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추진한 물소 수입 프로젝트
지옥에서 온 악마, 조선 물소의 흥망성쇠
2008년 4월 18일 미국 대통령의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 이명박 대통령이 도착했다. 이 대통령의 취임 후 첫 한미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서였다. 정상회담 바로 전날 열린 만찬에서 이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에게 준 선물은 우리나라의 전통 활인 ‘각궁’이었다. 물소 뿔, 소 힘줄, 민어 부레, 쇠가죽 등의 8가지 자연재료로 만드는 활이다. 요즘 국제 경기에서 사용하는 양궁보다 사거리가 2배 이상 될 만큼 성능이 우수하다. 또 재료를 다듬고 말리는 데만 6개월의 기간이 소요되며, 제조 과정에서 3천 번 이상의 손질이 갈 만큼 정교한 활이다.
옛 선조들에게는 한 많은 사연이 담겨 있는 절절한 물품이기도 했다.
동이족의 ‘이(夷)’는 큰 대(大)자와 활 궁(弓)자의 합성 문자로서, 우리 조상들이 그만큼 활쏘기와 활 만들기에 능했다는 증거이다. 성능이 훨씬 좋아진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각궁이다.
물소 뿔은 한 개의 길이가 2m나 되므로 줌통에서 도고지까지 뿔로 붙이는 장궁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물소는 아열대 및 열대지방에서만 서식하므로 우리나라에서는 각궁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한우 뿔은 짧아서 3개의 뿔을 덧대야 했고, 또 줌통에서 삼삼이 근처까지만 뿔을 붙일 수 있다. 삼삼이에서 도고지까지는 뽕나무로 이어 붙였다. 따라서 화살을 쏘아 날리는 힘도 그만큼 좋았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의 군사력이 강성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우리 선조들이 성능 좋은 각궁을 만들기 위해서는 중국에서 물소 뿔을 수입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런데 수입하는 데는 제약이 따랐다. 중국도 물소 뿔이 군사 전략상 주요 물품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거래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무역 거래에 의존하기에는 물량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1428년(세종 10) 세종은 “활을 만드는 데 수우각(水牛角)만한 것이 없다”며 명나라에서 아예 물소를 들여와 우리나라에서 기르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세종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겨울에도 추위가 덜한 전라도 지방에서 우리를 지어 잘 기른다면 사육에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방안을 내놓은 것이다. 세종이 그처럼 자신 있게 밀어붙인 데는 나름대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때 낙타를 교역하고 싶다고 중국에 청한 적이 있었는데, 중국 황제가 그 값을 받지 않고 낙타 30필을 하사한 적이 있다는 사례를 세종은 주목하고 있었다.
중국 조정의 예부를 통하기도 하고 황제에게 직접 주청하기도 했으나, 중국은 가타부타 말없이 그냥 침묵으로만 일관했다. 군사 전략물자인 물소가 낙타와 전혀 다르다는 점을 세종은 간과했던 것이다. 1449년(세종 31) 명나라의 영종 황제가 하북성 토목에서 몽고의 오이라트 족과 전투를 벌이다 대패하여 포로로 잡히고 만 것이다. 이것이 바로 ‘토목의 변’이라 불리는 사건인데, 그 이후 중국은 군사전략상 물소 뿔의 거래를 아예 금지시켜 버렸다.
그러자 1450년 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종은 중국에서 온 사신에게 암수 물소 20두를 섬에 놓아길러서 활 제조에 사용하고 싶으니 황제에게 말해달라는 부탁까지 하게 된다.
1461년(세조 7) 평소 조선과 친근하여 사신 및 조공을 보내오던 백제 계통의 일본 호족인 대내전에서 암수 물소 두 마리를 바쳤다. 그 후 일본 대내전은 번식을 시키지 못해 물소의 종자가 끊어졌지만, 조선에 온 물소는 칙사 대우를 받으며 번식에 성공했다. 이듬해에는 창덕궁 후원에 데려와 사복시(조선시대 궁중의 가마 및 말ㆍ소들을 관리하던 관청) 관원들로 하여금 사육법과 질병 치료법 등을 익히도록 한 후 보살피게 했다. 성종 때는 조선에서 기르는 물소의 수가 약 70마리에 이르게 되었다.
물소가 어느 정도 많아지자 성종은 자신의 즉위에 찬조한 공신들에게 물소를 나누어주기까지 했다. 1488년(성종 19) 6월 4일자의 성종실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물소 암수 각각 1두씩을 내려주고 잘 기르라고 하였다.” 물소가 사람을 그 기다란 뿔로 들이받아서 상해를 입힌 사건이 생긴 것이다.
