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198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명릉길(용두동) 475-95
- 통일로, 녹번동, 불광역 사거리, 연신내 사거리 등 어느 곳에서도 진입 가능
- 서대문에서 구파발쪽으로 가다가 녹번 삼거리 ,
연신내 사거리에서 좌회전 서오릉로 진입하면 서오릉 입구 까지 연결
창릉(昌陵) |
예종 능의 곡장 너머로 보이는 안순왕후의 능.
창릉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동원이강릉이다.
사후 ‘우상좌하 남우여좌’의 원칙에 따라 오른쪽에 왕, 왼쪽에 왕비 능이 자리한다.
8대 예종(睿宗, 1450~69)과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1498) 한씨의 능이다.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19세에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불과 14개월의 짧은 재위기간 동안 남이(南怡)의 옥사가 일어나는 등 정치적 격동을 겪었다.
안순왕후 능의 고석에 새겨진 귀면 무늬.
예종 능의 고석에는 귀면 무늬가 아닌 문고리 무늬를 새겼는데, 그 생김새가 진짜 북 모양 같다.
효성이 지극했던 예종은 세조의 승하를 너무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해쳐
세조 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했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1469년 승하했다.
안순왕후는 장순왕후의 뒤를 이어 세자빈이 되었다.
석물의 배치는 <국조오례의>의 예에 따랐으며 왼쪽이 예종릉, 오른쪽이 안순왕후릉이다.
창릉은 대석주의 주두(柱頭)가 둥근 원수(圓首)와 그 아래 둥근받침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예종릉의 고석은 귀면문이 아니라 문고리를 새겨 넣어 그 생김새가 진짜 북과 같은 형상을 한 것이
독특하며, 안순왕후릉 고석에느 귀면문이 새겨 있다.
창릉 - 예종과 안순왕후
王權의 무게가 너무 컸을까 13개월 통치, 19세 요절
세조가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뒤 왕가에는 불행이 끊이질 않았다. 세조와 정희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는 왕위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18세에 요절해 경릉(敬陵)에 묻혔다. 의경세자의 아들이자 세조의 원손인 월산대군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세조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海洋大君)이 왕위를 이어받았으니 그가 바로 조선 제8대 왕인 예종(睿宗, 1450~1469). 그러나 재위 13개월 만에 19세로 요절했다.
예종의 이름은 황(晄), 자는 평보(平甫). 그는 사가에서 해양대군으로 있을 때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의 딸과 결혼했고, 이듬해인 1457년 세자가 됐다. 그러나 세자빈 한씨가 인성대군을 낳고 건강이 악화돼 17세에 죽자 2년 뒤 청주부원군 한백륜의 딸과 다시 결혼했다. 두 번째 왕비가 안순왕후(安順王后, ?~1498)다.
모후 정희왕후가 첫 수렴청정
예종은 ‘성품이 영명과단(英明果斷 · 총명하고 일에 과단성이 있음)하고 공검연묵(恭儉淵默 · 공손하고 겸손하며 속이 깊고 말이 없음)’했다. 또한 서책에 뜻을 두어 날마다 시학자에게 세 번씩 진강하게 하고, 몹시 춥거나 더운 날에도 멈추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병이 위중해져 수강궁(창경궁)으로 옮긴 세조는 예조판서 임원준을 불러 “내가 세자에게 전위하려 하니 모든 일을 준비하라”고 명했다. 정인지 등이 “성상의 병환이 점점 나아가시는데 어찌하여 자리를 내놓으려고 하십니까?” 하자 세조는 “운이 다하면 영웅도 마음대로 못하는데 너희가 나의 하고자 하는 뜻을 어기니,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라고 한 뒤 내시로 하여금 면복을 가져오게 하여 친히 세자에게 내려주었다.
세자는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이고, 백관이 모여 의위(儀衛 · 의식의 장엄함을 더하고자 참열해 호위하는 것)하는 가운데 수강궁 중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날이 1468년 9월 7일로 예종의 나이 18세였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아 그는 섭정과 원상제도로 왕권을 행사했다. 그의 모후 정희왕후가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했는데 정희왕후는 대담하고 결단력이 있어 예종의 유약한 성품을 잘 받쳐주었다. 원상제도는 왕의 미숙한 업무 능력을 보조하기 위해 그가 지명한 원로 중신들이 승정원에 출근, 모든 국정을 상의해 결정하면 왕이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 제도다. 이때 원상으로 지목된 이는 한명회, 신숙주, 구지관 등이었다.
예종이 즉위한 해인 1468년, 태종의 외손이자 세종의 외종질이며 세조와는 외사촌 간으로 28세에 병조판사에 오른 남이 장군이 이를 시기한 유자광, 한명회 등의 계략에 걸려 처형당하는 역모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예종은 훈구세력의 횡포를 막고자 권문세가들의 기득권을 금지하는 분경금지법과 실세들이 세금을 거둬드리는 경저인제도를 폐지했다. 그리고 최항 등이 세조 때 입안한 ‘경국대전’을 찬진했으나 반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병약한 예종은 즉위한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 왕권을 이어받자마자 아버지 세조의 국장을 치렀고, 세조의 뜻을 좇아 할아버지 세종의 능원을 여주로 옮기는 대역사를 지휘했다. 1년에 국장을 두 번이나 치렀으니 예종은 지칠 대로 지쳤을 것이다. 더군다나 형 의경세자의 요절을 지켜봤고, 세조가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백성들의 정서와 단종의 후손들에 의한 복권 기도로 중압감이 컸는지도 모른다.
