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특별전 대표 유물 ― '한국문화(文化), 그 찬란한 기억']
3. 호우총 호우
신라 고분에서 광개토왕 추모 기념품이…
고구려에 인질로 간 내물왕 아들이 가져와
양국 교류 보여주는 5세기 희귀 명문(銘文)자료
1946년 경주 호우총 발굴 조사에서 출토 된 호우
1946년 4월의 마지막 날, 서울을 출발한 미군 트럭 한 대가 경주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운전석 옆자리 조수석에는 국립박물관의 서갑록 연구원이 타고 있었고,
짐칸에는 낡은 측량도구와 발굴에 필요한 장비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이들은 그 전해 광복을 맞아 출범한 국립박물관의 첫 발굴을 위해 역사적인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같은 날 김재원 박물관장과 함께 기차 편으로 서울을 출발한 3명의 조사원은 다음 날 경주에 도착했다.
그러나 장비를 실은 트럭은 도중에 고장이 나서 사흘 만인 5월 2일에야 일행과 합류할 수 있었다.
조사원 가운데에는 이제 막 40대에 들어선 일본인 한 사람이 끼어 있었다.
총독부박물관 근무를 포함하여 15년 남짓 우리나라에 머물렀던 고고학자 아리미쓰(有光敎一)였다.
그는 박물관 업무를 인계하기 위해 한국에 남아 있다가 발굴현장까지 동행한 것이다.
국립박물관 직원 가운데는 발굴 경험자가 전무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자구책이었다.
그는 흡사 포로나 인질 같은 입장이었으나
올곧은 학자적 양심으로 발굴을 성실히 돌봐준 뒤 발굴을 끝내고 부산을 거쳐 귀국했다.
역사적인 첫 발굴 대상으로 선정된 '호우총(壺杅塚])'은
경주 시내 곳곳에 나지막한 언덕처럼 솟아있는 고총(高塚) 가운데 하나로
당초 '노서동(路西洞) 140호 무덤'으로 알려졌다.
이 무덤은 이 지역 대다수의 왕릉급 고분과 같은 대형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 積石木槨墳)으로
남쪽의 은령총(銀鈴塚)과 함께 표주박 모양의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었다.
그해 5월 한 달을 다 채운 조사 결과는 첫 발굴치고는 대단한 학술적 성과였다.
'호우총'이라는 이름은 많은 부장품과 함께 출토된 합(盒) 모양의 청동제 호우(壺杅)에서 비롯되었다.
그릇 밑바닥에 있는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는 16자의 명문은
이 유물의 제작지가 고구려임을 알려주었다.
여기서 을묘년은 광개토왕의 사후(死後)인 장수왕 3년(서기 415년)이다.
이 호우는 광개토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한 기념품이었던 것이다.
5세기경 고구려 유물이 신라 수도 경주에서 출토된 사연은 무엇일까.
당시 이 발굴을 직접 지휘한 김재원 관장은
이 특이한 호우가 광개토왕 때 고구려에 인질로 머물렀던
신라 내물왕의 아들 복호(卜好)가 귀국할 때 가져온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삼국 간에 이루어진 교류의 흔적을 물증으로 보여주는 희귀한 명문(銘文) 자료였던 것이다.
호우총 축조 시기는 돌무지덧널무덤의 마지막 단계인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출토된 호우는 약 100년 남짓 전세(傳世)되어 오다가 무덤 주인과 함께 묻힌 것이다.
호우총 발굴은 해방 후 출범한 국립박물관이 우리 손으로 이뤄낸 첫 발굴이자,
그 뒤에 이루어진 삼국시대 고분 연구에 시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박물관 100년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다.
-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 2009.06.24 © 조선일보 & Chosun.com
"호우를 찾아갔는데 아리미쓰(有光敎一)가 이것을 들어 올려 보여주면서 바닥의 명문(銘文) 쪽을 보는 광경을 보았지요. 아리미쓰는 '아, 손이 떨립니다' 하는 데 그때 떨리는 손에서 그 그릇의 가운데 금이 나타난 것을 목격했습니다."(손보기 석장리박물관 명예관장) 광복 이후 처음으로 이뤄진 이 고고학 발굴에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마지막 관장이었던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가 작업에 참여했다. 그 그릇의 바닥에서는 학계를 깜짝 놀라게 한 명문이 쓰여 있었다. 서기 415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기념해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경성대 사학과 학생으로서 발굴을 참관하던 손보기는 그 순간의 감격을 회고하면서 '유물 훼손'의 안타까움에 대해서도 털어놓는다. "땅 속의 미세 기후 환경 속에 있던 것을 햇볕이 쪼이는 가운데 들어 올린 것이 화근으로 보였지요. 발굴할 때는 흥분은 금물이라는 것을 마음 깊이 새겨두게 됐습니다." -<일곱 원로에게 듣는 한국 고고학 60년> 한국고고학회 엮음 / 사회평론 / 2008
그 호우총 발굴로부터 60여 년이 흐른 지금 출간된 이 책은 '한국 고고학 60년'의 비사(秘史)라 할 만하다. 한국고고학회가 기획한 '원로 증언집' 사업의 결과물로, 평생을 현장에서 보낸 '고고학의 산 증인'들로부터 생생한 육성을 수집한 것이다. 이 책은 어느 발굴 보고서나 논문에도 등장하지 않는 발굴 과정의 경험과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다.
김정기 교수는 '경주 황남대총을 발굴했으면 좋겠다'는 이병도 박사의 말을 전해 듣고 '저 산 같은 무덤을 미쳤다고 발굴해!'라며 기겁을 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결국에는 제가 그 미친놈이 된 건데, 그 고분은 경주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신앙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반대했던 것"이라고 회고한다. 김 교수를 인터뷰한 신창수 국립공주박물관장은 "1979년 황룡사지 발굴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오셔서 악수라도 한 번 하려고 앞에 서 있다가 차지철 경호실장한테 쫓겨서 사무실 한 방에 다 몰려 감금되고 그랬다"고 말한다. 손보기 교수는 1973년 구석기 유적인 제천 점말동굴을 발굴할 당시 현지 한약재 시장에 오래 된 짐승뼈들이 나와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고 말한다. 알고 보니 그곳의 짐승 유골들은 이미 서울 한약방까지 팔려 나가고 있었고, 동굴 입구는 걸인들이 구들을 놓고 살았던 탓에 많이 훼손돼 있었다.
윤세영 교수는 1959년 웅천패총 발굴 조사를 회고하며 "도서관 1층 화장실에서 4층 옥상까지 물을 길어 날라서 토기 파편들을 두서너 번 세척했는데 추운 겨울 찬물에 그런 일을 하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회고한다. 윤무병 교수는 '한국 고고학의 대표적 발굴'로 알려진 1971년의 무령왕릉 발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대발견이었는데… 초창기 학자 모두가 함께 겸허하게 반성해야 할 사건이었다." 너무나 서둘러 발굴한 탓에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얘기다. 이 책은 등장인물들이 발굴했던 그 수많은 유물들과 통하는 데가 있다. 역사를 증언하는 후대의 사료(史料)로 남게 될 것이라는 점 말이다. |
- 국립중앙박물관 · 조선일보 공동기획
●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특별전 유물 (1). 천마도 장니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627
●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특별전 유물 (2). 청자상감포도동자문동채주자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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