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새
첨단 원자력기술로 검증한다
“남과 북이 통일을 약속하고 그 첫 상징인 경의선 철도 완전 개통식을 추진한다.
그러나 일본은 1907년 대한제국과의 조약을 근거로 개통식을 방해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압박한다.
‘고종의 숨겨진 국새가 있다’고 주장하는 최민재박사(조재현)는 국새를 찾는다면
일본의 억지 주장을 뒤엎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의 확신을 믿게 된 대통령(안성기)은 ‘국새발굴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 마지막 희망을 거는데…”
이것은 2006년 개봉한 영화 ‘한반도’의 줄거리입니다.
왜 영화 ‘한반도’로 이야기를 시작하는지 궁금하시죠?
이 영화의 키워드가 된 ‘국새’와 관련된 원자력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를 통해 확인
국새는 왕조시대에는 왕권의 상징으로,
오늘날에는 국가의 상징으로 나라의 중요문서에 사용되는 도장입니다.
국새는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의 지위에서 행하는 헌법공포문, 훈ㆍ포장증, 5급 이상 공무원의 임명장,
중요 외교문서 등에 날인되고 있는데 연간 16,000번 정도 사용되고 있다고 하네요.
지난 2월(2008년) 출범한 새 정부는 얼마 전 새로 제작한 ‘4대 국새’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난 1999년부터 사용하던 국새를 정밀검사한 결과,
내부 깊숙한 곳까지 금이 간 사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죠.
따라서 새로 제작한 국새는 한국원자력연구원에 있는 국내 유일의 연구용 원자로인 ‘하나로’를 통해
최초로 품질검증까지 받았습니다.
비파괴검사로 물체 내부의 결함 알아내
국새와 같이 합금으로 만들어진 무거운 물질은 중성자를 쏘여 내부의 결함을 알아낸다.
'중성자토모그라피' 장치를 이용하면 물체의 내부 구조를 3차원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어떤 원자력의 원리로 물체의 결함 유무를 찾아내는지 함께 알아볼까요.
국새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데는 ‘비파괴검사’라는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비파괴검사는 물체를 파괴하지 않고 내부의 결함을 검사하는 방법 전부를 이르는 말로,
사람 몸속을 들여다보는 X선 촬영도 일종의 비파괴검사인 셈이죠.
하지만 국새의 경우에는 금, 은, 구리, 아연, 주석의 합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반적인 X선으로는 내부를 살필 수 없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성자를 국새에 쪼여 투과된 정도를 살펴서 내부의 결함을 알아내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중성자는 X선과는 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무거운 물질도 투과할 수 있기 때문에
국새와 같이 합금으로 이뤄진 물체의 내부를 살피기에 좋답니다.
특히 이번 검사는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에 설치된 비파괴검사 장치를 이용해서 이뤄졌습니다.
이는 원자로 연료인 우라늄이 붕괴하면서 방출하는 중성자를 모아서
장치 안에 놓인 국새에 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죠.
즉 중성자가 장치 속의 국새를 투과하는 힘과 각도 등을 관찰해 내부의 균열을 살피는 것입니다.
‘중성자 토모그라피(Neutron Tomography) 장치’는
중성자를 이용해 촬영한 물체의 내부구조를 3차원으로 영상화하는 장비로
병원에서 쓰이는 컴퓨터 단층촬영(CT)과 같은 식으로 물체의 내부를 볼 수 있답니다.
이와 같이 중성자 비파괴검사는 비행기, 우주선 부품 등 안전이 매우 중요하지만
속을 뜯어볼 수 없는 물체에 주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현재 국내에서의 사용은 무척 제한적입니다.
왜냐하면 국내에 중성자 비파괴검사를 할 수 있는 연구용 원자로는 ‘하나로’ 단 1기뿐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탄소-14 연대측정법은 발견되는 유물들의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매우 유효한 방법이지만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어요. 1회측정에 수 그램의 탄소 시료를 필요로 한다는 점 때문이었는데,
연대를 알고자 하는 유물 중에는 귀중한 것이 많아서
측정을 위해 수 그램이나 되는 탄소 시료를 떼어낸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죠.
