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조선왕릉의 비밀] ① 공순영릉(恭陵, 順陵, 永陵)

Gijuzzang Dream 2009. 9. 7. 11:25

 

 

 

 


사적 제205호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4-1

 


 

<공순영릉 가는길>
구파발 → 벽제 → 장곡검문소 → 파주농협 하나로 클럽
→ 송촌 토파즈 아파트 앞 버스정류장(공릉입구)에서 우회전 후 직진 → 파주삼릉

 

 

 

 

 


 

 

 

 

 

 

 공릉(恭陵)

 


 


조선 8대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章順王后, 1445~61) 한씨의 능이다.

장순왕후는 한명회의 셋째 딸이다. 세조 때 한명회는 영의정까지 오르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병약한 세자(덕종)가 죽고 세조의 둘째 아들(예종)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한명회는 1460년 그의 딸을 세자빈의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그의 딸은 다음해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을 앓다가 17세 어린 나이로 승하했다.

장순왕후에 이어 예종도 짧은 재위기간을 마감하고 요절했다.


 

장순왕후는 아름답고 정숙하여 세자빈으로 간택된 뒤 시아버지인 세조에게 사랑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세조는 왕세자빈에게 장순(章順)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470년(성종 1) 능호를 공릉이라 했고, 1472년 장순왕후로 추존되었다.

 

 

 

 

공릉은 처음에 세자빈묘로 조성되어 봉분의 난간석과 병풍석이 생략되었고

석호, 석양 각 2기씩만 능을 보호하고 있다.

봉분 앞에 혼유석과 장명등이 있으며, 양쪽 끝에 석마와 문인석이 서 있다.

문인석은 홀을 쥔 손이나 몸에 비해 큰 얼굴, 옷주름 등이 조선 초기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공릉 - 장순왕후

 

 한명회 셋째 딸로 살다 못다 핀 꽃, 세조의 큰며느리로 죽다

 

 

(왼쪽)곡장으로 둘러싸인 능침. (오른쪽)공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을 가리켜 파주 삼릉이라 한다.

 

공릉은 조선 제8대 왕 예종(睿宗, 1450~1469)의 비 장순왕후(章順王后, 1445~1461) 한씨를 모신 곳이고,

순릉은 제9대 왕 성종(成宗)의 비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를 모신 곳이다.

 

영릉은 제21대 영조(英祖)의 맏아들로 세자로 책봉됐다가 일찍 승하한 진종(眞宗, 추존)과 그 비(妃)를 모신 곳이다.

 

 이 중 단릉인 공릉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산4-1에 술좌진향(戌坐辰向)으로 앉아 있다. 북서 방향에 자리 잡고 남동향을 바라보는 형태다.

 

연성대군 낳고 산후병으로 16세에 요절

 

장순왕후는 당대 최고의 처세가이자 책략가인 상당부원군 영의정 한명회와 부인 민씨의 셋째 딸이다. 부군인 해양대군(예종)은 1457년(세조 3) 겨울, 형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9세에 세자가 되었다.

 

해양대군의 세자 책봉에 적극적인 사람은 한명회였다.

3년 뒤 세자의 배필을 정할 때 허삼, 손선충 등은 딸을 숨겨놓아 조정에서 문책을 당하기도 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거부이자, 왕세자비라는 중책을 회피하기 위한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이듬해 봄 병조판서이던 한명회의 딸(장순왕후)이 15세에 세자빈에 책봉됐다. 이때 해양대군은 11세였다.

 

세자빈 책봉 때 세조와 왕후가 친히 광화문에서 맞이하고 근정전에 나아가 한씨를 왕세자빈으로 책봉했다. 세조의 책문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대 한씨는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 온유하고 아름답고 정숙해 종묘의 제사를 도울 만하다. 효령대군 보(補)와 우의정 이인손 등을 보내 그대에게 책보를 주어 왕세자빈으로 삼는다. 그대는 지아비를 공경하고, 서로 도와서 궁중의 법도를 어기지 말고 왕업을 융성케 하라. 만 가지 교화가 시작되고 만 가지 복의 근원이 그대 한 몸에 매였으니 공경하지 아니할 수 있는가?”

 

이때 세자빈 집에는 면포 500필, 쌀 200석, 황두 100석을 내려주었다.

