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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조선왕릉의 비밀] ② 장릉(章陵 : 김포 원종릉)

Gijuzzang Dream 2009. 9. 7. 11:31

 

 

 

 

 



사적 제 202호/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산 141-1



장릉 가는길
공항로(외곽순환도로 김포IC)→48번국도를 이용 김포, 강화방면→
김포시청입구(사우동) 에서 좌회전→
김포시청 정문에서 좌회전 200M 오면 오른쪽으로 장릉


 

 

 


 

 

 

 장릉(章陵)




장릉은 봉분 아래에 얕은 호석만 둘렀을 뿐, 병풍석과 난간석은 생략되었다.
이는 추봉한 다른 왕릉의 전례를 따른 것이다. 석물만 왕릉 형식으로 상설하였다.


조선 16대 인조의 부모인 원종(元宗, 1580~1619)과 인헌왕후(仁獻王后, 1578~1626) 구씨를 모신 능이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으로 용모가 출중하고 태도가 신중했으며,

성과 우애가 남달라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참도는 다른 능들과 달리 경사진 참도를 통해 정자각에 이르게 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정자각이 높은 곳에 지어진 형태이다.

 

 

정원군은 처음엔 양주군 곡촌리에 묻혔다.

큰아들 능양군(인조)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정원군은 대원군에 봉해졌고,

묘가 원으로 추숭되어 흥경원(興慶園)이라 했다.

1627년 인조는 정원군묘를 김포현의 성산 언덕으로 천장했고,

1632년 다시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원종, 능호를 장릉이라 했다.

 

 


능역 바깥, 장릉 남쪽에는 연을 가득 심어놓은 연지가 있다.


 


사등신 비례의 몸에 경직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문,무석인과 망주석.
세부조각은 문석인보다 무석인이 더 화려하다.

 

인헌왕후는 아들(인조)이 즉위하자 연주부부인이 되었고, 궁호를 계운궁(啓運宮)이라 했다.

1626년 4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김포 성산 언덕에 예장하고 원호를 육경원(毓慶園)이라 했다.

흥경원을 이곳으로 다시 천장하면서 원호를 흥경원이라 합쳐 불렀다.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는 두 봉분 앞에 혼유석이 각각 놓여있는 쌍릉의 형식으로

봉분은 지면과 맞닿은 부분에 아무런 조각, 무늬도 새개지 않은 호석을 두르고 있다.

이것은 추존 전에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두 봉분 사이에 있는 팔각장명등에는 꽃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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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에서 발간한 [조선 왕릉 답사 수첩] 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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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릉(章陵 - 추존 원종 · 인헌왕후)

 

선조의 아들. 왕자로 태어나서 광해의 핍박왕기에 눌려살고

… 인조의 선친 죽어 왕좌에 앉다

 

 

김포시청 뒷산 너머에 자리한 장릉(章陵)은

원종(元宗 · 1580~1619)과 그의 부인 인헌왕후(仁獻王后 · 1578~1626) 구씨의 무덤이다.

원종이란 이름이 우리에게 낯선 까닭은 그가 생존 당시의 임금이 아니라 추존된 왕이기 때문이다.

원종은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1595~1649)의 아버지이자 선조임금의 아들인 정원군(定遠君)으로,

그가 죽었을 당시에는 '군(君)'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1623년 광해군을 축출시킨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인조)이

임금이 되자, 이미 고인이 된 정원군은 정원대원군으로 높여졌고,

10년 후인 1632년(인조 10년)에 원종으로 추존된다.

그 뿐만 아니라 양주 곡촌리(현재 남양주시 금곡동) 처갓집 선산에 초라하게 묻혀있던 원종의 무덤은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장릉'이 된 것이다. 살아있을때보다 오히려 죽은 뒤에 대접을 받은 셈이다.

 

 

필자의 전공이 풍수지리이기 때문에 풍수와 관련해 두 가지 관점에서 장릉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장릉봉분 근경

추존 전에 조성돼서인지 간결하게만 보이고,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는

두 봉분 앞에 혼유석이 각각 놓여 있다. 봉분의 지면에 맞닿은 부분에

아무런 조각이나 무늬도 없는 호석만을 두르고 있다.