그때 등장한 것이 바로 가속기 질량분석기였답니다.
그럼 탄소-14 연대측정법이 실제로 이용된 사례를 알아볼까요.
경주 황남동 제98호 고분으로도 알려져 있는 황남대총은
금관과 금동관 등 7만여 점의 유물이 발굴된 국내에서 가장 큰 초대형 고분이죠.
1973년 발굴에서도 무덤 주인공에 대한 결정적 자료가 나오지 않았고,
신라초기의 고분들에 관한 역사적 기록도 없었죠.
따라서 축조시기를 둘러싼 많은 논란이 있었으며 학자에 따라 200-300년 정도 차이가 있었는데,
결국 제17대 내물왕(A.D. 356-402) 또는 제19대 눌지왕(A.D. 417-458) 무덤으로 압축되었습니다.
서울대학교 AMS연구센터는
발굴유물 중에서 섬유, 백화수피편, 갈대, 가죽편 그리고 칠기편 등의 시료를 채취,
AMS를 이용해 분석한 결과 황남대총은 A.D. 420-520년의 것으로 압축했죠.
따라서 황남대총의 피장자가 A.D. 458년에 사망한 눌지왕으로 알려지고 있답니다.
- 글: 최정운, 사진: 김정원
- 한국원자력문화재단 타운 홈페이지
- 사라져 버린 제1대 국새(태극 익룡)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은 선포한다.
새로운 나라에 걸맞는 새로운 국새를 필요로 한 제1공화국은
옥새전각장 석불 정기호(1889~1989)로 하여금 대한민국 정부 1대 국새를 만들게 하여
모습을 드러낸 1대 국새 '태극익룡 1호 국새'는 은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졌으며
손잡이 모양은 용이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용은 황제나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상징이기 때문에
과거의 역사속에서 중국의 전유물이었는데 대한민국 최초의 국새를 용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큰 상징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역사속에서 대부분 봉황을 상징으로 사용했으며
자주성을 강조한 고려 건국 초기나 대한제국과 같이 몇몇 특수한 시점에 용을 상징으로 사용했었다.)
1대 국새는 용의 발톱 수가 5개인 '오조룡'을 사용,
결국 이승만 정부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큰 의미를 두고 자주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오조룡'을 형상화한 국새를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고 수도 서울을 비우고 피난을 가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국새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당시 국새를 관장하던 총무처의 총무처장이
국새를 직접 안고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피난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1954년 11월 1일에 국새를 재등록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한민국 1대 국새인 '태극익룡 1호 국새'는 한국전쟁을 거치는 시기에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피난통에 분실했다는 소리도 있고 누군가가 이를 빼돌려서 개인소장 하고 있을 것이란 추측도 있다.
왼쪽의 그림이 바로 대한민국 1대 국새 '태극익룡 1호 국새'
위의 이상한 동물 모양의 국새는 대한민국의 1대 국새인 '삽살개 2호 국새'
비화에 따르면, 정기호 옥새전각장이 1대 국새를 만들어서 정부에 보내고 나니
한 권력자가 국새를 하나 더 만들어 달라고 요청을 했다고 한다. 이에 불쾌해진 정기호씨는
그 권력자를 조롱하는 방법으로 손잡이가 삽살개인 또 하나의 국새를 만들어 보낸다.
이 국새는 일반적인 국새와 다르게 삽살개의 엉덩이가 앞에 오고 있으며
개는 몸을 돌려서 앞을 보고 있는 모양으로 엉덩이가 앞으로 오다니.. 말 그대로 치욕이었다.
그러나 문화공보부가 대한민국 1대 국새라면서 찍어서 국가기록원에 넘겨준 사진은
이 '삽살개 2호 국새'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1대 국새 '삽살개 2호 국새'
그런데 정통성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삽살개 2호 국새' 역시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
2대 국새가 만들어서 사용된 1963년까지는 분명히 사용된 기록이 있는데
지금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는데 고위공무원이나 정부권력자가 개인소장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진짜 1대 국새, '태극익룡 1호 국새'는 스케치로만 남아있고
정통성도 없는 가짜 1대 국새, '삽살개 2호 국새'는 사진으로만 남아있고...
