게 조성

 

태릉의 문·무석인은 목이 짧고 얼굴이 상대적으로 큰 형태다. 무석인은 특히 퉁방울눈에 코가 유난히 크다. 문석인은 높이가 260cm로, 관복에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하는 복수 (頭)를 쓴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두 손으로는 홀(笏)을 공손히 맞잡고 있는데, 왼쪽의 문석인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는 반면 오른쪽의 문석인은 반대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좌우 문석인의 홀을 잡는 방법은 동일하나 이곳 태릉의 경우는 다르다. 무석인은 문석인과 비슷한 크기이며,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투구를 쓴 위용 넘치는 무장(武將)의 모습이다. 문·무석인 얼굴과 몸통의 비례가 1대 4 정도로 머리 부분이 거대하다.

 

태릉에서는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의 금천교를 볼 수 있다. 앞쪽의 부러진 금천교는 외금천교로 전해지는데 1950~60년대 서울여대 앞쪽 화랑로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릉 전면의 물길은 오랜 세월 상부의 마사토 등이 흘러와 퇴적하면서 물의 흐름이 막혀 다리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사라진 물길을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

 

정자각은 6·25전쟁 때 파손돼 석축과 초석만 남은 것을 1994년에 복원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전(正殿)과 그 앞의 월랑(月廊)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으로 1970년대 태릉 능역 안에 만든 놀이동산과 사격장을 철거하고, 소실된 재실과 어정을 복원해야 한다.

 

중종의 정릉과 성종의 선릉은 1592년 일본군에 의해 도굴되고 시신이 훼손되는 수난을 겪었다. 임진왜란 직전 조영된 문정왕후 태릉도 ‘효인’이라는 자가 능침 안에 금은보화가 많다고 고자질해 1593년 1월 일본군이 기마병 50명과 주민 50명을 동원해 도굴하려 했으나 삼물의 회(灰)가 너무 단단해서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태릉 주변의 송림, 좌우 능선과 계곡에 있는 굴참나무 숲과 진달래는 서울에서 보기 드문 생태 경관이다.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2010.08.02 748호(p74~76) 주간동아 [신의 정원 조선왕릉] 

 

 

 


 

 

 

 



                          

강릉(康陵)

                 


 
 명종과 인순왕후의 쌍릉으로,

열두 면의 병풍석과 열두 칸의 난간석을 둘렀는데, 난간석을 터서 두 봉분을 서로 연결하고 있다.

 

조선 13대 명종(明宗, 1534~67)과 인순왕후(仁順王后, 1532~75) 심씨의 능으로,

어머니 문정왕후릉(태릉)에서 1km 떨어진 동쪽 산줄기에 안장되어 있다.




문 · 무석인, 망주석 등의 석물은 이웃한 중종왕비(문정왕후) 태릉과 비슷하다.

명종은 재위 기간 내내라 할 정도로 오랫동안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명종은 중종의 둘째 아들로 1545년 인종이 승하하자 12세 나이로 왕위에 올라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인순왕후가 낳은 순회세자가 죽은 지 2년 만에 의지했던 어머니 문정왕후마저 숨지자

명종은 마음의 병을 얻었다. 선정을 베풀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명종은 보령 34세로 승하했다.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한 후 인순왕후는 덕흥대원군(중종의 일곱째 아들)의 셋째 아들을 왕위로 올렸다.

그가 14대 선조다. 선조의 나이가 어려 인순왕후는 1568년까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인순왕후가 승하한 뒤 명종릉(강릉)에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강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모두 병풍석으로 둘렀으며, 12칸의 난간석으로 연결되어 있다.

대체로 태릉과 마찬가지로 설치되었으나 혼유석은 왕릉과 왕비릉에 각각 설치되었다.

봉분 앞에 건원릉과 선릉에서 보던 팔각 장명등이 서 있는데

이것은 화대가 하대석보다 좁아지고 대석 허리가 길어진 양식으로

조선건국 초기에 보여준 복고풍 장명등의 모습이다.

