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혁정치가 조광조를 논고한다
조광조를 내친 중종임금을 위한 변명
조광조와 중종 임금의 인연은 조광조의 나이 서른셋, 1515년에 치러진 알성시에서다.
임금이 직접 성균관에 거동하여 출제한 '공자의 3년 정국구상을 논하라'는 문제에
'춘부(春賦)'라는 답안지로 장원 급제를 따면서부터다.
알성시가 있기 5년 전, 조광조는 이미 사마시에 장원급제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해 있었다.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조지서의 사지가 되었지만 가슴에 품은 뜻을 펼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행정직이었기 때문이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중앙정부 9급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근무 중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과 비슷한 모양새다.
임금의 마음을 흔들어버린 조광조의 답안지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 됨이 하나입니다.
하여, 하늘이 사람에 대하여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고로 임금과 백성은 하나입니다.
상고하건데 이상적인 임금들이 백성들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춘부, 春賦)
이어지는 조광조의 답안지는 임금의 마음을 흔들었고 임금은 신선한 현기증을 느꼈다.
공자사상을 하늘과 사람으로 축약한 조광조의 논리는 가슴 뭉클한 충격이었다.
등극한지 10년차. 이제야 인재를 만난 기쁨으로 충만 되었다.
그랬던 임금으로부터 불과 4년 만에 사약을 받고 조광조가 죽어가고 있다.
누가 도리에 어긋났는지 따지는 것은 사치스러운 환경이다.
"학문이 깊고 훌륭한 문장이로다."
조광조의 뇌리에 입력된 그때 그 임금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전적, 예조 좌랑을 시작으로 홍문관 교리, 부제학, 대사헌에 이르는 승자를 뛰어넘는
쾌속 승진을 밀어주고 끌어주던 임금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피를 토하며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고통에 몸부림치며 헤매고 있는데 그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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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선생 적려유허추모비 |
금부도사가 한양에서 가지고 내려온 비상은 독약이었다.
비소에 부자와 게의 알을 으깨어 꿀에 뭉치고 제련하지 않은 황금가루와 독극물을 넣어 만든 환을
소주에 풀어 마시는 것이 사약이다.
"네가 경연관으로 있을 때, 너를 따르는 시강관 한충을 통해서
'경연에 나올 때는 교의에 앉지 말고 평좌하자고?"(중종실록 11년 11월16일)
당시 중종은 여인들에 파묻혀 살았다. 여자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정국공신들이 추천하는 여자를
받아들인다는 옵션에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반정공신들의 강압에 못 이겨 정비 단경왕후를 즉위 7일 만에 쫓아내고 계비 장경왕후를 맞았지만,
첫아들(훗날 인종) 낳다 죽어 중전이 없는 틈새를 후궁들이 파고들었다.
이중에서 재색을 겸비한 사람이 창빈 안씨이고 육감적인 사람이 경빈 박씨였다.
중전을 비워둘 수 없다는 주청에 따라 왕비를 맞아들였는데
이분이 훗날 수렴청정(명종 대)의 대가가 된 중종의 제 2 계비 문정왕후이다.
하지만 나이 열여섯인 어린 왕비는 세상 물정을 몰랐고 중종은 나이어린 왕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틈새에서 각축을 벌이던 여인이 몸짱 경빈 박씨와 얼짱 희빈 홍씨다.
"언젠가 내 얼굴을 보고 싶다고 말했지? 신하들은 용안을 봐야 한다구, 그래 지금 보니까 잘생겼니?
말해봐 임마, 잘생겼어? 못생겼어?"(중종실록 13년 1월18일)
소격서도 그래. 왕실의 안녕을 위해 일월성신에게 제사 드리던 곳인데
변질되어 무녀들을 대궐에 불러들여 푸닥거리나 하구 퇴폐스럽게 흘러가는 거,
니가 말 안 해도 나도 잘 알고 있었어.
조금 아까 말했듯이 내가 후궁이 하나 둘이냐? 지네 들이 잘났다고 서로 일러바치니 알 수밖에…."
