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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과정곡(鄭瓜亭曲) - 정치적 희생양이 된 외척의 노래

Gijuzzang Dream 2009. 5. 13. 21:47

 

 

 

 

 

 

 

 정치적 희생양이 된 외척의 노래, 정과정곡(鄭瓜亭曲)


 

 

 

 

채웅석 (중세사 1분과)

 

 

 

 


   내 님믈 그리사(ㅿㆍ)와 우니다니
   山 졉동새 난 이슷하(ㅎㆍ)요이다
   아니시며 거츠르신 달(ㄷㆍㄹ)  아으
   殘月曉星이 아라시리이다
   넉시라도 님은 한대 (ㅎㆍㄴ)(ㄷㆎ)  녀져라 아으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過도 허믈도 千萬 업소이다
   말(ㅁㆍㄹ)힛마리신뎌
   살읏븐뎌 아으
   니미 나랄(ㄹㆍㄹ) 하(ㅎㆍ)마 니자(ㅈㆍ)시니잇가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악학궤범』 제5권)

 

 

이 작품은 고등학교 고전문학시간에 향가계 고려가요의 예로서 익혔던 정과정곡이다.

의종 때 정서(鄭敍)가 유배생활을 하면서 지은 것으로서

자신의 결백과 억울한 심정을 잘 담아내고 있으며,

이른바 후대에 충신이 임금을 그리워하면서 짓는 노래의 원류가 된다고 배웠다.

 

 


<사진> 부산 수영구 망미동 정과정유적지(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고려사』 악지의 기록에 따르면,

의종이 정서를 본관인 동래로 귀향형을 보내면서

“오늘 가게 된 것은 조정의 의론에 몰렸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소환하겠다.”라고 하였는데,

오래되어도 소환하지 않자 거문고를 타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정서(鄭敍)의 집안은 본관인 동래에서 향리를 맡아오다가 조부 때부터 중앙관료로 진출하였다.

정서(鄭敍)는 당시 최고 문벌가문의 하나이던 정안 임씨 임원후의 사위가 되었는데,

인종비 공예태후가 임원후의 딸이었다. 정서는  인종대에 내시에 속하여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의종대에 와서 왕의 이모부로서 외척이라 할 수 있는 그를 유배하게 만든

조정의 의론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의종은 마지못해 그를 처벌했던 것일까?

고려중기에 이자겸을 비롯한 외척들이 득세했다고 하는데, 그의 경우는 왜 불우하게 지냈을까?
 
의종대에는 모후 공예태후의 친인척들을 외척세력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고려중기에 외척은 왕의 후사를 보위하면서 위상을 강화하였지만,

의종대에는 오히려 왕으로부터 의심과 견제를 받았다.

원래 인종과 공예태후는 의종이 왕이 되기 전에 그의 능력을 의심하여

차자인 대녕후를 태자로 삼으려 했었다.

그 과정에서 외척세력은 애매한 입장에 있었으며, 의종은 모후에 대하여 원망을 품었다. 
 
왕위 계승이 순조롭지 못했던 의종은 즉위 후에 친위세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잠저시에 보좌했던 김존중과 유모의 남편인 환관(宦官) 정함(생몰년 미상)을 우대하면서

내시와 환관들을 육성하여 측근세력으로 키웠다.

그리고 금위군을 강화하려는 의도와 격구 등의 무예를 즐기는 취향에 따라

하급무인들이 측근세력에 포함되었다.

이렇게 왕의 측근세력이 구축되어가자,

인종대 후반 이후 김부식의 주도 아래 유교적 관료정치를 추구해던 관료들과의 사이에

마찰을 빚었다. 그렇지만 의종은 측근세력을 키우려는 의도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에 따라 의종대 전반기에 대간의 간쟁이 매우 격렬하게 벌어졌다.
 
의종 5년(1151)
 궁중에서 열린 연회에서 정함이 서대를 착용한 것을 본 어사대 관리가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뺏으면서 왕의 측근세력과 대간이 충돌하였다.

정함이 왕의 하사품이라고 불복하고 의종에게 호소하자 왕이 노하여

내시를 보내 어사대 관리를 체포하고 처벌하려 하였다.

