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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가며(자료)

해외대원정에 나선 중국의 대항해가 - 정화

Gijuzzang Dream 2009. 7. 30. 12:14

 

 

 

 

 

정화

 

 


“일찍이 크고 작은 30여 나라를 찾아,

십만 리의 바닷길을 다녔네.

망망대해에서 산처럼 큰 파도가 하늘을 엎을 듯이 몰아쳤다네. 보이느니 안개 자욱하게 덮인 바다

틈틈이 낯선 이국의 풍경이라네.

돛을 높이 올려 밤낮으로 바다를 달리니,

파도가 뱃전을 때리고,

그 파도를 우리 배가 뛰어넘었네.”

(정화, <천비지신령응기(天妃之神靈應記)>에서)

 

 

 

정화(鄭和). 본래 이름은 마화(馬和)다. 아니, 그나마 다른 이름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색목인(色目人)이라 불리던 중동 계통의 피를 받은 이슬람교도로,

그의 아버지는 메카 순례를 다녀온 적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마합지였다고 하는데,

‘합지’(哈只)란 메카 순례를 다녀온 이슬람교도에게 붙이는 존칭,

‘하지’인 듯하니, ‘마(馬)’란 본래 ‘마흐무드’ 또는 ‘알 마그레브’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정화의 조상이 원나라 때 함양왕에 봉해진 최고위급 색목인이라는 기록도 있지만,

정화는 어린 시절에 고향을 떠났고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겨우 기억할 정도라고 했으므로

그다지 믿기 힘든 기록이다.

 

정화가 고향인 운남성 곤명을 떠나야 했던 이유는

바로 나중에 영락제가 되어 그에게 대원정을 지시하는 연왕 주체(朱棣)가

원나라의 세력이 남아 있던 곤명을 정벌했기 때문이다.

곤명성이 함락되자 주체는 성인 남성을 모두 학살해 버리고, 어린 소년들은 거세시켰다.

병졸이나 환관으로 쓰기 위해서였는데, 열두 살이던 정화도 이 때 거세된다. 

자신의 가족과 남성을 빼앗아간 주체에게 원한을 품을 만도 하련만, 정화는 오히려 그에게 충성했다.

그래서 주체가 조카인 건문제와의 권력 투쟁을 거쳐 황제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로를 세우고, 덕분에 환관 중에서 두 번째로 높은 내관태감이 되어 정(鄭)이라는 성도 하사 받았다.

 

나중에 미화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정화의 용모와 풍채는

흔히 환관에게서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고 한다.

키가 9척에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위엄 있게 걷는 모습은 호랑이 같고, 목소리는 크고 우렁찼다고 한다.

또 병법과 지략에 밝고, 고금의 학술에 통달했을 뿐 아니라,

사람됨이 온화하고 겸손하여 모두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완벽한 인간’이었다는 것인데,

이미 ‘완벽한 남자’일 수는 없었던 그에 대한 그런 묘사가 얼마나 진실일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영락제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야심적인 사업을 그에게 맡긴 것을 보면,

그리고 그것을 기대 이상으로 훌륭히 수행한 것을 보면 대단한 인물이었음은 틀림없으리라.

 

 

 

그 국력과 인구에 비추어 보면,

전근대 중국은 다른 왕국들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영토에 욕심을 낸 경우가 많지 않다.

원정을 하더라도 북방 초원 지대, 서역, 베트남, 그리고 한반도 정도였다.

그러나 영락제는 다섯 차례나 직접 몽고 원정을 했을 뿐 아니라

1405년에는 정화에게 함대를 이끌고 동남아시아와 인도, 중동, 아프리카까지 대원정을 지시한다.

실로 중국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정말 ‘원정’의 성격이었는지 묻는 일이 당시부터 지금까지 분분하다.

황궁 함락 당시 죽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시체를 찾지 못했고, 지금은 ‘바다 멀리’ 달아나서

복수를 꿈꾸고 있다는 소문이 나돈 건문제를 찾기 위한 수색이라는 말이 있었다.

뭐든 화려하고 진기한 것을 좋아했던 영락제가 일반적인 진상품에 싫증이 나서,

머나먼 곳에서 진귀한 물건을 가져오도록 한 극히 개인적인 동기가 위주였다는 해석도 있다.

(그래서인지 원정대의 함선들은 ‘보물배(寶船)’라고 불렸다).