선릉. 서울 삼성동.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자순대비)
그런데 넌 소격서를 폐지하라고 265회나 상소를 올리고
급기야는 밤늦은 자시(子時)가 될 때가지 퇴청하지 않고 농성할 때 난 정말 싫었어. 정나미가 떨어졌다구.
그리고 정말 니가 싫어 진 것은 어느 날 니가 입궐 할 때, 니 앞에 호조판서 고형산이 앞서가고 있었다며?
그 꼴을 보지 못한 니가 호판의 가마꾼을 불러다 조졌다며? 건 월권이고 자만이야. 겸손 좀 해라 겸손."
(중종실록 14년 12월16일)
조광조묘 비문
"겸손 얘기가 나왔으니까 한 마디 더 하겠다.
내 마누라(장경왕후)가 애 낳다가 죽어 창경궁에 피어하는 걸 너희들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나를 몰아 부칠 때, 대사헌 최숙생이 엄청 따지고 들더라. '임금의 행적은 항상 알려야 한다'고,
그래 일리 있는 얘기야. 그때 너 뭐라고 얘기했어? 최숙생의 등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구?"
(중종실록 12년 8월20일)
"그리고 또 '지당하십니다'라는 말은 누가 쓰는 어휘냐?"
"예, 임금님이 옳은 말씀을 하실 때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쓰는 공대의 말입니다."
"그래, 맞아. 맞는데 말이야 너희들은 그 말을 내가 쓰게 만들었어.
특히 너 조광조가 경연에서 논리 정연한 어투로 설파할 때,
자리를 같이했던 사관들이 내가 '지당하다고 했다'고 실록에 기록해놨어, 이게 말이나 되냐?
임금이 신하의 말에 지당하다는 것이…. 너희들은 그걸 즐긴 거야.
임금을 모욕주면서 너희들은 쾌재를 불렀겠지만 나는 수모를 당하는 심정이었어.
내가 뭐 용상에 앉아 있으니까 내 마음이 하해같이 넓은 놈인 줄 아는데, 나 속 좁은 놈이야,
벤댕이 속처럼 좁다구. 내가 왜 이렇게 좁아진 줄 아니?
허구한 날 칼춤을 추는 형(연산군) 앞에서 살아남으려니까 간댕이가 콩 알만해졌어.
그렇게 해서 속 좁은 놈이 됐다구…."
찬바람이 스산하다. 정신이 가물가물하다. 싸라기를 뿌리던 눈발이 거세진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에서 희미하게 보이던 임금의 얼굴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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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에 있는 조광조 묘 |
피를 토하던 조광조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이보시오 금부도사! 사약이 남아 있으면 더 주시오!"
금부도사 유엄으로부터 약사발을 받아든 조광조는 목마른 사슴이 물을 들이키듯 벌컥 벌컥 들이마셨다.
하지만 목 줄기를 다 넘기지 못하고 '쨍그랑' 약사발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쓰러졌다.
의지의 선비 조광조는 이렇게 갔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흐트러지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그래도 머리는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하고 절명했다.
한이 맺혀서 일까?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양팽손이 떨리는 손으로 눈을 쓰다듬어 내리자 그때서야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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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선생, 학포 양팽손선생 추모비. 능주 죽수서원에 있다. |
조광조가 죽었다. 그 후 소격서는 부활했고 현량과는 폐지되었으며 위훈삭제는 취소되었다.
도덕을 바탕으로 세상을 평정하려 했던 젊은 개혁 사상가는 좌절했다.
하늘의 뜻을 백성에게 펼치려 했던 개혁 정치가는 실패했다.
올곧은 마음으로 국가를 경영하려 했던 선비는 한 사람을 경세하지 못하여 무너졌다.
죄인의 시신을 거두는 일은 동률로 처벌받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학포 양팽손은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하여 향리에 가매장 했다가 이듬 해 용인 선영으로 이장하였다.
또한 그의 제자 소쇄 양산보는 홍문관 관직을 벗어던지고 향리에 내려와
흙 담을 쌓고 집을 지으며 스승을 기렸다. 그것이 오늘날의 소쇄원이다.
490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그의 사상이 우리의 가슴에 각인되어있는 것은
이루지 못한 아쉬움과 그의 도(道)가 백성에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개혁(改革)은 문자 그대로 피부를 가르는 아픔을 동반한다.
