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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 남계서원(濫溪書院)

Gijuzzang Dream 2009. 4. 12. 18:12

 

 

 

 

 

 함양 남계서원(濫溪書院)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09.04.06(월) 경남 함양군 소재 경남 유형문화재 제 91호인

“함양남계서원(濫溪書院)”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예고 하였다.

함양 남계서원은

조선시대 5현1) 및 동국 18현2)중의 한 분인 일두 정여창(鄭汝昌)을 추모하기 위하여

명종 7년(1552)에 건립, 1566년에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사액을 받은 유서 깊은 서원이며,

1868년과 1871년에 서원 훼철령이 내렸을 적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하였던

47개 원사(院祠) 가운데 경남지역 유일의 서원이다.

서원에는 왕이 하사한 『어정오경백편 (御定五經百篇)』5권, 『경서정문(經書正文)』4권을 비롯하여

다수의 고서들이 온전하게 전수되고 있어

우리의 전통 제례양식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 자료가 되고 있다.

서원의 건축구성은

조선시대 서원의 특징과 같은 전저후고(前低後高) 지형에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양식3)을 따르고,

제향공간에는 사당, 동무4)(東廡, 성현을 배향하는 공간), 내삼문(內三門)5)이 있다.

강학공간에는 강당, 동 · 서재(東 · 西齋, 유생들의 생활공간), 장판각(藏板閣), 풍영루(風詠樓),

비각(碑閣)이 있고, 동재와 서재 남쪽에 각각의 방형연지(方形蓮池) 2개소를 조성하는 등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어 서원 건축양식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번에 지정 예고하는“함양남계서원”은
30일간의 예고와 주민의견 수렴 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 등

지정절차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하게 된다.



≪지정고시 개요≫
ㅇ 사적명칭 : 함양남계서원(咸陽濫溪書院)
ㅇ 지정종별 :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ㅇ 소  재 지 : 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1번지 일원
ㅇ 지정면적 : 5필지 4,810㎡
ㅇ 관리단체 : 경남 함양군(함양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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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김굉필 · 정여창 · 조광조 · 이언적 · 이황
주 2) 설총 · 안향 · 김굉필 · 조광조 · 이황 · 이이 · 김장생 · 김집 · 송준길 · 최치원 · 정몽주 · 정여창 ·

         이언적 · 김인후 · 성혼 · 조헌 · 송시열 · 박세채
주 3) 앞쪽 낮은 곳에는 공부하는 강학공간을 두고 뒤쪽 높은 곳에는 사당을 둠
주 4) 조선시대, 문묘 안 동쪽에 있던 행각, 여러 유현(儒賢)의 위패를 서무와 나눠 모셨다.
주 5) 종묘 · 문묘 · 향교 · 서원 등의 출입문 중 안쪽에 세 칸으로 세운 문.

         경내에 들어가서도 다시 신전으로 들어가는 문을 따로 설치한 것


- 담당자 : 사적과 곽수철, 김영범
- 전화번호 : 042-481-4841~4842
- 2009-04-07, 문화재청

 

 


함양남계서원 전경

 

풍영루

비각, 동재, 서재,강당

 

사당

 

서원 내부전경


소 재 : 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1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남계서원(濫溪書院)은

일두 정여창(1450-150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조선 명종 7년(1552)에 지었다.

강익의 주동으로 유림과 군수 윤확(尹確)이 세웠다.

 

일두 정여창을 받들고 있는 서원은 전국적으로 9개소에 이르는데

그 주된 서원은 남계서원이며, 종산서원(鍾山書院, 함북), 영계(永溪書院, 하동),

용문서원(龍門書院, 안의), 도산서원(道山書院, 거창), 인산서원(仁山書院, 아산),

이연서원(伊淵書院, 합천 야로), 경현서원(景賢書院, 나주), 도남서원(道南書院, 상주) 등이 있다.

 

명종 21년(1566) ‘남계(濫溪書院)’ 사액을 내려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6년(1603) 나촌으로 옮겨지었다가

광해군 4년(1612) 옛 터인 지금 위치에 다시 지었다.

1634년(인조 12) 따로 사당을 짓고(별사, 別祠) 개암(介庵) 강익(姜翼, 1523-1567)을 제향하고

1642년(인조 20) 유호인(兪好仁, 1445-1494)과 정온(鄭蘊, 1324-1402)을 병향하였으며,

1677년(숙종 3) 정온을 본사당(本祠堂)에,

1689년(숙종 15) 강익을 본사당에 올려 배향하였다.

1820년(순조 20) 정홍서(鄭弘緖, 1571-1648)를 유호인과 함께 별사에 모셨는데,

고종 5년(1868) 별사는 훼철되었다.

 

사우(祠宇)에는 정여창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정온과 강익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매년 2월 중정(中丁)과 8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남계서원(濫溪書院)은

서원 입구에 홍살문과, 하마비, 누문인 풍영루(風詠樓),

명성당(明誠堂)은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영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왼쪽은 거경재(居敬齋), 오른쪽은 집의재(集義齋)로 유림 회합 및 학문의 강론장소 등으로 사용되어 왔다.

동재인 양정재(養正齋), 서재인 보인재(輔仁齋)에는 각각 연못과 애련헌(愛蓮軒), 영매헌(詠梅軒)이 있다.

그리고 장판각(藏板閣)까지 강학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내삼문과 사당(祠堂)을 두어 제향공간을 이룬다.

기타 고직사(庫直舍)는 전사청과 묘정비각 등이 강당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강익의 ‘남계서원기(濫溪書院記)’에 의하면,

사우와 강당 및 동서재와 앞문간까지 총 30여 간이나 된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하였다는 것으로서 여러 군자가 그 전발을 기록하고 그 제사에 이름하기를 청한다.

사양하다 못해서 삼가 서원을 세워 뜻을 기록하고 드디어 강당을 명성(明誠)이라 이름했는데,

중용에서 ‘밝히면 성실하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왼쪽 좁은 방은 ‘거경(居敬)’, 오른쪽은 ‘집의(集義)’라 했음은

정자가훈(程子家訓)에 <경(敬)에 거(居)해서 이(理)를 궁구한다>는 것과

추경(鄒經)에  <의(義)를 모아 산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재사의 동쪽방을 ‘양정(養正)’이라 함은 역경(易經)에 <산업을 바르게 기른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서쪽방을 '보인(輔仁)'이라 함은 논어(論語)에 <벗으로서 인(仁)을 돕는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재사(齋舍)의 두 추녀를 ‘애련(愛蓮)’과 ‘영매(詠梅)’라 했고

앞대문을 ‘준도문(遵道門)’이라 했는데 이 역시 각각 뜻이 있다.

선액(宣額)에 ‘남계서원(濫溪書院)’이라 했음은 서원이 남계강가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