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테마전 <정병과 관음신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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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는 불교의식구이자 일상 생활용품이기도 한 정병 중에서도
소위 명품으로 거론되는 10여 점이 한자리에 모인다.
<물가풍경 무늬 정병(국보 92호)> <청자 물가풍경 무늬 정병 (보물 344호)> 등
이 중 가장 관심이 가는 정병을 꼽는다면,
국보 92호인 <물가풍경 무늬정병(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 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정병은 고려 금속공예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정병이 어떤 과정을 거쳐 관음신앙에 수용되었는지 알 수 있는
까닭은불보살 중에서도 대중적 인기가 가장 높은 관음보살이 늘 손에 쥔 물건이 바로 정병이기 때문이다.
전시는 정병이 가진 공예적인 특징과 종교적인 성격을 규명한다.
특히 고려시대 금속기와 도자기 정병을 한자리에서 보여주는 첫 번째 전시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고려시대 금속공예품을 대표하는 ‘물가풍경 무늬 정병’(국보 92호),
‘청자 물가풍경 무늬 정병’(보물 344호) 등 10여 점의 정병을 공개한다.
신안에서 발굴된 정병도 전시된다.
이번 전시에선 비슷한 시기에 제작됐으나
청동, 주석, 청자 등 재질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른 정병들을 한 눈에 보여주는 셈이다.
똑같이 청동으로 만들었다 해도 녹의 성분에 따라 그 빛깔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같은 시대에 제작된 같은 기형(器形)의 공예품이
재질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표현되는지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다.
이에 정병의 찬조 출연자로 이번 기획전에는
삼국시대 관음보살(국보 127호)과 금으로 제작한 높이 2.6㎝ 고려시대 미니 관음보살상도 전시된다.
정병이라는 유물이 나타나면 우선 관음신앙과 연관이 있지 않나 의심해 본다.
관음신앙은 불교의 여러 신앙 갈래 중에서도 이미 삼국시대에는 한반도에 상륙했으며,
더구나 그것이 활개를 쳤다는 점에는 어느 불교학자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알려진 거의 모든 정병은 약속이나 한 듯이 '고려시대'라는 명패를 달았다.
물론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다.
예컨대 지금 실물이 파악된 금속제 정병에는 대체로 문양이 없지만,
문양이 표현된 경우에는 입사(入絲)기법을 이용해
물가 풍경을 묘사한 포류수금문(蒲柳水禽文)이라는 무늬가 그것을 뒷받침하는 가장 주요한 근거였다.
포류수금문은
버드나무가지가 늘어진 물가에서 헤엄치는 새들과 배를 탄 사람 등을 묘사한 서정적인 문양이다.
이런 문양은 고려시대 청자 정병과 대접에도 보인다.
그러니 같은 문양이 나타나는 정병 또한 고려시대 유물이라는 등식이 성립한 것이다.
이번 테마전에 선보이는 정병들 또한 모두 '고려시대' 작품으로 분류된다.
정병(淨甁)
부처나 보살에게 바치는 맑은 물을 담는 물병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물병과 달리
물을 담는 주구(注口)와 물을 따르는 첨대(尖臺)로 이뤄진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원래 인도에서 정병은 수행생활을 하는 승려가 마실 물을 담던 수행도구의 하나였다.
5세기 초 불교 경전 『청관세음경(請觀世音經)』에
관음보살이 버드나무 가지와 맑은 물을 중생에게 받은 뒤 그들의 병을 치료해줬다는 내용이
전해지면서 부처나 보살에게 바치는 맑은 물을 담는 정병이 관음보살의 상징물이 됐던 것.
이후로 관음보살상 중에는 정병과 버드나무가지를 들고 있는 '양류관음보살상'도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불교가 성행했던 고려시대에는 정병도 모든 계층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품이었다.
중국 북송의 서긍(徐兢)이 1123년 고려를 방문한 후 저술한『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귀족과 관리, 사찰과 도관(道觀), 민가에서 물을 담을 때 모두 정병을 사용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정병은 주로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불교가 성행했던 고려시대에는 다양한 재질로 만든 정병이 널리 쓰였다.
금속기뿐 아니라 도자기로도 많이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금속제 정병에는 문양이 없지만,
문양이 표현된 경우에는 입사(入絲)기법을 이용해 물가의 풍경을 묘사한
‘포류수금문(蒲柳水禽文)’이 나타난다.
