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알아가며(자료)

明왕조의 제3대 황제 - 영락제

Gijuzzang Dream 2009. 7. 30. 12:18

 

 

 

영락제

 


 

1402년 7월 17일, 중국 땅에 새로운 황제가 탄생했다. 명 왕조가 세워진 지(1368) 35년, 세 번째의 황제였다. 그러나 금과 옥으로 꾸며진 화려한 옥좌에 오르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것은 친 조카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뿌린 4년 동안의 치열한 내전의 결과였다.

 

 

 

주체(朱棣)는 1360년 5월 2일, 명나라를 세운 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는 주원장이 홍건적의 두령으로 원나라와 맞서 한참 항전을 벌이던 시절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확실하지 않은데, 공식적으로는 홍무제의 정비인 마황후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고려 출신의 공비(碽妃)라는 설이 있고, 또 원나라 여인에게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이런 출생의 불확실함 때문에 그가 아버지나 형제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명나라의 건국 과정에서 주체는 아직 코흘리개 어린아이였기에 별 공로가 없었다.

하지만 1370년, 홍무제가 아들과 손자들을 변방 지대의 번왕(藩王)으로 책봉하면서

주체를 연왕(燕王)으로 북평을 다스리게 한 이후로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북평은 몽고와 여진 등 이민족과 직접 상대해야 하는 군사적 요충지이며,

오랜 전란 끝에 도시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헐벗어 있었다.

주체(朱棣)는 이곳을 맡아 삼십 년 동안 몽고족의 침입을 물리치고 경제를 안정시켰으며,

연(燕)을 번왕국 중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냈다.

 

하지만 중앙에서 볼 때, 그토록 커진 연왕의 힘은 국가적으로는 보탬이어도 정치적으로는 부담이었다.

그래서 1398년에 홍무제가 사망하고 그의 맏아들 주표(朱標,)의 맏아들인 주윤문(朱允炆)이

2대 황제(건문제, 建文帝)로 즉위하자, 곧바로 연왕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정면 공격은 ‘조카가 삼촌을 박해한다’는 점에서 명분도 없고, 연왕의 세력이 워낙 만만치 않았으므로

첩자와 자객들을 보냈는데, 연왕은 거짓으로 미친 척을 하여

한여름에 화롯불을 껴안고 살거나 시궁창에서 잠을 자는 등 실없는 행동으로

그들의 주의를 흐리게 했다고 한다.

또 땅굴을 파고 그 안에서 무기를 제작하면서 땅 위에서는 거위 떼를 길러,

그 꽥꽥대는 소리로 무기 만드는 소리를 감추었다고 한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춘 연왕 주체는 마침내 1399년, 조카에 맞서 거병한다.

명분은 ‘정난(靖難)’, “황제를 에워싸고 있는 간신들을 처단하여 나라를 바로잡는다”는 것이었다.

 

북평의 군대는 정예병이었으나 수도 남경의 황제군에 비해 수적으로 크게 열세였다.

그래서 연왕 측이 크게 패하고 연왕조차 죽거나 사로잡힐 위험에 빠진 경우도 있었지만,

건문제가 “숙부님의 생명까지 위협해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 몰아붙이지 마라”며 제동을 거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반면 연왕은 자신에 버금가는 군사력을 가졌던 영왕 주권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함께 조카를 노렸다.

두 세력 사이의 치열한 공방전은 마침내 1402년 6월,

정예병만을 추려 남경을 전격 습격한 연왕의 필사적인 도박이 성공을 거두어

남경이 연왕군에게 함락됨으로써 끝난다.

 

 

 

남경에 입성한 연왕은 사흘 동안 궁궐 안을 뒤지며 건문제에게 충성하던 신하들을 숱하게 죽였다.

연왕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에 앞장섰던 제태와 황자징은 눈 앞에서 사지를 찢어버렸다.

그런데 정작 건문제는 온데간데가 없었다.

함락 당시 일어난 불에 타 죽었다고 했지만, 시체를 끝내 찾지 못했다.

꺼림칙함이 남을 수밖에 없었던 연왕은 건문제를 찾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는데,

정화의 대원정도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한다.

  

 

이런 와중에도 연왕은 건문제의 스승이며 연왕 제거론의 주역이기도 했던 방효유만은 살려두었고,

옥에 가두기는 했어도 정중하게 대접했다.

방효유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존경 받고 있었기 때문에

회유하여 자신의 통치를 선전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마침내 옥좌에 앉은 연왕, 영락제는 방효유를 불러오게 했다.

