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여인의 가슴에서 태어난 공화국

Gijuzzang Dream 2009. 3. 22. 17:01

 

 

 

 

 

 

 여인의 가슴에서 태어난 공화국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유럽 민주주의 운동의 시발점이며, 근대 민족주의의 기점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약 40년 뒤 1830년 7월 27일 파리 민중은 다시 한 번 봉기했고,

이번에도 거의 전 유럽에 여파를 몰고 왔다.  

3일간 지속된 7월 혁명은 제대로 된 의미의 지도자 없이 진행됐다.

1824년부터 통치하고 있던 부르봉 왕조의 샤를 10세가 일련의 강경조치를 취하자

이에 대한 반응으로 대중들 사이에 즉발적으로 일어난 민중봉기였다.

샤를 10세가 취한 조치는

다름 아니라 귀족의 헤게모니를 다시 강화해서 절대주의 체제로 되돌아가려는 획책이었다.

그는 1830년 7월 26일 7월 칙령을 공포해서, 새로 선출된 내각을 해산하고

선거권을 토호(토지를 소유한 귀족)에게 유리하게 조정하고 언론의 자유를 제한했다.

이러한 조치는 민중이 격렬하게 저항하는 3일 천하를 불러왔고,

마침내 샤를 10세의 실권으로 막을 내렸다.

- 토마스 R. 호프만의 <명화>(2008, 미술문화) 중에서

 

 


 

“구약성경의 창세기 19장에는

신의 저주로 소돔과 고모라에 떨어진데 이어 자손을 낳아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없게 되자,

롯의 두 딸이 아버지에게 술을 들게 하고 동침한다.

큰딸이 작은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이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적지 않은 화가들이 이 이야기를 묘사했다.

정경(正經)에서 제외되어 외경에 실린 유디트 같은 이야기와 달리

이 이야기에는 모종의 교훈이나 뜻이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회화사에서 이 삽화를 묘사한 그림들은 별도의 해석을 필요로 한다.

독일계 화가인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 1480-1538), 브텔발 요아킴(Joachim)

같은 이의 그림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보다는 오히려 패륜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롯의 두 딸은 로마시대 이래 이른바 <로마식 자비(Roman Charity)>로 불리는

우의적 작품에 이르러 서서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루벤스가 그린 <로마식 자비(Roman Charity)>

동일한 인물구성에도 불구하고 부녀지간의 의미가 구약의 그것과 사뭇 달라져있음을 일러준다.

아사형(餓死刑)을 받아 옥에 갇힌 아버지, 두 손마저 포박되어 운신조차 힘든 아버지를 위해

젊은 딸이 풍만한 가슴을 열어 젖을 먹게 하고 있다.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자손 때문이었든, 아니면 아사 직전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든

이 그림들은 우의적 의미보다는 그 충격적인 장면으로 인해 보는 이들의 눈을 돌리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당황스런 장면은 17세기 이후 거의 그려지지 않았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  로마식 자비(Roman Charity)

원 제목 : Roman Charity(= 로마식 慈愛) / 부제 : simon & pero

1612, Oil on Canvas transferred from panel, 180.3x140.5cm,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로마 시대에는 죄인들에게 감옥에서 굶어 죽는 아사형을 내리곤 했다.

아사형을 언도받은 죄인에게는 가족 중 한 사람으로부터 젖을 얻어먹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루벤스의 이 그림은 딸이 아버지를 찾아와 굶주린 아버지에게 젖을 빨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른바 ‘로마 식 자비’로 불리는 장면인데, 여러 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상당히 에로틱한 그림으로도 볼 수 있지만, 이 그림은 후일 공화국을 여인의 형상을 빌어 표현하는

서구 조각과 회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많은 경우 공화국을 상징하는 여인은 풍만한 가슴의 소유자인데,

이는 국민을 먹여 살리는 어머니로서의 모국을 상징한다.

바로크 화풍의 대가였던 루벤스 특유의 격정적인 묘사가 죄인인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과

아비에게 자신의 젖을 물리는 딸의 갸륵한 효심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 그림을 루벤스의 다른 그림들, 특히 <대지와 바다의 결연> 같은 작품과 비교해보면

이미 젊은 여인과 늙은 노인이 딸과 아버지라는 친족관계를 서서히 벗어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일한 구도와 인물설정에도 불구하고 이런 그림들이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프랑스대혁명을 전후해서다. 특히 공화정이 모든 자유주의자들의 신념이자 꿈이 되었던 19세기 내내

정치적 상징으로, 나아가서는 프로파간다의 이미지로 변모하게 된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The Union of Earth and Water, 대지와 바다의 결합>

1618년 캔버스에 유채, 180.5x222.5cm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러시아 에르미타주 국립 미술관)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루벤스가 그린 또 하나의 걸작이 이 그림 <대지와 바다의 결합>이다.

실물 크기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대형 신화화는

여인이 대지를 상징하고 삼지창을 든 남자가 바다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전형적인 우의적 그림, 즉 알레고리이다.

