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베를린 국립미술관 소장
(Staatliche Museen zu Berlin, Gemaldegalerie, Berlin, Germany)
독일 베를린 국립미술관은 예술 후원자였던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베를린을 문화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처음 계획되어 설립된 미술관이다. 19세기 주요 강대국으로 부상한 독일은 자국의 위세를 과시하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 고대 그리스 신전 형태를 모방한 국립 미술관을 지었다. 독일에 있는 당대 미술품을 가장 폭넓게 소장하고 은행가이자 영사였던 요라킴 하인리히 빌헬름 바게너가 국내외 화가들의 작품 262점을 기증한 것이었다. 소장하고 있던 많은 예술품들이 창고로 옮겨져 화를 피했다. 동 · 서 베를린으로 분리되어 운영되었던 국립미술관은 1989년 분단 독일이 통일됨에 따라 하나로 운영된다.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Michelangelo Merisi, 1571년–1610년), 이탈리아 밀라노출신의 화가이다. 태어난 마을의 이름인 카라바조(Caravaggio)로 잘 알려져 있다. 카라바조는 신화나 영웅을 표현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에서 벗어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전통을 무시하고 파격적으로 표현해 외설시비를 낳은 작품이 카라바조의 <정복자 큐피드>다. 이 작품은 귀엽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로 표현되었던 전통작인 큐피드에서 벗어나 활과 화살로 사랑을 전파시키는 큐피드가 아니라 자극적인 실제의 소년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이 작품에서 큐피드는 오른손에 화살을 쥐고 있고 바닥에는 악보와 악기 그리고 책과 펜, 월계관, 컴퍼스, 각도기가 놓여 있다. 악보와 악기는 음악을 상징하고 있고 책과 펜은 문학 그리고 각도기와 컴퍼스는 건축을 상징한다. 큐피드는 무기를 들고 지식과 권력의 상징들을 짓밟고 있다. 카라바조는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라는 베르길리우스가 쓴 전원시에서 차용을 했다. 사랑은 학문과 예술을 정복한다는 의미다. 미켈란젤로의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비>를 위해 제작된 <승리>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그 작품을 똑같이 옮겨 놓지는 않았다. 그는 큐피드의 자세를 영웅의 모습도 아니고 어린아이의 모습도 아닌 노골적으로 유혹하고 있는 소년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메조소프라노 곡의 일부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 작품을 처음 구입한 빈체초 주스티아니 후작이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카라바조는 그를 칭송하기 위해 악보와 악기를 그려 넣었다. 그림 위에 초록색 천으로 덮여져 있었다. 25년 후 시인 페트라르카가 호기심으로 그것을 들추어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었다. ‘날개 한 쌍’을 돌려달라고 재촉하는 편지 덕분에 이 작품의 제작연대가 정확하게 1602년이라고 밝혀졌다.
승리의 미소
큐피드를 통해 표현된 솔직하고 진실한 기쁨의 표현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의 작품에서는 좀처럼 미소를 짓고 있는 그림은 찾아 볼 수 없는 단지 2점의 그림 ‘정복자 큐피드’(1601~ 02)와 ‘성 세례 요한’(1602)에서는 옷을 모두 벗은 남자 어린이들이 미소 짓는 장면이 나온다. 어린 소년 큐피드가 날개를 단 채, 사랑의 화살을 쥐고 정면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남자 어린아이는 정면으로 완전히 노출되어 있으며 부끄러운 듯이 관자 쪽을 바라보고 있다. 카라바조가 델 몬데 추기경의 화실에 소속되어 있을 때부터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카라바조의 작품 ‘성 마태와 천사’의 첫 번째 판이 어떤 사유로 인해 인수가 거부되었을 때, 후작은 그 작품을 서슴지 않고 고가로 사들였던 카라바조의 강력한 후원자였으며, 또 당시 로마의 대표적인 예술품 수집가로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 작품 650점을 소장한 것으로도 유명한 예술을 사랑하는 수집가였다.
