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조선왕릉] 세계문화유산

Gijuzzang Dream 2009. 6. 26. 11:54

 


 

 

 

 

 

 조선 왕릉, 불멸의 왕을 만나다

 

 

 


이제까지 왕릉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거의 비슷하게 생긴 것처럼 보이는 왕릉은, 개별 왕릉 하나하나에 대한 역사와 문화에 얽힌 이해 없이는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못한다.
이 왕릉의 주인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정치를 펼쳤고, 후대의 왕은 선왕과 어떤 관계였고,

당시 왕릉을 조성할 때는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를 안다면,

처음에는 엇비슷해 보여 구별이 가지 않던 왕릉의 다른 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모든 조선 왕릉은 그 자체로 조선왕조실록인 셈이다.
조선 왕릉, 불멸의 왕을 만나다  - 신병주


 

 

 

 

 

 

1. 조선왕릉은 어떤 곳인가?

- 엄격하고 고아한 상징의 세계

 

  

남이 인정하자 그제야 제 것의 가치를 알아보기 시작하는 모습은 부끄럽지만,
그런 계기로라도 제 것의 소중함을 깨닫고 잘 가꾸어 나간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왕릉에서는 돌 하나, 나무 하나도 허투루 봐서는 안 된다.
조선 왕릉에서 우리는 가장 정제된 조선 시대의 이념과 문화를 만날 수 있다.
- 이창환, 상지영서대학 조경학과 교수

 

 

조선 왕릉은 도성을 중심으로 십 리(4) 밖, 백 리(40) 안의 길지(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선 왕릉은 전체 마흔두 기 가운데 남한에 40기가 있으며, 그중 31기가 경기도에 있다.

(개성에 2기, 서울에 8기, 영월에 1기).


조선 왕실에서는 수도권 주변 길지에 나누어 능역(능이 있는 구역)을 조성했기 때문에

경기도 곳곳에는 역사의 향기가 배어 있는 아름다운 숲과 능원이 있다.

수십만에서 수천만 평에 이르는 왕릉에는 민가나 사가의 무덤을 조성할 수 없기 때문에,

왕릉은 수도권 지역에 남아 있는 가장 성스러운 녹지 공간이자 천년의 숲이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남양주 광릉수목원, 고양의 서오릉, 화성의 융건릉, 여주의 영(英) · 영(寧)릉 등이
모두 그러한 곳이다.


조선 왕릉은 519년 동안 왕실에서 철저히 관리해왔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다소 훼손되었다.

다행히 지금까지 문화재청에서 특별히 관리하고 있어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며,

다른 시대 왕릉과 비교했을 때도 가장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설계

 

우리나라 왕릉의 원형은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져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로 이어졌으며,

조선 시대에 이르러 독창성과 높은 완성도를 갖게 된다.

능선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중층적인 조선 왕릉은 폐쇄성과 안정성을 확보한 공간에 입지하고 있다.

그러나 능침(봉분)은 반드시 능역 앞의 시계를 넓게 확보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조선 왕릉은 좌청룡 우백호의 능선과 계류가 감싸고 내려와 입구가 오므라진 산세가 있는 곳에

조영되었는데, 입구가 오므라지지 않은 곳에는 보호막 역할을 하는 비보림(裨補林)과 연못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능원의 시설물은 유교의 위계성에 따라

능침(봉분)-장명등-정자각-홍살문의 순서로 직선 축을 이뤄 이어진다.

능역의 규모가 이에 적합하지 않은 곳은 조영 방식을 달리하며

자연 지형에 적합한 구부러진(절선) 축을 이루기도 했다.


재실-금천교-홍살문을 잇는 능역의 참배로는

능역 내의 명당수가 흐르는 개천을 따라 구불구불한 곡선 형태로 나 있다.

능원 공간의 신성함과 엄숙함을 나타내기 위해

참배객이 능원에 진입할 때 능침이 직선의 형태로 보이지 않도록 설계한 것이다.


조선 왕릉의 입지와 조영물의 축조는 전후방 산의 형태와 주위 지형을 충분히 고려하여

위치와 규모 등을 결정한다.

능원(역)을 자연환경의 일부로 여기는 한국인의 자연스러운 생각과 풍수사상 때문이다.


조선 왕릉은 유교 예법에 따라

진입 공간-제례(향) 공간-(전이 공간)-능침 공간이라는 기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능원의 공간별 시설들을 살펴보면

진입 공간에는 홍살문, 재실, 금천교 등이 있으며,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참도, 수복방, 수라간, 정자각 등이 있다.

전이 공간에는 예감, 소전대, 비각, 산신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능역의 중심인 능침 공간에는

봉분, 석양과 석호,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 문 · 무인석, 석마, 곡장 등이 있다.

이 밖에 향탄산, 능원 사찰 등이 능역 외곽에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능역의 공간 구성 요소는 능을 향하여 진입하는 동선을 중심축으로 배치된다.


능침 공간은 왕릉의 핵심으로, 봉분의 좌우 후면 삼면에 담을 둘렀으며(이를 곡장이라고 한다).

그 주변은 소나무로 둘러싸서 능의 위용성을 강조하고 있다.

 

능침 공간의 주요 시설은 봉분이다.

봉분은 원형이며, 방위를 십이병풍석 또는 십이지간의 그림과 글자로 표시해놓았다.

 

능침 공간은 가로 방향으로 장대석을 설치하여 공간을 3단으로 나뉘었다.

봉분이 가장 위쪽에 있으며 죽은 자의 침전(임금의 침방이 있는 전각) 기능을 한다.

다음 단은 중계(中階)라고 해서 문인의 공간으로 문인석상과 석마가 있다.

세 번째 공간은 하계(下階)로 무인석상과 석마가 함께 있다.

이 능침 공간은 선왕만 머무는 곳으로, 산 자의 접근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제향 공간은 참배하는 곳으로 사자와 생자가 제의 때 만나는 반 속세의 공간이다.

정자각과 홍살문을 잇는 선을 따라 참배로가 2~3단으로 구분되어 있다.

 

제례의 시작인 배위를 지나 참도의 양 옆으로 수라간, 수복방이 있다.

 

참도의 구성 형태는 종묘, 사직과 더불어 직선의 형태를 이루며,

참도의 경우 제의가 동남쪽에서 시작하여 서북쪽에서 끝나는 행위에 따라 절선형을 이루고 있다.

동남쪽에서 시작하여 서북쪽에서 끝나는 것은 탄생과 죽음을 나타내기 위한 방위적 질서 체계이다.

 

능역의 배경을 이루는 숲은 송림이 으뜸이다.

봉분을 중심으로 한 성역 공간에는 반드시 소나무가 에워싸고 있다.

