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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추진한 물소 수입 프로젝트

Gijuzzang Dream 2009. 4. 13. 22:28

 

 

 

 

 

 세종이 추진한 물소 수입 프로젝트 

 지옥에서 온 악마, 조선 물소의 흥망성쇠

 

 

 

2008년 4월 18일 미국 대통령의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 이명박 대통령이 도착했다.

이 대통령의 취임 후 첫 한미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서였다.
국가 정상 간의 만남에서는 으레 선물이 오가기 마련이다.

정상회담 바로 전날 열린 만찬에서 이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에게 준 선물은

우리나라의 전통 활인 ‘각궁’이었다.

각궁은 대나무와 참나무, 뽕나무, 벚나무 껍질을 비롯해

물소 뿔, 소 힘줄, 민어 부레, 쇠가죽 등의 8가지 자연재료로 만드는 활이다.

요즘 국제 경기에서 사용하는 양궁보다 사거리가 2배 이상 될 만큼 성능이 우수하다.

또 재료를 다듬고 말리는 데만 6개월의 기간이 소요되며,

제조 과정에서 3천 번 이상의 손질이 갈 만큼 정교한 활이다.

각궁은 제조과정에서 3천 번 이상의 손질이 갈 만큼 정교한 활이다 


지금은 한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에게 선물할 정도로 각궁은 자랑스런 우리의 옛 물품이지만,

옛 선조들에게는 한 많은 사연이 담겨 있는 절절한 물품이기도 했다.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우리 민족을 ‘동이족’이라 일컬었다.

동이족의 ‘이(夷)’는 큰 대(大)자와 활 궁(弓)자의 합성 문자로서,

우리 조상들이 그만큼 활쏘기와 활 만들기에 능했다는 증거이다.
나무로 만든 목궁이나 대나무로 만든 죽궁보다 단단하고 탄력이 좋은 뿔을 활에다 덧대면

성능이 훨씬 좋아진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각궁이다.

 


군사 전략 물품, 수입 쉽지 않아

짐승의 뿔 중에서 활 재료로 가장 적합한 것은 물소 뿔이다.

물소 뿔은 한 개의 길이가 2m나 되므로 줌통에서 도고지까지 뿔로 붙이는 장궁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물소는 아열대 및 열대지방에서만 서식하므로 우리나라에서는 각궁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삼국시대만 해도 한우의 쇠뿔을 이용한 향각궁을 주로 만들었다.

한우 뿔은 짧아서 3개의 뿔을 덧대야 했고, 또 줌통에서 삼삼이 근처까지만 뿔을 붙일 수 있다.

삼삼이에서 도고지까지는 뽕나무로 이어 붙였다.

그런데 한우 중에서도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만주 지방의 쇠뿔은 길이가 훨씬 길었다.

따라서 화살을 쏘아 날리는 힘도 그만큼 좋았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의 군사력이 강성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고구려벽화 수렵도에 각궁으로

사냥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우리 선조들이 성능 좋은 각궁을 만들기 위해서는 중국에서 물소 뿔을 수입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런데 수입하는 데는 제약이 따랐다.

중국도 물소 뿔이 군사 전략상 주요 물품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거래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무역 거래에 의존하기에는 물량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조선시대 들어서 이에 대해 해결책을 내놓은 이가 바로 세종대왕이었다.

1428년(세종 10) 세종은 “활을 만드는 데 수우각(水牛角)만한 것이 없다”며 명나라에서 아예 물소를 들여와 우리나라에서 기르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물소는 털이 매우 적고 또한 짧아서 우리나라의 겨울 추위를 견디기 어렵다는 점을

세종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겨울에도 추위가 덜한 전라도 지방에서 우리를 지어 잘 기른다면

사육에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방안을 내놓은 것이다.

그 후로 세종은 틈날 때마다 명나라 황제에게 물소 구매에 대한 청을 올렸는데,

세종이 그처럼 자신 있게 밀어붙인 데는 나름대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때 낙타를 교역하고 싶다고 중국에 청한 적이 있었는데,

중국 황제가 그 값을 받지 않고 낙타 30필을 하사한 적이 있다는 사례를 세종은 주목하고 있었다.

 


'토목의 변'으로 물소 뿔 거래 금지

하지만 명나라의 반응은 세종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중국 조정의 예부를 통하기도 하고 황제에게 직접 주청하기도 했으나,

중국은 가타부타 말없이 그냥 침묵으로만 일관했다.

군사 전략물자인 물소가 낙타와 전혀 다르다는 점을 세종은 간과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설상가상으로 물소 뿔의 수입이 완전히 막혀버리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1449년(세종 31) 명나라의 영종 황제가 하북성 토목에서 몽고의 오이라트 족과 전투를 벌이다

대패하여 포로로 잡히고 만 것이다. 이것이 바로 ‘토목의 변’이라 불리는 사건인데,

그 이후 중국은 군사전략상 물소 뿔의 거래를 아예 금지시켜 버렸다.

