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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東醫寶鑑)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Gijuzzang Dream 2009. 7. 31. 12:38

 

 

 

 

 

 

 

 동의보감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바베이도스 회의 결정... 국내 7호 탄생 

 

 


허준(許浚, 1539-1615, 호는 구암龜巖)의 주도로 편찬된 조선시대 의학서 <동의보감(東醫寶鑑)>이

한국의 7번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됐다.

문화재청은 7월31일 유네스코 사무국 마쯔우라 사무총장이
중앙아메리카의 바베이도스 수도 브리지타운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9차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1 권고를 받아들여

한국이 등재 신청한 <동의보감>초간본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승인했다고 말했다.


이번에 등재가 결정된 <동의보감> 판본은 1613년(광해군 5년), 편찬 총책임자인 허준 자신이

직접 간행에 관여해 나온 초판 완질 어제본(御製本)으로,

국립중앙도서관(25권 25책/ 보물 제1085호)과 한국학중앙연구원(25권 25책/보물 제1085-2호) 소장이다.

 

보물 제1085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보물 제1085-2호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이로써 한국은 1997년 <훈민정음>과 <조선왕조실록>의 두 건을 시작으로

<직지심체요절>과 <승정원일기>(이상 2001년),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 <조선왕조의궤>(이상 2007년)에 이어

모두 7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문화재청은 보건복지부
와 한의학연구원 주도로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추진되던 <동의보감>을

2007년 11월 공식 등재 신청키로 확정하고,

지난해 3월 외교통상부를 통해 유네스코에 관련 신청서를 제출했다.

<동의보감>이 세계기록유산이 등재된 것은

유네스코가 <동의보감>의 역사적 진정성, 세계사적 중요성, 독창성, 기록정보의 중요성,

관련 인물의 업적 및 문화적 영향력 등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문화재청이 말했다.

초간본 기준 총 5편 25책인 <동의보감>은 실용성과 과학성을 중시해

당시까지의 동양의학의 모든 지식을 집대성해 체계적으로 서술했으며

일본과 중국에까지 전해져 동아시아 전통의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고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세계기록유산은

인류의 소중한 기록유산을 가장 적절한 기술을 통해 보존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가능한 많은 대중이 기록유산에 접근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에서

유네스코가 1992년부터 추진해온 사업으로 2년마다 등재 유산이 정해진다.

이번 세계기록유산에는 동의보감을 포함해 '1215년 마그나카르타
(영국)', '안나 프랑크의 일기(네덜란드)',

'니벨룽겐의 노래(독일)' 등 35건이 신규 등재돼 세계기록유산은 모두 83개국 193건에 이른다. 
국가별로는 독일이 가장 많은 11건을 보유했고

오스트리아 10건, 러시아와 폴란드 각 9건, 멕시코 8건, 중국 5건 등이다.

우리나라의 세계기록유산은 7건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많고 세계에서는 6번째로 많아

문화선진국으로서의 위상을 높이는데 일조할 것으로 기대된다.

 

 

 


코페르니쿠스 자서전에서 <동의보감>까지

 

각국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관심 증대

 

유네스코가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업을 시작한 것은 1992년이었다.

다만 이 무렵에는 이런 사업을 한다는 합의만 도출했을 뿐이며,

그에 따른 세계기록유산 등록기준이 마련된 것은 1995년이고, 실제 기록유산이 탄생한 것은 1997년이다.
이후 한국의 <동의보감>을 등재 결정한 올해 바베이스도스 회의에 이르기까지

총 9회에 걸쳐 탄생한 세계기록유산은 83개국 193건을 헤아린다.

 

 

이 세계기록유산 사업은 유네스코 '세계유산(World Heritage)'사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역사가 짧아 아직까지는 세계유산 만큼의 관심을 받지는 못한다.
하지만 문화재청에서는 세계기록유산 사업이 언제까지나 지금과 같은 위치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으며,

가까운 장래에는 '세계유산'에 맞먹는 대접을 받을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때를 대비한다는 차원에서도 될 수 있으면 많은 유산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미 이런 징후가 감지되기 시작했다고 판단한다.
이전까지는 국가별 기록유산 등재 신청 규모를 제한하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한 회의에서 3건 이하만 신청하도록 하는 가이드라인을 확정했다.
이는 그만큼 세계기록유산을 세계 각국이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등재를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한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나아가 우리가 세계기록유산에 부쩍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데는

'세계유산'에서의 뼈아픈 경험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당시에는 '세계유산'이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다지 매력은 없었다.

하지만, 이후 상황은 돌변했다.

관광객 유치라는 현실적 경제 목적과도 뗄 수 없는 세계유산을 더 만들어내기 위한 각국의 움직임이

그야말로 '혈안'이 되다시피한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국내 문화재 분야에서는 90년대 중반 이전을 회상하면서

"등재 기준도 상대적으로 까다롭지 않았으며, 경쟁 또한 훨씬 덜 했던 그때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많이 등재시켰어야 한다"는 만시지탄을 숨기지 않는다.

아무튼 세계기록유산 사업은 전성기를 준비하는 전단계인 '정착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까지 탄생한 세계기록유산 중에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사례가 많다.


1939년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 '오즈의 마법사'
는 영화산업 진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과

제작 당시의 촬영 기술 그대로 보존 상태가 매우 우수하다는 판정을 받아

관련 영상자료가 2007년에 등재됐다.

음악 관련 유산으로는 오스트리아가 보유한 '슈베르트
악보 모음집'(2001년)과

독일이 소장한 '루드비히 반 베토벤 교향곡 9번-합창' 악보(2001년)가 세계기록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문학이나 과학 부문에서는

'입센의 인형의 집 필사본'(노르웨이, 2001년), '안데르센의 원고 필사본과 편지'(덴마크, 1997년),

'괴테의 생가, 괴테-쉴러 사료보관소(독일, 2001년), 

'코페르니쿠스 자서전'(폴란드, 1999년)을 특히 주목할 만하다. 