이렇듯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아는 사이에서 화가와 주문자가 되었기 때문에 ‘정복자 큐피드’에는 주문자의 학문에 대한 관심과 그 박식함을 유감없이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주문자 주스티니아니 후작의 음악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반영되어 있으며,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는 검은색 갑옷은 군사적 용맹성과 지식을, 큐피드의 오른쪽 허벅지 뒤편에 놓여있는 천체 본은 천문학에 대한 지식과 관심을, 왕관은 정치적인 탁월한 수완과 영광을, 그 리고 바닥에 놓여 있는 기억자형 측량 기구는 주문자의 기하학에 대한 지식과 관심을 각각 표현한 것이다. 이 그림의 주문자이며 자기의 강력한 후원자인 주스티니아니 후작의 박식한 지식을 여러 분야의 학문을 정복한 승리자로 표현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보는 큐피드의 미소는 이러한 학문들의 지식을 습득한 학문의 정복자로서의 주스티니아니의 기쁨의 미소를 큐피드가 대신 연출하고 있는 것으로 그야말로 승리자의 미소이다. 마음에 탄력이 생기고 들뜬 기분에 몸마저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게 되어 얼굴에는 붉은 기가 돌며 입술에는 윤기가 돌아 더욱 부드러워지며 미소가 저절로 새어난다. 그것은 그 사람이 지닌 욕구, 염원이나 가치관에 따라 차가 생기게 마련이고 또 같은 기쁨이라도 언제나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며 또 그러한 기쁨을 처음 느낄 때와 자주 느꼈을 경우와는 많은 차가 있게 마련인데, 작품에서는 어린 큐피드를 통해 구김 없고 솔직한 승리감에 도취된 미소이다. - 문국진(고려대명예교수) - MD저널 [art & medicine] 중에서
문화 예술의 후원자로 예술품 구매의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당시 신흥 귀족으로 부상한 중산층의 사회적 위치를 말해주고 있는 작품이 한스 홀바인의 <게오르크 기체의 초상>이다.
Portrait of the Merchant Georg Gisze(1532)
진기한 사물과 과학적 기구, 책, 꽃병은 홀바인(Holbein, Hans the Younger)의 초상화에 자주 등장한다. 몇몇 그림에서 이 사물들은 모델과 거의 대등한 위엄과 구성적 중요성을 지니는 점에서 홀바인은 정물화를 예견했다고 할 수 있다.
홀바인은 전형적인 독일화가라 할 수 없다. 그는 '떠나간 독일인'으로 10대 때 스위스로 건너갔으며 나중에는 영국으로 가서 헨리 8세의 궁정화가가 된다. 따라서 홀바인의 작품들은 국제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게오르크 기체의 초상) 그는 기체의 깊은 내면이 아니라 그의 개인적인 세계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마치 열쇠구멍을 통해 보여지는 것 같은 이 장면을 묘사했다. 기체의 이름과 나이를 알 수 있게 윗쪽에 안내문을 적었으며, 런던의 스틸야드(Steelyard)에서 온 편지를 통해 이 사람이 한자동맹에 소속된 상인이며, 무역에 필요한 도구들을 자신의 깔끔한 녹색사무실에 정리해두고 있는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저울, 책, 상자들, 봉인, 장부, 약간의 현금 등 그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과 빛나는 새틴으로 된 소매로 보아 그가 부유한 상인이라는 점도 알 수 있다.
