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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家의 몰락을 가져온 근친결혼

Gijuzzang Dream 2009. 5. 28. 01:13

 

 

 

 

 

 합스부르크家의 몰락을 가져온 근친결혼 

 

 

 

 “유전질환이 유럽 최고 가문의 종말을 초래” 英 인디펜던트 

 

피렌체를 다스렸던 메디치 가문과 함께

유럽 최대 가문으로 손꼽히는 합스부르크 왕조.

이 왕조는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대부분의 지역을 통치하면서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벨기에,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 제국 등 중앙유럽을

비롯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이르기까지 힘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는 가문을 지탱할 손(孫)이 끊기면서

부르봉 왕조에 바통을 넘겨주고 몰락하고 만다.

전쟁이나 반란이 아니라 대(代)가 끊겨 몰락한 보기 드문 왕조다.

 

최근 스페인의 한 과학자가 합스부르크가의 혈통을 유심히 조사한 끝에

이 왕가의 몰락이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질환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영국 유력 일간지 인디펜던트(Independent)가 최근 보도한 내용을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와 함께 정리해서 싣는다. [편집자 註]

 

 

 

600년에 걸쳐 유럽 전역을 지배했던 유럽 최대가문의 합스부르크 왕조.

그러나 근친결혼으로 인한 유전질환으로 대가 끊겨 멸망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합스부르크 가문(The House of Hapsburg)을 둘러싸고

유명한 라틴어 시구(詩句)가 있다.

“Bella gerant alli, tu felix Austria nube”라는 말이다.

영어로는 “Let others wage wars, but you, happy Austria, shall marry”로 보통 해석한다.

“다른 사람들은 전쟁을 하게 만들라.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그대는 결혼을 하라.”라는 말이다.

이는 유럽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가가 전쟁이 아닌 결혼정책으로

외교에 성공했다는 말을 의미한다.

짓궂게 표현하자면 “우리는 전쟁 같은 힘들고 피 흘리는 작업에는

참여하지 않고 결혼으로 당신들이 정복한 영토를 접수하고,

승리의 영광도 가져가겠다”는 말이다.

사실 이러한 결혼정책은 대단히 성공했다.

무려 600년이나 그 힘을 발휘했다.

신성로마황제 직위를 싹쓸이 했는가 하면 적대적인 관계에 있으며

자주 마찰을 빚었던 프랑스의 프랑코 왕국을 제외하고 유럽 전역을 지배했다.

다시 말해서 전 지역에 걸쳐 합스부르크 가문의 왕들이 계속 나왔다.

그들은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기에 앞서

위대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손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가문에 순종하여 충성할 수밖에 없다.

면밀히 이야기하자면 프랑스도 합스부르크 왕조의 결혼정책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는

유일하게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이 나오지 않은 세력이었다.



프랑스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지역에서 왕을 배출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 전역을 가문의 지배하에 두고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가문의 딸들을 프랑스의 왕들과 결혼시켰다.

프랑스 프랑수아 1세의 왕비 엘레오노레를 비롯해 6명이 합스부르크 출신이었다.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과 함께

사치와 허영의 극치를 대표하는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합스부르크 출신이다.

그에 대한 편견도 사실은 그녀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프랑스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그녀는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역사의 비극 속에서 남편과 함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심지어 그녀의 대를 이을 둘째 아들 루이 17세조차 굶어 죽는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그를 보호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혁명의 불길은 어떻게 끌 수가 없었다.

허영과 사치의 상징이자

프랑스대혁명 비극의 주인공 마리 앙투아네트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출신이다.

그래서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미움을 더욱 많이 샀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두 번째 황후 마리 루이즈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다. 그는 나폴레옹의 오스트리아 침공으로 두 번이나 왕궁을 떠나야 했다. 그러면서 결코 나폴레옹 같은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폴레옹을 미워했다.

1821년 세인트 헬레나에서 죽음을 앞둔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에게 이런 유서를 보냈다.

“사랑하는 마리 루이즈, 나의 심장을 꼭 보관해 주길 바라오.

나의 진정한 소원이오.”

