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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가며(자료)

<무원록(無怨錄)>과 조선시대의 검시(檢屍)

Gijuzzang Dream 2009. 3. 20. 15:26

 

 

 

 

 

 

 무원록(無怨錄)>과 조선시대의 검시(檢屍)

 

 

 

 

 

1. 범죄추리물, 대중의 관심을 끌다

 

2006년 이후 경기 서남부 일대에서 실종된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으로 요즘 전국이 시끄럽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범죄심리학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용어들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살인을 무려 일곱 번이나 저지르고도 죄책감 하나 느끼지 않는 피의자를

반사회적 인격장애자인 ‘사이코패스’로 정의하는가 하면, 연쇄살인 피의자로부터 자백을 이끌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범죄심리 분석관 ‘프로파일러’에 대한 대중적 관심도 증대하였다.

 

범죄가 갈수록 지능화되면서 범죄 물증을 확보하기 위해

일선 경찰서의 과학수사팀의 역할도 한층 강조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들은 범죄현장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휴지, 담배, 침, 발자국 등을 수집하는가 하면,

DNA 분석을 위해 핏자국이나 머리카락 등을 확보하려고 애쓴다.

이번 사건에서도 피의자로부터 연쇄살인을 자백받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피의자 트럭에서 발견한 피해자 중 한 사람의 것과 동일한 DNA를 갖는 혈흔이었다.

 

차마 떠올리기 싫은 현실의 잔혹한 범죄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스릴과 공포를 느끼게 해준다는 이유에서인지

갈수록 각종 매체들에서 쏟아내는 범죄 추리물이 대중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미국 CBS에서 성공리에 방영되던 과학수사 관련 드라마인 <CSI 과학수사대>는

우리나라에서도 MBC와 OCN 등에서 시즌별로 방송 중에 있다.

<CSI 과학수사대>가 현대 미국의 과학수사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면,

우리가 별로 주목하지 못했던 과거 우리나라의 범죄 수사모습을 생생하게 극화하였다는 점에서

색다른 재미를 주는 작품들로 영화 <혈의 누> 드라마 <조선 과학수사대 별순검>이 있다.

 

2005년 개봉된 영화 <혈의 누>는 1808년 조선의 외딴 섬마을인 동화도에서 5일간 일어났던

의문의 연쇄발인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은 한 마디로 ‘조선판 CSI'라는 평가를 받는 추리드라마이다.

2007년부터 케이블채널에서 상영된 이 드라마는 갑오개혁 이후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살인사건을 과학적으로 수사하여 해결해 가는 수사팀의 활약상을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는 조선과학수사대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살인사건 피해자의 사망원인을

정확히 확정하고, 증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여기에서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도대체 이들 범죄추리물의 시나리오는

어떤 자료에 근거해서 만들어졌을까?

작품에 등장하는 시체 검시 및 과학수사 방식이 당시 실상을 보여주는가?

 

 

2. 조선시대 살인사건 수사 절차는?

 

조선시대에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신중하고도 엄격한 절차를 거쳐 수사가 진행되었다.

그런 점에서 앞서 소개한 조선시대 범죄추리물에 등장하는 시체 검시 및 수사기법은

비교적 역사적 고증에 충실했다고 생각한다.

그럼 실제로 조선시대 살인사건의 검시 및 수사 절차가 어떠했는지를

당시 법의학 지침서로 쓰인 <무원록(無寃錄)>과

조선시대 사체 검시보고서인 <검안(檢案)>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시대에 변사사건이 발생하여 관에 신고가 들어오면 즉시 사건 수사를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1차 수사는 시신이 놓여진 장소의 관할 관리가 담당하였는데,

서울의 경우 지금의 구청장 급에 견줄 수 있는 부장(部長)이,

지방의 경우 시장과 군수에 해당하는 고을 수령(守令)이 수사를 총괄하였다.

지금이야 수사를 맡은 검찰, 경찰이 행정부로부터 일정하게 독립되어 있었지만,

행정권과 사법권, 수사권 등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는 당시로서는

행정기관의 수장이 강력사건 수사까지도 떠맡고 있었던 셈이다.

