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현궁을 거닐다 >
흔적 (跡) - 운현궁의 일상
운현궁에는 조선 말기 왕실의 생활문화를 알려주는 많은 유물이 전해진다.
규모가 크고 화려한 궁중가구와 궁중예복에서부터 일반 사가(私家)에서 사용되는 것과
구별되는 제기(祭器),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이화문(李花紋)이 장식된 정교한 은공예품,
중국과 서양으로부터 들여온 수입품 등의 다양한 생활유물은 운현궁의 흔적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의거리(衣巨里) Wardrobe
19세기 말~20세기 초, 배나무 ․ 비단 ․ 종이 ․ 무명, 52.5×104.5×170
동자폭 3.2 쇠목 3.5 기둥 4.1×4.1 문틀 3.1 살두께 1.2 2.1
옷을 넣어 보관하던 궁중용 옷장으로 2층장이다. 장의 전면(前面)은 자주색 비단으로 장식되었다.
전면 하단과 상단에는 4개의 머름칸을 배치하였으며,
머름칸의 동자는 외관상 굵고 납작하여 헛동자로 보인다.
동자의 짜임은 안쪽에 촉을 내어 쇠목에 물린 제비촉짜임이며 옆쇠목도 제비촉짜임이다.
문받이턱은 두께 1.2cm, 깊이 3.7cm로 일반 사가용(私家用) 장이나 농의 문받이턱보다 두껍고 크다.
또한 삼각형의 횟대나 보통의 장보다 굵은 층널의 구조도 일반 사가의 장과 구별된다.
경첩은 백통으로 각 5개씩 부착하였는데, 경첩에는 못 자국이 없어
안쪽에 제물 못을 부착한 것으로 보인다. 자물통은 방형의 북통자물쇠를 고정하였다.
풍혈은 당초문을 투각하였으며 다리는 족대를 댄 뻗다리이다.
사층책장(四層冊欌) Book Cabinet
19세기, 은행나무, 54.6×126.4×210 기둥 4.1×4.1 벽선 3.0 문틀 4.0×2.1
책을 보관하는 4층의 책장이다. 규모가 크고 단순하면서도 기품이 흐르는 책장으로
흥선대원군이 사용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면에 양선문을 달아 책을 수납하기 편리하도록 제작하였다.
장석은 두석(豆錫)으로 기둥과 쇠목에 망두감잡이를 하고 쇠목과 동자에도 거멀감잡이,
문틀에는 귀잡이를 대었다. 앞바탕, 감잡이, 귀잡이의 경첩에는 조이로 당초문을 장식하였다.
앞바탕에는 굵은 배목과 환고리가 있으며 ‘백자천손(百子千孫)’이라는 문자가 조이된 자물통과
당초가 조이된 자물통이 각 1개씩 있다. 머름칸은 최하층 아래에만 두었는데 5칸으로 구성하고
안상문을 조각한 후 장석으로 장식하였다. 족대가 달린 뻗다리와 투각된 당초문 풍혈로 장식하였다.
홍칠 삼층각게수리장(紅漆三層千眼廚欌) Cabinet with three horizontal sections
19세기 말~20세기 초, 피나무, 39.8×64.4×111.2
홍칠을 하고 양선문 안쪽은 서랍을 배치한 각게수리장이다.
모든 문변자 네 면에 여의주를 희롱하는 한 쌍의 용을 장식하여
궁중에서 사용했던 중국풍의 가구로 생각된다.
상단의 서랍에는 꽃을,
문 복판에는 수팔련(水波蓮, 잔치나 굿할 때에 장식으로 쓰는 종이로 만든 연꽃)과 수(壽)자를,
네 칸의 머름칸에는 수(壽) ․ 복(福) ․ 강(康) ․ 녕(寧)을 각각 한 자씩 배치하였다.
모든 문양들은 돋을새김 하여 부착하였다.
서랍과 문 복판, 머름칸 등은 홍칠하고 그 밖의 골조에는 흑칠하였다. 머름동자는 헛동자이다.
태사의(太師椅)
청대(淸代), 자단목, 56.9×45.0×102.5 다리 4.4×4.2 팔걸이 3.0×3.2 좌판 2.8
중국 관직명인 태사(太師)와 관련되어 이름 지어진 의자이다.
남송(南宋) 때 태사를 지낸 진회(秦檜)의 고사(古事)에서 비롯되었다.
태사의는 북송에서 시작하여 이후 청대에 이르기까지 유행하였다.
이 유물은 청대에 제작된 것으로 명대이후 정착된 사각의 좌판, 등받이와 손잡이를 갖추었으며,
육중한 재료와 시원한 너비, 화려한 장식이 된 점에서 청대 응접실가구의 전형을 보여준다.
등받이는 구름문과 나무문이 복합되어 투각되었으며,
양측 하대 밑으로는 낮은 풍혈을 대었고 다리 끝은 고사리 말림형으로 음각되었다.
방등(方凳) Stools
청대(淸代), 자단목, 41.0×41.0×51.5 다리 4.0×4.0 좌판 2.8
태사의와 함께 청대가구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각형의 의자이다. 좌판은 연귀촉 물림으로 제작되었다.
다리는 직선으로 쭉 뻗어 내려와 하단에 고사리말림형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다리와 다리사이 초엽에는 당초문으로 투각되어 장중하면서도 화려한 청대가구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칠보문 좌삽병식 체경(七寶紋座揷屛式体鏡) Mirror Stand
청대(淸代), 흑단, 48.2×98.4×202
몸 전체를 비추어 볼 수 있는 큰 거울인 채경이다.
하단에 칠보가, 그 위로는 해태가 장식된 대좌 위에 곡두문으로 테 두른 틀 안에 거울을 부착하였다.
거울 위에는 수(壽)자가 투각된 여의주를 중심으로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하였다.
테두리는 갈이틀로 갈은 굴곡주를 중앙에 끼웠으며 상인방은 굴곡주에 상촉내다지로 끼웠고
쌍용 양측에는 호리병형 장식이 끼워져 있다. 전형적인 중국식 가구의 형태이다.
팔걸이의자(安樂椅子) Armchair
20세기 초, 68.5×62.5×90
치펀데일 양식 굽어진 다리와 다리 등받이의 당초문은 루이 15세식 양식을 보이는 20세기 초의 의자이다.
조각의 수법이나 세부양식이 장의자와 같아 한 세트임을 알 수 있다.
장의자(長椅子) Sofa
20세기 초, 71.5×150×91.9
로코코 취향을 바탕으로 여러 시대와 지역의 양식을 대담하게 도입한 치펀데일(Chippendale)풍의
굽어진 다리와 뱀과 같은 등받이널 등의 루이 15세식 Settee의 양식을 나타내는 20세기 초 재현품이다.
등받이와 다리의 곡선에 장식한 당초문은 루이 15세식 양식이며
천을 고정시키기 위한 못의 머리에는 양각의 화형(花形)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1850~75년에 유행한 영국 가구디자이너의 이름과 그가 만든 가구양식을 말하며,
‘치펀데일’이라는 용어는 특히 구체적으로 1750, 1760년대에 변형된 로코코 양식의 영국가구를 가리킨다.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치펀데일 디자인은 좌대가 넓은 리본 모양의 등받이 의자인데
이것은 등받이 가로대가 큐피드 화살 모양으로 되어 있고 누각된 등판이 뒤얽힌 리본같이 조각되어 있다.
우아한 곡선이 많고 장식적인 디자인이다.