1) 동원이강형인 창릉은 왕(왼쪽)과 왕비(오른쪽)의 능침이 있는 언덕 가운데에 정자각을 세웠다. 2) 난간석을 두른 예종의 능침. 3) 안순왕후 능침에서 바라본 예종의 능침. 4) 연산군 때 만든 안순왕후 능침의 무석인. 연질의 돌을 쓴 탓인지 부식이 심하다. 그래도 수백 년을 지켜온 늠름한 자태는 우리의 조각기술을 자랑하고 있다.
1년에 국장 두 번 치르고 지쳐 1469년 11월 28일 예종의 병세가 위독하자 승지와 원상 등이 사정전으로 모였다.
그리고 진시(辰時 · 오전 7~9시)에 예종은 자미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신숙주, 노사신이 자미당에 들었다. 이들은 승하를 확인하고 대궐문 안으로 들어와 궁성의 모든 문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태비(정희왕후)에게 “국가의 큰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주상(主喪)은 불가불 일찍 결정해야 한다”고 전한 뒤, 주상자(主喪者)를 정해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기를 청했다. 이에 태비가 강녕전 동북방에 나와 원상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자(제안대군, 당시 4세)는 포대기 속에 있고 월산군(덕종의 장남, 성종의 친형으로 원손이었으나 세조 승하 후 너무 어려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삼촌인 예종에게 왕위를 넘김)은 어려서부터 병약하다. 자을산군(者乙山君·성종)이 비록 어리나 일찍이 세조께서 그의 도량을 칭찬하여 태조에 비했으니 그를 주상(主喪)을 삼는 것이 어떠냐?”
이에 모두 마땅하다 했다.
태비를 비롯해 신하 모두 슬픔에 잠겨 있자 신숙주가 나서서 왕권 계승을 재촉했다. 선왕의 죽음보다 왕권 계승이 중요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예종이 승하한 지 10시간 뒤인 당일 신시(申時 · 오후 3~5시)에 자을산군이 면복을 입고 근정문에서 즉위한 뒤 교서를 발표했다. 이날 대사면이 실시되고 모든 승지와 원상이 대궐 안에서 숙직했다. 졸지에 대비가 된 예종비 안순왕후는 지아비를 잃은 데다 원자인 아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왕권까지 빼앗겼으니 이중의 아픔이었을 것이다. 반면 인수대비는 지아비(의경세자)의 요절로 왕권을 시동생에게 넘겼다가 다시 작은아들을 통해 넘겨받았으니 한을 푼 기쁨이 가득했을 것이다. 이처럼 왕이 승하한 지 1~5일 만에 바로 즉위식을 하는 것은 왕위 계승자가 선왕의 장례를 주관하면서 조정을 안정시키게 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선왕의 상주는 반드시 친아들(장자)이 아닌, 왕권을 물려받은 차기 왕이 맡는다. 따라서 예종의 주상(主喪)은 조카인 성종이며, 능의 조영도 성종이 주관했다.
3개월 뒤 대행대왕의 존시는 ‘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이라 하고 묘호는 ‘예종(睿宗)’, 능호는 ‘창릉(昌陵)’이라 했다. 이때 국장도감은 신숙주 · 서거정, 산릉도감은 예종의 장인이며 우의정인 한백륜과 조문석 등이 맡았다.
그리고 예조에 명해 대행대왕(예종)의 원자(元子)를 왕자(王子)로 고쳐 부르게 했다. 곧이어 대왕대비(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중앙과 지방에 알렸다. 모든 상례는 세조의 예에 따랐다. 장례일(음력 2월 5일) 전라도와 경상도에 흙비(황사)가 내렸다.
그때도 중국에서 황사가 온 것으로 추정된다. 능역의 낮고 이지러진 곳은 보토를 하고, 최소 910기의 사가 무덤을 이장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능선과 숲을 잘 보전했다. 예종 승하 29년 후인 1498년(연산군 4년) 12월 22일 대왕대비(안순왕후)의 건강이 좋지 않자 대조전에서 진연(進宴 · 건강을 위한 잔치)을, 선정전에서 나례(儺禮 · 귀신을 쫓는 제례)를 베풀었으나 다음 날 왕대비는 승하했다. 대행대비의 시호를 안순(安順)으로 했다. 이때 압존(壓尊 · 보다 높은 어른 앞에서 어른의 공대를 줄임)해 칭호를 부를 때, 즉 애책(哀冊 · 애도하는 글, 발인문)에 시호를 쓸 때 정비는 성씨를 붙이나 계비 등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 2010.05.31 739호(p82~84) 주간동아 [신의 정원 조선왕릉]
경릉(敬陵) |
추존 덕종 능은 난간석이나 망주석이 없고, 무석인도 없으며, 석양과 석호도 한 쌍뿐이다.
