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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가며(자료)

정조의 <어찰첩(御札帖)>

Gijuzzang Dream 2009. 5. 18. 20:52

 

 

   

 

 

 

 정조(正祖)의 《정조어찰첩(御札帖)》

 

 

 

 

 

 

 

 

 

 

 

너무나 인간적인

성군의 재발견
'어찰첩'으로 본 정조

 

 

"아, 제 우리가 알고 있던 훈남 이미지를 버려야 하나….” 여기저기서 탄식이 들려온다.

정조(1752~1800년)에 대한 얘기다.

소설, 드라마, 영화를 통해 성군(聖君)으로, 인자한 왕으로, 개혁 군주로 그려진 조선 22대 왕(재위 1776~1800년) 정조.

 

이런 탄식이 나오는 이유는 새롭게 발굴돼

2월9일 공개된 정조의 《어찰첩》때문이다.

발굴된 편지는 299통.

모두 자기 아래서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낸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 심환지(1730~1802년)에게 보낸 비밀 편지다.

그 가운데 이날 공개된 것만 봐도 정조를 가리키던 수식어는

크게 바뀌어야 할 판이다.

‘막후정치의 대가’  ‘다혈질의 소유자’  ‘막말도 서슴지 않는 군주’ 등으로 말이다.

어찰첩 덕분에 바야흐로 정조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있는 것.

 

정조가 다혈질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은 곳곳에 있다.

정조는 편지에서 주위 인물을 평가하며 과격한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호론(湖論)의 대표 한원진을 반대하는 젊은 학자 김매순(金邁淳)의 행동에 흥분해

쓴 편지에서 정조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였던 김매순에 대해선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놈”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오경(五更, 새벽 3~5시)이 지났다”고 토로했다.

 

최측근으로 알려진 서용보에 대해 “호래자식”(胡種子)이라고 욕하기도 했으며 
비밀에 부치라는 편지 내용을 말하고 다니는 심환지에게

“이 떡을 먹고 말을 참아라”라며 애정어린 질타도 한다.

 

한자로 써내려가던 편지에서 뜬금없이 한글로 ‘뒤박’(뒤죽박죽)이라 쓴 것을 두고

성격이 급했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적절한 한자가 생각나지 않자 급한 마음에 일단 한글로 썼다는 해석이다.

그런가 하면 인간미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구어체와

‘개에 물린 꿩 신세’ ‘꽁무니 빼다’ ‘누울 자리 보다’ 같은 속담, 비속어를

자주 사용한 대목에선 권위와 체면을 버린 소탈한 모습이 엿보인다.

 

따뜻한 면모도 드러난다.

정조는 잠시 곁을 떠나 있던 심환지에게 “헤어진 뒤로 어느덧 달이 세 번 바뀌고

50일이 지났는데, 그리운 마음에 잊지 못하고 있다. 잘 지내고 있는가”

라는 편지를 보냈다.

정조는 함께 보낸 약재들의 이름을 별지에 일일이 적어 편지에 동봉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정조가 ‘막후정치’에 능했음을 보여주는 편지들이다.

“충청도의 인심을 수습하기 위해 자리를 안배할 것”을 지시하는 등

인사(人事)에 개입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상주(上奏, 왕에게 말씀을 아뢰는 일)하도록 한 뒤 이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일을 처리한 적도 많았다.

심지어 상주문의 글귀를 직접 써서 보내기도 했다.

 

정조가 ‘일벌레’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만한 대목도 있다.

“일을 보느라 바빠서 잠깐의 틈도 내기 어렵다.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가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가 지나서야 비로소 밥을 먹으니,

피로하고 노둔해진 정력이 날이 갈수록 소모된다.”

 

이래저래 정조의 이미지를 새롭게 정립하는 연구가 불가피해졌다.

그렇다면 세종과 효종은 실제로 어떤 군주였을까.

다른 왕들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사료 역시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게 아닐까

궁금해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 금동근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 주간동아 674호, 2009.02.24 (p13)

 

 

 

 

 

 

 욱하는 워커홀릭 정조 '어찰첩'에 생생히

 

 

 

정조(1752~800)가 심환지(1730~1802)에게 보낸 어찰 297통이 출간됐다.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정조의 불같은 성격, 막후정치,

정조와 정조의 정치적 적으로 여겨진 노론 벽파(僻派) 심환지와의 관계가 잘 드러나 있다.