하지만 동원된 선박이 최대 3500척, 인원은 3만 명에 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런 동기에서 벌인 사업으로는 규모가 너무 크다. 그래서 정치적 동기, 또는 군사적 동기가 거론된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여러 나라와 적극적으로 무역을 해서

몽고와의 전쟁 등으로 피폐된 재정을 보충하려 했다는 것이다.

 

사실 영락제(永樂帝, 明의 제3대 황제, 재위 1402~1424년, 묘호는 太宗 : 후에 成祖)는

외국과의 교역을 억제했던 아버지, 태조 홍무제(洪武帝  朱元璋, 명의 제1대 황제, 재위 1368~1398년)

달리 비단길과 바닷길을 통한 교역을 장려하였다.

하지만 대원정의 동기를 그것만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머나먼 나라에 넘치도록 있다는 황금이나 당시 유럽에서 황금이나 다름없는 가치가 있었던 향료,

또는 노예를 노리고 모험을 떠난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 가마, 마젤란 등과는 달리

‘보물배’는 세계 각지의 진귀한 물건을 실어왔을 뿐

당장 경제적으로 가치가 높은 물자를 갖고 돌아오지는 않았던 것이다.

보물배가 싣고 온 향료 등을 서양에 판매하면 높은 수익을 얻었을 것이라고도 하지만,

그런 이중 무역이 행해졌다는 기록은 없다. 그에 비해 대규모의 원정단에 들어가는 비용은 엄청났다.

 

그래서 명나라의 영향력에 도전하고 있던 베트남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 명나라의 위세를 떨치고,

중화와 변방이라는 전통적인 국제관계를 과거보다 훨씬 큰 규모로 이룩하려던 것이라는 해석,

즉 정치적 동기를 주로 보는 해석이 가장 설득력을 얻는다.

그래서인지 정화의 선단은 수십 년 후 ‘지리상의 대발견’에 나선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단과는

원주민을 대하는 태도가 정반대였다. 서양인들은 원주민을 분열시켜 자기들끼리 싸우게 했고,

자신들을 환대하는 사람들을 배반하고 학살했다.

정화의 함대는 반대로 서로 갈라져 싸우는 세력들을 중재하고 화해시켰으며,

적대 세력은 가만 두지 않고 격파했지만 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선물을 주었다.

원주민의 땅을 빼앗거나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고, 원주민을 노예로 잡아가지도 않았다.

중국의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정복과 착취가 아니라 명나라의 위력을 과시하고 그 형식적인 지배권을 인정받는 게 목표였던 것이다.

 

 

 

만약 시대의 흐름이 조금 달라져서 중국과 서양의 함대가 충돌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부분 약 4백년 뒤 아편 전쟁 때와는 정반대의 양상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중국 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했으리라는 것이다.

중국 함대는 서양 함대보다 인원이나 배의 수에서 훨씬 앞섰고,

배의 크기만 보더라도 콜럼버스의 캐러벨선보다 정화의 보물배는 30배나 더 큰 거인이었다.

마젤란의 배는 3 개의 돛으로 움직였고, 보물배는 10개의 돛으로 움직였다.

한 척의 보물배 옆에 바스코 다 가마의 배들을 놓으면 다섯 척이 나란히 늘어서도 모자랐다.

공격력을 봐도, 서양 배들은 기본적으로 활로 무장을 했으나

중국 배들은 총통을 비롯한 각종 화약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명나라 함대는 보급선과 지원 부대도 충분했다.

전쟁이란 물자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지만, 도저히 상대가 안 되는 규모의 차이였다.

 


다만 육지에서도 반드시 명나라가 우세하리라는 법은 없었다.

실제로 정화는 상륙지에서 여러 차례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을 많이 치러 본 정화의 노련함과 지휘 능력이 제몫을 해냈다.

스리랑카에서는 그곳 왕이 배신하여 함대와 연락이 끊기고 적군에게 포위당하는 위기에 처했지만, 소수의 병력을 솜씨있게 운용한 결과 거꾸로 스리랑카 왕을 포로로 잡아 북경으로 압송한 일도 있었다.

 

이런 정화의 대원정은

1405년 7월 11일 시작해 1407년에 끝난 제1차 항해를 시작으로 1407년의 2차, 1409년의 3차, 1413년의 4차, 1416년의 5차, 1421년의 6차, 그리고 1430년에 시작해 1433년에 끝난 7차까지 모두 합쳐 16여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동남아시아의 참파에서 말래카, 태국, 인도의 캘리컷, 스리랑카, 페르시아의 호르무즈, 아라비아의 아덴,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케냐의 몸바사까지 명나라 깃발을 단 거대한 보물선이 오고 갔다.