 

 


#광해군의 풍수 핍박을 받은 원종

풍수술사들 사이에 '명당 쓰고 인물 나는가 하면, 인물 나고 명당 쓰기도 한다'는 말이 있다.

언뜻 보면 아들이 임금이 되자 지금처럼 양지바르고 넓은 곳으로 옮겨졌으니 인물 나고 명당 쓴 셈이다.

그런데 원종은 그렇게 간단히 해석할 수 없는 풍수지리와의 모진 인연이 있다.

정원군(원종)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과 비범한 관상으로 부왕인 선조 임금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선조가 죽고 이복형인 광해군이 임금이 되자 정원군은 '잠재적인 정적'으로서

광해군에게 집중적인 견제와 감시를 받았다.

특히 정원군의 어머니 인빈김씨의 무덤과 정원군이 살던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소문 때문에

광해군은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 와중에 1615년(광해군 7) '신경희 옥사'라는 사건이 터진다.

소명국이란 사람이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이 신경희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 한다'고

무고를 하자 광해군은 능창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 죽게 한 것이다.

한편 정원군이 아들을 잃은지 2년후인 1617년(광해군 9)에는

지관 김일룡이 "새문동에 왕기가 서려있으니 그곳에 궁궐을 짓자"고 광해군에게 보고하는데,

왕기가 서렸다는 새문동터는 다름 아닌 정원군이 살던 집터이다.

이에 광해군은 정원군의 집터를 빼앗아 경덕궁(현재의 경희궁)을 짓게 한다.

사랑하던 셋째 아들 능창군이 광해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자신이 살던 집터까지

광해군에게 빼앗기자 정원군은 술로 화병을 달래다가 2년 후인 1619년(광해군 11) 40세로 죽는다.

그래도 불안했던지 광해군은 정원군의 무덤 자리를 제대로 고르지 못하도록

장례기간의 단축을 재촉하고 조문객을 감시하도록 한다.

유족들은 장지를 고를 엄두도 내지 못한채, 정원군의 처가 선산에 그를 대충 안장한다.

여기까지 보면 정원군과 광해군의 싸움에서는 광해군이 완벽하게 이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원군이 세상을 떠나고 4년 후인 1623년에는 광해군이 쫓겨나고

정원군의 큰 아들인 능양군이 임금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인조 다.

그때까지 살아있던 정원군의 부인(인헌왕후)은 아들이 임금이 되자 마치 남편의 한이라도 풀 듯

빼앗긴 새문동 집터(경덕궁)로 되돌아가 몇 년을 살다가 1626년에 숨을 거둔다.

이렇게 보면 결국 광해군이 정원군의 부인을 위해 궁을 지어준 셈이다.



 

   

장릉 혼유석의 고석.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이장을 결심한 인조

인헌왕후가 죽자 아들 인조는 어머니를 아버지 무덤 옆에 합장하지 않고 새로운 자리를 찾게 한다.

광해군에 의해 동생 능창군을 잃고 아버지 정원군이 화병으로 죽은 사실을 괴로워했던 인조로서는

어머니와 아버지 무덤 선정에 각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산141-1

 

 

무덤 선정 과정에 대해 인조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1619년 아버지(정원군)가 상을 당했는데 그때 광해군이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날로 극심했고,

또 다그치고 감시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감히 마음대로 장지를 정하지 못해

외가의 선산에 임시로 장사를 지냈다. 하지만 그곳은 길가의 낮은 언덕일 뿐만 아니라

모양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유골이 편안하지 못하고,

나무꾼과 가축치기들이 함부로 다니는 것이 염려돼 이장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별고가 잇따랐으므로 지금까지 실천하지 못했으니 이 역시 과인의 큰 불효인 것이다.

양주의 풍양(진접읍)에 할머니(인빈김씨)의 산소가 있기는 하지만

산세가 높고 가파르며, 언덕이 짧고 감싸 도는 데가 없어 쓸 만한 자리가 없다.