'포류수금문'은 버드나무가지가 늘어진 물가에서 헤엄치는 새들과 배를 탄 사람 등을 묘사한
서정적인 문양이다. 이 문양은 금속제 정병과 향완은 물론 청자 정병과 대접에도 보여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한 문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청자 정병과 대접, 금속제 향완에도 쓰이는 등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한 문양이다.
이 포류수금문은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고려만의 독특한 문양이었다.
이는 인도에서는 승려의 생활용기였던 정병이 고려에서는
모든 계층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병이 된 것. 또 정병의 성격이 불교공예품이면서
또한 생활용품으로도 이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채해정 학예연구사는
“고려의 정병은 유물이 워낙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생활용품으로 이용된 것이 맞는 듯하다”고설명했다.
한편, 이번 전시를 위해 전시품 분석을 실시한 결과,
<물가풍경 무늬 정병(국보 92호)> 의 주구 뚜껑과 병목 윗부분을 덮은 은제 장식에는
금도금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함께 전시되는 신안에서 발굴된 정병은 그동안 은제로 알려졌는데,
분석 결과 은이 아니라 주석과 납의 합금임이 밝혀졌다.
보존과학팀의 도움으로 밝혀진 이러한 결과는 이번 전시에서 얻은 커다란 성과로,
앞으로 금속공예를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청동 물가풍경무늬정병(국보 92호)]
고려 12세기, 높이 37.5㎝, 청동, 국립중앙박물관
정식명칭 -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
재질이 청동이며, 은 가루로 실선을 넣는 방식(입사기법)으로
버들과 물짐승 무늬를 넣었다는 의미다.
주구 뚜껑 부분, 첨대와 목 사이 원반의 투각 장식은 은으로 된 것에 금을 씌웠다.
금도금은 벗겨져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청자 물가풍경무늬정병(보물 344호)]
고려 12세기, 높이 34.2㎝, 국립중앙박물관
지정 명칭 - 청자양각위로수금문정병(靑磁陽刻葦蘆水禽文淨甁).
갈대밭과 물짐승 무늬를 돋을 새김한 정병이란 뜻이다.
양각기법으로 무늬를 새겨넣었다. 문양의 옆부분을 파내 무늬가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기법이다.
[물가풍경 무늬 정병]
고려, 12세기-13세기, 높이 37.5㎝
[몸에 지니는 작은 보살] 고려, 높이 2.6㎝
고려 사람들이 몸에 지니고 다니던 양류관음보살상은 높이가 2.6㎝에 불과하다.
이 금불상의 오른손 언저리에는 버드나무 가지가 꽂힌 정병이 놓여있다.
정병이 관음 신앙에 수용된 흔적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정병과 버드나무가지를 든 모습은 양류관음보살의 전형적인 도상이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통일신라 시대 청동정병(왼쪽)과
경북 군위 인각사에서 2008년12월 발굴 당시의 청동 정병(오른쪽) / 불교문화재연구소 제공
정병은 지금까지는 고려시대 유물만 알려졌으나
2008년 12월 군위 인각사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2점이 최초로 발견됐다.
두 점이 나온 청동 정병은 주전자의 일종이다. 한 점은 목 부분이 파손된 상태지만, 한 점은 완형이다.
정병은 지금까지는 고려시대 유물만 알려져 있었으나 이번에 최초로 통일신라의 것이 발견됐다.
고려 때의 것에 비해 몸체와 목 부분이 가늘고 길어 정병의 발전 양상을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볼록한 허리에 완벽한 형태미를 갖춘 정병은
충남 부여 부소산에서 나온 기존 9~10세기 유물보다 앞서며 예술성도 훨씬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나아가 지난해(2008년 12월 5일) 발굴조사 결과
국내 미술사학계를 들뜨게 한 군위 인각사 터에서 발굴된 유물은 총 19점으로
금동 병향로(柄香爐) 1점, 청동 정병(淨甁) 2점, 청동 향합(香盒) 1점, 청동 이단합(二段盒) 1점,
청동 반자(飯子) 1점, 청동 그릇 2점, 청동 접시 2점, 해무리굽 청자 7점, 청동판 1점, 가릉빈가상 1점이
세트를 이룬 불교공양구가 출토된 것이다.
인각사 경내에서는 회랑시설과 탑지, 담장시설 등 통일신라시대 건물지 5개 동이 확인됨으로써
이곳에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음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