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찾아 떠나고(답사)

화순 학포당(學圃堂)과 죽수서원(竹樹書院)

Gijuzzang Dream 2009. 4. 22. 17:04

 

 

 

 

 화순 - 학포당과 죽수서원

 

 

 

 

 

 (1) 양팽손과 조광조, '날개 꺾인 봉황' 조광조가 머문 자리

 

수령 500여년의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학포당 전경

이 곳은 생전에 양팽손이 기거했던 곳이다. ⓒ 오창석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38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당대는 물론 후세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부패하고 침체된 당시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열망하였던 신진 사림들에게는

이념과 실천을 겸비한 개혁의 지도자였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학자요, 정치가로서 이상적 모델이 되었다.

정암은 현실정치에서 패배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먼 후대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친 지도자였다.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반복해서 돈다는 말처럼,

정도전이 개국 초기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가 정비한 이념과 제도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안정된 기틀 위에 올려놓았듯이

성리학으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지치주의(至治主義)에 기초를 둔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했던 정암의 이상은 그가 죽은 후 조선왕조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로 뿌리를 내렸다.

중망을 바탕으로 임금의 신임을 얻어 상승세를 탔을 때는 구만 리를 날아갈 기세였던 대붕은

현실의 장벽에 부딪히자 날개가 꺾인 상처투성이의 새가 되어

이곳 화순 능주의 한 초막에 내려앉았다.


 

조광조가 한 달여 동안 머물렀던 초가(적려)

 

35일간의 짧은 귀양살이 동안 그는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왕이 곧 불러 줄 것을 기대하며 앞날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밤마다 고단한 몸을 눕히며 사약을 받는 꿈에 몸서리쳤을까.

차가운 아침 초막의 뜰에 쌓인 소담스런 백설을 바라보며 인간사의 덧없음을 한탄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완전히 격절(隔切)된 상태는 아니었고, 자기를 알아주는 지기지우(知己之友)가 있음으로써 위안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가 능주에 머문 동안 수시로 찾아와 위로가 되어준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이곳에 고향을 둔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이었다.

양팽손은 일찍이 18세의 어린 나이에 경기도 용인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고

21세 때에는 생원시에 장원급제한 후 같은 해에 급제한 정암과 더불어

성균관에서 생활한 적도 있었다.

그는 정암과 함께 경연(임금이 공부하는 자리)에도 나가 진강(進講,강의)하였는데

박세희, 최산두, 기준과 함께 기묘(己卯) 사학사(四學士)의 명성을 얻을 정도로 학문이 높았다.

죽수서원 전경.

조광조와 양팽손이 함께 배향된 서원. ⓒ 오창석

 

32세 때 기묘사화(1519년, 중종 14)가 일어나자 소장을 올려 간하였다가 그해 12월에 파직되어

고향인 능주로 돌아와 그곳에 마침 귀양살이를 와 있는 정암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들은 매일 같이 만나 경론을 탐구하고 지내지만 그것도 잠시,

정암은 유배된 지 35일만인 12월 22일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어두운 세상에 횃불을 밝히려 했던 위대한 지도자가 모질고 거친 풍파에 쓰러져 죽었건만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시신을 거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리 있는 학포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을 수습하여 산 속에 은닉해 두었다가

이듬해 봄에 경기도 용인으로 운구하였다.

세상이 안온할 때 신념이나 용기 그리고 의리를 말하기는 쉬운 일이지만

막상 자신의 몸에 해가 미칠 것을 알면서 의로운 일을 행하기란 범인으로선 어려운 일이었다.

그 뿐 아니었다.

적려유허비 옆 영정각에 봉안되어 있는 조광조의 영정. ⓒ 오창석

 

학포는 기묘사화로 유배당한 신잠, 김구, 최산두 등을 방문하여 의리를 다하였고 그 후에는 정암의 시신을 숨겼던 중조산 아래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25년 동안 은거하며 경론의 탐구와 서화(書畵)에 몰두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특히 그가 그린 '묵죽도'는 후세에 안견의 화풍을 계승한 대표적인 문인화로 평가되었고, '산수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산수도'에는 “고깃배야 오고 가지 마라. 행여 세상과 통할까 두렵노라’라는 오언시(五言詩)가 씌어 있는데 의롭지 못한 세상과 단절한 그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정암은 일찍이 그를 두고 “학포와 얘기하면 마치 지초나 난초의 향기가 풍기는 것 같다. 비 개인 뒤의 가을 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걷힌 뒤의 밝은 달이라. 세속의 욕망이 깨끗하게 없어져 버린 사람이다”고 하였다.

학포는 정암과 함께 사액서원인 전남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의 죽수서원(竹樹書院)과 경기도 용인 수지면 상현리의 심곡서원(深谷書院)에 배향(配享)되었는데,

그 중 심곡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정암의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가 있는 능주면 남정리는 광주에서 40분 거리이고

죽수서원, 학포당은 그곳에서 승용차로 30분 이내의 거리에 있다.

인근에는 학포당이 있는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에서 5분 거리에 쌍봉사가 있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절 쌍봉사.

절 옆으로 난 대숲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철감선사 부도가 나온다. ⓒ 오창석

 

학포 선생이 어려서 공부를 했다는 이 쌍봉사는 신라 경문왕 시기에 지어졌다는데

12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건축양식이 특이한 아름다운 고찰이다.

