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신(神)의 정원, 조선 왕릉

Gijuzzang Dream 2009. 6. 26. 11:54

 

 

 

 

 

 

 

 

[신의 정원 조선 왕릉]

 

 지상에서 영원으로 聖과 俗이 숨쉬는 공간

 

한양에서 10리 밖, 100리 안에 자리잡은 조선 왕릉의 분포 현황

1.건원릉(健元陵) 2.정릉(貞陵) 3.헌릉(獻陵) 4.영릉(英陵) 5.현릉(顯陵) 6.장릉(莊陵)

7.사릉(思陵) 8.광릉(光陵) 9.경릉(敬陵) 10.창릉(昌陵) 11.공릉(恭陵) 12.선릉(宣陵)

13.순릉(順陵) 14.연산군묘(燕山君墓) 15.정릉(靖陵) 16.온릉(溫陵) 17.희릉(禧陵)

18.태릉(泰陵) 19.효릉(孝陵) 20.강릉(康陵) 21.목릉(穆陵) 22.광해군묘(光海君墓)

23.장릉(章陵) 24.장릉(長陵) 25.휘릉(徽陵) 26.영릉(寧陵) 27.숭릉(崇陵) 28.명릉(明陵) 29.익릉(翼陵) 30.의릉(懿陵) 31.혜릉(惠陵) 32.원릉(元陵) 33.홍릉(弘陵) 34.영릉(永陵) 35.융릉(隆陵) 36.건릉(健陵) 37.인릉(仁陵) 38.수릉(綏陵) 39.경릉(景陵) 40.예릉(睿陵) 41.홍릉(洪陵) 42.유릉(裕陵)

 

 

1408년 음력 5월24일, 서울에 많은 비가 내렸다. 새벽 파루(야간통행금지 해제 때 서른세 번 타종하는 것)에 태상왕 이성계는 가래가 심해져 태종이 급히 달려와 청심원을 드렸으나 삼키지 못하고 눈을 들어 두 번 쳐다보고는 창덕궁 별궁에서 74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이날을 양력으로 계산하면 6월27일이다.

 

601년 후 2009년 6월27일 새벽 1시30분(한국 시각), 스페인의 역사도시 세비야에서 조선 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6월21일부터 7월3일까지 열린 제33차 세계유산대회(World Heritage Committee) 기간 중 태조가 승하한 바로 그날 그 시각, 그의 후대 왕과 왕비의 유택이 모두 세계유산이 된 것이다.

우연치고는 대단한 우연이다. 이런 것을 두고 하늘의 뜻이라고 하는 걸까?

 

6월27일 오후 동구릉 건원릉에서 태조 승하 601주기 기신제(매년 후손들이 치르는 제사)가 황세손 이원(李源) 씨를 초헌관으로 거행됐다. 601년 전과 달리 쾌청했다.

 

조선 왕릉은 탁월하고 보편적인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인정받아, 세계인이 함께 보존하고 향유해야 할 우리 민족의 중요한 문화유산이 됐다. 세계유산에 등재되려면 잠정등록, 등재를 위한 학술연구, 등재신청서 작성,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실사, 세계유산대회 등의 과정을 거친다.

 

필자는 십수 년 조선 왕릉을 연구해온 덕에 운 좋게 이 모든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제 ‘신의 정원’ 조선 왕릉의 내밀한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하고자 한다.

 

동서고금 가장 완벽한 형태의 무덤 유산

조선시대 능원은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이래 50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조영된 무덤 유산이다. 27대에 이르는 왕과 왕비, 추존왕 등 42기의 능(陵)이 남아 있으나 조선 초기의 능인 제릉(齊陵)과 후릉(厚陵)은 북한 개성에 있고, 폐왕이 된 연산군 · 광해군의 묘는 이번에 세계문화유산 등재에서 제외됐다.

 

5000여 년의 역사에서 조선시대는 우리 민족의 성립기이며 문화의 완성기다.

이때 조성된 궁궐과 왕릉은 대표적인 한국의 문화유산이다.