소나무는 십장생의 하나로 왕조의 영원성을 나타내며 늘 푸른 솔잎이 충절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정자각을 중심으로 제향 공간의 주변 식생은

소나무, 잣나무, 신갈나무 등이 크고 높게 자리 잡고 있으며,

아래쪽에는 때죽나무, 철쭉, 진달래, 그리고 바닥에는 습지에서 잘 자라는 오리나무 등이 있다.

능원의 지피식물은 한국형 잔디(Zosia Japonica)가 주종을 이룬다.

조선 시대에는 모화관(慕華館)에서 인위적으로 잔디를 재배하여 보식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잔디를 7~8월에 파종하기도 했다.

건원릉의 봉분만은 태조(이성계)의 뜻에 따라 고향 함흥의 억새를 심고 벌초를 하지 않는 것이 특이하다.

 

 

조선 왕조 500년의 압축


조선 왕릉은 조상에 대한 효를 중시하는 유교 문화권에서

당대 최고의 예술과 기술을 집약시킨 문화유산이다.

같은 시기 다른 유교 문화의 왕릉과 비교해도 탁월한 완성도와 독창성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조선 왕릉에는 한국인의 자연관과 세계관이 잘 드러나 있고,

음양사상, 풍수지리설, 불교, 도교 등의 영향이 복합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특히 조선 시대의 정치적 통치 이념인 유교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난 조영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서 갖는 보편적 가치는 무엇일까?

역사가 긴 동일 왕조의 문화유산, 오랜 세월에 걸친 조성과 완벽한 보존, 조영 방식의 독창성,

제례문화의 장구한 전통, 당대 기록물의 보존성, 역사 경관적 가치, 현존하는 제례 문화 등이 담긴

문화유산이라는 점이다. 이제 조선 왕릉이라는 훌륭한 문화유산을 어떻게 잘 관리하고,

전 세계인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로 만들어낼지에 대한 숙제가 남았다.

 

 

왕릉의 구조와 명칭 

 

곡장(曲墻, 곡담) -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봉분의 동, 서, 북 삼면에 둘러놓은 담장.

봉분의 중심을 드러내주고, 정자각을 향하여 열려 있음을 분명히 제시한다.

곡장의 바깥으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을 조성하여 왕릉의 위엄성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능침(陵寢, 봉분) - 능 주인이 잠들어 있는 곳. 능상(陵上)이라고도 한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으로 둘러 있어 전체가 하나의 왕관처럼 보인다.

봉분의 높이는 6m 정도이며, 병풍석에는 시대에 따라 십이지신, 모란, 연화 문양이 새겨 있다.

왕과 왕비의 합장 여부에 따라 단릉, 합장릉, 쌍릉, 삼연릉, 동원이릉, 동원상하봉릉 등의 형태가 보이며,

이에 따라 왕릉 전체의 배치 계획이 적용된다.

 

병풍석(屛風石) -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봉분 밑 부분에 둘러 세운 12개의 돌.

병풍석에는 12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신상을 해당 방위에 맞게 양각하였는데,

든 방위에서 침범하는 부정과 잡귀를 몰아내기 위하여 새겼다.

둘레돌, 호석(護石)이라고도 한다.

지대석(地臺石) - 병풍석의 면석을 받쳐놓은 기초가 되는 돌.

난간석(欄干石) - 봉분을 둘러싼 울타리 돌.

 

상계(上階) - 능침과 혼유석, 석양, 석호, 망주석, 곡장이 있는 가장 위의 단으로 초계라고도 한다.
중계(中階) -  문인석과 석마가 있는 중간 단.
하계(下階) - 무인석과 석마가 있는 아랫단.

 

석양(石羊) -  능침 공간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석양과 석호가 일반적으로 네 쌍이 배치되어 있다.

양은 대개 희생의 상징이나 제물로 사용되지만,

석양은 수호의 의미를 지니므로 죽은 이의 명복을 빌며 사악한 것을 피하게 해준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왕릉의 석양은 고개를 숙여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능에 배치되는 동물은 주로 수컷이지만, 서오릉과 서삼릉에는 암컷인 석양이 보인다.

 

석호(石虎) - 석양과 함께 능침을 수호하는 호랑이 모양의 수호신. 밖을 지켜보는 형태로 설치했다.

능을 수호한다는 상징성은 동일하지만, 각 능마다 꼬리의 위치나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

 

망주석(望柱石) -  봉분의 앞면 좌우에 팔각의 촛대처럼 배치된 석물을 망주석이라고 한다.

혼령이 봉분을 찾는 표지 구실을 한다는 설과 음양의 조화, 풍수 기능을 한다는 등 여러 주장이 있다.

망주석은 능침이 신성구역임을 알리고, 또 멀리서 능상 부분을 바라볼 때 이곳에 능이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보게 하려고 세워둔 것으로 추정된다. 망주석 기둥에는 세호(細虎)라는 동물상이 조각되어 있다.

망주석을 올라가는 형상 혹은 내려가는 형상으로 새겨 있다.

 

혼유석(魂遊石) - 일반인의 묘에는 상석이라 하여 제물을 차려놓지만,

왕릉은 정자각에서 제를 올린다. 그래서 혼유석은 혼령이 앉아 쉬는 곳이다.

혼유석은 능의 정면에 놓인 상처럼 생긴 돌로, 원래 명칭은 석상(石床)이다.

영혼이 이곳에 나와서 놀라고 설치하는 것이라 전해진다.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창안의 석상이 혼유석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고석(鼓石) - 둥근 북 모양을 닮은 혼유석의 받침돌로 4~5개의 고석이 있다. 

사악한 것을 경계하는 의미로 도깨비의 얼굴(귀면, 鬼面)이 새겨 있는데

사악한 잡귀로부터 혼유석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명등(長明燈) - 왕릉의 장생발복(長生發福)을 기원하는 등.

장명등은 석등의 형태로 망주석보다 한 단 아래에 놓인다.

초기에는 장명등의 화창 부분에 기름 등잔을 놓아 묘역을 밝혔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불을 피운 흔적이나 등을 넣은 흔적이 없으므로 점차 형식적인 상징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봉분 앞에 세워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벽사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문인석(文人石) -  능상 부분은 일반적으로 상 · 중 · 하계 3단으로 나뉘는데,

2단에는 문인석 한 쌍이 석마를 대동하고 서 있다. 조선시대 백관이 착용하던 복두와 공복을 입고,

자신의 품계를 나타내는 홀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문 · 무인석은 장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 사람 키보다 훨씬 크게 조각하여 세워두었는데,

후대로 내려올수록 머리 크기가 줄어 사람의 몸에서 차지하는 머리의 비율에 가까워진다.

 

무인석(武人石) -  문인석 아래에서 왕을 호위하며 두 손으로 장검을 짚고 위엄 있는 자세이다.

전형적인 무관의 성격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다소 큰 얼굴과 바튼 목, 굵은 몸, 골격 마디를 강조하며 무관을 표현했다.

