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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가며(자료)

타락죽을 먹고 중종은 비소에 중독되다

Gijuzzang Dream 2009. 6. 21. 13:58

 

 

 

 

 

 

 타락죽을 먹고 비소에 중독되다

 

 

 

 

 

“요즈음 풍한증이 있어서 이 때문에 오른쪽 어깨가 붓고 아프다.

이제 약을 하문해야겠으니 내의원 관원 하종해와 홍침을 불러

맥을 본 의녀의 말을 듣고 나서 합당한 약을 올리게 하라.”

이는 1532년(중종 27) 10월 21일자의 ‘중종실록’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 중 유일하게 ‘풍한증’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이 기록처럼

중종은 평소에 풍한증으로 인해 고생을 많이 했다고 전해진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중종은

비소 중독으로 인한 호혹병을 앓는 것으로 그려졌다 

풍한증이란 찬바람의 나쁜 기운으로 인해 일어나는 여러 증상을 가리키는데, 대개 오한과 콧물을 비롯해 열이 나는 감기 증상을 일컫는다.

런데 한류 열풍으로 유명해진 인기 사극 ‘대장금’에서도

중종이 몸에 찬 기운이 도는 감기 증상을 앓는 장면이 나온 적이 있다.

드라마 속의 중종은 그로 인해 입 안이 헐어 음식을 먹기 힘들어 하고, 피부 질환이 심해져 상처가 잘 아물지 않아서 고생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그러다 급기야는 눈이 안 보이고 피부가 검어지기 시작했다.

어의는 중종의 이 같은 증상을 진단한 결과 호혹병(孤惑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호혹병은 구강ㆍ인후ㆍ음부ㆍ항문 등에 짓무르는 궤양이 생기며,

눈이 충혈되고 눈 주위가 검어지는 질환이다.

‘금궤요락’이라는 한의학 서적에 의하면 이 질환에 걸릴 경우

“식욕이 없고 음식 냄새를 싫어하며 안색이 벌개졌다가 검어지고 하얗게 되었다가 한다”고 적혀 있다.

대장금 역시 중종의 병을 호혹병이라고 진단했지만, 그 원인을 놓고서는 어의와 의견을 달리 했다.

어의는 중종의 호혹병이 감기의 후유증으로 인한 것이라고 본 반면,

장금이는 웅황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라는 다소 엉뚱한 답을 내놓은 것.

 



비소는 독 중의 왕, 맹독성 원소

웅황(雄黃)은 황화비소를 함유하는 귤홍색의 반투명한 광석을 말한다.

이 웅황을 가열ㆍ승화시키면 사약의 주성분으로 알려진 비상을 얻을 수 있다.

웅황과 비상에 함유된 비소는 ‘독 중의 왕(King of Posion)’으로 알려진 맹독성 원소로서,

고대로부터 독약으로 사용되어 왔다.

비소에 중독되어 검은 반점이 생긴 손 

사람이 비소를 120㎎ 이상 섭취하면 구토ㆍ설사 및 모세혈관 확장, 혈압 감소 등의 증상과 함께 중추신경기능이 마비돼 1~2시간 내에 사망하게 된다.

무색 무취의 백색 분말인 비소는 물에 잘 녹고 설탕이나 밀가루에 섞기 쉬워 오래 전부터 암살용 독극물로 사용되었다.

또한 비소를 조금씩 계속 먹으면 체내에 축적되어 서서히 죽으므로 증거를 남기지 않고 죽이는 데 무척 유용했다.

최근 밝혀진 바에 의하면 청나라 말에 개혁을 꿈꾸었던 황제 광서제의 죽음도 비소 중독으로 인한 독살임이 드러났다.

비소에 만성적으로 중독되면 피부가 거칠어지고 식욕이 떨어지며

많은 부위에 미세한 피부궤양이 생기거나 피부색소 침착으로 인한 반점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곧 드라마 ‘대장금’ 속 중종의 증상과도 일치한다.

그럼 중종의 병도 누군가의 고의적인 음독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과연 누가 중종을 시해하려 했던 것일까.

이런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은수저를 이용했다.

은이 황과 반응하면 검은색의 황화은으로 변하게 된다.

