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세계
산과 물의 나라 화천
‘평화의 댐’ 건설을 둘러싼 갖가지 해프닝은 화천이라는 고장을 울리고 웃겼다.
“딱 3년만 해보자”고 시작한 산천어 축제는
해마다 100만 명 이상이 찾아오는 국제적인 축제로 거듭났다.
해산의 일출 - 호랑이가 출몰했던 곳
평화의 댐과 비목공원으로 가는 아흔아홉 굽잇길로 유명하다.
북으로는 휴전선까지 뻗어 있다. <화천군청>
화천은 군사도시다. 오늘날의 화천(읍)을 건설한 것은 육군 일병이었단다.
해방 이후 북한 치하였고, 한국전쟁으로 초토화한 시가지를 건설한 것은 6사단 공병대였다.
그런데 폐허 위에 바둑판처럼 줄을 그은 이가 다름 아닌 육군 일병이었단다.
새마을 운동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나.
나중에 화천시가 전설의 일등공신인 이 일병을 찾으려 무진 애를 썼지만 영영 나타나지 않았단다.
구름이 가까워 옷이 젖은 산의 고을
비목공원 가곡 ‘비목’ 무대
비바람 긴 세월에 이름 모를…. 산화한 젊은 무명용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국민 가곡 ‘비목’의 무대. 평화의 댐에 자리 잡고 있다. <화천군청>
여전히 민간인 수보다 군인 수가 훨씬 많은 화천에는 분단과 한국전쟁,
냉전의 아픈 추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유명한 인공호수 이름이 오랑캐를 무찔렀다는 뜻의 파로호(破虜湖)인 것도
한국군이 중공군 대부대를 수장(水葬)시킨 것을 기념해 이승만 대통령이 붙인 이름이다.
무명용사의 넋을 기리며 지었다는 국민가곡 ‘비목’의 고향이기도 하며,
인민군 사령부막사가 분단과 전쟁의 상흔을 증거해 준다.
간동면 오음리는 1960년대 베트남전 파병용사들이 꽃다운 청춘을 바치며
고된 훈련을 받았던 추억이 깃든 곳이다.
![](http://img.khan.co.kr/news/2009/03/16/012.jpg)
파로호 1940년대 화천댐 공사로 생긴 파로호. <이우형>
화천은 ‘산의 고을’이다.
고려 명종대의 학자 김극기는 “푸른 산이 사방의 이웃이로다(靑山是四隣)”이라 했고,
여말선초의 학자 이지직(李之直)은 “구름이 가까우니 옷이 젖을 정도(雲近衣裳濕)”라고 읊었다.
용화산 - 구름이 가까워 옷이 젖는다
옛 시인들은 화천을 두고 ‘사방이 푸른 산이고, 구름이 가까우니 옷이 젖을 정도’라고 했다.
그만큼 산이 높다는 뜻이었다. 용화산은 화천의 정신적인 영산(靈山)이라는 평을 듣는다. <화천군청>
그랬다. 오죽했으면 한국전쟁이라는 미증유의 난리통에도 피아의 군인 한 사람도 보지 못했고,
숲에 가린 하늘이 불과 3평이었던 마을(간동면 방천리)이 있었다 하지 않는가.
전쟁 직후 화천 사람들은 바로 이곳 방천리 마을에서 씨앗을 얻어 농사를 지었다지.
그도 그럴 것이 최전방 날씨의 대명사로 일기예보에 자주 등장했던
적근산(1073.1m) · 대성산(1174m) · 백암산(1179.2m)을 비롯, 사명산(1197.6m), 광덕산(1046.3m),
화악산(1468m) 등 고봉준령이 고을을 떡하니 감싸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화천군의 총면적은 907.07㎢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산 면적이 86.2%에 달합니다.
지어 먹을 수 있는 논밭이라야 7.2% 정도? 그 중에서도 논은 2.1% 정도지요.”(정갑철 화천군수)
산 높고, 계곡 깊은 땅이기에 은둔선비들의 이상향이었다.
생육신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년)과
노론계의 핵심 인물로 당쟁에 휘말려 낙향을 거듭했던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1635~1705년)은
화천의 ‘곡운구곡(谷雲九曲)’을 두고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 하지 않았던가.
곡운구곡은 화천 사내면 동부와 춘천 사북면 북부에 걸쳐있는
직경 15㎞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심산유곡이다.
청옥협(靑玉峽), 신녀협(神女峽), 방화계(傍花溪), 명옥뢰(鳴玉瀨), 백운담(白雲潭), 와룡담(臥龍潭),
명월계(明月溪), 융의연(隆義淵), 첩석대(疊石坮)를 일컫는다.
