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사극으로 역사읽기 - MBC 드라마 '동이'

Gijuzzang Dream 2009. 6. 26. 11:53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동이'

 

 

 

 

 인현왕후 폐위 사유는 '뒷담화'

 

 

최 숙빈 · 장 희빈 · 인현왕후의 여인천하를 다루고 있는 MBC 드라마 <동이>.

'야당'인 장희빈은 '여당'이자 '기호 1번'인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궐 밖으로 내모는 데에 성공하였다.

드라마 속에서 인현왕후의 폐위는 순전히 장 희빈 측의 작품으로 묘사되고 있다.

드라마 속에서 장희빈 측은 잘못된 탕약을 올려 숙종의 어머니 명성대비(명성왕후)를 위독하게 만드는

한편, 그 책임을 인현왕후에게 전가시켜 숙종의 마음을 돌려놓음으로써

중전 폐위라는 개가를 올리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드라마 <동이>의 주요 인물 인현왕후(박하선 분)ⓒ MBC

  

 

 

명성대비 죽음과 인현왕후의 폐위가 연관?

 

그런데 인현왕후가 폐위되었다는 이야기 자체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만,

그 폐위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관한 드라마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우선, 명성대비의 죽음이 인현왕후의 폐위와 완전히 무관했다는 점부터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명성대비는 숙종 9년 12월 5일(음력) 즉 서기 1684년 1월 21일(양력)에 사망했고,

인현왕후는 음력으로 숙종 15년(1689) 5월 2일에 폐위됐다.

음력을 기준으로 할 때에 두 사건 사이에 5년 반 정도의 시간적 간격이 있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대비의 죽음과 왕후의 폐위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었다.

 

게다가 명성대비 사후에야 비로소 장희빈(장옥정)이 후궁이 되고 여인천하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장희빈이 대비의 사인(死因)을 악용해서 인현왕후의 폐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인현왕후 폐위가 장희빈의 계략 때문이라는 드라마 <동이>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럼,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한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누구의 잘못 때문에 왕후가 폐위된 것일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왕후의 폐위를 초래한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 시기의 정세변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숙종이 인현왕후 폐위한 진짜 이유

 

숙종 6년(1680) 경신대출척 이후 정권을 잡은 쪽은 서인 당파였다.

그런데 서인의 집권은 숙종 15년(1689)에 다가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인의 집권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정치환경이 조성된 탓이었다.

그 환경이란 것은 장희빈의 아들인 이윤(훗날의 경종)의 출생이었다.

 

신생 왕조의 활력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자손이 번성했던 전기 조선과 달리,

후기 조선에서는 왕실에 손(孫)이 매우 귀했다. 손이 귀하다는 것은 왕실의 연속성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숙종 입장에서는 첫아들인 이윤의 후계자 지위를 조속히 확정할 필요가 있었다.

출생 이듬해인 숙종 15년(1689)에 이윤이 예비 후계자인 원자에 책봉된 데 이어,

다시 그로부터 1년 뒤인 숙종 16년(1690)에 정식 후계자인 세자에 책봉된 사실은

후계구도 안정에 대한 숙종의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인의 지지를 받는 이윤을 중심으로 한 후계구도의 정착은

집권여당인 서인의 기반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윤 중심의 후계구도 확립을 둘러싼 이해관계의 대립은 결국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분출되었다.

이 때문에 불거진 정쟁으로 송시열이 사약을 받는 등 서인 지도부가 대대적인 타격을 입는 동시에,

남인이 9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하는 정치변동이 발생했다.

 

숙종이 여당을 교체한 핵심적인 동기는,

자신이 구상한 후계구도를 반대하는 당파와는 손을 잡고 국정을 운영할 수 없다는 판단에 있었다.

그것은 특정 당파가 너무 커지기 전에 싹을 자르는 숙종 특유의 통치스타일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숙종시대의 정치변동에서 나타난 특징은 당쟁과 여인천하가 긴밀히 연동됐다는 점이다.

당쟁의 승패가 여인천하의 승패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패턴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서인정권이 무너지면서 인현왕후도 함께 무너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인현왕후의 폐위는 기본적으로 서인정권의 몰락과 연동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아무리 당쟁과 여인천하가 연동됐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서인정권이 붕괴됐다는 이유만으로 숙종이 인현왕후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서인을 내몬 여세를 몰아 인현왕후까지 내몰려면, 인현왕후에게서 뭔가 문제점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장 희빈과 숙종에 대한 저주, 화 불렀다

 

숙종이 인현왕후에게서 발견한 문제점은 <숙종실록>의 여러 군데에서 나타난다.

숙종 15년(1689) 5월 2일자 <숙종실록>에 실린 숙종의 비망기(備忘記)는 흥미롭다.

비망기란 것은 승지(비서)에게 전달된 임금의 명령문이다.

숙종이 작성한 비망기에는 인현왕후 폐위의 사유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후는) 투기하는 것 외에도, 별도로 간특한 계략을 만들어내

역대 왕과 왕후의 명령을 꾸며 공공연히 큰소리로

'그(장희빈)의 팔자에는 본래 아들이 없기 때문에 주상께서 애쓰셔봤자 아무 소용도 없고,

중궁전에는 자손이 많을 것이니 선조 때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내게 말했다.

이런 말은 삼척동자라도 믿지 않을 게 분명하다.

하물며, 이제 조상들이 도우셔서 세자가 태어남으로써 (왕후의) 흉한 계략이 더욱 더 드러났으니,

누구를 속이겠는가?"