조대를 지나면서 단이 없어지고 문인석과 같은 높이에 배치되는데,

는 국난을 겪고 난 후 무인의 지위 향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석마(石馬) - 문인석과 무인석은 각각 석마를 데리고 있다.

석마는 고려시대에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중국에도 없는 조선 왕릉의 특징적 요소이다.

고삐 없이 석인상 뒤나 옆에서 읍을 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말은 시베리아 지역의 대표적인 제물의 하나이며 특히 천신에 바치는 태양을 상징한다.

조선왕릉에 배치된 석마 역시 계급을 상징한다.

 

예감(瘞坎) -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석함, 망료위(望燎位)라고도 한다.

정자각 뒤 왼쪽에 있다.

산신석(山神石) -  장례를 치른 후 3년 동안 후토신(땅을 관장하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정자각 뒤 오른쪽에 있다.

 

정자각(丁字閣) - 정자각은 제사를 모시는 공간이다.

왕릉의 중심 건축물로서 그 평면이 한자의 ‘丁’자와 같다고 하여 이름 붙었다.

정자각에 오를 때는 동쪽으로 오르고 내려올 때는 서쪽으로 내려오는데

이를 일러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 한다.

 

비각(碑閣) - 비석이나 신도비를 세워둔 곳.

신도비(神道碑)는 능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현재 남아 있는 신도비는 태조 건원릉의 신도비와 태종 헌릉의 신도비뿐이다.

 

수복방(守僕房) - 능을 지키는 수복이 지내던 곳으로 정자각 오른쪽 앞에 있다.

참도(參道) -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길.

박석을 깔아놓았으며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신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신도(神道)라고 하며,

오른쪽의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어도(御道)라고 한다.

 

배위(拜位) - 홍살문 옆 한 평 정도의 땅에 돌을 깔아놓은 곳으로

왕이나 제관이 절을 하는 곳이다. 판위(板位), 어배석(御拜石), 망릉위(望陵位)라고도 한다.

 

홍살문(紅箭門) -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 홍문(紅門), 또는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한다.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살을 박아놓았다.

 

금천교(錦川橋) - 홍살문으로 진입하기 전에 금천교라는 석조물이 있다.

금천교의 ‘금천’은 건너가는 것을 금하는 시내라는 뜻으로,

금천교 건너편은 특별한 영역, 즉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홍살문 바깥에 설치되지만 유일하게 효종 영릉에만 금천교가 참도의 중간에 설치되어 있다.

그 이유는 물이 능역을 가로질러 흐르기 때문이다.

 

재실(齋室) -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으로,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숙식과 제사음식을 장만하고, 음복(飮福)하고, 망제(望祭)를 지내는 곳이다.

 

 

 

 

 

 

 

 

 

- 동아일보 윤완준 2008.10.1 

 

 

 

 

 

2. 조선왕릉,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와 개발 방향 

    - 풍수의 교과서, 왕조사의 보고

 

 

 

조선 최고의 명당인 왕릉은 그 자체로 훌륭한 자연학습장이다.

뿐만 아니라 이야깃거리와 볼거리, 체험할 거리도 많으니

개발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문화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원형과 거기에 깃든 생각을 훼손하지 않고

잘 살려 세계인이 향유하는 문화 유적으로 개발하고 관리해야 한다.
- 박성진, 문화집단 예문관 대표

 

 

조선 왕릉이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자

어느 당의 중진 한 분이 우리 문화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주말에 여럿이 모여 가까운 수원 화성부터 찾아가 보기로 했단다.
그들은 수원화성박물관 김준혁 팀장을 만났고 그의 열정적인 안내를 받으며

화성과 융 · 건릉까지 답사를 했다. 그들은 그동안의 무관심이 부끄럽고 안타깝다며

조선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더듬어본 뜻 깊은 시간이었다고 한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가슴아픈 이야기도 들었고,

정조가 새 수도 화성을 건설하며 이루고자 했던 국가 부흥의 꿈을 듣고 나서는

자기들도 도원결의를 맺었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달에 한 번 조선 왕릉을 탐사하겠노라고.

왕릉의 겉모습만 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왕릉의 주인인 왕의 자취와 사상, 그리고 후손에게 물려준

정신의 유산까지 공부하고 오자는 결의였다고 한다.

그렇게 30개월이 흐르고 나면 그들은 조선의 역사를 씨줄과 날줄로 엮을 실력들이 생길 것이다.


 

 

▲융건릉의 숲

장조(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 추존왕)와 경희왕후의 융릉, 정조(22대)와 효의왕후의 건릉.

잘 보존된 숲에 여러 산책로가 있어 찾는 이가 많다.

 

 

세계인이 감탄한 ‘신의 정원’

 

왕릉은 한 임금의 태평하거나 처절한 역사를 마감하는 공간이다.
또한 새 역사를 이끄는 임금이 자신의 권력을 처음으로 드러내는 출발지이다.

그렇게 보면 왕릉은 한 임금이 이끌어온 시대의 종결

후대 임금이 이끄는 새 왕실의 운명이 겹치는 절묘한 공간이다.

우리 민족은 조선 왕릉과 같은 사후 공간을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곳으로 조성해왔다.

선왕은 속세에서의 피곤한 삶을 잊고 편히 쉬는 공간으로,

뒤를 이은 왕은 선왕의 선정을 본받는 공간으로 조영했다.

외국처럼 죽은 왕이 통치하는 개념이 아니라 후손을 배려한 정원 같은 개념이다.

그래서 유럽의 정원 건축가들이 경탄을 금하지 못하는 것이다.

산과 숲이 자연스럽게 담장 역할을 하며 봉분 지역을 제외하고는 최대한 자연환경을 그대로 활용한

“자연 위에 인공이 살짝 내려앉은 완벽한 신의 정원”이라고 말이다.

 

세계인의 인정과 경탄은 조선 왕릉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다소 변화시켰다.

왕릉에 대한 보호와 더불어 개방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일전에 우리나라 고고학계의 원로인 조유전 박사에게 왕릉 개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조심스레 여쭤보았다가, 그의 개방성에 그리고 나의 보수성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조선 왕릉을 포함한 문화 유적은 역사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원형을 훼손하거나 변형시켜서는

안 된다. 하지만 현대인의 감수성과 의식의 변화에 따라 문화 유적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것에는

열린 자세를 보여야 한다. 잘 보존된 원형은 그 자체로 볼거리이며

문화 유적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현대인이 공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좋은 문화 관광 자원으로 활용이 가능할 것” 이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덧붙이면 온국민이 참여하는 궁 · 능원의 제향은 가장 경건하게 원형을 살려야 할 것이며,

그러한 경건함이 전제된다면 조선의 왕릉은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이 공존하는 장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왕릉으로 수학여행을 가곤 했다.