물소 뿔은 길이가 2m나 되는데다

단단하고 탄력이 좋아

활 재료로 최적이다 

 

그러자 1450년 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종은 중국에서 온 사신에게 암수 물소 20두를 섬에 놓아길러서 활 제조에 사용하고 싶으니 황제에게 말해달라는 부탁까지 하게 된다.

조선의 물소 사육에 대한 이런 소망은 중국이 아니라 뜻밖에도 일본에 의해 이루어졌다.

 

1461년(세조 7) 평소 조선과 친근하여 사신 및 조공을 보내오던 백제 계통의 일본 호족인 대내전에서 암수 물소 두 마리를 바쳤다.

이 물소는 유구국(琉球國 ; 15~19세기 오키나와 등의 류큐 제도에 있었던 류큐왕국)의 것으로서, 대내전이 4마리를 수입해 그 중 2마리를 조선에 바친 것이다.

그 후 일본 대내전은 번식을 시키지 못해 물소의 종자가 끊어졌지만,

조선에 온 물소는 칙사 대우를 받으며 번식에 성공했다.

세조는 물소를 기후가 따뜻한 경상도 웅천(지금의 진해 일대)에서 기르게 하다가,

이듬해에는 창덕궁 후원에 데려와

사복시(조선시대 궁중의 가마 및 말ㆍ소들을 관리하던 관청) 관원들로 하여금

사육법과 질병 치료법 등을 익히도록 한 후 보살피게 했다.

그 물소 2마리가 새끼에 새끼를 낳아 번식해

성종 때는 조선에서 기르는 물소의 수가 약 70마리에 이르게 되었다.

 

물소가 어느 정도 많아지자 성종은 자신의 즉위에 찬조한 공신들에게 물소를 나누어주기까지 했다. 1488년(성종 19) 6월 4일자의 성종실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심회, 윤필상, 홍응, 이극배, 노사신, 윤호, 이철견, 한치례에게

물소 암수 각각 1두씩을 내려주고 잘 기르라고 하였다.”

그런데 물소가 많아지면서 그에 따른 말썽도 생겼다.

물소가 사람을 그 기다란 뿔로 들이받아서 상해를 입힌 사건이 생긴 것이다.

 

1493년(성종 24) 8월 20일 성종실록에는 그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물소는 가축화되어

농경용과 사역용으로 길러져 왔다 

“지금 수원과 남양에 물소를 기르는데 사람을 받아서 상해하였다고 한다. 이는 소가 성질이 사나워서 그러한 것일 뿐만 아니라 지키는 자가 상시로 마음을 더하여 길들이지 아니하고, 혹은 들판에 놓아두어서 들짐승과 다름이 없게 되어 사람을 꺼리게 한 때문이다. 사람을 상해하는 물소를 죽여서 번식하지 못하게 하면 이것이 어찌 옳겠는가? 이 뒤로는 지키는 자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훈련시켜 길들이게 하는 것이 가하다.”

초식동물인 소는 원래 유순한 성미로서, 사람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소는 오랫동안 사람의 손에 의해 가축화된 동물이다.

물소 역시 동남아시아에서는 오래전부터 가축화되어 논밭을 가는 농경용과 무거운 짐을 나르는 사역용으로 길러져 왔다. 지금도 인도나 파키스탄 등지에서는

물소가 짐수레를 끌고 도로를 어슬렁거리며 지나가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 소가 사납게 돌변해 뿔로 사람을 들이받아서 상해를 입혔다니 정말 어이가 없을 만했다.

더구나 임금에게까지 보고되었으니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프리카의 5대 맹수 중 하나로 꼽혀

하지만 이는 물소의 원래 성미를 알고 있었다면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었던 일이다.

물소는 초식동물 중에서 가장 위험한 맹수로 손꼽힌다.

아프리카 사냥꾼들은 사람을 해치는 가장 위험한 맹수 5가지에

사자, 표범, 코끼리, 코뿔소와 물소를 포함시킨다.

특히 물소는 달려드는 속도가 코뿔소나 코끼리보다 훨씬 빨라 ‘지옥에서 온 악마’라고 불릴 정도이다.

때문에 백수의 제왕으로 불리는 사자도 물소에게는 함부로 덤벼들지 못한다.

아프리카 케냐의 세렝게티 초원에서는 물소 사냥에 나섰다가

오히려 물소의 무지막지한 뿔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사자도 흔히 목격된다.

인도의 동북끝 히말라야 산맥 기슭의 오지 마을에서는 물소의 이 같은 사나운 성질을 이용해

마을을 지키는 보초로 활용하기도 한다.