특히 조선 왕릉은 518년 동안 왕실이 철저히 관리했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까지도 국가에서 관리해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따라서 조선 왕릉은 현존하는 능원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춘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왕릉은 유교의 이념에 따라 능역 공간의 크기, 문 · 무석과 석물, 기타 시설물의 형태와 배치를 달리해 예술성을 높였다. 조선시대 최고의 장인들이 만들어낸 1500여 개 석조물은 지상 최대의 조각공원을 유산으로 남겼다. 아울러 당대의 조영 내용을 기록한 각종 의궤와 능지가 있어 보존과 관리에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 또한 높이 평가받았다. 

 

이러한 역사성 외에도 조선의 통치철학인 유교에 근거한 공간의 배치와 자연친화적인 곡선미 등 능원의 형태와 봉분의 조영 방식에서 독특한 한국의 미(美)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 왕릉은 한국인의 자연관과 세계관에 따라 조영된 문화유산으로, 비슷한 시기 타 유교문화권의 왕릉들과 비교해도 독보적인 길례(吉禮)의 공간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린벨트의 기원이 된 능역

왕릉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10리(4km) 밖, 100리(40km) 안에 조영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능지가 결정되면 수십에서 수백만 평의 능역에 선왕의 유택만 두고 사가의 무덤과 마을을 이전하고 녹지를 철저히 보존하고 관리했다. 덕분에 능역 주변의 녹지가 잘 보전돼 오늘날 그린벨트의 근간이 됐고 왕릉 숲은 현재의 광릉수목원, 홍릉수목원 등 도시 숲이 형성되는 역사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

 

능원은 산의 능선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어 마치 꽃잎에 싸인 꽃심처럼 보인다. 이처럼 중층적인 공간에서 왕릉은 외부와 분리돼 폐쇄성과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능침(봉분)만큼은 시계가 넓게 확보되는 곳에 자리잡는다. 즉 주종산(主宗山)을 뒤로하고 좌우가 주종산보다 낮은 산록으로 둘러싸이며 앞이 트인 지형에 있다.

 

능침 앞으로 좌청룡 산, 우백호 산의 능선이 감싸고 내려와서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산세가 좁아진다. 만약 지형적으로 입구가 오므라들지 않는 곳이라면 별도로 비보림(樹林)과 연못(蓮池)을 조성하기도 한다.

참배 위치에서 정자각, 능침(봉분)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능원의 시설물은 능침(봉분)→장명등→정자각→홍살문의 순서로 직선 축을 이루는데 이는 유교의 위계성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배치 축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능역의 규모에 따라 조영 방식을 달리하거나 자연 지형에 맞게 자연스럽게 축이 구부러지기도 한다.

 

이제 봉분과 정자각의 높이를 비교해보자.

정면에서 보면 정자각 위로 봉분이 솟아 있다. 이는 능침의 위엄성과 성스러움을 강조하고, 성과 속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능침에서 원근산천(遠近山川)의 자연경관을 굽어 살핀다는 상징적 의미뿐 아니라, 햇살과 배수를 위한 실용적 목적도 있다.

 

다음으로 재실(齋室)-금천교(禁川橋)-홍살문(紅箭門)을 잇는 능역의 참배로(參拜路)를 걸어보자. 참배로는 능역 내의 명당수가 흐르는 개천을 따라 갈지(之) 자나 검을현(玄) 자의 구불구불한 곡선 형태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능원에 진입하는 참배객에게 성스러운 능침이 곧바로 보이지 않게 하며, 능원 공간의 신성함과 엄숙함을 상징한다.

 

조선 왕릉은 지상 최대의 조각공원이라 할 수 있다. 사진은 효종과 인선왕후가 안장된 영릉.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신의 정원’

능원의 입지 선정과 조영물의 축조 방법은 주위 지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는 능원을 자연환경의 일부로 여기는 풍수사상과 한국인의 자연관에 따른 것이다.

 

조선의 왕릉은 단릉, 쌍릉, 합장릉, 동원이강릉, 동원상하릉, 삼연릉 등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왕과 왕비의 무덤을 단독으로 조성한 것을 단릉(單陵)이라 하며 대표적인 예가 태조 건원릉이다.