베이징으로 여행을 가도 만리장성을 다녀오는 길에는

꼭 명 13릉(중국 베이징 북쪽 약 40지점에 있는 천수산 아래에 조성된 명나라 때 13帝의 능묘군)에

들렀다 온다. 왕릉이 전해주는 역사적 이야깃거리는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31기의 왕릉은 스토리텔링의 보고다. 한국 풍수 역사에서 왕릉은 교과서에 해당한다.
개발은 신중하게, 활용은 창의적으로 나는 그동안 경기도 전역의 왕릉에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산릉 제향을 지낸 전주 이씨 후손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이러한 제향이 문화유산 등재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리포트도 보았다.

러나 왕릉은 대한민국 역사의 대동맥이며 국가 정체성의 핵심적 문화유산이다.

이제는 특정 가문에게 국가의 일을 맡길 것이 아니라

왕릉이 있는 지역의 자치단체와 지역 주민이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참여해

정통적인 제향을 지내는 일에 대해 검토해야 한다.

세계문화유산의 보호와 활용을 문화재청에게만 미룰 일은 아니다.

경기도가 주체적으로 왕릉을 통한 외국 관광객 유치를 시도해볼 만하다.

현재 조선 왕릉 31기가 경기도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체적 문화 향연이 가능하려면 문화재청에서 시설 보완과 관련 법규를 조속히 정비해야 한다.

 

왕릉 제향(祭享)에는 축제의 요소가 매우 많다.

능원 주변의 지역 주민들이 제를 드리고 즐기는 향연은 오랜 전통이다.
현재 왕릉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프로그램은 제향과 명절 때 쓰는 민속놀이 기구 비치 수준에 머물고 있다.

 

죽은 자의 공간인 정자각에서부터 봉분까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은

녹색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

매머드형 박물관을 지역별로 조성한다고 호들갑을 떨기보다는

능원 규모에 맞는 자연친화적이고 콘텐츠가 풍부한 안내센터를 설치하고,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일깨울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을 개발하고,

풍수와 자연생태 학습 및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고,

자치단체의 정성으로 치르는 제향 등을 기획하고 준비해서

다양한 지역 문화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유네스코도 권고했듯이

왕릉 주변의 도시는 과도한 개발은 자제해서 문화유산을 원형 훼손 없이 잘 가꾸어나가야 한다.


왕릉은 자연이며 공원이며 우리 정신문화의 위대한 가치가 남아있는,

영원히 보존해야 할 역사적 자산이다.

 

 

 

 

 

 

3. 도시화와 지역개발 속의 조선왕릉 

    - 자랑보다 예우가 먼저다

 

 

 

오늘날 왕릉은 산 자와 죽은 자가, 전통과 현대가, 자연과 인공이 어울리는 의미심장한 역사 공간이다.
도심에 있는 왕릉이라면 왼쪽에 초고층 아파트, 오른쪽에 커피숍이 있다 해도 놀랍지 않다.

그러나 이런 공존에는 문화유산에 대한 진심 어린 이해와 예우가 필요하다.
- 정동일, 고양시 문화재 전문위원

 

 

인구 2000만 명이 살고 있는 수도권, 이 대도시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릉이 있다.

수많은 전쟁과 외세의 침략, 산업화와 근대화 속에서 우리 민족이 굳건히 지켜온 조선의 왕릉은

그저 이씨 왕조의 무덤이 아니다.

조선의 역사와 문화, 예술과 사상, 제도와 절차, 더 나아가 문화적 수준과 국력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조선 왕조에서는 건원릉을 조성한 이래 27대 순종 황제의 유릉에 이르기까지

왕릉과 주변을 철저히 보호하고 관리해왔다.

신을 모신 봉분 말고도 주변에 금표(禁標) 구역을 설정하여 벌목과 출입을 통제했고,

능에서 보이는 안산(집터나 묏자리 맞은편에 있는 산)과

주산(묏자리나 집터 따위의 운수 기운이 매였다는 산), 조산(혈에서 가장 멀리 있는 용의 봉우리),

금천(건너가는 것을 금하는 시내)까지도 보호하고 유지했던 것이다.

능 주변에는 주로 능에 관련된 관리나 백성을 거주시키고,

그 수도 최대한 줄여 자연의 훼손을 막을 만큼 철저하게 보호했다.

또 후손을 왕릉 주변에 기거하게 해 제례를 준비하고 왕릉을 지키게 했다.

 


외세의 침탈과 도시화로 점점 좁아지는 능역


외세의 침탈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조선 왕릉도 훼손과 오욕의 역사를 겪게 된다.

왕릉에서도 일제의 의도된 민족 말살 정책과 문화유산 파괴가 일어났다.
우선 능역 입구의 숲이 수탈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의 능역은 인근의 삼송(三松)동, 세수리, 송현(松峴)이란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백 년 된 소나무가 울창했던 곳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곳 부근에 서울 교외선을 만들면서 철도의 침목으로 쓰기 위해 소나무를 베었고,

그 결과 봉분 주위를 제외하고는 울창한 숲 대부분이 사라졌다.

서울의 여러 능도 일본군 기지나 연구, 수련, 학교시설 등의 설치를 목적으로 숲이 훼손되었다.


해방 이후 정부도 이 왕릉 훼손의 역사에 동참한다.

능역에 거대한 대학과 병원이 들어서고 운동장, 공원이 만들어지면서

왕릉은 이제 겨우 봉분과 그 주변만 보존하기도 버겁게 됐다.

금천이 메워지고 안산은 도로 등으로 잘려나갔다.

 

1970년대 이후 왕릉은 군부대나 군사시설의 점령지로 변해 지금도 이 아픔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수도권 인구 과밀화의 여파로 인해 신도시들이 생겨났고,

이로 인해 서울과 경기도의 능들은 다시 큰 훼손을 겪게 된다.

능역의 주산과 안산 자리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조선 왕릉은 주로 경기도 북부에 있는데,

이곳은 배산임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뒤로는 북한산을 두고, 앞으로는 한강이 흐르는 모양새다.

왕릉은 도성을 중심으로 주로 동쪽과 서쪽에 조성되었다.

배로 한강을 건너 국장을 치르는 것이 당시에는 큰 부담이었

북한산 너머 멀리까지 나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양주, 고양, 파주는 최적의 능지로 손꼽혔고

이러한 이유로 경기 북부의 이 세 지역에는 총 26기의 왕릉이 남아 있다.


왕릉 주변이 가장 많이 변화된 곳으로는 서울 강남의 선릉, 정릉을 들 수 있다.

 

▲ 선정릉 

정릉 중종(11대)의 능. 서울 강남의 도시화로 인해 능침과 고층건물이 공존하고 있다.

 

 

능역에 올라 주변을 살펴보면 고층 빌딩이 왕릉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

빌딩에서 내려다본 왕릉의 모습은 주변 건물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작다.

그러나 주변의 숲과 정자각, 신도를 합쳐보고

좀 더 먼 거리에서 왕릉의 조성미와 능상의 언덕, 신도와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를 살펴보면

그 자연적인 조화가 매우 아름답다.