그리고 지필묵을 주면서 자신의 즉위 조서를 쓰도록 부드러운 말로 권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방효유는 순순히 붓을 들었다. 그리고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락제가 지은 득의의 웃음은 이내 얼어붙고 말았다.

방효유가 쓴 글은 단 네 글자뿐이었기 때문이다. ‘연적찬위(燕賊簒位)!’

연나라의 도적놈이 제위를 찬탈했다는 말이 아닌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영락제는 소리질렀다. “네가 정녕 구족을 멸해야 말을 듣겠느냐?”

방효유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맞받았다.

“구족(九族)이 아니라 십족(十族)을 멸한다 해도 역적과 손잡을 수는 없다!”

 

영락제는 그 자리에서 방효유의 입을 찢어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방효유를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을 뿐 아니라, 정말로 십족을 멸했다.

구족이란 자신을 기준으로 위로 사대, 아래로 사대를 가리킨다.

구족을 멸한다면 그야말로 일가친척 피붙이는 남김없이 몰살시키게 된다.

역적은 구족을 멸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범위가 너무 넓다 보니 이리 저리 안 걸리는 사람이 없으므로,

실제로 구족을 멸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영락제는 문자 그대로 구족을 멸했을 뿐 아니라 혈연관계가 아닌 제자, 친구, 선후배 등

방효유와 친분관계가 있다 싶은 사람도 ‘열 번째 일족’이라 하여 모조리 처형장으로 보냈다.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형벌이었다. 이후에도 정권이 안정될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이렇게 황제가 된 영락제는 ‘7학사’를 중심으로 하는 내각정치와 승려 도연,

환관 정화(마화) 등을 앞세운 밀실정치로 제국을 이끌었다.

내각이란 행정능력은 뛰어나지만 방효유 같은 선비 기질은 없는 소장파 관료들을 추려 측근에 두고,

공식적인 육부 조직을 넘어 황제 직속기구가 실권을 행사하게 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대통령이 장관들을 허수아비로 두고 비서관들하고만 국정을 운영하는 셈이다.

그리고 도연이나 정화 등 정식 관료가 아니면서 궁궐에 거주하며

황제와 수시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신임하고 실권을 주었다.

한편으로 스스로 번왕으로서 쿠데타로 집권했던 입장이라,

번왕들을 견제하다가 끝내 하나 둘씩 폐지하고 황제 직할체제로 바꾸었다.

또 수도를 남경에서 자신의 본거지인 북평(이때부터 북경이라고 개칭했다)으로 옮겼으며

관료들을 감시하고 공작정치를 벌이기 위한 비밀정보조직, 동창을 창설해서 활용했다.

 

 

이는 실로 노골적이고 음산한 권력정치였으며,

똑같이 일족의 피를 손에 묻히고 정권을 잡은 당태종이 신하들과의 소통과 민심을 중시했던 것과는

다른 독재의 모습이었다. 당나라 때보다 인구가 늘고 사회가 복잡해졌기 때문일까.

아무튼 영락제의 찬탈과 측근정치, 밀실정치, 환관과 이민족을 중용하는 통치 스타일은

정통 관료들에게는 지탄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동창의 서슬이 시퍼런 마당에 대놓고 지탄할 수야 없었지만).

 

하지만 한편으로 유교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생각과 대담한 정책을 펼 수 있기도 했다.

 

천하가 안정되어 가자 영락제는 ‘뭔가 거대한 것’에 대한 동경을 유감없이 충족시켜 갔다.

세계 최대의 궁성인 자금성을 축조하는 한편 만리장성을 개축하고 대운하를 확충했다.

국방과 경제를 위한 조치였다지만,

진시황과 수양제의 스케일에 도전하려는 영락제 개인의 야심도 있지 않았을까.

뿐만 아니라 정화에게 사상 최대의 대선단을 주고 서방원정에 나서게 했으며,

그 자신은 친히 말에 올라 북쪽의 초원과 사막을 원정했다.

이를 ‘삼려오출(三黎五出)’이라고 하는데,

다섯 차례 북벌을 하여 세 번 적의 본거지를 공격했다는 뜻이다.

 

만주 여진족과 일본 왜구 역시 정벌의 대상이었다.

‘거대한 것’에 대한 영락제의 취향은 학문 분야에도 나타나,

2천 명 이상의 학자들을 동원해 마치 장성이나 대운하를 건설하듯 몰아붙여서

약 2만 8천권에 달하는 사상 최대의 유서(類書)인 <영락대전>을 지어냈다.

 

 

 

하지만 거대한 사업은 그만큼 거대한 비용을 요구한다.

