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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오딧세이]

[간도 오딧세이] 56. 청의 심기를 살핀 국경 획정

Gijuzzang Dream 2009. 5. 22. 14:55

 

 

 

 

[간도오딧세이] 청의 심기를 살핀 국경 획정

 

 

 

 

 

 


1636년 병자호란에 패배한 후

청의 요청으로 세운 삼전도비.

조선은 청에 어떤 나라였을까?

청의 역사책 <청사고>의 1876년(고종 13년)의 기록에는 일본의 외교 관리가 북경에 가서 청의 관리와 나눈 대화가 나온다.

 

일본의 외교 관리는

조선과 통상 조약을 하기 전인 1872년 북경을 방문했다.

이 관리는 “조선은 속국이 아닌가”라면서

“그 나라의 통상에 관한 일을 대신하여 주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청의 관리는 “조선은 비록 번속(藩屬)이기는 하지만 내정과 외교는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두고 아조(我朝)에서 간여하였던 일이 없다”고 말했다.

 

19세기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 ‘번속’의 관계는

17세기 말~18세기 초에 더 심했으면 심했다고 볼 수 있다.

 
<청사고> 1712년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순(李焞)은 표(表)를 올려 늘 바치던 공물을 줄여준 것에
대한 사은을 표시하고 방물을 바쳤다. 황제는 사은예물을 동지·원단예물로 삼도록 하였다.

이 해에 목극등이 백두산(중국명 장백산)에 이르러

조선접반사 박권 · 관찰사 이선부와 함께 소백산 위에 비석을 세웠다.

‘이순’은 숙종의 이름이다.

‘조선국왕’이란 표현이 <청사고>에 일부 나타나 있지만 조선의 왕들은 이름으로 표시됐다.

강희제는 ‘황제’라고 표현했다.

공물을 바치던 기록만 보아도 조선 국왕과 청 황제의 관계를 알 수 있을 정도다.

이때는 1636년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큰 굴욕을 당한 지 한 세기가 넘지 않았다.

왕세자가 볼모로 잡혀갔고 수많은 사람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이런 주종의 관계 속에서 목극등이 백두산으로 파견됐으니 조선의 주장은 궁색했다.

잘못하면 청의 관리가 화를 낼까, 청의 조정이 격노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목극등 잘못에 대해 조선 관리들 침묵

 

외국의 사절을 응대하는 조선의 접반사 박권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가

목극등에게 1712년 5월 4일 올린 글을 보면 어떤 상황인지 잘 알 수 있다.


삼가 대인께서 황명(皇命)을 공경히 받들어 욕되게도 원방에 오셔서

산천을 모두 거치고 험조함을 두루 맛보셨습니다.

그럼에도 지기는 미려(彌勵)하시고 용감히 나아감을 게을리 하지 않으시니

최선을 다하는 의리와 쉼없는 충성은 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함을 일으키고 감탄을 자아냅니다.

저희들은 무엄하게도 대인을 인도하는 임무를 맡게 되어 대인의 모습을 직접 뵐 수 있으니,

감히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쏟아

저희 임금께서 대조(大朝)를 존경하는 뜻을 감히 몸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외교문서를 담은 <동문휘고>에 나오는 내용이다.

지금의 문구로 봤을 때 아무리 외교적인 문서라고 하더라도 과도한 응대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청과 조선의 관계는 이렇게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양국 간 경계를 확정한다는 것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관리들은 어떻게 하면 청나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 고심했다.

 

하급관리들은 더했다.

이들은 목극등이 경계를 잘못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1712년의 잘못된 경계 획정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발생했다.

국가 간 경계 획정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것이다.

청은 토문강이 동해 쪽으로 흘러내려 갈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정계비가 세워진 곳의 토문강은 동해 쪽이 아니라 북쪽인 만주를 향해 내달음쳐 갔다.
-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 2009 06/02   위클리경향 82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