덕종(의경세자, 1438~57)과 원비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 한씨의 능이다.
의경세자는 세조의 장남으로 1455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20세에 승하하여 대군묘 제도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1471년 둘째 아들인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사후 추존된 덕종 능이 매우 간소한 데 비해
생전에 추존된 소혜왕후의 능은 왕비 능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소혜왕후는 1455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아들 성종이 즉위하자 왕대비(인수대비)가 되었다.
소혜왕후는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어
부녀자들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한 『내훈(內訓)』이란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소혜왕후는 손자 연산군이 생모 윤씨의 폐비 · 사사 사건에 대해 보복하려 하자 이를 꾸짖다가
연산군의 머리에 받힌 얼마 후 승하했다고 한다.
대군묘여서 석물이 간소하게 설치되어 있는 덕종릉은 이후 추존 왕릉으로 조성되는 능의 표본이 되었다.
소혜왕후릉은 12칸의 난간석을 비롯하여 다른 왕릉과 같이 모든 석물들이 갖추어져 있다.
덕종릉과 소혜왕후릉인 경릉은 동원이강의 능제를 따르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우상좌하의 원칙(능자리 기준)에 따라 오른쪽 언덕에 왕, 왼쪽 언덕에 왕비의 능이 있는데,
조선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왕비가 왕보다 더 높은 자리인 우상(右上)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경릉 - 추존왕 덕종과 소혜왕후
왕실 피바람 지켜본 인수대비 우비좌왕의 특이한 형태
경릉(敬陵)은 후에 덕종(德宗)으로 추존된 의경세자(懿敬世子, 1438~1457)와 그의 비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1437~1504)의 능이다. 소혜왕후는 제9대 성종의 어머니로 흔히 인수대비라 부른다. 경릉은 경기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번지 서오릉 지구에 있는데, 서남향의 동원이강형 능이다. 시호는 아버지 세조가 직접 내려 ‘온화하고 성스럽고 착한 것이 의(懿)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경계하는 것을 경(敬)이라 한다’ 했다. 의경세자는 세조의 맏아들로 이름은 장(暲), 자는 원명(原明)이다. 1455년 세조가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면서 왕세자로 책봉됐다. 단종과는 사촌지간으로 나이는 세 살이 더 많았다. 의경세자는 한확의 딸 한씨와 결혼해 월산대군을 낳고, 세자 책봉 후인 1457년 자을산군(성종)을 낳았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스무 살에 요절했다.
세자가 병이 나자 왕실은 환구단(원구단), 종묘, 사직 등에서 기도를 드리며 온갖 정성을 기울였으나 9월 2일 본궁(경복궁) 정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이 된 단종은 다시 노산군으로 강봉돼 영월로 유배되고, 단종 추종세력이 복위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서예를 잘했던 의경세자는 승하 직전 ‘비바람 무정하여 모란꽃이 떨어지고, 섬돌에 펄럭이는 붉은 작약이 주란(朱欄 · 붉은 칠을 한 난간)에 가득 찼네. 명황(明皇)이 촉(蜀 · 중국 삼국시대에 유비가 세운 나라) 땅에 가서 양귀비를 잃고 나니, 빈장(嬪嬙 · 임금의 수청을 들던 궁녀)이야 있었건만 반겨보지 않았네’라는 시를 썼다. 세자를 간호하던 사람들이 이 시를 보고 상서롭지 못하다며 걱정했다. 아버지의 왕위찬탈 과정을 지켜본 세자의 중압감을 표현한 글이라고 했다.
결국 세자가 사망하자 세조는 수차례 묏자리를 물색하게 하고 산형도(山形圖)를 그려 친히 선지를 했다. 양주 대방동, 광주, 과천, 양덕원, 공주 원평, 한강나루, 건원릉 근처, 헌릉 근처, 용인, 교하, 원평, 양근, 풍양도원 등 수많은 곳을 찾았으니 기록상 역대 가장 많은 곳의 상지(相地 · 자리 잡기)였다. 마지막에 오늘날의 고양으로 결정됐다.
세조가 묏자리 물색 후 직접 전작 1457년 10월 24일 세조는 세자의 조묘도감(왕릉을 조성하는 기관은 ‘산릉도감’이라 하고, 세자와 왕세자비 등의 능은 조묘도감에서 조영한다)에 “석실 및 석상·장명등·잡상은 세자 묘 형식을 따르고, 사대석 · 삼면석 · 석난간 · 삼개석은 설치하지 말라”는 전지를 내렸다. 같은 날 단종은 사사돼 시신이 동강에 버려졌으나 엄흥도가 이를 몰래 수습해 매장했다.
단종의 장릉과 의경세자의 경릉, 두 능의 입지와 규모, 석물은 비교될 수밖에 없다. 폐위된 단종의 무덤은 유배지에 초라하게 마련됐고,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의경세자는 부왕이 진두지휘하는 가운데 수도권에 거대하게 조영됐다. 이런 상황을 하늘에 있는 할아버지인 세종은 알고 있었을까.
2)추존왕 덕종의 능침. 사실상 조선시대 최초로 조영된 세자의 묘다.