 

비망기에 따르면,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한 데에는 장희빈에 대한 투기 외에 또 다른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국본(國本) 즉 세자의 생산을 두고 인현왕후가 허무맹랑한 저주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비망기에 의하면,

인현왕후는 평소에 "장희빈의 팔자에는 본래 아들이 없기 때문에 주상께서 애쓰셔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其八字本無子, 主上勞而無功)이라며 막말을 일삼았다.

근거 없는 사주풀이를 동원해서 숙종과 장희빈의 관계를 갈라놓으려 했던 것이다.  

인현왕후는 숙종과 장희빈을 갈라놓기 위해 그 같은 비난을 일삼았겠지만,

그런 비난이 숙종의 귀에는 또 다른 의미로 들렸던 것 같다.

숙종 입장에서는 장희빈에 대한 비판보다는 '주상께서 애쓰셔봤자 아들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부분이

한층 더 불쾌하고 노여웠던 모양이다. 하루라도 빨리 후사(後嗣)를 양성해 후계구도를 안정시키려는

숙종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막말을 꾹 참아온 숙종은 세자가 태어나고 그 지위가 안정된 뒤에야

비로소 속에 담아 두었던 분노를 거침없이 표출했다.

"이제 조상들이 도우셔서 세자가 태어남으로써 흉한 계략이 더욱 더 드러났으니 누구를 속이겠는가?"라고

'중전의 사주풀이가 맞는다면 세자 이윤이 왜 태어났겠느냐?'며 인현왕후를 공격한 것이다.

 

위와 같은 기록을 보면, 인현왕후 폐위는 왕후의 배후세력인 서인 정권이 붕괴함에 따른 결과인 동시에,

숙종의 후사 생산을 놓고 평소 막말을 일삼던 인현왕후에 대한 숙종의 분노가 폭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한 개인적 동기 중 하나는, 왕후가 평소에 근거 없는 정보를 동원해서

숙종의 후사 생산과 관련해 모독적인 발언을 일삼은 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근거 없는 사주풀이로 무책임하게 국본을 뒤흔들고 또 왕실의 번성보다는 개인의 영화를 우선시하는

중전에게, 숙종은 인현왕후 폐위라는 구국의 결단을 과감히 내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현왕후 폐위는 장희빈 탓이라기보다는 인현왕후 자신의 탓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2010.05.31 오마이뉴스 

 

 

 

 

 실제 숙빈 최씨는 '냉혈터미네이터'

 

 

한동안 궐 밖에서 생활을 한 인현왕후는 장 희빈의 폐위를 계기로 복위하며

동이(최 숙빈)가 후궁이 된 원인은 무엇인가?

드라마 <동이>에서는 장 희빈 측과 청나라의 불법 커넥션에서 그 기원을 찾았다.

 

조선의 왕세자는 조선 국왕의 책봉뿐만 아니라 청나라 황제의 책봉까지 받아야 했다.

장 희빈 측은 장 희빈과 숙종 사이의 첫아들인 이윤(훗날의 경종)에 대한 청나라의 책봉이

별탈 없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은밀한 불법거래를 시도했다.

청나라가 필요로 하는 조선의 국경 수비기록인 <등록유초>를 넘겨주는 대신,

청나라로부터 왕세자 책봉을 무사히 받아내려 한 것이다.

 

퇴계 이황의 추종세력이자 집권여당인 남인 당파는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정권을 내주어야 했고,

남인의 지원을 받는 장 희빈은 중전에서 정1품 빈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동시에, 인현왕후는 복위하고 동이는 후궁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좀 그럴싸하지만, 위 이야기의 대부분은 허구에 불과하다.

드라마 속에서 <등록유초>니 불법 커넥션이니 하는 것들이 너무나 진지하게 취급되었기 때문에

시청자들로서는 '정말 그런 이유 때문에 장 희빈이 몰락하고 최 숙빈이 후궁이 되었나?'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독자나 시청자들이 궁금해할 만한 내용들을 4개 테마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테마 ①] <등록유초>은 어떤 책인가?

 

드라마 속에서 동이와 장 희빈이 서로 확보하려고 다투었던 <등록유초>란 이름의 책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의 첩보 가치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아니, 첩보 가치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드라마 속에서는 대단한 기밀문서인 것처럼 다루어졌지만,

실제의 <등록유초>는 실록을 통해 이미 공개된 내용을 주제별로 정리한 책에 불과했다.

 

그럼, <등록유초>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을까?

이 책의 내용 중 일부가 국방문제와 관련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역로(驛路), 봉수(烽燧), 군정, 변경사무, 외교 등에 관한 항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국방과 무관한 문제, 이를테면 관직이라든가 목축이라든가 재정이라든가 하는 것에

관한 것들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문서를 두고 장 희빈 측과 청나라가 비밀 거래를 할 필요는 없었다.

 

 

[테마②] 남인 정권은 왜 붕괴했나? 

 

광해군의 자주외교(중립외교)를 무너뜨린 인조 쿠데타(인조반정, 1623년) 이후

조선의 정권은 율곡 이이 및 성혼의 추종세력인 서인 당파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런 상태가 50년 정도 지속되다가 1674년 제2차 예송논쟁을 계기로 정권은 남인 당파에게 돌아갔다.

1674년에 즉위한 숙종은 남인 정권 하에서 등극한 군주였다.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성장한 숙종은 여느 군주와 달리 당쟁을 교묘히 활용하는 정치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당쟁에 휘둘리지 않고 특정 당파가 절대권력을 갖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느 당파든지 간에 국왕의 말을 듣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집권당의 힘이 너무 강해지기 전에

야당과 제휴하여 집권당을 교체하는 통치스타일을 선보였다.