언덕 위를 평평하게 조성해 곡장(曲墻)으로 두르고 그 안에 우왕좌비(右王左妃)의 원칙에 따라 왕과 왕비의 봉분을 쌍분으로 만든 것을 쌍릉(雙陵)이라 한다. 대표적인 능이 헌릉이다.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것을 합장릉(合葬陵)이라 한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능이 최초다.

하나의 정자각 뒤로 한 줄기의 용맥에서 나뉜 다른 줄기의 언덕에 별도의 봉분과 상설(석물)을 배치한 형태를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 하고, 이러한 형태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광릉을 들 수 있다.

왕과 왕비의 능이 같은 언덕에 위아래로 조성된 왕상하비(王上下妃)의 형태를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라 한다. 여주에 있는 효종과 인선왕후의 영릉(寧陵)이 그 예다.

조영 방식에서 황제의 능제를 따른 순종의 유릉.

한 언덕에 왕과 왕비 그리고 계비의 봉분을 나란히 배치하고 곡장을 두른 형태를 삼연릉(三緣陵)이라 하며, 헌종과 그의 비들의 경릉이 유일하다.

왕과 왕비, 계비를 한 봉분에 합장한 것을 동봉삼실릉(同封三室陵)이라 한다. 이것은 순종과 그의 비들의 유릉이 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보면 봉분의 형태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조선의 능원은 자연 지형에 어울리게 한국인의 자연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한국전통조경학회 부회장,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한국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2009년 6월 조선 왕릉 40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숨은 주역으로 알려져 있다.

  2010.03.23 728호(p76~78) 주간동아

 

 

 

 

 

 

5개월의 국장(國葬) 기간 정성과 기술 총결집

  

 
 

조선 왕릉은 자연과 조화롭게 조영된 것이 특징이다. 사진은 효종 영릉의 진입 공간.

 

 

왕이 승하하면 3일에서 5일 안에 새로운 왕이 선정된다.

새 왕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선왕을 좋은 자리에 정성껏 모시는 것이다. 유교 국가인 조선은 더욱 그랬다. 새 왕은 국장을 치를 장례위원회를 조직한다.

 

장례위원장을 ‘총호사’라 한다. 총호사는 일반적으로 3정승이 맡는다. 총호사 밑에는 선왕의 시신을 안치하고 예를 갖추는 빈전도감, 국장의 의식과 절차를 담당하는 국장도감, 능원의 자리 잡기와 능역을 조성하는 산릉도감의 조직을 둔다. 이 일을 잘하면 차기 정권의 실력자로 들어갈 수 있기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다. 대선이 끝나면 조직되는 인수위원회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국장은 대개 5개월 동안에 이루어진다. 능역 조성의 책임을 맡은 산릉도감은 대체로 공조판서가 총괄한다. 태조 건원릉의 산릉도감은 경복궁과 종묘 등을 건축한 박자청이 담당했다. 동원된 인력은 5000~9000명에 이른다. 당대 최고의 기술자와 자재가 동원된 조영기술의 총합이다.

 

산 자를 위한 진입 공간

조선시대 능역의 공간 구성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공간인 정자각을 중심으로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외금천교, 재실, 연지 등이 있는 진입 공간은 산 자를 위한 곳이다.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과 참배도(향도 + 어도), 수복방, 수라청이 배치된 곳은 왕의 혼백과 참배자가 만나는 제향 공간이다.

언덕 위 봉분을 중심으로 곡장(ㄷ자형의 담)과 석물이 조성된 곳은 죽은 자를 위한 성역으로 능침 공간 이라 한다.

 

각 공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후손을 위한 진입 공간은 외금천교, 외홍살문, 재실, 연지, 금천교로 이어진다.

외금천교는 능역의 영역을 구분하는 돌다리를 가리킨다.

외금천교를 지나면 외홍살문이 있다. 능 행차 시 헌관은 외홍살문 앞에서 하마(下馬)한다. 원래는 하마비가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말에서 내린 헌관은 가마를 타고 재실로 향한다. 재실에서 헌관 일행은 음식을 준비하고 몸을 깨끗이 한 뒤 제례 준비를 한다. 필요에 따라 숙박을 하기도 한다.