 

왕세자가 신부 집으로 가서 신부를 맞는 친영의(親迎儀) 때 서로 여덟 번 절하여(八拜禮) 이성 간에 결연의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왕궁을 향해 세자가 앞서고, 세자빈이 가마에 오르고 내릴 때 가마의 발을 세자가 친히 거두게 했다.

또한 동향에서 서향하여 선 신랑과 서향에서 동향하여 선 신부가 첫날밤 교배(交拜 · 절을 주고받는 예)를 마치고 술과 찬(饌 · 음식)을 나눈 뒤 신방에 드는 의식인 동뢰연(同牢宴)이 열렸다. 이때 술은 금으로 만든 잔에 두 번 마시고, 나중에 근(작은 표주박을 둘로 쪼개 만든 잔)에 합잔을 해 세 번에 걸쳐 마신 뒤 두 번 절하고 합방을 한다.

 

이튿날 시집온 세자빈이 아침 일찍 시부모를 뵙는 조현례(朝見禮)를 행한다. 이때 세자빈은 왕과 왕비에게 조율(棗栗 · 대추와 밤)을 드리고 네 번 절한다. 혼례 3일째에 세자빈은 왕궁으로 시집와서 처음 왕과 왕비에게 어선(御膳 · 상 차리는 예)을 드리는 관궤례(饋禮)를 한다. 또한 왕세자와 세자빈이 세자빈 집으로 가서 빈의 부모에게 인사하는 회문례(回門禮)를 한다. 이해 8월 한명회는 황해·평안도관찰사로 발령 나서 왕세자가 모화관에서 전별잔치를 베풀었다.

 

세자빈으로 책봉된 지 1년 7개월 만인 세조 7년(1461) 11월 30일 밤, 세자빈이 원손(인성대군)을 낳으니 세조가 기뻐서 한명회에게 “천하의 일 가운데 무엇이 오늘의 경사보다 더하겠는가?”라며 술을 올리게 하고, 밤새워 원자와 산모의 건강을 기원했다.

그러나 닷새 뒤인 1461년 12월 5일 왕세자빈이 관저에서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열여섯 꽃다운 나이였다. 어렵게 얻은 인성대군도 세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능침에서 본 공릉 전경.

 

계유정난과 단종의 폐위 사건 등 어렵게 정권을 잡은 세조는 두 살 위의 지략가 한명회를 국정운영 파트너로 삼았다.

 

한명회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한상질의 손자이며 한기의 아들이었으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과거시험의 운도 없어 세월을 보내다가 문음제도(공신의 자손은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에 따라 문종 2년(1452) 37세의 늦은 나이로 개성에 있는 경덕궁 관리직에 올랐다.

권람의 추천으로 수양의 책사가 된 한명회는 1453년 계유정난 때 무사 홍달손을 이용해 정적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세조가 등극하면서 정권의 핵심에서 13년간 좌부승지·도승지·이조판서 · 병조판서 · 관찰사 · 우의정 · 좌의정 · 영의정 등을 거치며 조정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한명회는 해양대군(후에 예종)과 첫째(셋째라고도 함) 딸 한씨(장순왕후)를 혼인시켰다. 또한 1467년 영의정으로 있을 때 넷째 딸(공혜왕후)을 덕종(세조의 큰아들)의 둘째아들 자을산군(후에 성종)과 혼인시켜 겹사돈이 되면서 권력을 이어갔다.

즉 한명회는 열한 살 터울의 두 딸을 왕비로 만들어 세조와는 정치적 동반자이면서 예종, 성종 두 대에 걸쳐 왕의 장인으로 네 번이나 일등공신에 추대되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세조가 시호 내리고 장례 주관

 

시아버지의 사랑, 친정아버지의 후광을 받고도 요절한 장순왕후에 대해 세조와 한명회는 얼마나 애석했을까.

이러한 애틋함으로 세조는 온순하고 아름답고 어질며 자애롭다는 뜻의 장순(章順)이란 시호를 내리고 세자빈 묘를 조성했다.

 

그러나 예종도 왕이 된 지 13개월 만에 서거하고 조카인 성종이 왕위를 잇자, 1470년 시어머니인 대왕대비(세조의 비 정희왕후)는 장순왕후의 능호를 공릉이라 추숭했다. 이때 성종의 어머니이며 의경세자의 부인인 수빈 한씨는 인수왕비로 추숭하고, 의경세자는 의경왕으로 추존하며 능호를 의경릉 또는 경릉(敬陵)이라 했다.