2월9일 세상에 나온 이 어찰 가운데 10통에는 논란이 됐던 정조의 병인과 사망의 원인이 담겨 있다.

정조의 기질과 지병에 따른 병사 가능성을 높였다.

 

《정조어찰첩》번역에 참여한 진재교(48)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는

"4년간의 편지 속에서 정조의 건강이 지속적으로 나빠지고 있으며,

사망할 무렵에는 급속도로 악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면서

"정조는 자신의 병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스스로 진단하고 의원들과 수시로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정치 10단인 어머니 헤경궁 홍씨도 정조 사망 직전까지 정조를 자주 문병했다.

독살기미가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바로 눈치챘을 것이다."

진 교수는 "정조의 독살설은 당초 정치적인 정황을 근거로 터져 나온 것이기 때문에

문서나 기록으로만 판단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닐 듯하다.

궁궐에서 일어나는 비밀스러운 일을 문서나 기록으로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라면서도

"정조 독살의 명확한 기록이 드러나지 않는 한

정조어찰첩, 조선왕조실록, 풍고집(김조순의 문집) 등의 기록에 근거해 보면

정조의 사망 원인은 지병에 따르는 병사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진 교수는 "집착할 정도의 부지런함도 정조의 병을 악화시키는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짚었다.

"죽기 2주전에 한번 쓰러졌는데 다음날 일어나 또 정무를 보다가 다시 쓰러졌다.

'눈코 뜰새 없다'는 말을 자주 쓰면서 새벽까지 공무를 돌보며 힘들다는 토로를 편지에 종종 털어놓았다"

고 전했다.

어찰집이 일부 공개되고, 다혈질에 신하들에게 폭언을 일삼았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정조는 성군이 아닌 폭군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안대회(48)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어찰집을 번역, 정리하면서 정조가 조급한 성질에

마음에 안 드는 신하가 있으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말을 거칠게 하고 욕설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하들이 폭언에 반발해서 상소를 올리기도 했을 정도"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화를 내더라도 곧 이성을 찾았으며,

화에 못 이겨 신하를 바로 처벌하고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폭군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선을 그었다.

"정조는 상소문 때문에 화가 나서 새벽 3시까지 일어나 있다가 심환지에게 편지를 쓰면서

'내가 이런 것 때문에 3시까지 이러고 있으니 우습다'면서 껄껄 웃기도 한다.

정조는 단지 다혈질일뿐 인간적인 인물이다."

정조는 심환지뿐 아니라 각 정파의 핵심 인물과 사적으로 정보망을 구축,

여론과 정국 현안에 관한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남인의 영수였던 채제공을 비롯, 김희순, 어용겸, 서용보 등 노론 벽파에 속하는 인물들과도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정국의 동향과 정보를 파악한 막후 정치의 대가였다.

《정조어찰첩》은 또 정조의 여론정치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여론을 반영하는 듯 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여론이 움직이도록

배후에서 조종한 인물 정조가 보인다.

진 교수는 "전제군주를 둘러싼 수뇌부에서 진행된 정치의 실태와 생리의 따끈따끈한 실상을 담은

《정조어찰첩》에는 당대 정치사가 풍부하다.

책에 담긴 정치가들의 생생한 현장은 승정원과 실록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기타 왕실 기록들과 대조하면서 보면 국가 기록들에 대한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평했다.

- 2009.05.18

- 저작권자ⓒ '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

 

 

 

 

 

 

 

 

 정보 부재 불안에 시달렸던 정조

 

 

 


비밀어찰의 개가는 '심환지의 재발견'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지냈던 심환지(沈煥之)에게 보낸 조선국왕 정조의 비밀어찰 297통은

'어찰정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이 18일 전모를 드러낸 이들 편지는

지난 2월 어찰첩 발굴공개 당시 이미 지적됐듯이

정조가 국가의 공식 언로(言路) 대신에

얼마나 비밀 편지를 통한 '정보정치'를 치밀하게 펼쳤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들 편지만 본다면, 정조에게 각종 정보를 제공했을 심환지는