단종이 죽은 다음 날 세조는 노산군과 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 아들로 단종 복위를 시도함)의 자손을 종친에서 삭제했다. 의경세자에 대해서는 부왕이 직접 전작(奠爵 · 헌관이 주는 술잔을 신위 앞에 드리는 일을 가리킴)을 했다. 최고의 예우이며, 사실상 조선시대 최초로 조성된 세자의 묘(園, 원)다. 조선시대에는 왕이나 왕비의 능침은 능(陵)이라 하고 세자나 세자빈, 왕의 사친의 무덤은 원(園)이라 했다.
세조는 조묘도감에 어찰을 내려 “무덤 안은 마땅히 후하게 하고, 무덤 밖의 석물은 간소하게 하라”고 했다. “백성을 번거롭게 하고, 죽은 자에게는 유익할 것이 없다”는 세조의 능역 간소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현궁 안은 충분한 예우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필자가 조선시대 능역을 측량한 결과, 경릉이 석물의 수는 적으나 조각이 정교하고 봉분의 지름도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 실로 그 내부가 궁금하다.
국제학술대회 때도 외국 학자들이 조선 왕릉의 내부에 많은 관심을 가졌듯이, 당시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 조묘도감 의궤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임진왜란 때 소실돼 더욱 궁금증을 자아낸다. 실록의 내용을 토대로 내부를 추정해보면 현궁은 북쪽으로 머리를 하고 가운데에 있으며 애책(哀冊 · 죽음을 애도해 쓴 글)을 서쪽, 증옥(贈玉 · 죽은 사람의 무덤에 함께 묻던 옥돌)과 증백함(贈帛函 · 비단 선물함)을 남쪽에 두고 그 옆에 명기(明器 · 그릇 등 도기)와 복완(服玩 · 일상 집기와 애장품)을 나열했다. 나머지 것은 문비석(門扉石 · 남문의 문짝) 밖의 편방(便方)에 넣었다. 지석(誌石)은 남쪽 봉분과 석상 사이 북쪽에 묻었다 한다. 이곳은 1471년 의경세자가 둘째 아들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되면서 능호를 경릉이라 했다.
인수대비와 손자 연산군의 악연 소혜왕후는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이 왕위(성종)에 오르면서 인수대비로 책봉됐다. 인수대비는 청주의 세가 출신으로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 자문했으며, 경전의 불경을 언해하고 부녀자의 도리인 ‘내훈’을 간행하기도 했다.
인수대비는 1504년, 덕종이 승하하고 47년이 지나 손자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 되던 해 한여름 창경궁 경춘전에서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가 사약 받은 사건에 연관된 사람들을 숙청하려 하자 인수대비는 이를 꾸짖다가 연산군의 머리에 받혀 사망했다고 한다. 인수대비가 승하한 뒤 연산군은 “대행대비께서 조정에 임하신 지 오래이나 나라에 이렇다 하게 한 일이 없으며 다만 자친(慈親)으로 섬겼을 뿐이니, 의경세자보다는 높게 하고 안순왕후(예종의 계비, 인수대비의 손아래 동서)보다는 좀 낮추어 세자빈의 예를 따르라”고 했다.
대행대비의 시호는 소혜(昭惠), 휘호는 휘숙명의(徽肅明懿)로 결정했다. 할머니 소혜왕후를 머리로 들이받아 사망케 한 연산군이 능원을 조성했으니 정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왕과 왕비의 발인은 원래 5개월과 3개월 중 논의를 거쳐 결정하나, 연산군은 62일을 제안했다. 신하들이 “천자는 7개월이 돼야 방궤(方軌·여러 수레)가 다 이르고, 제후는 5개월이 돼야 동맹이 다 이르게 된다”고 했으나 연산군은 결국 27일로 장례기간을 단축했다. 이때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시호를 제헌왕후(齊獻王后), 능호를 회릉(懷陵)으로 하여 정성 들여 능의 격식에 따라 추숭(追崇)을 하고 있었다. 소혜왕후의 상기를 단축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연산군은 의금부를 시켜 어머니의 폐비에 앞장서고 사약을 내리는 데 관여한 한명회의 묘를 파헤쳐 머리를 잘라 청주 저잣거리에 효수하게 했다.
신장 크고 당당한 문인석이 특징
연산군은 세조가 의경세자의 묏자리를 잡으면서 세자빈에게 “이곳은 능소가 아름다워 너 역시 만세 뒤 이곳에 장사 지내질 것이다”라 했고, 대비도 “평생 세조의 말씀을 들어 경릉 곁에 묻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며 공조판서 임사홍을 경릉에 보내 살펴보게 했다. 임사홍이 “백호에 계좌정향의 간산(艮山)”이라고 추천해 결국 이곳으로 정했다. 또한 연산군은 성복(초상이 나서 처음 상복을 입음)에 대해 인수대비는 할머니일 뿐 국모였던 적이 없으니 예종의 비 안순왕후의 예대로 할 수 없다며 성복을 거부하다, 우의정 허침(許琛)이 주나라의 예를 들며 청하자 부득이 성복을 했다. 발인 때도 당일 지송(祗送 · 백관이 임금의 거가를 공경해 보냄)을 하지 않고 전날 백관을 거느리고 조전(祖奠 · 발인 전에 영결을 고하는 제사의식)을 행했다. 발인 날 백관과 유생, 노인들도 모화관 앞에서 지송하게 했다. 이는 법도에 없는 일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인수대비의 능침 조영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인수대비 능침의 석물은 조각의 질이 떨어지고 석질이 무르다. 또한 우왕좌비의 원칙을 벗어나 우비좌왕의 특이한 형태다.