이는 딸에 대한 한명회의 애정과 권력욕에서 나온 지략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유교에서 일부일처(1제 1후)의 원칙을 내세워 세자빈이었던 장순왕후를 정비로 추숭하고, 뒤에 왕비가 된 안순왕후는 계비가 됐다.

 

예조에서 공릉과 경릉의 존호를 높이고 의물인 석물을 갖춰야 한다고 올리니, 정희왕후는 “신도는 고요함을 숭상하는데 두 능이 오래돼 동요시킬 필요가 없으니 잡물을 가설치 못한다”고 명했다.

 

큰며느리 장순왕후의 장례를 주관한 세조는 자신의 형수이며 문종의 세자빈이었던 단종의 모친 현덕빈의 예에 따라 상례를 치르게 했다. 성빈(成殯 · 빈소를 차림)은 한명회의 뜻에 따라 관저에서 이루어졌다. 5일간 왕과 왕비는 조회와 저자를 정지했다. 겨울이라 구의(柩衣)를 하나 더하려 하니 세조가 “공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속히 썩게 하는 것이 좋다”라며 못하게 했다. 석곽 만드는 것도 경계하고, 사치하는 것은 “진나라 목공(穆公)이 순장(殉葬·장례 때 하인 등을 생매장함)하고 진시황이 은으로 하수(河水·진시황 능에 수은으로 강물을 만들어 넣었다는 고사)를 만든 뒤에야 만족할 것”이라며 역시 금지했다. 세조는 강회백 모친의 무덤이었던 파주 조리면 박달산 지맥의 보시동(普施洞)에 세자빈 터를 잡아 안장했다.

 

공릉은 그리 높지 않은 용맥이 능역을 감싸는 온화한 지형으로 북 · 동·서쪽이 능선으로 담을 쌓고 있어 북서풍을 막아주며, 남서쪽이 약간 열린 형국이다. 임진강에서 올라오는 참게가 능역의 개울에서 목격된다고 하니, 수도권에 있는 맑고 깨끗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① 공릉의 신계(神階) 조각이 선명하고 아름답다.

② 옥개석과 상륜부가 커서 비례감이 떨어지는 장명등

③ 공릉의 문석인은 머리 부분이 크고 조각이 단순한 편이다.

 

 

얼굴이 몸통에 비해 유난히 큰 문석인

 

공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참도가 ‘ㄱ’자로 꺾인 점이 특징이다. 이는 능역이 협소한 경우 자연 지형에 어울리게 조영한 것으로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과 단종의 장릉, 선조의 목릉에서 볼 수 있으나 흔하지는 않다. 공릉 능침 뒤에서 멀리 조산을 바라보면 봉분과 장명등, 정자각이 일직선으로 축을 이루는 경관적 특성을 볼 수 있다.

 

공릉의 봉분은 당대 세자 묘로 조영된 덕종(경릉)의 봉분처럼 규모가 큰 편이다. 병풍석이 없는 세자빈 묘의 원(園) 형식으로 난간석 · 병풍석 · 망주석이 모두 생략됐고, 무석인도 없다. 곡장 안 봉분 둘레에 석양(石羊)과 석호(石虎) 한 쌍이 바깥을 수호하고 있다. 왕과 왕비의 능역은 일반적으로 석양·석호가 2쌍 4마리인 점과는 다르다. 석양은 봉분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석호와 같이 악귀를 쫓는 기능을 한다.

 

능침 상계 앞 가운데 놓인 혼유석이 550여 년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는 듯하다.

장명등은 왕릉과 일품(一品) 이상 사대부 묘에만 사용하는데 장명등의 화사석(火舍石 · 등불을 밝히도록 된 부분)에는 사각의 창을 뚫고, 옥개석을 올린 뒤 그 위에 보주가 달린 상륜을 얹었다. 장명등은 팔각으로 규모가 크며, 옥개인 지붕돌과 화사석에 비해 간석·하대부 등 기단부가 다른 능보다 낮아 안정적이지 않다.