제례 준비를 마친 헌관 일행은 제례의식을 갖추고 능원으로 향한다.

명당수가 흐르는 개천을 따라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진입하면 작은 연못이 나오는데, 이는 농토에 물을 대고 제관(참배객)들이 휴식할 수 있게 하는 수경 공간이다.

곡선의 참배로를 따라 조금 더 걸으면 돌다리인 금천교를 만난다. 금천교는 왕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으로 속세와 구분해주는 구실을 한다.

금천교를 지나면 능원이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는 커다란 문이 있다. 홍살문 또는 홍전문이라고 한다. 헌관은 홍전문을 통하지 않고 배위로 향한다.

  

선왕과 현세의 왕이 만나는 제향 공간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제향 공간. 사진은 문정왕후 태릉.

홍살문 앞 오른쪽에는 제례의 시작을 알리는 가로세로 6자(1.8m) 정도의 네모난 배위가 있다. 이 배위에서 혼백을 부를 때 4배한다.

홍살문 앞에서부터 정면의 정자각까지 얇은 돌을 깔아 만든 긴 돌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참도라고 한다. 참도는 혼령이 이용하는 신도(향도라고도 함)와 참배자(왕 또는 제관)가 이용하는 어도(御道)로 구분돼 있다. 신도가 어도보다 3치 정도 높다. 일반적으로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300척(약 90m)이나 능마다 차이가 있다.

참도는 정자각 월대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월대 동쪽에서 접근하여 각각 계단을 통해 배위청에 오르게 돼 있다. 이 계단은 남향의 능원에서 동쪽에 자리해 동계라고도 한다. 동계도 신계(神階)와 어계(御階)로 나눈다. 동계를 오를 때는 오른발을 먼저 내디뎌야 한다.

동계를 통해 오른 월대의 형태는 정전의 기단 폭과 배전의 기단 폭이 일치하는 일반배전형이 많으며, 월대의 높이는 3단 장대석을 쌓았다.

신계는 3단으로 돼 있으며 양옆에 구름무늬와 삼태극을 조각한 배석이 설치돼 있다.

어계는 배석이 없으며 단순한 장대석의 3단 계단이다.

 

헌관은 월대에 올라 배위석에서 4배하고 동문을 통해 정청으로 들어간다. 혼백은 가운데 신문으로 들어간다. 제례를 마친 제관은 정청 서문을 통해 나와서 배위청 서쪽으로 내려온다. 배위청 서쪽에는 동계와 같은 규모의 어계 한 조만 놓여 있다. 이는 제례를 마친 신(즉 조상)은 정청에서 신문과 신교, 신도를 거쳐 바로 능침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배위청은 앞면 1칸, 측면 2칸이며 배위청에 맞닿은 정청은 앞면 3칸, 측면 2칸으로 배위청보다 단을 3치 높게 조성한다. 이 두 건물이 결합해 정(丁)자 형태를 갖추었다 해서 정자각이라 한다. 정자각은 일반적으로 맞배지붕이다. 이러한 건축은 우리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평가받는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실사를 맡은 중국의 고건축가 왕리쥔(王力軍) 부원장도 이 정자각에 매료돼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자각 뒷면 가운데 신문을 열면 능주의 혼백이 제향 후 봉분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능침을 향해 놓은 돌다리인 신계(神階) 또는 신교(神橋)가 있다. 그리고 신도(神道)가 능의 사초지(岡)가 끝나는 곳까지 이어지는데 박석(얇고 넓적한 돌)으로 포장돼 있다.

가장 길고 재미있는 신도는 동구릉에 있는 선조(宣祖)와 그의 비들의 능인 목릉에서 볼 수 있다.

제례를 마친 제관들은 정청 서쪽 문을 통해 나와 월대 서쪽 어계를 거쳐 내려온 뒤 정자각 북서쪽에서 제례의식을 마치는 의미로 지방을 불사르고 제물을 예감(隸坎 또는 望燎位)에 묻는다. 예감은 가로세로 2자, 깊이 30cm 정도의 정(井)자 형태로 나무뚜껑이 있다. 초기 능인 건원릉과 헌릉에는 잔대 형식의 소전대라는 석물이 있었으나 이후 능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시기에 따른 제례 행위의 변화로 보인다.

