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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충((蝗蟲=누리), 조선의 논밭을 황무지로 만들다

Gijuzzang Dream 2009. 6. 26. 15:09

  

 

 

 

 

 

 황충(蝗蟲=누리), 조선의 논밭을 황무지로 만들다 


 

메뚜기 떼는 한 무리가 적어도 1억 마리에서 수백 억 마리나 되는 것으로 추정한다.

 

남쪽 하늘에 검은 구름처럼 지평선 위에 걸려 있더니 이윽고 부채꼴로 퍼지면서 하늘을 뒤덮었다.

세상이 온통 밤처럼 캄캄해지고 메뚜기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그들이 내려앉은 곳은 잎사귀를 볼 수 없고

모두 졸지에 황무지로 돌변했다.

아낙네들은 모두 손을 높이 쳐들고 하늘에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올렸고,

남정네들은 밭에 불을 지르고 장대를 휘두르며 메뚜기 떼와 싸웠다.”

이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소설가 펄벅의

대표작인 ‘대지’에 묘사되어 있는 메뚜기 떼의 습격 장면이다.

 


'메뚜기'는 산의 옛말인 ‘뫼’에서 뛰어노는 곤충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순우리말로서,

그 어원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귀여운 느낌의 곤충이다.

또한 못 먹고 살던 시절에는 메뚜기에 기름을 둘러서 볶아낸 ‘메뚜기볶음’이

아이들의 간식거리이자 어른들의 좋은 술안주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다정다감한 이미지의 메뚜기가 무리를 지어 떼로 몰려다니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메뚜기 떼는 한 무리가 적어도 1억 마리에서 수백 억 마리나 되는 것으로 추정하는데,

떼를 지어 날아갈 때 그 떼의 폭이 수백m이고 길이는 수㎞에 이른다.

사막 메뚜기의 경우 최대 수백㎢까지 떼로 몰려다니는 경우도 있다.

이들이 하늘을 날면 거대한 구름 형상이 되어

인공위성에서도 촬영이 가능할 정도라고 하니 가히 놀랄 만하다.

하루에 자기 몸무게만큼의 작물을 먹어치우는 엄청난 식욕의 메뚜기 떼가 쓸고 간 자리는

정말 펄벅이 묘사한 것처럼 황무지로 변해버린다.

약 1톤 가량 되는 메뚜기 떼의 경우 사람 2천500명분의 식량을 먹어치운다고 하니

정말 살인적인 식욕이 따로 없다.

 


근고에 없는 참혹한 변괴


이런 메뚜기 떼는 주로 사막에서 발생한다.

메뚜기는 기후조건이 맞을 경우 평소보다 많은 수의 알을 낳는다.

즉, 사막에 비가 내려 풀이 무성해질 경우 메뚜기는 엄청난 알을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사막에 다시 햇볕이 쨍쨍 내려 쪼여 풀이 메말라 죽으면

메뚜기 알들은 부화조건이 맞을 때까지 휴면상태에 들어간다.

그렇게 메뚜기 알의 수가 점차 누적되어 있다가

적당한 기온과 습도가 되면 모두 일제히 부화하여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아프리카 사막 지역에서 발생한 메뚜기 떼는 계절풍을 타고 중동 지방은 물론

멀리 인도까지 이동한다.

때문에 곤충 중에서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하는 기록의 보유자도 바로 메뚜기 떼인데,

시속 15~20㎞의 속도로 하루에 최대 100㎞ 이상 이동할 수 있다.

메뚜기 떼는 주로 사막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메뚜기 떼에 의한 피해는

비단 먼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역사에도 종종 등장한다.

 

1566년(명종 21) 5월 29일자의 ‘명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강원도 간성에 황충이 있었는데

황흑색이었으며 두 잠 잔 누에만한 것도 있고

세 잠 잔 누에만한 것도 있어

밭곡식과 초목의 잎을 모두 갉아먹어

산과 들이 모두 벌겋게 되었으며,

길에까지 가득 옮겨와 사람들이 차마 발을 디딜 수 없었으니 근고에 없는 참혹한 변괴였다.”