그의 앞에는 이국적 테이블 보가 깔린 테이블이 있고, 베네치아산으로 보이는 꽃병이 놓여 있다. 꽃병에 꽂힌 카네이션은 원래 약혼을 상징하는 꽃으로, 이 초상화는 그의 약혼녀였던 크리스틴 크루거에게 주려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홀바인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大 한스 홀바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홀바인家는 독일의 유명한 종교화가 가문으로 삼촌 지크문트는 다소 보수적인 성격을 띤 독일 후기 고딕양식의 그림으로 유명하였고,
홀바인과 동생 암브로시우스는 처음 그들의 아버지에게 미술을 배웠으며 그의 동생은 1519년경 미술가로서 성숙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홀바인은 1515-25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미술활동을 하였으며, 이탈리아 북부(1517년) 프랑스(1524)를 여행하며 여정 중에 로렌초 로토의 초상화를 연구하게 되는데, 이는 종교화와 초상화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1526년 종교개혁으로 인해 격렬한 성상파괴 폭동과 언론에 대한 엄격한 검열 때문에 당시 예술의 정체현상을 초래한 상황에서 그는 인문주의학자인 에라스무스의 소개장을 가지고 스위스 바젤을 떠나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 런던으로 이주하여, 토머스모어 경의 후원을 받게 된다. 그는 1533년경 이미 영국의 궁정 저명인사들을 그렸으며, 4년 뒤에는 헨리 8세의 궁정화가가 되었는데 1543년 페스트로 사망할 때까지의 생애 이 마지막 10년 동안 왕족과 귀족을 모델로 한 초상화를 150여 점 가량 그렸다고 한다. 실물 크기의 초상화와 세밀초상화도 있었다.
홀바인은 초상화가로서뿐만 아니라 궁정의 패션디자이너로도 활동하여 왕의 모든 예복을 디자인했으며 그밖에도 왕족을 위하여 단추와 버클, 행렬용 무기와 마구, 책의 장정에 이르기까지 250여 가지가 넘는 품목의 정교한 디자인을 남겼다.
여기에서 홀바인은 마니에리스모 양식의 질감과 세부표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이 아마도 심오한 정신성의 표현을 방해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의 초상화들이 모델의 성격이나 정신적 경향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홀바인의 생애 역시 그의 성격이나 정신적 경향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직접 쓴 메모나 편지는 물론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들 역시 한결같이 애매모호하다. 홀바인은 자신의 창조적인, 그러나 매우 세속화된 힘을 억제시킬 수도 있는 권력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고 초연해짐으로써 아름다움과 뛰어난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홀바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인상은 종종 표현주의적이거나 감정적이라기보다는 예술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아마도 이것이 그의 미술의 유일한 한계일 것으로 본다.
집안 대대로 상인이었던 단치히의 게오르크 기체는 1539년대에 영국에서 상점을 열었다. 이 작품은 게오르크 기체의 사무실을 묘사한 작품으로서 홀바인의 초상화 연작 중에 첫 번째 작품으로서 세부 묘사가 뛰어나다. 홀바인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오리엔트 양탄자가 탁자에 깔려 있고 그 위에 북 모양의 탁상시계 같은 사치품 그리고 깃펜, 봉인 달린 양피지, 인장, 동전, 가위, 금, 저울, 열쇠, 장부 등 실용품들이 가득 차 있다. 이러한 물건들은 투명한 거래가 생명인 젊은 상인의 직업과 성향을 알려주고 있다. 사랑과 정절, 순수와 겸손을 가리키고, 피었다가 곧 시들을 꽃은 삶을 경솔하게 받아들이지 말 것을 상징한다. 이 작품에서 시계는 신용을, 유리병은 투명한 거래를 상징한다. 기체의 머리 위의 쪽지에는 ‘이 그림은 게오르크 기체의 얼굴과 외모의 모습이다. 눈빛과 뺨이 생생하지 않은가. 서기 1532년 그의 나이 34세.’라고 라틴어로 인물을 설명하고 있다. 전통적인 원근법을 무시한 파격적인 구성에 있다. 겉으로는 부유한 상인의 사무실이 질서정연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 같지만 융단이 덮여있는 탁자 상단도 정확히 묘사되지 않고 벽돌도 직각을 이루지 않고 있다. 이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 같아도 홀바인은 미묘한 변화를 주었다. 그것은 모든 물질은 부서지기 쉬움과 헛됨을 그는 암시하고 있다. 결코 아름다운 그림은 아니지만 미술 역사상 중요한 초상화 중의 하나다. 중산층이었던 게오르크 기체를 홀바인이 그렸다는 것은 중산층이 그림을 구매하는 층으로 부각되었다는 것과 또한 평범한 중상층이 초상화를 의뢰했다는 것은 신분 상승 욕구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 박희숙 서양화가, 미술 칼럼니스트 - 2009년 05월 26일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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