요가 수행자들의 의료비법과 관행에 대한 기록물이자 약초 활용법 소개한 '타밀 의료기록 모음집'(인도, 1997년), 카리브해
연안 부족들의 노예 생활상을 기록한 '카리브해 노예 기록유산'(바베이도스, 2003년),

무슬림 코란의 가장 오래된 경전인 '오스만의 무샤프 코란'(우즈베키스탄, 1997년)도 세계기록유산이다.

호주 국립도서관이 소장한 '제임스 쿡 선장의 엔데버호 일기'(2001)는

1768-1771년 쿡 선장이 엔데버호를 타고 유럽인 최초로 호주 동부 해안과 뉴질랜드를 일주 항해한

기록이며, 이집트가 보유한 '수에즈 운하 비망록'도 세계 문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록 유산이다.


한국은 7건의 ’세계기록유산’외에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조선왕릉, 종묘 등 8건을 등재시켰으며,

‘세계자연유산’에 제주도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등재돼 있다.

아울러 ‘세계무형유산’에도 판소리, 강릉 단오제 등 3건이 등재돼 있다.

 

- 김윤구, 김태식기자,

- 2009.07.31 (c)연합뉴스

 

 

 

 

 

 

  

 

서자출신으로 당상관 오른 불멸의 의성 허준

 

 

 

<동의보감>편찬을 주도한 어의(御醫) 허준(許浚ㆍ1539~1615)은 서자 출신으로

정1품의 직위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특히 허준은 전염병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위해 한글로 된 의서를 저술하는 등

일반 백성들의 구제에도 힘을 써 ‘불멸의 의성(醫聖)’으로도 불린다.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허준에 대한 기록은 매우 미비하다.

심지어 허준이 어떤 경로로 어의가 됐는지조차 정확하지 않다.

양천허씨 가문 족보인 ‘양천허씨세보’에는 허준이 1574년(선조 7) 의과에 급제한 것으로 기록돼 있고,

‘미암일기’에는 미암 유희춘이 이조판서 홍담에게 천거해 의관이 되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허준은 양예수 등과 함께 선조를 진료한 공으로 여러 차례 상을 받기도 했고,

1590년에는 광해군의 두창을 씻은 듯 치료해 이듬해 당상관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로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떠나자 허준은 어의로 선조를 모셨으며,

선조와 광해군을 진료한 공을 인정받아 양평군(陽平君)이란 작호와 함께

‘정1품 보국숭록대부’의 파격적인 품계를 받았다.

허준이 명저 <동의보감> 편찬에 착수한 것은 1596년의 일이다.

‘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서를 편찬하라’는 선조의 명을 받은 허준은

혼신을 다해 1610년 <동의보감> 집필을 마무리했다.
허준은 특히 임진왜란 후 전염병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위해

한글로 쓴 <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 등의 의서를 많이 저술해 많은 생명을 구했다. 

 

<동의보감>은 국가가 주도해 편찬하였으며, 

평민의 보건의료에 대한 책무가 국가에 있다는 근대적 이념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물재료와 치료기술을 자세히 싣고 있으며

병이 생기기 전에 치료한다는 양생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내경(內景), 외형(外形), 잡병(雜病), 탕액(湯液), 침구(鍼灸) 등 총 5대 강편(綱篇) 25책으로 구성됐다.

동의보감 내경편 ‘신형장부도’

 

<동의보감>은 허준(許浚) 등이 선조의 명을 받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서들을 모아 집성하고

또 임상의학적 체험을 통한 치료방을 모아 놓은 한의학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1596년 선조는 허준과 정작, 양예수 등에게 명하여 의서를 편찬하게 했으나,

정유재란으로 편집이 중단되었다가 난이 끝난 뒤 허준이 단독으로 진행하여 1610년에 완성하였다.

 

1613년에 내의원 목활자본으로 간행된 이 책은 모두 25권 25책으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보물 제1085호) 모두 동일판본이다.
장서각 소장본(보물 제
1085-2호) 25권 25책은 완질본으로 무주 적상산사고본이다.

규장각 소장본(보물 제1085-3호) 24권 24책은 태백산사고본(잡병편 권6의 1책 결본)이고,

역시 규장각 소장본 17권17책은 8책이 결본이다.

국내에 남아있는 동의보감 초간본(목활자본)은 전본이 드물어 희소성이 있으며

한국의학사와 임진왜란 이후 도서출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동의보감>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간행된 어떤 의서보다

체계적으로 서술된 독창성 등을 높게 평가받았다.

고대에서 17세기 초까지 아시아의 의학적 지식을 총정리하고 있으며

편찬된 이후 현재까지 한의학적 치료에서 기본적인 의서로 사용돼 왔고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반영하는 자료의 의미도 크다.

 

 

 

의성(醫聖) 허준의 삶과 의인(醫人)의 길

 

□ 허준(許浚, 1539년-615년)의 출생과 가계

허준의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

    허론(許碖)과 영광김씨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 허준의 부친 허론은 『양천허씨세보』에 의하면 무과에 급제하여 용천부사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 허준은 어려서부터 “총민하면서도 학문을 좋아하여” 경전과 사서에 두루 밝았고

    의학에는 더욱 정통했다고 한다.

하지만 서자라는 사회적 신분의 제약으로 문 · 무관이 아닌 의관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 의관으로서의 활동과 선조 보필

○ 허준이 어떤 경로로 의관이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양천허씨세보』에는 1574년(선조 7)의과에 급제하였다고 하고,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에  

  의하면 1569년(선조 2) 이조판서 홍담(洪曇)에게 내의원에 천거해 주도록 부탁하여

  의관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관으로서의 허준은『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양예수(楊禮壽) 등과 함선조를 진료한 공으로 여러 차례 상을 받기도 하였으며,

    1590년에 광해군의 두창(痘瘡)을 치료하여 이듬해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다.