대간들이 관련 내시들을 탄핵하였지만, 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대간들이 업무거부를 하는 사태를 빚었다.

그리고 이어 정함을 환관에게는 금지된 고위관직에 임명하려 하다가 거센 비판에 봉착하여

정함이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그렇게 되자 정함은 탈출구로 의종과 왕위계승 경쟁을 했던 대녕후를 역모로 고소하여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고 자신의 입지를 회복 강화하려고 하였다.

정함은 먼저 자신을 공격하는 대간들을 원망하여,

그들이 대녕후를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고 무고하였다.

 

그것이 여의치 않자 그는 다시 공예태후의 오빠인 임극정과 정서 등의 외척이

대녕후와 사적으로 교제하고 있다고 고발하였다.

이 고발에 왕이 몰래 돕고 대간들도 처벌에 동조하여 큰 옥사가 벌어졌다.

이 때 정서는 동래로 유배당하였다.

결국 이 사건의 고발과 처리과정에서 김존중, 정함 등 왕 측근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었다. 

다시 말하여 임극정ㆍ정서 등의 외척이 대녕후와 교제하였다는 빌미로

의종 측근세력에 의해 정치적 희생양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6년 뒤에 비슷한 상황이 또 연출되었는데, 무고라는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의종이 대녕후를 비롯한 아우들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간관들을 부추켜 탄핵하게 하였다. 그 결과 대녕후와 임극정ㆍ정서 등을 재차 처벌하여,

정서의 유배지를 고향 동래에서 거제도로 옮겼다. 
 
대녕후와 연결되었다고 의심 받은 외척들은 의종대 내내 억압받았다.

의종 15년(1161)에는 정서의 부인이 왕과 대신들을 저주한다는 무고사건이 일어나고,

21년(1167)에는 호위군사의 화살이 실수로 어가 옆에 떨어진 것을

왕이 대녕후와 연관된 자들의 소행인 아닌가 의심하여 옥사가 크게 벌어졌다.
 
 

정서가 정과정곡을 창작한 것은 동래에 귀향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소쩍새에 비유하여 억울한 한을 호소하는 내용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의종에게 그는 경계의 대상이 되어 충신과 거리가 멀었다.

 

조정의 의론 때문에 부득이하게 귀향시키는 것이니 머지않아 소환하겠다는 의종의 말은

그의 속내와는 전혀 달랐다. 정서 등은 무신정변이 일어나 의종이 쫓겨난 이후에야

사면 받아 조정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의종대 중기이후 측근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지만 대간활동을 무력화시키는 등

정치운영이 경색되었다.

개혁정치가 필요한 시기였지만 측근세력은 종교적 관념적 차원의 대응에 머무르고

왕을 신성화하여 왕을 보좌하는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려고 하였다.

그런 가운데 측근세력 내부에서 내료ㆍ문신과 무신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져서

급기야 정변으로 이어졌다.

 

의종은 정서가 유배가 있던 거제도로 쫓겨 갔다가, 김보당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자신이 측근으로 키웠던 이의민에 의해 경주에서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말았고,

그가 견제했던 또다른 아우 익양후가 추대받아 명종이 되었다.    

 

- 한국역사연구회, 2009-04-22   

 

 

 

 

 

 
 

 

 접동새’와 ‘소쩍새’ 

 

 

우리 문학을 공부하다보면 ‘접동새’와 ‘소쩍새’를 자주 만난다.

 

○ 내 님을 그리워하여 울며 지내니

    산 접동새와 난 비슷하여이다.(정서의 ‘정과정곡’)

○ 이화(梨花)난 발셔 디고, 졉동새 슬피 울제

    낙산동반(洛山東畔)으로 의상대(義湘臺)예 올라 안자(정철의 ‘관동별곡’)

○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김소월의 ‘접동새’)

○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 소쩍새들이 운다.

    소쩍 소쩍 솥이 작다고

    뒷산에서도 앞산에서도

    소쩍새들이 울고 있다.(장만영의 ‘소쩍새’)

 

위에서 보듯이 접동새는 우리 고전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새다.

<두시언해>에도 ‘접동새 오디 아니하고’나

최세진의 <훈몽자회>에도 ‘견(鵑)’을 ‘접동새 견’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접동새와 관련된 설화도 있다.