혼란했던 당시 대한민국 현대사를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 볼품없는 제2대 국새(거북)
대한민국 2대 국새, '거북 국새'
최장수 '거북 국새'이다.
군사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박정희 군사정부는
대한민국 1대 국새인 '태극익룡 1호 국새'와 '삽살개 2호 국새'의 행방이 묘연한 상태에서
2대 국새를 제작하였다.
하지만, 나라의 중요문서에 국가의 상징으로서 날인되는 대한민국의 2대 국새는
어이없게도 서울 광화문 근처에서 도장집을 하던 남기웅씨가 10일만에 뚝딱 제작하게 된다.
국새의 모습도 1대 국새에서 사용됐던 용의 상징성이 사라진 '거북이' 모양이었고
예술성 또한 떨어졌으며 '대한민국'이라고 새겨진 한글 서체도 치졸했다고 한다.
제2대 거북 국새는 36년이 넘도록 매년 16,000회 가량 사용되어 인면이 많이 손상되어
1999년 1월 31일 마지막으로 사용된 후, 지금은 대전 정부청사 국가기록전시관에 전시 보관중이다.
- 균열로 인해 퇴출된 3대 국새(봉황)
대한민국 3대 국새, '봉황 국새'
50년만에 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정권교체로 김대중 정부가 탄생했다.
IMF 구제금융의 혼란 속에서 '제2의 건국'을 선포한 김대중 정부는
닳고 닳은 '거북 국새'를 대신할 대한민국 제3대 국새를 제작하게 된다.
이전에 사용하던 국새의 수명이 다해 그 시기도 적절했고,
IMF 국가위기를 거치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국새를 만드는 일이라 그 상징성도 충분했던 것.
대한민국 제3대 국새 '봉황 국새'는
제1대 국새 '태극익룡'을 제작한 옥새전각장 석불 정기호의 제자인 세불 민홍규가 책임 제작하였으며
1999년 2월 1일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금 75.2%, 은 11.8%, 동 11.6%, 아연 1.4%가 함유된 금 18K로 이뤄졌다.
1999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 의해 제작 당시 순수제작비는 5천450만원.
또 국새의 인면부 크기는 10.1×10.1㎝이며 총중량은 2.15㎏이다.
인영(印影)은 '대한민국'이라는 한글 훈민정음체로 양각되었다.
이밖에 국새함, 인끈, 국새함 보자기, 자물쇠, 자물쇠 주머니, 열쇠술 각 1점도 함께 제작되었다.
3대 국새는 1년에 평균 1만6천회, 9년간 14만4천회에 걸쳐서
훈·포장증이나 장·차관 등 공직자의 임명장 등에 사용됐다.
그러나, 대한민국 제3대 국새는 1명의 장인이 책임을 지고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분업방식으로 만들어진데다 그 제작과정이 짧아서 문제가 있었다.
봉황국새는 1999년 겉면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고, 좌우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기울어져 있어서
하자가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2005년 당시 행정자치부 의정과에서 비파괴를 검사를 실시한 결과,
국새의 안쪽에도 균열이 생긴 것으로 드러나
결국 당시 노무현 정부는 새로운 국새 제작을 시작했으며
제3대 '봉황 국새'는 2008년 1월 31일까지 사용된 뒤, 정부대전청사의 국가기록전시관에 보관되었다.
국새의 안쪽 깊숙히까지 균열이 생겼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 새롭게 완성된 4대 국새
제작이전, 대한민국 제4대 국새의 계획모형
2005년 제3대 국새에서 균열이 발견된 이후, 새로운 국새제작을 계속해 온 노무현정부는
2008년 1월, 대한민국 제4대 국새인 '봉황국새'를 완성, 공개했다.