 

문석인은 장명등·석마(石馬)와 함께 중계(中階)에 놓여 있다. 문석인은 손에 홀(笏)을 쥐고 있으며, 얼굴이 몸통에 비해 유난히 크다. 얼굴과 마음이 아름다웠던 장순왕후에 대한 애절함을 달래기 위해 얼굴을 크고 정밀하게 표현했는지 조각가의 마음을 알고 싶다.

 

능침 아래 정자각 서북쪽에 있는 예감(제례가 끝난 뒤 제물을 태워 묻는 곳)이 다른 곳과 달리 투박하고 정감 있다. 월대 위의 정자각은 앞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그리 크지 않아 세자빈 묘 형식에 어울린다.

정자각 신문 뒤의 신교와 모서리 배수구를 공들여 조영했다. 공릉의 참도는 세월이 흐르면서 변형된 듯하다.

없어진 금천교와 일부 훼손된 재실의 원형 복원이 아쉽다.

공릉의 비석은 영조(영조 52년, 1776)까지는 없었으나, 이후 순조 17년(1817) 공릉과 영릉에 표석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숙종, 영조 때 공릉과 순릉에 호랑이가 횡행해 포수를 보내 잡았다는 기록이 실록에 전한다.

 

공릉을 중심으로 한 파주 삼릉은 조용히 사색하며 자연생태의 모습을 보고 역사를 탐미하는 장소로 일품이다.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2010.06.07 740호(p80~82) 주간동아 [신의 정원 조선왕릉] 

 

 

 
 
 
 
 

 순릉(順陵)

 

 


조선 9대 성종의 비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74) 한씨의 능이다.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넷째 딸로 순릉과 마주보고 있는 공릉의 장순왕후와 자매지간이다.
공혜왕후는 1467년 의경세자(덕종)의 둘째아들 자산군에게 출가했다.

효심이 깊은 예종은 세조의 장례를 치르면서 건강을 잃어 재위 14개월 만에 승하했다.

이때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겨우 3세에 불과했고,

15세인 월산군은 병약하여 자산군(성종)이 왕위를 계승함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다.


 

공릉과 달리 순릉은 왕비능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공혜왕후는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왔으나 예의바르고 효성이 지극해

삼전(세조비 정희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 계비 안순왕후)의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왕비로 책봉된 지 5년 만에 후사 없이 승하한 공혜왕후는 왕비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세자빈의 신분으로 돌아가신 언니 장순왕후의 공릉에 비해 구성물이 더 많다.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을 뿐 능제나 상설제도는 모두 조선 초기의 제도를 따랐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은 네 개이며 귀면문이 새겨져 있다.

난간석의 작은 기둥은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을 본받았다.

 

 

   

 순릉 - 성종비 공혜왕후

 

 장순왕후와 자매간 요절에 후손 못 남긴 것도 닮아

 

 

순릉의 능역은 공혜왕후의 품성처럼 포근하고 아름답다.

 

순릉(順陵)은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비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1474) 한씨(韓氏)가 잠든 곳이다.

공혜왕후는 영의정 한명회의 넷째 딸로, 같은 파주 삼릉지구 북서쪽에 있는 공릉의 주인인 장순왕후와 자매간이다. 공혜왕후는 왕비로 책봉된 지 5년 만에 슬하에 자식도 없이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순릉은 한북정맥(漢北正脈·강원과 함남의 도계를 이루는 평강군 추가령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한강과 임진강 입구에 이르는 산줄기의 옛 이름)에서 이어지는 명봉산을 주산으로 하는 파주 삼릉지구에서도 가운데 긴 장룡의 능선 끝자락에 묘좌유향(卯坐酉向·동향에서 서향)을 하고 있다.

 

세조 13년(1467) 1월 12일 자을산군(성종)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8남(막내)인 영웅대군의 집에서 한명회의 넷째 딸을 친영했다. 재종친(再宗親)과 상정소(조선시대 국가의 법규·법전을 제정하거나 정책과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기구)가 위요(圍繞·혼인 때 가족 중 신랑이나 신부를 데리고 동행하는 사람)했다.