혁명은 밭을 갈아엎듯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개혁은 판을 깨지 않고 가는 길이다.
그래서 혁명보다 개혁이 더 어렵다고 말한다.
- 이정근 기자
- ⓒ 2006 오마이뉴스
(2) 영혼을 지킨 관료를 역사는 기억한다
죽은 뒤에 명예회복한 정암 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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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년(중종 14) 12월 20일
"죄인은 어명을 받으시오."
한양에서 내려온 금부도사가 사립문을 밀치며 큰소리로 외쳤다.
방안에서 책장을 넘기던 죄인은 용수철처럼 마당으로 튀어나갔다.
유배를 거둔다는 희소식이라도 가져온 걸까? 아니면?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죄인을 사사(賜死)하라는 어명이오."
중종 임금의 명을 받들어 한양에서 내려온 금부도사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무릎 꿇고 금부도사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죄인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사약이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이른 아침 까치가 울어대어 좋은 소식이라도 있으려니 했는데 청천벽력과 같은 날벼락이었다.
"사사의 명만 있고 사사의 글은 없소?"
죄인의 항변에 금부도사가 쪽지 하나를 보여줬다.
"내가 전에 대부(大夫) 줄에 있었는데 어찌 쪽지 하나로 신을 죽이려 하겠소?
그는 죄를 받기 전. 대사헌이었다.
"죄인은 무엄하게도 어명을 따지려 드는 것이오?"
금부도사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도사를 불신한 것이 아니오니 너무 노여워 마오. 지필묵을 부탁하오."
죄인에게 붓과 벼루가 주어졌다. 하얀 종이 위로 죄인의 손이 빠르게 지나갔다.
애군여애부(愛君如愛父)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우국여우가(憂國如憂家) 나라 근심하기를 집안 근심하듯 하였노라
백일임하토(白日臨下土) 밝은 해가 아래 세상 내려다보고 있나니
소소조단애(昭昭照丹衷) 가이 없는 이내 충정 길이길이 비추리라
검은 먹 점이 글씨가 된 형체 위에 하얀 눈발이 날렸다.
붓을 놓은 죄인은 하늘을 쳐다봤다. 회한이 밀려왔다.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4배를 올렸다.
검붉은 사약이 담긴 탕기에 새하얀 눈이 내려앉았다. 심호흡을 하던 죄인의 눈꺼풀이 가볍게 떨렸다.
약 사발을 바라보던 죄인은 사약을 단순에 들이켰다.
약사발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덕과 예를 바탕으로 한 유교적 왕도정치를 추구했던 개혁사상가 조광조는 이렇게 사라져 갔다.
그의 정치사상은 자연 질서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려는 강렬한 염원이 담겨 있었으나
기득권을 쫓는 훈구 세력에게는 목에 가시였다.
경륜이 짧은 그의 정책은 과격하여 보수 세력을 결속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했으며
급진적인 그의 지향점은 수구세력의 저항을 불러왔다.
그의 사후 불과 25년이 되던 1544년 박세무와 신백령이 조광조를 신원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현존 임금이 죽인 죄인을 당대에서 신원하라는 상소는 매우 이례적이고 도발적이다.
"임금의 과오를 들추어 짐을 이렇게 능멸해도 되느냐?"라고 흥분한 군주가 피바람을 불러올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다. 허나, 당대에선 신원되지 못하고 선조 1년(1568) 기대승의 청으로 신원되었다.
조광조 죽음 49년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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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사사하라'는 어명이 떨어진 날이 12월 16일.
이튿날 한양을 출발한 금부도사 유엄은 남행길을 재촉했다. 한양에서 능주 까지 900여 리.