또 1719년(숙종 45) 5월에는
“평안도에서 황충이 극심하게 발생하여

익어가는 보리와 밀을 비롯해 자라는 기장과 피 및 볏모 가운데 부드럽고 연한 것을 거의 다 먹어

평안도가 거의 적지(赤地 ; 흉년이 들어 거둘 만한 농작물이 하나도 없게 된 땅)가 되어서

백성들이 모두 모여 울부짖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친경전에도 피해 입어

 

중종 때에는 임금이 농사를 짓는 친경전도

황충의 피해를 입었다 

황충(蝗蟲)이란 메뚜기의 일종으로서

우리말로 ‘누리’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황충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거나 논의를 한 기록이 무려 200여 건에 이르고 있다.

삼국사기에도 서기 18년 신라에서 황충이 일어나 기근이 심했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황충과 관련해 신라 24회, 백제 5회, 고구려 8회 정도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고려사에도 26회 정도의 황충에 관한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유독 황충에 대한 기록이 많은 까닭은 황충에 대한 정의의 차이인 것으로 짐작된다.

즉, 조선시대 이후 황충은 꼭 메뚜기나 그와 유사한 곤충에 한정시키지 않고,

명충나방의 유충이나 벼멸구 등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해충을 통틀어 지칭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의미이다.

1468년(세조 14) 9월 1일자의 ‘세조실록’에 의하면

“경상도에 황충이 일었는데 그 모양이 매미와 같기도 하고 또는 모기와 같기도 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매미처럼 아주 큰 것과 모기처럼 아주 작은 것 모두 황충으로 여긴 듯싶다.

황충에 의한 피해는 임금이 몸소 경장하던 논밭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1522년(중종 17) 5월 28일자의 ‘중종실록’에 의하면

“동적전(동대문 밖 전농동에 있던 임금의 친경전으로서, 종묘와 사직 제사에 쓰는 곡식을 심는 논밭)

관원이 와서 말하기를 황충이 번식하여 곡식의 뿌리와 잎을 먹으므로

종묘의 제사에 쓸 양식이 없게 되었다”고 아뢰고 있다.

여기서 황충이 번식했다고 한 표현은 갑자기 떼로 몰려온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서,

조선왕조실록에서의 황충이 메뚜기 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모든 해충을 일컫는 것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준다.

 


군대 동원해 60여 석이나 잡아


이와 같은 황충의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선의 임금들은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태종 때에는 황충으로 인한 피해가 심할 경우 예조에서 포제를 지내기도 했다.

포제(酺祭)란 농작물에 충해가 심할 때 재해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중국의 ‘문헌통고’를 참고하여 지낸 이 제사는

그 후 영조 때까지 황충이 심할 때 가끔 행한 기록이 나타난다.

또한 태종은 밭 부치는 자를 시켜서 황충을 잡아 땅에 묻게 하기도 하고,

수령의 책임 하에 잡으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세종은 황충에 대해 좀 더 강력한 조치를 취한 임금이었다.

1444년(세종 26) 충청도 공주에 황충이 나타나 곡식을 해치자

세종은 군대를 출동시켜 잡게 했는데, 그때 잡은 황충의 양이 무려 60여 석이나 되었다.

또한 세종은 황충이 처음 나올 때 묻어버리면 충해를 없앨 수 있다며

황충의 적극적인 퇴치를 권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세종이 이처럼 황충에 대한 초기 조치를 독려하게 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황충이 곡식에 큰 피해를 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황충을 많이 죽이면 화기(和氣)를 거스른다 하여 황충 잡기를 꺼렸다는 옛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영조의 경우 1768년(영조 44) 7월 23일 호남에서 발생한 황충을 잡기를 명하면서

불에 태우지 말고 구덩이를 파서 묻도록 당부했다.

그 이유는 황충이 비록 미물이라 하더라도

임금인 자신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메뚜기 떼가 번성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진 벌이라는 의미인 셈이다.