따라서 음식물에 비상이나 웅황의 성분인 황이 들어 있을 경우 은수저를 갖다 대면 색깔이 변하게 되는 것.

수라간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은 반드시 기미상궁이 은수저를 넣어보고 미리 먹어서 검식을 하게 했다.

그런데도 중종이 웅황에 중독된 것이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비소 중독의 주범은 자연?

모두가 놀라서 다그치는 상황에서 장금이는 태연하게 그 범인이 바로 ‘자연’이라고 대답한다.

장금이가 내린 결론에 의하면 궁중에서 기르는 소가 웅황 농도가 높은 지하수를 마시고 자라서

소의 우유에 비소 성분이 축적되었고, 그것을 꾸준히 먹은 중종의 몸에도 비소가 조금씩 쌓였다가

중독 증상이 나타났다는 것.

냄새가 없고 맛이 거의 없는

하얀 비소 분말 

물론 중종의 병은 드라마 속에서의 픽션에 의한 설정이었다. 하지만 중종의 비소 중독과정에 대한 장금이의 설명은 나름대로 충분한 과학적 근거를 가진다.

부경대 연구팀이 웅황과 인공위액을 반응시킨 다음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인체 내 환경을 분석해본 결과,

웅황은 극미량이 체내에 흡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지하수에 함유된 비소의 경우 소의 체내에서 인체에 흡수되기 쉬운 형태로 축적될 수 있다.

때문에 웅황성분이 많이 함유된 지하수나 비소에 오염된 풀을 먹고 자란 소의 우유를 상식할 경우

중종처럼 비소 중독을 일으킬 가능성이 충분하다.

비소는 바닷물 속에 10~20ppb, 강물에 2ppb 정도 함유되어 있으며,

지하수 중에는 최대치가 50ppb 정도 되는 물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 조선시대에도 중종처럼 우유를 그렇게 자주 마실 수 있었던 것일까.

조선시대에는 우유를 타락(駝酪)이라고 했다.

타락이란 ‘말린 우유’의 뜻을 지닌 ‘토라크’라는 몽골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경인교대 김호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조선시대 왕실의 보양식으로 가장 많이 진상된 것이 붕어찜과 더불어 바로 이 ‘타락죽’이다.

타락죽은 우유로 만든 죽으로서,

곱게 갈아놓은 찹쌀에 물을 붓고 쑤다가 우유를 넣어 덩어리가 없게 풀어서 만든다.

임금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이른 아침 허기를 채우기 위해 자릿조반이란 죽상을 올렸는데,

그 대표 메뉴가 바로 타락죽이었다.

허영만의 만화 ‘식객’에서도 한국을 방문한 세계적인 칼럼니스트 케빈에게

주인공인 성찬이가 타락죽을 대접해 ‘역사 깊은 한국 음식의 진수’라는 평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임금의 대표 보양식, 타락죽

동의보감에 의하면 타락죽은 신장과 폐를 튼튼하게 하고 대장 운동을 도와주며

피부를 윤기 나고 부드럽게 해주어서 어린아이나 노인, 환자의 보양식으로 좋다고 소개되어 있다.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타락죽은 종종 임금의 보양식으로 추천되고 있다.

이른 아침 임금에게 바치는 자릿조반의 대표 메뉴가 타락죽이었다 

단종이 즉위하자마자 황보인ㆍ남지ㆍ김종서 등의 대신들이 문안 인사차 들러 “지금 주상께서 나이 어리시고 혈기가 정하지 못하시니 청컨대 타락을 드소서”하고 권했다.

또 왕위에 오른 지 불과 8개월 보름 만에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 조선의 역대 왕들 가운데 재위기간이 가장 짧았던 인종에게도 여러 신하들이 타락을 권했다.

내의원 도제조 홍언필은 “타락은 고깃국과 같은 것이 아니어서 위장에 자양을 주어 윤택하게 하고 심열을 제거하는 것이니 빨리 드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간곡히 청했다.

