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서원과 각석군(刻石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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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 · 후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조광조와 송시열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으며
서울 지역 인재들이 다수 모여들어 학문을 닦던 도봉서원(道峰書院)과
송시열 · 송준길 등 당대 명필들의 글씨가 새겨진 도봉서원 앞 계곡의 바위들[각석군(刻石群)]이
도봉산 계곡과 함께 서울시 문화재로 일괄 지정될 전망이다.
송시열의 도봉동문 바위
서울시는 서울 · 경기 일원에서 경관과 수석(水石)이 아름다운 것으로 첫 손가락에 꼽혀 왔고
조선 중종 때 성리학자이자 개혁 정치가인 조광조가 즐겨 찾았으며
율곡 이이 · 백사 이항복 등 당대에 유명한 문인 · 학자들이 시나 문장을 지어 그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도봉산 계곡과 계곡 내에 자리잡은 도봉서원 터, 그리고 각석군이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심의에서 전통적 명승지(名勝地)와 역사유적으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갖는 유적으로
보존가치가 크다고 검토됨에 따라 2009.6.18 이 유적들을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 예고했다.
※ 기념물 : 서울시 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 기념물 · 민속자료 · 무형문화재) 중 한 종류로
※ 기념물 : 서울시 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 기념물 · 민속자료 · 무형문화재) 중 한 종류로
역사 유적지 · 고고 유적 · 전통적 경승지(경치나 경관이 뛰어난 곳) · 식물 중에서
학술적 · 역사적 · 예술적 가치가 큰 것을 지정함.
도봉서원 전경
이 가운데 <도봉서원>은
양주목사 남언경이 조선 중종 때 신진 사림(士林) 세력을 배경으로 도학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정암 조광조(趙光祖 : 1482년~1519년)를 기리기 위해 그가 경치 감상을 위해 자주 찾던 도봉산 자락에
1573년(선조 6)~1574년(선조 7) 세운 서원이다.
1696년(숙종 22)에는 조정의 논의와 숙종의 명으로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우암 송시열(宋時烈 : 1607년~1689년)을 조광조와 함께 배향하게 되었다.
수도권 내 가장 대표적인 서원이었던 만큼 역대 왕들의 관심도 각별하여
영조는 ‘도봉서원’이라는 현판을 직접 써 내려주었고,
정조는 직접 방문한 후 제문(祭文)을 내리고, 관리를 파견해 대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한편, 도봉산 등산로를 따라 난 약 300m 길이의 계곡에는
한편, 도봉산 등산로를 따라 난 약 300m 길이의 계곡에는
도봉서원과 깊은 관련이 있고 당대에 명필로 이름을 날린 우암 송시열 · 동춘당 송준길 · 한수재 권상하 등
유학자들의 글씨와 시문이 새겨진 바위들이 아름다운 계곡·폭포 등과 조화를 이루어 다수 분포하고 있어
전통 경관과 서예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서울시는 도봉서원이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는 도봉서원이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당 부분과 옛 사료상의 도봉서원 유적으로 소개된 각석군(刻石群)이 원형대로 잘 남아 있고
또한 이들을 감싸고 있는 도봉산 계곡 자체가
조선시대 각종 문헌이나 시에 등장하는 전통적 경승지(景勝地)에 해당하므로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보고 30일간의 예고 기간을 거쳐
2009년 8월까지는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할 계획이다.
도봉서원이 지정되면 서원유적으로는 서울시에서 최초로 지정되는 사례가 되며,
서울시 기념물은 총 25건으로 늘어나게 된다.
- 출처: 서울특별시청 2009년 0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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