가장 정교한 로코코식 디자인은 조각한 다음 도금을 입힌 것으로
거울의 틀과 지란돌(가지 달린 장식촛대), 콘솔 탁자에 이용되었다.
치펀데일 디자인은 18세기 후반에 들어 단순해지고 변형되었는데,
크게 지방풍의 치펀데일과 아일랜드 치펀데일로 나뉘었다. 특히 지방풍 치펀데일 가구 중
지방 장인들이 솜씨 있게 변형시킨 유명한 로코코양식 리본모양의 등받이 의자는
조각된 복잡한 치펀데일 디자인에는 미치지 못했다.
재료는 고급 가구를 만드는 데 이용된 수입 마호가니가 아닌 현지에서 생산되는 목재를 사용했다.
마호가니로 만든 아일랜드 치펀데일 가구는
겉으로 보기에는 치펀데일 디자인과 비슷하지만 품질은 떨어진다.
(1) 결혼예복(結婚禮服) Wedding Dress
20세기, 벨벳, 길이 147.0 품 42.0 치마폭둘레 152.5 소매길이 22.0
(2) 드리개 Veil
20세기, 면, 334×85.5
백색의 화문(花紋) 벨벳으로 만든 원피스형 웨딩드레스이다.
치마는 A라인으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퍼지는 형태이며, 진동선에서 치마단까지 프린세스라인을 주었다.
소매는 퍼프형 반소매이다. 칼라는 스탠드칼라로 제작되었다.
이 드레스는
흥선대원군의 3세손인 이우(李鍝, 1912~1943)의 부인 박찬주(朴贊珠, 1914~1995)여사가 입었던 옷이다.
드리개는 웨딩드레스와 같은 예복을 입을 때 머리 뒤로 늘어뜨리는 장식물이다.
꽃 형태의 레이스천으로 만들어졌다. 머리 위로 얹는 위쪽은 약 0.3cm너비로 고무줄을 2줄 박아서
폭을 15cm로 줄였으며, 나머지 부분은 어깨를 지나 바닥까지 끌리도록 넉넉하게 재단하였다.
양끝의 단 처리는 화문의 형태를 그대로 살리면서 자연스럽게 마무리하였다.
적의(翟衣) Ceremonial Robe with Pheasant Design
조선 19세기, 길이 154.0, 화장 103.5, 품 49.3, 진동 24.0, 수구 74.0, 선 너비 9.2
겉고름너비 8.2, 겉고름길이 88.5, 속고름너비 8.0, 속고름길이 88.0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가 입었던 궁중대례복인 9등 적의이다.
삼청색 단에 9줄의 적문을 직조하였다. 적문은 황색, 연두색, 홍색, 남색, 소색, 보라색 실로 직조하였다.
적문 한 단위의 크기는 세로 3.3cm, 가로 3.5cm이며,
소색, 홍색, 황색, 연두색, 청색, 보라색 실을 사용하였다.
선 부분은 홍색 바탕에 운봉문을 직금한 단(緞)으로, 운봉문과 화염부분에 연금사를 사용하였다.
깃부분 안쪽은 홍색 명주로, 고름(겉고름, 속고름)과 겨드랑이의 대고리는 홍색 공단,
겨드랑이 바대와 어깨 바대는 청색 명주이다.
수구는 모두 트였으나 위에서 19.5cm 내려온 지점에 홍색 명주로 박쥐매듭을 만들어 고정하였다.
어깨 바대(길이 75cm, 너비 8.7cm)와 겨드랑이 바대(길이 20cm, 너비 18cm)는 한쪽에 2개씩으로
총 4개이다. 양옆 고대와 밑단의 등솔선 끝(뒤 밑단 중심)에 2.5cm 길이의 홍색 고리가 있고,
뒷고대 중심에서 등솔선을 따라 15cm 내려온 지점과 이 지점에서
오른쪽 17cm, 왼쪽 16.5cm 떨어진 지점에 각각 쌍밀이 단추 1개씩이 있는데,
하피와 후수를 걸기 위한 고리로 보인다.
소매배래의 모양은 길의 옆선이 퍼지는 자연스러운 각도를 따라 약간 어슷한 형태이다.
모든 솔기는 손바느질이다.
적의(翟衣)는 왕비의 예복(禮服)으로 법복(法服)이라고도 한다. 대례복(大禮服)으로서
이에는 활수대의(闊袖大衣)의 포제(袍制)에 속하는 적의와 중단(中單) ․ 상(裳) ․ 폐슬(蔽膝) ․
대대(大帶) ․ 혁대(革帶) ․ 옥패(玉佩) ․ 수(綬) ․ 말(襪) ․ 석(舃)을 착용하고 규(圭)를 든다.
적의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고려 제31대 공민왕 19년(1370) 明 태조후(太祖后)인 효자황후(孝慈皇后)가
왕비에게 칠휘이봉관(七釪二鳳冠)과 더불어 적의를 보내옴으로써 비롯되었으며,
그것은 宋나라 때의 명부복(命婦服)에 해당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제3대 태종 3년(1403)에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과 더불어 대삼(大衫)을 보내왔는데,
이를 한국에서는 역시 적의(翟衣)라 일컬었으며, 그것은 명나라 군왕비복(郡王妃服)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제21대 영조 때에 와서 우리 나름대로의 적의 제도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조선말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부르면서 고종황제 광무(光武) 원년(1897) 관복 제정시
다시 明나라 황후 ․ 황태자비의 적의제도를 그대로 모방하여 제정하였다.
대한제국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순종황제의 황후 윤씨)가 황후로서 착용한 적의는
심청색 바탕의 저사(紵紗) ․ 사(紗) 및 나(羅)를 수용(隨用)하였는데,
여기에 12등분하여 적문(翟文) 154쌍을, 사이사이에는 윤화(輪花: 李花)를 넣었으며
홍색 깃과 도련 및 수구의 홍색 선에는 운룡문(雲龍文)을 직금하였다.
적의에 들어가는 꿩문양 테두리는 금가루로 그렸다.
청 ․ 홍색 또는 검은색 바탕에 황색 테두리로 꿩문양을 그린 후
청 ․ 백 ․ 홍 ․ 황 ․ 흑의 오색실로 꿩문양 수를 놓았다.
적의의 앞뒤에는 황금색 용무늬의 보(補)를 붙였는데
왕비의 적의에는 오조룡, 세자빈의 적의에는 사조룡의 보(補)를 붙였다.
순정효황후(윤황후)의 적의 바탕색은 심청색이며
깃과 도련, 수구에 홍색 선을 두르고 운룡문(雲龍紋)을 직금하였고,
적문 사이사이에 작은 이화(李花)를[중국에서는 윤화(倫花)] 나란히 하여 꿩 154쌍을 직금하였다.
앞의 꿩이 고개를 뒤로하여 쌍쌍이 다정하게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다.
순정효황후의 12등적의는 현재 세종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중단은 옥색으로 하고 홍색 선을 둘렀으며, 깃 둘레에는 불문 13개,
폐슬은 심청색으로 적문 3줄 사이에는 작은 이화문을 4줄, 아청색으로 연을 하고 운룡문을 직금하였다.
옥으로 만든 혁대는 청색 비단으로 하고 여기에 옥장식 10개와 금장식 4개가 장식되었고
운룡문을 그려 묘금하였다. 대대는 겉은 청, 안은 홍으로 하고 끝은 순홍으로 하여 늘어뜨렸다.
후수(後綬)는 훈색을 바탕으로 황 ․ 적 ․ 백 ․ 청 ․ 녹의 5색으로 직성하고 옥환 2개가 있고
후수와 같은 색의 소수가 옥패받침으로 늘어져 있다.