정화의 함대는 나침반과 견성판으로 방위를 재고, 물시계를 가지고 배의 속력을 따지며 장거리 항해를 했다. 선원들의 주식은 현미와 절인 야채였고, 개고기도 먹었다. 선원들의 고된 뱃길을 달랜다는 이유로 기생들도 상당수 태웠고, 학자들도 탑승하여 진귀한 이국의 풍물을 탐구했다.

그러나 중국 ‘무적 함대’의 영광은 오래지 않았다. 누군가와 싸워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 스스로 보물배의 목재를 뜯어내고 항해 기록을 불살랐다.

1424년에 영락제가 사망하자 뒤를 이은 홍희제(洪熙帝, 영락제(永樂帝)의 맏아들, 명나라의 제4대 황제. 이름은 주고치(朱高熾),  묘호는 仁宗, 재위 1424~25년)

“보물배의 원정은 아무 소용없는 일에 국력을 낭비할 따름이니 마땅히 중단해야 한다”는

유학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할아버지인 태조 주원장의 정책을 본받아

외국과의 접촉을 통제하고, 특히 배가 중국의 항구를 드나드는 일을 엄격히 금지하는 해금(海禁) 정책을

취했다. 원정의 기록은 폐기되고,

정화도 궁궐의 개축작업을 돕는 등 비교적 한가한 일을 하며 세월을 보내야 했다.

홍희제의 뒤를 이은 선덕제(영락제의 장손으로 이름은 주첨기(朱瞻基), 明의 제5대 황제, 묘호는 宣宗,  재위 1425~1435년)는 기본적으로 홍희제의 노선을 따르면서도

애써 이룩한 해군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깝게 여겼다. 그래서 6년 만에 원정을 지시했고,

육순을 넘긴 정화도 다시 바다로 나갔다. 하지만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1433년, 정화는 호르무즈 근방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시신을 싣고 돌아온 함대는 두 번 다시 출항하지 못했다.

 

그만한 노력을 들여 그만한 업적을 세워 놓고, 왜 중국은 스스로 공든 탑을 허물어 버렸을까?

원정의 동기가 건문제를 찾거나 영락제의 이국 취미를 만족시키는 차원의 것이었다면

이는 오히려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원정에는 그 이상의 뜻이 있었고, 성과도 있었다.

그런데도 영락제의 죽음 후 상황이 급변한 이유는 아직 확실히 규명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가설은 ‘새로운 세력의 등장과 기득권과의 정치적, 이념적 다툼’이다.

정화의 대원정은 경제적 목적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었기에

서양의 경우처럼 ‘상업혁명’을 가져올 정도의 효과는 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신흥 상인층의 등장은 가져왔을 것이다.

또 이민족 출신에 환관인 정화처럼 전통 중국의 지배계급에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들의 권력 획득도

두드러졌을 것이다. 상업이 발달하고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새로운 사상이나 문화가 유행할 조짐도 보였을 것이다.

 

이에 조바심이 난 기득권층, 다시 말해 농업 생산을 바탕으로 유교 이념과 전통 문화를 내세우며 살던 계층이 일제히 ‘반격’을 한 것은 아닐까?

명나라는 17세기 초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광업, 공업, 상업의 발달로 새로운 상인층의 세력이 강해지자

상공업에 무지막지한 세금을 매기며 노골적으로 탄압하여 권력구도의 변화를 막았던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중국은 자체적으로, 그것도 서양에 앞서서 ‘근대화’될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셈이다.

 

 

 

2002년에는 한 권의 책이 세계 역사학계를 놀라게 했다.

개빈 멘지스의 <1421-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였다.

정화 원정대의 항해일지와 보고서 등은 해금 때 불태워지고,

지금은 선덕제 때 세운 비석 몇 기와 원정대에 따라갔던 역사가들이 쓴 개괄서 두어 권만 남아 있다.

이에 따르면 보물배들은 동남아에서 동부 아프리카까지 오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어찌 보면 그렇게 놀라운 업적이 아닐 수도 있었다.

동남아-인도, 인도-중동, 중동-동아프리카 등의 항로는 오래 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다만 정화 원정대는 그 여러 항로를 하나로 꿰어서 오갔을 뿐이며,

콜럼버스나 마젤란처럼 미지의 바다를 누비며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멘지스는

항해가로서의 자기 경험과 뿔뿔이 흩어져 있는 여러 흔적들에 의거하여 놀라운 주장을 내놓았다.