 

일례로, 1680년 경신환국('경신년의 정권교체'라는 의미) 때에는 서인 당파에게 정권을 넘겨준

숙종은 1689년 기사환국 때에는 다시 남인 당파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같은 조정의 당쟁이 궁중의 여인천하와 긴밀한 연동을 보였다는 점이다.

경신환국 이후에는 서인의 지원을 받는 인현왕후가 중전이 되고

기사환국 이후에는 남인의 지원을 받는 장 희빈이 중전이 된 사실은,

숙종이 집권당과 중전 자리를 동일선상에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존의 집권당을 배척하는 김에 기존 집권당의 지지를 받는 중전까지 함께 교체했다는 사실은,

숙종이 부인을 부인으로가 아니라 정당의 대리인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만큼 숙종이 권력유지에 민감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사환국을 계기로 남인이 권력을 재장악했지만, 남인의 세상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남인이 인현왕후의 복위운동을 탄압하고 이를 계기로 서인 당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려 하자,

남인의 독주를 우려한 숙종은 서인의 손을 들어주고 남인을 배척하는 갑술옥사(1694년)를 단행했다.

이때 장 희빈은 남인 정권과 함께 몰락하여 후궁의 자리로 원위치되었다. 

드라마 <동이>에서는 장 희빈-청나라 커넥션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남인 정권이 붕괴했다고 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위와 같이 서인에 대한 남인의 숙청작업에 불안감을 느낀 숙종이

당쟁에 개입함에 따라 남인 정권이 붕괴했던 것이다. 

 

 

[테마③] 최 숙빈은 어떻게 장 희빈을 몰락시켰나

 

당파 대립을 활용해 왕권을 강화한 숙종의 무덤인 명릉.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오릉 안에 있다.
 

드라마 속 동이는 장 희빈-청나라 커넥션을 폭로하여 장 희빈을 몰락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또 동이는 장 희빈의 몰락에 가슴 아파하며 장 희빈 측 궁녀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이와 전혀 달랐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여당인 남인과 야당인 서인이 대립한 갑술옥사 당시,

남인은 "서인이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려 한다"며 공격을 가했고

서인은 "중전 장씨가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며 반격을 가했다.

장 희빈이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서인의 주장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서인은 자칫 몰락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때 "서인의 주장이 정말"이라며 서인을 편들고 나선 것이 바로 최 숙빈이었다.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원이 집필한 <단암만록>에 따르면,

숙종의 유모를 통해 서인 소속 김춘택과 전략을 상의한 최 숙빈은

한밤중에 숙종을 찾아가서 장 희빈의 독살 시도가 사실이라고 보고했다.

남인의 독주를 경계하던 숙종은 이 보고를 근거로 장 희빈과 남인에 대한 정치적 공격에 돌입했고,

이를 계기로 권력은 남인에서 서인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최 숙빈은 장 희빈의 불법 커넥션을 폭로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독살시도를 폭로하는 방식으로 장 희빈을 몰락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장 희빈의 독살 시도를 보고하던 날,

최 숙빈이 숙종에게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장 희빈이 나를 죽이려 했노라고 그냥 말로만 보고했고,

숙종은 그런 최 숙빈의 말을 근거로 정치적 숙청을 단행했던 것이다.

이는 숙종이 평소에 최 숙빈을 신뢰했음을 보여주는 것인 한편,

숙종이 그만큼 남인 정권을 붕괴시킬 빌미를 찾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장 희빈의 폐위가 충분한 명분 없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최 숙빈의 보고가 거짓이라면 장 희빈으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폐위를 당한 셈이다.

 

최 숙빈의 보고가 참이었는지 거짓이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몰락하는 장 희빈에 대해 최 숙빈이 연민의 정을 느꼈을 가능성은 없다는 점이다.

이는 최 숙빈이, 평소에는 어떤 성품을 보였든지 간에,

정치적 투쟁의 현장에서만큼은 철저하게 승부에 집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의 최 숙빈은 그처럼 '냉혈 터미네이터'였던 것이다.

 

 

[테마④] 최 숙빈은 언제 후궁이 됐나?

 

최숙빈의 신위를 모신 사당인 육상궁.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의 '칠궁' 경내에 있다.

 

드라마 <동이>에서는 남인 정권과 장 희빈을 몰락시키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킨 여세를 몰아

동이가 종4품 후궁인 숙원(淑媛)에 책봉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점과 관련하여서도 사실과 드라마 사이의 명확한 차이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궁녀 최씨가 숙원에 책봉된 것은 숙종 19년(1693) 4월 26일이었다.

이때는 중전 장 희빈이 아직 건재하던 시점이었다. 갑술옥사(1694년)가 발생하여

남인 정권과 장 희빈이 몰락하기 1년 전에 이미 최씨는 후궁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최씨가 후궁 자리에 오른 이유는 명확하다.

최씨가 후궁이 된 숙종 19년(1693) 4월 26일로부터 5개월 정도 경과한 시점인 10월 6일에

최씨는 자신의 첫아들이자 숙종의 셋째아들을 출산했다.

그러므로 4월 26일 시점은 최씨의 임신 사실이 외형적으로 드러난 이후였던 것이다.