좌우측이 서로 다른 무인석은 둘 다 코에 붉은 빛이 돌고 투구와 안면의 크기는 비슷하지만,

오른쪽의 것은 투구가 작고 이마 부분이 좁고 코가 둥글며 턱과 양볼이 튀어나와 있다.

 

 

   

 강릉 - 명종과 인순왕후

 

 권신들 횡포와 국정 혼란 허수아비 왕권에 ‘눈물’ 

 

 

강릉에 내리는 비는 명종의 눈물을 떠올리게 한다.

강릉(康陵)은 조선 제13대 왕 명종(明宗, 1534∼1567, 재위 1545∼1567)과 비 인순왕후(仁順王后, 1532∼1575) 심씨의 능이다. 명종의 위(諱)는 환()이며 자(字)는 대양(對陽)이다.

 

11대 왕 중종과 계비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은 그의 이복형인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후사 없이 죽자 12세에 왕위에 올라, 모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왕의 종아리를 때릴 만큼 독선적이고, 정치적 야심이 컸다고 한다.

 

강릉은 문정왕후가 묻힌 태릉의 동북쪽인 서울 노원구 공릉동 산223-19에 있다. 오른쪽에 태릉선수촌이 있으며, 왼쪽에 삼육대가 인접한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명종은 23년 동안 재위했으나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을사사화, 임꺽정의 난, 을묘왜변 등 국가적 혼란을 겪으며 성군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언적(1491∼1553) 등을 통해 주리성리학을 정립하게 하고 이황(1501∼1570) 등의 활동으로 성리학, 유학 사상을 발전시켰다.

1545년 7월 1일 인종 승하 후 왕권을 이은 명종은 언제, 어디서 즉위했는지 기록이 없다. 인종이 승하하는 날 문정왕후가 바로 경복궁에 입궁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일 즉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중기 연산군 때부터 명종까지 신진사류(사림)가 훈구세력으로부터 받은 정치적 탄압으로 약 50년간 네 차례의 사화가 일어났다. 선왕인 인종 때는 25년간의 세자생활과 8개월의 재위 동안 외척인 윤임을 중심으로 한 대윤파가 실권을 장악했으나, 명종의 즉위와 더불어 문정왕후 동생인 소윤파 윤원형 등이 득세해 대윤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것이 을사사화다.

 

이후 약 20년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탓에 명종은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윤원형의 권세가 크다 보니 노비 출신으로 정경부인까지 된 그의 애첩 정난정의 위세가 대단해서 뇌물을 받고 남의 재산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생사여탈이 그의 손에 달렸다는 말이 오갈 지경이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명종은 윤원형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인순왕후의 친인척을 가까이 두었으나 그들 역시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해 부정축재를 일삼고 자기 세력을 키워 조정은 권신들의 횡포로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다. 이 무렵 황해도 구월산에 본거지를 둔 의적 임꺽정이 난을 일으켜 3년간 조선의 행정은 마비되고, 을묘왜변 등 왜구의 약탈로 민간의 고통은 커졌다.

 

혼란기에 왕권을 지키고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애쓰던 명종은 1567년(명종 22) 6월 28일 축시(새벽 1~3시)에 후임 왕을 점지하지 못하고 경복궁 양심당에서 세상을 하직할 기미를 보였다. 왕실과 조정은 선왕 승하에 대한 슬픔에 앞서 차기 왕(사왕 · 嗣王) 선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날 밤 상왕의 병이 위독해 두 정승을 부르나 이미 퇴청했고, 왕이 신음하면서 괴로워하니 뒤늦게 정승들이 들어와 내시들이 부축했으나 말을 잇지 못했다. 사관이 두 사람의 이름을 써서 올렸으나 끝내 고명하지 못했다.

 

결국 신하들이 중전(인순왕후)에게 후계자 전교를 요구하자 “을축년(2년 전)에 하서(下書)한 일이 있는데, 그때 덕흥군의 셋째 아들 균(鈞)을 후사로 삼은 일을 경들도 알고 있다”고 말하니, 신하들은 양사의 장관(예조와 사관)들이 알아야 한다며 중전에게 재전교를 부탁했다. 그러나 인순왕후는 “밤이 깊어 미안하니 서간으로 전한다” 해서 신하들이 물러나와 경회지(慶會池) 다리에 둘러앉아 좌의정 이명 등에게 중전의 전교를 논의하다 사관들이 들으려 하자 못 듣게 하니 불안의 기색이 많았다고 실록은 전한다.