봉황모양의 손잡이를 가지고 있고, 훈민정음체의 '대한민국'이 새겨진 새로운 국새는
제3대 국새를 제작했던 옥새전각장 세불 민홍규가 제작했다.
대한민국 제4대 '봉황국새'는 2008년 2월1일 이명박정부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된다.
대한민국 제4대 국새 '봉황 국새'
새로 만든 대한민국 제4대 국새
현재까지 대한민국 국새는 건국 이후 모두 4차례 제작되었는데,
첫 국새는 1949년 5월 제작돼 1963년까지, 2대 국새는 1963년부터 1999년 2월까지 사용됐다.
처음 제작된 1대 국새는 한국전쟁과 군사쿠데타를 거치면서 사라져, 1대 국새는 행방을 알 수 없고,
2대 국새는 군사정권에 의해 졸속으로 만들어져서 결국 대전 정부청사 국가기록전시관에 보관돼 있다.
1999년 2월부터 2008년 2월21일까지 사용한 3대 국새는 2005년 균열이 발견되면서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원에 영구보존되었다.
그 해 10월, 4대 국새를 제작하여, 2008년 2월22일부터 사용하고 있다.
4대 국새는 자문위 구성~전국민 대상으로 인문(印文·국새면) · 인뉴(국새손잡이 부분) 설문조사~
국새 모형 공모 등을 거쳐 국새모형 당선작가인 전각가 민홍규씨가 제작을 주도했다.
금 합금인 국새는 99×99×99㎜크기로 무게는 2㎏.
인문에는 ‘대한민국’ 네 글자가 훈민정음체로, 인뉴는 봉황이다.
국새를 날인하는 장면.
국가의 상징인 만큼 국새 제작과정에서도 많은 뒷이야기가 녹아있다.
국새 제작시 진흙거푸집은 서울 북한산을 비롯해 전국 9개 명소의 흙을 사용했고,
내함을 싸는 겹보자기에는 금실 자수를, 국새 받침대는 전통한지 200장을 1800겹으로 배접했다.
인궤에는 철갑상어 가죽과 가죽 가공과정에는 닭똥 · 쌀겨 등이 사용되기도 했다.
국내 최고의 전통공예 각 부문 장인들이 만든 전통예술의 결정판인 셈이다.
- 출처 : Make a better place 참조, 재정리
태평새(璽)
중국 진시황은 봉황새가 깃든 돌에서 캐낸 옥(玉)을 얻어
‘수명어천기수영창(受命於天其壽永昌 : 하늘에서 명을 받았으니 그 수명이 영원히 번창하라)’이라는
글을 새긴 도장을 만들었다. 문헌상 나타난 최초의 국새(國璽)라고 한다.
재질이 옥이어서 ‘옥새(玉璽)’라 불리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천년 전 환웅이 아버지 환인으로부터 천부삼인을 받았다는 <삼국유사>의
단군고사 내용이 있고, 부여 예왕 때 ‘예왕지인’이라는 국인(國印)이 사용됐다는 기록도 있다.
오래 전부터 국새가 사용됐다는 방증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요, 금, 원, 명, 청나라 황제로부터 옥새를 받았다.
1987년에 이르러서야 국권의 상징인 국새를 우리 손으로 제작했다.
당시 고종은 대한제국이 독립국임을 선포하고 용을 상징물로 한 옥새를 만들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첫 국새는 1949년 탄생했다.
‘대한민국지새’라는 여섯자가 한문으로 새겨졌다.
1963년 국새규정 개정에 따라 한글로 ‘대한민국’ 넉자를 새긴 두 번째 국새가 제작됐고,
1999년 봉황국새로 다시 바뀌었다. 그리고 봉황국새에서 내부균열이 발견되어
2005년 네 번째 국새제작에 들어갔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공모절차를 거쳐 마침내 ‘제4대 국새 헌정식’ 정부 중앙청사에서 열렸다.
가로, 세로, 높이가 99㎜인 4대 국새 제작에는 민홍규 단장을 비롯,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10명을 포함해 29명이 동원되었다.