버선(말 ․ 襪)과 신(석 ․ 舃)은 청색 비단으로 되어 있다.
곡옥규(圭)는 길이가 7촌으로 위가 뾰족하고 곡문(穀紋)이 새겨져 있다.
아래의 손잡이는 황색 비단으로 황대(黃袋)에 넣어 있다.
적문(翟紋, 꿩 문양) 폐슬(蔽膝) 말(襪) 석(舃) 대대(大帶) 중단(中單) 옥규(玉圭) 수(綬) 옥패(玉佩) 하피(霞帔)
황태자빈으로 영왕비가 착용했던 9등적의는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데,
9등으로 하여 심청색 바탕에 홍색 선을 수구와 도련, 깃에 둘렀으며
여기에는 운봉문(雲鳳紋)을 직금하였다. 140-160쌍의 꿩이 9등으로 나눠서 직금되었다.
원삼(圓衫) Ceremonial Robe
조선 19세기, 비단, 앞길이 119.9, 뒷길이 157.0, 화장 120.0, 품 46.0, 진동 23.5,
수구 71.8, 겉깃나비 3.5, 겉깃길이 56.0
왕비 이하 내 · 외명부에서 입었던 예복으로, 활옷과 당의와 함께 신분에 따라 그 색과 문양을 달리하여
왕비 · 세자빈 · 세손빈은 소례복으로,
대군부인 이하 상궁과 관직자부인(官職者婦人)은 대례복(大禮服)으로 입었다.
직위에 따라 황후는 황원삼(黃圓衫), 왕비는 홍원삼(紅圓衫), 비빈은 자적원삼(紫赤圓衫),
공주 · 옹주 · 반가부녀는 초록원삼(綠圓衫)을 입도록 구분하였다.
이 원삼은 두록색 도류문사로 만들었는데 안감은 홍색 운문사, 색동은 홍색과 황색 직금단,
안단은 청색 운문사와 무문사, 한삼은 소색 무문사, 동정은 소색 진주사이다.
겉과 안을 홑으로 만든 후 겹쳐서 연결하였다. 색동너비는 5.3cm이며, 한삼 너비는 18.7cm이다.
안감은 노란색 색동부분까지만 있으며 안감의 끝에는 청색 운문사로 안단처리하고,
한삼부분은 안감 없이 홑으로 처리하였다.
겉깃과 안깃 모두 맞깃이며, 겉깃은 배자깃, 안깃은 목판깃의 형태이다.
고름이 없고 안깃에는 동정을 달았고 자마노색 단추로 여미게 만들었다.
소매 색동에는 직금단을 사용하였다. 전체적으로 손바느질을 했다.
길과 소매, 색동 등은 성글게 홈질하였고, 안단은 2cm 간격으로 공그르기 하였으며,
겉깃은 깃선을 따라 촘촘하게 온박음질하여 마무리하였다.
앞길이가 짧으며 녹색 갑사로 되어 있고 흰색 갑사를 덧댄 녹원삼은
내명부 ․ 외명부의 일반 부녀자의 상복(上服)으로 사용되었으며,
활옷과 함께 서민층의 신부 혼례복으로도 착용이 허용되었다.
사대부가에서는 모두 두록색의 비단에 안감을 홍색으로 하였다.
홍색 안감 둘레에 남색 선을 둘렀다. 수구에는 다홍색과 노랑색 색동을 달고 한삼을 달았다.
그리고 화문(꽃무늬와 글자무늬)을 금박하였는데, 이는 궁중에서 사용되어 오던 형태이다.
당의(唐衣) Ceremonial Long Jacket
19세기, 길이 77.0, 화장 62.5, 품 45.0, 진동 20.0, 수구 15.0, 깃너비 4.0, 깃길이 54.5,
겉고름너비 4.0, 겉고름길이 74.5/62.2, 속고름너비 3.2, 속고름길이 56.0/55.0
조선시대 여자들이 입었던 소례복(小禮服)인 당의이다.
겉감은 녹색 화문단으로 만들었고 안감은 ‘수(壽)’, ‘복(福)’이 있는 홍색 문단,
겉고름과 속고름은 보라색 화문단, 거들지와 동정은 소색 문단으로 만들어졌다.
겉감과 안감으로 이루어진 겹당의이다.
등솔선과 섶선(겉섶, 안섶)은 바느질하였으나, 어깨솔기와 진동선이 없이 한 폭으로 마름질하였다.
거들지는 속에 창호지가 들어있으며,
겉감과 안감의 연결 시 수구를 바느질하지 않은 상태에서 거들지를 대고 넓게 홈질하여 고정시켰다.
깃은 당코깃의 형태이며, 파임부분에 맞게 긴 고름의 너비를 줄여서 달았다.
동정은 길이 47㎝, 너비 1.4㎝이며, 속에는 한지를 넣어 빳빳하게 모양을 잡았다.
길에 금박을 하였는데, ‘수(壽)’자 ‘복(福)'자, 석류, 매화 등의 길상어(吉祥語)와 식물문양으로 이루어졌다.
고름에는 금박하지 않았다. 모든 솔기는 홈질로 손바느질하였고,
고름은 길에 온박음질하여 고정시켰으며, 밑단은 공그르기 하였다.
봉황첩지(鳳凰疊紙) Hair pins
19세기 후반, 은, (1)길이 5.5 (2)길이 5.0
궁중의 비(妃), 빈(嬪)들이 머리를 장식하던 것으로 신분에 따라 크기와 재질, 장식물이 다르다.
황후는 도금한 용첩지를 사용했고, 봉황첩지는 비와 세자빈이 사용했는데
봉황장식에 도금한 흔적이 남아있다.
그 중 첫 번째 첩지에는 봉황의 볏과 날개 등이 비교적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꼬리부분은 네 가닥의 금속선을 말아 경쾌하게 표현하였다.
두 번째 첩지는 첫 번째보다 길이가 다소 작으며 세부묘사도 간략하다.
(1) 조선말기, 서각, 전체길이 18.6, 최대너비 2.1
(2) 조선말기, 서각, 전체길이 12.3, 최대너비 2.7
검은색 물소뿔(서각, 犀角)로 만든 비녀이다. 주로 궁중에서 장례용으로 사용하였다.
잠두(簪頭)와 몸체는 따로 제작하여 끼워 완성하였는데 석류와 매화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석류문은 다산(多産)을 상징하기 때문에 여성의 장신구에 많이 사용하였다.
잠두와 몸체의 연결부에는 음각선으로 잎을 형상화하였다.
백옥잠(白玉簪) Hairpin
조선말기, 백옥, 전체길이 12.3, 최대너비 1.8
백옥으로 만든 비녀(簪)이다. 잠두(簪頭)에 화엽문(花葉紋)과 만초문(蔓草紋), 조문(鳥紋) 등을 조각했다.
잠두 끝에 화문 한 송이가 조각되어 있으며, 잠두 전체가 줄기가 얽힌 모습으로 투각되었으며,
그 사이로 작은 새 두 마리가 선각되었는데, 부리, 날개 등 특징적인 형태만 간략하게 묘사되었다.
옥잠(玉簪)은 왕실이나 반가의 부녀자들이 하절기에 사용하는 비녀로
특히 이처럼 잠두에 화엽문, 만초문 등이 조각된 것은 특별한 날에 사용하였다.
죽잠(竹簪) Hairpin
조선말기, 은, 파란, 최대너비 1.3, 전체길이 13.7
잠두(簪頭)에 대나무 마디와 죽엽을 장식한 파란죽잠(琺瑯竹簪)이다.