도감으로 하여금 나라에서 쓰려고 해 둔 것 가운데서 사의(私意)에 따르지 말고 극진히 가려서

장지를 정하게 하라. 그리고 아버지의 산소도 개장할 계획을 세워

한편으로는 신도(神道)를 편안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나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라."

그렇게 해서 정해진 것이 '김포객사(金浦客舍 · 현재의 김포시청)' 뒷산 너머에 자리한 현재의 장릉이다.

즉 인조의 어머니를 현재의 장릉에 먼저 안장하고, 이후 아버지(원종) 무덤을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장릉 연지. 장릉의 남쪽에는 연꽃을 가득 심어놓은 연못이 있다.

왕릉에 연지가 조성된 곳은 이곳 장릉과 홍유릉이 있다.

 


#왕릉 풍수 용어의 혼란

장릉을 풍수호사가들이 자주 찾는 까닭은 이곳이 왕릉 가운데에서도 대단한 길지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곳으로 정원군이 안장된 이후 비록 그 아들 인조가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기는 했지만

대대로 그 후손들(효종→현종→숙종→경종…)이 임금이 돼 조선을 지켜갔기 때문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조선왕릉을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몇 번 답사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마다 왕릉 뒤 약간 볼록한 부분을 가리키면서

"바로 이곳이 지기가 뭉쳐진 '잉(孕)'이지요?"라는 확인성 질문을 받곤 했다.

예전에는 전혀 쓰이지 않았던 이 '잉'이란 풍수용어가 왜 갑자기 등장한 것인가?

조선의 모든 왕릉 선정에는 풍수의 전문가, 즉 지관(地官)들이 참여해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왕릉 관련 전문가들이나 해설사들은 '왕릉과 풍수'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잘못된 풍수용어의 남용이 아주 심각하다는 점이다.

일부 풍수술사들이 왕릉 관련한 책을 내거나 답사기를 쓰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풍수용어들을 왕릉의 지형지세에 자의적으로 대응시키면서 생겨난 것인데,

이것을 참고로 해 다시 왕릉을 해설하면서 생겨난 문제이다.

 

왕릉선정에 참여한 당시 지관들은 '경국대전'에 명시된 풍수서들을 공부한 뒤,

국가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이른바 지관이란 '국가공무원'이 될 수 있었다.

참고로 조선조 지관 선발 필수과목은 다음과 같다.

 

 


# 조선조 지관 선발 고시 과목

1. 청오경(靑烏經) 2. 장서(葬書: 일명 금낭경 錦囊經) 3. 지리신법(地理新法: 일명 호순신 胡舜申)

4. 명산론(明山論) 5. 지리문정(地理門庭) 6. 감룡(감龍) 7. 착맥부(捉脈賦) 8. 의룡(疑龍)

9. 동림조담(洞林照膽)

따라서 왕릉을 풍수적으로 이야기할 때

위의 풍수서들을 근거로 해 정확한 용어 사용과 해설이 뒤따라야하며,

왕릉 관련 풍수답사기를 쓰는 이들의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한번 잘못 사용된 용어들을 훗날 정정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 글/김두규 우석대교수,  사진 / 조형기 편집위원
- 2010.04.22   경인일보,
 

 

 

 

 

 

 

 

 장릉 - 원종(인조의 친부모)

 

 

포근한 매화낙지형 터 대원군(大院君) 묘제에 맞춰 조성

 

 

1) 장릉의 연못은 천원지방설에 따라 조영된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이다. 장릉 연못의 아름다운 연꽃.

 

 

장릉(章陵)은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 3∼1649. 5)의 아버지인 추존왕 원종(元宗, 1580∼1619)과 비 인헌왕후(仁獻王后, 1578∼1626) 구씨(具氏)의 능으로, 난간이 없는 동원쌍릉이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定遠君)이며 이름은 부( )다.

 

정원군은 선조와 인빈김씨 사이에서 난 세 번째 아들로, 친모가 낳은 형제가 9명이나 된다. 선조는 여러 부인 중 인빈김씨를 총애했다. 생모의 힘으로 그의 동복형 신성군이 세자 책봉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임진왜란 때 병사했다. 신성군이 아들 없이 죽자 선조는 인빈김씨의 봉사(奉祀 · 제사를 받듬)를 정원군에게 맡겼고, 정원군은 자신의 셋째 아들 능창군에게 신성군의 봉사를 위임했다.