이는 최씨가 정치적 공로가 아닌 임신 사실을 발판으로 후궁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장 희빈이 몰락하고 인현왕후가 복위된 숙종 20년(1694) 시점에는 최씨가 이미 후궁이 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최씨의 신상에 생긴 변동사항이 있다면, 인현왕후가 복위된 다음날인 숙종 20년(1694) 6월 2일에

종4품 후궁인 숙원에서 종2품 후궁인 숙의(淑儀)로 승진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남인 정권과 장 희빈이 몰락하는 과정이나 최 숙빈이 후궁이 되는 과정은

드라마 <동이>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등록유초>라는 책이 쟁점이 된 적도 없고,

청나라와의 불법 커넥션이 남인 정권과 장 희빈 몰락의 원인이 된 적도 없다.

또 최 숙빈은 장 희빈-청나라 커넥션을 폭로하는 방법이 아닌,

자기에 대한 장 희빈의 독살시도를 숙종에게 보고하는 방법으로 장 희빈을 몰락시켰다.

한편, 최 숙빈은 장 희빈과의 대결과 관계없이 임신 사실을 발판으로 이미 후궁에 오른 상태에서

장 희빈과 남인의 몰락을 지켜보았다.

- 2010.08.02 오마이뉴스

 
 

 

 

 

 

 

 

 

 출산드라 '동이' 숙빈 최씨

 

 

 

 

 

MBC 드라마 <동이>에서 장 희빈(이소연 분)을 파멸로 몰아넣은
실질적 장본인이자 영조 임금을 낳은 최 숙빈(숙빈 최씨, 한효주 분)

 

현재,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동이는 장 희빈과 본격적인 대결을 펼치게 될 것이다.

그럼, 실제 역사 속에서 두 여인의 대결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었을까?

이들의 대결은 기본적으로 정치력 싸움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들의 대결은 또 다른 무대에서도 벌어졌다. 그 '또 다른 무대'란 바로 다산(多産) 경쟁이었다.

누가 더 많이 왕자를 낳을 것인가를 두고도 치열한 경합이 벌어졌던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왕의 여인들이 왕자 생산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하여

그것이 곧바로 남아선호사상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현대 정치에서 잠재적인 대권후보를 많이 보유한 정당이 대중적 인기도 얻고

다음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듯이,

왕조국가에서는 왕자를 많이 보유하고 있어야 왕실의 통치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 왕실의 '문제'로 떠오른 '저출산'

 

평민들 입장에서는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통할 수도 있었지만,

왕실 입장에서는 경우에 따라 '무자식이 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왕자 생산에 대한 왕실의 집착을 남아선호사상이라는 코드에서 바라볼 게 아니라,

왕조국가 특유의 정치시스템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왕조의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었던 왕자의 생산.

이것은 숙종시대에 접어들면서 한층 더 절실한 문제가 되었다.

그런 상황을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대 조선 임금들의 왕자 숫자. X축은 역대 임금, Y축은 왕자 숫자 ⓒ 김종성

 

 

 

위에서 X축은 27명의 조선 국왕을, Y축은 왕자의 숫자를 가리킨다.

붉은 수직선의 왼쪽은 제19대 군주인 숙종 이전의 상황을 가리킨다.

최 숙빈과 장 희빈이 등장하기 이전의 상황인 것이다.

 

표에서 보면, 왕자를 가장 많이 낳은 군주는

한글창제와 과학진흥과 변방개척 등으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제4대 세종 임금이다.

그는 무려 18명의 왕자를 생산했다.

그 뒤는 제2대 정종(17명), 제9대 성종(16명), 제14대 선조(14명), 제3대 태종(12명)이었다.

 

눈에 띄는 것은,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제1대 태조부터 제14대 선조까지 왕자가 상대적으로 많이 생산되었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에 해당하는 제14대 선조 이후에는

6명의 아들을 둔 제16대 인조, 제19대 숙종, 제26대 고종을 빼고는

왕자를 한두 명 낳는 데에 그치거나 아니면 하나도 낳지 못했다.

조선 후기에는 왕자를 전혀 낳지 못한 왕의 숫자만 해도 4명이나 된다. 

 

 

숙종시대 들어 더욱 강조된 왕자 생산의 필요성

 

한편, 아직 왕조의 기틀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시기에 조선을 통치했던

태조 · 정종 · 태종 · 세종 시기에 왕자가 매우 많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제5대 문종이 이런 분위기를 잠재우기 전까지, 이 네 명의 군주는 도합 55명의 왕자를 두었다.

 

제19대 숙종이 등장하기 직전의 상황에 주목하면,

당시 왕실이 왕자 생산을 놓고 얼마나 노심초사했을 것인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 등장한 제15~제18대 군주 중에서 왕자를 비교적 많이 낳은 사람은 제16대 인조뿐이었다.

제15대 광해군, 제17대 효종, 제18대 현종은 왕자를 각각 한 명밖에 생산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숙종이 즉위하기 직전까지 조선 왕실은 '저출산'이라는 고민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 숙빈과 장 희빈이 등장했으니,

이들이 왕자 생산을 놓고 얼마나 신경전을 벌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여타 시대에도 왕의 처첩들이 왕자 생산을 놓고 경쟁을 벌였지만,

숙종시대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런 경쟁이 특히 치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왕자 생산의 필요성이 특히 더 강조되어서 그런지, 연달아 1명씩의 왕자만 생산한 효종 · 현종 시대와 달리

숙종시대에는 6명의 왕자를 생산했다.

왕자 6명의 생산은, 조선 후기(제15~제27대)만 놓고 보면, 가장 높은 기록에 속한다.

숙종시대에는 이전 시대의 저출산 문제가 상당 정도 극복된 셈이다.

 

 

첫째 낳은 지 2개월만에 둘째를 임신한 최 숙빈

 

그럼, 그 6명의 왕자는 어떤 여인들의 몸에서 태어났을까?  