정화의 함대, 특히 제6차 원정에서 정화와는 별도로 움직이다가 여러 해가 지나서야 귀국했던

부대장들의 소함대는 동아프리카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나아가 희망봉을 돌았으며,

서아프리카를 지나 남북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남극과 북극까지 도달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국인들이 콜럼버스보다 수 십 년 전에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마젤란보다 수 십 년 전에 세계를 일주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당시 중국의 기술로 미루어 그런 항해는 충분히 가능했고,

서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아메리카 등에 군데군데 남아 있는 중국인의 흔적들,

가령 정화가 원정지에 남긴 비석과 비슷해 보이는 돌판, 동양인의 용모를 한 사람들의 전설,

중국 닭과 비슷한 품종인 남미의 닭 등을 ‘증거’로 들고 있다.

또한 그는 마젤란 해협의 발견 연도보다 앞선 해도에 이미 그 해협이 나와 있다면서

“정화 원정대가 남긴 해도를 바탕으로 서양 사람들이 세계 해도를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콜럼버스나 마젤란이 항해에 성공했을 것이다”고도 주장했다.

멘지스의 주장이 맞다면 ‘지리상의 대발견’이란 중국인들이 차린 밥상에 수저만 들이민 격이었다.

 

 

‘동양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가슴이 뛰는 주장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것이 ‘가능’했다고 해서 실제로 ‘존재’했다고는 볼 수 없다.

중국 배들이 세계를 일주할 능력이 있었다고 실제로 세계를 일주했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또한 ‘신대륙’, 특히 오스트레일리아에는 분명 서양인들이 오기 전에 동양인들이 오고 간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들이 꼭 중국인이라고, 구체적으로 정화 함대였다고 봐야만 할까?

앞선 송나라나 원나라, 아니 신라나 고려 사람들일 수도 있지 않은가?

멘지스는 뛰어난 상상력과 보기 드문 끈기를 가지고 주목할 만한 책을 썼지만,

정작 한자를 해독할 능력은 없었다. 그래서 번역된 자료나 2차 자료만 갖고

중국의 시대 배경을 설명하다 보니 곳곳에 어색한 부분도 눈에 띈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책 한 권만으로 정화 대원정의 역사가,

그리고 세계사가 다시 씌어질 것 같지는 않다.

 

정화와 그의 위풍당당한 함대를 떠올리며, 생각해 봐야 할 점이 둘 있다.

하나는 중국, 아니 크게 보아 동양이 서양에 뒤지지 않았으며

많은 부분 앞서 나갔음에도 결국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양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이고

오늘날까지 서양 중심의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1등을 해 놓고도 2, 3등에게 뒤처지는 경우는 더 비참하고, 한심한 게 아닐까.

 

또 하나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점이다.

정화의 업적은 서양에서는 동양에서만큼 평가 받지 못한다.

그러나 동양의 힘이 점점 강해진다면, 나중에는 멘지스의 주장처럼 다소 어설픈 이론도

정설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그리고 오늘날 세계사가 대체로 서양 위주로 가닥을 잡고 있는 것과 반대로,

동양이 항상 서양을 이끌었고 서양이 앞선 시기는 ‘잠깐의 예외’에 불과했다고 통용되지 않을까.

 

역사는 냉정한 시각을 요구한다.

그러나 역사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역사를 외치는 목소리 크기에 달려 있다.

그런 현실이 단지 ‘동양 중심 대 서양 중심’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아전인수적 역사관마저 경계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남달리 착잡할 수밖에 없다.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조행복 역, 사계절)는 저자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 조금 부담스럽지만, 하나의 장편 역사소설을 읽는 듯 다채로운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나간 점을 음미할 수 있다.

 

미야자키 마사카쓰의 <정화의 남해대원정>(이규조 역, 일빛)은 정화의 원정을 세계사적인 큰 흐름에서 서술하며, 그의 원정이 이슬람 상인들의 ‘제1차 대항해 시대’와 서양인들의 ‘제3차 대항해 시대’ 사이를 잇는 중국 위주의 ‘제2차 대항해 시대’를 나타낸다고 본다.


1421-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정화의 남해대원정1421 세계최초의 항해가 정화

 

우에스기 센넨의 <1421, 세계최초의 항해가, 정화>(임진호 역, 이치)는

다른 책에 비해 정화라는 인물에 많은 중점을 두었다.

멘지스의 주장에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도 은근히 동조하는 투다.

 

- 함규진, 역사저술가

-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세계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