국권의 상징인 국새는 물론 16가지의 의장품을 만들기 위해
각 분야의 대표적 장인들이 힘을 보탠 것이다. 나무와 종이, 가죽 등 각종 재로는 최상품이다.
그래서인지 도장이라기보다 탁월한 예술품이라는 평가다.
국새는 헌법 공포문 전문과 훈ㆍ포장 증서. 중요 외교문서 날인 등 연간 1만5천여 회나 사용된다.
새 국새는 이명박대통령이 취임하면서부터 사용되었다.
민홍규 단장의 국새 공모작 이름은 ‘태평새’였다.
모두 편안하게 잘 살았으면 하는 희망이 담겨있을 것이다.
이명박대통령이 올해(2008년)을 상징하는 사자성어로 택한
‘시화연풍(時和年豊, 나라가 태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과도 맥이 닿아 있다.
- 김진홍 논설위원, 2008년 1월30일, 국민일보, [한마당]
옥새전각장, 민홍규
국새, 국운상승 철학 담겨 세계적 예술품으로 인정.
'옥새(玉璽)'는 왕실의 도장이자 상징이었다. 왕실이 강하고 흥했을 때는 권위와 영광의 상징이었고, 왕실이 약하고 침략당했을 때에는 망국의 비애요, 회한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런데 40여 년 가까이 어찌 보면 소외된 전통을 붙들고 섭씨 1500도의 뜨거운 가마 옆을 지키며 조선시대 대표적인 옥새를 복원하고 새롭게 만들어 온 옥새전문가, 옥새전각장, 민홍규 세불옥새전각연구소 소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옥새’의 역사를 소급해 올라가면 <삼국유사>에까지 도달한다. <삼국유사> 첫 장에 우리나라의 최초 고대국가는 ‘하늘로부터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받아 국가를 열었다’는 대목이 보인다. ‘천부인’이라고 하는 도장은 하늘의 뜻과 권위를 상징한다. 천부인을 받았다는 것은 하늘의 결재를 받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조선조의 역대 왕들이 사용하였던 도장인 옥새도 바로 이러한 맥락의 권위를 상징한다. 왕이 지닌 권위를 가장 작은 조형물로 압축한 것이 옥새이다. 그래서 왕이 바뀔 때마다 옥새를 확보하는 일이 관건이었다.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거사를 하면서 가장 먼저 손을 썼던 일 역시 광해군으로부터 옥새를 돌려받는 일이었다. 왕이 사망하였을 때는 대비가 옥새를 보존하고 있다가 다음 왕 즉위할 때 옥새를 전해주는 일을 맡았다. 조선시대에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 가장 중요한 의례가 바로 옥새를 인수인계하는 부분이었던 것이다.
옥새 제작은 비공개, 비기록이 원칙
조선왕조 옥새의 시작은 정도전의 주장에 의해서였다. 이때부터 옥새를 제조하는 비방을 적어놓은 ‘영새(榮璽)부’라고 하는 장부가 전해져 왔었는데 중간에 오면서 옥새를 위조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나라에서 특별히 지정하는 옥새전각장 1인에게만 그 내용이 비전으로 전해져왔다. 그 영새부를 이어받은 마지막 옥새전각장이 민홍규 소장이다. 옥새는 왕의 신표(信標)이며 나라를 대표하는 표상이다. 사방 3촌(약 10㎝)의 작은 크기이지만 여기에는 서예, 회화, 조각, 전각, 금속공예 등이 함축되어 있다. 다면적 종합예술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손 안에 잡히는 조그마한 도장에 왕조 고유의 격식과 품격을 담아낸 옥새야말로 ‘방촌(方寸)의미’의 절정이고 ‘조선시대 예술의 보고’라고 말한다. 그래서 다른 예술 분야와 달리 옥새 전수자는 주로 서사관이나 화원 등 양반출신들이 맡아왔다고 덧붙였다. “전통적으로 옥새전각장은 교서관, 서사관들을 임명하고 중인, 상민 등은 배제했습니다. 국새는 임금의 상징물로 국새를 만드는 일은 임금의 옥체를 만진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전각장이 인본(印本)을 만들면 전문 사서관이 확인하고 옥새와 문자를 관장하며 감독했지요.”