 

한명회 넷째 딸 … 정희왕후 덕에 왕비로

 

1469년 11월 28일 예종이 승하하고 성종이 즉위한 다음 날, 공혜왕후는 어찌 된 일인지 궁궐을 나가 사가에 한참 머물다가 1월 19일에야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비로 책봉됐다. 임신을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왕비 책봉 때 책문에 “그대 한씨는 선을 쌓은 명문 원훈벌족으로 부지런하고 검소한 덕이 일찍부터 나타나고 유순하며, 성품이 타고나고 부도의 예를 갖추었다”고 했다. 왕비가 인정전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고 반사(頒赦 ·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죄인을 용서하는 것)를 했다.

 

사실 공혜왕후는 왕비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예종의 원손이 있었으며, 의경세자와 인수대비 사이에 손위의 월산대군이 있었으니 자을산군은 왕위 계승 순위에서 한참 밀렸다. 만약 자을산군을 후계자로 지목한 할머니 정희왕후가 아니었다면 왕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공혜왕후는 임금에게 “정원(庭園)에 옥책을 펼쳐 남다른 은총을 밝게 보이시어, 중궁의 자리에 있게 되니 실로 저의 분수에 넘치는 일이므로 놀라고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으며, 감격함이 참으로 깊습니다”라고 했다.

“번저(藩邸 · 사가)에서 집 안의 빗자루를 들고 오로지 음식 만드는 데만 부지런할 줄 알았지 임금의 짝이 되어 왕가를 다스리는 덕이 부족한데 어찌 적의(翟衣 · 꿩이 그려진 왕비 옷)를 입는 영광에 응하겠습니까? 주상 전하께서 덕이 하늘과 땅에 화합해 밝음이 해와 달을 아울러 왕화(王化·임금의 덕행으로 감화)하고, 예의 모범을 계명(鷄鳴 · 시경의 편명, 제나라 현비가 애공에게 정사를 부지런히 할 것을 경계한 노래)에서 본받겠으며, 왕가와 나라를 일으키고 교화해 휘음(徽音 · 좋은 평판)을 듣게 하고 인지(麟趾 · 시경의 편명, 훌륭한 자손을 낳기를 기리는 노래)를 잇겠습니다”라고 사은의 전문을 올렸다.

 

이때 백관들이 “중궁 전하께서 단정하고 장중하고 정숙하시며, 부드럽고 아름다우시며, 온화하고 공순하시고, 선대왕비(세조비, 덕종비, 예종비)에 효도하고 왕을 도와 본손과 지손이 백세토록 번창하고 화봉(華封)의 삼축(三祝)을 본받아 오래 사시기”를 비는 하례를 올렸다.

  

참배로가 하나뿐인 순릉의 제향공간. 제대로 된 능이라면 어로와 신로가 따로 있어야 한다.

 

왕비 책봉 한 달 후 친정에 거둥(임금이나 왕비의 나들이)했다. 북쪽 마당에 장전(帳殿)을 치고 중궁은 서쪽의 붉은 칠을 한 어상(御床)에 앉고, 친정어머니 민씨는 동쪽의 검은 칠을 한 평교에 앉았다. 친정아버지 한명회는 임금이 내린 선온(宣醞 ·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술)을 마시고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4일 중궁이 선정전에서 백성에게 양로연을 베풀었고, 10월 11일 중궁의 생일을 맞아 의정부와 육조에서 표리(表裏 · 옷의 겉감과 안감, 즉 선물)를 올리고 임금이 백관을 불러 음식을 대접했다.

 

예의 바르고 효성 지극 삼전의 귀여움 받아

 

그러나 왕비 책봉 3년 6개월 무렵 중궁이 병석에 눕자 친정으로 거처를 옮겼다. 거의 매일 왕과 백관이 문안하고, 7월 30일 왕의 생일잔치까지 물리고 중궁을 간호했다. 이후 환궁을 했지만 왕비의 병치레는 계속됐다.

결국 성종 5년(1474) 4월 15일 오전 10시 무렵, 왕비가 구현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불과 19세였다.

왕실 생활에 대한 부담이었을까? 아니면 시할아버지 세조의 왕위 찬탈을 주동했던 아버지 한명회의 죗값을 치른 것일까? 안타깝게도 한명회가 정략적으로 왕비를 만든 두 딸은 모두 요절했고 후손도 남기지 못했다.

 

예조에서 국상의 예를 발표하는데 세종비인 소헌왕후의 예를 따르도록 했다. 이 기간에는 혼례를 금하고 음악을 쓰지 않으며, 도살을 금하고 5일간 시장을 열지 않았다.