 

이처럼 선조의 사랑을 받은 정원군은 이복형인 세자 광해군의 섭정에 불만을 갖고 자주 정치에 개입했다. 선조가 근심이 많을 때 정원군의 큰아들 종(倧 · 능양군, 인조)은 할아버지 앞에서 재롱을 부리고 그림을 그려 바쳐 각별한 사랑과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선조의 급서로 이복형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정원군도 어려움에 처했다.

정원군은 임란 중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봉해졌으나, 셋째 아들 능창군이 광해를 축출하려는 역모 사건에 연루돼 곤욕을 치렀다. 능창군은 신성군의 아들로 입적돼 대북파의 지지를 받고 있어 광해군에게는 정적이었다.

 

‘광해군일기’(광해군이 폐위돼 실록이라 하지 않고 일기로 명명)에 “능창군은 역모로 몰려 위리안치(圍離安置)돼 냉방에서 자고, 모래와 흙이 섞인 밥이라 먹지 못해 나인 관동이 던져주는 밥을 얻어먹다 목매 자살했다”며 이 사건은 “광해군이 넌지시 유도했다”고 전한다.

 

광해군은 인왕산 아래 새문리(塞門里)에 있는 정원군의 집터에 왕성한 기운이 돈다는 설이 나돌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민가 수천 채를 헐고 그 자리에 이궁인 경덕궁(慶德宮)을 지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관동이 광해 때는 내놓지 못하고 흙 속에 묻었다가 인조반정 이후 알려졌다고 한다. 이는 광해군을 음해하고 인조반정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적인 글귀로 해석된다.

 

병풍석과 난간석 없이 단순 둘레석만

 

정원군은 어려서 기표(奇表 · 우뚝한 외모)가 있고 우애가 깊어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은 만큼 광해군의 견제가 심해 걱정과 답답한 심정을 술로 달래며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았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았다. 오직 바라건대 빨리 죽어 지하의 선왕(선조)을 따라가는 것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원군은 광해 11년(1619) 12월 29일 세상을 떠나니, 불과 마흔 살이었다.

광해군은 길지로 알려진 정원군의 어머니 인빈김씨의 장지를 감시하게 하고, 장례도 서둘러 양주군 곡촌리에 군묘 형식으로 치러 조문객까지 감시했다.

 

4년 뒤인 1623년 능양군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라(인조반정) 아버지 정원군을 대원군(大院君)에 봉했다. 그리고 1627년에 묘가 원(園)으로 추숭돼 김포 성산언덕으로 천장하면서 1년 앞서 조영한 인헌왕후의 '육경원'과 쌍릉으로 합쳐 '흥경원(興慶園)'이라 했다.

인조 10년(1633) 이귀(李貴) 등의 주청에 따라 정원군은 다시 원종으로 추존돼 능호를 '장릉'이라 하고 석물을 왕릉제로 개수했다. 존호는 원종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元宗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이라 하고 비는 “경의정정인헌왕후(敬毅貞靖仁獻王后)”로 추숭하면서 성종의 아버지 덕종의 추존 예를 따랐다.

 

2) 장명등 창호로 보이는 안산과 조산(계양산). 장릉은 사신(四神)이 뚜렷하고, 조산과 축의 조영이 돋보이는 왕릉이다.

 3) 정자각 뒤에서 바라본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침.

 

인헌왕후는 본이 능성(綾城)인 좌찬성 구사맹의 딸로 13세에 정원군(원종)과 결혼해 능양군(인조), 능원군, 능창군을 두었다. 큰아들 인조가 즉위하자 연주부 부인으로 높여졌고, 궁호를 계운궁(啓運宮)이라 했다. 엄숙하고 화락(和樂)하고 법도가 있으며 침착하고 단정했다고 한다.