요즘의 국가정보원장 정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번 어찰첩을 발굴한 학계가 줄곧 강조하듯이

이들 편지는 심환지라는 특정인에게 보냈다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

정조는 심환지 외에도 당시 조정 여러 대신이나 측근들에게

이와 같은 유사한 어찰정치를 시도했음을 알 수 있다.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에게 보낸 편지도 일부가 전하며,

이번 어찰 자체를 보아도 심환지 외에도 정조가 서용보(徐龍輔)나 어용겸(魚用謙) 등에게도

자주 어찰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정조는 당파를 막론해 주요한 인물들을 '정보원'으로 활용하면서

각 당파의 움직임을 시시각각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정국을 이끌어 가려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중에 가장 빈번하게 반복되는 말이

"요즘은 왜 새로운 소식이 없는가"라는 다그침이다.

예컨대 병진년(1796) 9월15일에 보낸 편지에서는

"요사이 시사(時事)는 들려줄 만한 것이 있는가"라고 묻는가 하면,

이듬해 2월5일 저녁에 보낸 편지에서는

"근래 오랫동안 인편 왕래가 없어 몹시도 답답하다"는 심경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어 2월29일자 편지에서는 "어용겸도 소식을 전하지 않으니 어째서인가"라고 심환지에게 묻는가 하면

3월12일자 편지에서는 "어용겸은 요새 소식을 전하지 않는가?

또 무슨 까닭으로 어용겸만 소식을 전하고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하려 하지 않는가"라고 따지기도 했다.

이런 대목만으로도 정조가 같은 노론 벽파라 해도

심환지라는 하나의 '정보원'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여러 정보통을 개설했음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어찰첩 발굴에 관여한 성균관대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는 정조의 이런 증세를

"정보 공백에 대한 조급증"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번 비밀어찰 발굴이 몰고온 메가톤급 폭풍은 심환지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어찰첩 발굴 이전까지 심환지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정조시대에 관한 역사학계 연구를 보아도 심환지는 노론 벽파의 주요 인물로 다뤄지기는 했지만,

결코 '넘버 원' 취급을 받지 못했으며, 그랬기에 안 교수 표현을 빌리자면

그에 대한 연구는 "논문 한 편은커녕 반편도 없는 실정이다."

심환지(沈煥之)

나아가 심환지는 시종 정조에 맞선 정적으로 간주되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스런 편지가 무더기로 공개됨으로써,

정조의 그에 대한 신임이 간단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번 편지가 공개됐음에도 여전히

"그렇다고 해도 심환지가 정조와 대척점을 형성한 정치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반론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아무런 선입관 없이 이들 편지를 읽으면,

심환지는 정조의 심복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들 어찰에 드러난 심환지는 어떤 인물일까?

아쉽게도 이들 어찰은 정조가 심환지에게만 보낸 편지 묶음이지,

반대로 심환지가 정조에게 보낸 편지는 아니다. 후자의 편지가 발굴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정조어찰만으로도 심환지의 성격은 대략 짐작이 가능하다.

우선 심환지는 대단히 사려깊은 정치가라는 인상을 준다.

이들 편지에서 정조는 심환지가 이끄는 노론벽파에 대해 끊임없이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선명노선'을 견지할 것을 주문하지만,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다는 식으로 여러 차례 질책을 받는다.

나아가 "왜 경은 내가 편지를 쓰기 전에는 먼저 편지를 주지 않느냐"는 질책도 여러 번 듣는다.

예컨대 정사년(1797) 4월6일자 편지에서 정조는

"요새는 내가 편지를 보내지 않으면 애당초 경이 먼저 인편을 보내는 경우가 없으니,

경도 근래 이러쿵저렁쿵하는 말을 두려워해서 그러는가"라고 다그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역설적으로 심환지가 얼마나 '노회'한 정치가였는지를 말해준다 할 수 있다.
노회하고 사려깊은 정치가 심환지는 이들 비밀어찰을 관리한 태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비밀어찰에는 편지를 받는 날짜는 물론이고, 그 시각까지 적었다.

지난 2월 어찰첩 발굴 공개 당시에는 이런 기록들이 심환지 집안에서

후대 누군가가 편지들을 정리하면서 붙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후맥락을 볼 때, 이는 심환지 본인이 아니고는 도저히 적을 수 없는 사항이었다.