왕릉은 이렇게 각 조영물과 숲, 언덕의 조화를 함께 봐야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있다.

 


골프장과 목장에 둘러싸인 서삼릉


도시화와는 별개로 숲이 사라진 곳이 있으니 바로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이다.

이곳 서삼릉에는 본래 희릉(11대 중종 계비 장경왕후 윤씨)과 효릉(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

예릉(25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3기 왕릉과 함께 소경원(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이 있어

면적이 대략 150만 평에 달했다.

일제강점기에 침탈을 겪으면서 훼손되기 시작해 2009년 현재 남아 있는 능역은 고작 6만여 평 정도다.

그것도 절반만 공개되고 있을 뿐이다.

 

비공개 능역들 사이로는 말이 뛰어노는 종마 목장, 경마 교육원이 있고

그 옆으로는 세계문화유산이 무색한 수십만 평의 목장이 있다.

바람이 부는 봄이면 도저히 왕릉을 답사할 수 없을 만큼 심한 악취가 난다.

마장으로 말을 보러 오는 관광객 때문에 왕릉 주차장까지 내주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능역에는 거대한 규모의 골프장이 들어서 있다.

효릉의 안산에는 골프장 휴게소가 왕릉을 내려다보고 있다.

골프장 안쪽 서삼릉 능역 바로 앞에는 스카우트 훈련원이 있는데,

이곳은 바로 회묘의 정자각이나 사당이 있어야 할 자리이다.

대학도 능역에 들어서 있고 군부대도 서삼릉 내에 들어와 있다.

 

금천을 통해 들어와야 할 참배의 동선은 이미 엉망이 되었고,

희릉은 종마 목장과 경계를 이루는데 거리가 50m를 넘지 않는다.

예릉도 한쪽만 숲으로 연결되어 있고 나머지 세 방향은 목장에 둘러싸여 있다.

주산과 금천, 안산은 그 역할을 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이고 훼손도 심각해 효릉 출입이 통제되고 말았다.

효릉 앞 목초지의 넓이는 무려 20여만 평이 넘는다.
능역 곳곳에는 수령이 100년은 되어 보이는 적송이 군데군데 남아 있어

훼손 전에 소나무 숲이 얼마나 울창하고 아름다웠을지를 짐작게 한다.

훼손이 심각한 서삼릉 능역을 전통 조경의 방법으로 복원하려면 오랜 시간과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조선 왕릉을 살아 있는 문화유산으로 만들기


훼손이 매우 심각한 능역은 식재나 공원 조성 같은 방법보다는 미래 지향적인 복원 방법에 대해

고민하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먼저,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릉에 대한 교육, 전시, 체험을 위한 왕릉 관련 시설이

건립되어야 한다. 또 조선 왕릉에 대한 연구 및 조사를 위한 시설물이 필요하다.

1차 문헌 사료를 통한 왕릉과 의궤의 연구, 왕릉의 조성과 석물 가치, 능 조영 방법의 특징 및

이곳에 담긴 조선의 사상 등을 폭넓게 연구하려면

박물관이나 홍보관, 전시관, 교육관, 체험관의 건립이 절실히 요구된다.


두번째로 조선 왕조의 전통 장례를 문화 행사로 재현한다면 의미 있는 볼거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장례 행렬 도구는 상설 전시하고 상여는 국상에 사용할 수 있는 방안도 생각해봄직하다.

 

세번째로 왕릉 부근에 외국인을 비롯한 관광객을 위한 왕릉촌 건립을 건의한다.

조선시대에도 왕릉 제례를 위해 능역 부근의 객사나 행궁 등에서 묵으며 제례를 봉행했다.

능 주변을 전통 가옥의 왕릉촌으로 꾸며 왕의 행차를 재현하고 관광지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왕릉 부근을 왕릉 관련 사업으로 유도하는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수라상의 현대적 개발, 궁중 복식의 재현 및 상품화, 능지기 마을의 재현 등으로

왕릉이 살아 있는 문화유산으로 재탄생하길 바란다.

 

 

▲창릉(서오릉에 있는 다섯 개의 능 가운데 하나)

예종(8대)과 계비 안순왕후의 능이다.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태라 진입공간에서 왕과 비의 능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홍릉(서오릉에 있는 다섯 개의 능 가운데 하나)

영조(제21대)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
영조의 자리를 비워두었으나, 영조는 승하 후 계비 정순왕후와 동구릉 내에 있는 원릉에 안장되었다.

주변의 난개발로 능역 훼손이 심각하다.

  

 

 

▲경릉(서오릉에 있는 다섯 개의 능 가운데 하나)

덕종(성종의 생부인 의경세자, 추존왕)의 원비 소혜왕후의 능으로 왕의 능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한다.
덕종은 왕세자의 신분으로 승하했고,

소혜왕후는 승하 당시 왕대비(인수대비)였기 때문에 더 높은 곳에 위치하며, 석물도 더 풍성하다.

  

▲현릉(동구릉에 있는 아홉 개의 능 중 하나)

문종(5대)과 현덕왕후의 능으로 <국조오례의>의 정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능이다.

 

▲경릉(동구릉에 있는 아홉 개의 능 중 하나)

헌종(24대)과 원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삼연릉이다.

   

▲유릉(홍유릉에 있는 능 중 하나)

순종(27대)황제와 원비 순명황후, 계비 순정황후의 능.
대한제국 선포에 따라 황제가 되어 능역도 명나라 태조의 효릉 방식에 따라 조성했다.

 

 

 

 

 

 

4. 이야기와 함께하는 건원릉 

    - 산 자와 죽은 자의 정치가 만나는 곳

 

 

 

생이 짧다. 못다 한 일이 많다.
삼시 세끼 따뜻한 밥을 먹고 싶다던 백성의 소박한 바람마저도 이뤄주지 못했다.
그런데 어찌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겠는가.
저 산 너머 굽이굽이에서 들려오는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밖에 못하지만, 그 원성이나마 들어주고 싶다.
왕의 육신은 잠들어도 왕의 정신은 잠들지 못한다.


 

왕이 살아서 정치를 하는 곳이 궁궐이라면, 죽어서 정치를 하는 곳은 왕릉이다.

왕릉은 선왕과 후왕이, 그리고 조정 대신들이 정치 권력을 두고 주도권 싸움을 벌이는 장소다.

아름다운 조선 왕릉은

조선 왕조의 사상과 문화뿐 아니라 정치사를 읽어내는 데도 아주 흥미로운 텍스트다.
- 신병주,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양주 검암산 자락(현재의 구리시)에 있다.

최고의 명당이라 그런지 태조 이후에도 문종(현릉), 선조(목릉), 현종(숭릉), 영조(원릉), 헌종(경릉) 등

여섯 명의 왕이 이곳으로 왔다.