 

 

숙종의 여인들이 낳은 왕자의 숫자ⓒ 김종성

 

 

6명의 왕자는 최 숙빈·장 희빈과 함께 박 명빈(명빈 박씨)의 몸에서 태어났다.

최 숙빈이 3명, 장 희빈이 2명, 박 명빈이 1명을 낳았다.

 

이 통계를 보면, 최 숙빈이 두뇌 싸움에서뿐만 아니라 다산 경쟁에서도 장 희빈을 눌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왕실의 사랑을 받으며 궐내 위상을 높여갈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를 이로부터 알 수 있다.

 

최 숙빈이 왕자들을 낳은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그가 왕실의 환영을 특히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최 숙빈은 첫째아이(숙종의 3남)를 낳은 숙종 19년(1693) 10월 6일로부터

1년이 약간 넘은 숙종 20년(1694) 9월 13일에 둘째아이인 영조(숙종의 4남)를 출산했다.

 

숙종 20년에는 윤5월이 있었기 때문에, 숙종 19년 10월과 숙종 20년 9월은 12개월 간격이 된다.

첫째와 둘째를 12개월 간격으로 출산했다는 것은 첫째를 낳은 지 2개월 후에 둘째를 임신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만큼 최 숙빈이 건강한 신체를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천민 출신인 최 숙빈이 왕실의 환영을 받은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숙빈이 희빈에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다산과 건강

 

또 '누가 더 많이 왕자를 낳았는가'하는 점뿐만 아니라

'누가 더 건강한 왕자를 낳았는가' 하는 점에서도 최 숙빈은 장 희빈을 능가했다.

 

숙종시대에 접어들어 조선 왕실은 여섯 명의 왕자 외에도 두 명의 공주를 얻음으로써

저출산 문제를 상당 정도 해결했지만, 높은 영아사망률이라는 또 다른 과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높은 영아사망률은 의료기술이 낮았던 과거에는 매우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다.

'높은 영아사망률의 극복'이라는 또 다른 과제와 관련해서도 최 숙빈은 장 희빈을 능가했다고 볼 수 있다. 

 

숙종의 첫째 부인인 인경왕후가 낳은 두 명의 공주는 모두 일찍 죽었다.

숙종의 또 다른 후궁인 박 명빈이 낳은 아들은 21세 때에 사망했다.

최 숙빈이 낳은 세 아들 중 두 명은 일찍 죽었다.

장 희빈이 낳은 두 아들 중 하나는 생후 10일 만에 사망했고,

또 경종 임금은 무사히 성장했지만 허약체질과 만성질병에 시달리다 37세의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런 점들을 보면, 숙종이 낳은 2녀 8남 중에서 2녀와 7남은 다들 단명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숙종의 자식들 중에서 유별하게 건강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제21대 영조 임금이었다.

그는 무려 82년간이나 살았고, 52년간이나 통치했다.

최 숙빈이 낳은 아들들과 숙종이 낳은 아들들 중에서 유독 영조만이 건강과 장수를 누렸고,

또 그 혈통에서 제22대~제27대 조선 국왕이 배출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숙종의 진정한 후계자는 단명한 경종이 아니라 장수한 영조였다고 볼 수 있다.

 

최 숙빈이 천민 출신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후궁의 품계를 계속 높여 나가는 한편

장 희빈에 대해 최종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그의 다산능력과 건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 없는 고아 소녀로서 궁녀가 되어

궐내 봉제공장(침방)에서 젊은 나날을 보내다가 숙종을 만나고 정1품 후궁의 지위에 오른 최 숙빈의

성공 비결 속에는 판단력 · 정치력 · 대담성 · 의리 · 친화력 등과 더불어 건강이라는 요소가 있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지만 튼튼하고 건강했기에, 그것을 바탕으로

 그는 귀족 출신의 인현왕후와 부잣집 출신의 장 희빈을 모두 제치고

여인천하의 최종승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조 이후의 일곱 임금을 배출하는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

 

최 숙빈의 사례는, 튼튼하고 건강한 신체가 재산이나 가문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개인의 사회적 성공을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어쩌면 건강이 가장 든든한 '백'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 2010.06.21 오마이뉴스
 
 
 
 
 
 
 
 

 최 숙빈의 아들, 이금(연잉군), 영조 되다

 
 
 

드라마 <동이>에서 장 희빈의 아들 이윤(오른쪽)과 최 숙빈의 아들 이금(왼쪽). ⓒ MBC

 

 

장 희빈과 동이 최 숙빈의 2세들이 대결을 펼친 어머니들의 운명을 물려받게 될

착하지만 병약한 왕세자 이윤(경종), 똑똑하고 씩씩한 이금(영조)이 그 주인공들이다.

 

장 희빈의 아들 '이윤'은 제19대 숙종 임금의 첫째아들로서 훗날 제20대 경종이 될 인물이다.

최 숙빈의 아들 '이금'은 숙종의 넷째아들이자 최 숙빈의 둘째아들로서

날 경종에 이어 제21대 영조가 될 인물이다.

이금의 경우, 최 숙빈의 첫째아들이 생후 2개월 만에 사망했으므로

실질적으로 최 숙빈의 장남이나 마찬가지였다.

 

TV 드라마나 문학작품에서 이런 유형의 인물들이 대립할 경우,

우리는 둘 중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인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지금 당장에는 '이윤'이 앞서 있지만

이 관계가 나중에 역전되리라는 예감을 갖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훗날 '이'윤을 지지할 소론보다는 '이금'을 지지할 노론이 더 강력했으므로,

시청자들로서는 처음부터 '이금' 쪽에 무게를 두고 이들의 운명을 지켜보기 마련이다.