댓잎은 선각으로 시문한 다음 파란을 얹었고, 잠두의 6엽 대나무 잎은 오목한 홈 속을 파란으로 채웠다.
잠두의 윗면은 파란을 입힌 화엽문으로 장식하였다.
대나무는 ‘절개’를 상징하며 여인들의 장신구에 많이 이용되었다.
궁이나 반가에서 예장(禮裝)시 주로 사용했으며,
파란으로 장식된 비녀는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많이 애용되었다.
뒤꽂이(簪) Hairpins
20세기, 은, 파란, 1/2)최대너비 1.5 길이 6.9 , 2/2)최대너비 1.3 길이 7.5
조선시대 부녀자의 쪽진 머리 뒤에 꽂던 장식품이다.
2개로 구성되었으며 아래쪽은 뾰족하고 위쪽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장식이 달려있다.
첫 번째 뒤꽂이는 은으로 기본 형태를 만들고 파란과 호박으로 장식했는데,
화문 장식 위에 두 마리의 새가 부리를 맞대고 올라앉은 형태이다.
두 번째 뒤꽂이는 빗치개 모양이다. 머리 부분은 가장자리를 따라 회문(回紋)을 두르고,
청색, 청록색, 황색 등의 파란을 입혀 장식했으며
중앙에는 화문을 배치하고 화문 아래쪽에도 선각으로 초화문을 시문하고 파란을 입혀 장식했다.
비취장도(翡翠粧刀) Knife
조선말기, 비취, 전체길이 11.9, 너비 1.2, 운1394
비취로 만든 장도이다. 앞, 뒷메기와 원장석, 사발이, 여치 등의 금속장식물은 모두 도금처리 하였다.
원장석에는 막대형의 도금장식을 부착하고, 그 위에 꽃모양의 장식을 더했다.
또 원장석에는 둥근 고리가 달려 있어 술 등의 끈목을 걸 수 있게 하였다.
일반적으로 장도의 표면에는 다양한 장식을 하는데 반해
이 장도는 비취의 녹색 반점을 살려 자연스러운 미감을 나타냈다.
화형문 윷말(花形紋 윷말) Pieces in Yut
20세기, 은, 최대너비 2.0, 두께 0.7
이화형 윷말(李花形 윷말)
20세기, 은, 최대너비 1.9, 두께 0.7
박쥐형 윷말(蝙蝠形 윷말)
20세기, 은, 최대너비 2.3 두께 0.7
윷놀이 할 때 사용하는 말로 4개가 1세트를 구성하고
재질은 은으로 만들어져 화려했던 왕실의 놀이문화와 일상생활의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화형)꽃모양으로 가운데 암술을 양각하였다.
(이화형)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이화를 조각하였다.
(박쥐형)박쥐문 형태.
잔받침 Cup Mats
20세기, 면,
16.8×17.4 (2/15) 16.9×16.8 (3/15) 17.0×17.0 (4/15) 17.3×16.9 (5/15) 17.2×16.9
찻잔이나 작은 접시 등을 받치기 위해 천으로 만든 받침이다.
박찬주여사가 사용한 것으로 전한다. 별다른 장식은 없고 한쪽 모서리에 운현궁문을 수놓았을 뿐이다.
바탕천은 평직의 면을 사용하여 가장자리 올을 풀고 감침질하였다.
은제유개 잔탁(銀製有蓋盞托) Cups and Saucers with a Lid
조선, 은,
잔높이 4.8, 입지름 5.6, 바닥지름 2.8, 뚜껑높이 1.4, 뚜껑지름 6.1, 받침대지름 12.9
잔높이 4.8, 입지름 5.7, 바닥지름 2.8, 뚜껑높이 1.3, 뚜껑지름 6.0, 받침대지름 12.9,
바닥지름 10.5, 높이 1.1
은으로 만든 후 도금을 한 잔과 잔받침으로 뚜껑과 함께 구성되어 있다.
잔의 양 옆에는 귀(耳)가 달려있어 손잡이를 이루고 있는 양이(兩耳)잔의 형태이다.
손잡이는 두 개의 대가 뻗어 나와 상단에 초문(草紋)의 장식이 구연부와 맞닿아 있다.
뚜껑은 구연부를 밖에서 덮는 형태이며,
잔 받침은 가운데 원형의 턱을 두어 잔이 움직이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양옆에 홈을 파서 손잡이 부분을 끼울 수 있게 만들었다. 잔받침의 외곽은 전을 돌려 만들었다.
은제 잔탁(銀製盞托) Cups and Saucers
20세기, 은, (잔) 높이 3.1×5.9×2.1, (탁) 높이 2.3×10.2×3
잔(盞)과 받침(托)으로 이루어진 은제잔탁이다.
잔은 구연부가 바깥쪽으로 살짝 외반한 형태이며 굽부분은 따로 만들어 붙였다.
받침은 전체적으로 5엽화형(花形)이고 가운데를 오목하게 만들어 잔의 굽이 끼워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받침에는 3송이의 꽃과 1마리 나비를 음각선으로 시문했다.
바닥에는 ‘순은(純銀)’과 ‘창신(昌信)’이라는 명문이 각인되어 재질과 제작사를 알 수 있다.
식탁용 칼 Knife
(1) 20세기, 철 ․ 상아, 2.3×9.5×25.3
(2) 20세기, 철 ․ 상아, 2.1×9.4×25.4
서양식 식탁용 칼인데 손잡이는 상아로 만들었고, 칼날은 철제이다.
(1)칼날의 한쪽에 'MEIDI-YA TOKYO'라고 새겨져 있다.
(2)칼날에 ‘JAMES DEAKIN & SONS SHEFFIELD'라 새겨져 있어 제작사를 알 수 있다.
손잡이에는 검정색으로 이화문을 음각으로 새기고 검정 안료로 안을 채웠다.
대한제국기 왕실에서 사용되었던 물건임을 알 수 있다.
은제 종(銀製鍾) Silver Bell
20세기, 은, 높이 9.6, 너비 2.0
손잡이가 달린 소형의 은제 종이다.
손잡이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만입되었다 다시 퍼지는 형태이며 약 1/3 지점에 2개의 돌대를 돌렸다.
은제계란형 합(銀製卵形盒)
20세기, 은, (합) 높이 6.8, 최대지름 4.5, (컵) 3.6×3.5×2
소형 은제 컵 3점을 겹쳐서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든 계란 형태의 합(盒)이다.
합은 위쪽 절반이 뚜껑 역할을 하도록 제작하여 돌려서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굽은 따로 없으나 합의 바닥 쪽을 살짝 오목하게 만들어 세워질 수 있도록 했다.
구연부 쪽은 안쪽으로 꺾이도록 만들어 은제 컵이 합의 바닥에 닿지 않고 끼워질 수 있도록 했다.
전체적으로 소형 은제 컵은 입지름이 넓고 약한 경사를 이루며 줄어들어 바닥에 이르는 형태를 띠고 있다.
은제주전자(銀製注子) Silver Pot
(1)20세기, 은
전체높이 18.1, 몸체지름 13.3, 입지름 7.7, 최대너비 16.0, 뚜껑높이 4.5, 뚜껑지름 8.0
(2)20세기, 은
전체높이 18.1, 몸체지름 13.3, 최대너비 16, 뚜껑높이 4.5, 뚜껑지름 8.0
(1)은으로 만든 주전자이다. 내부 흔적으로 보아 단조기법을 사용하여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고,
겉면은 매끄럽게 다듬었다. 물대와 손잡이는 별도로 만들어 고정하였다.