장렬왕후(인조의 계비)의 휘릉과 단의왕후(경종의 원비)의 혜릉 등 두 명의 왕비,

왕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수릉)까지 함께 하면서 총 아홉 기의 왕과 왕비의 능이 조성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동육릉, 동칠릉으로 불리다가 문조(효명세자)의 무덤이 철종 때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현재 지명인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조선 시대 스물일곱 명의 왕 중 여섯 명의 왕의 능(22.2%)이 이곳에 조성되었다.

산자락이 여러 군데로 뻗쳐 있어 대규모 왕릉군을 조성하기가 유리했고,

풍수지리로도 더할 나위 없는 명당자리다.

또 왕실의 무덤은 서오릉이나 서삼릉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집단적으로 조성되는 경향이 있다.

가능하면 선조의 무덤이 있는 곳에 묻히려는 후왕의 의지,

같은 경역 내에 왕릉을 조성하면 관리가 용이하다는 점 등이 고려되어

동구릉 지역은 조선 최대의 왕릉 조성지가 되었다.


왕릉은 단순히 왕과 왕비의 무덤이라는 측면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무덤을 조성한 지역과 곁에 묻힌 인물을 통해 당시의 정치적 입장을 살펴볼 수 있으며,

왕릉 주변에 조성된 석물을 통해 당대 건축과 미술사의 흐름까지 읽을 수 있다.

왕릉 조성을 위한 여러 과정은 당시의 문화와 사상을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다.

조선의 첫 왕릉인 건원릉 역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죽어서는 신덕왕후와 함께하지 못한 태조


<태종실록>에는 건원릉에 관한 기록이 몇 차례 등장한다.

이 기록을 보면 태조의 장례식에는 불교적 요소가 다분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회암사 같은 왕궁에 견줄 만한 절을 조성하고

이곳에 기거하려 했던 태조 생전의 처신과도 일면 부합한다.

1408년 9월 9일 태종은 영구를 받들고 건원릉에 가서 장사를 지냈다.


그런데 태조는 처음부터 지금의 건원릉 자리에 묻히고 싶어 했을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사실 태조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계비 신덕왕후 강 씨의 무덤인 정릉(貞陵) 옆에 묻히기를 원했다.

 

조 생전에 신덕왕후가 사망하자 태조는 지금의 덕수궁 근처 정동에 정릉을 조성하고

경복궁 궁궐에서도 늘 왕비의 무덤을 보곤 했다. 그리고 자신도 죽은 후 그곳으로 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태조의 능인 건원릉 조성을 결정한 태종이 누구인가?

계모 신덕왕후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아버지에 반대해 왕자의 난까지 일으킨 인물이 아니던가?

신덕왕후와는 철저히 원수지간이었던 태종은 태조 생전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태조 사후에는 눈엣가시 같은 정릉을 경기도 외곽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정릉이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태종은 이것도 성에 차지 않았던지, 서울에 큰 홍수가 일어나 청계천 광통교의 다리가 떠내려가자

정릉의 석물들을 뽑아 다리로 만들었다. 광통교 석물 일부에는 정릉 병풍석의 흔적들이 남아 있으니,

600년 전 역사의 현장이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쉬는 것이다.

원래 정릉이 있던 곳이라서 붙은 이름인 정동(貞洞)은 희미하게나마 신덕왕후의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신의왕후나 신덕왕후의 무덤 곁에 조성되지 못했다.

신의왕후는 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사망하여 개성의 재릉에 묻었으나,

개성은 새 왕조 조선의 첫 왕을 묻을 곳으로는 적절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태조의 무덤을 계비인 신덕왕후의 곁에 만들 수도 없었다.

왕릉 조성의 실질적인 책임자 태종은

아버지가 계모 신덕왕후와 함께 있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원릉의 배위, 정자각 뒤로 보이는 비각과 능침.

건국 시조지만 그리 크거나 웅장하지 않다.

 

 


잔디가 아니라 억새가 무성한 사연

 


태조의 무덤에는 특이하게 잔디가 아니라 억새가 심어져 있다.

조의 유언을 따라 아들 태종이 고향 함흥의 억새와 흙을 가져와 봉분을 덮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여러 왕이 태조의 사초는 특별히 관리한 정황이 나타난다.

생전에도 많은 갈등을 겪었던 아버지 태조와 아들 태종.

태종은 무덤마저도 아버지가 원치 않는 곳에 조성했지만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만은 거절하지 못했다.

건원릉의 억새풀에는 아버지가 진정 묻히길 원치 않던 곳에 아버지를 묻은 불효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고자 했던 태종의 마음이 반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건원릉은 조선 건국 시조의 무덤인 만큼 역대 왕들이 어느 무덤보다 관리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태조 이후에도 여러 왕의 무덤이 함께 조성되어 자연히 왕릉 관리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러나 실록에는 건원릉이 수난을 당한 사례도 자주 나타난다.

종 때에는 호랑이의 발자국이 건원릉으로 향했다는 보고가 올라와 조정을 잔뜩 긴장시켰으며,

선조 때에는 건원릉과 현릉(문종의 무덤)에 불이 나서 해당 관원을 문책하기도 했다.

<고종실록>에는
“지금부터 건원릉 참봉은 반드시 대군과 왕자의 봉사손 중에서 선발하라”는 기록이 있어서,

특별히 왕실의 후손을 선발해 건원릉의 관리를 맡겼음을 알 수 있다.


2009년 6월, 조선 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제까지 왕릉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거의 비슷하게 생긴 것처럼 보이는 왕릉은,

개별 왕릉 하나하나에 대한 역사와 문화에 얽힌 이해 없이는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못한다.
이 왕릉의 주인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정치를 펼쳤고, 후대의 왕은 선왕과 어떤 관계였고,

당시 왕릉을 조성할 때는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를 안다면,

처음에는 엇비슷해 보여 구별이 가지 않던 왕릉의 다른 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건원릉뿐만 아니라 모든 조선 왕릉은 그 자체로 조선왕조실록인 셈이다.

 

 

 

 

 

 

5. 세계의 왕릉을 가다 

    -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상대적인 시선

 

 

 

왕릉은 절대적 존재를 영원히 기리고자 하는 상징물이다.

그러나 그 절대적 존재에 대한 시각과 형상화는 놀랄 만큼 상대적이다.

무엇이 낫고 못하고를 가리자는 것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의 산물인 왕릉을 통해, 다른 문화를 경험해보자는 것이다.

어떤 왕릉은 왜 깊은 산속에 있는지, 왜 천애 절벽에 있는지 궁금해하며 말이다.
- 김태식, 연합뉴스 문화부 기자

 

 

미국에는 왕릉이 없다. 반만 년을 헤아리는 우리에 비해 역사가 짧아서가 아니다.

미국은 1776년 7월 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이래 지금까지 약 230년이 흐르도록

한 번도 왕의 존재를 허락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왕과 왕국을 경험하지 못한 그들에게 넘버원 ‘내셔널 트레저National Treasure’는 독립선언서다.