참고로, 이황을 지지하는 동인에 맞서 이이 · 성혼의 추종자들로 구성된 서인은

숙종 집권기에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과 윤증을 지지하는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이금'보다 '이윤'의 정치적 입지가 더 튼튼했다

 

 
장 희빈의 아들인 '이윤' ⓒ MBC

 

그런데 이금 쪽에 무게를 두고 둘의 관계를 지켜보게 되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 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은 지 19년이 지난 1720년에 숙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경종 이윤이

즉위 4년 만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1724년에 영조 이금이 왕위에 오른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1724년 이전의 조선에 가보면, 이런 선입견이 순식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

TV 사극 등에서 일반적으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의 역사 현장에서는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이금보다는 이윤의 정치적 입지가 훨씬 더 튼튼했다는 느낌을 갖게 될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다수당이 이금을 지지하는데도 불구하고

숙종과 청나라가 이윤에 대해 강력한 지지를 보낼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먼저, 숙종의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남인 세자 이윤이 죽은 장 희빈의 아들인데다가 소수당의 지지밖에 받지 못하는데도

이윤이 대리청정(왕위계승권자가 국정수행을 대리하는 것)에 이어 등극에까지 이르도록 지켜본 것은,

이윤이 별 탈 없이 왕위를 계승하고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숙종의 판단이 지배했기 때문일 것이다.

숙종에게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이윤을 세자 자리에 앉힌 상태에서 편안히 눈을 감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선왕이 죽기 전에 사관(史官)이 없는 상태에서 노론 대신 이이명과의 독대에서

연잉군 이금이 훗날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는 말이 숙종 사후에 나오지만,

그런 이야기는 이금을 지지하는 노론 쪽에서 나왔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믿기가 힘들다.

 

 

국제적 지위도 꽤 공고했던 장희빈의 아들

 

다음으로, 제3자인 청나라가 취한 태도를 보면, 이윤의 지위가 국제적으로도 꽤 공고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같은 청나라의 태도는, 경종 2년(1722)에 조선에 전달된 청나라 강희제의 칙서에서 잘 나타난다.

 

강희제의 칙서가 오기 이전에 조선에서는 사실상의 쿠데타가 2차례나 연이어 발생했다.

경종 1년(1721) 8월에 노론이 34세의 경종 이윤에게 아들이 없다는 명분을 들며

한밤중에 경종을 압박해서 연잉군 이금을 왕세제로 인정하는 재가를 받아낸 데 이어(제1차 정변),

불과 2개월 뒤에 경종을 한 차례 더 압박해서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하고 정치일선에서 물러나도록

했던 것이다(제2차 정변).

 

그런데 노론은 제1차 정변에서는 승리했지만,

제2차 정변에서 도리어 역공을 당해 소론에게 주도권을 내주고 말았다.

제2차 정변의 실패로 이금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지만,

반대파인 소론 내부의 온건세력과 남인(동인의 분파)의 도움으로 왕세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제2차 정변 후에도 이금을 함부로 다룰 수 없었던 것은,

숙종의 아들이라고는 이윤과 이금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이금 외에는 마땅히 왕위를 계승할 만한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조선 정세가 수습되어 가던 시점에서 왕세제 이금에 대한 강희제의 책봉 칙서가 도착한 것이다.

 

조선이 국왕이나 왕위계승권자에 대한 책봉을 요청하면

청나라는 이를 그대로 승인해주는 것이 오랜 관행이었다.

이 점은 1876년에 심계분(沈桂芬) 청나라 총리각국사무아문(외교통상부) 수석대신이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중국주재 일본공사와의 회담에서 한 · 중 간의 책봉문제를 언급하면서

"우리가 (조선 국왕을) 선정하여 옹립하는 게 아니라 그 나라의 요청에 따라 책봉할 뿐"이라고

공식적으로 발언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같은 관행이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는 조선에서 요청한 대로 왕세제를 승인해주면 되는 것이었다.

 

 

청나라 강희제는 왜 이금을 불안해 했을까

 

그런데 강희제가 보낸 칙서에는 미묘한 문구가 담겨 있었다.
경종 2년(1722) 5월 27일자 <경종실록>에 소개된 이 칙서에서 강희제는
"짐이 생각하건대, 부자간에 (왕위를) 전하는 것이 정상적인 법도이고 형제가 계승하는 것은 임시방책"
이라고 전제하고, 왕이 중병을 앓고 있고 자식도 없으므로 부득이하게 동생을 왕세제로 책봉한다고 한 뒤에
묘한 여운을 풍기는 코멘트를 덧붙였다.
"만약 …… 웅몽(熊夢)의 길한 점을 얻게 되면 왕은 다시 주청하라."

 

'웅몽의 길한 점을 얻는다'란 훌륭한 인재를 얻는다는 뜻이다.

연잉군 이금을 후계자로 승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훌륭한 인재를 얻게 되면 왕은 다시 주청하라"고

말한 것은, 왕이 새로운 후계자를 내세우면 청나라는 얼마든지 승인해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는 건강을 회복해서 아들을 낳든지 아니면 종친 중에서 양자를 들이든지 해서

후계자를 새로 세울 경우에도 청나라는 변함없이 경종 이윤의 입장을 지지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이금을 왕세제로 승인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금에 대한 승인을 철회할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종래의 책봉이 대부분 요식행위에 그친 사실을 고려할 때, 강희제의 메시지는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연잉군 이금이 훗날 왕위에 오를 경우에

조선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위험성에도 청나라가 그 같은 칙서를 보낸 것은

이금의 입지가 상당히 불안하게 보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금 외에는 마땅한 후계자가 없고 또 그가 다수파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청나라가 보기에는 그의 정치적 앞날이 아무래도 불안했던 것이다. 