몸체 중앙에는 5엽의 꽃잎과 3개씩의 수술로 구성된 이화문과 원권이 둘러져 있는 운현궁문(雲峴宮紋)이
조각되었다. 뚜껑에도 운현궁문이 조각되어 있는데 꽃잎 가운데를 봉긋하게 세워 손잡이로 삼았다.
(2)반구형 동체에 평저(平底)이며, 유연한 주구(注口)를 가진 소형 주전자이다.
동체 내부의 흔적으로 보아 단조로 성형하고 겉은 마연하여 매끄럽게 다듬었다.
동체 전면에 산수문이 선각되어 있으며, 후면은 시문하지 않고 남겨두었다.
주구와 경부는 따로 제작하여 접합한 것으로 보이며
경부의 끝은 직각으로 외반하여 전을 만들어 뚜껑을 걸칠 수 있도록 하였고,
뚜껑에도 같은 크기의 전이 있어 동체와 꼭 맞도록 제작되었다.
손잡이와 동체 사이의 연결부분은 5삼엽형(三葉形)과 보주형(寶珠形)이 이어진 모양으로
손잡이와 삼엽형은 리벳으로 연결되어 있다.
뚜껑 중앙에는 2조의 얇은 음각선으로 원을 그리고 내부에 5엽 화형(花形)이 음각되어 있으며
중앙에 편구형 꼭지를 리벳으로 고정했다. 바닥면 중앙에 '창신순은(昌信純銀)'이 양각으로 찍혀있으며
가는 선으로 ‘운현(雲峴)’이라고 새겨져 있다.
은제 합(銀製盒) Silver Bowl
20세기, 은銀, 전체높이 6.5, 너비 6.8, 몸체높이 3.9, 몸체너비 5.8, 몸체길이 9.3
뚜껑에 경첩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만든 은제 컵으로 내부 유리 용기와 소형숟가락이 세트를 이룬다.
은제 컵은 타원형의 원통형이며 바닥 중앙에 원형의 구멍이 있다.
이 구멍은 내부의 유리용기를 빼기 쉽게 하기 위해 고안한 것으로 추정되며
바닥면에 양각의 ‘EP’, ‘AI’와 음각으로 새긴 ‘본궁(本宮)' 명문이 있다.
뚜껑을 여닫기 쉽도록 ‘乙’자형 손잡이를 부착했으며
경첩 반대쪽에는 홈을 두어 수저를 꽂은 채 뚜껑을 닫을 수 있도록 했다.
유리용기는 반투명하며 숟가락 뒷면에는 ‘NOOUOHIWARE'가 양각으로 찍혀 있다.
은제 발(銀製鉢) Silver Rice Bowl
조선말기, 은, 동, 전체높이 9.1, 입지름 9.7, 몸체높이 7.2, 입지름 9.7, 바닥지름 4.5,
뚜껑높이 2.1, 뚜껑지름 9.9, 뚜껑바닥지름 4.4
몸체와 뚜껑으로 이루어진 발(鉢)이다.
구연부가 살짝 외반하였으며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다가 굽 가까이에서 둥글게 오므라든 형태이다.
몸체 사방에 도안화된 ‘수복강녕(壽福康寧)’ 4글자를 배치하여 음각하였다.
바닥에는 ‘한성미술(漢城美術)’ 명문이 각인되었고, ‘운현궁 노안당’이 새겨져 있다.
이로 보아 한성미술제작소에서 제작하였으며, 제작 시기는 1908년~1912년 사이로 추정되며,
운현궁 노안당에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뚜껑 가운데의 평평한 부분에는 원형으로 도안화된 ‘수(壽)’자를 음각선으로 시문했다.
은제 호(銀製壺) Silver Bowl with a Lid
20세기, 은 ․ 파란, 전체높이 4.0, 입지름 2.9, 바닥지름 3.0, 뚜껑높이 1.3, 뚜껑지름 3.4
뚜껑에 파란장식이 있는 편구형(偏球形) 호(壺)이다.
몸체는 위아래로 납작한 편구형이며 굽이 없고 편평한 형태이다.
편구형 몸체를 상하(上下)로 나누어 제작하여 중간을 접합하였으며 단조기법으로 두드려 만들었다.
뚜껑에는 버섯모양의 꼭지를 달았으며, 꼭지를 중심으로 화엽문(花葉紋)을 선각하고
청(靑) ․ 녹(綠) ․ 황(黃) ․ 자(紫)색 파란으로 장식했다.
3개의 호 중 하나는 뚜껑이 위에서 아래를 덮도록 만들고 홈을 냈다.
몸체에도 같은 크기의 홈이 있어 원래는 작은 수저 등이 부속물로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은제 합(銀製盒) Silver Bowl with a Lid
(1)20세기, 은, 파란, 전체높이 3.5, 지름 5.9, 뚜껑높이 1.1, 뚜껑지름 6.1
(2)20세기, 은, 파란, 전체높이 3.8, 입지름 5.7, 바닥지름 4.2, 뚜껑높이 1.7, 뚜껑지름 4.2
(3)20세기, 은, 파란, 전체높이 2.9, 입지름 4.5, 바닥지름 4.7, 뚜껑높이 0.7, 뚜껑지름 4.6,
전체길이 5.4, 높이 1.8
(1)몸체와 뚜껑으로 이루어진 합이다. 뚜껑은 평평하고 버섯모양의 꼭지를 달았다.
몸체는 은판을 둥글게 말아 접합하고 원형으로 자른 은판을 몸체에 붙여 바닥으로 삼았다.
뚜껑 꼭지 주위로 화엽문(花葉紋)과 원권문(圓圈紋)을 조각하고
청(靑) ․ 녹(綠) ․ 황색(黃色)의 파란을 얹어 장식했다.
(2)뚜껑이 있는 소형 합이다. 몸체는 은판을 둥글게 말아 접합하고
밑판과 굽, 전 부분을 따로 제작하여 접합하였다. 뚜껑의 중앙은 평평하고, 꺾여서 내려오다가
원형 돌대를 다시한번 둘렀으며 가장자리에서 수직으로 꺾여 몸체를 덮도록 하였다.
뚜껑에는 버섯모양의 꼭지를 달았으며 그 주위로 8엽의 화엽문(花葉紋)을 찍어 형태를 만들고
청(靑) ․ 황(黃) ․ 자색(紫色) 파란을 얹어 장식했다.
(3)뚜껑이 있는 소형의 원통형(圓筒形) 합이다.
몸체는 은판을 둥글게 말아 접합하고 바닥을 따로 제작하여 접합하였다.
뚜껑은 가장자리가 내려와 몸체를 덮도록 만들었다.
2점 중 1점에는 스푼을 넣을 수 있도록 뚜껑과 몸체에 홈을 내었다. 화장품 용기로 생각된다.
스푼은 손잡이가 곡선으로 구부러져 있고 끝에 연봉 장식이 있다.
은제 연적(銀製硯適) Silver Dropper
조선말기, 은 ․ 파란, 전체높이 3.8, 지름 5.0, 뚜껑높이 1.1, 뚜껑지름 2.5
뚜껑이 있는 원통형의 은제합의 형태를 지녔으나,
평평한 윗면에는 물과 공기가 들어가도록 하는 물구멍이 있으며,
그 반대쪽 몸체에 호로병 형태의 주구(注口)가 달려 있어 연적으로 생각된다.
