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욕의 역사는 또 반복된다
실체 드러나는 ‘노무현 게이트’, 연산군-유자광과 닮은꼴
1000여 년 전 고려 성종대에 활약한 문하시중 최승로(崔承老 · 927~989)가 국왕에 올린 ‘시무책’ 28조 중 제14조는 이상적인 제왕상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하루하루를 삼가여 스스로 교만하지 말고 아랫사람을 접할 때 공손함을 생각하소서 (願聖上日愼一日 不自驕滿 接下思恭).”
그로부터 500년 후 연산군은 조선 성종(成宗)의 원자로 태어나 세자가 되고 18세에 보위에 올랐으나 스스로 제왕의 모습을 저버려 재위 12년 만인 연산군 12년(1506) 9월2일 폐위되고, 진성대군이 신왕으로 즉위하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났다.
패악과 방탕으로 쫓겨난 뒤 역병으로 삶 마감
그날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연산군일기’ 제63권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금상(今上 · 중종)이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왕(연산군)을 폐하여 교동현(喬桐縣)으로 옮겼다. 처음에 왕의 어머니 폐비 윤씨가 성질이 모질고 질투함으로 성종이 할 수 없이 종묘에 아뢰고 왕비를 폐하였다. 왕은 그때 아직 강보에 있었는데… 적장(嫡長)이기 때문에 왕세자로 세웠다. …세자를 폐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으나 불쌍히 여겨 차마 못하였다. 성종이 승하하자 왕은 상중에 있으면서도 서러워하는 빛이 없으며 후원의 순록을 쏘아 죽여 그 고기를 먹으며… 임술 · 계해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장녹수(張綠水)에게 빠져 방탕이 심해지고 또한 광포한 짓이 많음으로… 조종의 옛 제도를 모두 고쳐 혼란케 하였는데 먼저 홍문관, 사간원을 혁파하고… 날마다 연회를 베풀되 때로는 밤중에 달려가 연회를 베풀기도 하고… 왕은 스스로 자신의 소행이 부도(不道)함을 알고 내심 부끄러워하며 인도(人道)를 혼란시켜 자기와 같이 만들려고 하여… 이윽고 무인일(9월1일) 저녁에 모두 훈련원에 모여… 주상이 크게 군도(君道)를 잃어 종묘를 맡을 수 없고 천명과 인심이 이미 진성대군에게 돌아갔으므로… 교동으로 폐천(廢遷)되어 가서 울타리 안에 거처하게 되자 백성이 왕을 뒤쫓아 원망하며 이가(俚歌 · 속요)를 지어 부르기를,
충성이란 사모요(忠誠是詐謀)
하였으니 대개 사모(紗帽)와 사모(詐謀), 거동(擧動)과 교동(喬桐)은 음이 서로 가깝고, 방언에 각시(婦)와 가시(荊棘)는 말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뜻을 빌려 노래한 것이다.”
연산군은 그해 11월 서른의 나이로 교동에서 역병(疫病)으로 죽었는데,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 묘호와 능호 없이 왕자 신분으로 기록됐고, 실록도 ‘연산군일기’로 강등됐으며, 능도 ‘연산군지묘’로 남아 있다. 황음무도(荒淫無道)한 혼군(昏君)이자 폭군(暴君)인 연산군 시기에 국왕의 패악과 방탕에 빌붙어 산 유자광(柳子光 · ?~1512)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 당시가 얼마나 황음의 세월이었는지를 살펴보자.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 역사학 - 주간동아, 2009.05.19 686호(p74~75), [이영철 교수의 5분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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