1626년 1월 14일 인조의 모친 계운궁 구씨(추존 인헌왕후)가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지로 김포, 고양, 파주 교하의 객사 뒷산이 추천됐으나 김포가 풍수적으로 사신이 완벽한 지형이라고 해 이곳에 모셔졌다. 묘호는 '육경원(毓慶園)'이라 했다.

이때 상주는 사가의 예에 따라 인조가 아닌 능원군이 했다.

다음 해 그의 부군 원종이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흥경원'으로 불렸다.

1632년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숭될 때 함께 왕비로 추존했다.

 

장릉은 남한정맥의 계양산과 가현산의 중간에서 분기, 황하산을 거쳐 장릉(북성)산에 이르는 용맥 아래에 자리 잡았다. 즉 장릉산을 주산으로 하고 계양산을 조산(朝山)으로 하는 사신(四神)이 확실하고, 수계가 맑고 분명히 흘러 장릉 연지에 합수되는 길지로 알려진 곳이다. 풍수가들은 매화낙지형,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 등으로 평가한다.

 

경사지의 사초지를 따라 볼록한 지형에 자리한 장릉은 병풍석과 난간석 없이 단순한 둘레석(호석·護石)을 두르고 있어 대원군의 묘제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호석은 봉토를 둘러막는 돌로 호석면에 별다른 조각이나 문양을 새기지 않아 단순하다. 장릉만이 갖는 둘레석이다. 원제(園制)에서 왕릉제(王陵制)로 석물만 교체했기 때문이다. 원에서 왕릉제로 개축되면서 원래에 있던 비석의 받침대가 능침의 우측 계곡에 묻혔던 것을 2008년 발굴해 비각 옆에 설치했다. 흥경원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가 보기에 받침대로는 보기 드문 걸작이다.

 

장릉은 왕과 왕비의 쌍분 능침으로 2개의 혼유석 앞에 중계와 하계를 두고 있다. 팔각 장명등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석인, 무석인 등을 배치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길인 향로(香路)와 어로(御路)가 다른 능과는 달리 약간 경사가 진 계단식이다. 자연의 지형에 어울리게 정자각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능침 앞 강(岡)은 길지만 그리 높지는 않다.

 

장릉 앞 재실 저수지는 자연학습장

 

정자각은 3단 장방형 기단에 자리한 익공식(翼工式)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동쪽으로 올라가 서쪽으로 내려오는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제례의례를 반영한 건축으로, 내부에는 신좌(神坐)가 마련돼 있다.

얼마 전 장릉의 창고에서 정자각에 드리던 신렴(神簾)의 유구가 나와 복원이 가능해졌다. 원래 정자각의 월랑(배위청)과 신문 등에는 신렴이 드리워져 정자각의 신비감을 더해주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비각 아래 자리한 수복방(守僕房)은 능원을 수호, 관리하던 수복이 근무하던 곳으로 2칸이다. 맞은편에 제례용 음식을 준비하던 수라청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수라청 근처에는 반드시 제정(어정)이 자리한다. 이곳 장릉의 어정은 물이 좋아 약수터로 사용하고 있으나 콘크리트로 수리하고 덮개를 씌워놓았다. 원형을 찾아야 할 부분이다.

   

4) 장릉 정자각의 잡상. 5) 향로와 어로가 경사지에 자연스럽게 조영된 장릉.

 

장릉의 장명등은 큰 옥개(屋蓋)와 상륜(相輪), 8각의 지붕 등이 이후 숙종대에 등장하는 사각지붕보다 화려한 맛이 있다. 주변의 산과 조화를 이루며 창호를 통해 멀리 조산과 축이 일정하게 들어온다. 서양 건축의 축 개념과 비교되는 우리만의 조영 예술이다. 장명등은 묘역을 밝히는 상징적 조명기구일 뿐 아니라, 피장자의 신분이나 지위를 상징하는 장식적 능묘 석조물로서 능침의 중심시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장명등 창호로 보이는 조산(계양산)의 전망은 아파트 건설로 훼손되고 있다. 안산과 조산의 경관축 보존 대책이 시급하다.