윗면에는 화염보주(火焰寶珠)를 사이에 둔 2마리 용이 선각으로 시문되었으며
청색 파란이 일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파란으로 문양을 장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몸체 옆면에는 원형으로 도안화된 문자문을 배치하였는데
주구 좌측으로부터 ‘수복강녕(壽福康寧)’ 4자를 음각하였다. 뚜껑에는 연봉형 손잡이를 달았으며
윗면에 보상당초문을 선각했다.
- 도자유물
운현궁에서 대원군家가 거주하기 시작한 때는 19세기 중엽이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흥선군의 사저(私邸)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 이하응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府大夫人)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였다고 한다.
따라서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중인 운현궁 도자의 실제 사용연대는 그 상한을 1800년대 중엽으로,
하한은 대원군家의 5대손인 이청(李淸) 일가가 거주하였던 20세기 후반으로 계상할 수 있다.
따라서 19세기 유물로 확인되는 명문도자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물은 20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근대기로의 이행과정에서 점차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는 시점의 유물들이다.
소장된 운현궁의 도자유물 중 특별히 대원군 집권기에 해당하는 유물로는
7점의 ‘운현(雲峴)’명의 접시와 1점의 ‘상실(上室)’명 접시가 있다.
이들은 조선시대 마지막 관요인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요의 19세기 후반 제작품이다.
현재 ‘운현’명이 있는 도자기 7점은 접시와 종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양은 크게 보상당초문과 초문(草文)으로 분류된다.
<백자청화보상당초문종지편>과 같이 기물의 외면에 보상당초문을 시문한 예,
<백자청화초문접시>와 같이 기물의 외면을 팔화형으로 구획하여
각각의 칸에 초화를 그려 넣어 장식한 예를 살펴볼 수 있다.
20세기에는 국내에서 제작된 자기 이외에도 일본 등지에서 수입된 자기들이 주로 사용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한제국기에 황실용으로 제작된 이화문(李花文=오얏꽃)이 시문된
<백자금채이화문접시> <백자금채이화문유개발> 등의 자기류이다.
이화문(李花文)은 다섯 개의 꽃잎마다 셋의 꽃술을 산형으로 배치하여 정형화한 것으로
이 문장을 통하여 이들이 궁을 위해 주문 생산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운두가 낮고 투명유를 입혔으며 접시 테두리에 금색선을 두르고
내부에 이화문을 넣은 대체로 가벼운 기물로 기형상 서양식기를 따르고 있다.
한편, 1897년 고종황제에 의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오얏 ‘李 ’자에서 따온 오얏꽃 곧 이화문(李花文)을 황실의 상징으로 삼았다.
같은 이화문이라 하더라도 왕실의 집안에 따라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여 사용하였는데,
운현궁에서 사용되었던 문장은 도자기의 문장과 달리 원권(圓圈)을 두르고 꽃술이 생략된
보다 도안화된 형식의 문장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 강순형 <대한제국 문장 오얏꽃(李花文)>, 오얏꽃 황실생활유물, 궁중유물전시관, 1997)
(- 정지희 <운현궁의 금속유물> 운현궁 생활유물Ⅱ, 서울역사박물관, 2004)
(1)백자금채이화문유개 발(白磁金彩李花紋有蓋鉢)
Gold-Plated White Porcelain Covered Bowl design of plum flower
20세기, 9-1
뚜껑 3.5×12.0 / 몸체 4.7×11.5×6.5, 9-2
뚜껑 3.8×12.2 / 몸체 4.8×11.6×6.2, 9-3
뚜껑 2.6×12.1 / 몸체 5.0×11.5×6.5, 9-4
뚜껑 3.4×13.0 / 몸체 5.3×12.6×7.2, 9-5
뚜껑 3.5×12.8 / 몸체 5.0×11.9×6.3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이화문이 있는 발(鉢)이다.
뚜껑과 발의 외면에 다섯 개의 꽃잎과 3개씩의 꽃술로 이루어진 이화문을 배치하였다.
발과 뚜껑이 맞닿은 부분은 금테를 둘러 장식하였다. 구연은 직립하였으며 내저는 곡면을 이룬다.
(2)백자금채이화문 접시(白磁金彩李花紋楪匙) Plates
Gold-Plated White Porcelain Dishes with a design of plum flower
20세기, (1)2.0×19.4×11.8 (2)2.1×19.2×11.6
금색의 이화문으로 장식된 서양식 접시이다.
접시의 가장자리와 내저면 연결부에 금채로 각각 2조와 1조의 선을 돌린 후 이화문을 배치하였다.
굽의 중앙에 ‘日本陶器會社, NORITAKE, NIPPON TOKIKAISHA’라고 쓰여 제작사를 알 수 있다.
(3)백자청화초화문 접시(白磁靑畵草花紋楪匙)
Blue and White Porcelain Dish with flowering plant design
19세기, 3.7×14.1×8.2
운두가 낮으며 구연이 살짝 외반한 백자접시이다.
몸체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면서 굽까지 좁아지는 형태이다. 태토에는 약간의 잡물이 섞여 있다.
기면 전체에 투명한 백자유를 고르게 시유하였고, 유면에는 은은한 광택이 보인다.
구연과 굽 측면에는 청화로 각기 한 줄의 선을 돌렸고,
내저면 중앙에는 두 줄의 원권(圓圈)을 두른 후 그 안에 ‘복(福)’자를 써 넣었다.
접시의 외면은 부드러운 S자형 곡선으로 여섯 개의 공간을 구획한 후
그 내부에 각각 초화문을 배치하였다.
굽 안바닥에는 청화로 써 넣은 ‘운현(雲峴)’명이 있다.
굽은 접지면의 유약을 닦아낸 후 고운 모래를 받치고 구웠다.
(4)백자청화보상당초문 접시(白磁靑畵寶相唐草紋楪匙)
Blue and White Porcelain Dish with floral arabesque design
19세기, 3.0×13.8×7.0
청화로 보상 당초문을 시문한 접시이다.
운두는 낮고 구연은 외반 하였으며 내측면은 완만한 곡선을 이룬다.
일부 잡물이 섞인 태토로 성형한 후 담청색을 머금은 백자유를 기면 전체에 고르게 입혔다.
내저 중앙에는 청화를 사용하여 이중의 원권(圓圈)을 두르고 그 안에 ‘복(福)’자를 시문하였다.
접시의 구연의 외측면과 굽 측면에 여러 줄의 선을 돌렸으며,
측벽에도 보상화문과 당초문을 교대로 배치하여 전면을 꽉 차게 장식하였다.
굽 안 바닥에는 '운현(雲峴)'명을 청화로 써 넣어 운현궁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굽의 접지면에는 유약을 닦아내고 내화토를 받쳐 구운 흔적이 남아있다.
(5)백자청화초문 접시(白磁靑畵寶草紋楪匙)
Blue and White Porcelain Dish with grass design
19세기, 3.0×17.0×8.5
입이 비교적 넓고 운두가 낮은 접시이다. 내저면이 편평하고 구연은 살짝 외반하였다.
태토에는 약간의 잡물이 섞여 있고 일부 기포의 흔적이 보인다.
담청색을 띠는 백자유로 전면을 고르게 시유하였으며 일부 광택이 있다.
내저 중앙에는 청화로 이중의 원권(圓圈)을 돌리고 그 안에 간략한 포도당초문을 그려 넣었다.
구연에는 청화로 한 줄의 선을 돌렸고, 외측면에도 완만한 곡선을 이용해 여섯 면을 구획한 후
그 내면에 각기 초문을 시문하였다.
굽은 접지면의 유약을 닦아낸 후 내화토를 받치고 구웠다.
굽 안바닥 중앙에는 ‘운현(雲峴)’명이 청화로 쓰여 있다.