여기에는 신라 최고의 부도로 일컬어지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걸작품인 쌍봉사철감선사탑(부도)과 탑비가 남아 있다.

 - 오마이뉴스, [이철영의 전라도기행]

 

 

 

 

 

 

 

 (2) 왕도정치 혼얼 깃든 정암 조광조 적려지

 

 

‘킹로드 정치’는 화순 능주서 배워야
공자와 정암, “백성은 강물 권력은 쪽배”

 

◇ 정암 조광조의 영정 

왕의 길은 어렵다. 킹로드는 외길이 특징이다. 아무리 훌륭한 머리로 아무리 훌륭한 정책으로 아무리 훌륭한 참모들과 정치의 길을 함께 해도, 백성들을 절대 만족시킬 수 없는 외로운 길이 절대자의 고독길이다.

결국 양심있는 절대자에 의해 결정되고 그 결정에 의해 국가의 운명도 나라 장래도 심지어 민족의 미래도 좌지우지된다.

공자는 왕도정치를 이렇게 비유했다. 한 아이가 우물가에서 서성이고 있다. 왕도정치인은 아이를 피신부터 시킨다. 그러나 폐도정치가는 아이가 우물에 빠지기를 기다린다. 빠지면 건져내고 생색내고 백성들에게 자랑해대느라 국력을 소모해가고 민심을 속여대기만 한다.

인간사회 권력의 속성은 유일무이가 원칙이다.

권력은 한 입에서 나오지 두 입에서 절대 나오지 않는다.

 

하나뿐인 ‘톱권력’은 권력의 유지와 연장을 위해 경쟁자를 제거하고

미래세력의 싹을 애시당초부터 제거한다.

그래서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고 동서양 정치사에서 간파하고 있다.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선생은 ‘동방(조선)공자’로 일컫는다.

훈구파들에 의해 제거됐지만, 그의 도학정치가 공자의 왕도정치에 버금갈 만큼

한국 정치사에서 그 위상이 위대하기 때문이다.

선공후사, 청렴지수, 애민애족 등이 여느 정치인보다 탁월하기 때문이다.

정암 선생의 개혁의 상징인 사림의 모범으로 전국의 서원 20여 곳에서 추모돼 왔었지만,

전남 화순군 능주고을에서 가장 빛나고 있다. 선생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죽수서원이 정암 선생 사액서원 1호이기 때문이다.

◇ 죽수서원 전경 ⓒ 데일리안

 


임금이 어버이처럼 사랑하고(愛君如愛父)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憂國如憂家)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白日臨下土)
나의 붉은 마음 환희 비추리(昭昭照丹哀)

임금은 신하를 버렸지만 신하인 조광조는 임금도 백성도 버리지 않았다는

조광조의 이승 마지막 시(절명시)가, 요즘 정치인들처럼 공천을 주지 않으면 이당으로,

세력이 유리하면 저당으로, ‘정치주소’를 정치계절마다 이전하는 ‘철새 정치인’들에게

어떤 의미로 비추일까.

정암 선생이 현실타협과 이해타산에 밝은 훈구파 정치인들보다 ‘죽어서 더 존대받는 이유’는

아마도 정치를 통해 부귀영달을 달성하려는 정치 풍토에 큰 쐐기를 박은 것이 분명해서일까.

백성의 배를 불리고 인구가 늘어나고 교육이 증진되어야 바른 정치요

그 정치노선이 킹로드임을 동서고금의 모든 인간들이 늦게나마 깨달아서일까.

정암 선생의 적려지와 사액서원 1호인 죽수서원이 있는 능주면은

‘면단위 위세’로 초라한 실정이지만, 옛 위상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백제시대부터 1914년까지 화순군 안에는 능주와 동복 그리고 화순의 3개현이

독자적인 행정체제를 유지해 온 셈인데,

능주는 인근에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너른벌군(이능부리)으로 옛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1632년 인조반정 이후 10년 뒤에 인조의 생모인 인헌왕후 능성 구씨의 관향이라 하여

능성현은 능주목으로 ‘지명특별승진’됐다. 왕비의 고향이어서 특진을 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능주면은 화순군을 포함하기도 하고 대표하기도 하고 화순군에 속하기도 하면서,

양반 고을의 이미지를 오랜 세월 간직해온 셈이다.

그런 능주로 조광조가 유배돼온 것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광필의 배려 덕분인 것으로 알려진다.

정광필이 홍경주, 남곤, 심정 등 ‘골수 훈구파’들과 차별되어 평가되는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법하다.

1개 군에 3개 향교(1郡3校)가 있는 지역이 몇 개나 될까 만은,

좌우간 화순군 안에는 향교가 3개요, 서원도 죽수서원 도원서원 해망서원 등 여럿이다.

향교들은 유교문화가 퇴색된 지금까지도 소실과 복원의 역사를 반복해오면서

‘화순골 정신적 지주 1번지’역할을 튼실하게 해왔다는 지역내 평가가 드높다.

◇ 죽수서원 ⓒ데일리안


3개의 향교에서 정암 정신을 공부하고 의로움을 수양했을 인물로는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도 우리땅’이라면서 진주성 싸움에 부인인 주논개와 함께 참전한

최경회 장군, 문홍헌 장군, 조헌 장군, 병자호란 당시 종형제 7명이 의병장인 평택 임씨들,

대명처사로 유명한 류함 등이 있다.