그러나 나폴레옹이 귀양을 갔을 때 다른 백작과 바람이 나서

아들까지 낳은 루이즈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나의 소원은 당신의 심장이 당신과 함께 당신무덤에 묻히는 것이오.”

이에 앞서 루이 14세 왕비로서

‘추녀’로, 그리고 ‘주걱턱’으로 소문난 마리아 테레사도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다.

그녀는 한심할 정도로 멍청했다고 전해진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멀리 떨어진 강력한 스페인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근친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혼인으로 혈통은 계속 꼬여만 갔다. 유전자는 더욱 병들어만 갔다.

마리아 테레사는 엄밀히 말하면 고모의 아들과 결혼한 셈이 된다. 그녀는 주걱턱 왕비로도 불렸다. 

주걱턱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물림을 통한 유전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어쨌든 얽히고 설키는 결혼정책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6세기 동안이나 유럽을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된 근친결혼 정책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피는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유전인자가 병들어 가면서 유전질환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스페인 알바레스 교수 “근친혼에 따른 유전질환으로 代 끊겨”

합스부르크 왕조의 몰락을 근친혼 탓이라고 밝혀낸 학자는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대학의

곤살로 알바레스(Gonzalo Alvarez) 교수다.
그는 16세기부터 무려 200여 년간 대제국을 건설한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문 국왕들이

친척들과 근친결혼을 고집했기 때문에 결국 유전질환으로 혈통이 끊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은 크게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중앙유럽을 지배하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였다.

 

알바레스 교수는 1700년 혈통이 끊겨, 결국 브르봉 왕조에 바통을 넘겨준 스페인 왕조에

초점을 맞춰 연구했다.

한 왕조의 힘을 굳건히 지탱하기 위해 정치에서 결혼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왕과 제후, 또는 영주나 신하는 결혼을 통해 서로 간의 세력 균형을 꾀할 수 있다.

서로 간의 안전을 유지할 수 있다.

지방영주는 중앙정부로부터 안전을,

왕이 통제하는 중앙정부는 지방의 반란이나 호족세력을 통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고려를 세운 왕건도

사실 호족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무려 60명이 넘는 부인을 거느렸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결혼정책으로 초창기에 권력을 유지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은 좀 달랐다.

권력 초창기뿐만 아니라 최고로 번창했을 때도 계속 결혼정책을 밀고 나갔다.

합스부르르크 가문의 가장 중요한 정책은 전쟁이 아니라,

결혼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지배하는 것이었다.



‘하나의 유럽’ EU 탄생에 결정적 역할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왕 찰스 2세.

유전질환을 앓고 있던 그는 계속 병에 시달렸으며 결국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다. 주걱턱은

이 가문의 대물림이었다. 

그러나 한 국가가 아니라 수많은 나라들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 결국 결혼은 근친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혈통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그러한 가운데서

‘친족’이라는 구실을 이용해 합스부르크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유럽은 하나’에서 출발해

오늘날 유럽연합 EU가 탄생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유럽을 지배한 고대 로마제국을 든다.

그리고 기독교를 든다.

로마와 기독교가 여러 민족들로 이루어진 유럽을

하나로 만드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면밀히 따지자면 유럽을 하나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커다란 영토를 하나의 왕조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더구나 왕실 간의 결혼으로

소위 ‘이질적인 민족’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 친척이라는 개념이 깊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에 따른 유전질환 이야기는 잠시 접고

성공적인 결혼정책으로 유럽을 지배하게 된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를 잠시 짚어 보자.

 

 

英 인디펜던트 “500여 년간 계속된 정략결혼이 가문을 파멸로 이끌어”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은

'매의 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가문의 문장도

매의 머리로 치장했다.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대부분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왕가.

다시 말해서 화려했던 전성기의 오스트리아 제국을 거느렸던

유럽 최대 왕실 가문 합스부르크 왕가가 발흥하게 된 것은

당시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유럽은 로마제국의 멸망 후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기독교의 신성로마황제가 있었지만 거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유럽의 최고 강자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됐다.