 

의관이 왕의 수족이 식어간다 전하자 승지가 영의정 이준경, 좌의정 이명 등에게 주상을 봉영할 것을 큰 소리로 울부짖으니, 인순왕후가 “망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재작년(을축년) 서한한 사람으로 하라”고 명했다. 죽어가는 명종 앞에서 인순왕후가 덕흥군의 삼남 하성군을 사왕(차기 왕)으로 지명한 것이다.

곧바로 명종이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했다.

 

1) 웅장하면서 견고한 병풍석과 난간석의 능침 석물. 2) 강릉의 신로와 어로는 자연과 어우러져 고즈넉하다.

 

하성군 양자로 입양, 그가 곧 선조

 

하성군은 세자교육을 받지 못해 신하들이 인순왕후에게 수렴청정을 청하자 처음에는 사양하다 행했다. 인순왕후는 중종의 양아들이 된 사자(嗣子 · 대를 이을 아들)에게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자신의 친아들 순회세자의 이름을 따라 일(日)자를 쫓아 연( )자로 개명을 시켰다. 즉, 선조가 명종의 아들로 입적한 것이다.

이날 사직동에 있는 덕흥군의 사저에 가서 잡인의 접근을 막고 16세의 하성군을 맞으려 했는데 사군의 친모(정씨)가 사망해 빈소 곁에 있어야 한다는 이유를 들며 사양했다. 그러나 내명(內命)의 중요성을 들어 경복궁 근정전 동뜰을 거쳐 입궁하고 잡인의 출입을 금했다. 하성군이 양자로 입양해 왕위를 이은 것이다.

 

일주일 뒤 하성군이 근정전에서 즉위하니 이가 곧 선조다.

백관이 사배삼고두(四拜三叩頭)하고 산호(山呼 · 임금 취임을 축하해 만세를 세 번 부름)했다.

 

이후 이황 등이 명종의 행장을 수찬한 내용은 남아 있으나, 임란 때 각종 의궤와 함께 실록이 불타 국장 내용은 알 수가 없다. 다만 ‘강릉지’에 일부 내용이 전한다.

 

인순왕후 심씨는 청송 본관의 청릉부원군 심강(沈鋼)의 딸로 1545년 명종 즉위년에 왕비로 책봉됐으며, 1551년 명종과의 사이에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세자가 13세 때 요절하고, 1567년 명종이 먼저 죽자 대비가 돼 16세의 선조를 수렴청정했다. 인순왕후는 선조 8년(1575) 1월 2일에 성의전(聖懿殿)에서 세상을 떴으며 명종의 능에 나란히 쌍릉으로 모셔졌다.

 

상주인 선조에게 큰어머니이자 대비인 인순왕후는 각별했다. 전혀 가능성이 없던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했고, 문정왕후와 달리 1년만 수렴청정하고 왕권을 넘겨주었다. 그래서 선조는 인순왕후의 상례에 많은 공을 들였고, 장례 준비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빈전랑청 등 많은 사람이 파직을 당했다. 능원의 자리도 명종의 강릉을 수산(水山)이니, 건산(乾山)이니 논의하다 금산(金山)이라 하고 지리설을 주장하며 지금의 강릉에 정했다.

 

선조의 감독 아래 어렵게 조영된 강릉은 이름에서 나타나듯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하고 온화하다. 그래서인가. 많은 조선 왕릉의 석물이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코, 갑옷 등이 총상을 입고 훼손됐으나 강릉만은 온전히 보전됐다.

 

강릉은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마련한 동원(同原)쌍릉이다. 태릉과 마찬가지로 병풍석을 두르고, 12칸의 난간석으로 연결돼 있으며,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과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긴 만석이 있다. 혼유석은 왕릉과 왕비릉에 각각 설치했다. 450여 년의 오랜 세월이 흘러 혼유석 상판을 물갈이한 흔적이 자꾸 사라져 신경이 쓰인다.