 

사건 현장에 관리가 출동할 때에는 아전들을 보조 인력으로 데리고 갔는데,

이들은 시체를 다루는 일에서부터 관련자 심문 등의 제반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때 사건 수사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시체의 사망 원인을 밝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목격자나 관련자들의 증언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런데 “살인사건의 검시는 사망 원인 파악이 핵심이요, 관련자 진술은 그 다음이다”라는 말처럼

당시 사람들은 두 가지 중에서 왜 죽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더 중시하였다.

 

 

시신의 검시

조선시대 시신을 검시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검시 초기에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미세한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시신의 옷을 모두 벗긴 후

술찌꺼기, 식초, 물 등을 이용하여 시신의 몸을 세척하였다.

측 상단의 관복을 입은 자가 검시의 총책임자이며, 하단에 붙잡혀 온 자는 살인 피의자로 보인다.

<사법제도연혁도보>에 실려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싸늘한 시신을 앞에 두고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가려내고

행여 억울한 죽음은 아닌지 분석하기 위해서는 법의학적 지식이 총동원될 필요가 있었다.

 

<무원록>은 이때 참고하여야 할 필수적인 책자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원래 시체 검시의 방법을 상세히 기록한 <무원록>은

중국 원나라에서 간행한 법의학책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책자가 본격적으로 검시에 활용된 때는

조선 세종 때 우리 실정에 맞게 주석을 단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간행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조선후기 영조 때 시대 변화에 맞게 내용을 보완한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을 편했고,

정조 때에는 한글로 풀어쓴 ‘언해본(諺解本)’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寃錄諺解)>까지 제작되었다.

 

 

-  <무원록>의 현대 번역본들

<무원록>의 언해본은 1975년 법제처에서 법제자료로 영인된 바 있으며,

최근에는 <신주무원록 : 김호 번역>과 <증수무원록언해>에 대한 번역서도 출간되었다.

<역주 증수무원록언해 : 송철의 등 번역>

 

 

사망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무원록>에서는

시체의 머리부터 검안하기 시작하여 신장과 얼굴의 빛깔, 팔과 다리, 피부의 손상여부 등

모든 신체부위를 상세히 살펴보고 조사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요즘처럼 첨단장비와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지 못했지만,

<무원록>에서는 사망원인 조사에 사용할 수 있도록 나름대로 여러 가지 검시용 재료를 제시하고 있다.

이들 검시용 재료를 ‘응용법물(應用法物)’이라고 하는데,

술과 술찌꺼기, 식초(酸), 소금, 초(椒), 파, 매실, 감초, 토분(土盆), 망치, 탕수기(湯水器), 목탄, 백반,

백지, 솜, 거적자리, 닭, 가는 노끈, 재(灰), 분기(盆器). 자, 은비녀 등이 그것이다.

 

검시 재료를 동원하여 시신의 사망 원인을 확정하고 목격자를 비롯한 관련자들의 심문을 종합하여

상부 관서에 보고하면 1차 수사는 끝이 난다.

그러나 사람의 인명이 달린 살인사건의 경우 시신 검시와 수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2차 검시는 수사의 공정성을 위해서 동일인이 하지 못하게 했으며,

이에 따라 지방의 경우는 이웃 고을수령이, 서울의 경우는 한성부의 낭관(郎官)이 맡았다.

두 차례의 검시를 통해서도 사망 원인이 애매한 경우에는 심지어 3차, 4차 검시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끝으로 이들 수사기록을 종합하여 사건의 최종판결을 내리는 사람은 국왕이었다.

 

 

칼을 차고 있는 죄인

: 조선시대에 살인 등 중죄인의 경우는 감옥에서도 칼을 차고 있었다.

아울러 증거가 명백한데도 자백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합법적으로 고문을 가할 수 있었다.

사진에 나오는 죄수의 죄명과 촬영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생활과 풍속>, 서문당 수록)

 

 

이상 조선시대 이루어진 일련의 수사, 검시 절차를 살펴볼 때

형사재판에서 원통한 죽음, 억울한 죄수를 없애고자 하는 노력이

적지 않게 제도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유교의 삼가고 신중하라는 ‘흠휼(欽恤)’ 정신이 녹아있다고나 할까 …

 

 

3. <무원록>을 통해 본 조선시대 검시

 

현대사회에서 수사는 일종의 과학이다.