옛날 어느 부인이 아들 아홉과 딸 하나를 낳고 살았다.

그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의붓어미가 들어왔는데, 의붓어미는 아이들을 심하게 구박하였다.

큰누이가 나이가 들자 이웃 부잣집 도령과 혼인하여 많은 예물을 받게 되었다.

이를 시기한 의붓어미가 그녀를 친모가 쓰던 장롱에 가두었다가 불에 태워 죽였다.

동생들이 슬퍼하며 남은 재를 헤치자 거기서 접동새 한 마리가 날아올라 갔다.

죽은 누이의 화신인 것이다.

관가에서 이를 알고 의붓어미를 잡아다 불에 태워 죽였는데, 재 속에서 까마귀가 나왔다.

접동새는 동생들이 보고 싶었지만 까마귀가 무서워 밤에만 와서 울었다.

 

이 설화를 바탕으로 쓴 시가 김소월의 ‘접동새’이다.    

 

과거에는 '접동새'와 '소쩍새'를 동일한 동물로 생각했다.

그래서 한글학회 우리말 큰사전에는 '접동새'가 곧 '소쩍새'라고 설명을 했다.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에서도 '접동새'는 경남 지역에서 사용하는 '두견이'의 방언이고,

'소쩍새'가 곧 '두견'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는 '두견이'는 우리말로 '접동새'라고 하고

한자어로 '두우, 자규'라고 설명한다.

일부 국어사전에는 '소쩍새'라고도 되어 있는데 그 생김새가 다르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송순창의 ‘한반도조류도감’(김영사)에서는 소쩍새는 올빼미과 동물이고,

두견이는 두견이과 동물이라고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소쩍새의 북한 이름이 '접동새'라는 설명을 했다.

 

현재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접동새는 두견의 경남 지역 방언으로 처리하고 있다.

 

사전에서 '두견'을 검색하면

 

1. ‘동물’ 두견과의 새. 편 날개의 길이는 15~17cm, 꽁지는 12~15cm, 부리는 2cm 정도이다.

등은 회갈색이고 배는 어두운 푸른빛이 나는 흰색에 검은 가로줄 무늬가 있다.

여름새로 스스로 집을 짓지 않고 휘파람새의 둥지에 알을 낳아, 휘파람새가 새끼를 키우게 한다.

한국, 일본, 말레이시아 등지에 분포한다.

≒귀촉도ㆍ두견새ㆍ두견이ㆍ두백(杜魄)ㆍ두우(杜宇)ㆍ불여귀ㆍ사귀조(思歸鳥)ㆍ시조(時鳥)

 

2. 자규(子規)ㆍ주각제금ㆍ주연(周燕)ㆍ촉백(蜀魄)ㆍ촉조(蜀鳥)ㆍ촉혼(蜀魂)ㆍ촉혼조.

옛날 중국 촉나라의 망제가 쫓겨나 촉나라를 그리다가 죽은 넋이 귀촉도 새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이 새는 망제혼, 불여귀, 자규 등 많은 이칭이 있다.

현실적으로 이 표현은 두견이의 다른 이름으로 인정하고 있다.

 

 

반면 소쩍새는 다른 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소쩍새’를 올빼밋과의 여름새로

등은 어두운 회색이고 온몸에 갈색 줄무늬가 있으며 귀깃을 가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낮에는 나뭇가지가 무성한 곳에서 자고 밤에 활동하여 벌레를 잡아먹는다.

‘소쩍소쩍’ 또는 ‘소쩍다 소쩍다’하고 우는데,

민간에서는 이 울음소리로 그해의 흉년과 풍년을 점치기도 한다.

조금 높은 산지의 침엽수림에 사는데 한국, 일본,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에 분포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보나, 실용적으로 보나 우리는 접동새가 익숙하다.

접동새는 전통적으로 써오던 표현이다. 그런데 이 표현을 표준어에서 제외했다는 것이 아쉽다.

사전에서 두견(이)라는 한자어로 쓰는 것이 바르다고 하고 있으나,

이렇게 쓰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더 아쉬울 뿐이다.

- 2009-04-14, 해피수원뉴스, 윤재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