○ 허준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난갈 때 어의로서 선조 옆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모셨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전쟁이 끝난 후 호성공신(扈聖功臣)이 되었고,

     1606년(선조 39)에는 “양평군(陽平君)”이라는 작호와 함께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라는 품계를 받았다.

   

□ 동의보감을 비롯한 활발한 저술활동

1596년 “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서(醫書)를 편찬하라”는 선조의 명을 받고

    동의보감(東醫寶鑑)』편찬에 착수하였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편찬이 잠시 보류되기도 하였다.

○ 허준은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어의로서 책임을 물어 의주로 유배되었다가 바로 풀려나

    광해군의 어의로 활동하면서 의서 편찬에 전념하여 1610년 『동의보감』의 편찬을 완성하였고,

    1613년 내의원에서 『동의보감』초간본이 간행되었다.

그밖에 허준은 맥학관련 의서인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과

    일반 민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글로 된 의서인『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를 저술하였고,

    임진왜란 이후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유행하자

   『벽역신방(辟疫神方)』,『신찬벽온방(新纂辟瘟方)』등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 명 칭

◦ 세계의 기록유산 (Memory of the World)

 

□ 목 적

◦ 세계적 가치가 있는 귀중한 기록유산을 가장 적절한 기술을 통해 보존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함

◦ 유산의 중요성에 대한 전 세계적인 인식과 보존의 필요성을 증진하고, 기록유산 사업 진흥 및

  신기술의 응용을 통해 가능한 많은 대중이 기록유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

※ 세계기록사업 일반운영지침 : 보존(Preservation), 접근(Access),

    기록문화유산 부산물들의 보급(Distribution of derived products), 인식 제고(Awareness)

□ 종 류

도서관, 문서고 등에 보관된 세계적 가치가 있는 값진 소장문서로서 그 유형에는 필사본, 도서 등

  글자형태의 기록이 담긴 자료와 그림, 프린트, 지도, 음악악보 등 비문자 기록 자료 및

  전통적인 움직임과 현재의 영상 미지, 오디오, 비디오, 원문과 아날로그 또는 디지털 형태의

  정지 이미지 등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전자 데이터 등이 포함됨

 

□ 등재 기준 

<기준항목>

◦ 한 국가를 초월하여 세계사와 세계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준 자료

◦ 역사적 중요시기를 이해하는데 중요하거나 그 시기를 특별한 방법으로 반영하는 자료

세계사 또는 세계문화 발전에 기여한 지역, 인물, 주제 에 대한 정보를 지닌 자료

형태와 스타일에서 중요한 표본이 된 경우, 뛰어난 미적 양식을 보여 주는 자료 등

<보충기준>

◦ 완성도 또는 완전성에 있어 탁월한 자료

◦ 독특하거나 희귀한 자료

 

□ 등재 절차

 

등재 신청 대상

문화재 선정

(국내)

 

 

문화재위원회에서 세계기록유산 신청대상 문화재 선정

 

 

등재 신청서류

유네스코 제출

 

 

ㅇ제출기한 : 매 2년마다 3월말까지 

ㅇ제 출 처 : 유네스코 사무국에 제출

ㅇ제출서류 : 신청서 및 부속자료(사진, 슬라이드, VTR 등)

 

 

사전심사

 

 

제출년도 9월초 유네스코 정보사업국에서 신청서 사전심사

 

 

국제자문위원회

최종심사

 

 

제출익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서

최종 심사 및 등재권고

 

 

유네스코사무총

장 승인

 

 

국제자문위원회 권고에 따른 등재 승인

 

□ 등재 효과

 

◦ 국제적 보존 ·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법적기구로 발전 가능성 대비

◦ 보존관리에 대한 유네스코의 보조금 및 기술적 지원

◦ 홍보와 인식 제고를 위한 세계기록유산 로고 사용 및 유네스코를 통한 지속적 홍보 가능

◦ CD-ROM, 디지털 테이프와 오디오 CD 같은 디지털기술을 활용하여 세계기록유산을

  가능한 많은 대중에게 제공할 수 있음

 

□ 등재 현황

◦ 전체 세계기록유산 : 83개국 193건('09.7.31. 현재)

◦ 우리나라 등재 현황(7건)

* 1997년 : 훈민정음(국보 제70호), 조선왕조실록(국보 제151호)

* 2001년 : 승정원일기(국보 제303호), 직지심체요절

* 2007년 : 조선왕조의궤, 해인사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

* 2009년 : 동의보감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

(International Advisory Committee)

 

 

 

□ 목적 및 기능

◦ 세계기록유산에 관한 전반적인 의사결정 수행

 

□ 연 혁

◦ 1992년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유산사업 창설

◦ 1995년 세계유산등록 선정기준 합의, 등록제도 창설 권고

 

□ 구 성

유네스코 정보사업국의 자문기구

사서, 법률전문가, 교육학자, 저술가, 문서관리 전문가 등 14여명

 

세계기록유산 주요 목록

현재까지 등재된 세계기록유산은 83개국 193건이 있으며, 그 중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음

 

슈베르트 악보 모음집

- 오스트리아 2001년 등재

- 슈베르트가 직접 수기로 기록한 악보들의 방대한 모음집

 

오즈의 마법사

- 1939년 제작된 영화, 미국 2007년 등재

- 영화산업의 진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과

   제작당시의 촬영기술 그대로 보존상태가 매우 우수함을 인정받음

 

타밀 의료기록 모음집

- 인도 1997년 등재

- 요가 수행자들의 의료비법과 관행에 대한 기록물로서 약초 활용법 소개

 

카리브해 노예 기록유산

- 바베이도스 2003년 등재

- 카리브해 연안 부족들의 노예 생활상에 대한 모든 기록물

 