숱한 화순의 열부와 열녀들도 ‘지절(지조와 절개)의 고장 화순’을

진한 외로움과 숱한 고난을 이겨내고 자랑해 왔다.

결국 조광조 정신은 학포 양팽손, 신재 최산두에 이어,

조선시대 숱한 의병장, 쌍산의소 정신, 일제수난시대 독립운동, 광주민주화 운동 등으로

그  ‘화순고장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능주의 승경을 산수화로 표현하기 어렵구나
백성들은 화목하고 만물은 풍요롭기만 하네
남쪽의 명승지를 어느 곳에서 찾아볼까
서석산 돌아보고 오는 길에 이 정자를 찾아보소
(시인 정의림의 ‘영벽정’에서)

 


능주 사람들은 지극한 효성과 자상한 자식 사랑이 남다르기로 유명하다.
능주의 예전 향교터에는 사슴이 숨겨달라고 방안으로 뛰어들었는데,

그 사슴을 잡아먹은 선비 부부가 낳은 자식이 칼놀이를 하다가 애비를 찔러 죽인 전설이 녹아있다.

능주인들은 그 이후로 고을에서 불효자식이 나올 수도 있다면서

향교 자체를 현 향교터로 이전해 버렸다. 자식사랑은 교육열로 승화됐다.

지역명문교인 능주고등학교에서 배출한 숱한 인재들이 서울과 광주 등에서

‘인재의 고장 능주’를 빛내고 있음을 능주 사람들은 자랑한다.

행정고시 최다 합격자 배출지로 능주면과 도곡면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때에는

면민들이 소와 돼지를 잡아 축하하기도 한다.

한 마을에서 서울대학교를 5명이 다닌다는 뉴스를 듣고

그날밤 마을 사람들이 ‘동네가요무대’ 잔치를 벌이기도 한다.

◇ 정암 적려지 ⓒ 데일리안


전남 지방을 열십자로 그렸을 때,

한복판 지역인 능주에도 탈향시대의 가슴아픈 역사가 깊기만 하다.

호남 사람들이 소위 먹고 살기 위해, 자식 교육을 위해, 직장 잡기 위해,

서울로 부산으로 광주로 차표 한 장 끊어 떠났던 그림자가 짙기만 하다.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했던 사람들, 혹은 조상 때문에 애향심 때문에

능주를 떠나지 못했던 능주면민들은 이제 더 이상 ‘울지 않으리’를 연발하고 있다.

‘어차피 떠난 사람들’ 기다려 봐야 능주 발전의 희망이 샘솟지 않기 때문이다.

능주면민들은 왕비의 고향이어서 능주목으로 승격된 1416년 5월 3일을 능주면민의 날로 제정해

단합과 단결 그리고 능주 발전을 다짐하고 있다.

왕비를 배출한 능성 구씨가,

조광조 선생 시신을 수습한 의리의 사나이 문정공 양팽손의 제주 양씨가,

문홍헌 장군의 남평 문씨가, 구씨가와 사돈가인 신안 주씨가, 제주 고씨가 등의 집성촌이

능주 고을 안에는 아직도 유명하다. 이들 성씨들은 경쟁적으로 가문을 빛내고 자식을 출세시키고

서로 사돈을 맺으면서 호남 선비문화를 고을 안에 가득 채워왔고, 앞으로도 이어갈 각오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지식인이자 실천인이자 스승인이었다.

꼿꼿한 지조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꺽이지 않을 만한 강인한 기개,

옳다고 확신되는 일에는 사약을 마시더라도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양보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았던 불요불굴의 정신력을 견지했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로 출세했던 선비들보다는,

개인적 욕망보다는 백성 걱정 나라 걱정,

나를 비롯한 타인과 함께 살아내야 하는 사익 아닌 공익 의로움이 팽배했던 능주에는

정암 조광조 선생의 트레이드 마크인 ‘백성은 강물이요 권세는 쪽배’ 교훈이

지금도 강물처럼 흘러넘치고 있다.

 


■ 능주 가는길
광주광역시를 기준해야 편리하다.

남광주-지원동-화순 너릿재 터널-화순 이십곡리 검문소에서 능주 가는 길은

4차선 도로로 직진해야 된다.

우회전하면 화순읍이요 잘못 들어서면 화순 동면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화순 공설운동장에서 20여 분 달리면 능주면 입구에 농업기반공사 건물이 보인다.

능주 진입 삼거리에서 물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양복사라는 사찰 아래 부근에 정암선생 적려지가 있고,

죽수서원은 능주면 소재지 동쪽 방향인 한천면으로 가다보면 안내판이 보인다.
도곡온천을 경유해 가는 길과 남평을 경유하는 길도 함께 있다.

- 유길수 기자

- ⓒ 데일리안,  2006-04-14

 

 

 

◆ 능성(綾城 = 능주(綾州), 현 화순)

 

《신증동국여지승람》제40권에 의하면 한양에서부터 능성(綾城)까지의 거리는 758리.

동쪽으로 보성군 경계까지 46리, 남쪽으로 장흥부 경계까지 44리,

서쪽으로 남평현(南平縣) 경계까지 17리, 북쪽으로 화순현 경계까지 12리이다.

