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알아가며(자료)

나라를 담은 인장, 국새(國璽)

Gijuzzang Dream 2009. 5. 15. 00:42

 

 

  

 


 

 

 

국새의 기원과 전통

    

동아시아에서 제왕을 상징하는 인장은 주로 ‘새(璽)’와 ‘보(寶)’자를 썼다.

선진시대(先秦時代)에는 관 ·사인(官 · 私印)을 모두 ‘새璽’라 하였으나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하고 전국새(傳國璽)를 제작하면서 ‘새(璽)’는 천자만이 쓰고,

신하나 관리는 ‘인(印)’과 ‘장(章)’으로 구별한 뒤 ‘새(璽)’가 제왕인장의 대명사가 되었다.

 

예부터 제왕은 하늘의 명을 받아 임명된다고 여겼으므로

제왕의 인장을 ‘수명새(受命璽)’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진시황이 화씨벽(和氏璧)이라는 귀한 옥을 얻어

‘수명어천(受命於天) 기수영창(旣壽永昌)’ 여덟 글자를 새겨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지금도 국새를 ‘옥새(玉璽)’라 부르는 이유 또한

화씨벽으로 제작된 수명새의 전통이 면면히 전해진 결과로 여겨진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국새의 전통은 바로 진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당(唐) 측천무후가 ‘새(璽)’의 발음이 ‘사(死)’와 비슷하다는 점을 꼬집어

‘보(寶)’로 고치고 난 후 송(宋) · 원(元) 이래로 명(明) · 청대(淸代)까지

‘새(璽)’와 ‘보(寶)’가 제왕인장의 명칭으로 병용되었고,

두 글자를 합하여 ‘새보(璽寶)’ 혹은 ‘보새(寶璽)’ 등 합성어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국새는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삼국사기』에는 ‘신라 남해왕 16년(서기 19)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지인(濊王之印)을 주워 (임금께)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 인장은 실물이 전하지 않아 그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지만,

예맥(濊貊)으로부터 부여(夫餘)와 고구려가 갈려 나왔다고 한다면

적어도 문헌상에 보이는 우리민족의 국새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 후 고구려에서는 국새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이 보인다.
“차대왕(次大王)이 시해되자 좌보(左輔) 어지류(어支留)가 사람을 보내서

왕의 동생을 모셔 오게 하였다. 그가 오자 어지류는 꿇어 앉아 국새(國璽)를 바치며 말하기를,

 ‘선군(先君)이 불행히 돌아가셨습니다. 아들이 있으나 능히 국가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무릇 인심(人心)은 지인(至仁)에게 돌아가므로 삼가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니

청컨대 대위(大位)에 나가소서.’하였다.”


새로운 국왕을 맞이하기 위해 고구려 신하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국새를 올리는 일이었다는 사실은

국새의 전수를 통한 왕위선양의 전통이 이미 고구려로부터 있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고구려 국새의 존재와 선양(禪讓)의 상징체로서 용도를

문헌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종 황제어새 인면

 

고려의 국새
    
고려는 475년간 거란(契丹), 요(遼), 금(金), 원(元), 명(明)으로부터

책봉과 함께 인장을 받았다.

중원으로부터 인수한 국왕의 인장은 책봉(冊封)의 관계를 의미한다.

책봉은 한(漢) 이래 중원의 이민족 국가에 대한 지배방식의 하나로,

황제가 주변국가의 통치자에게 특정한 관작(官爵)과

이에 상응하는 물품을 주어

자격과 지위를 부여하고 공인하는 제도이다.

 

고려도 여러 번 교체된 중원의 국가들을 대국으로 대우하고,

이소사대(以小事大)라는 당시 동아시아의 외교관행을 따랐다.

 

사대와 책봉은 단순한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사회상 힘의 역학관계를 여실히 반영하였다.


고려국왕이 책봉과 함께 받은 인장은 국새(國璽)를 의미한다.

사료에는 인문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고려국왕’을 의미하는 문구였으리라 추측된다.

 

손잡이의 모양은 명종 때의 낙타, 공민왕 때의 거북이로 두 종류가 나타난다.

낙타모양 손잡이는 삼국시대 이전과 고구려의 책봉인(冊封印)에서 이미 나타나며,

고대로부터 중원을 중심으로 동북방 민족에게 반사된 손잡이의 형식이다.

거북이는 주로 신하의 도리를 상징하므로 사대와 책봉의 관계를

손잡이의 형상에 반영하였다고 풀이되며, 이러한 전통은 조선에까지 이어졌다.

 


조선의 국새


앞서 언급하였듯이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중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중원을 석권한 세력은 이 지역의 패권자로서 주변국과의 책봉관계를 통해

중국적 세계질서를 형성하였다. 주변국 또한 황제의 승인을 얻어야만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선진문물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정치적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황제가 주변국의 왕을 승인하는 징표는 임명장에 해당하는 고명(誥命)과 인장인 국새(國璽)이다.