사나운 야생 물소를 먹이로 유인한 뒤 마을 입구의 나무에 묶어 놓으면

밤중에 가끔 마을을 습격하는 호랑이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래 이처럼 사나운 성미를 지닌 물소를

조선에서는 길들이지 않고 들판에 놓아서 들짐승과 다름없이 길렀으니

그야말로 야생 물소처럼 사납게 변해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아침저녁으로 물소를 훈련시켜 길들이라는 성종의 지시는

 사건의 본질을 꽤 정확하게 꿰뚫은 처방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성종은 ‘토목의 변’ 이후 거래금지 품목으로 지정된 물소 뿔을 확보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을 통해 물소 2마리를 들여와 번식에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각궁의 재료로 활용하기에는 물소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물소는 사납고 힘이 좋아

사자도 함부로 덤벼들지 못한다 

더구나 물소와 소는 친척 간이라도 해도 교잡종이 나오지 않으므로 번식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조선은 중국 몰래 물소 뿔의 밀수를 시도하기까지 했다. 1477년(성종 8)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간 조선인 역관이 물소 뿔을 몰래 구입했다가 발각되어 입수한 물량을 모두 몰수당하고 관련자들은 구속이 되고 말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 조정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으며, 그해 8월에 물소 뿔 거래금지 해제를 요청하는 사절을 중국에 파견했다. 그리하여 다음해인 1478년(성종 9) 1월부터 다시 물소 뿔의 교역을 허락받아 연간 50부의 물소 뿔을 들여올 수 있었다.

하지만 1년에 50부의 물량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여진족과 왜구 등이 침략해올 경우

조선군은 창검보다 활을 이용해 그들을 물리치는 전략을 구사했다.

따라서 성종은 1480년(성종 11) 12월 상당부원군 한명회를 정사로 하는 사신단을 다시 중국에 보내

물소 뿔을 수매할 수 있는 양을 늘려달라고 청원한다.

다음해 4월 한명회는

종전의 3배에 해당하는 수량인 물소 뿔 연간 150부 교역이라는 성과를 안고 귀국했다.

그러나 ‘토목의 변’ 이후 거래금지 품목으로 지정된 물소 뿔 교역을

중국 황제로부터 이처럼 순순히 이끌어낸 숨은 공신은 정작 따로 있었다.



나라에 이익이 없고 백성에 해만 될 뿐

당시 중국 황제의 마음을 움직인 이는 중국에서 태감이 되어 관직이 1품에 이른 윤봉이란 자였다.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그는 황해도 서흥 출신으로서,

일찍이 조선에서 차출되어 중국으로 간 환관이었다.
그 후 명나라 사신으로서 조선에 자주 왔던 윤봉은

자신의 형제 10여 명에게 벼슬을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뇌물을 주지 않는다고 소동을 부리는 등 중국출신 환관보다 조선을 더 괴롭힌 장본인이다.

그렇지만 그는 조선에서 받은 만큼 명나라에 대한 로비스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성종 때의 물소 뿔에 대한 거래금지 해제와 교역량 증대 건은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조선의 임금들은 물소 뿔의 확보를 위해 노력해 왔는데,

성종 이후 그 같은 분위기는 이상한 방향으로 반전되어 버린다.

 

맨 처음 그런 조짐을 보인 것은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연산군 때였다.

임진왜란 이후 각궁은 위력을 잃고

점차 사라져 갔다 

1497년(연산군 3) 6월 연산군은 각도 감사에게 글을 내려 “우리나라에서 물소를 많이 기르는데 밭갈이에 익숙하지 못하니 실용에 도움될 것 같지 않다. 각 고을에서 농구를 갖추어 갈기를 익혀 보게 하여, 밭갈이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 아뢰라”고 했다.

중종 때인 1509년(중종 4) 5월에는 급기야 대사간 최숙생 등이 각관에서 기르는 물소는 나라에 이익이 없고 백성에게 해만 있으니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후 물소는 섬으로 추방된 듯하다.

그해 7월 20일 병조 겸판서 유순정 등이 조정에 나가 아뢴 내용을 보면 “섬으로 추방된 물소들이 필시 주리고 얼어서 모두 죽었을 것”이라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농경용으로 이용하게 하자고 되어 있다.

그 후로도 계속 병조 등에서 물소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기르게 하자거나

섬에 방목하며 추워서 죽는 물소가 많으니 좋지 않다는 말을 아뢴 것을 볼 때

중중은 세종이나 세조, 성종처럼 물소를 그리 귀하게 여긴 것 같지는 않다.

중종 이후 물소의 직접 사육을 포기한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총이란 새로운 무기의 위력을 접한 뒤부터

각궁에 대해서 그리 집착하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 2009년 04월 09일 / 04월 17일[이야기과학실록]

- 이성규 기자,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