오스만의 무샤프 코란

- 우즈베키스탄 1997년 등재

- 무슬림 코란의 가장 오래된 경전

 

입센의 인형의 집 필사본

- 노르웨이 2001년 등재

- 근대극을 확립하고 근대 사상과 여성해방운동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친

   입센의 대표작 [인형의 집]의 필사본으로 노르웨이 국립도서관에 소장중임

 

안데르센의 원고필사본과 편지

- 덴마크 1997년 등재

- 덴마크 왕립도서관에 보관중인 안데르센의 원고 필사본과 편지로

   덴마크의 문학과 예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기록물

 

루드비히 반 베토벤 교향곡 D 마이너

- 독일 2001년 등재

- 전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곡중의 하나인 베토벤 [합창]악보,

  마지막장에 인류의 평화를 노래한 쉴러의 시 [환희에 붙임]을 실어 교향곡의 한계를 뛰어넘었으며

  후대 교향곡에 큰 영향을 끼쳤음

 

괴테의 생가

- 독일 2001년 등재

- 괴테가 1782∼1786년까지 살았던 괴테생가(괴테·쉴러 사료보관소)로 필사본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음

 

제임스 쿡 선장의 엔데버호 일기

- 오스트레일리아 2001년 등재

-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도서관에 보관중인 1768∼71년까지 엔데버호를 타고

   유럽인 최초로 오스트레일리아 동부해안과 뉴질랜드를 일주 항해한 제임스 쿡의 기록

 

르네상스 시대 학문 및 예술 관련 문서 모음집

* 2005년 공동등재-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헝가리, 이탈리아, 미국

 

수에즈 운하 비망록

- 이집트 1997년 등재

- 문서, 희귀본, 사진, 그림 등으로 구성된 수에즈 운하 기록물

- 지난 200년간 동·서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수로에 대한 정보와

   중동 지역의 역사에 끼치는 영향 등을 잘 보존하고 있는 기록물임

 

코페르니쿠스 자서전

- 폴란드 1999년 등재

- 지동설로 유명하며 르네상스 출현을 가능하게 한 언어학자, 의사, 박애주의자, 현대 경제의 창시자인

   코페르니쿠스의 자서전

 

 

 

동의보감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유

 

 

1. 진정성(眞正性)

 

ㅇ 국가 기관에 의해 작성되었다.

- 동의보감의 편찬을 위한 특별기구[편서국(編書局)]가 설치되고,

   여기에 당대 최고 의사와 학자인 양예수(楊禮壽), 정작(鄭碏) 등이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이후 왕의 주치의[御醫]였던 허준이 편찬을 완료하였다.

 

ㅇ 연대기 기록에서 실체가 확인된다.

- 작성의 경위 및 작성자에 대한 정보는 이미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관계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光海君日記 권32, 光海君 2년 8월 戊寅)

 

ㅇ 작성 시점부터 국가의 공식적인 문서 보관 관청 및 시설에서 보존, 관리 되었다.

- 동의보감은 간행 후 국가의 해당 관청 및 전국의 사고(史庫)에 분산 보관되었다.

   조선왕조 이후에도 이들 자료는 국가 시설에 수용 보관되었으며,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는 문화재 관련 기구에서 관리되었다.

 

 

2. 세계적 중요성

 

□ 중세 동아시아 의학의 집성

 

ㅇ 동의보감은 16세기 말까지 간행된 동양의학 주요 의서의 집대성이다

- 동의보감은 ‘역대의방(歷代醫方)’에 기록한 86종의 인용도서를 포함한 총 120여 의 도서를

   정리하여 인용하였으며, 그 연구의 바탕이 되었던 왕실 내장고의 500권의 의서를 감안할 때

   16세기까지 간행된 대부분의 의서를 총 정리하였다. 이를 통하여 한의학의 형성 이래 축적된

   의학이론 및 임상적 지식들이 동의 보감 안에서 재정리되었다.

 

ㅇ 동의보감은 중세 아시아의 우주와 자연, 인간에 대한 이해를 살필 수 있는 주요한 자료이며,

    17세기 이후 인체와 질병을 둘러싼 생활과 문화,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 자료이다.

- 인간 윤리와 천지의 자연법칙을 일관되게 적용하는 성리학 사상과 연단법 등의 도가적 수련법,

  그리고 흙,물,불,바람의 네 요소로 인체가 이루어 졌다는 불교의 사상을 수용하여

   인간을 다양하게 이해하였다. 이처럼 동의 보감은 중세 동아시아인들이 생각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는데, 양의 전통 세계관은 자연과 인간이 밀접하게 관계를 맺는 유기체적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 동아시아 의학의 발전 및 보급에 기여

 

ㅇ 동의보감은 병이 생기기 전에 치료한다는 전통의학의 관념에 기초한 양생의 개념을

     적극 개진함으로써 중세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한 특징을 형성하였다.

- 양생 개념의 수용은 의학이론의 중심을 질병의 증상에서 인체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편집의 체계는 인체를 중심으로 내경․외형․잡병의 순서가 되었으며,

   이는 개별 병의 증상을 중심으로 편집하였던 이전과는 다른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 사람의 몸이 형성, 변화하는 과정을 자연의 형성과정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절제와 금욕을 강조하는

   중세 사상을 반영하는 생명관을 제시하였다.

 

ㅇ 동의보감은 17세기 이후 가장 널리 사용된 의서로,

    현재 동아시아 전통 의학의 보급 및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 동의보감은 편찬 이후 조선의 왕실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국민들을 치료하는데 어서 기초의서로

   이용되었으며, 이후 조선에서 편찬되는 의서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다.