메뚜기 떼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성경에서는 메뚜기 떼의 재앙이 단순한 자연의 재앙이 아니라

하느님의 심판의 도구로 종종 묘사되고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출애굽기’ 속에 나오는 메뚜기 떼의 재앙이다.

출애굽기는 구약성서의 한 책으로서 ‘출’은 탈출을, ‘애굽’은 이집트를 의미한다.

즉, 이집트 탈출기로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기록이다.

예로부터 메뚜기 떼는 하늘로부터 벌로써 내려진 재앙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하느님의 명을 받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 땅에서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파라오에게 요구하자, 파라오는 단번에 거절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심한 노역을 시켰다.

그러자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게 했다.

첫째 재앙은 이집트의 강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것이었고

둘째가 개구리 떼의 습격,

셋째 재앙이 모기 떼의 습격이었다.

그 열 가지 재앙 중 여덟 번째 재앙이 메뚜기로 온 이집트를 덮게 하는 것이었다.

“메뚜기가 온 지면에 덮여 날으매 땅이 어둡게 되었고

메뚜기가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었으므로

애굽 전경에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은 남지 아니하였더라.” (출애굽기 10장 15절)

메뚜기 떼에 놀란 파라오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보내주겠다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러나 메뚜기 떼가 지나가자 파라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어서 어둠이 온 땅을 덮게 하는 아홉째 재앙과

이집트의 맏아들을 모두 죽이는 마지막 재앙이 계속해서 내려졌다.

결국 파라오는 굴복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사히 이집트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황충을 날것으로 삼킨 당 태종

중국에서도 메뚜기 떼는 하늘로부터 벌로써 내려진 재앙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로 인해 중국의 역대 황제 중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는 당나라의 태종 이세민은

메뚜기 떼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 가뭄이 들고 황충이 일어나자

태종은 뜰에 나아가 곡식의 줄기를 먹는 황충 몇 마리를 집어 들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은 곡식으로 살아가는데 네가 먹어대면 백성에게 해가 된다.

백성의 허물이 있다면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니

너희들이 신령함이 있다면 단지 나의 심장을 먹고 백성에게는 해가 없도록 하라.”
그러면서 태종은 황충을 삼키려 했다.

주위의 신하들이 나쁜 곤충이 혹시 병이라도 일으킬까봐 걱정스럽다며 말렸지만,

태종은 끝내 “황충의 재해가 나에게 옮겨지기를 바라는데 어찌 병을 피하겠는가”라며

살아 있는 황충을 삼켜버렸다. 그러자 이후부터 황충의 재해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일화이다.

메뚜기 날것을 직접 삼킬 정도로 백성을 걱정한 태종의 고사는 조선 임금들에게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

성종과 중종 시절 가뭄이 심할 때 경연에서 이 일화가 거론되었으며,

성종 때 조선 왕실에서 만든 병풍에도 당 태종의 이 고사가 그림과 함께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 태종의 메뚜기 일화는 조선의 임금들에게 종종 스트레스가 되기도 했던 모양이다.  

 

1768년(영조 44) 여름에 한 달 가까이 가뭄이 들고 충해마저 생기자 영조는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예전에 당 태종은 황충을 잡아먹었는데 그 마음이 오직 정성스러웠기 때문에 효험이 있었으나

나는 부덕하고 또 노쇠하였으며 가뭄과 해충이 이와 같으니 이는 누구의 허물인가?”


알을 뒤덮은 거품의 비밀

군집성 메뚜기가 되는지의 여부는 알을 뒤덮고 있는 거품에 의해 좌우되는 것으로, 한 연구 결과 밝혀졌다. 

그럼 귀여운 어감의 메뚜기는 왜 이처럼 떼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일까.  

 

우선 개별적으로 생활하는 메뚜기의 경우 연두색 내지 갈색 계통의 몸 색깔을 지닌다. 또 이들은 비교적 비활동적이며 성격이 온순하고, 짝짓기를 할 때만 함께 모인다.