신하들이 시호를 올릴 때 공경하고 유순하게 윗사람을 섬김의 ‘공(恭)’과,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인자함의 ‘혜(惠)’라고 했다. 능호는 순릉이라 했다. 그의 시숙모였던 친언니 장순왕후가 13년 전 안장된 공릉 부근을 정인지, 신숙주, 정창손, 서거정 등이 살피고 공릉 도국 안의 을방(乙方)으로 내려온 묘좌유향에 터를 잡았다.

 

병조판서인 한명회가 늙음을 이유로 사면(辭免 · 맡아보던 자리를 물러남)을 요청하나 수렴청정하던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한명회를 좌의정에 제수했다. 한명회는 딸의 빈전에 진향하고 장례를 치렀다. 순릉의 조영 감독은 아버지 한명회가 했다.

 

공혜왕후는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왔으나 예의 바르고 효성이 지극해 삼전(세조비 정희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의 귀여움을 받았다. 착한 공혜왕후는 성종이 연산의 어머니 폐비 윤씨를 왕궁에 들여도 개의치 않고 투기의 기색도 없이 직접 옷을 지어주고 패옥을 하사하는 등 덕을 보였다 한다. 그러나 중궁으로서 자식을 낳지 못한 것이 마음의 짐이 된 데다 삼전을 모시는 과중한 업무까지 더해진 것이 요절의 원인이었을지 모른다.

 

공혜왕후릉에는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만 둘러쳐 있다. 전체적인 상설제도는 공릉과 같지만, 순릉은 왕비의 능이므로 공릉에 비해 구성물이 많고 정교하다. 정자각 오른쪽에 있는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공혜왕후의 비가 있다. 비에는 전서(篆書)로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朝鮮國 恭惠王后 順陵)’이라 쓰여 있다. 순릉의 비각은 공릉과 같이 순조 17년(1817)에 세운 것이다.

 

순릉의 장명등은 공릉의 것과 세부적인 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비슷하다. 옥개석을 제외하고는 화사석(火舍石)과 대석(臺石)이 한 돌로 돼 있다. 대석과 화사석은 복련(伏蓮)과 앙련(仰蓮)이 표시돼 있고, 화사석에는 4각창이 뚫려 있다. 순릉의 장명등은 공릉의 것처럼 8각으로 돼 있어 조선 전반기 장명등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난간석주의 원수(員首)나 동자석주의 형태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을 따랐으며, 고석의 나어문두(羅魚文頭)도 비슷하다.

문무석인은 좌우 1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능침에서 문석인은 중계(中階)에, 무석인은 하계(下階)에 세워지는 구성 요소다. 순릉의 무석인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양손으로는 칼을 잡고, 무관의 갑옷을 입고 목을 움츠린 모습이다. 근엄하고 수염이 팔자형이다. 갑옷의 선은 뚜렷하지만 얼굴은 다소 경색된 표정이다.

 
 

1) 능에서 공혜왕후의 효의 정신을 공부하는 어린이들. 2) 순릉의 고석.

 3) 일반 능원보다 투박하고 작은 배위(절을 하는 자리).

 

100여m 거리 두고 시숙모와 조카며느리 관계

 

성종 때 능역 주변에서 사냥을 하니 노사신이 선왕, 선후의 체백을 간직한 능원에서 타위(打圍 · 사냥)함은 상례로서 배알하고 돌아서서 짐승을 쫓는 것이니 의리에 부끄러운 일이라며, 당나라 때 전쟁하다 포위돼 위급한데도 건릉(고종과 측천무후릉)을 지날 때 능침이 놀랄까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어 능역에서 사냥을 금하도록 제청해 그대로 했다. 이런 연유에서 조선시대 왕릉의 능침 공간은 선왕의 절대적 성역의 공간으로 현세의 왕도 함부로 진입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지금도 문화재청에서는 능침 공간의 보존을 이유로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최근 능침의 봉분과 석물을 감상하기 위한 개방 요구가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문화재로서 보존 가치가 높고, 많은 석물 조각이 노후하고 산화돼 훼손됐음을 고려할 때 제한적 입장이나 영상 감상으로의 대체와 같은 대책이 필요하다. 세계문화유산이 됐으니 더욱 보존 대책을 세워야 한다.