“청산의 그림자가 푸른 물에 비쳐있는 청옥협, 천반의 열두 기봉이 무산처럼 나열돼 있는 신녀협,
동천이 홀연히 열려 백옥뜰을 이룬 방화계, 한가한 구름이 수풀 속에 얕게 드리운 명옥뢰,
눈 앞에 꽃이 홀연히 밝은 백운담, 산이 맑고 물이 깨끗한 와룡담, 밝은 달이 늘상 먼저 비추는 명월계,
용이 누워 있는 듯한 융의연, 첩첩히 쌓인 돌이 책을 쌓아놓은 듯한 첩석대….”(<수춘지·壽春誌>)
1689년 기사사화(己巳史禍)가 일어나자 김수증은 바로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
구름처럼 떠다닌 매월당의 발자취가 숨 쉬는 곳,
바로 화천 사내면 삼일리에 ‘화음동정사(華陰洞精舍·강원도기념물 63호)’를 짓는다.
‘화음동 정사’에서 눈길을 잡아매는 것은 전서(篆書)로 너럭바위에 새긴 ‘인문석(人文石)’이라는 명문이다.
또 하나, 북송 때의 철학자 소자(邵子·1011~1077년)의 상수사상(象數思想 · 상징적인 그림과 부호,
숫자로 전개한 우주론)을 집대성한 태극도와, 그 위에 새겨 넣은 ‘복희선천팔괘(伏羲先天八卦)’가
눈에 띈다. 하지만 어찌 대붕(大鵬)의 뜻을 연작(燕雀)이 알리오.
우리네 같은 장삼이사(張三李四)로서는 운둔의 삶에서까지 심오한 성리학적 우주관을 표출한
선비의 큰 뜻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족탈불급이다.
천년의 삶, 청동기 사람들의 터전
‘산의 고을’ 다운 절경은 또 있다.
옛날 맥국(貊國)임금이 난을 피했다는 용화산은 화천의 대표적인 명산이다.
특히 용화산에서 떨어진 간동면 오음리와 유촌리 사이에는 박쥐굴이 있는데,
이곳에서 불을 때면 50리나 떨어진 춘천 고탄에서 연가가 난다는 구전이 있을 정도라니.
용암리 청동기유적
모두 230여기의 유구가 확인됐다. 〈강원문화재연구소 제공〉
화천은 ‘물의 고을’이다. 북한강의 15곳 지류가 흘러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터전을 잡고 살았다.
최근에 북한강변 충적대지인 하남면 용암리에서 3000년 전부터 1000년 이상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터전을 잡았던 이른바 ‘청동기 타운’이 발견됐다.
“모두 230여 기의 청동기시대 유구가 쏟아졌는데요. 청동기 타운에는 30평형대 대형 주거지들이 나왔어요.
공동회의장과 석기공장·석기수리점까지 구비한….”(이우형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연구원)
용암리와 위라리 일대는 아직 발굴하지 못한 여전히 청동기~삼국시대 유적이 널려있으며,
위라리에는 삼국시대 초기 적석총이 방치된 채 무너져 내리고 있다.
위라리 적석총
지금도 허물어져가고 있는 방치된 삼국시대 초기의 적석총이다.
하지만 화천이 명실상부한 ‘물의 나라’가 된 것은 1944년 완공된 화천댐(간동면 구만리)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호수(파로호·破虜湖)가 생겼으니 말이다.
1986년에는 국민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린 이른바 ‘금강산댐 소동’이 일어난다.
그해 10월30일 전두환 정권은 북한이 비밀리에 200억t 저수용량의 금강산댐(임남댐) 건설계획을 세웠으며,
이 댐이 붕괴될 경우 서울은 12~16시간 내에 물바다가 되고
여의도 63빌딩의 3분의2, 국회의사당의 지붕 부분만 남게 된다는 충격적인 시뮬레이션을 발표했다.
정부는 대대적인 성금모금운동을 펼쳤으며, 급기야 화천 동촌리에 ‘평화의 댐’ 건설을 추진한다.
하지만 평화의 댐은 1989년 5월27일 댐 높이 80m에 이르는 공사가 완료된 것으로 끝났다.
![](http://img.khan.co.kr/news/2009/03/16/011.jpg)
평화의 댐
대응 댐으로서의 효용 가치가 새삼스레 부각된 평화의 댐.
<화천군청제공>
정권이 바뀌면서 금강산댐 위협이 터무니없이 과장됐으며,
결국 정권 유지 차원의 ‘국면전환용’ 사기극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평화의 댐은 천덕꾸러기가 되어 흉물로 변한다.