- 중국에서 30여 차례, 일본에서 2차례 간행되었으며,

   1897년 미국인 랜디스에 의해서 동의보감의 일부가 영역되어 소개되는 등

   400여 년 동안 동아시아 전역 의사들의 교육과 사람들의 질병 치료에 널리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양에도 적극 소개되었다. 현재 한국은 물론 중국, 베트남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한의학의 기초 연구서로써 계속 간행하고 있으며 동시에 자국어로 번역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동의보감에서 정리된 전통의학 지식을 임상 치료에 적극 활용하는 한편,

   현대 의학지식 속에서 체계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의학의 발전을 꾀하는 연구에 기초가 되고 있다.

 

동의보감은 17세기 초에 이미 인민의 보건의료보건 향상이 국가의 주요한 책무 중에 하나라는

    근대적 이념을 선제적으로 구현(반영)하고 있다.

- 동의보감을 국가가 주도하여 편찬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국가 일반인민의 보건과 복지에 대한

   책무가 바로 국가에 있다는 중세 동아시아 성리학의 위민사상(爲民思想)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 전문적 의학지식 이외에도 일상에서 구하여 사용할 수 있는 약물재료와 치료 기술을

   자세히 발굴하여 실었으며, 일반 인민이 읽을 수 있는 쉬운 한글을 채택하여 기록하기도 하였다.

 

 

3. 독창성

 

동의보감은 독자적인 분류 방식을 통해 동아시아지역에서 당시 간행되었던 어떤 의서보다

    체계적으로 서술되었다.

- 동의보감의 편집 형식은 각 질병의 원인, 일반적 증상, 진단법, 침구법, 처방, 특이 증상 등에 대해서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기술하였다. 또한 세부내용에서 각론을 제시함으로써 이해하기 쉽도록 하였다.

- 동의보감은 편, 강목, 소강목, 내용의 순서로 구조를 작성하고

   본문 가운데 관련 개념들에 대한 연관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찾으려는 내용을 중심으로 상위개념, 하위개념, 유사 질병 등의 의미적 네트워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한다. 또한 위의 정보를 담은 목록을 강화함으로써 의서로서의 실용도를 대폭 높였다.

 

ㅇ 동의보감은 인용한 전거들을 명확히 밝히고 있는 의서이다.

- 지식의 축적을 중시하는 동양학의 전통에서 인용전거를 전부 밝히고 있는 동의보감은

   새로운 지적 풍토를 조성하는데 기여하였으며, 이 가운데 수정․ 변화된 의학이론 및 처방의 내용을

   비교 검토함으로써 한의학의 발전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주요한 의서이다.

- 동의보감은 인용전거를 분명하게 기재하였으므로,

  동의보감에서 언급하였으나 현재 전하여지지 않는 의서는 오직 동의보감만을 통하여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 고,중세 의학사를 복원 및 연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4. 비대체성

 

ㅇ 허준이 최초로 작성하여 국왕 광해군에게 올린 동의보감은 전하여지지 않는다.

- 최초의 동의보감은 필사되었으며, 그것을 토대로 내의원에서 교감, 간행한 동의보감 초간본은

  허준이 처음 기록했던 동의보감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 동의보감의 판본은 국내외를 합하여 40여 종 이상이지만,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의보감 초간본의 완질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에서 소장하고 있는 두 본만이 남아 있어 유일본에 가깝다.

- 동의보감 초간본은 전쟁 직후 국가적 어려움에도 심혈을 기울여 진행된 국책 사업이었던 만큼

   내용의 정확성은 이후에 다시 간행된 다른 판본들보다 훨씬 우수하다.

 

 

5. 희귀성

 

동의보감은 여러 차례 중간되는 등 많은 판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의보감의 원형이라고 할 초간본은 매우 드물다.

 

동의보감 초간본의 경우 25권 25책이 현재까지 온전히 전하는 것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이 있다.

 

 

6. 원형성

 

ㅇ 최초 제작된 원형이 유지되고 있다.

- 1613년 간행된 후 400여 년의 시간이 경과하였으나 간행 당시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동의보감(東醫寶鑑) 개요

 

□ 임진왜란 중에 꽃피운 의서(醫書), 동의보감

동의보감은 1596년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의 대부분이 황폐화되고 병자가 쉽게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편찬됨

의원과 의서는 있으나 새로운 학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의원들이 처방의 뜻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 약을 잘못 쓰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선조는 허준 등에게 새로운 의서의 편찬을 명하여 발간되었음

 

□ 동의보감의 편찬과정

동의보감은 국내 의서인 『의방유취(醫方類聚)』·『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림촬요(醫林撮要)』를 비롯하여 중국 의서 86종을 참고하였고,

편찬 작업은 정유재란의 발발 등으로 보류되기도 하였음

1608년 선조의 승하로 잠시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던 허준이 의서 편찬에 전력을 기울여

1610년(광해군 2) 25권 25책으로 완성하였으며, 3년 후인 1613년 내의원에서 완간함

 

□ 동의보감의 구성과 내용

우리나라 전통의학 백과전서로 오늘날까지 애용되고 있는 동의보감은

내경(內景) · 외형(外形) · 잡병(雜病) · 탕액(湯液) · 침구(鍼灸)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음

○ 금번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동의보감은 초간본 5편 25책임

(국립중앙도서관 및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본)

내경(內景) : 인체를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들인

                      정(精), 기(氣), 신(神), 혈(血)과 오장육부(五臟六腑)를 설명함

외형(外形) : 몸의 겉에서 관찰되는 인체부위의 의학적 기능과 거기에 생기는 질병에 대해 설명함

잡병(雜病) : 인체에 발생하는 질병들의 원인, 증상과

                      그에 대한 진단과 치료의 기본이 되는 원리와 방법들을 서술함

탕액(湯液) : 약재의 채취와 가공, 약물의 처방법, 복용법, 약리이론,

                      오장육부와 경각각에 상응하는 약물 등을 서술함

침구(鍼灸) : 경락과 혈자리, 침의 종류와 시술법, 뜸의 이론과 실행법,

                      침과 뜸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방법과 금기 등을 다룸

 