- 금속유물
■ 흥선대원군 화로(興宣大院君 火爐)
조선말기, 놋쇠, 높이 20.4, 받침대포함 높이 26.8, 받침대 6.0, 다리높이 7.2, 지름 45.7,
몸통지름 43.7, 개인소장
흥선대원군이 사용하던 것으로 전하는 화로이다.
놋쇠로 두텁게 만들어 중후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전과 몸체, 다리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제작하여 놋쇠 못으로 고정하였다.
둥근 전은 외곽을 높이 세운 형태이고, 몸체 어깨부분에는 귀꽃형태 장식을 덧붙여 장식성을 가미하였다.
귀꽃의 형태는 위는 네 개의 곡선이 맞닿은 형태이고, 아래는 여섯 개의 곡선이 맞닿은 형태이다.
다리는 세 개로 구성되었는데, 대체로 둥근 형태를 유지하다 하단이 오목하게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현재 다리 밑에는 나무로 된 받침대가 연결되어있다.
간결하면서도 위엄 있는 형태와 과하지 않으면서 세련된 장식, 중후한 미감 등에서
조선왕실의 기품을 느낄 수 있는 유물이다.
■ 운현궁의 제기(祭器)
운현궁에서 사용한 제기는 거의 유기(鍮器)로
운현궁 금속유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양과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제기는 종묘제기와 일반 사대부家의 제기로 구분된다.
현재 남아있는 운현궁 제기는 주로 일반 사대부가에서 사용한 것과 같으나,
간혹 왕실이나 묘에서 사용되던 형태의 제기들이 섞여 있다.
예를 들면 종자우리, 작점(爵坫), 전촉자(剪燭子), 우리(于里)와 우리대구(于里臺具) 등이다.
이는 운현궁이 왕실에 버금가는 권세와 면모를 지니고 있었고,
크고 작은 궁중행사가 운현궁에서 열렸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운현궁중수공사보고서> 및 <고종실록>의 기록(1년 9월22일조, 1년 9월24일조, 3년 1월16일조,
3년 3월21일조)들을 보면, 운현궁은 흥선대원군 당시 권력의 중심지로서 과거, 가례, 접견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은 운현궁의 권역에서 벗어나 있지만 덕성학원 평생교육원 내의 육사당(六四堂)이
가례와 관련된 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굳이 이런 행사가 아니더라도 운현궁의 예우 차원에서 많은 궁중집기가 유입되었을 것이다.
①종자우리(種子于里)는
종묘제례 때 잣, 은행, 밤, 대추, 비자(榧子) 또는 연자(蓮子) 등 5가지 제물을 진설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흔히 종자(種子)는 '종지'를 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간장, 고추장 등의 장류를 담는 일반적인 종지와는 분명 구분을 두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종자우리는 맨 아래에 대접모양의 대를 받치고 위아래가 뚫린 원통형의 그릇을 끼워놓아 사용하였다.
운현궁의 경우 종자우리가 여러 점 남아있기는 하지만 완벽하게 세트를 이루는 것은 없다.
서로 모양과 크기가 다른 것이 있어 적어도 3세트 이상의 종자우리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 종자우리
- 종자우리를 분리한 모습
②계절에 따라 지내는 차례나 설, 한식, 단오, 추석 같은 속절제 때
주로 산자, 약과, 다식 등을 높이 괴는데 쓰던 우리(于里)와 우리대구(于里臺具)는 모두 9점이다.
이중 우리(于里)는 4점, 우리대구(于里臺具)는 5점이 남아 있다.
종묘에 있는 우리(于里)는 살이 파초모양으로 장식되었는데
운현궁 우리(于里)는 장식 없는 살로 간결하게 만들었다.
굽은 넓게 만들어져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대구(臺具)의 윗면은 기울어지지 않고 판판하고
운두를 높게 세워 우리(于里)가 쓰러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우리(于里) Offering Containers
20세기, 놋쇠, 29.3×16.5
계절에 따라 지내는 차례나 설, 한식, 단오, 추석 같은 속절제 때
주로 산자나 약과 등을 높이 쌓아 올리는데 사용되던 제기의 일종이다.
위 아래에 너비 약 2㎝의 띠형의 대(臺)에 8개의 살이 일정한 간격으로 2개씩의 못을 박아 고정시켰다.
대(臺)가 파초 모양으로 장식되는 경우도 있으나 이것은 장식 없이 일자로 만들어졌다.
우리대구(于里臺具) Ritual Stands for biscuit container
20세기, 놋쇠, 18.4×13.1×7.5
다과(식)나 약과, 산자 등을 높게 쌓아올리는데 사용하는 우리대구이다.
굽은 넓게 만들어져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대구의 윗면은 기울어지지 않고 판판하게 만들었으며
운두를 높게 세워 우리(于里)가 쓰러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③작점(爵坫)은 술잔의 일종인 작(爵)을 받치는 것으로 작판(爵板)이라고도 불린다.
사각형의 판 가운데를 둥글게 깎아 놓은 형태이다.
예전의 작점은 굽이 없게 만들었으나 요즘 만들어지는 것은 약 0.5㎝의 둥근 굽이 있다고 한다.
운현궁 제기 중에 작점이 있다는 것은 운현궁에서 작(爵) 등의 종묘제기를 사용했음을 알려준다.
술잔(작, 爵) / 받침(작점, 爵坫)
각종 제례와 궁중에서 쓰는 술잔을 높여 ‘작(爵)’ 이라 부르며,
‘작점(爵坫)’ 은 작(爵)을 올려놓는 받침이다.
단술인 예제(醴齊), 거르지 않은 흰빛 술인 앙제(盎齊), 청주(淸酒) 등을 담는 제기로
종묘제례와 같은 큰 제사 때 신위마다 세 번 올린다.
④희준(犧罇), 산뢰(山籟), 계이(鷄彛), 황이(黃彛), 가이(斝彛) 등의 제기가
현재 운현궁 후손 댁에 전해지고 있다.
종묘는 예로부터 왕조의 개창과 계승이라는 의례적인 상징으로 인하여 사직과 더불어 가장 큰 제사로 받들어졌다. 이 때 사용한 제기는 다른 제사와는 다르게 천자나 왕만이 지내는 제사이기 때문에 절대 권위를 상징하는 의미와 형태로 만들어져 사용되었고 이를 국가에서 특별히 제작하여 관리 보관하였다.
제기의 형태나 문양에 있어서도 왕실의 절대 권위를 상징하는 용(龍)이나 봉황(鳳凰) 등 상상의 동물이나 산(山)과 우뢰(雷)와 같은 위엄이 있는 문양을 장식하였고, 대개 사물에서 취하거나 신체에서 취하여 의미를 부여하였으며, 준(尊)이나 이(彛)의 명칭에서도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즉, 준은 존엄을 말하는 것으로 준(尊)으로 술을 위에 바치면 천지에까지 미치게 된다는 것이며, 이것은 떳떳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彛)로서 울창주(鬱鬯酒)를 땅에 부으면 종묘에까지 미치게 된다고 하여 술을 담는 제기를 준(尊) 또는 이(彛)라고 하였다. [술동이(이, 彛)] 이(彛)는 울창주(鬱鬯酒)와 현주(玄酒), 명수(明水) 등 제례에 사용되는 제주(祭酒)를 담는 격이 높은 제기이며 신실 밖 준소상에서 진설한다. 준(尊)보다는 격이 높은 제기이다.