살인 등 강력사건이 날 때마다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우리나라 첨단 과학수사를 이끄는 곳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는?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과학수사 전담기구가 존재하지 않았고

원님들이 직접 나서서 사건을 처리하였는데, 앞서 소개한 <무원록>을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 과학수사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먼저 궁금한 것은 사망 시간을 어떻게 단정했을까 하는 점이다.

<무원록>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시신이 부패하는 과정을 소요기간을 정리해 두어

이를 통해 사망시간을 추정할 수 있다.

 

시신은 크게 세 단계의 부패과정을 거치는데 읽기 거북하겠지만 소개하면 이렇다.

 

먼저 얼굴이나 배 등 피부색이 누렇게 혹은 파랗게 변하는 단계,

코와 귀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고 배가 팽창하고 몸에서 구더기가 나오는 단계,

마지막으로 부패가 더욱 진행하면 머리카락이 빠지는 단계를 거친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패하는 기간은 계절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한여름에는 부패가 빨리 진행되어 3-4일만에 3단계의 부패가 모두 진행되는 반면,

겨울에는 1단계를 거치는데도 4-5일이 소요된다고 하였다.

 

 

- 검시할 때 살펴보아야 할 시신의 앞, 뒷면

<무원록>에 나오는 사망자의 신체부위를 그림으로 그린 시형도(屍型圖)이다.

앙면(仰面)은 앞면, 합면(合面)은 뒷면을 말한다.

검시관은 이 시형도에 나오는 각 신체부위의 상태를 검안에 꼼꼼하게 기록해야 했다. 

 

 

 

다음으로 육안으로 기본적인 사망 원인을 판별하는 핵심은 시체의 몸 색깔이었다.

<무원록>에서는 사망원인에 따라 얼굴이나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에 착안하여

검시관은 무엇보다 시체의 안색 등을 잘 살필 것을 주문하고 있다.

예컨대 얻어맞아 죽은 경우는 시신이 적색을 띠는 것이 일반적이며,

독살이나 질식사의 경우 청색, 병사한 경우는 황색, 시신이 부패한 경우는 흑색을 띤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살해한 후에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일부러 목을 맨 시쳉의 경우

기혈(氣血)이 통하지 않아 백색을 띤다는 주의사항도 적고 있다.

 

한편, 몸 색깔과 함께 시신에 나타난 상처나 흔적은 중요 관찰대상이었다.

시체를 깨끗이 씻어서 검시하는 과정에서 앞서 제시한 검시용 재료 중 술찌꺼기, 식초 등이 활용되었다.

먼저 술찌꺼기, 식초 등을 시체에 씌우고 죽은 자의 옷가지로 덮은 다음,

그 위에 끓인 식초와 술을 부어두면 식초와 술기운이 스며들어 시체가 부드러워진다.

이 때 물로 술찌꺼기와 식초를 제거하는데 이럴 경우 잘 보이지 않던 상흔도 찾아낼 수 있었다.

 

<무원록>에는 이밖에도 흥미로운 수사기법이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먼저 화학물질을 활용해 혈흔을 찾는 방법이다.

살인자가 사용한 흉기로 의심되는 깨끗한 칼을 숯불로 달군 후

그 위에 고농도의 식초로 씻어 핏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수사이다.

이는 혈액의 단백질 성분이 산에 노출되면 응고하는 성질을 이용한 것으로

오늘날 과학수사팀의 현장 감식 과정에서 혈흔을 찾기 위해

‘루미놀’이라는 질소화합물을 이용하는 것과 유사하다.

 

-  부인에 의해 독살되는 남편

<금병매(金甁梅)>에 나오는 독살장면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독살되었어도 병사로 처리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검시관은 은비녀 등을 이용해 타살여부를 밝혀야 한다.

<중국인의 사체관찰학 : 웅산각, 일본> 책자에 수록

 

 

다음 중독사의 판별을 위해 은비녀, 혹은 살아있는 닭과 백반을 활용하는 것도 기발하다.

사실 독에 반응하는 은의 성질을 이용하여 은비녀로 독살 여부를 살폈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방법이다.

독살이 의심스러운 경우 은비녀를 쥐엄나무 껍질을 삶은 물로 깨끗이 씻은 후

죽은 자의 목구멍에 넣어두고 입을 종이로 봉한다.