 

능성현(綾城縣)의 원래 이름은 ‘이릉부리(爾陵夫里)’이며,

백제의 옛 이름으로는 ‘죽수부리(竹樹夫里)’, 혹은 ‘인부리(仁夫里)’라 하였다.

훗날 조선 선조 때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죽수서원은

백제 때의 옛 지명을 따서 지은 이름으로 이곳은 예부터 궁벽한 땅으로 알려져 있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의하면, 능주는 화순지방 평야지대의 중심으로

1632년(인조 10) 인조의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의 고향이라고 하여

능주목(牧)으로 승격되기도 하는 등 한때는 인근에서 가장 세력이 큰 고을이었다.

 

 

 

 

 

죽수서원(竹樹書院)

- 소재 : 전남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산 15-3

 

- 현존 건물 

▲하마비(下馬碑), 홍살문

▲외삼문 - 고경루(高景樓)

▲내삼문 - 조단문(照丹門)

사당 - 천일사(天日祠)

▲강당 - 정윤당(精潤堂)

동재 - 박약재(博約齋)

             ‘박약진전(博約眞詮, 박약의 참된 깨달음)’

             ‘널리 배우고 예(禮)로써 요약하라는 공자의 말씀을 제대로 깨달음’의 의미다.

             ‘박약(博約)’은 한마디로 유학의 핵심이다.

             이를 송나라 주자(朱子, 1130-1200)가 이어받았고,

             우리나라에서는 퇴계 이황(1501-1570)이 계승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의 동재(東齋) 이름도 박약재(博約齋)이고,

             또 정암 조광조를 모신 전남 화순의 죽수서원(竹樹書院)에서만 쓰고 있다.

▲기타 - 불우문(不偶門), 관리사

 

①1570년(선조 3) 조정의 명에 의하여 사당(竹樹書院)을 정암 조광조의 적려지(謫廬賜死址)

   근처인 현 위치로 이건하고 이어 죽수서원의 사액을 내렸다.

②1610년(광해군 2) 전라감사 박승종(朴承宗)이

   서원의 옆에 있는 대를 천일대(天日臺)라 이름지었다.

③1630년(인조 8)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주장으로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을 같이 배향하였다.

④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서원을 폐쇄하였다.

⑤1971년 능주의 유림과 학포선생 후손들의 주관으로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에 죽수서원을 복원하였다.

⑥1983년 4월 서원 원지인 모산리 산15-3번지의 10,131평을 한양조씨 후손들의 성금으로

   매입하여 1971년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에 복원한 서원을 해체, 이건하였다.

⑦사당(祠堂: 天日祠), 내외삼문(照丹門, 高景樓), 강당(精潤堂), 동재(博約齋), 묘정비,

   홍살문 등을 완공하고 진입로 약 800m 확장, 포장하였다.

⑧1991년 4월 25일 전국 유림과 한양조씨 후손들이 참여한 가운데 위패 봉안식을 끝내고,

   매년 음력 3월 15일 춘향제(春香祭)를 올리고 있다.

 

 

죽수서원(竹樹書院)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혜강공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을

배향(配享)한 서원으로

전남지방에서는 순천의 옥천서원(玉川書院)에 이어 두 번째로 1570년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정암 조광조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으며,

‘여씨향약’을 8도에 실시하도록 하였고,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 기존의 과거제도와 달리 6조와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지방관찰사와 수령들로부터 마땅한 인물을 천거받아 예조에서 심사한 뒤

왕 앞에서 시험을 보아 뽑는 제도)를 처음 실시하였다.

 

중종 14년(1519) 위훈삭제사건으로 반정공신(훈구파)들의 반발을 사게 되어

발생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능성현(綾城縣)에 유배되었는데,

이때 정암과 여러모로 인연이 깊었던 학포 양팽손도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인 능성현에 와 있어서 자연히 만날 수 있어 서로 강론하면서 의리를 교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암조광조가 유배된 지 1개월 정도에 사약을 받고 숨지자

양팽손은 은밀히 시신을 거두어 현 쌍봉(雙峰) 중조산(中條山) 아래(현재 화순군 이양면 증리 서원동 일명 조대감골)에 장사지내고 서운태(서원터) 마을에 모옥(茅屋)을 짓고

춘추로 제자들과 함께 제향하였다.

지금도 조광조의 시신이 한겨울 동안 가매장되었던 자리에는 ‘靜庵趙先生書院遺址追慕碑’란

작은 비석이 서 있다. 송시열이 쓴 명필인데,

조광조의 사후 그의 무덤자리에 세워졌던 서원의 흔적도 사라져 버리고

한겨울 그곳에서 가매장되었던 조광조의 시신은

이듬해 봄 조광조의 선영인 오늘날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의 심곡리로 이장되었다.

 

조광조는 선조 1년(1568)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광해군 때에는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정에서는 정암을 향사할 서원의 건립이 논의되어

선조 3년(1570)에 다시 능성현령(綾城縣令) 조시중(趙時中)의 협조로

현 위치인 천일대(天日臺) 좌측에 서원을 짓고 ‘죽수(竹樹)’란 사액(賜額)을 받은 죽수서원은

1613년 중수하였고, 인조 8년(1630) 도내 유림과 조정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등의

발의로 학포 양팽손을 추배하였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위패는 매안(埋安)하였고 겨우 단(壇)을 마련하여 제향하였는데,

1971년 능주(綾州)의 유림과 제주양씨 후손들이 도곡면 월곡리에 죽수서원을 복원하였다.