하지만 못된 정권이 ‘국면전환용’으로 이용해서 그렇지 ‘평화의 댐’ 자체의 효용성은 훗날 입증된다.
평화의 댐 북쪽으로 24㎞ 떨어진 곳에 완공된(2003년) 임남댐(금강산댐)에 균열이 발생하자
우리 정부는 2006년 흉물로 남아 있던 평화의 댐 2단계공사를 마무리 지었다.
임남댐(26억2000만㎥)보다 1000만㎥ 많은 26억3000만㎥ 저수용량의 평화의 댐을.
만에 하나 북한 임남댐이 붕괴된다 해도 끄떡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물’이다.
2단계 평화의 댐 공사로 다시 파로호의 물을 뺀 것도 문제이다.
더욱 큰 고민은 북한 임남댐 건설로 1년에 17억에 달하는 물이 내려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차피 남북간 댐은 세운 것이니까 북은 물을 내려 보내주고
남은 북한에 부족한 전력을 보내주는 상생의 협력이 마련되어야 할 것 같아요.”(이우형씨).
순식간에 산천어의 고을이 되다
평화의 댐 소동은 역설적으로 화천을 ‘산천어의 고을’로 바꿔 버렸다.
“두 차례에 걸친 댐공사로 물을 뺀 파로호는 밀려든 토사로 죽은 호수가 되었어요.
하루 1000여 명이 찾던 파로호에 1년에 1000명이나 왔을까. 화천 경제는 가히 빈사상태에 빠졌어요.
그래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산과 물의 상징인 산천어를 생각하게 됐죠.”(정 군수)
![](http://img.khan.co.kr/news/2009/03/16/013.jpg)
화음동사지
조선 중기 노론계 핵심인 김수증이 은둔하면서 세운 화음동사지.
<화천군청 제공>
파로호가 살아가는 것을 기다려 2003년부터 딱 3년만 진행시키려 했던 산천어 축제는
뜻밖에 대박을 터뜨렸다. 1년에 100만 명 이상이 찾고,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포토뉴스로 보도할 만큼 세계적인 축제로 변한 것이다.
1년에 단 열흘 동안 치르는 산천어 축제가 낳는 경제효과만 해도 450억 원에 이른단다.
올해 축제 때에도 90t에 이르는 산천어를 풀었다.
산천어는 화천의 이미지에는 맞는다고는 하지만 화천의 고유어종은 아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화천의 고유어종으로 열목어, 누치, 쏘가리를 꼽았을 뿐 산천어는 없었다.
1988년 발간된 <화천군지>에도 산천어는 화천의 고유어종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그런 산천어가 화천군을 대표하는 어종이 되었으니…. 축제에 쓰이는 산천어는 일본산이란다.
어떻든 산 86%, 물 5%인 ‘산과 물의 고장’인 화천.
그 때문에 궁벽한 고을의 상징이 되었지만, 거꾸로 보면 물과 산이 선사하는 청정의 이미지 덕분에
여전히 매혹적인 고장이 될 수 있다. 세파에 찌든 사람들의 안식처로….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2009-03-16, 경향 [新택리지]
가는 길/ 강촌→의암댐→춘천댐→지암리→신포리 검문소→화천길은 북한강을 끼고 갈 수 있는 드라이브 코스. 또한 춘천→춘천댐→고탄→화천 길은 가장 빠른 산악도로 코스이며, 춘천→소양댐→오음리삼거리→오음리→화천길도 있다. 버스는 동서울 터미널(2시간40분·1일 16회)과 상봉동 터미널(2시간30분·1일 12회 정도)에서 탈 수 있다. 2008년 화천군 요리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033-442-1290 화천에서 생산되는 쌈(산나물)을 재료로 한 쌈밥정식이 일품. 033-442-4880 해물찜과 탕, 샤브샤브가 유명. 033-442-2708 평양냉면과 초계탕이 유명한데, 특히 초계탕은 춘천권 일대에서는 최고라고. 033-442-1112 무공해 청정지역인 화천에서 잡히는 민물고기 전문요리집이다. 033-441-3579 핀란드·노르웨이 등 관광강국을 벤치마킹했다. 033-441-3880 꽃농장에 자리잡고 있으며, 콘도식 민박펜션이다. 033-441-4632 콘도형 민박펜션이다. 033-442-1631 유촌리 마을회가 운영하고 있는 가족단위 펜션이다. 017-375-5515(이종석 이장) 산천어밸리와 연계한 여름철 계곡 휴양지 인근에 있다. 033-441-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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