 

□ 동의보감의 역사적 가치

1. 중세 동아시아 의학의 집대성

동의보감은 실용성과 과학성을 중시하여 당시까지의 동양의학의 모든 지식을 집대성하여

가장 체계적으로 서술되었음

우리 국토에서 생산되는 향약(鄕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이용과 보급을 강조하였으며,

이를 위해 향약 중 637개의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여 쉽게 이용토록 하였음

다양한 국·내외 의서를 참고하여 편찬하여 내용이 풍부하여

임상의(臨床醫)에게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음

 

2. 동아시아 의학의 발전 및 보급에 기여

○ 동의보감은 병이 생기기 전에 치료한다는 전통의학의 관념에 기초한 양생의 개념을 적극 개진하여

중세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한 특징을 형성함

○ 동의보감은 17세기 이후 가장 널리 사용된 의서로 일본과 중국에까지 전해져

동아시아 전통의학 발전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

 

3 . 국가의 국민 의료보건 향상 책무의 반영

○ 동의보감은 17세기 초에 백성의 의료보건 향상이 국가의 중요한 책무로 인식한 결과로

중세 동아시아 성리학의 위민사상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의 결과임

○ 동의보감의 편찬을 위한 특별기구가 설치되고 왕의 주치의였던 허준이 편찬을 마무리하여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추진된 것은 근대적 국가의 국민보건의무 이념이 선제적으로 구현된 것임

○ 일반 백성에게 널리 사용되기 위해 쉽게 구할 수 있는 약물재료와 치료기술을 발굴하였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언문을 채택하여 기록하기도 하였음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6건)

 

구 분

등 재 유 산

1997년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2001년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2007년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조선왕조 의궤

2009년

동의보감

 

 

1. 훈민정음 (97.10.1. 등재)

 

훈민정음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란 뜻이다.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은 그때까지 사용되던 한자가 우리말과 구조가 다른 중국어의 표기를 위한 문자체계이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배워 사용할 수 없는 사실을 안타까워하여 세종 25년(1443)에 우리말의 표기에 적합한 문자체계를 완성하고 "훈민정음"이라 명명하였다.

 

세종 28년(1446)에 정인지 등이 세종의 명을 받아 설명한 한문해설서를 전권 33장 1책으로 발간하였는데 책의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하였다.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현존본은 1940년경 경북 안동 어느 고가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국내에서 유일한 귀중본이다.

 

세종은 새로 만든 새문자에 대하여 창제의 목적을 밝힌 서문과 새문자 하나 하나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예시하고 설명한 글을 짓고, 집현전의 학자들에게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용례를 짓도록 하여 책을 만들고 이것을 백성들에게 널리 공표하였다.

 

이 책에는 세종어제 서문과 훈민정음 음가 및 운용법을 밝힌 예의편이 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 합자해, 용자례 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세계의 많은 민족들이 자기의 언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문자를 만들려고 노력하였으나, 한글과 같이 일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이 이미 존재한 문자에서 직접으로 영향 받지 않고 독창적으로 새 문자를 만들고 한 국가의 공용문자로 사용하게 한 일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더욱이 새 문자에 대한 해설을 책으로 출판한 일은 유례가 없었던 역사적인 일이었다. 특히, 이 책에서 문자를 만든 원리와 문자사용에 대한 설명에 나타나는 이론의 정연함과 엄정함에 대해서는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정인지의 서문이 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쓰여 졌다고 되어 있어어도 음력 9월 10일에 출판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에서 이 책의 출판 일을 기념하여 한글날로 제정한 것이나 유네스코에서 문맹퇴치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세종대왕상을 주는 것은 이 책의 문화사적 의의를 나타낸다.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조선왕조실록 (97.10.1. 등재)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의 시조인 태조로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1392년~1863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총 1,893권 888책으로 되어 있는 오래되고 방대한 양의 역사서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경제, 산업, 교통, 통신, 사회, 풍속, 미술, 공예,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그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초자료 작성에서 실제 편술까지의 편수 간행작업을 직접 하였던 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기술에 대한 비밀성을 제도적으로 보장 받았다. 실록의 편찬은 다음 국왕 즉위한 후 실록청을 개설하고 관계관을 배치하여 편찬하였으며 사초는 군주라 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도록 비밀을 보장함으로써 이 실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확보하였다.

 

실록이 완성된 후에는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에 각각 1부씩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고의 실록들이 병화에 소실되기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재출간하거나 보수하여 20세기 초까지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의 4사고에 각각 1부씩 전하여 내려왔다.

 