미국에는 왕릉이 없지만,

그 모국인 영국에는 지금의 엘리자베스 여왕에 이르기까지 줄곧 왕이 존재해왔다.

그 왕이 실제로 국가와 국민 위에 군림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결국 왕릉은 철저히 지역과 시대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왕릉을 생각할 때 이 점을 먼저 확실히 해야 한다.

왕릉이 없는 곳도 있고, 있었던 시대도 있으며, 그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곳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까닭에 같은 왕릉이라 해도, 그 모양이나 그를 향한 사람들의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고,

그 자리 또한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같은 한국사 안에서도 시대에 따라 왕릉은 많이 다르다.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 왕릉을 비교하면 단박에 드러난다.

이들의 공통점을 이른바 ‘인류 보편적 가치’라고 할 수 있을 테고,

다른 점을 ‘독자성’ 혹은 ‘특수성’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천애 절벽의 페르시아 왕릉


중국 광동성 광주의 도심에는 상강이라 일컫는 해발 49.71m의 야트막한 구릉이 있다.

1983년, 공사 중에 이곳에서 옛 무덤 하나가 발견됐다.

고고학자들이 조사를 벌인 결과, 놀랍게도 이 무덤은 기원전 200년 무렵에 건국되어 약 100년 동안

지금의 중국 남쪽 일대를 호령한 남월국(南月國)의 두 번째 임금인 조말(趙昩)의 왕릉으로 밝혀졌다.

그는 죽고나서는 문제(文帝)라는 이름을 받았다.
지금은 발굴 현장을 중심으로 이 왕릉에서 쏟아진 각종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이 왕릉은 이미 있는 야산을 최대한 그대로 이용해 만들었다.

자연 그대로의 야산을 봉분처럼 이용하면서, 마치 두더지 굴을 파듯이 공간을 조성한 다음,

안에 임금의 시신을 안치한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조금만 흘러도 야산과 무덤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남월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왕릉을 만들었을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도굴을 우려했기 때문이 아닐까.

무덤, 특히 왕의 무덤에는 시신만 덜렁 묻는 게 아니라 각종 진귀한 물품을 넣곤 했으니까.
이 때문에 왕릉은 늘 도굴꾼의 표적이 되곤 했다.

그래서 아예 자기 무덤에 보물을 넣지 못하게 하거나

심지어 그곳이 무덤인 줄 모르게 아무런 표식도 못하게 했다.

여기서 표식이란 대체로 무덤 위에 흙으로 봉긋하게 쌓아 올린 봉분을 말한다.

흉노를 비롯한 북방 유목 국가들에서는 대체로 봉분을 만들지 않는다(사진 1).


시간이 많이 흘러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에서도 황제들은 봉분이 없는 황제릉을 조성했다.

요즘 몽골 고원에는 매년 여름이면 세계 각국에서 고고학자들이 몰려들어 각지에서 발굴을 벌인다.
이들이 품은 꿈 중의 하나는 몽골제국을 건설한 칭기즈 칸의 무덤을 찾는 일이다.

칭기즈 칸 또한 도굴에 대한 우려 때문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자기의 무덤을 조성하게 하고,

봉분을 만들지 말라고 유언했다.


그런가 하면, 아예 천 길 낭떠러지 암벽을 파서 왕릉으로 만든 경우도 있다.

지금의 이란 일대에서 기원전 700~500년 무렵에 번성한 고대 페르시아 왕국이 그랬다.

이란 중부 사막 지대의 우뚝 솟은 바위산에 형성된 나크시-에 로스탐(Naqsh-e Rostam)이란 유적

수십m나 되는 암벽 중턱을 따라가며 十자 모양으로 표면을 깎아내고 그 정중앙을 방형으로 구멍을 파서

나란히 네 개의 왕릉을 만들었다. 이들은 지표면에서 대략 10m는 될 듯한 지점에 있다.

이들 왕릉 주인공은

크세르크세스, 다리우스 1세, 아르타크 세르크세스 1세, 그리고 다리우스 2세라고 일컬어진다(사진 2).

 

 

 

세계에서 가장 큰 왕릉은 어디에?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세계 최대의 왕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우리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덩치 챔피언’은 일본에 있다.

일본 오사카 사카이 시(堺市)라는 곳에 있는 다이센료 고분(大仙陵古墳)이 그 주인공이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그 모습이 열쇠 구멍 같다. 앞쪽에는 사각형의 평탄한 대지를 만들고,

그 뒤쪽에 봉분을 쌓아 올렸다.

그래서 앞쪽은 네모나고, 뒤쪽은 둥글다 해서 이런 무덤을 일본에서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 한다.

그 주변으로는 거대한 도랑 겸 호수가 세 겹으로 형성돼 있다.

이런 도랑 시설을 해자(垓字)라 한다(사진 3). 

 

규모를 보면, 앞쪽 사각형 평탄 대지에서 뒤쪽 원형 봉분까지 길이가 자그마치 486m다.

그 앞쪽 폭은 305m에 이르며, 뒤쪽 봉분은 지름 245m, 높이는 35m나 된다.

그 주변을 두른 도랑은 외곽 기준으로 길이가 무려 2718m나 된다.

이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무덤은 일본 황실 재산이다.
천황, 혹은 그 조상이 묻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고분이니 당연히 일본에서는 이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일본에는 이만한 규모에 이르는 고분이 또 하나 있으니,

같은 오사카 하비키노 시(羽曳野市)에 있는 곤다고뵤야마 고분(譽田御廟山古墳)으로, 422m 길이가 된다.


한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고분은

경주시 황남동 대릉원 안에 있는 황남대총으로, 봉분 두 개를 이어붙인 쌍분이다.

그 규모는 남북 길이 120m, 높이 23m이니,

이에 비해 이들 일본의 옛 무덤이 얼마나 규모가 방대한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왕릉의 덩치와 비례해 무덤을 만든 왕조의 국력을 가늠하는 경향이 많다.

인도 무굴제국의 샤자한이 죽은 왕비를 추모해 건립했다는 타지마할도

비슷한 시각에서 평가하는 사람도 있지만 왕릉의 덩치와 국력은 하등 관계없다.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이 힘만 자랑한다는 말이 있다.

덩치만 큰 왕릉이 어쩌면 이에 딱 맞을 수도 있다.

조선 왕릉이 이번에 세계유산에 등재된 까닭을 나열한 항목에 ‘덩치’는 없었다.

 

 

 

 

 

 

6. 조선왕릉을 가꾸는 사람들 

    - 왕과 나, 500여 년 역사를 뛰어넘은 이웃

 

 

 

1910년, 519년간 27명의 왕이 이어온 조선 왕조가 끝났다.

존경받은 왕도 있었고, 전쟁에 패해 굴욕을 당한 왕도 있었다.

