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이 중국사에, 아니 동양사에 남긴 영향 중 하나는
역사서를 국가적 사업 차원에서 편찬하는 관행을 수립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중국의 역사책은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 진수의 <삼국지>처럼
개인이 연구하여 펴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당태종은 학문 연구 기관인 홍문관에서 <북제서>, <주서>, <수서> 등 여덟 권의
과거 왕조 역사서를 편찬하게 했으며(‘중국 24사’중 삼분의 일에 해당한다),
역사 기록의 주체를 개인에서 국가로 옮겼다.
이는 풍부한 자료를 활용하고 특정 개인의 사상에 치우치지 않은 역사가 나오게도 했지만,
한편으로 역사의 ‘어용화’ 경향도 나타났다.
사마천은 자신을 처벌한 한무제의 비리와 약점을 낱낱이 역사에 적는 등 서슴없이 ‘직필’을 휘둘렀다.
하지만 황제가 지휘하는 역사 기록 과정에서는 사관들이 꿈에라도 그런 비판을 시도할 수 없었고,
당나라의 개국 명분을 살리려고 수나라의 실정을 과장하거나,
당태종을 띄우기 위해 ‘현무문의 변’ 같은 사건 기록을 변조하는 등의 왜곡마저 저질러야 했다.
지금 전해지는 중국역사서와 그것을 본뜬 <삼국사기>의 기록만으로
삼국시대의 실체를 알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이렇게 황제와 왕조에 대해 자유로운 비판을 할 수 없게 된 개인들, 즉 지식인들은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역사 대신 정치론에서 제왕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역할을 강조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정관정요>다.
당태종의 정치의 요체를 담았다고 여겨져 온 이 책은 당태종 사후 50년쯤 뒤에 오긍이 저술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일 것’, ‘사치에 빠지지 말고 사사로운 욕심을 없앨 것’,
‘충신들을 곁에 두고 간신을 물리칠 것’ 등인데,
결국 요약하면 “(현명한)신하들의 말을 잘 들어야 좋은 임금”이라는 것이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정치론이고, 당태종의 실제 정치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임금은 아무것도 아니고 신하들이 얼마나 잘 하는지에 따라 좋은 정치가 된다는 논리는
지나치게 신하 입장에서만 정치를 보았다고 하겠다.
이런 정치론은 주자학의 시대가 되면서 더욱 강화된다.
주자로 불리는 주희는 “당태종이 한 일은 모두가 사리사욕에서 비롯된 일이었다”며
당태종을 잊고 고대의 신화적인 명군인 요, 순을 받들라고 했다.
이런 성향은 본고장 중국보다도 주자학에 충실했던 조선에서도 받아들여져,
조선왕조에서 정치를 논할 때 당태종이 거론되면
“유교를 장려한 점과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점은 훌륭했다”
“그러나 형제를 죽이고 말년에는 사치를 일삼았으니 위대한 군주는 아니다”는 식의 평가가
늘 정답이었다. 용감한 무인이자 전략가였던 당태종, 유방과 조조의 재능을 가졌던 당태종의 진가를
평가하기에는 지나치게 인색한 게 아니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