그러다가 1983년 다시 한양조씨 정암 조광조선생 후손들에 의하여

본래의 위치이자 죽수서원 사액을 받은 모산리에 죽수서원 복원을 추진,

월곡리의 건물을 이건하고 신축하여 현재 서원의 모습을 갖추었다.

 

서원의 경내는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내삼문과

좌우로 둘러진 담장에 의해 제향(祭享)구역과 강학(講學)구역으로 분리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1989년 동재(東齋), 1994년에 외삼문 보수, 관리사를 신축하였고, 

1997년 내삼문을 보수하였다.

 

정암 조광조는 능주 죽수서원(竹樹書院), 양주 도봉서원(道峰書院), 희천 양현사(兩賢司)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정암집(靜庵集)〉이 있다.

     

 

 

◆ 영벽정(映碧亭)

연주산(連珠山) 아래 조광조의 사당 죽수서원 앞을 흐르는 지석강의 상류 영벽강변에 있다.

강물에 비치는 연주산의 모습이 아름다워 영벽정(映碧亭)이라 이름하였다.

조선 명종, 선조 때 16세기 후반경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인조의 모후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의 고향이라 하여 목사골이 되고

목사 정윤이 아전들의 휴식처로 정자를 개수하였다고 한다.

고종 9년(1872)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73년 능주목사 한치조가 중건, 1920년 중수하였다.

정자 안에는 9개의 현판이 있다. 

 

◇ 영벽정 ⓒ 데일리안

 

연주산(連珠山) 밑을 지나고 있었다.

구슬이 연하여 있는 모양이라 하여서 연주산이라 불리는 산 밑에는

영벽정(映碧亭)이란 작은 정자가 하나 있었다.

일찍이 한훤당 김굉필(寒喧堂 金宏弼, 1454-1504)의 스승이었던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이곳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 김종직의 영벽정 ⓒ 데일리안

 

“연주산 위에 뜬 달은 소반 같은데

풀과 바람 나무 간 곳 없고 이슬 기운만 가득 차네.

천 뭉치의 솜구름 모두 흩어지고

한 덩이 공문서(公文書) 보잘 것 없도다.

시절은 다시 깊은 가을이라 아름답긴 하지만

나그네의 회포를 오늘 밤 누가 달래줄 것인가.

갈 길은 또 서쪽 바다 따라 돌아가니,

손가락 끝으로 장차 게[蟹] 배꼽이나 쪼개리라.”  

 

 

스승 한훤당의 스승이었던 김종직.

문장과 경술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의 종조(宗祖)가 되었던 조선조의 뛰어난 성리학자.

학문적으로는 조광조의 할아버지뻘 되는 김종직이지만

정치적으로도 조광조가 이끄는 신진 사림파의 시조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죽은 후에 무오사화가 일어나 무덤이 파헤쳐져 참시를 당하는 비극의 주인공이고 보면

조광조의 유배는 신진 사림파들이 반드시 겪어야 되는 운명의 대물림인 것인가.

 

정몽주는 격살 당하였고, 그의 제자인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였고,

또 그의 제자인 한훤당은 유배 중에 사사 당하였고,

막내격인 조광조 자신은 가라앉는 배를 타고 이처럼 유배를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 김종직이 지은 시처럼 연주산은 깊은 가을이라 핏물을 뚝뚝 듣는 듯한 만산홍엽으로

물들어 아름답지만 나그네의 깊은 회포는 그 누가 달래줄 것인가.

 

마침내 유배지인 능성에 도착한 조광조는 그 즉시 그곳 현감에게 인계되었다.

현감은 비봉산(飛鳳山) 아래 작은 민가를 구해 놓고 시중을 들 관동을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제자 장잠을 비롯하여 생활에 필요한 일을 도와줄 하인들이

조광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헤어질 무렵 자신을 이곳까지 무사히 호송하고 온 나장들과 일일이 손을 잡고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가 11월 26일.

조광조가 한양에서 유배 길을 떠난 것이 11월 17일이었으니,

정확히 열흘 만에 최종 목적지인 능성에 도착한 것이다.

- 최인호, <유림> 열림원, 2005년

 

 

◆ 최경회 사당(포충사, 褒忠祠)

이 사당은 임진왜란 때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장군 등과 함께 의병에 가담하여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최경회 장군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조선 순조 때 건립한 것이다.

원래 이 사당은 능주목 동면 금전리(현 화순군 한천면 금전리)에 건립되었는데

1963년 3월 금전저수지의 축조로 말미암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최경회(崔慶會, 1532~1593)의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 또는 일휴당(日休堂)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화순출신이며 시호는 영조 22년(1746)에 충의공(忠毅公)으로 하였다.

명종 16년(1561) 진사가 되고, 선조 원년(1567)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을 시작으로 옥구, 장수, 무장(茂長)현감을 거쳐 영암군수에 임명되고

곧 영해 부사(府使), 담양부사를 역임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우의병장(全羅右義兵長)이 되어

금산, 무주 전투에서 왜병과 싸워 크게 전공을 세워

이듬해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해 6월 진주성 2차싸움에서 최후까지 왜군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후에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

능주의 포충사(褒忠祠) 및 삼충각(三忠閣), 화순의 삼충사(三忠祠), 진주의 창열사(彰烈祠),

영해(寧海)의 생사당(生祠堂), 장수의 월강사(月岡祠)에 배향되었다.