조선시대의 국새는 대부분 명(明) · 청(淸)의 황제들에 의해 책봉과 동시에 사여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고려의 국새를 명나라에 반납하고 새로 내려주기를

여러 차례 요청하였으나 태조 당대에는 실현되지 않았다.

건국 이후 명으로부터 국새를 받기 이전 약 10년간

조선에서는 「조선왕보(朝鮮王寶)」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전근대에는 인장에 사용하는 글자에 엄격한 규정을 두어

제후국인 조선에서는 국새에 ‘새(璽)’나 ‘보(寶)’자를 사용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 명(明) · 청(淸)으로부터 받은 공식적 국새는

모두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으로 ‘인(印)’자를 사용하였고,

손잡이의 모양은 신하의 도리를 상징하는 거북이였다.

 

태조 때에 조선에서 자체 제작한 「조선왕보(朝鮮王寶)」는

명(明)과의 책봉관계 형성 이전에 나타난 하나의 특수한 사례에 해당한다.

이 국새는 고종 때에 다시 재현되었는데,

국새와 관련된 여러 물품들이 의궤(儀軌)에 상세하다.

국새와 이를 담는 보통(寶筒), 보통을 담아 이동하는 보록(寶록),

인주를 담는 호갑(護匣) 등 다양한 물품이 수반되었다.

 

고종 때에 재현한 조선왕보(朝鮮王寶)와 관련 물품.

<보인의궤>(보통寶筒, 호갑護匣, 보록寶록, 실인實印) 1876년 이후, 장소각소장.

 

 


조선에서 처음으로 국새를 받은 시점은

태종 때로 금으로 만든「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었다.

이 국새는 인조 때까지 주로 명나라와의 외교문서에 사용하였고,

청나라가 들어서기 이전 두 차례 더 인수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명나라에서 받은 국새는 총 3과이다.

 

 

태종 때에 명나라로부터 인수한 <조선국왕지인>의 인영.

<정전왕지(鄭悛王旨)> 1409년, 장서각 소장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나라에서 받은 국새를 사용하였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국가로, 그들의 문자인 만주문자를 사용하였다.

청나라로부터 처음 받은 국새는 만주문자가 새겨져 있고,

이후 한자와 만주문자를 병용한 국새를 받았다.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청나라에서도 총 3차례 국새를 인수하였으므로,

조선시대 명 · 청으로부터 받은 국새는 총 6과가 되는 셈이다.

 

 


대한제국의 국새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조선은 청나라와의 사대관계를 끝내면서

종전의 책봉에 의한 국새인수제도를 폐지하고, 이를 국내에서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1881년 고종은 일본에 통신사(通信使)가 가지고 가는 국서(國書)에 기존에 사용하던

「위정이덕(爲政以德)」보(寶) 대신에「대조선국보大(朝鮮國寶)」를 제작하여 쓰라는 명령을 내렸다.

 

갑오경장을 즈음하여 조선에서는

이 국새 외에도 「대조선국대군주보(大朝鮮國大君主寶)」(1882. 7. 1 제작),

「대군주보(大君主寶)」(1882. 7. 1 제작),

「대조선국주상지보(大朝鮮國主上之寶)」(1876. 12.15 제작)를 제작하여

외국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사용하였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직후

조선에서는 황제즉위를 요청하는 상소가 조야 각계로부터 쇄도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의 위압 하에 정해졌던 건양(建陽)이란 연호를 광무(光武)로 변경하고,

10월 초에는 마침내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곧이어 국명을 ‘대한(大韓)’으로 변경함으로써

505년간 지속된 조선왕조는 종언을 고하였고 대한제국이 수립되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황제의 나라에 걸맞은 새로운 인장을 제작하였다.

이때 제작한 국새와 어보는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시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3과), 「칙명지보(勅命之寶)」(2과), 「제고지보(制誥之寶)」,

「시명지보(施命之寶)」로 총 9과이다.

 

이 가운데 「대한국새」만이 외교문서에 사용하는 공식적 국새이고

다른 인장들은 모두 국내용 행정문서에 사용되는 어보에 해당한다.


이 외에도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비밀국새가 있다.

최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재미교포로부터 구입한 이 국새는

당시의 제작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유리필름에 실물의 모습과,

당시 고종이 서구열강에 보낸 친서에 찍혀진 사례가 다수 남아 있다.

풍전등화와 같은 대한제국의 운명 앞에서 공식적인 인장을 사용할 수 없었던 고종이

비밀리에 제작하여 사용한 국새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 성인근,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학자료조사실 전임연구원
- 사진,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 월간문화재사랑, 2009-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