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이약동(李約東) 이야기
이약동(1416~1493)은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벽진(碧珍), 호는 노촌(老村)이다.
경상도 김천 하로촌(賀老村: 현 김천시 양천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영남의 대학자였던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의 문하에서 배웠고,
그의 아들이었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과 교분이 깊었다.
1442년(세종 24)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1454년(단종 2) 사헌부 감찰, 황간현감, 사헌부 지평, 청도군수, 사헌부 집의, 구성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470년(성종 1) 8월에는 제주목사가 되어 부임하였다.
그는 재직 중에 관아 아전들의 부정과 민폐를 단속하여 근절시키고,
조정에 바치는 공물(貢物)의 수량을 감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준 선정으로 칭송을 받았다. 제주 관아에서 한라산의 산신에게 제사지내는 산천단은 원래 한라산 정상부근에 있었다.
그래서 제사 때가 되면 많은 관리들과 군인들이 동원되어 며칠씩 산에서 야영을 하며 행사를 치렀는데,
혹한기에는 동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약동은 제주목사로 부임하자마자 이러한 폐단을 조정에 보고하여 산천단을 한라산 중턱의 현재 위치로 옮기게 하였다.
이후에는 산신제 때문에 고통을 겪는 주민들이 없게 되었다.
곰솔공원에는 이약동의 산천단 이설과 관련된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약동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재임 중에 착용하던 의복이나 사용하던 기물들을 모두 관아에 남겨두고 떠났다.
한참동안 말을 타고 가다보니 손에 든 말채찍이 관아의 물건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성문 누각에 걸어놓고 서울로 갔다.
후임자들이 이를 아름다운 일로 여겨 채찍을 치우지 않고 오랫동안 그대로 걸어 놓아 기념으로 삼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채찍이 썩어 없어지게 되자 백성들이 바위에 그 채찍 모양을 새겨두고
기념하였는데, 그 바위를 괘편암(掛鞭岩)이라 하였다.
이야기는 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제주도의 노인들 사이에서 미담으로 전해오고 있다.
제주도에서 뭍으로 가는 항해 중에 갑자기 광풍이 불고 파도가 일어 파선의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사색이 되었는데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하였다.
“나는 이 섬에 와서 한 가지도 사리사욕을 취한 것이 없다.
우리 막료 중에 누군가가 부정을 하여 신명이 노한 것이 아닌가?
일행 중에 누구라도 섬의 물건을 챙겨오는 자가 있으면 내놓아라.” 하였다.
한 군졸이 나와 “행차가 막 떠나오려 할 때 섬사람 하나가 갑옷 한 벌을 바치면서 바다를 건넌 후에
사또께 올려 그들의 정성을 표해달라고 하기에 숨겨 왔습니다.” 하였다.
이에 이약동은 “그 정성은 내가 잘 알았으니, 그 갑옷을 바다에 던져라” 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바다에 던지자 파도가 그치게 되었다. 그 갑옷 던진 곳을 투갑연(投甲淵)이라고 한다.
바다를 건너오자 그곳의 백성들이 영혜사(永惠祠)라는 생사당을 지어 춘추로 제사하였는데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이렇게 그는 청백리로서 제주도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많았다.
이약동은 1477년 12월에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고, 1478년에 경주부윤, 1483년에 호조참판,
1486년에 전라도관찰사, 1487년에 한성부 좌윤과 이조참판, 1489년 개성유수를 지냈다.
만년에는 김천의 고향집에 내려와 여생을 보내었는데,
집은 겨우 비바람을 막을만하였고, 아침 저녁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가난하였다.
이때 그는 후손들에게 다음과 같은 훈계의 시를 지어 남겼다.
家貧無物得支分 살림이 가난하여 나누어줄 것은 없고
惟有簞瓢老瓦盆 있는 것은 오직 낡은 바구니 표주박과 질그릇일세
珠玉滿 隨手散 주옥이 상자에 가득해도 곧 없어질 수 있으니
不如淸白付兒孫 후손에게 청백하기를 당부하는 것만 못하네
그는 성종 때 청백리로 뽑히고, 기영록(耆英錄)에 올랐다.