정족산,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1910년 일제가 당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였다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대로 소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일본으로 반출하여 갔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어 현재 27책만 남아 있다. 적상산본은 구황궁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가져가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1984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함께 보관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 정족산본 및 태백산본을 분리하여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산엽본 21책을 포함해서 총 2,077책이 일괄적으로 국보 제 1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3. 직지심체요절 (01.9.4. 등재)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하 불조직지심체요절이라 함)은 백운 화상이 75세였던 고려 공민왕 21년(1372년)에 노안을 무릅쓰고 선도(禪徒)들에게 선도(禪道)와 선관(禪觀)의 안목을 자각(自覺)케 하고자 함은 물론, 선풍(禪風)을 전등(傳燈)하여 법맥(法脈)을 계승케 하고자 저술한 것으로서, 그 제자 석찬과 달담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 7월에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등의 사전부(史傳部)의 여러 불서(佛書)를 섭렵하고 역대의 여러 불조사 (諸佛祖師)의 게(偈), 송(頌), 찬(讚), 가(歌), 명(銘), 서(書), 법어(法語), 문답(問答) 중에서 선(禪)의 요체(要諦)를 깨닫는데 필요한 것만을 초록(抄錄)하여 찬술 (撰述)한 것이 그 주된 내용이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의 ‘직지심체’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이라는 수신오도(修身悟道)의 명귀에서 채록한 것으로 ‘참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직시(直視)하면, 그 심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본서는 우리나라의 학승(學僧)들이 대교과(大敎科)를 마치고 수의과(隨意科)에서 공부하는데 사용되는 대표적인 학습서인 것이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의 찬자(撰者)인 백운화상(白雲和尙)은 백운이 그의 호이며, 법명(法名)은 경한(景閑)이다.고려 충렬왕 24년(1289년)에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출생하여, 공민왕 23년(1374년)에 여주(驪州)의 취암사(鷲巖寺)에서 77세를 일기로 입적(入寂)하신 분이다. 화상은 어려서 출가하여 불학(佛學)을 익히고 수도하는 데에만 전념하였다. 후에 백운화상은 중국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 천호암(天湖庵)의 석옥청공(石屋淸珙)화상으로부터 직접 심법(心法)을 전수 받았으며, 인도의 지공(指空) 화상에서도 직접 법(法)을 물어 도(道)를 깨달았던 것이다. 귀국한 뒤에는 태고 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 1301년∼1382년)나 혜근 나옹화상(惠勤懶翁和尙, 1320년∼1376년)과 더불어 대선사(大禪師)로서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뿐만 아니라 황해도 해주(海州)의 안국사(安國寺)에서 11년 동안이나 선림(禪林)의 정업(精業)에 전력하였고, 뒤에는 해주의 신광사(神光寺)에서 후학들을 계도(啓導)하였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이 해외로 유출된 경위는 조선시대 고종 때 주한 불란서대리공사로 서울에서 근무한바 있는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가 수집해간 장서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 그 후 골동품수집가였던 앙리베베르(Henry Vever)에게 넘어갔으며 그가 1950년에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책은 상·하 2권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하권만이 유일하게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다. 하권은 39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 장은 없고 2장부터 39장까지 총 38장만이 보존되고 있다.

 

흥덕사(興德寺)의 창건연대와 규모는 알 수 없으나, 「불조직지심체요절」하권 간기에 고려 우왕 3년(1377)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하였음을 명기(宣光七年丁巳七月 日 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하고 있는데, 이것은 독일의 구텐베르그보다 70여년이나 앞선 것으로 1972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도서의 해"에 출품되어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 활자본으로 공인된 것이다.

 

그러나 흥덕사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던 중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청동으로 든 북과 청동불발(靑銅佛鉢)에 "西原府 興德寺(서원부 흥덕사;서원은 신라 때 청주의 이름)"라는 글자(名文)가 음각되어 있어 이곳이 바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간행한 흥덕사임을 입증하게 되었다.

이 책은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인쇄하였는데, 인쇄술을 보다 편리하고 경제적이며 교정을 쉽게 하여 주었고 이 모든 것은 책의 신속한 생산에 공헌하였다. 또한 활자 인쇄술에 적합한 먹, 즉 기름먹을 발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이 혁신한 실용적인 활판 인쇄술은 동양 인쇄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유럽등지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4. 승정원일기 (01.9.4. 등재)

 

「승정원」은 조선 정종대에 창설된 기관으로서 국가의 모든 기밀을 취급하던 국왕의 비서실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1623년(인조1년) 3월부터 1894년(고종31년) 6월까지 272년간 승정원에서 처리한 국정 기록과 승선원, 궁내부, 비서감, 규장각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1910년(융희 4)까지 총 3,243책의 기록이 남아 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 최대의 기밀 기록인 동시에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과 같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자료이며, 또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 기본 자료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실록보다 오히려 가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음은 물론, 원본 1부밖에 없는 귀중한 자료로 국보 제303호(1999.4.9)로 지정되어 있다. 이는 세계 최대 및 1차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내용을 보면 국정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사실의 기록으로 계품(啓稟), 전지(傳旨), 청패(請牌), 청추(請推), 정사(呈辭), 상소(上疏), 선유(宣諭), 전교(傳敎) 등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의 기재 방식을 보면 한 달을 기준으로 책머리에 월간 경연상황, 내전(內殿)의 동향을 기록하고 다음으로 승정원의 관리 및 당직자의 표시와 출근실태를 표시하고 마지막에 승정원의 업무현황, 왕 및 내전의 문안, 승정원의 인사관계(人事關係) 등의 내용을 실었다.

 

「승정원일기」는 일기식으로 한달에 1책씩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후기로 올수록 내용이 많아져 한 달에 2책 이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조선 건국 초부터 정리되었으나 조선전기분(朝鮮前期分)은 임진왜란 등의 병화(兵火)로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재는 3,243책만이 남아 있으며, 국사(國史)연구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문화, 군사 등 모든 학문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이다.

 

그 사료적 가치는 중국의 「중국 25사」(3,386책, 약 4,000만자) 및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888책, 5,400만자)보다 더 방대한 세계 최대의 연대 기록물(총 3,243책, 글자수 2억4천250만자)이며,「조선왕조실록」이 국왕 사후 사관들에 의해 편집된 2차 자료라면「승정원일기」는 당시의 정치·경제·국방·사회·문화 등에 대한 생생한 역사를 그대로 기록한 조선시대 1차 사료인 것이다. 고종 31년 갑오경장 이후의 일기 내용은 일제에 의한 내정 간섭기 궁중기록이므로 조선왕(황제)의 결제를 요하는 사건과 기타 궁중의 비화를 기록한 것이므로 근대사 연구의 1차 기본 사료가 된다.

