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중국 ‘무적 함대’의 영광은 오래지 않았다. 누군가와 싸워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 스스로 보물배의 목재를 뜯어내고 항해 기록을 불살랐다.
1424년에 영락제가 사망하자 뒤를 이은 홍희제(洪熙帝, 영락제(永樂帝)의 맏아들, 명나라의 제4대 황제. 이름은 주고치(朱高熾), 묘호는 仁宗, 재위 1424~25년)는
“보물배의 원정은 아무 소용없는 일에 국력을 낭비할 따름이니 마땅히 중단해야 한다”는
유학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할아버지인 태조 주원장의 정책을 본받아
외국과의 접촉을 통제하고, 특히 배가 중국의 항구를 드나드는 일을 엄격히 금지하는 해금(海禁) 정책을
취했다. 원정의 기록은 폐기되고,
정화도 궁궐의 개축작업을 돕는 등 비교적 한가한 일을 하며 세월을 보내야 했다.
홍희제의 뒤를 이은 선덕제(영락제의 장손으로 이름은 주첨기(朱瞻基), 明의 제5대 황제, 묘호는 宣宗, 재위 1425~1435년)는 기본적으로 홍희제의 노선을 따르면서도
애써 이룩한 해군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깝게 여겼다. 그래서 6년 만에 원정을 지시했고,
육순을 넘긴 정화도 다시 바다로 나갔다. 하지만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1433년, 정화는 호르무즈 근방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시신을 싣고 돌아온 함대는 두 번 다시 출항하지 못했다.
그만한 노력을 들여 그만한 업적을 세워 놓고, 왜 중국은 스스로 공든 탑을 허물어 버렸을까?
원정의 동기가 건문제를 찾거나 영락제의 이국 취미를 만족시키는 차원의 것이었다면
이는 오히려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원정에는 그 이상의 뜻이 있었고, 성과도 있었다.
그런데도 영락제의 죽음 후 상황이 급변한 이유는 아직 확실히 규명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가설은 ‘새로운 세력의 등장과 기득권과의 정치적, 이념적 다툼’이다.
정화의 대원정은 경제적 목적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었기에
서양의 경우처럼 ‘상업혁명’을 가져올 정도의 효과는 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신흥 상인층의 등장은 가져왔을 것이다.
또 이민족 출신에 환관인 정화처럼 전통 중국의 지배계급에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들의 권력 획득도
두드러졌을 것이다. 상업이 발달하고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새로운 사상이나 문화가 유행할 조짐도 보였을 것이다.
이에 조바심이 난 기득권층, 다시 말해 농업 생산을 바탕으로 유교 이념과 전통 문화를 내세우며 살던 계층이 일제히 ‘반격’을 한 것은 아닐까?
명나라는 17세기 초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광업, 공업, 상업의 발달로 새로운 상인층의 세력이 강해지자
상공업에 무지막지한 세금을 매기며 노골적으로 탄압하여 권력구도의 변화를 막았던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중국은 자체적으로, 그것도 서양에 앞서서 ‘근대화’될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