쉬지 않고 달렸다. 임금의 명이 의롭고 의롭지 않다는 것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임금의 명을 빨리 집행하는 것이 충성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집행이 49년 후 신원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 2008.12.19 오마이뉴스, [영혼을 지킨 관료를 역사는 기억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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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가 남긴 詩(絶命詩).> 憂國如憂家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 걱정하듯 하였네 白日臨下土 하늘이 이땅을 굽어보시니 昭昭照丹衷 내 일편단심 충성을 밝게밝게 비추리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능성에 귀양을 왔던 정암 조광조(1482-1519)선생을 추모하고자 세운 것이 적려유허비이다. '적려(謫廬)'란 귀양또는 유배를 말한다. 자리하고 있는데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이수(螭首)를 갖추고 있다. 비신 전면에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靜蓭趙先生追慕碑)>라 하여 해서체 종서 2행으로 썼다. 비신 뒷면은 상단에 <정암조선생추모비(靜蓭趙先生追慕碑)>라 전액하고 그 밑으로는 정암선생의 유배 내력을 기록하였다. 議政府右贊兼成均館祭酒世子二師(의정부우찬겸성균관제주세자이사)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 동춘 송준길(同春 宋浚吉)이 썼으며 전서(篆書)는 충청도관찰사겸수군절도사순찰사(忠淸道觀察使兼水軍節度使巡察使) 민유중(閔維重)이 쓰고, 1667년(현종 8) 4월에 능주목사 민여로(閔汝老)가 건립하였다. 영정을 봉안하고 있으며, 유배생활했던 초가를 복원하여 적려유허비 주위를 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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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 비문
오호라 여기는 정암 조선생의 귀양살이한 집이요, 또한 운명하신 유허(遺墟)이다. 오호라 이제 중종 기묘년을 소급하면 149년이 되었으되 학사와 대부는 그 도학을 숭모하고 백성과 관리는 그 은덕을 그리워하여 오래 되어도 더욱더 잊지 아니하고 모두 이르기를 우리 동쪽 편방(偏邦)으로 하여금 군신 부자의 윤리를 알게 하고 이적(夷狄), 금수(禽獸)의 지역에서 면하게 한 것은 진실로 우리 선생님의 주심이라 하고 여기를 지낸 자 숙연이 치경(致敬)치 않을 이 없으니. 대개 우리나라는 기자가 도해(渡해)한 후로 상하 수천년간에 도학이 회명(晦冥)하여 간혹 정포은(鄭圃隱), 김한헌당(金寒暄堂) 제현께서 혹선혹후(或先或後)하여 도학을 창명(倡明)하였으나 그러나 그 정주(程朱)의 연원을 계승하고 요순의 정치에 뜻을 두고 탁연히 명덕(明德), 신문(新民)으로 이 유학의 표준을 삼은 이는 이 선생으로부터 되었음을 속일 수 없으리라. 한양인이니 성화 임인(成化 壬寅 1482년)생이다. 을묘(乙卯 1519년) 11월에 북문의 화가 일어나 그 달에 이곳으로 귀양오시니 그 옥(屋) 주인은 관노문후종(官奴文厚從)이라 익월 20일 사약이 내렸다. 금왕의 丁未年(현종6, 1667년)은 숭정(崇楨) 기원후 40년인데 본주 목사 민여로(閔汝老)가 오래 되면 그 유지(遺址)를 잃을가 염려되어 입비하여 표시하였다. 오호라 정학(正學)을 어찌 가히 잊을 수 있으리오. 이를 가히 이 비에 새길지로다. 기(記)를 짓고 정헌대부원임의벙부좌참찬 겸 성균관제주세자시강원찬선 송준길이 쓰고 통정대부수충청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 민유중이 전자(篆字)하다. <역: 우석 이진백 (愚石 李鎭白)> |
◆ 정암조광조선생 적려(謫慮)유허지
1519년(중종 14) 겨울,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해 능주에 귀양을 왔던
정암 조광조(1482~1519)선생이 귀양살이 하던 집으로,
당시 38세의 요즘으로 치면 검찰총장인 대사헌의 지위에 있었다.
그는 능주에서 관청노비 문후종의 초가삼간에서 구차하게 지내다가,
귀양 온 지 35일 만인 12월20일에 임금이 내려 보낸 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았다.
△ 현재 건물
- 영정각(影幀閣) : 조광조의 영정을 모심
- 강당 : 애우당(愛憂堂)에는 절명시, 유배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올린 ‘상소문’
‘능성적중시’의 현판이 걸려 있다.