이에 비해 집단 생활을 하는 메뚜기는 흑갈색이며 성격이 매우 공격적이다. 또한 주로 밤에 날아다니는 개별 생활 메뚜기와는 달리 군집성 메뚜기는 낮에 모여서 날아다닌다.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팀은 메뚜기가 떼를 짓는 이유를 연구한 결과,

메뚜기들이 서로의 어깨를 격렬하게 문지르고 난 뒤 떼를 짓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암메뚜기들이 알을 낳기 전에 4시간 정도 모여 있을 경우

군집성 메뚜기가 태어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더 구체적으로 어떤 메뚜기는 개별 생활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군집성 메뚜기가 되는지의 여부는

알을 뒤덮고 있는 거품에 의해 좌우된다고 연구팀은 밝혔다.

즉, 까놓은 알들 위로 거품이 있을 경우 군집성 메뚜기가 태어나고,

거품이 없는 알들은 개별 생활을 하는 메뚜기가 태어난다는 것.

실제로 연구팀은 메뚜기 알들로부터 거품을 없앤 결과 개별 생활을 하는 메뚜기가 태어났고,

개별 생활을 하는 메뚜기 알에 이 거품을 씌우면 군집성 메뚜기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연구진은 알을 덮고 있는 거품 속의 어떤 화학물질이 군집성을 결정짓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그 화학물질의 정체가 밝혀질 경우 메뚜기 떼의 발생을 미리 막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한편 개별 생활을 하는 메뚜기와 군집성 메뚜기의 성격이 왜 판이하게 다른지에 대한 이유도

최근 밝혀졌다. 영국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 연구팀은 군집성 메뚜기의 신경계에서는

개별 생활 메뚜기보다 세로토닌이 3배 이상 분비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신경 호르몬인 세로토닌은 사람의 뇌에서도 분비되는데, 크게 두 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

첫 번째는 격한 마음이나 화를 조절하는 기능이 그것이며,

두 번째는 생기와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기능이다.

그런데 연구진의 실험 결과 개별 생활을 하는 메뚜기의 경우

세로토닌을 주입하면 무리를 지어 공격성을 띠고,

군집성 메뚜기도 세로토닌을 차단하면 혼자 다니며 성질이 온순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메뚜기는 먹이가 부족하거나 서식 장소가 좁을 때 세로토닌 분비량을 증가시키는데,

이는 곧 척박한 환경이 메뚜기의 공격성을 자극하고 떼를 짓게 하는 셈이다.



물을 만나면 진행 방향 바꾸어 이동해

메뚜기 떼는 물을 만나면 진행방향을 바꾸어

육지로만 이동하는 습성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메뚜기 떼가 자주 출몰했다는 옛 역사 기록에 대해 한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메뚜기의 생태 특성상 서해를 건너 우리나라로 직접 날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2004년 11월 아카바만 부근에서 발생한 메뚜기 떼가 시나이 사막을 통해 이집트로 이동하면서 3~5㎞에 불과한 바다를 건너지 않고 북쪽으로 돌아 육지 위로 날아가는 것이 목격됐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미국과 이스라엘 과학자들이 그 이유에 대해 연구한 결과, 메뚜기들은 커다란 수면에서 반사되는 편광을 탐지하는 능력이 있어서 물을 만나면 진행방향을 바꾸어 이동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막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메뚜기 떼에게 물은 위험요인으로 받아들여지는데,

특히 바다 위를 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가끔씩 날아와 한반도의 논밭을 피폐하게 만든 황충은

어떤 경로를 통해 이동해온 것일까. 서해를 건너지 않고 북쪽으로 돌아서 한반도 남쪽까지 날아왔던 걸까?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삼국시대의 기록에는 황충이 나타난 시기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에서 같은 해에 기록된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사실에 비추어 혹자들은 삼국이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에 존재했을 거라는 ‘대륙삼국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또 삼국이 나란히 붙어 있은 게 아니라 지리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 숨겨진 황충의 미스터리는 과연 밝혀질 수 있을까?

- 이성규 기자

- 2009년 06월 26일/ 07월 03일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