좌측 능선에 있는 덕종의 능침은 난간석이나 망주석이 없고, 석양과 석호도 2쌍이 아닌 1쌍만 있다. 이는 덕종이 세자로 있을 때 승하했기 때문이다.
성종은 아버지를 덕종으로 추존하고 능역도 왕릉의 형식으로 재조성하려 했으나, 인수대비가 선왕 세조의 유시에 따라 검소하게 할 것을 명해 석물을 더 세우지 않고 간소화했다. 덕종의 능침에는 문인석만 있는데 조각의 머리 부분이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할 만큼 크고, 신장이 매우 커서 당당해 보이는 게 특징이다. 전면의 관대에는 문양이 없고 뒷면 관대도 4각 외형만 5개 있다. 요대 역시 문양 없이 좌에서 우로 사선형을 이룬다. 덕종 능침의 팔각 장명등은 조선 초기의 형태로 규모가 크고, 장명등 옥개석 아래의 처마 밑 처리가 한옥의 다포 양식으로 돼 있어 당시의 처마 모습을 볼 수 있다.
우측의 소혜왕후 능침은 덕종의 능침과 달리 난간석이 있다. 석양과 석호 등의 동물상도 각각 2쌍이 있으며, 문석인과 무석인까지 모두 갖춰 다른 왕릉의 석물 배치와 다를 바가 없다. 단, 문석인과 무석인은 마모가 심하다. 무석인은 체구에 비해 손이 크고 우람하며 흉갑의 문양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 연산군이 서둘러 조영한 탓으로 보인다. 왼쪽의 청룡 언덕 너머 입구에 있는 재실 터는 ‘경릉지’ 등에 현장 그림이 있어 복원이 가능하다. 제향공간의 중간에는 정자각이 하나 있다. 경릉은 전위공간이 넓어 마치 골프장의 잔디 곡선처럼 아름답다. 정자각 전면에는 왼편에 수복방 세 칸이 있으며, 좌측의 수라청은 소실됐다.
덕종과 소혜왕후 사이의 둘째인 성종의 능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산131번지에 있으며 능호는 선릉(宣陵)이다.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 2010.05.24. 738호(p80~82) 주간동아 [신의 정원 조선왕릉]
명릉(明陵)
정자각 뒤로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의 쌍릉이 보인다.
명릉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 세 분을 모셨는데,
숙종과 인현왕후는 쌍릉으로, 인원왕후는 단릉으로 조영하여,
쌍릉과 단릉이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형식의 동원이강릉이 되었다.
조선 19대 숙종(1661~1720)과
제1계비 인현왕후(1667~1700) 민씨, 제2계비 인원왕후(1687~1757) 김씨의 능이다.
숙종 시기에는 조선 정치사상 정치세력의 기복이 가장 심하고 붕당정치의 정쟁이 격심했지만,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체제 전반을 복구 · 정비하는 작업을 거의 완료하는 치적을 남겼다.
명릉 수복방 주초 너머로 보이는 정자각.
인원왕후는 미리 잡아놓은 곳에 능을 조성할 경우 정자각을 새로 지어야 하는 등
막대한 국고 소요가 예상되어, 숙종과 인현왕후 능의 오른쪽 언덕에 단릉으로 조영하였다.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는 서오릉 안에 있는 익릉에 따로 안장되어 있다.
숙종은 경종을 낳은 장희빈과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 등을 후궁으로 두었다.
인현왕후는 1681년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희빈 장씨의 무고로 폐위되었다가 갑술환국 때 복위되었으나 숙종 26년 원인 모를 병으로 승하했다.
제2계비 인원왕후는 1702년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757년 승하했다.
조선 능제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명릉은 숙종의 명에 의해 간소화한 능 조영제도를 따르고 있다.
그래서 부장품의 수량도 줄이고 석물의 크기도 실물 크기로 하여 다소 왜소해 보인다.
건원릉 이후의 장명등이 팔각지붕이던 것을 사각 지붕으로 바꾼 것이 특이하다.
정자각 뒤쪽의 언덕 위의 쌍릉이 숙종과 인현왕후릉이고, 왕릉 뒤 왼쪽으로 인원왕후릉이다.
비각에는 두 개의 비석이 각각 문을 달리하여 세워져 있는데 왼쪽은 숙종과 인현왕후,
오른쪽은 인원왕후의 비로 모두 명릉이란 한 이름으로 조성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숙종은 인현왕후가 승하하여 명릉에 장사지낼 때 왕비를 오른쪽(정면에서 보아 왼쪽)을 비워놓아
쌍릉으로 조성하고 정자각을 중간에 위치하게 했다.