 

  

   

 

  

 

 

학포당(學圃堂)

- 소재 :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411 

 

 

  

조선 중종 16년(1521)에 지어진 학포당은

조선 중종대의 학자이자 서화가인 혜강공 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1488~1545)이

기묘사화 이후 낙향하여 능주에 유배와 있던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교유하면서 기거했던 곳이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학포선생이 쓰던 건물이 아니라 중간에 퇴락하여 없어진 것을

1920년에 그 후손들의 현 위치에 복원한 것이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85평이 넘는 경내에는 학포당 창건 당시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 1그루가 있다.
1994년 학포당을 보수하였고,

1995년 외삼문 복원과 담장 보수, 1996년 담장 설치, 1997년 담장 보수를 하였다.

소유자는 제주양씨 문중이다. 

 

 

 

◆ 양팽손(梁彭孫) : 1488(성종 19)~1545(인종 1)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 시호는 혜강(惠康)이다.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기묘명현(己卯名賢 : 조선 중종 때의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사류로, 조광조, 김정, 기준, 한충, 김식,

김구, 박세희, 박훈, 윤자임 등) 가운데 속한다.

 

그는 전라도 능성현(현 능주) 월곡리에서 양이하(梁以河)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송흠(宋欽, 1459-1547) 문하에서 수학했고,

1510년(중종 5)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29세인 151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현량과에 발탁되어

공조좌랑, 형조좌랑, 사관원정원, 이조정랑, 홍문관 교리를 역임했다.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32세인 1519년 교리로 재직 중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재상들이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신진사류를 몰아낸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 · 김정(金淨) 등을 위해 항소하다 삭직되어

고향인 전라도 능성현 쌍봉리에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독서와 서화로 소일했다.

50세 때인 1537년 관직이 회복됨.

 

1539년(중종 34) 다시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544년 김안로(金安老)가 사사(賜死)된 후 용담현령을 지냈지만 곧 사임하고, 이듬해 58세로 죽었다.

 

1630년(인조 8) 김장생 등의 청으로 능주 죽수서원(竹樹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818년(순조 18) 순천 용강서원(龍岡書院)에 추향되었다.

경기도 용인의 심곡서원(深谷書院)에도 배향(配享)되어 춘추로 향사되고 있다.

 

그는 문장과 서화로 명성을 얻은 문신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조선 후기의 윤두서(尹斗緖), 말기의 허련(許鍊)과 함께 호남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손꼽히는데,

특히 양팽손은 호남 화단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그의 문학적인 위상을 살필 수 있는 문집에 《학포유집(學圃遺集)》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에서 그에 관한 언급은 중종(中宗) 12년부터 36년까지 25년 동안 40여 회에 이른다.

한미(寒微)한 집안에서 자라났으나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이 두드러졌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는 벗들이 그의 촌스러움을 헐뜯었다고 하나

강직함이 익히 알려져 있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양팽손보다 6년 연상으로 1510년 생원시에 같이 등과한 조광조(趙光祖)는

그와 평생 뜻을 같이한 지인인데, 조광조는 학포 양팽손에 대해

‘더불어 이야기하면 마치 지초(芝草)나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서 풍기는 것 같고

기상은 비 개인 뒤의 가을 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막 걷힌 뒤의 밝은 달과 같아 인욕을 초월한 사람’

이라 묘사했다.

조광조의 유배당시 곁에서 함께 한 이가 학포였고 조광조가 타계하자 학포는 그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 학포 양팽손 묘

쌍봉마을 앞 쌍봉천을 건너서 오른쪽으로 뻗어 나가는 들판을 300여m 쯤 가면

중조산(中條山, 일명 大山) 입구의 산기슭에는 양씨 제각인 영모재(永慕齋)가 자리잡고 있다.

이 제각 뒤로 뻗은 골짜기 길을 타고 올라가면 길 오른쪽에 「학포천(學圃阡)」이라 새겨진 바위가 있고,

5분쯤 올라가면(제각에서부터 약 470보) 큰 봉우리 밑에「증 정부인 김해김씨지묘」가 있고,

거기서 왼편으로 100보쯤 계속 올라간 곳에 학포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오른쪽 봉분에는 학포와 금산김씨 부인을 합폄(合窆)하였고 왼쪽은 청주한씨 부인의 봉분이다.

이 자리를 사람들은 비봉포란(飛鳳抱卵) 형국이라 부른다.

 

 

△ 학포(學圃)와 정암(靜菴)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은 조광조(趙光祖, 1482~1519)보다 6살 연하였으나

능주가 고향인 선비로 사마시를 함께 응시하여

조광조는 진사에, 양팽손은 생원시에 각각 장원으로 급제하였던 인연을 갖고 있었다.

특히 양팽손이 성균관에 입학하였을 때 유생들은 양팽손을 ‘촌놈’이라 부르며 푸대접하였지만

조광조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고 가까이 지내왔던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것이었다.

 

조광조와 함께 동문수학했던 친구 학포 양팽손은 정암이 유배를 당할 때,

그를 위한 상소를 올렸다가 훈구파의 미움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인 능주로 내려왔다.