 

또한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일기로 300년간의 국문학의 변천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국문학적 가치가 인정되고 있으며, 288년간 매일의 날씨 정보를 기록한 것으로서 특히「조선왕조실록」의 날짜는 60갑자로만 표기되어 있어 오늘날 우리가 쓰는 태양력으로 환산하는 데 많은 혼란을 겪고 있으나 「승정원일기」는 60갑자와 수시력 역법의 일자를 동시에 표기하고 있어 역사의 기초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전통적인 유교사회 내부로부터 자생적인 천주교 수용이 민중들 사이에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이에 대한 정치권의 대응 등을 자세히 살필 수 있다.

 

 

 

5.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07.6.14. 등재)

 

ㅇ 고려대장경판 81,258판

그 외 1098년부터 1958년까지 불교 경전과 불교 역사, 불교 계율, 불교 연구논문, 고승의 문집, 계율판, 불교 판화 등 5,987판

 

고려대장경판(팔만대장경)의 제작은 한국이 13세기에 일구어낸 위대한 문화적 업적으로 학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려대장경판은 81,258 목판에 새긴 대장경판으로 아시아 전역에서는 유일하게 완벽한 형태로 현존하는 판본자료다.

 

고려대장경판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정확하고 가장 완벽한 불교 대장경판으로 산스크리트어에서 한역된 불교대장경의 원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고려대장경판은 인도 및 중앙아시아 언어로 된 경전, 계율, 논서, 교리 및 불교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물을 집대성하여 한역한 내용과 더불어 중국어가 원문인 일부 문헌을 선정하여 수록하고 있다. 그 엄청난 규모로 볼 때 이러한 대장경판의 제작은 상당한 국고 및 인력의 투입을 필요로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해인사에 소장되고 있는 고려대장경판과 제 경판 87,000여장의 목판은 1098년부터 1958년까지의 오래 시간에 걸쳐 완성된 경판들로써 국가제작판과 사찰제작판으로 나뉜다. 국가제작판은 고려대장경으로 81,258판 5,200여 만자에 달하고, 사찰제작판은 5,987판이다.

 

려대장경판은 이미 사라진 초기 목판제작술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는 한편, 고려시대의 정치, 문화, 사상의 흐름과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역사기록물 이기도 하다. 경판 표면에는 옻칠을 하여 글자의 새김이 760년이 지나도록 생생한 상태로 남아 현재까지 인쇄할 수 있을 정도이다.

※ 대장경(大藏經)은 불교의 교조 석가모니가 일생동안 설법한 경전과 계율, 그리고 그 내용들에 대해 후대의 사람들이 첨부한 논서, 주석서, 이론서들을 집대성한 불교경전(佛敎經典)의 총서(叢書)를 가리키는 말이다.

 

해인사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은 2007년 6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6. 조선왕조의궤 (07.6.14. 등재)

 

ㅇ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된 546종 2,940책의 각종 의궤

ㅇ 한국학 중앙연구원 장서각(藏書閣)에 소장된 287종 490책의 각종 의궤

 

의궤는 조선왕조에서 유교적 원리에 입각한 국가 의례를 중심으로 국가의 중요 행사를 행사 진행 시점에서 당시 사용된 문서를 정해진 격식에 의해 정리하여 작성한 기록물이다. 같은 유교문화군에 속하는 중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는 의궤의 체계적인 편찬이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의궤는 조선시대 600여년에 걸쳐(1392년~1910년) 왕실의 주요 행사, 즉 결혼식, 장례식, 연회, 사신영접 등 뿐 아니라, 건축물·왕릉의 조성과 왕실문화활동 등에 대한 기록이 그림으로 남아져 있어 600여년의 생활상을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

 

총 3,895 여권의 방대한 분량에 이르는 의궤는 왕실의 주요한 의식이 시기별, 주제별로 정리되어 있어서, 조선왕조 의식의 변화 뿐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를 비교연구, 이해하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반차도, 도설 등 행사모습을 묘사한 시각 콘텐츠는 오늘날의 영상자료처럼 당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예컨대 정조의 능행도(陵幸圖)는 전 여정을 15.4m에 걸쳐 표현하고 있다. 이런 형태(시각중심 visual-oriented)의 기록유산은 뛰어난 미술장인과 사관의 공동작업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 마디로 의궤는 장기간에 걸쳐 조선왕조의 주요 의식을 방대한 양의 그림과 글로 체계적으로 담고 있으며 이러한 유형은 동서양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난 기록유산의 가치(outstanding value of documentary heritage)를 지니고 있다.

 

세계사 맥락에서 유교의 중요성이 저평가되고 있는 면이 없지 않다. 유교는 세계의 조그만 한쪽 구석에 존재했던 문화가 아니다. 유교가 지배했던 영토는 그 면적으로 볼 때 서유럽보다도 몇 배나 컸으며 인구수에 있어서도 유럽, 서남아시아 및 중동을 초과하는 큰 규모였다. 유교권은 최소 14세기까지 전세계를 2~3개 권역으로 분할하던 주요 문화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수차례에 걸친 야만족의 침입과 이들에 의한 점령으로 인해 시간이 경과하며 전통 의식은 원형을 점차 잃어갔다. 특히 몽골 침입 기간 동안 유교 의식을 수록한 문헌 상당수가 소멸됐다. 이에 반해 한국은 그러한 침입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전통 유산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며 천년 동안 진정성을 훼손하지 않고 유교 의식을 봉행하는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의궤는 대부분의 유교사회에서 잊혀진 과거 유산을 보존하고 있는 기록이다. 또한, 의궤는 조그마한 군주국가의 기록이 아니라, 한때 세계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유교 전통의 핵심을 대표하는 기록이다.

 

조선왕조 의궤는 2007년 6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자세한 내용은 문화재청 홈페이지(www.cha.go.kr)→문화유산정보→한국의 세계유산 참조

 

 

 

 

 

 

 

 

 

 

 

 

  1.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International Advisory Committee) : 유네스코 정보사업국의 자문기구로 세계기록유산 등재와 관련된 전반적인 의사결정을 수행함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