명예직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은

현재 스위스 캔톤(Canton)에 있는 아르가우(Argau)에 세워진

합스부르크 성(城)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1020년 슈트라스부르크 주교인 베르너(Werner)와,

무리(Muri) 수도원을 세운 그의 동생 라트보트(Radbot)가

세웠다고 한다.

할아버지인 군트람(Guntram)은

이 가문의 조상 가운데 역사적 기록을 더듬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시조다. 군트람은 아마도 950년에 독일의 오토 대제 당시 아주 번영했던

카운트 군트람(Count Guntram)과 동일인물일 것으로 역사가들은 짐작하고 있다.

그렇다면 합스부르크 가문의 조상은 481~751년간 초창기 프랑크 왕국을 통치한

메로빙거(Merovingian) 왕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프랑크 왕국의 후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너무 지나친 해석이라는 주장이 많다.

왜냐하면 베르너의 아들인 오토에서부터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사분오열로 찢겨진 지방토호세력 가운데 하나가 합스부르크 가문이며,

그러한 난세를 결혼정책으로 성공해 차후 전 유럽을 지배한 왕조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합스부르크는 ‘매의 성’이라는 말에서 출발

라인강에서 멀지 않은 아르강이 내다보이는 이 성의 이름의 기원에 대해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일부 학자들은 11~15세기의 중세고지독일어(Middle High German)를 바탕으로

‘매의 성(Hawk Castle)’을 뜻하는 '하비히츠부르크(Habichtsburg)'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가문은 독일의 남부지방에서 점점 영향력을 확대하여

신성로마제국(당시 독일)에서 큰 세력으로 부상했고

나중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임명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으로 등장했다.

소위 유럽의 거대한 게르만 민족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 왕가가 바로 합스부르크 왕조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요한 전략은 결혼정책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결혼해서 들어오는 공주들의 지참금으로 영역을 넓혔다.

그리고 거기에서 난 자식을 다시 다른 나라의 군주로 앉히는 정치적 전략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1740년 '유럽의 여제'로 평가받고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죽으면서 그 대가 끊겼다. 

사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원래 300여 개의 영주국가들로 이루어진 신성로마제국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략결혼을 통해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드디어 1273년 첫 왕을 탄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바로 루돌프1세다.

 

그는 어머니 쪽 외가로부터 엄청난 영토를 물려 받아

대단한 영향력을 소유한 영주였다.

거기에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을 이용해

독일 왕, 다시 말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 놓는 기초를 마련했다.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 Interregnum)라는 국내 혼란을 틈타

영토를 확장하고 힘을 길러, 뵈멘왕(王) 오토카르 2세와의

독일 왕위 다툼에서 승리해서 국왕으로 선출됐다.

제후들은 동방의 강자 오토카르의 실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힘이 약해 보이는 그를 선출, 독일왕권의 무력화를 기도한 것이다.

대공위시대란 정치적인 혼란으로

독일 역사상 국왕(신성로마 황제)의 추대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은

1254~1273년 사이를 말한다. 루돌프 1세 즉위 이후 대공위시대는 막을 내린다.

합스부르크가 최초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1273~1291년간 재위하면서

오스트리아를 본령으로 삼고 독일왕권의 전통정책이었던 이탈리아 정책을 버리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확장 정책에 정력을 쏟아 독일에 새로운 시대를 초래했다.

전쟁뿐만 아니라 그 또한 정략결혼을 통해 많은 영토를 획득했다.

뵈멘령(領)은 오토카르의 아들 벤첼 2세에게 상속시키고 자기 딸을 주었다.

다시 장남 알브레히트 1세에게는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지방을 주고,

둘째인 프리드리히 3세에게는 독일을 물려 주었다.

이를 시작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마치 날개라도 단 것처럼 그 세력을 뻗어 나갔다.



상속녀와 결혼해 유럽영토를 거머쥐어

루돌프 1세를 계승한 프리드리히 3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최고 서열에 오르고

다시 독일 왕에 선출된다. 비록 제후들과 끊이지 않은 분쟁, 그리고 반란에 시달리지만

기독교 유럽에서 이슬람 공격을 물리친 첫 왕이 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막스밀리언 황제는 상속녀와의 결혼을 통해 엄청난 영토를 거머 쥐었다.