하지만 타락은 조선에서 쉽게 맛볼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조선 숙종 때 김창업이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쓴 ‘연행일기’에 의하면 자금성에서 황제의 알현을 기다리는 동안 타락차가 들어왔는데

조선 사신들이 마시려 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그것은 조정의 높은 벼슬아치들도 우유의 맛을 미처 알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러면 축산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임금들은

어떻게 타락죽을 그처럼 자주 먹을 수 있었던 것일까.

 

 

 

송아지가 불쌍해 타락죽을 금지시킨 영조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대학로 뒤편에는 낙산(駱山)이 있다.

오래 전부터 숲이 우거지고 약수터가 있어 산책길로 많이 이용되는 이곳은

산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다고 해서 낙타산 또는 낙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이 바로 조선 왕실의 우유를 공급했던 조달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고려 말기에 우유를 조달하는 관청인 유우소(乳牛所)가 생겼는데,

그것이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궁궐 살림을 담당하는 사복시 아래의 타락색(駝酪色)으로 바뀌었다.

타락색이 위치한 곳은 지금의 동대문 부근의 동산이었다.

이후 그 산은 타락색이 위치하고 있다 해서 타락산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지금의 낙산이 바로 그곳이다.

이렇게 볼 때 낙산이란 명칭은

원래 낙타 낙(駱)자가 아니라 우유 낙(酪)자에서 유래된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조선 왕실의 우유를 공급했던 관청인

타락색이 있었던 낙산 


타락색에서는 우유를 공급하는 소를 경기영(京畿營)으로 하여금 각 읍에 분량을 정해주어

내의원에 진상하게 했다. 물론 이 소는 항상 우유를 생산하는 젖소가 아니었기에

새끼를 낳은 어미 소의 젖을 모아 우유를 진상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타락색에 소속된 소에게서 태어난 어린 송아지는

영문도 모른 채 어미 소의 젖을 잘 먹지 못하고 굶주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력의 핵심인 소들이 그 모양이니 농사에도 지장이 많았다.

이 같은 어미 소와 송아지의 애닮은 처지를 측은히 여겨 타락죽을 올리지 말라고 명한 임금이 있었다.

소의 모성애를 헤아린 그 임금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무참히 죽였던 영조였다.

 



봄갈이를 위해 타락죽을 금지시키기도...

1749년(영조 25) 10월 6일자의 영조실록에 의하면

내의원에서 전례에 따라 우유를 올렸는데, 하루는 영조가 암소 뒤에 송아지가 따라가는 것을 보고

매우 측은히 여겨 타락죽을 정지토록 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753년(영조 29)에도 영조는

“다섯 주발의 타락죽을 위해 열여덟 마리의 송아지가 젖을 굶게 하는 것은 인정이 아니다”며

원손궁에는 책봉 후에 타락죽을 올리게 하는 등 타락죽의 진배를 줄이는 조치를 취했다.

사도세자가 영조의 명에 의해 28세의 나이에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죽은 것이 1762년의 일이었으니, 이때만 해도 영조는 어미 소의 자식사랑까지 헤아렸던 감수성이 풍부한 성품이었던 듯싶다.

영조는 송아지가 젖을 못 먹는 것을 염려해 타락죽을 정지시키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이후에도 영조는 몇 차례 타락죽을 올리지 말라는 명을 내리곤 했는데, 그때는 봄을 맞아 소를 본래 고을로 돌려보내 봄갈이에 사용하도록 한 조치였다.

인기 드라마 ‘대장금’에서 타락죽으로 인해 비소에 중독된 것으로 그려졌던 중종도 1511년 외방 수령들이 타락죽을 많이 사용하여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친다는 이유에서 타락죽을 금하게 하는 조치를 취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외에 다른 이유로 타락죽을 거부한 임금들이 있었다.

 

선조는 선대 왕 명종의 비였던 인순왕후가 1575년(선조 8)에 승하하여 상중에 있을 때 계속해 곡을 하여 목이 상하고 원기가 쇠약해져 주위에 걱정을 끼쳤다.

이에 삼정승이 선조를 문안하여 타락죽 같은 음식물을 자주 드셔야 한다고 아뢰었으나,

선조는 타락죽을 올리지 말도록 명했다.

인조는 중전이던 인열왕후 한씨가 1635년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뒤

왕비를 애도하여 30일 넘게 평상시 먹던 음식은 물론 타락죽도 올리지 말게 했다.