얼마후 은비녀를 빼냈을 때 색이 푸른빛을 띤 검은색으로 변하면 독살이 분명하다.

 

독살을 살피는 다른 방법으로 제시한 닭과 백반 이용법은 비교적 단순하다.

즉 백반 한 뭉치를 죽은 자의 목구멍에 넣었다가 한 두 시간 후에 꺼내어

닭에게 먹여서 닭이 죽으면 독살로 판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백성 중에 이렇게 실험한 닭을 먹는 사건이 발생했는지

영조는 1764년(영조 40) 앞으로 닭을 이용한 방법을 가능한 쓰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4. <검안>, 그리고 격동기 근대

 

지금까지 조선시대 살인사건의 처리 절차, 시신에 대한 검시과정을

<무원록>의 내용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사례 등을 종합해 볼 때

조선시대 변사사건 수사가 우리가 짐작하는 것만큼 그렇게 허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생활 속에서 얻은 과학지식이 실제 검시 및 수사에 적극 확용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사건수사 및 검시과정에서 시대적 한계도 적지 않았다.

먼저 변사자에 대한 검시가 종종 생략되곤 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선조 34년(1601)에는 수령이 관하 백성을 형벌로 다스리다가 죽은 경우

굳이 검시까지 하지는 말 것을 규정으로 만들었으며,

영조 28년(1752) 연좌되어 유배지에 머물던 양반집 부녀자가 죽은 경우에 검시하는 것은

매우 불미스러운 일이아 판단하여 이 또한 검시를 중지시켰다.

이들 조치 모두 나름의 이유는 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려 했다면 이같은 조치는 적절했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시 행했던 검시방법 중 의학적인 근거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현대 법의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무원록>에서 언급한 사망원인에 대한 진단에

섣부른 일반화가 종종 눈에 띤다고 한다.

특히 <무원록>에는 핏방울의 응고 여부로 부모자식, 형제자매 여부를 판명하는 방법이 나와 있다.

예컨대, 부모의 해골 위에 자식의 피를 물방울처럼 떨어뜨리면

친자식인 경우 피가 해골에 스며들고, 아닌 경우는 스며들지 않는다는 주장이지만

이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 1905년 강원도 철원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검시 보고서

철원군수가 칼에 찔려 죽은 자의 시신을 검시하고, 관련자들의 진술을 확보하여

강원도관찰사에게 올린 검시보고서이다.

원본은 대검찰청에 소장되어 있고, 도록 <한성판윤전>(서울특별시립박물관, 1997)에 도판이 실려 있다.

 

 

아무튼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대한제국기에 발생한 살인사건의 검시보고서인 <검안>이

수백종 보관되어 있어 실제 구한말 사건수사 내용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최근에 만들어지고 있는 각종 범죄추리극, 범죄 및 수사관련 대중서들도

이들 자료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최근 쏟아지고 있는 영상물이든 책자이든 간에 시대적 맥락을 추적하기보다는

엽기적이거나 극단적인 사건을 침소봉대하거나

조선시대의 과학적 수사기법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20세기 전후 한국사회는 한 마디로 격동의 시기였다.

당시 조선사회는 급격한 사회변동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와중에 기층 사회구성원들의 삶과 갈등양상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그간 역사학자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 이 당시 범죄사건 기록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의 거대 사회변동 양상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민중들의 삶의 모습이

생생하게 복원되었으면 하고 기대해본다.

- 심재우, 2009년 2월 11일

- 한국역사연구회

 

 

 

 

 

 

 

 

 

 

무원록과 신주무원록

 

 

서울대 규장각소장, 신주무원록  네이버백과사전

 

 

조선시대에도 살인사건은 종종 일어났는데 놀라운 것은 당시 이미 과학수사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타살이냐 자살이냐, 중독이냐 구타냐, 목 졸려 죽은 경우이냐 스스로 목을 매 죽은 경우이냐를 놓고

고민하며 시신을 검험하는 모습은 과학수사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겠지만

조선시대 역시 이것은 범죄현장에서의 꽤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수사 절차는 과학적이었으며 체계적이었다.


당시 과학수사가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무원록』에 있다. 

『무원록』은 원나라 학자 왕여가 1308년에 편찬한 법의학 서적으로서

검안을 비롯한 각종 수사기법이 수록되어 있다.