실제 안대회 교수가 경기도박물관에 기증된 심환지 친필 글씨를

이번 어찰첩에 적힌 편지 수신날짜 관련 글씨와 비교해 본 결과 심환지 친필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로써 보건대 심환지는 정조에게 편지를 받는 그 순간에

그것을 수취한 날짜와 시각까지 적어 그것들을 차곡차곡 보관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어찰첩 정리에 관여한 성균관대 한문교육학과 진재교 교수는

정조가 문체는 자고로 순정해야 한다는 소위 문체반정(文體返正)을 표명했으나,

실제 이들 편지에 적힌 문체는 구어체와 속담, 욕설에 가까운 비리한 표현 등을 적극 구사한 점을 들어

"그의 문체반정은 매우 정치적 지향이 강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됐다"고 말했다.

 2009-05-18, 연합뉴스

 

 

 

 

 

 성대 동아시아학술원 《정조어찰첩》간행


 

<정조 어찰첩〉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18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이 대학 출판부를 통해 《정조 어찰첩(正祖御札帖)》두 종류를 발간했다고 말했다.
하나는 주된 독자층으로 학계를 겨냥한 2권 1세트 본(本)이며, 다른 하나는 1권짜리 보급판이다.

이 중 2권 1세트 본에는 지난 2월9일 언론을 통해 일부가 공개된 정조어찰 297통 전부를

원색 사진으로 촬영ㆍ축소해 수록하는 한편,

이에다 탈초(脫草, 인쇄체 정자로 새로 쓰기), 번역, 윤문 및 해제를 덧붙였다. 
반면 보급판(568쪽)은 실물 영인을 제외한 원전의 탈초와 번역, 윤문과 해제를 수록했다.

 

 

정조가 노론 벽파(老論 僻派)의 핵심 인물 심환지(沈煥之.1730-1802)에게 보낸

비밀어찰 297통을 담은 《정조 어찰첩(正祖御札帖)》을 번역한 성균관대 안대회 · 진재교 교수는

"지난번 언론 공개 당시 정조어찰을 모두 299건으로 파악했으나

날짜별로 다시 정리한 결과 2건이 줄어 모두 297건으로 확인됐다"면서

"이번 자료 및 해제집은 19세기 전후 정조시대 정치사와 문화사를 해명하는 크게 참고가 될 것"

이라고 말했다.


이들 편지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국가공식 기록에는 없는 내용이 대부분이며,

그 내용이 겹친다 해도 그와는 전혀 색다른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판도라 상자'에 비유된다.

무엇보다 국왕이 특정신하에게 보낸 어찰이 이처럼 대규모로 발굴된 적이 없고,

나아가 정조가 특정 계파를 대표하는 인물을 통해 시시각각으로 각종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정국을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자 때로는 '공작정치'를 시도한 흔적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비상한 주목을 끌고 있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남몰래’ 편지를 쓴다.

남몰래 쓰면서도 또다시 ‘불에 태워라’, ‘찢어버려라’, ‘보고나서 찢어버려라’,

‘세초하든지 돌려보내든지 하라’, ‘읽은 다음 찢어버리고 남기지 말라’ 등의 지시를 내린다.

그러나 심환지는 정조의 ‘증거인멸 지시’를 거부한다.

그리하여 그 은밀한 편지들은 2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 앞에 존재한다.

정조가 남몰래 쓴 편지 속에는 인사문제를 비롯한 당시 정치 현안,

그리고 각 정파의 인물들에 대한 적나라한 평가가 담겨 있다.

또한 여론의 동향을 사전에 파악하거나, 정국의 안정을 해치는 상소의 경우

그 공론화를 미연에 방지하도록 조종하고, 나아가 정국 운영에 유리하도록 공론화시키는 데

 ‘심환지의 입과 글’을 사용한 증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학술원은 1796년 8월20일부터 정조가 승하하기 직전인 1800년 6월15일까지 심환지에게 보낸

이 어찰들을 사안별로 분류한 결과

민감한 정치 현안의 처리와 자문에 관한 내용(67건)과 인사 문제(54건)이 가장 많고,

상소ㆍ차자ㆍ장계의 처리와 지시를 담은 내용(41건),

중앙 정계와 산림의 여론과 동향을 탐색한 사안(31건), 부정부패 척결과 정조의 관심사(19건),

정조와 심환지의 인간적 관계(31건), 정조의 건강상태(10건), 조정 인사들의 인물평(15건),

정조의 성격과 개성(11건) 등이 뒤를 잇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덧붙였다.