 

순릉의 정자각 앞에는 일반 능역에 있는 신로와 어로가 아닌 한 개의 참배로만 있다. 원형이 아닌 듯하다. 이 역시 원형 보존이 필요하다. 배위석도 규모가 작다. 흔적이 있는 수복방과 수라간도 복원해야 한다.

 

‘춘관통고’(1788)에 재실과 연지가 능원의 오른쪽 언덕 너머에 있다고 기록됐으나 고증과 발굴 복원이 아쉽다. ‘춘관통고’에 따르면 공릉과 순릉은 주변 둘레가 24리에 이른다고 하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왕실 재산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많은 면적을 상실했다. 1930년경 공릉과 순릉 도면을 보면 공릉이 三町八反七苗六步(3만4268평·11만3280여㎡)이며, 순릉과 영릉은 七町六反四步(2만2900평·7만5700여㎡)로 축소하고, 이 밖의 지역을 동양척식회사(大賢農林部)에 임대해 조선시대 내내 잘 가꿔온 송림을 남벌했다. 이 송림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또 하나의 자랑스러운 숲이 됐을 것이다.

 

자매였던 장순왕후와 공혜왕후는 궁에 들어가서는 시숙모와 조카며느리 관계로 살다가 죽어서는 500년간 100여m 거리를 두고 각기 다른 언덕에서 지내왔다.

그러나 두 자매 능인 공릉과 순릉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능선 사이에 관통도로가 생겨 끊어지고 말았다. 이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서 복원이 절실한 부분이다.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2010.06.28 743호(p82~84) 주간동아 [신의 정원 조선왕릉] 

 

 

 

 

 

 

 

 

 영릉(永陵)


 

영조의 장자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 1719~28)와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 1715~51)의 능이다.

진종은 1725년 7세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728년 숨을 거두자 시호를 효장(孝章)이라 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한 뒤

사도세자의 맏아들인 왕세손(정조)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통을 잇게 했다.


 

소략한 능침 공간의 석물들에 비해 정자각은 규모가 큰 편이다.


 

정조가 즉위함에 따라 효장세자는 양부(養父)로서 진종으로 추존되었으며

그 후 1908년 황제로 추존, 진종소황제가 되었다.

효순소황후는 1727년 세자빈에 간택되었고, 1735년 현빈(賢嬪)에 봉해졌으나 37세에 소생 없이 승하했다.
정조가 즉위한 후 효순왕후로 추존되었으며, 1908년 다시 효순소황후로 추존되었다.

  

 

 

 

영릉은 세자와 세자빈의 예로 능을 조성했기 때문에 다른 능에 비해 간소하게 꾸며졌다.

동원이봉의 쌍릉으로 봉분 주위에 병풍석과 난간석 모두 생략되어 있다.

석양과 석호 각 한 쌍이 능을 호위하고 있으며 봉분 앞에 각각 혼유석을 두고 망주석 한 쌍이 서 있다.

또 명릉식의 사각장명등과 문인석이 아담하게 제작되어 있으나 무인석은 생략되었다.

 

영릉에는 비각이 두 채 있다.

위에 있는 비각에는 능 조성 다시의 세자신분의 능비가 있으며

아래 비각에는 정조 때 왕으로 추존한 후 세운 비와 순종황제 때 황제로 추존하고 세운 비 2기가 있다.

 




----------------------------------------------------------------

* 미술문화에서 발간한 [조선 왕릉 답사 수첩] 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에 있습니다.
* 사진과 글의 무단 전재나 복사를 금합니다.
*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8)
-----------------------------------------------------------------------------------

 

 

 

 

 

조선왕릉 세계유산 등재기념 대국민보고회 및 고유제

 

 

문화재청은 2009년 7월 15일(수), 오후 3시 종묘에서

조선왕릉 40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기념하고

이를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대국민보고회 및 고유제를 개최하였다.

 

이번 행사는 문화재청장의 세계유산 등재 보고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유인촌)의 기념사,

그리고 세계유산 등재과정과 노력을 담은 영상물 상영,

고유제(告由祭) 순으로  진행되었다.

 

고유제는 나라의 중대한 일을 종묘 정전에 고하던 예에 따라

조선왕릉의 세계유산 등재사실을 종묘에 아뢸 목적으로 거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