『무원록』은 여말선초 시기에 조선에 수입되었지만 독해의 어려움 때문에 활용은 미미했다.

세종 때 비로소 주석 작업이 이뤄짐에 따라

주석을 달고 음훈을 병기한『신주무원록』을 간행하기에 이른다.

이후 신주무원록은 수사 과정에서 표준 지침서로 유용하게 쓰였으며,

시간이 흐르면서『증수무원록』,『증수무원록대전』,『증수무원록언해』등으로 더욱 보완되었다.

 

현재 『신주무원록』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번역본(왕여 지음, 최지운 외 주석, 김호 옮김 『신주무원록』, 사계절)은 서점에서 구입하실 수 있다.

   

 

조선시대 때 검험 과정에서는 시체의 안색을 가장 많이 주목하지만

안색 이외에도 독살여부를 판단하는 방법으로 사인(死因)을 구별하였는데

『신주무원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구타인가? 중독인가?


주먹이나 손발 등으로 구타당해 죽은 경우

"눈과 입이 열려있고, 손과 발이 흐트러져있다."

"심한 경우 상처의 모양과 색이 검붉거나 붉으며 약간 부어오른다."

"보통 검붉거나 부어오르지 않거나, 푸르거나 붉다."

"독사 상흔과 유사하다."


독을 먹고 죽은 경우

"청흑색의 멍이 있다. 구타에 의한 상흔과 유사하다."

"입술이 찢어지고 혀가 문드러지고, 입 안이 검붉거나 검고, 손톱이 푸르다."

"은비녀를 인후에 넣었다가 꺼내어 색이 흰색이면 중독이 아니고, 색이 검은색이면 중독이다."

"시체 목구멍에 집어넣은 백반 한 덩이를 한두 시간 후 목구멍에서 꺼내어 닭에게 먹인다.

이 때 닭이 죽으면 독사다. 이것을 반계법이라고 한다."

"독사를 검험하는 데 잘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때에는 더운 기운을 이용한다.

우선 목구멍에 은비녀를 넣고 뜨거운 초와 지게미를 사용하여 하반신을 덮어둔다.

더운 기운이 아래에서 위로 통하면서 독이 입으로 올라가면 은비녀에 흑색이 나타난다." 


타인에게 독살된 경우

"입과 눈이 열리고, 전신이 검게 부어오르고, 손톱, 발톱이 검은색이 되고, 피부가 갈라진다."

"죽기 전에 오물을 토하고, 검은 피를 쏟고, 항문이 부어오르거나 대장이 돌출된다."

- 왕여 지음 ․ 최지운 외 주석 ․ 김호 옮김 『신주무원록』, 사계절 461p

 

 

조사과정 및 보고

 

 

조선 전기 때 무원록은 검시, 그 외 수사절차, 그리고 보고의 ‘표준지침’이었다.

무원록에 따라 조사부터 검험까지 모든 과정이 이뤄졌다. 

 

사건 발생

 

사건접수

먼저 사건을 접수하여, 

출발 일시, 검험(檢驗)자, 시체가 있는 장소, 거리를 빠짐없이 기록한다.

 

사건 관련자 소집

마을의 주수나 이정은 사건 관계 인물들을 소집한다.

시신과의 친인척 또는 지인은 시친의 부재를 증명하는 다짐을 한다.

 

검험((檢驗)

검시관이 검험을 지휘하고 검험결과를 기록한다.

먼저 현장을 묘사하고 시체 상태를 묘사한다.

이외에 시체 상태를 묘사할 때에는 피부에 상처가 있지는 않은지,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는지,

상투는 단단한지 풀어졌는지, 손발의 위치는 어떠한지 등 현장과 시체에 대해 기록 후 보고한다.

 

복검(覆檢)

복검에 대비하여 이정이 시체를 지킨다.

추가적인 논쟁과 복검에 대한 요청이 없을 때 매장한다.

그러나 논쟁이 있을 경우에는 구덩이를 마련하여 시체를 안치하고 흙으로 봉토를 만들었다.

복검의 경우에도 이상이 없으면 매장한다.

 

- 문화재청, <신주무원록을 통해 본 조선시대 법의학>에서 부분 발췌

- 2011.05.24 제3기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