루벤스의 그림은 대지와 바다의 관계를 아름다운 여인과 우람한 남자의 관계로 표현함으로써

대지와 바다의 관계를 에로틱한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대지의 여신 곁에는 과일이 가득 놓여있고

바다의 신인 남자가 기대고 있는 물항아리에서는 물줄기가 힘차게 쏟아져 내려 바다로 흘러들고 있다.

 

 

 

 

풍만한 가슴의 딸들은 이제 공화국을 상징하는 어엿한 국모의 위치로 격상되기에 이른다.

공화국은 로마의 산물이다. 그래서였을까.

프랑스대혁명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은 로마를 흠모했고 부활을 꿈꾸었다.

공포정치의 주역들이었던 막시밀리엔 로베스피에르 (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와

생 쥐스트(Louis de Saint-Just, 1767-1794)는 로마의 광신도들이었고

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시우스 형제들의 맹세> 역시 당시 이런 분위기를 잘 일러준다.

 

 

 

Jacques Louis David(1748-1825) <The Oath of the Horatii(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 Oil on canvas, 330×425㎝, Musee du Louvre, Paris

 

이 그림은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기 5년 전에 제작되었고

신고전주의의 신호탄이자 다가올 혁명에 대한 예고가 된 작품이다.

‘혁명을 앞지른 미술’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혁명 전야의 투지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혁명의 기운이 꿈틀대는 당시의 프랑스에서 가치관의 혼동으로 헤매는 동료 시민들에게

자식과 형제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가올 혁명의 대오에 참여하자고 역설하는 그림이다.

조국과 대의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비극은 극복되어야 한다.

혁명 이전부터 다비드 뿐만 아니라 여러 예술가들이 로마를 무대로 한 역사화를 다수 제작했는데

로마가 공화정으로 건국된 사회라는 점을 의식하여 체제 변혁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을 반영한 것이었다.

단순히 고대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그린 것만은 아니었다.

 

 

 

표현된 이야기 자체도 그렇지만,

간결한 구도 속에서 강렬한 빛을 발하며 세 인물군을 연결하고 있는 붉은색,

비탄에 빠져 있는 여인들과 죽음을 각오하는 남편들의 결의에 찬 모습의 대비 등이

미학적으로 로마를 상기시킨다.

뿐만 아니라 로마 노예들이 자유를 얻었을 때 착용했던 프리지아 모자는

프랑스대혁명 당시 거의 모든 이들이 착용했던,

말하자면 붉은악마의 티셔츠에 해당하는 하나의 상징이었고

혁명을 묘사하는 거의 모든 조형물에는 회화든, 조각이든 이 모자가 등장했다.

 

혁명이 일어난 해인 1789년 8월26일 ‘인권 및 시민권 선언’이 있게 된다.

현재 파리 카르나발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인권선언>그림은 많은 상징을 함축하고 있다.

 

 

한 가운데에 올라가 있는 ‘빛의 삼각형(le delta lumineux)'은 삼위일체의 연장이면서

잘 알려진대로 프리 메이슨단의 상징이기도 하다.

왼쪽의 여인은 앙시앵 레짐으로 불리는 압제의 사슬을 끊고 있고

천사의 형상을 한 반대편 여인은 한 손으로 인권선언을 가리키며

다른 한 손으로는 빛의 삼각형에 점화를 하고 있다.

두 여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혁명 초기에 제작된 테라코타가 일러주듯

한 여인이 마치 모세의 십계명처럼 생긴 석판을 양쪽으로 들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보기와는 달리 이런 변형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령 한 여인이 가슴을 풀어헤친 채 앞으로 뛰어나오고 있는 1830년 7월혁명을 기리는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도 여인은 하나로 줄어들었고

이후 1848년 공화국 상징물 조형응모에 제출되었던

오노레 도미에의 <민중을 양육하고 교육시키는 공화국>에서도

역시 여인은 하나로 그 수가 줄어들었다.

 

 

 Eugène Delacroix. Liberty Leading the People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민중을 바리케이트로 이끄는 자유: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aux barricades>

부제 : 28 July 1830

1830. Oil on canvas. Louvre, Paris, France 

 

 

 

 

  

 Honore Daumier. 공화국(Sketch for "La République).

1848. Oil on canvas. 73×60cm, Musée d'Orsay, Paris, France.

 

 

 

그 후 공화국을 상징하는 조각물들은 기념물 조각이 홍수를 이룬 19세기 중반 이후

파리는 물론이고 각 지방의 대도시 광장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유럽 어느 나라를 가든 공화국 광장에선

거의 언제나 풍만한 가슴의 거대한 여인이 우뚝 서있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대혁명 2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파리 시 각 구청 앞에는

유명여배우들의 특히 가슴이 큰 여배우들을 모델로 한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공화국 여인상들이

세워져 있고, 많은 경우 온 몸에 삼색깃발을 두르고 있다.

아사(餓死) 직전의 아버지에게 젖을 먹이는 딸에서

국민을 양육하는 공화국을 상징하는 어머니로 변신한 이 여인은

후손을 잇기 위해 아버지의 아이를 낳은 구약의 여인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구약의 여인들 역시 한 부족, 나아가서는 국가를 위해 인륜을 저버린 것일까.

 

- LES VACANCES, [미술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