- 정암조광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靜庵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
1667년(현종 8) 능주목사 민여로가 세운 것으로
‘적려(謫廬)’는 ‘귀양 갔던 곳’을 말하고
유허비(遺墟碑)는 ‘한 인물의 옛 자취를 살펴서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를 말함이니,
정암 조광조가 능주에 유배 온 행적을 적은 비라 할 수 있다.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이 조광조 선생의 행장(行狀) 비문을 짓고,
예학(禮學)의 대가였던 동춘당 송준길이 비문을 해서체로 썼으며,
둔촌 민유중(屯村 閔維重, 1630-1687)은 ‘靜庵趙光祖先生追慕碑’를 전자(篆字)로 썼다.
△ <능성적중(綾城謫中)>詩文 - 조광조
誰憐身似傷弓鳥 누가 이 몸을 활 맞은 새 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
自笑心同失馬翁 나 스스로 말 잃은 늙은이 마음같이 웃고만 있다네
猿鶴正嗔吾不返 원숭이가 짖고 학들이 울어대지만 나는 돌아가지 못하리니
豈知難出伏盆中 엎어진 독 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으리.
‘猿鶴(원숭이와 학)’이란 군자(君子)를 비유한 고사에서 따온 것으로
조광조는 조정의 군자들이 절규해도 자신은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절망하고 있었다.
'伏盆(엎어진 독)'이란 정적들에 의해 억울한 모함을 받은 자신의 처지를 비유하였으며,
또한 자신을 ‘화살 맞아 상처난 새’로,
졸지에 정계에서 쫓겨난 자신을 ‘말 잃은 늙은이’의 심정에 빗대고 있다.
△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 1482년(성종 13)~1519년(중종 14)
17세 되던 해 어천(魚川, 지금의 평북 영변) 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갔던 그는
평안도 희천에 귀양와 있던 한훤당 김굉필에게서 글을 배워 사림파의 학통을 이어받게 되었다.
1515년(중종 10) 가을에 알성시에 급제하면서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들어선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고
홍문관으로 옮겨 수찬과 부제학을 역임하면서는 왕 앞에 나아가 학문을 강의하는 등
더욱더 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마침내 1518년(중종 13) 대사헌이 되었다.
조광조는 ‘도학을 존숭하고 인심을 바르게 하고 성현을 본받음으로써 지치(至治)를 일으킬 것’
즉 성리학을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고대 중국 3대(하, 은, 주)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지치주의(至治主義 : 하늘의 뜻이 실현된 이상사회를 현실에서 건설하려는 것) 정치를 실현하려 했다.
왕(중종)에게 성현을 본받아 수양에 힘쓸 것을 누누이 강조하고
기존 훈구세력의 부패와 비리를 공격했다.
중종을 성군으로 만들려는 조광조의 열성은 지나칠 정도여서 기록에 따르면
왕 앞에서 학문을 강연하고 정사를 의논하기도 하는 경연 자리에서 조광조가 말을 시작하면
끝이 없어서 다른 사람이 끼어들 틈이 없었고, 왕까지도 괴로움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1519(중종 14) 11월 15일 밤, 홍경주는 왕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지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여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히니’
죄를 밝혀 벌을 주라고 청했다. 이른바 기묘사화가 터지면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는 줄줄이 잡혀 국문을 받은 후 각지로 유배되었고
현량과 출신 관리들은 축출되었고 조광조를 두둔하던 관리들은 파직되었다.
후세에 율곡 이이는 “하늘이 그의 이상을 실행하지 못하게 하면서도 어찌 그와 같은 사람을 내었을까”
하고 조광조의 실패를 안타까워했으며,
조광조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과 함께 ‘동방사현(東方四賢)’으로 꼽았다.
조광조가 호남 능성현(綾城縣)에 귀양갔는데, 얼마 뒤에 사사(賜死)되었다.
고사(故事)에, 재상(宰相)에게 사사(賜死)할 때에 어보(御寶)가 찍힌 문서가 없고
다만 왕지(王旨)만 받들어 시행하였다.