또한 스페인에도 손을

뻗쳐 결국 왕을 배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정략적으로 포르투갈의 공주 엘레오노라(Eleonor)와

결혼해서 6명의 자녀를 낳았다.

이 가운데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유럽 최고의 가문으로 올려놓은 막스밀리안(Maxmillian)이 있었다.

마치 정략결혼을 위해 태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눈부신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부르군디 공국(지금의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와 프랑스 일부)의 샤를 대공의 딸 마리와 결혼한다.

이 결혼은 유럽 역사상 가장 중요한 결혼으로 꼽힌다.

무남독녀였기 때문이다.

막스밀리안은 엄청난 영토를 결혼 한 방으로 거머쥐었다.
얼굴도 예뻤던 마리는 2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그는 영국 해협을 끼고 있는 브르타뉴를 손에 넣기 위해

이 지역 상속녀와 결혼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프랑스의 저항에 굴복,

꿈을 이루지 못했다.

막스밀리안은

다시 손녀 마리를 헝가리 왕의 아들 루이스와 결혼시키고,

다시 루이스의 여동생 앤(Anne)을 손자인 페르디난트와

결혼시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통합했다. 뿐만이 아니다.

스페인에도 손을 뻗었다. 아들 펠리프를 스페인 공주와 결혼시켜 이베리아 반도까지 넘보았다.



정략결혼의 귀재는 막스밀리안 황제

이를 계기로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는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가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 펠리프 1세와 스페인 왕 페르난도의 상속녀 후아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부친 쪽에서 네덜란드를,

외가로부터는 스페인, 나폴리, 그리고 신대륙 식민지를 상속받았다.

다시 포르투갈도 접수했다.

이제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 독일왕, 신성로마제국 황제, 스페인, 포르투갈 왕의 왕가로

유럽 최대의 왕실가문으로 부상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조는 오스트리아 계열과 스페인 두 가문으로 나누어져 유럽을 지배했다.

기본은 왕실 간의 계속적인 결혼정책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여타 유럽 국가가 이런 관계를 유지하려면 비록 관계가 멀다 해도

‘근친(近親)’에 의한 결혼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근친결혼(inbreeding)이 무려 600년이나 계속된 것이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전자를 담고 있는 피는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채 썩어만 갔다.

유전질환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면서 자손들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13년간이나 유럽을 전쟁으로

밀어 넣어 60만 명 이상이 죽은

스페인왕위계승 전쟁은

합스부르카 가문의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 일어났다. 

결국 1700년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이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스페인 왕 찰스 2세가 아무런 자식도 낳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결과로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와 후계자를 주장하는 프랑스와 스페인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13년에 이르는 전쟁이 일어나 40여 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다시 40년이 지난 1740년 오스트리아의 정통 합스부르크 가문도 문을 닫았다.

‘유럽의 여제’ 후계자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 여왕이 죽으면서다.

그녀는 무려 5개 국가를 통치했다.

다시 합스부르크의 거대한 영토 오스트리아를 둘러싼 왕위 계승을 두고 피 터지는 전쟁이 일어났다.

불을 보듯 뻔한 전쟁이 유럽을 공포 속으로 몰아 넣었다.

물론 훗날 마리아 테레지아가 

로트링겐(로렌)의 공작인 프란츠 스테판과 결혼해서 생긴 요셉 2세가 오스트리아를 장악해 

비엔나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합스부르크-로렌 왕가로 바뀌어

1차 대전의 도화선이 됐던 사라예보 사건까지 그 명맥을 유지한다.

그러나 적어도 혈통을 중요시하는 가계라는 차원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1740년을 기점으로 막을 내렸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다른 유럽 왕가와 달리 여왕을 옹립하지 않았다.  

유럽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흥망성쇠를 결정한 것은 전쟁이나 반란이 아니었다.

혁명도 아니었다. 그 뒤안길에는 바로 근친결혼이 있었다.

 
- 김형근 편집위원, ⓒ ScienceTimes

- 2009년 05월 08일/ 05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