인원왕후는 생전에 숙종 곁에 묻히기를 소원해서 숙종의 능에서 400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영조가 인원왕후의 능을 조성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별도의 능호없이 한 정자각의 봉사를 받게 했다.
그래서 나타난 현상이 합장릉, 쌍릉, 삼연릉의 경우 모두 오른쪽에 왕릉을 두고 있는데
서열이 맨 끝인 제2계비 인원왕후가 가장 높은 자리인 오른쪽을 차지하고 있는 형태이다.
단릉인 인원왕후릉도 난간석의 무늬만 조금 다를 뿐, 나머지 상설은 모두 숙종릉과 같다.
목릉 - 선조, 의인왕후와 계비 인목왕후
임진왜란에 상처 난 王權 능침 조성으로 만회하려 했나
조선의 제14대 임금 선조(1552~1608, 재위 1567. 7~1608. 2)와 원비 의인왕후(懿仁王后, 1555~1600) 나주 박씨,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 연안 김씨가 묻힌 목릉(穆陵)은 하나의 동원에 3개의 능침이 있는 동원삼강릉(同原三岡陵) 형태로 조영됐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3개의 언덕에 곡장이 둘러쳐진 능이 조성된 것은, 다른 능에서는 볼 수 없는 목릉만의 형식이다.
목릉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東九陵)에서 가장 깊숙한 곳인 건원릉의 동편 언덕에 자리했다. 왼쪽 정자각 바로 뒤쪽으로 보이는 것이 선조의 능침이고 그 오른쪽이 의인왕후, 비각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것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신로와 어로는 곡선형을 이루었다. 명종이 승하했으나 그를 이을 적손(嫡孫)이 없자,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군의 아들 하성군이 명종의 양자로 입적돼 왕에 즉위했는데 그가 선조다.
선조는 명종 7년(1552) 11월 11일 인달방(仁達坊) 덕흥군 사저에서 태어났다. 선조는 서손(庶孫) 출신으로 방계승통을 한 최초의 임금이다. 하성군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기백과 도량이 영특해 모두 비범하게 여겼다. 어느 날 명종이 하성군과 그의 두 형을 불러들여 자신이 쓰고 있던 익선관(冠)을 써보라 했다. 이때 하성군이 “군왕께서 쓰시던 것을 신자(臣子)가 어떻게 감히 머리에 얹어 쓸 수 있겠습니까”라며 사양하니 명종이 경탄하면서 “마땅히 이 관을 네게 주겠다”고 했다. 또 명종은 “임금과 아버지 중 누가 더 중하냐”고 묻고는 글로 답하라 했는데 하성군이 “임금과 아버지는 똑같은 것이 아니지만 충(忠)과 효(孝)는 본래 하나입니다”라고 하자 매우 기특해했다.
덕흥군과 하동군부인 정씨의 3남으로 태어난 하성군이 졸지에 왕위에 오른 것은 그의 나이 16세 때라 명종비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그러나 1년 뒤부터 친정을 했으니 조선 왕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시작한 것이다.
세자교육을 받지 않은 선조는 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난세에 나타난 성군이랄까? 성리학적 왕도정치를 구현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인격이 훌륭하고 덕망이 높은 이황, 이이, 정철, 이덕형, 이항복 등 많은 인재를 등용해 사림이 중앙정치 무대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정국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림 내부의 분열로 동인과 서인의 붕당 간 대립이 심해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 인적 손실이 막대했을 뿐 아니라 황폐화한 국토, 문화적 손실 등의 상처가 오래도록 아물지 못하고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는 반성부원군 나주 박씨 박응순의 딸로 15세에 왕비에 책봉됐다. 1569년 어린 왕 선조가 친정할 때 이루어진 결혼이다. 착하고 어진 왕비로 알려져 있던 의인왕후는 1600년 6월 27일 임시 궁궐인 월산대군의 집에서 승하했다. 선조는 임란 때 피해를 본 선릉과 정릉 그리고 자신의 친아버지 덕흥대원군(大院君·왕이 자손 없이 죽어 종친 중에서 왕위를 계승했을 때 그 왕의 생부에게 봉하던 직위, 최초의 대원군임)의 산소까지 참변을 당해 부랴부랴 개수했는데 그 직후 의인왕후가 승하해 황망해했다. 전란으로 국력은 약해지고 능역을 조영하는 산릉도감의 인력 확보도 어려웠던 터라 조정에서는 선릉 개수에 쓰려던 지석을 그대로 써 민력을 덜기도 했다.
“길지 찾아라!” 어명에도 4개월간 논란
이때 선조는 자신도 의인왕후와 함께 묻히고자 쌍분의 수릉(壽陵)을 만들려 했다. 선조 승하 8년 전의 일이다. 선조는 마침 왜란으로 폐허가 된 도성을 재건하고자 불러들였던 명나라의 풍수가인 섭정국(葉靖國) 등을 동원, 고양 · 파주를 비롯해 여러 터를 물색했다. 중추부사 이덕형, 영의정 이항복 등 많은 논객과 청오경, 금낭경, 칠요구성법, 지리신서, 정혈법, 호신순의 책 등을 보며 여러 차례 논의했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수개월 동안 우왕좌왕했다. 선조의 우유부단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심지어 포천과 교하 두 곳을 결정하고 5000여 명을 동원, 40일 동안 작업을 하다가 다시 터를 물색하게 한 일도 있었다. 전란이 끝난 뒤라 국고는 바닥이 났고 신하들은 자기 살길 마련에 바빠, 왕권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왕이 길지를 찾으라고 수차례 지시를 내렸으나 사대부마저 자신들의 선영을 선뜻 내놓지 않았다.