 

'왕은 다시 주청하라'는 여운을 남긴 것은,

이금을 대신할 새로운 후계자가 나타날 경우에 그 새로운 인물과의 관계를 원만히 풀기 위해

청나라 나름대로 안전장치를 해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청나라가 '이금이 왕세제에 이어 왕이 될 가능성'과 '이금이 왕세제에서 끝날 가능성' 중에서

후자에 배팅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청나라가 이윤과 이금 중에서 이윤에 배팅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최숙빈 혈통라인을 살린 경종 이윤의 급사

 

이금의 지위가 불확실해서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정치적 앞날을 장담하기 힘들었다는 점은,

경종의 급사라는 돌발 변수의 발생을 계기로 이금의 입지가 갑작스레 개선된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1724년에 연잉군 쪽에서 보내준 게장을 먹은 뒤에 디저트로 생감을 먹은 경종이 갑작스레 드러누워

5일 만에 사망하는 비상사태가 돌출한 덕분에, 이금이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게장과 생감을 먹은 경종의 급사'라는 기적의 발생에 힘입어 이금이 극적으로 왕위에 오른 사실은,

등극 이전의 이금의 지위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견고하지 않았음을 반영한다.

이윤 쪽에 희망을 건 청나라의 배팅을 무색케 하는 그런 기적이 돌발하지 않았다면, 최

 숙빈의 혈통인 영조-정조-순조-헌종-철종-고종-순종 라인이 어떻게 되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의 시청자들은 '착하지만 병약한 이윤'과 '똑똑하고 씩씩한 이금' 중에서

후자 쪽(이금)에 무게를 두고 이들의 대결을 지켜보지만,

숙종과 청나라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경종 이윤이 급사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착하지만 병약한 사람'인 이윤의 정치적 앞날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밝았다고 할 수 있다. 

 - 2010.08.30 오마이뉴스

 

 

 

 

 

 

 

 인현왕후는 실제로도 '이금'을 지지했을까

 

 

조선 숙종시대의 궁중 투쟁을 묘사하고 있는 MBC 드라마 <동이>.
두 왕자의 등장을 계기로 <동이>는 요즘 새로운 활력을 보이고 있다.
장 희빈의 아들인 세자 이윤(훗날의 경종)과 최 숙빈의 아들인 연잉군 이금(훗날의 영조) 간에 벌어지고
있는 '눈에 보이는 따뜻한 우정'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의의 경쟁'이 시청자들의 눈을 끌어 당기고 있다.

 

장 희빈과 최 숙빈은 물론이고, 두 아이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인현왕후까지도

이들의 대리전으로부터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 속에 비친 인현왕후의 태도와 관련하여 우리가 그냥 지나치기 쉬운 것이 있다.

그것은 세자 이윤이 불임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인현왕후가 왕실을 위한다는 명분 하에

연잉군 이금으로 세자를 교체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동이 아들을 세자로 미는 인현왕후, 실제도 그랬을까

 

인현왕후는 동이(최 숙빈)에게 "어떤 경우에도 연잉군을 왕으로 만들라"고 권유하는 한편,
장희빈에게는 "모든 것(세자의 불임)을 전하에게 고백하라"면서 "세자는 교체될 수 있다"고 압박을 가했다.

 

인현왕후가 세자 이윤의 불임을 이유로

연잉군 이금의 세자책봉을 추진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다.

인현왕후 사망 당시의 세자 이윤은 아직 14세였기에 이 시기에 그가 불임문제에 시달렸을 가능성은 낮다.

그의 불임문제가 크게 부각된 시기는 33세의 나이로 등극한 이후였다.

 

하지만, 드라마 속의 인현왕후를 보면서, 시청자들은 '설령 불임문제가 없었더라도

인현왕후는 세자 이윤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느낌을 갖기 쉽다.

장 희빈 때문에 한때 폐위를 당한 적이 있는 인현왕후로서는

장 희빈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후의 입장에서는 자신과 가까운 최 숙빈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게 훨씬 더 나았으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TV 속의 상황은 실제 역사와는 동떨어져 있다.

실제의 인현왕후는 세자 이윤의 왕권도전을 방해하지 않았다.

세자 이윤이 인현왕후를 포함해 그 어느 누구에게도 흠잡힐 빌미를 주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자 이윤이 고도의 자기관리와 대단한 인간미로 인현왕후는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경종대왕 행장>과 <인현왕후전>을 들 수 있다.

 

 

어느 누구도 공격할 수 없었던 경종 이윤, 왜?

 

행장(行狀)이란 망자의 일대기를 기록한 글이다. 왕이 죽으면 왕의 행장이 공식적으로 기록되었다.

경종 이윤이 왕으로서 재위하다가 죽은 뒤인 영조의 재위기에 <경종대왕 행장>이란 것이 기록되었다.

 

<경종대왕 행장>은 경종과 대립관계였던 영조가 등극한 후에 기록된 글이므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명제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이 책에 경종의 약점들이 많이 쓰여 있겠지'라는 선입견을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행장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

이 행장에서 경종 이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성인군자로 묘사되어 있다.

 

행장에 따르면, 아버지를 대신해 대리청정(통치 대행)을 했을 때나 훗날 왕위에 올랐을 때나,

이윤은 신하들이나 종친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베풀었다.