그러나 제작방식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나라의 인장이 유출되면 국기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경국대전은 ‘옥새와 화폐는 절대 위조되어서는 안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옥새 제작은 비공개, 비기록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후기 옥새에 대한 기록을 담은 <보인소의궤>가 나올 때까지 어느 문헌에서도 옥새제작에 관한 언급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옥새전각장이 ‘영새부’라는 이름으로 전수자에게 비밀리에 전수한 게 전부였죠.”
옥새 제작에 관한 기술을 전수자에게만 비밀리에 담아 전한 ‘영새부’
‘영새부’의 첫귀절은 ‘새인용처지천태(璽印用處地天泰)’라는 내용이다. ‘지천태’는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밑에 있으니 평화롭다는 의미를 지닌 주역의 괘 이름이다. ‘국새는 지천태의 평화를 위해서 사용한다’는 의미가 도출된다. 국새의 제작과정에는 동양사상의 3대 축인 천시(天時) · 지리(地理) · 인사(人事)의 삼재(三才) 사상이 농축되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만큼 옥새 제작은 인격 수양과 철학이 요구되는 고난도의 작업이었다. 옥새전각장 민홍규에 의하면 국새를 배우는 데 고전공부 4년, 서예공부 4년, 전각학습 4년을 합해서 총 12년의 세월이 걸린다고 한다. 그는 36년 동안 국새를 만들다가 폐와 신장까지 잃었다. 현재 한 · 중 · 일 3국 중에서 옥새 제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민홍규 한 사람뿐이라고 한다.
유일의 옥새전각장인 민소장은 옥새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예술품이 될 수 있다고 장담한다. “청나라 옥새가 소더비 경매에서 6억원에 낙찰될 정도로 옥새는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예술품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국운을 상승시킬 수 있는 철학을 담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상징물로 제작되느냐에 따라 의미도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민소장은 대한제국 국새제작자인 황소산에 이어 조선조의 옥새전각을 계승한 정기호 문하에 16세에 입문해 전통제작법을 전수받은 장인으로 그동안 조선시대 옥새 73과 중 40여 과를 복원했다. 민소장은 1996년 삶의 터전을 경기 포천에서 이천으로 옮겨 그가 작업하는 곳은 이천에서도 한적한 설성면 장천4리 농촌마을에 정착하였다. “옥새를 제작할 때는 거푸집이 중요합니다. 거푸집은 진흙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진흙이라고 다 똑같지 않습니다. 장호원에서 나는 진흙이 좋은데 그건 이미 조선시대 옥새 제작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천으로 옮겼지요.”
민소장에게는 아직 전수 후계자가 없다. 조선시대에는 옥새 1개를 만드는데 서예가, 전각장, 사서관, 매듭장 등 수십 명이 동원됐다. 서예, 전각, 가마작업 등을 혼자서 하려면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민소장이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옥새에 대한 열악한 인식이다. “사람들은 인감의 중요성을 잘 알면서 1000년 역사가 담긴 옥새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도 주권국가의 상징인 국새의 전통이 끊이지 않도록 살폈으면 좋겠습니다.” - 글 최모림 차장, 사진제공, 국립전주박물관 - KOREA TODAY / 2006.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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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새도 기가 막힌 ‘금도장 로비’
4대 국새 제작과정 비리 의혹 쏟아져 국가 기강 세우려면 차라리 새로 만들자! |
조선 태종 3년(1403) 4월 8일 明나라 영락제의 즉위를 축하하러 간 등극사(登極使) 하륜(河崙, 1347~1416)이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가지고 한양에 도착했다. 고명은 중국 황제가 주변 제후국 왕을 임명하는 임명장이고, 인신은 왕의 권위를 보장하기 위해 금으로 만들거나 도금한 도장인 금인(金印)이다. 이른바 고명과 금인은 조공책봉 관계의 표징으로 중국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비로소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편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 개국 이래 태조 이성계는 명태조 홍무제에게 고명과 인신을 요청했으나 종계변무 문제(宗系辨誣問題·이성계 계보를 바로잡기 위한 문제), 표전 문제(表箋問題 · 정도전이 작성한 외교문서로 명태조가 정도전 소환 요구), 양국 간 국경 마찰 등 외교 현안으로 불편한 관계가 계속돼 성사되지 못했다.