 

한편, 정적으로부터 ‘광인(狂人)’ 혹은 ‘화태(禍胎, 화를 낳은 근원)’라 불린

조선 최고의 급진적 개혁정치가 정암 조광조는 성리학적 이상주의를 조선 땅에 뿌리내리고자 한

철저한 원칙주의자였을 뿐, 부패한 관리는 절대 아니었다.

 

조광조는 죽음을 맞으면서 시를 한 편 남긴다.

 

愛君如愛夫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했고

憂國如憂家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했노라

白日臨下土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

昭昭照丹衷  내 일편단심 충정을 밝게 밝게 비추리.

   

조광조가 마지막으로 시를 짓고 사약을 받아 죽음을 맞자 양팽손이 시신을 염습하여

능성(綾城)에서 30여 리 떨어진, 쌍봉사 부근 중조산(中條山) 깊숙한 골짜기(조대감골)에 암장을 했다.

이듬해인 1520년(중종 15) 경기도 용인의 조광조의 선영하에 이장하고

그해 여름에는 조광조의 시신을 겨울 동안 암장했던 중조산 골짜기에

죽수사(竹樹祠)라는 영당(影堂)을 지어 자신이 그린 조광조의 초상화를 걸게 하고

문인과 제자를 시켜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것이 죽수서원(竹樹書院)의 효시이며,

그 후 26년만에 태학생 홍인헌(洪仁憲) 박겸(朴謙) 등이 상소하여 신원(伸寃)끝에 관작이 회복되고,

1569년(선조 2) 대사간 백석걸(白石傑)의 주장과 이퇴계의 조언으로

문정공(文正公)의 시호가 내려짐과 동시에 ‘죽수’ 사액이 내려졌다.

1630년(인조 8)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주장과 사림의 건의에 의하여

조정에서 학포 양팽손을 함께 추가 배향하도록 허락하여,

생전에 의리로 맺었던 교분이 죽은 뒤에도 같은 사우(祠宇) 안에 모셔져

‘사동(四同)’이라 하여 존경과 추모를 받게 된 것이다.

*** '사동(四同)'이란, 서로 같은 네 벗을 말하는데,

말은 부화뇌동하지 않으나 뜻은 같고, 행실은 답습하지 않으나 취향은 같고,

벼슬길에 나아가기는 선후가 있으나 시기는 같고, 직분은 안과 밖이 다르나 하는 일은 같다

 

도학을 숭상하여(崇道學)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正人心)

성인과 현자를 본받아(法聖賢)

지극한 정치를 일으키도록 하세(興至治)

 

양팽손이 조광조의 초상화 밑에 적어놓은 위와 같은 네 구절의 글도

사실은 살아생전의 조광조가 목숨보다 중히 여기고 실천했던 신념이자,

유도(儒道)가 타락한 인간 세상에 하늘의 도를 펼치고자 했던

신진 사류(士類)들의 피 끓는 맹세나 다름없었다.

 

 

 

 

△ 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양팽손은 사대부이면서도 그림에 일가견을 보여, 안견(安堅)의 산수화풍을 계승한 <산수도>가 전한다.

이 작품은 16세기 전반 편파구도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며,

은둔의 심회를 읊은 제시(題詩)가 적혀 있어 1521~45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家住淸江上   깨끗한 강가에 집 지어놓고

晴窓日日開   맑은 창은 늘 열어 놓으니

護村林影畵   산촌을 둘러싼 숲그림자 그림 같고

聾世瀨聲   흐르는 강물소리 세상일 들리지 않네

客棹隨潮泊   나그네 물결 따라와 닻을 내리고

漁船捲釣廻   고깃배 낚시 거두어 돌아오네

遙知臺上客   저 언덕 위의 나그네는

應爲看山來   응당 산천구경 나온 것이리.

 

江闊飛塵隔   강은 넓어 분분한 티끌 이르지 못하고 

灘喧俗語聾   여울소리 요란하니 속된 사연 아니 들리네

漁舟莫來往   고깃배야 오고 가지를 마라

恐與世上通   행여 세상과 이어질까 보다.

- 학포 양팽손

 

조선 초기, 종이에 수묵, 88.2cm×46.5cm, 국립중앙박물관

 

학포 양팽손은 중종 때 문장과 서화로 명성을 얻은 문신이다.

안견의 산수화풍을 이었다고 평가받는 학포는

후기의 윤두서(尹斗緖. 1668-1715), 말기 허련(許鍊. 1809-92)과 함께 호남의 3대 문인화가로 불리며

호남 화단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양팽손의 〈산수도〉는 당시 화단의 주류를 이루었던 안견의 작품이라 전해지는 산수도와

비슷한 화풍을 보인다. 일찍부터 알려진 그의 대표작인데,

일제강점기 데라우치총독이 박물관에 기증한 그림이다.

한편으로 치우친 구도, 봉우리가 겹쳐지면서 점차 멀어지는 원경의 모습,

근경 물가의 언덕에 모인 선비들의 모습 등 당시 공통적인 산수화 양식을 보여준다.