 

강릉의 정자각은 최근 보수한 태릉의 정자각보다 고풍스러운 느낌이고, 문무석인상의 인상과 형태는 전체적으로 태릉과 유사하다. 임진왜란 직전의 것들로 임란 이전의 능제시설 연구에 가치가 있는 능원이다.

  

3) 임꺽정의 난 등 어려움을 겪은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침은 웅장하게 조영돼 있다. 4)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강릉 어정은 빠른 복원이 요구된다.

 

문인 공간에 세워진 장명등은 조선 초기 건원릉(健元陵)과 헌릉(獻陵)을 본뜬 16세기 복고풍 장명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대(火臺)가 하대석(下臺石)보다 좁아지고 몸체 부분이 길어지는 이러한 형식의 장명등은 할아버지인 성종의 선릉(宣陵)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강릉의 문석인은 전체적으로 보아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크고, 목이 짧아 마치 머리가 양어깨 사이로 파고 들어간 것처럼 조각돼 있다. 석물의 재질이 전단강도가 약한 화강암이어서 목 부분이 가늘면 잘 부러지는 것을 고려해 이렇게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복장은 복두(頭)를 쓰고 관복(官服)을 걸친 문관의 차림을 하고 있다. 두 손에는 홀(笏)을 쥐고 있으며, 태릉과 마찬가지로 강릉의 문석인도 좌우에 따라 손의 위치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태릉을 조각한 작가들이 강릉 조영에도 참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것은 ‘산릉도감의궤’ 등에 참여한 인력이 자세히 기록돼 있어 확인이 가능하다. 그러나 강릉을 비롯해 임란 이전 능원의 의궤는 대부분 소실돼 확인이 어렵다. 매우 아쉬운 일이다.

 

무석인은 왼쪽의 경우 투구와 안면 크기가 엇비슷한 반면, 오른쪽의 무인석은 투구가 작고 턱과 양쪽 볼이 튀어나와 묘한 인상을 준다. 신체 표현에서도 왼쪽 무석인의 경우 팔꿈치에는 구름 문양을, 등과 무릎 부분에는 비늘 문양을 새긴 반면, 오른쪽 무인석은 띠가 생략된 가슴의 전면에 걸쳐 파도 문양을 조각했으며, 양어깨에는 귀면(鬼面)을 새겼다. 화강암 조각의 정교함이 우리 선조의 조각기술에 감탄하게 한다.

 

정자각 왼쪽 앞에 가정자각 터

 

강릉의 진입 공간에 있는 금천교의 장대석은 아래로 배흘림해 구조적으로 튼튼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수라청 터 오른쪽 계류에는 원형의 어정이 있다. 조선 왕릉의 어정 중 몇 개 남지 않은 것이라 복원이 아쉽다.

 

정자각 왼쪽 앞에는 인순왕후 승하 때 사용했으리라 추정되는 가정자각 터가 있다. 조선 왕릉 중 가장 오래된 가정자각 터로 사료된다. 임금이나 왕비 중 어느 한 분이 먼저 승하해 3년이 지나면 길례(吉禮)로 정자각을 만들어 제례를 모시는데, 흉례(凶禮)로 함께 모실 수 없어 만드는 것이 가정자각이다.

명종이 승하한 지 3년이 지나 길례로 모시고 있으므로, 부득이 인순왕후는 흉례로 가정자각에 모셨다가 3년 후 길례로 본정자각에서 함께 모시고 가정자각은 철거했다. 이런 가정자각 터는 목릉의 인목대비 능침 앞에서도 볼 수 있다.

 

태릉에서 강릉을 잇는 계곡과 능선 산책로 변에 자생하는 천연의 굴참나무와 진달래 숲은 수도권에서 보기 드문 생태경관이다.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2010.08.23 751호(p76~78) 주간동아 [신의 정원 조선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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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에서 발간한 [조선 왕릉 답사 수첩] 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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