이처럼 선조와 인조가 상중에 타락죽을 거부했던 것은 상례(喪禮)에 따른 조치였다.

상복을 입는 기간에는 고기가 든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 우유도 육식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자식과 첩에게 타락죽을 먹인 윤원형

한편, 명종 때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부리며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윤원형이

문정왕후의 사후 다른 신하들에 의해 상소된 26가지 죄목 중의 하나에도 타락죽이 등장한다.

그때 대사헌 이탁 등이 올린 봉서에 의하면

“사복시의 타락죽은 궁궐에 진상하는 것인데 임금께 올릴 때와 똑같이 우유 짜는 인부에게

기구를 가지고 제 집에 와서 조리하게 하여 자녀와 첩까지도 배불리 먹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임금이 먹는 귀한 타락죽을 자기 식구들에게 먹이기 위해

타락색에서 일하는 인부까지 마음대로 부렸다니 당시 윤원형의 권세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명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원형의 귀양을 윤허하지 않다가

대신들의 상소가 쇄도하고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결국 윤원형을 강음에 유배했다.

윤원형은 거기서 애첩으로서 정경부인의 작호까지 받은 정난정이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자

그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하다 함께 자결했다.

그런데 대신들조차 좀처럼 먹기 어려웠던 우유가

중국 사신들에게는 예외적으로 융숭하게 대접되었던 모양이다.

1601년(선조 34) 11월 17일자의 ‘선조실록’에 의하면

일찍이 명나라 사신인 허국이 타락죽을 즐겨 먹었으므로,

행선지 도처에서 매양 타락죽을 먹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한번은 허국이 어떤 참(站)에 이르러 타락죽을 먹으려다가 갑자기 도로 상을 물려서

죽 그릇을 살펴보았더니 위에만 타락죽을 덮어놓고 그 속에는 다른 죽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화가 조영석이 그린 '우유 짜기' 


 

하지만 드라마 ‘대장금’ 속의 중종은 이렇게 귀했던 우유를 홀로 먹은 탓에 비소 중독을 앓게 되었다.

비소로 오염된 풀을 먹은 소가 우유를 생산하고, 백성들은 감히 먹을 수 없었던 우유를 홀로 먹은 임금만이

비소 중독에 걸린다는 설정 속에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백혈병 치료제로 사용하는 비소

독약으로 널리 사용된 비소가 미용제나 정력제로도 사용된 적이 있었다.

중국 화남 지방에서는 여자 아이에게 비소를 조금씩 먹이는 풍습이 있었다.

비소를 먹으면 멜라닌 색소의 생성이 억제되고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아 얼굴이 창백해지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얼굴을 하얗게 하는 미용제로서 비소를 사용했던 것이다.

또 19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비소를 정력제로 여겨 복용하는 이들도 많았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비소를 함유하는 비상은 학질을 다스리고 담이 흉격이 차 있는 것을 토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되어 있다.

또 구충제로 혹은 피부질환이나 악성종창 등에 비소를 이용하기도 했다.

근대 들어 매독의 치료제인 ‘살바르산’이란 약물로도 활용된 비소는 이제 백혈병 치료제로 등장하고 있다.

19세기 이후 비소를 사용해 백혈병을 치료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1970년대 말 중국의 과학자들에 의해 비소를 사용한 백혈병 치료제가

좋은 약효를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이 발표되었다.

이후 전 세계 과학자들이 비소의 약리 실험을 진행했는데,

1998년 미국의 한 암센터 연구진들이 급성 전골수구성 백혈병에 비소가 매우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후 약 2년여 간의 임상 시험을 거쳐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처음으로

비소화합물을 치료제로 공식 승인했다.

연구진들은 급성 전골수구성 백혈병 이외 다른 암에 대해서도

비소가 약효를 발휘할 수 있는지 연구를 진행 중이다.

약이 곧 독이 되며, 독이 곧 약이 되니 무엇이든 너무 과한 것은 좋지 않다는 평범한 진리를

비소를 통해 또 한 번 깨닫게 된다.

 

- 이야기 과학 실록 (56)-(57)

- 2009.06.12/ 06.19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