 

화면의 오른쪽 위에는 은둔생활을 노래한 두 수의 오언시(題詩)와 함께

양팽손의 호인 학포(學圃)라는 낙관, 그 아래에 방형(方形)의 양각 도장이 찍혀 있어서

양팽손의 그림으로 전해지나, 전해지는 작품이 전칭작(傳稱作)을 포함하여 10점 내외여서

그의 화풍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시팔경도>는 구도, 구성, 필묵법, 수지법에 있어서 후대 안견파 화가들의 산수화에

하나의 모범을 제시했다. 즉 양팽손의 <산수도>는 <사시팔경도>를 계승하되

근경, 중경, 원경의 삼단을 형성하는 ‘편파삼단구도(偏頗三段構圖)’를 보여준다.

전경(前景)에서 중경(中景)으로 이어지는 구도가 자연스럽고,

경물 사이에 연운(煙雲)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표현되어 있는 점이나,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바위의 모습 등

조선 전기의 화풍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의 하나로서 가치를 지닌다.

학포 양팽손의 <산수도>는 16세기 한국 회화사를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조선이 일본 회화에 끼친 영향 등 양국 회화교류의 측면에서 자주 거론되기도 한다.

   

양팽손의 ‘산수도(山水圖)’

 

학포 양팽손은 정5품의 홍문관 교리를 지낸 선비화가이다.

그의 ‘산수도’는 선비정신을 담은 마음의 풍경이다.

이 풍경이 실제 자연을 근거로 한 것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여말 선초의 산수화 경향이 그랬다.

그의 이러한 ‘일정한 틀이 정해진 산수그림(정형산수, 定型山水)’은 안견과 그 흐름이 맞닿아 있다.

안견파의 영향이라고 불리는 이 그림들의 연원은

11세기에 활동한 북송의 화가 곽희(郭熙)로 올라간다.

몽글몽글한 구름 모양의 언덕과 산봉우리, 게발톱 같은 나뭇가리의 숲,

먼 산과 가까운 산을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시점의 혼용 등이 그것이다.

 

안견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에서도 이러한 양식적 특징들이 보인다.

사계절의 여덟 장면을 화첩에 그린 것으로 이 그림은 늦봄의 온화하고 따뜻한 풍경을 묘사했다.

왼쪽으로 몰아붙인 편파구도, 바위 기슭의 나무 치는 법,

능선을 따라 짧은 점선을 잇대어 찍어서 나무를 표현한 방법 등이 비슷하다.

다만 양팽손의 그림이 보다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른 작가의 개성이 드러난다.

그것은 산수를 빌어 표현한 삶의 내력이자 정신의 궤적이다.

풀 먹인 모시 적삼같이 깨끗하고 투명한 선비정신을 담아냈다.

- 우리 그림 백가지, 박영대, 현암사, 2002년, 99쪽

   

이 밖에 문중에는 원화는 아니나 '학포선생산수도'라는 제목이 화면상에 있는〈산수도판각〉이

전해지는데 화면구성 및 산세 표현, 나무처리기법 등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산수도〉와 친연성이 감지되는 작품으로

양팽손의 문집 발간시 제작된 것으로 사료된다.

 

이와 함께 문중이 소장한 <매죽도판각(梅竹圖板刻)>,

원래는 8폭 병풍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4폭만 전해지는 병풍화 <묵죽(墨竹)>이 전하는데

노산 이은상의 언급에 따르면

이본호남가(異本湖南歌)의 실내묘사에 '학포의 묵죽'이란 대목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양팽손이 대나무를 그렸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묵죽의 경우 죽순이 등장한 봄, 바람에 휘날리는 세죽(細竹)과 굵은 줄기의 통죽(筒竹) 등

계절이 안배된 일괄품이다. 매 에 화가이름을 알려주는 도장과 묵서의 작품명이 있는데

이는 후대의 것으로 사료된다. 매폭 예외 없이 새들이 등장하여.

조선중기에 문인화가들이 수묵으로 즐겨 그려 크게 유행한 사계영모도(四季翎毛圖) 계열,

그리고 15∼16세기 청화백자의 문양으로 등장하는 대나무 및 새들과 친연성이 감지되는 그림들이다.

 

현재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기명절지도에 속하는 <연지도(蓮芝圖)>는

학포의 후손이 1916년 추사(金正喜, 1786-1856)의 본가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며,

양팽손의 외손인 이이장(李彛章,1708-1764)이 1761년에 쓴 제발이 첨부되어 있어

양팽손이 그림을 잘 그렸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자료이기도 하다.

다기(茶器)와 함께 연꽃, 영지가 그려진 두 폭으로 그가 차 살림을 했다는 것을 추정케 한다.

또, 오늘날 이 소재의 그림은 윤두서에 이어 책가도(冊架圖) 계열의 조선말기 것들이 전래되는데

이 분야의 그림 중에서는 시대가 올라가는 점에서도 중시된다. 

 

한편, 일본에는 유현재(幽玄齋) 소장의 전술한 <산수도>와 매우 유사한 그림이 알려져 있고,

1996년 대화문화관(大和文華館)에서 개최된 ‘조선회화특별전’에

김익주(金翊胄)의 1720년 간기(刊記)가 있는 <호렵도>와 <산수도> 전칭작이 출품되었다.

한편 사군자, 산수화 8폭병풍이 일본 동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2003년 '4월의 이달의 인물'에 선정되어 문화관광부에서 발간한 책자에서 참고

      

 

 

 

 

 

 - 전수연 / "바람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