이처럼 4개월 동안 논란만 계속되자 이항복 등은 우리나라의 왕릉 인산(因山) 법도는 중국이나 사대부의 법도와 달라 “형세와 향배가 필수적일 뿐 아니라, 혈도가 광활해 석물을 놓을 수 있어야 하며, 명당이 넓게 있어야 하고, 제궁을 지을 수 있으며, 청룡과 백호가 분명하고, 마주보는 산이 법대로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미 200여 년 전 조성된 태조 건원릉이 있는 검암산을 지목하며 “이곳은 태조께서 무학과 함께 대대로 왕릉을 쓸 수 있는 곳으로 평가받았다”고 추천했다. 의인왕후 승하 5개월 만에 결정된 것이다. 결국 건원릉 동측 세 번째 언덕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안장하고 유릉(裕陵)이라 했다. 5개월의 국장 기간을 넘기고 승하 6개월 만에 안장했으나 이곳은 지금까지도 풍수가 사이에 길지냐 흉지냐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선조는 의인왕후 승하 후인 1602년 방년 19세인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을 계비(인목왕후)로 맞이했다. 그리고 55세인 1606년에 늦둥이 영창대군을 얻어 총애했다. 그러자 영창대군을 세자로 교체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당시는 이미 선조의 둘째 아들 광해군(공빈 김씨 소생)이 임진왜란 때의 공을 인정받아 세자로 책봉된 상태였다.
1608년 2월 1일 선조가 정릉동 행궁에서 점심에 찹쌀밥을 먹고 기(氣)가 막혀 급작스럽게 승하했다. 이때 어의는 허준(許浚)이었으나 손쓸 수가 없었다. 다음 날 33세인 세자 광해군이 곧바로 즉위해 상례를 주도했다.
광해군은 선조가 의인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했던 자리를 무시하고 이항복, 이원익, 이덕형 등과 논의 끝에 건원릉 서측 다섯 번째 능선에 모셨다. 현 경릉(景陵) 터로 추정된다. 선조의 휘호를 현문의무성경달효(顯文毅武聖敬達孝)로 올리고 묘호를 선종(宣宗), 능호를 목릉이라 했다. 후에 인조 때 선종은 선조로 묘호를 바꿨다.
이후 부실공사에 풍수적 논란까지 일자, 인조반정 후 인조가 직접 행차해 1630년 11월 21일 의인왕후 능침 좌측으로 천장했다. 건원릉 지역은 세조가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이후 꺼리던 자리였다. 선조의 능침을 이곳으로 선정한 것은 최초의 방계혈통으로 왕위에 올라 사림의 왕권 도전을 뿌리친 선조의 혈통이 태조의 음덕을 받아 길이 왕조의 발전을 기원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던 세력인 소북파는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에 의해 쫓겨났다. 영창대군은 강화로 쫓겨나 사사되고 인목대비는 폐서인돼 유폐됐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호돼 대왕대비로서 인조의 후견인 노릇을 했다. 인목대비는 어려서 총명하고 왕비가 돼서는 인자했으며 검소하고 글씨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인조 10년(1632) 6월 28일 인목대비 김씨가 인경궁(仁慶宮)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했다.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인목대비가 승하하자 인조는 정성을 다해 모셨다. 묘호는 인목으로 하고 능호를 혜릉(惠陵)이라 했다. 선조의 목릉은 이미 2년 전 의인왕후 오른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선조의 능침 오른쪽이 인목왕후 능침으로 추천되나, 우상좌하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해 의인왕후 능침의 왼쪽 두 번째 언덕으로 결정했다. 정자각은 그대로 두고 신로로 연결했으며 세 능침의 능호를 목릉으로 통일했다. 이때 산릉 책임자는 한음 이덕형이었다.
3) 드넓은 잔디정원을 가지고 있는 목릉. 정자각 뒤가 선조의 능침, 왼쪽이 의인왕후, 오른쪽이 인목왕후 능침이다. 의인왕후와 인목왕후의 능침은 숲으로 가려 서로 보이지 않게 했다. 4) 눈을 감고 입을 꼭 다문 문석인. 임란을 거치면서 할 말을 잃었을까, 아니면 말하기 싫어서일까.
