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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의 불교적 제재와 그 연원

Gijuzzang Dream 2009. 5. 27. 16:06

 

 

 

 

 

 

 

 고구려 고분벽화의 불교적 제재와 그 연원

 

 

 

 

고구려 고분벽화의 불교적 제재는 안악 3호분의 현실 천정에 묘사된 연화문에서 볼 수 있듯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연화문이 불교적 내세관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왜냐하면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이고,

벽화의 내용도 인물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생활 풍속적 장면들이 주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불교적 내세관을 보여주는 벽화들은

아무래도 불교가 국가의 공식 종교로 선포되고

왕실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사회 전체로 확산되어 가는 5세기에 이르러야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대다수의 고분벽화에서는

인물풍속적인 요소가 점차 약화되고 그에 대신하여 불·보살상(그림 1),

연화문, 연화화생, 비천(그림 2), 화염문(그림 3) 및 공양인 행렬도(그림 4)와 같은

새로운 불교적 소재들이 유행하여

기존의 계세적 사후세계관과는 구별되는 불교적 사후세계관의 보여준다.

 





 

 

 

5세기의 벽화고분 가운데 불교적 내세관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예로는

집안일대의 장천1호분, 산연화총, 귀갑총, 삼실총과

평양일대의 감신총, 덕흥리 벽화고분, 쌍영총, 안악2호분 등을 꼽을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불교적 요소가

감숙지역의 초기 석굴벽화와 긴밀한 연관성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감신총을 시작으로

묘주 초상의 등 뒤에 출현하는 역삼각형의 등받이(그림 5),

장천1호분 불상의 화염광배 뒤에 묘사된 보리수의 표현(그림 2) 등은

4세기 말 5세기 초 감숙 지역의 석굴사원에서 매우 유행하였던 양식이다(그림 6, 7).

당시 감숙 지역은 잦은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중원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안정을 취하고 있었으며,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문화가 이민족 정권에 의해 한창 꽃을 피우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감숙 지역까지 흘러들어온 석굴 사원의 전통은

아직 중국 본토까지 들어오지는 못하고 정체되어 있었다.

 

따라서 감숙지역의 석굴사원에서 유행하였던 불교적 제재들이

중국의 화북지역이나 남방지역을 훌쩍 건너뛰어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먼저 나타난다는 사실은

바로 고구려와 감숙 지역 간의 재빠른 문화교류 및 고구려의 독자적이며 능동적인 대외교섭활동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구려의 이러한 적극적인 대외 외교활동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고구려가 처해 있었던 국제 정세가 크게 작용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에서 중국 세력을 축출하는 한편 북방민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여

중국의 서북 지역으로 직접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하였고,

나아가 감숙 일대를 통해 실크로드를 경유해 온 새로운 문화적 요소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5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에 농밀하게 보이는 불교적 정취가,

당시 세속적 생활상이나 도교적 신화로 채워진 남조의 고분벽화나 한문화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북위의 그것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구려만의 특징이라는 점이다.

 

북방민족 선비(鮮卑)에서 기원하여 한 때 광활한 화북지방을 통일하였던 북위는

한화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여 결국 민족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구려는 시종일관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개방적이며 진취적인 자세 또한 견지하여,

민족적 전통과 새로운 조류를 결합한 한 차원 높은 문화의 창조로 발전시켰다.
- 김진순, 문화재청 대구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2009-05-25 문화재청, 문화재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