정자각 앞쪽 양옆에는 재실에서 준비한 제례음식을 데우고 진설하는 수라청과, 능원을 지키는 사람의 공간인 수복방(수직방)이 있다. 수라청과 수복방은 참도를 향해 서로 마주하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수라청 근처에는 제례 준비를 위한 어정이 있다. 이 어정의 위치에 따라 수라청은 아래위로 자리를 이동하기도 한다.

정자각 후면 동북쪽에는 선왕의 업적과 이력이 기록된 비각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산신석이 능침의 강(사초지 경사면)이 끝나는 정자각 뒤 동북쪽에 세워져 있는데 규모는 혼유석의 4분의 1 정도다. 이 비각의 위치는 능원의 왼쪽 상단부로 학생 시절 달던 명찰의 위치와 비슷하다.

 

곡장을 친 순조와 순원왕후를 합장한 인릉의 능침 공간.

 

제향 공간과 능침 공간은 단의 높이에 상당히 차이를 두는데, 이는 능침 공간의 신성함과 위계감를 나타내기 위해서다. 이곳은 사초를 심어 유실을 방지하며, 배가 불룩한 철형의 경사면을 이룬다. 이 경사면은 참배객이 능침에 오를 때 허리를 굽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평소 참배객은 신성한 공간인 능침에 오르지 못하며 왕이나 제관, 참봉도 참배할 때만 오를 수 있다.

 

선왕을 위한 성역 능침 공간

능침 공간은 왕릉의 핵심으로, 능침 뒤의 높은 주산에서 내려온 주맥이 뭉치는 볼록한 지형인 잉(孕) 양옆으로 미사(眉砂)를 이루어 조금 아래 평지에 혈처를 찾아 곡장을 쳐서 조성한다. 봉분의 좌우 뒷면 북 · 동 · 서 3면에 곡장을 두르고, 주변에는 소나무를 심어 위엄성을 강조한다.

 

둥근 봉분은 초기에는 석실과 병풍석으로 돼 있었으나, 세조 이후 능제의 간소화 정책에 따라 석실은 회격실로 하고 병풍석은 방위를 나타내는 12방위의 난간석만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석양, 석호,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물이 배치돼 있다. 봉분 주변에는 좌우로 석양과 석호를 서로 엇바꾸어 두 쌍씩 여덟 마리가 배치돼 능을 수호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봉분의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다. 혼유석이란 혼이 노닌다는 의미다. 우리만의 독특한 이름이며 그동안 현세 정치의 고단함을 잊고 편히 쉬시라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왕조가 사후에도 계속 통치한다는 의미와는 사뭇 다른 해석이다.

 

봉분을 중심으로 석물이 놓인 곳을 능침의 상계라 하는데 사자(능주)의 중심 공간이다. 상계 앞의 한 단 낮은 곳은 문석인의 공간으로 중계(中階)라 불리며, 이 공간의 중심에 팔각 또는 사각의 장명등이 있고, 양옆으로 안쪽을 향해 문석인이 한 쌍 서 있다. 여기서 한 발 뒤, 한 발 옆으로 석마가 있다. 그 다음 한 단 아래 공간인 하계(下階)에는 무석인석마와 공간을 같이해 중계와 나란히 구성돼 있다. 하계 앞은 평지에서 급경사로 이어지며 사초지로 조성돼 있다.

 

조선 왕릉은 2009년 6월 연속유산(serial nomination)으로 인정받아 모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1890여 만m2(약 570만 평) 넓은 면적에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조선 왕릉 42기를 모두 봐야 그 시대의 정치, 철학, 사상, 조영기술을 읽을 수 있다. 또한 능주의 탄생과 업적, 승하, 당시의 정치·사상·기술·풍수학을 알아야 비로소 왕릉에 담긴 뜻을 헤아리게 될 것이다.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 2010.03.30 729호(p78~80) 주간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