금오랑(金吾郞=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이 귀양지에 도착하여 왕의 교지를 전달(宣旨)하니,
공(公)은 “국가에서 대신(大臣)을 대우하는 것이 이와 같이 허술하게 할 수 없는 것이며,
이렇게 한다면 장차 간사한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을 제 마음대로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소장을 올려 말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실행하지 못하였다.
목욕한 다음 의관을 정제(整齊)하고 뜰로 나와 조용하게 죽으니, 12월 20일로 38세였다.
이 날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는데 동서로 각 두 겹, 남북으로 각 한 겹이었고,
남북에 둘러진 무지개 밖에 각각 두 줄기의 무지개가 있어 큰 띠를 늘어뜨린 것같이
하늘에 뻗쳐 있었다. 또 서남쪽에 별도로 한 줄기의 무지개가 있어 길이가 한 길[丈]이 넘었는데
모두 때가 지나서야 없어졌다.
이듬해에 용인(龍仁) 선영(先塋)의 묘역(墓域)에 장사하였으니, 유지(遺志)에 따른 것이다.
아들 정(定)은 나이 5세, 용(容)은 2세였는데
정은 일찍 죽고 용은 벼슬하여 문천(文川) 군수에 이르렀으나, 아들이 없어
종질(從姪)인 순남(舜男)으로 뒤를 이었다.
선조 2년에 태학생(太學生) 홍인헌(洪仁憲) 등이 상소하여 문묘(文廟)에 배향할 것을 청하니,
양사(兩司) 및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서로 이어 계청하고,
옥당(玉堂)에서도 차자를 올려 대관(大官)과 좋은 시호(諡號)를 주자고 청하였다.
이에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고 문정(文正)이라 시호하도록 명했다.
신해년(광해군 3)에 문묘에 종사(從祀)하였다.
조광조가 능성(綾城)에서 사사(賜死)당하고, 다음해(1520) 봄에 용인으로 이장하여 떠날 때,
눌재(訥齋) 박상(朴祥=朴昌世, 1474-1530)은 그의 관을 실은 소달구지를 먼발치로 보고
조광조를 떠나보내면서 ‘효직의 상을 당하여’ 란 만시(挽詩)를 짓는다. (孝直은 조광조의 字)
효직의 상을 당하여 (逢孝直喪)
無等山前曾把手 무등산 앞에서 서로 손을 붙잡았는데
牛車草草故鄕歸 관 실은 소달구지만 바삐 고향으로 가는구나.
他年地下相逢處 후일 저 세상에서 다시 서로 만나더라도
莫話人間謾是非 인간사 부질없는 시비 일랑 더 이상 논하지 마세나.
눌재 박상은 시를 지어 곡(哭)하였다.
分手院前曾把手 분수원 앞에서 일찍이 악수하면서
怪君黃閣落朱崖 그대가 황각(정부)에서 주애로 감을 괴이하게 여겼다
朱崖黃閣莫分別 주애와 황각을 분별하지 마소
纔到九原無等差 겨우 구원(황천)에 이르게 되면 차등 없다오.
정암의 당손(堂孫) 조충남(趙忠男)이 퇴계(退溪)에게 공의 행장(行狀)을 지어 달라고 청하여
퇴계가 시를 지었다.
相思儀鳳瑞王庭 의봉이 임금의 뜰에 상서롭게 노닐던 것을 생각했는데
玉樹今逢想典刑 어제 옥수(남의 후손을 기리는 말)를 만나 그의 전형(얼굴 모습)을 상상한다
聖美揄楊吾豈敢 성스럽고 아름다움을 내 어찌 유양(남의 장점을 들어서 말함)하리오
雪霜千里愧君行 눈서리 천리길에 그대 옴이 미안하다.
- 《기묘록 보유(己卯錄補遺) 卷上》조정암전(趙靜庵傳)
- 《기묘록》해동잡록 1 본조(本朝)
- 《해동야언(海東野言)》
△ 정암 조광조의 <춘부(春賦)>
중종 5년(1510) 3월. 진사시에 1등(壯元)으로 합격했다.