 

장릉의 문석인은 머리에 복두(頭)를 착용하고 공복(公服)을 입은 채 석마와 나란히 서 있다. 하체에 비해 상체가 긴 4등신으로 무표정한 얼굴에 홀을 공손히 쥐고 있다. 무석인은 장군의 형상으로 투구와 갑옷을 입고 있다. 얼굴은 정면을 응시하며 마주 서 있고, 문석인과 마찬가지로 무표정하게 위엄을 나타낸다. 전체적인 조각 수법과 비례는 문석인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세부적으로는 한껏 멋을 부린 것 같다.

 

장릉의 재실은 깔끔한 한옥으로 장릉(章陵) 관리사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일부 전사청과 향대청은 소실됐다. 재실 옆 지당은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따른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연못의 형태다. 이곳 연꽃이 아름답다.

 

장릉 재실 앞에 있는 저수지는 1960년대 이전에 조성돼 다양한 수생식물이 자라고 철새가 찾아오는 자연학습장이다. 장릉 숲은 거닐기에 좋은 능원으로, 인헌왕후 구씨를 떠올리게 하는 포근한 곳이다.

 

장릉의 현재 입구는 청룡 맥을 끊고 능원의 옆구리를 치고 들어가는 훼손된 모습이다. 능역 입구 쪽으로 옮기고 용맥을 살려야 한다.  

근처 우백호 능선 너머에는 장릉의 원찰인 금정사(金井寺)가 자리한다. 원래의 금정사는 능원의 우백호 안쪽 능침 북서쪽에 있던 것으로 장릉을 확장, 조영하면서 옮겼다고 한다.

 

원종의 맏아들인 인조의 능은 경기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25-1에 있다. 능호는 장릉이다. 이곳은 어머니 인헌왕후의 초장지로 지목되던 곳이다.

 

- 왕실과 뽕나무

 

누에 길러 어의 만들고 상례 땐 신위 제작

장릉의 오래된 뽕나무.
장릉 정자각 수라청 터 뒤편 사초지 모서리에는 오래된 뽕나무(桑)가 있다. 오래된 뽕나무는 궁궐에도 있다. 특히 창덕궁 금원(후원)에 많다.

 

뽕나무는 누에를 길러 고급 비단의 어의(御衣)를 만들었다. 그래서 궁궐에 누에를 기르는 잠실을 두었다.

서울에도 강남에 잠원과 잠실을 두어 뽕나무를 장려했다.

 

뽕나무는 뿌리가 깊고 황색으로 왕실을 상징하는 황색의 수피를 갖고 있다. 뿌리 속이 흰색이라 한약재로 상백피(桑白皮)라고도 한다. 열매는 푸르다가 차츰 적색, 검은색으로 변한다.

오행색(五行色)을 다 갖추고 있어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정성 들여 가꾸고 이것으로 어의를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실에서는 상례 때 왕과 비의 영혼이 의지할 신위(神位 ∙ 지방)를 혼전에 모시는데 이것을 우주(虞主 ∙ 우제 지낼 때 쓰던 신주)라고 한다. 우주는 뽕나무로 제작한다. 그래서 신위를 상주(桑主)라고도 한다.

우주는 부묘 시 종묘 터에 묻고 밤나무로 만든 신주로 부묘(祔廟)한다. 밤나무(栗)는 자손의 번성과 왕권의 영구한 승계를 의미해, 지금도 폐백 때 시어머니가 신부에게 밤을 준다. 밤은 밤알(열매)을 파종해 새싹을 틔워 키우는데, 밤알은 거목이 돼 죽어도 껍데기가 계속 뿌리에 붙어 있어 혈통의 정통성을 확인시켜준다.

<임원경제지> 등에 밤알을 심을 때는 가운데 밤알을 심도록 돼 있다. 이는 가운데 밤알이 실해 건실한 혈통 계승을 의미한다.

 

인조는 아버지를 종묘의 혼전에 모시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장릉에 부모의 영혼이 의지할 뽕나무를 직접 심었다고 한다. 이 나무가 지금도 살아 있다.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 2010.09.06 753호(p76~78) 주간동아 [신의 정원 조선 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