자금성을 짓고 정화의 대함대를 만드느라 중국은 물론 인근 지역까지

쓸만한 목재가 고갈될 지경이었으며,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에 허리가 휘고 식량마저 빼앗겨 굶기가 일쑤였다.

삼려오출이나 정화의 서방원정 역시 들어간 비용에 비해 실익은 없다는 비판이 드높았다.

마침 자금성에 대화재가 일어나 옥좌까지 잿더미로 변하고, 지방에서는 홍수와 역병이 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대규모 민란까지 벌어지자 “이것은 위정자의 부덕함을 하늘이 꾸짖는 것”이라면서

그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신하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 유교적 명분론 앞에 마냥 동창의 힘만으로 상대할 수 없었던 영락제도 결국 타협하여,

사업의 규모를 줄이고 신하들과 소통하기로 한다.

 

명나라의 압력이 늦춰지자 이민족들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베트남에서는 명나라의 지배를 거부하는 반란이 일어났고,

몽고의 칸도 영락제의 사신을 돌려보내며 더 이상 저자세를 취하지 않을 것을 천명했다.

영락제는 이것을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했다.

“너희의 말을 듣다 보니 국방이 해이해지고 오랑캐가 날뛴다”며 신하들을 꾸짖은 그는

다섯 번째 몽고 친정에 나선다. 하지만 이미 늙고 병들어 있었던 그에게 그것은 지나친 무리였다.

결국 그는 몽고의 칸을 뒤쫓다가 고비사막 한가운데에서 숨지고 말았다. 1424년 8월 11일이었다.

락제의 시신은 북경으로 옮겨져 성대한 장례식을 거쳤다.

이 때 후궁 수십 명이 영락제의 능에 함께 매장되었는데, 그 중에는 조선에서 공출해 간 궁녀도 있었다.

 

“황제가 죽자 후궁으로 순장(殉葬)된 사람이 30여 인이었다.

죽는 날 모두 뜰에서 음식을 먹이고, 식사가 끝난 다음 함께 마루에 끌어 올리니,

곡성이 전각을 진동시켰다. 마루 위에 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서게 하고,

그 위에 올가미를 만들어 머리를 그 속에 넣게 하고 평상을 떼어 버리니, 모두 목이 매여 죽었다.

한씨가 죽을 때 김흑(유모의 이름)에게 이르기를, “유모! 나는 가요. 나는 가요.”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기 전에 곁에 있던 환관이 걸상을 빼내 죽었다.”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한씨는 한확의 누이였는데,

그는 이후에도 명나라에 누이를 바침으로써 조선에서 임금도 함부로 못하는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영락제가 죽자 4대 황제로 즉위한 홍희제는 아버지의 정책을 대부분 거꾸로 뒤집는다.

몽고원정이나 서방원정은 모두 중단되고, 내각과 환관 중심 체제도 혁파되었다.

홍희제는 수도까지 다시 남경으로 옮기려 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그 뒤를 이은 선덕제는 영락제와 홍희제의 정책을 절충하면서 수성군주로서 명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중국과 한국에는 가끔씩 비슷한 인물들이 나타난다.

가령 당태종과 조선 태종, 송태조와 고려 태조가 성격이나 업적에서 비슷한 부분이 많은데,

명성조 영락제와 비슷한 인물로 조선의 세조를 들 수 있다.

더욱이 대략 한 세대를 두고 태어난 두 사람은(영락제는 1360년, 세조는 1417년생이다)

엇비슷한 시대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두 사람은 ‘친인척’이기도 하다.

누이를 영락제의 후궁으로 들인 한확이 딸을 세조의 며느리로 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세조는 1453년에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사실상 쿠데타를 벌이며

그것을 영락제가 내세웠던 것과 같은 ‘정난’이라고 했다.

조카를 죽이고 옥좌를 빼앗은 후 바른 말 하는 선비들을 도륙한 것도 같다.

두 사람 모두 문화군주나 수성군주라기보다 정복자를 지향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옥좌에 앉은 영락제가 실무형 관료와 환관들을 활용했던 반면,

세조는 한명회, 신숙주 등 집권 과정에 힘을 보탰던 공신들에게 의지했다.

그리하여 말년에는 그 공신들의 압력에 치여 지내게까지 된다.

이들 공신은 ‘훈구파’를 형성하여, 약 백 년 뒤 사림파가 집권하기까지

정권을 농단하며 각종 부정부패와 탈법을 자행하게 된다.

조선이 중국을 모방하면서도 중국과는 규모가 달랐기 때문일까.

이후 연산군과 광해군의 예에서 보듯, 조선의 왕들은 쿠데타는 할 수 있어도 독재는 할 수 없었다.

 - 함규진, 역사저술가

-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세계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