성대 동아시아 학술원이 정조의 어찰들을

영인 · 탈초(脫草 · 초서체 원문을 정자체로 옮김) · 번역하고 해제를 덧붙여 간행한

《정조 어찰첩》영인해제본(상 · 하 2권) 및 보급판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이들은 학계 일각에서 제기된 노론 벽파에 의한 '정조 독살설'을 부정하고

다혈질적 기질과 성격, 이에 따른 지병 악화가 정조의 사망원인이라고 설명했다.

정조의 사망 원인은 이번 정조어찰첩을 근거로 보면

그의 기질과 지병에 따른 병사(病死)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면서

"비록 4년간의 편지지만, 정조의 건강은 이미 지속적으로 나빠졌고

사망할 무렵에는 급속도로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학술원은 말했다.

"정조가 독살됐다는 명확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 한 《정조어찰첩》《조선왕조실록》,

김조순의 문집인《풍고집》등으로 볼 때 정조의 사망원인은 지병에 따른 병사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어찰첩'에는 정조가 스스로 자신의 병증을 진단하고 약제를 조절하는 등 자가 진단과 치료는 물론

의원들과 수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병을 치료한 것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신하가 조금만 잘못 해도 버럭 화를 내는 다혈질에 '욱' 하는 성격,

며칠이라도 비밀편지를 통한 정보 보고가 없으면 안절부절 못하는 정보공백 불안증,

밤새 여러 사람에게 동시다발로 편지를 보낼 정도의 집착증과 일 중독 등이

정조의 지병을 악화시켜 사망했다는 것이다.


특히 안 교수는 "'정조 독살설'은 당시 경상도 지역에서 잠시 대두된 소문에 근거한 이설(異說)일 뿐"이라며

"정조가 독살됐다면 '정치 10단'이라 할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몰랐을 리가 없는데

《한중록》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고 반박했다.

학술원은 《정조어찰첩》이 "여론 파악을 위해 정조가 심환지뿐 아니라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어용겸 등 벽파의 소장 신료들과도 편지를 나눈 사실이 보이며,

남인 인사들에게도 두루 편지를 보내며 다양한 각도에서 정국 관련 정보를 입수했다"고 평가했다.

여론 동향과 향배를 중시했던 정조의 ‘여론 정치’도 새삼 드러났다.

정조는 알려진 대로 정적이었던 심환지만 관리한 게 아니었다.

여론이 국왕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막후 정치의 극대화를 꾀했다.

진재교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는 “정조는 노론과 남인 등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치적 현안을 조정했다”고 설명했다.
노론 벽파로 알려진 김희순, 어용겸, 서용보 등과 관련한 정보도 주고받았다

“김희순((金羲淳)은 요사이 소식이 없으니 다시 독촉하도록 하라”(1800년 3월 3일),

“어용겸(魚用謙)에게 어찌하여 근래의 소식을 적어 보이지 않는지 엄히 신칙하라”(1797년 7월 17일),

“지금 서용보(徐龍輔)의 편지를 받아보니 심규로(沈奎魯)가 상소한다고 한다”(1800년 2월 9일) 등.

자신의 구상을 바탕으로 각 정파를 관리해 정국을 이끌어 간 정조의 모습은

청나라의 주접제도(奏摺制度)를 연상하게 한다.

주접제도는 청나라에서 지방관이 사적으로 황제와 주고받은 비밀 거래문서를 말한다.

어찰첩은 비밀편지를 통한 여론정치와 국정운영 방식, 조선의 편지문화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친필 원본 297건의 묶음은 그 자체로서도 보물급 이상 가는 문화재로 평가된다.

실록을 비롯한 공식 기록들과 대조하며 편지들의 맥락을 하나하나 검토하면

다양하고 흥미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09-05-18 보도자료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