1493년(성종 24) 8월 20일 성종실록에는 그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다.
“지금 수원과 남양에 물소를 기르는데 사람을 받아서 상해하였다고 한다. 이는 소가 성질이 사나워서 그러한 것일 뿐만 아니라 지키는 자가 상시로 마음을 더하여 길들이지 아니하고, 혹은 들판에 놓아두어서 들짐승과 다름이 없게 되어 사람을 꺼리게 한 때문이다. 사람을 상해하는 물소를 죽여서 번식하지 못하게 하면 이것이 어찌 옳겠는가? 이 뒤로는 지키는 자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훈련시켜 길들이게 하는 것이 가하다.” 물소 역시 동남아시아에서는 오래전부터 가축화되어 논밭을 가는 농경용과 무거운 짐을 나르는 사역용으로 길러져 왔다. 지금도 인도나 파키스탄 등지에서는 물소가 짐수레를 끌고 도로를 어슬렁거리며 지나가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더구나 임금에게까지 보고되었으니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물소는 초식동물 중에서 가장 위험한 맹수로 손꼽힌다. 아프리카 사냥꾼들은 사람을 해치는 가장 위험한 맹수 5가지에 사자, 표범, 코끼리, 코뿔소와 물소를 포함시킨다. 때문에 백수의 제왕으로 불리는 사자도 물소에게는 함부로 덤벼들지 못한다. 아프리카 케냐의 세렝게티 초원에서는 물소 사냥에 나섰다가 오히려 물소의 무지막지한 뿔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사자도 흔히 목격된다. 마을을 지키는 보초로 활용하기도 한다. 사나운 야생 물소를 먹이로 유인한 뒤 마을 입구의 나무에 묶어 놓으면 밤중에 가끔 마을을 습격하는 호랑이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길들이지 않고 들판에 놓아서 들짐승과 다름없이 길렀으니 그야말로 야생 물소처럼 사납게 변해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아침저녁으로 물소를 훈련시켜 길들이라는 성종의 지시는 사건의 본질을 꽤 정확하게 꿰뚫은 처방이라 할 수 있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을 통해 물소 2마리를 들여와 번식에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각궁의 재료로 활용하기에는 물소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물소와 소는 친척 간이라도 해도 교잡종이 나오지 않으므로 번식에는 한계가 있었다. 조선군은 창검보다 활을 이용해 그들을 물리치는 전략을 구사했다. 따라서 성종은 1480년(성종 11) 12월 상당부원군 한명회를 정사로 하는 사신단을 다시 중국에 보내 물소 뿔을 수매할 수 있는 양을 늘려달라고 청원한다. 종전의 3배에 해당하는 수량인 물소 뿔 연간 150부 교역이라는 성과를 안고 귀국했다. 그러나 ‘토목의 변’ 이후 거래금지 품목으로 지정된 물소 뿔 교역을 중국 황제로부터 이처럼 순순히 이끌어낸 숨은 공신은 정작 따로 있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그는 황해도 서흥 출신으로서, 일찍이 조선에서 차출되어 중국으로 간 환관이었다. 자신의 형제 10여 명에게 벼슬을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뇌물을 주지 않는다고 소동을 부리는 등 중국출신 환관보다 조선을 더 괴롭힌 장본인이다. 성종 때의 물소 뿔에 대한 거래금지 해제와 교역량 증대 건은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성종 이후 그 같은 분위기는 이상한 방향으로 반전되어 버린다.
맨 처음 그런 조짐을 보인 것은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연산군 때였다.
1497년(연산군 3) 6월 연산군은 각도 감사에게 글을 내려 “우리나라에서 물소를 많이 기르는데 밭갈이에 익숙하지 못하니 실용에 도움될 것 같지 않다. 각 고을에서 농구를 갖추어 갈기를 익혀 보게 하여, 밭갈이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 아뢰라”고 했다. 그 후 물소는 섬으로 추방된 듯하다. 섬에 방목하며 추워서 죽는 물소가 많으니 좋지 않다는 말을 아뢴 것을 볼 때 중중은 세종이나 세조, 성종처럼 물소를 그리 귀하게 여긴 것 같지는 않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총이란 새로운 무기의 위력을 접한 뒤부터 각궁에 대해서 그리 집착하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 2009년 04월 09일 / 04월 17일[이야기과학실록] - 이성규 기자,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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