이런 험악한 조명관계가 홍무제의 훙거와 정도전의 죽음으로 실마리를 찾았다. 홍무제 사후 명나라는 2대 황제인 건문제가 즉위했으나 3년 후 삼촌 영락제에게 숙청되는 내전이 일어났다. 이러한 명나라의 복잡한 내부 상황은 조선에 유리하게 작용해 태종이 2대 황제에게 고명과 인신을 받았음에도 새 황제인 영락제에게 새로운 고명과 인신을 요청하자, 영락제는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조선에게 바로 고명과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 새겨진 금인을 보냈다. 이성계는 말로만 조선 국왕이었고, 조선 국왕이란 명칭은 태종 때부터 사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로써 조선과 명의 사대외교가 정립됐으니 이른바 존명사대(尊明事大) 정책으로 조선은 명나라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용하면서 조공무역을 통해 경제적 실리를 추구할 수 있었다.
조선 초, 명나라 영락제가 ‘조선국왕지인’ 금인 보내
조선 국왕이 중국 황제로부터 받은 금인은 흔히 옥새(玉璽)라고 통칭했는데, 정확하게 따지면 옥새는 옥으로 만든 인장이다. 진시황제 때 화씨벽(和氏璧)을 얻어 천자의 인장으로 제작한 것이 그 유래인데 중국으로부터 내려진 옥새에는 ‘예왕지인(濊王之印)’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 혹은 ‘조선국왕지인’ 등의 인문(印文)이 새겨져 있었다.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출범하면서 자주적 의미의 옥새가 처음으로 제작 · 사용됐는데 ‘대한국새(大韓國璽)’와 ‘황제지세(皇帝之璽)’의 두 가지 인문이 새겨졌다.
옥새는 왕조시대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대문서(외교문서) 및 왕명으로 행해지는 국내 문서에 사용됐고, 왕위 계승 시에는 전국(傳國)의 징표로 전수됐다. 또 국왕 행차 시 행렬 앞에 봉송돼 위의당당(威儀堂堂)을 과시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옥새제도가 폐지되고 새로운 국가의 상징으로 국새(國璽) 제도가 마련돼 1949년 5월 ‘대한민국지새(大韓民國之璽)’가 제작됐다. 1970년 3월 인문을 한글 전서체(篆書體)로 고쳐 ‘대한민국’으로 했다.
옥새도 태평성대에는 정상적인 왕위 교체로 차기 왕에게 전수됐으나 난세에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세도정치기가 시작되는 순조 원년(1800) 아버지 정조가 승하하자 11세의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가 즉위했으나 어린 나이 탓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장헌)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영조의 외척인 벽파(僻派) 김구주(金龜柱)의 누이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어죽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순왕후는 옥새를 거머쥐자 친정인 경주 김씨 일가를 요직에 발탁하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한 세자의 외척세력인 시파(時派) 세력을 대대적으로 타도했다. 그때 천주교 탄압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엄청난 피바람이 불었는데, 남인시파 정약용(丁若鏞) 집안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산의 셋째 형인 정약종은 순교하고, 둘째 형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 길에 오르게 됐다. 그러나 정순왕후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시파였던 안동김씨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이미 정조 때 간택됐다가 순조비가 된 것이다. 그 후 벽파 정권은 시파 정권으로 교체되고 말았다.