그는 자기와 연결된 모든 사람들과의 대인관계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가 인간관계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심지어 죄수들에 대한 태도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더위나 추위가 극심해지면, 그는 측근들을 교도소에 파견했다고 한다.

왜? 교도소에 갇힌 자기 심복이 걱정되어서? 그게 아니다.

한여름이나 한겨울이 되면, 일반 죄수들이 혹시나 고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 것이다.

측근들을 파견해서 수감자들을 살펴보도록 한 뒤, 죄가 가벼운 사람들은 그냥 풀어주도록 했다고 한다. 

추위나 더위가 닥칠 때에 감옥에 있는 일반 죄수들까지 걱정하는 통치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지위 고하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미를 베푸는 그런 태도는

그가 왕위에 오른 뒤에도 여전히 변치 않았다고 한다.

 

 

장희빈 선물 물리친 인현왕후, 이윤이 다시 건네자...

 

경종과 선의왕후의 무덤인 의릉.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 문화재지리정보서비스

 

 

이토록 대인관계를 철저히 관리한 이윤이 인현왕후를 소홀히 대했을 리 없다.

<경종대왕 행장>은 이윤이 인현왕후에 대해서도 지극한 효성을 다했다고 설명한 뒤에,

왕후 사망 당시의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왕후께서 영결(永訣, 죽음을 통한 영원한 이별)했다고 하자,

민진후(왕후의 오빠)는 엎드려 눈물을 흘렸지만 왕(경종)께서는 유독 슬픈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시다가

문 밖에 나와서 갑자기 민진후의 손을 잡고 크게 울며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셨다."

 

참고로, 인현왕후 사망 당시의 왕은 숙종이었다.

그런데도 <경종대왕 행장>에서는 당시의 이윤을 '세자'라 하지 않고 '왕'이라 칭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방식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현왕후의 시신 앞에서는 슬픔을 표시하지 않던 이윤이 밖에 나가서야

비로소 민진후의 손을 잡고 대성통곡했다는 이 일화는, 그가 진심을 갖고 왕후를 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이윤의 행동이 위선적이라고 판단했다면,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후의 입을 통해서 이 일화가 세상에 소개되었을 리 없다.

 

장 희빈 하면 치를 떨었을 민씨 집안의 사람들마저 감동시킬 정도였다면,

이윤이 평소 인현왕후에게 얼마나 극진히 대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왕후 측에서도 이윤에게 매우 호의적으로 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윤과 인현왕후의 관계가 얼마나 좋았는지는 <인현왕후전>을 통해서 보다 더 확실하게 입증될 수 있다.

전기(傳記)라고도 하고 소설이라고도 하는 작자 미상의 <인현왕후전>은

인현왕후의 입장에서 장 희빈을 철저하게 폄하한 책이다.

그런 책에서마저 이윤과 왕후의 관계는 상당히 각별하게 묘사되어 있다.

 

<인현왕후전>에서는 왕후가 세자 이윤의 효성을 기뻐했다고 말한 뒤에,

왕후가 죽기 얼마 전에 있었던 생일 잔치에서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잔치의 주인공은 병든 인현왕후였다. 이때 공주와 후궁들이 왕후의 생일을 기념해 옷을 선사했다.

왕후가 복위한 뒤로 후궁으로 전락한 장 희빈 역시 옷을 선사했다.  

인현왕후는 공주나 후궁들이 바친 옷은 마지못해 받았다.

하지만, 장 희빈이 바친 옷은 받지 않고 그냥 물리쳤다.

중병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장 희빈에 대한 앙금을 풀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세자 이윤이 그 옷을 갖고 있다가 다시 바치자,

인현왕후는 "세자의 간절한 효성과 얼굴을 보아" 부득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장 희빈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인현왕후전>에마저 이렇게 기록돼 있을 정도라면,

이윤과 왕후의 관계가 얼마나 각별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인현왕후는 장 희빈은 미워하면서도 그 아들 이윤만큼은 미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장희빈에게도 인현왕후에게도 세자교체는 아니될 말

 

기록들을 보면, 경종 이윤의 대인관계가 매우 원만했으며

그와 인현왕후의 관계도 상당히 돈독했음을 알 수 있다.

대리청정 3년과 재위 4년을 합쳐, 도합 7년 동안 이윤이 국정을 무난히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세상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연잉군 이금을 내세운 노론이 경종 이윤을 상대로 정치적 공격을 가하긴 했지만,

그들 역시 경종의 인간적 측면에 대해서만큼은 인정할 건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노론이 집권한 후에 기록된 공식 문서인 <경종대왕 실록>이나

노론의 입장에서 기록된 <인현왕후전>에서 경종을 극진히 칭송하는 것을 보면,

경종 이윤이 인간적 측면에서만큼은 어느 누구의 미움도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인현왕후의 복위를 계기로 한껏 위축된 자기 어머니의 처지를 의식하면서

자기수양과 대인관계에 만전을 기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수파인 소론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세자 시절과 대리청정 시절을 거쳐 무사히 국왕에 등극한 사실은

그의 노력이 얼마나 치열했을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런 그를 인현왕후가 과연 미워할 수 있었을까?

자신을 친어머니 이상으로 대하는 이윤을 보면서,

인현왕후는 그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 장희빈의 자식인 것이 무척 한스러웠을지 모른다.

설령 14세의 이윤이 훗날 불임이 될 것을 미리 알았다 해도,

인현왕후는 세자 교체를 머릿속에서마저 떠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

- 2010.09.06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