<춘부(春賦)>
시험장을 주재한 상시관(上試官)과 참시관(參試官), 그리고 감시관(監試官)을 놀라게 한 명문으로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춘부(春賦)>의 서(序)는 다음과 같다.
陰陽錯而四時序 春者天之元也
四時自春而始 四端自仁而發
無春序不成 無仁端不遂
然天無欲 而春行四時成 人有欲 而仁喪端不成
음과 양이 갈마들어 四時(사계절)의 순서가 되는데 봄은 하늘의 으뜸(元)이다.
四時는 봄으로부터 시작되고,
4단(四端; 惻隱之心, 羞惡之心, 辭讓之心, 是非之心)은 仁에서 발단이 된다.
봄이 없으면 四時의 질서가 이루어지지 않고
仁이 없으면 선심(善心=四端)의 실마리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러나 하늘은 욕심이 없어 봄을 운행하여 四時를 이루나
사람은 욕심이 있어서 仁을 상실하여 선심(善心=四端)의 실마리를 확충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속으로 스스로 슬퍼져서 부(賦)를 짓는다.
사계절이 봄으로 시작해서 운행하듯
측은지심이나 수악지심, 사양지심과 시비지심도 仁에서 출발한다는 <주역>과
성리학의 대의를 서(序)에서 펴고
본(本)에서는 성리학의 이(理)와 기(氣)를 들고 나와 조광조 자신의 주장을 펴나갔다.
惟陰陽之交變兮 음양이 교대로 변함이여
寓理氣之妙要 이기의 묘한 요체에 의거함이로다.
理乘氣而相感兮 이가 기를 타고 서로 느낌이여
元復元而不消 원이 원으로 돌아가 소멸치 않는도다.
이어서 조광조는 맑은 선비들이 세상에 나서지 않는 현실을 비유의 문장으로 지적했다.
하늘의 도는 맑은 샘물처럼 흘러가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흙탕물 같은 무리들에 의해
인도(人道)가 바르게 펼쳐지지 못하고 현실은 늘 혼란스럽고 혼탁하다는 것이었다.
泉渭渭而欲達兮 샘물이 흘러서 끝가지 가려고 함이여
被黃流而不淸 흙탕물이 섞이어 맑을 수가 없도다.
上褻天之明命兮 위로 하늘의 밝은 명을 더럽힘이여
下慢人之倫紀 아래로 사람의 윤리와 기강에 게으르도다.
甘下流而不悟兮 즐거이 아래로 흐르면서 깨닫지 못함이여
羌衆惡之小委 수많은 악이 쌓이는 바로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는 방편으로
조광조는 공자의 말씀을 수제자답게 금과옥조로 삼고 살았던 안자(顔子)의 태도에서
그 해답을 찾는 것으로 <춘부>의 본론을 끝냈다.
昔顔子於尼父兮 옛적에 공자에게 안자가 있음이여
問求仁之至方 인을 구하여 묻는 지극한 방도로다.
知四大與五常兮 4대(도교의 道,天,地,王)와 5상(仁,義,禮,智,信)을 앎이여
亦由玆而乃昌 또한 이에서 말미암아 번창해지도다.
勤四勿而操存兮 부지런히 4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에 힘써서 조촐하게 있음이여
方寸盎無不春 잠깐의 성함도 봄(春) 아닌 것이 없도다.
이리하여 조광조는 결론에 이르러서
도학을 권면하는 자신의 의지를 소신껏 발언하는 의문문 형식으로
<춘부(春賦)>의 마지막 문장을 끝냈다.
在天兮春 하늘에 있어서는 봄이요
在仁兮仁 사람에 있어서는 인이로다.
皆本太極 모두가 태극을 근본으로 하여
異而同兮 다르면서도 같거니
識此何人 이를 아는 사람 누구인가.
혼탁한 세상에 화두를 던지듯 '이를 아는 사람 누구인가' 하고 끝을 맺은 것은
지금까지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것을 당당하게 제기하는 물음이기도 했다.
하늘의 도를 펼치려면 성리학, 즉 도학이 열쇠인데 그 열쇠를 쥔 자가 누구냐는 발언이었다.
●조광조의 등장 2008-03-26 : http://blog.daum.net/gijuzzang/3049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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