그 생이 어찌 됐든, 왕이 남긴 모든 흔적은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홍릉과 유릉을 알리기 위해 힘쓰는 이창수 남양주문화원장과

광릉에서 문화유산 해설을 하는 정동석선생을 만나 왕릉을 가꾸는 일의 보람에 대해 들었다.
- 강혜란, 경기문화재단 문화홍보팀

 

 

홍 · 유릉, 굴곡진 역사를 간직한 곳


남양주에 있는 네 개의 왕릉 가운데 가장 달라 보이는 것은 고종의 능인 홍릉과 순종의 능인 유릉이다.

왕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봐도 그 다름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홍릉과 유릉은 황제의 능이기 때문에 왕의 능과 달리 조성했습니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고종과 순종은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능도 명나라 태조의 능인 효릉의 형태를 따랐습니다.

조선의 다른 왕릉과 비교했을 때 여러모로 이국적인 느낌이 납니다.”
홍릉과 유릉에서 만난 이창수 남양주문화원장이 왕의 능과 황제의 능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주었다.

 

가장 큰 차이는 석물의 위치와 모양이다.

능침 앞에서 능을 호위하고 있는 석물들이 참도 아래로 내려와 있고,

그 종류도 문인석과 무인석을 비롯해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등 다양하다.

그 때문에 참도와 정자각이 늠름해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능침은 허전해 보인다.

“석물이나 정자각뿐 아니라 다른 능에 없는 연지가 있는 것도 특징이지요.

동그란 연못에 동그란 섬이 떠 있는 연지는 일장기를 상징합니다. 아픈 역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거지요.”
왕릉에조차 남아 있는 일제의 잔해에 씁쓸함이 밀려왔다. 제의 위엄보다는 제국의 유약함이 느껴졌다.

 

이 원장은 패망이 남긴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며,

이 연지를 메우기보다는 그대로 간직하고 보존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수치스럽다고 해서 지워버리면 역사에서 무얼 배울 수 있겠느냐는 의미다.

“둘러봐서 알겠지만 이곳은 능역도 넓고, 볼거리도 풍부하고, 사연만큼이나 생각할 거리도 많습니다.

이곳이 관광지는 아니지만, 함께 보고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답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남양주문화원에서는 지역민뿐 아니라 국군장병을 대상으로도 왕릉 탐방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군인들이 제대 후에 남양주의 문화유산을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문화 체험 기회가 많지 않은 군인들에게 이 행사는 무척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지방에서 올라온 군인들 가운데는 능을 처음 보는 이들도 제법 된다.


“능과 관련한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기신제입니다.

가능하면 원래대로, 조선 시대 왕의 제사를 지내던 방식대로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바꾼 부분도 있습니다.

옛날 방식 그대로라면 시민들은 감히 들어올 엄두도 못내겠지요.”
제례를 지내는 방식이나 마음가짐은 그대로되,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의 범위는 늘렸다는 이야기다.

이제 왕은 저 멀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이웃한 아주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이곳 왕릉에서 역사가 기록한 그의 업적이 아니라 그의 인간적 고뇌에 관해서도 생각해본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역사 기행


광릉은 왕릉보다 숲이 더 유명하다.

벌목은 물론, 풀 한 포기 밖으로 옮겨 심지 못하게 했던 왕릉의 관리 원칙 덕분이다.

광릉에서 이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무를 사사로이 옮길 수도, 벨 수도 없다.

그러나 온전히 보존된 숲과 달리,

석물은 시간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풍화되고, 마모되어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다.


“세조는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해 봉분을 보호하던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고 했어요.

병풍석에 새기던 십이지신상을 난간석에 새겨 넣었는데, 풍화되어 그 흔적을 보기 어렵지요.

여기 그나마 흔적 하나가 남아 있네요.

시계 방향으로 십이지신상을 새겨 넣었으니 자리만 봐도 뭔지 알겠지요?”
광릉에서 만난 정동석 문화유산 해설사의 말이다.

그는 일반인의 상식 수준에서 조선 왕릉을 설명한다 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42기의 왕릉이 비슷해 보인다. <국조오례의>에 따라 능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조금씩 모양새가 다르다.

이 다른 것을 특징으로 설명하는 게 그의 문화유산 해설비법이다.


광릉은 세조의 유언에 따라 조성돼 다른 왕릉과 차별화되는 점이 많다.

병풍석도 없고, 내부 또한 돌방으로 만들지 않고

회격(관을 구덩이에 넣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으로 처리했다.

급격한 구릉의 경사도 그대로 이용해 사초지가 여느 능과 다르게 높다.

이 때문에 능침에서 저 멀리에 있는 광릉 숲이 내다보인다.

다른 왕릉에 비해 생략된 것이 많지만, 세조의 위풍당당한 품격은 살아 있다.

 

▲광릉

간소하게 능을 조성하라는 세조(7대)의 유언에 따라 봉분 내부에 돌방을 만들지 않았고,
병풍석도 세우지 않았다. 홍살문과 정자각에 이르는 길인 참도가 없는 유일한 능이다.

 

 

 
“퇴직하기 전에는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습니다. 전에 했던 일과 달라 공부를 많이 해야 했지요.

왕릉 조성의 근간이 된 <국조오례의>도 보고, <조선왕조실록>도 살펴보고,

신문 스크랩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역사 관련 강좌가 열리면 꼭 참석하려 하죠.”
그가 문화유산을 쉽게 해설할 수 있는 이유는 ‘공부’ 덕분이다.
끊임없이 배우려는 자세를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리라.

퇴직해 편안하게 노후를 보낼 수도 있건만 굳이 땡볕에 가파른 왕릉을 오르며

문화유산 해설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이유는 단순하고 태도는 단호했다.

노인정에서 마냥 무료한 나날을 보내다 죽을 순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 문화유산해설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묻자,

그는 세조비 정희왕후의 능에 있는 석물에 대해 이야기했다.

현재 광릉의 석물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지 못하다.

풍화로 인해 외형이 닳은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전쟁의 폐해로 부서진 석물이 많다.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탓에 망주석은 두 동강이 났다.

가장 바깥에 자리한 석마 한 마리는 반파되어 실체를 알 수 없다.

이 석물들이 복원을 통해 온전해지길 바라는 그의 간절한 마음이 듣는 이에게도 전해졌다.

  

▲정동석 문화유산 해설사


수학교사 생활을 하다 퇴직한 후 문화유산 해설에 관심을 갖게 되어 2001년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종묘를 비롯해 창덕궁, 서울역사박물관, 광릉 등에서 문화유산 해설을 하고 있다.

광릉에서는 숲해설도 겸하고 있다. 요즘은 ‘수학’의 명료함보다 ‘역사’의 재미에 푹 빠져 있다.

  
-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나루> 6호, 2009년 9-10월호

- 사진 제공 : 이주현, 문화재청 궁릉문화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