순조는 재위 27년(1827) 2월 장남 효명세자(익종, 1809~1830)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으나 효명이 4년 만에 죽자 그의 장남인 8세의 헌종(憲宗, 1827~1849, 재위 1834~1849)이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했다. 헌종이 어려서 할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 순조의 비, 1789~1857)의 수렴청정이 시작됐고, 헌종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권력 암투의 와중에 호색군주로 전락해 1849년 6월 6일,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어머니 신정왕후(神貞王后, 조대비, 1808~1890)의 무릎에서 승하하고 말았다. 그때 순원왕후는 나인에게 명령해 옥새를 가져오게 하고는 “국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일이 시급하다. 전계군 제3자 이원범(李元範)으로 대통을 잇게 한다”라고 천명했다.
세도정치 그늘에 국새 수난…민주주의 시대에 웬 국새 수난?
헌종 10년(1844) 형 이원경(회평군)의 옥사로 천애고아가 돼 강화에 유배된 14세의 이원범은 나무를 하고 농사짓다가, 5년이 지난 19세에 별안간 명을 받아 창덕궁 인정문에서 옥새를 받고 국왕에 즉위했다. 그가 조선 제25대 국왕 철종(哲宗, 1831~1863, 재위 1849~1863)이다.
‘강화도령’ 철종은 나이는 어리지 않았으나 농사를 짓다가 갑자기 왕이 돼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나라의 운명이 기울던 19세기 3대 63년에 걸친 세도정치는 그야말로 수렴청정의 시대였고, 정상적으로 옥새가 전수되지 못한 혼돈의 시대였다. 세도정권의 그늘 아래 국왕은 하나같이 유약한 군주로 자신의 경륜을 펼치지 못하고 술과 여색에 탐닉해 국정을 그르쳤다.
최근 2007년에 제작한 대한민국의 상징인 국새에 대한 비리 의혹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제4대 국새의 주조 과정,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의 국새문화원 건립 지원, 황금 횡령, 금도장의 정·관계 로비, 국새 제작 단장이 옥새전각장이 아니라는 이력 등 국새 의혹에 국민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고, 3년간 수면 아래 잠복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니 대한민국이 유린당한 느낌이 든다. 2007년은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말이고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해인데, 국새를 제작하고 남은 금으로 16개 도장을 만들어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와 행정자치부 공무원 등에게 13개를 돌리고 3개는 일반인에게 판매했다니 범법행위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누구에게 왜 금도장을 돌렸을까. 책임부서인 행정안전부는 빠른 시일 안에 하얀 가면 뒤에 숨겨진 검은 실체를 샅샅이 밝혀 국가의 얼굴인 국새에 대한 진실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2000만 원 상당의 금도장이 누구에게 전달됐는지, 그 실명을 공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은 세도정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작금의 금도장 로비를 보면서 일제강점기 화신백화점 사주 박흥식(朴興植, 1903~1994)이 순금 명함을 만들어 총독부 고위 관료를 접견해 면담을 성공시켰다는 추악한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국민의 일부를 끝까지 속이고, 국민의 전부를 한때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국민의 전부를 끝까지 속일 수는 없는 것이 역사의 정의가 아닐까. 이명박 정부는 이런 국새라면 하루라도 빨리 폐기하고 새로운 국새를 만들어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 주간동아, 2010.08.30 752호(p74~75) [이영철 교수의 5분 한국사] |
'탈 많은 4대국새' 폐기하고 '새 국새(5대)' 만든다
행안부 "권위 상실"... 현대식주조로 만들듯
최근 각종 논란을 빚고 있는 4대국새. |
정부가 논란이 되고 있는 제4대 국새를 없애고 5대 국새를 새로 만드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행안부 관계자는 14일 "제4대 국새는 이상이 없더라도 국새로서 이미 권위를 잃었다"며
"제5대 국새를 만드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행안부는 이날 국새 자문위원회를 꾸려 첫 회의를 열고 국새 운영방향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회의에서 자문위원들은 새 국새 제작에 찬성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로서는 국새제작단장 민홍규씨의 당초 주장한 전통식 국새 제작 방법이 없는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현대식주조로 5대 국새를 만드는 방법이 유력하다.
- 201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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