1493년 6월에 이약동의 별세가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제문과 제수를 내리고 평정(平靖)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사후 김천의 유림들이 그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감천면 원동 마을에 청백사(淸白祠)를 세워
제사하였다. 또한 제주도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도 여러 명현들과 함께 제향되었다.
형제 청백리 허종(許琮) 이야기
허종(許琮, 1434~1494)은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양천, 호는 상우당(尙友堂)이며 좌의정 허침의 형이었다.
1456년(세조 2)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57년 문과에 제3위로 급제하였다.
당시 가뭄이 심하였는데 합격 소식 날 갑자기 비가 내리자
사람들이 모두 그를 지목하여 정승이 될 징조라고 하였다.
세조가 일찍이 천문(天文)을 익히도록 명하였는데,
이때 마침 일식(日食)이 있는 것을 보고 허종이 그 원리를 계산하여 올리고,
아울러 글을 올려 불교와 사냥을 좋아하는 국왕의 태도를 나무라고,
언로(言路)를 열어 주며, 유흥을 절제할 것 등 6가지 조목을 개진하였다.
평소 국왕으로서 능력과 행동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던 세조는
허종의 말에 거짓으로 화를 내며 호통치기를
“네가 하(夏)나라의 태강(太康)과 양(梁) 나라의 무제(武帝)를 나에게 비유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고 역사(力士) 최적을 시켜 “내가 칼집에서 칼을 다 뽑거든 즉시 베어 죽이라”하고 천천히 칼을 빼었다.
주변사람들이 모두 놀라 숨을 죽이고 식은땀을 흘리며 벌벌 떨었지만
허종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고, 차근히 조목조목 응대하였다.
이에 세조가 말하기를, “진정한 장사(壯士)이다.”하고,
그의 용기 있는 행동에 탄복하여 겸선전관(兼宣傳官)을 제수하였다.
또 하루는 세조가 여러 신하들에게 불경을 읽게 하니
신하들이 세조의 위엄에 눌려 마지못해 불경을 외워야했다.
그러나 세조는 허종에게만 그것을 시키지 않았다.
그가 불교를 싫어하는 줄 알고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허종은 후에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持平), 예문관 응교 등을 역임하고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1467년(세조 15년)에 평안도 관찰사, 시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후에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471년(성종 2)에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의 칭호를 받았고,
1478년에 성종이 왕비 윤씨를 폐하려고 하는데도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지만
유독 허종만이 그 불가함을 극력 말하니, 임금의 마음이 풀렸다.
1487년 가을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488년 明나라 한림시강 동월(董越)과 급사중 왕창(王敞)이 칙사로 왔는데,
허종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영접하는 모든 일이 절도에 맞았다.
두 사신이 존경하고 감복하여 작별할 때 명 사신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말하기를,
“公이 일찍 북경에 조회하러 와서 중국 조정으로 하여금 해외에도 이런 인물이 있음을 알게 하기를
바랍니다. 하늘 위에는 몰라도 인간에는 둘도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는 1492년(성종 23)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에 승진하였다가 2년 후에 병으로 죽었다.
그의 뛰어난 자질과 청빈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여러 기록에 언급되고 있다.
『청파극담(靑坡劇談)』에서는
“그는 학식이 넓고 글을 잘하며 천문, 역법의 기예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활쏘기와 말 타기에도 능하여 나라에 일이 생기면 반드시 공으로써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살림살이는 돌보지 않아 거처하는 집은 겨우 바람과 햇빛을 가리울 정도였으나
마음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하였다.
또 『명신록(名臣錄)』에서는
“한평생 충성을 다하여 속마음을 털어놓고 국가의 큰일을 의논하였으며
말이 시행되지 않으면 잇달아 눈물까지 흘렸다. 큰 도량으로 사람들을 포용하였으나
간사한 무리를 탄핵할 때는 바른대로 말하고 꺼리거나 숨김이 없었다.
일찍이 출세하여 세력이 혁혁하였으나 청빈하기는 초야의 가난한 선비(寒士)와 같았다.
거처하는 집이 협착하고 누추하여 다른 사람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으나 그는 태연한 기색 이었다”
고 하였다.
허종의 동생인 허침(許琛)도 명관으로 의정부 좌의정을 지냈고, 청백리에 올랐다.
- 이영춘 국사편찬위원회 연구편찬실장
- 2009-06-08 월간문화재사랑,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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