잔디정원이 가장 넓은 왕릉
선조의 능침에는 다른 두 왕비 능침에는 보이지 않는 병풍석이 둘러쳐 있다. 병풍석 대석과 장명등 대석에 새겨진 연화와 모란의 꽃문양이 독특하다. 이것은 이후에 조성되는 왕릉 석물의 문양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말기까지 계속 사용됐다. 의인왕후 박씨 능침의 상설제도는 병풍석이 설치돼 있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선조의 것과 같다. 능선이 길지 않은 단유형(短乳形)이며, 선조의 능침보다 폭이 좁다. 석물은 조형미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왜란을 겪은 뒤여서 뛰어난 장인을 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왕후 김씨의 능침 역시 의인왕후의 것과 같은 형식을 따르지만 좀 더 숙련된 솜씨로 만든 듯하며, 전체적으로 생동감이 있다. 인조의 정성이 담긴 것이다. 그러나 문무석인의 허리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비율이 2대 1 정도로 상하의 균형이 맞지 않아 다소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인목왕후의 능침 아래에는 흉례로 모시는 가정자각 터가 그대로 남아 있어 보존 가치가 있다. 목릉에서 의인왕후의 능침은 남편 선조가, 선조의 능침은 광해군이, 인목대비의 능침은 인조가 감독한 것이므로 시대별 조영의 특징을 비교할 수 있다.
2007년 겨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국제학술대회 참가 학자들은 이곳 건원릉과 목릉을 답사했다. 필자는 목릉을 “조선 왕릉 중 가장 자연친화적이며, 중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우상좌하로 능침을 배치했음을 설명했다.
같은 유교 국가였던 중국, 베트남 등은 가운데 왕, 양쪽에 정비와 계비를 배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조선의 왕릉은 우측에 왕의 능침, 좌측에 정비와 계비의 능침을 순서로 배치했다. 이러한 특징은 동구릉 지구의 목릉과 경릉(景陵)에서 잘 나타난다. 이 우상좌하의 제도는 세종대왕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대왕이 우리만의 독특하고 우수한 문화 창달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또 목릉은 인류사의 많은 왕릉 중 잔디정원이 가장 넓은 왕릉이라 설명했다.
그리고 정자각 뒤 신로는 가장 길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조영된 것이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의인왕후의 능침과 인목왕후의 능침은 숲으로 가려 서로 보이지 않게 하고, 선조의 능침에서는 두 왕비의 능침을 마주보게 한 것이 특이하고 흥미롭다. 정비와 계비 사이를 고려한 후손들의 심리적 배려가 돋보인다. 세계 유산의 보존과 관리는 진정성이 요구된다. 조선 왕릉은 많은 기록물의 진정성 확보에 큰 도움이 됐다. 특히 상례를 자세히 기록한 각종 의궤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임란으로 많은 기록물이 소실돼 현재 남아 있는 도감은 의인왕후의 상례를 기록한 의궤가 최초의 것으로 왕릉 연구와 관리에 도움이 되고 있다.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 2010.08.30 752호(p76~78) 주간동아 [신의 정원 조선왕릉]
익릉(翼陵)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가는 참도가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다.
왕릉의 봉분이 자리한 높은 언덕을 ‘강(岡)’이라 하는데,
풍수에서는 땅속에 흐르는 생기를 많이 받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고,
일반 무덤과는 다른 절대 왕권을 상징하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조선 19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仁敬王后, 1661~80) 김씨의 능이다.
인경왕후는 1670년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20세 때 천연두를 앓다가 승하했다.
슬하에 공주 셋을 낳았으나 명선, 명혜, 명안공주 모두 오래 살지 못했다.
1680년 10월 26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춘추 20세로 승하하여 이듬해 2월 22일 이곳에 모셨다.
서오릉의 능들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익릉은
숙종의 명에 따라 간소하게 조성되었으나 숭릉의 양식을 따랐다.
정자각으로 가는 참도가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장명등과 망주석을 두르는 면에 꽃무늬를 새겨넣었고,
망주석에는 구멍 대신 상행(上行), 하행(下行)하는 모습의 세호(細虎)를 새겨놓았다.
홍릉(弘陵) |
영조 원비인 정성왕후 능 옆의 빈자리는 영조가 묻힐 곳이었다.
그러나 영조가 사후 동구릉에 자리한 계비 정순왕후 옆에 안장됨에 따라
홍릉의 자리는 빈 터로 남게 되었다.
조선 21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貞聖王后, 1692~1757) 서씨의 능이다.
정성왕후는 1704년 숙종의 둘째 아들 연잉군과 혼인했고,
병약하고 후사가 없던 경종의 뒤를 이어 연잉군이 영조로 등극하자 왕비에 올랐다.
홍릉은 정성왕후의 단릉이지만, 영조가 훗날 정성왕후 오른쪽에 자신도 묻히고자
자리를 잡아놓았기에 상설 제도도 쌍릉 형식에 맞추었다.
늘 미소 띤 얼굴로 맞아주고, 윗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생모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시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고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영조가 정성황후 오른쪽에 자신의 자리로 잡아놓으면서(우허제, 右虛制) 조성하였기 때문에
석물도 쌍릉의 형식에 맞춰 배치해 놓은 형태이다.
영조가 승하하자 정조는 영조의 능을 완전한 길지라고 주장하는 지금의 원릉 자리(동구릉)에
정했기 때문에 정성왕후의 홍릉은 이처럼 한 쪽이 빈 채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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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에서 발간한 [조선 왕릉 답사 수첩] 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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