▲계이(鷄彛)와 조이(鳥彛) : 한 쌍을 이루며, 봄과 여름제사에 사용 계이 - 봄에 명수를 담고, 여름에 울창주를 담는다. 조이 - 봄에 울창주를 담고, 여름에 명수를 담는다. ▲가이(斝彛)와 황이(黃彛) : 한 쌍을 이루며, 가을과 겨울제사에 사용 가이 - 가을에는 명수를 담고, 겨울에는 울창주를 담는다. 황이 - 가을에는 울창주를 담고, 겨울에는 울창주를 담는다. <예서(禮書)>에 따르면, 계이는 닭의 문양을 새긴 것으로, 닭이 동방의 생물로 인(仁)을 상징하고, 조이는 봉황을 새긴 것으로, 새(봉황)가 남방의 생물로 예(禮)를 상징하기 때문에 봄과 여름에 사용한다고 한다. 가이는 가(斝)가 곡식의 가(稼)와 발음이 같아서 화가(禾稼)의 형상을 새기었고, 벼(禾)는 백색을 의미하고 의(義)를 상징한다. 황이는 황금으로 눈(目)을 만든 것이다. 눈(目)은 기(氣)의 청명함을 말하며 중(中)을 나타내고 신(信)을 상징하기에 가을과 겨울 제사에 사용한다.
[준(尊)] 준(尊)은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때 사용하는 명수(明水)와 단술-예제(醴齊), 거르지 않은 흰빛 술-앙제(盎齊), 맑은술-청주(淸酒)를 담는 제기이다. 희준(犧尊, 소모양 술동이), 상준(象樽, 코끼리모양 술동이)
▲희준(犧尊) : 초헌례(初獻禮) 때 올리는 명수(明水)와 예제(醴齊)를 담는다. ▲상준(象尊) : 아헌례(亞獻禮) 때 올리는 명수(明水)와 앙제(盎齊)를 담는다. ▲산뢰(山籟) : 종헌례(終獻禮) 때 올리는 현주(玄酒)와 청주(淸酒)를 담는다. ***희준과 상준은 봄과 여름 제사에 쓰이며, 산뢰는 사계절 제사에 모두 쓰인다. ***착준과 호준은 가을과 겨울 제사에 쓰인다.
<예서(禮書)>에 이르기를, “희준은 周나라의 준(尊)을 본뜬 것이다. 소는 큰 희생(犧牲)이고, 기름이 향내가 나므로 봄의 형상에 적당하고, 코끼리는 남월(南越)에서 생산되니 이것이 선왕(先王)께서 희준과 상준을 봄 제사와 여름 제사에 사용했던 까닭이다.” 하였다. 희준과 상준은 조선초기에는 몸체에 술을 담았으나 후대에는 등 위에 원형의 잔을 얹어 사용하였다.
산뢰는 산과 구름의 형상을 그린 준으로 구름과 우뢰가 널리 혜택을 베푸는 것이 마치 임금이 은혜를 여러 백성들에게 두루 미치게 한다는 형상과 같다 하여 이름하였다.
가을과 겨울 제사에는 희준과 상준 대용으로 쓰이는 착준(著尊)과 호준(壺尊)이 있다.
착준(著尊, 저준이라고도 함)은 양(陽)의 기운이 내려와서 땅에 부착하는 형상(땅에 달라붙어 발이 없는 형상)이라 이름한 것이고, 호준(壺尊)은 음(陰)의 기운이 빙 둘러서 만물을 감싸는 형상이기 때문에 가을과 겨울 제사에 사용한다고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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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斝彛) Gai
조선, 놋쇠, 전체높이 25.8, 입지름 19.6, 바닥지름 14.8, 받침대높이 4.0, 몸통두께 0.9,
바닥두께 0.5, 구멍지름 0.5, 띠너비 2.1, 개인소장
종묘제례나 왕실 상례에 사용되던 제기로 황이(黃彛)와 함께 쌍으로 사용되었다.
가을에는 명수(明水), 겨울에는 울창주(鬱鬯酒)를 담아 올렸다.
몸체의 앞면과 뒷면 중앙에는 잘 익어 고개 숙인 벼를 조각하였는데,
이는 백색(白色)과 의(義)를 상징한다. 몸체는 비교적 세장한 형태이며 세 개의 구멍이 뚫린 굽이 있다.
<종묘의궤(宗廟儀軌)>등의 기록에는 손잡이가 달린 형태로 전하고 있는 것과 달리
손잡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황이(黃彛) Hwangi
조선, 놋쇠, 전체높이 25.8, 받침대높이 4.2, 입지름 19.8, 몸통두께 0.9, 바닥지름 14.6,
바닥두께 0.6, 띠너비 1.6, 구멍지름 0.5, 개인소장
종묘제례나 왕실 상례에 사용되던 제기로 가이(斝彛)와 한 쌍을 이룬다.
가을에는 울창주(鬱鬯酒), 겨울에는 명수(明水)를 담아 올렸다.
몸체의 앞면과 뒷면 중앙에는 눈을 조각하였다.
황이는 황금으로 눈을 그린 황목준(黃目尊)으로, 이 때 눈은 청명한 기(氣)를 말한다.
눈의 형태는 위로 치켜 뜬 모습으로 가운데 눈동자를 배치하고,
옆에 선을 더하여 눈에서 뿜어 나오는 기(氣)를 강조하였다.
형태는 비교적 세장하고 굽에는 세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손잡이나 다른 장식은 보이지 않는다.
계이(鷄彝) Gyei
조선, 놋쇠, 전체높이 25.8, 받침대높이 4.3, 입지름 19.7, 몸통두께 0.7, 바닥지름 14.6,
바닥 두께 0.5, 띠너비 1.4, 구멍지름 0.6, 개인소장
종묘제례나 왕실 상례에 사용되던 제기로 조이(鳥彛)와 함께 사용되었다.
봄에는 명수(明水), 여름에는 울창주(鬱鬯酒)를 담아 올렸다.
몸체의 앞면과 뒷면 중앙에 닭을 조각하였는데, 닭은 동방의 생물이며 인(仁)을 상징한다.
닭의 형태는 벼슬을 세우고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움직임을 주어 동적인 모습을 표현하였으며
몸 가득 깃털이 표현되어 있다.
운현궁 소장의 다른 이(彛)와 같이 전체적으로 세장한 형태로 굽에 세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조이(鳥彝)
계이(鷄彛)와 함께 한 쌍을 이루며 봄과 여름제사에 사용하는 제기이다.
봄에 울창주를 담고, 여름에는 명수를 담는다.
희준(犧尊) Huijun
조선, 놋쇠, 손잡이 포함 높이 26.5, 손잡이 제외 높이 22.1,
뚜껑길이 14.5, 뚜껑너비 8.7, 몸통두께 0.7, 전체너비 30, 뚜껑높이 5.9, 개인소장
종묘제례나 왕실 상례에 사용되던 제기로 봄과 여름 제사 때 명수(明水)와 예제(醴齊)를 담았다.
형태는 살집이 있는 소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는데 귀는 쫑긋하게 세웠으며 뿔은 안으로 굽은 모습이다.
얼굴표현은 단순한 편으로 눈은 타원형으로, 뭉뚝한 코 밑으로는 일직선 형태의 입을 조각하였다.
목 뒤로 세 줄의 가로줄로 목덜미 주름을 표현하였으며, 등에는 뚜껑과 손잡이가 달려 있다.
손잡이의 양 끝은 꽃봉오리형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뚜껑은 분리된다.
상준(象尊)
준(尊)은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때 사용하는 제기이며,
상준(象尊)은 아헌례(亞獻禮) 때 명수(明水)와 앙제(盎齊)를 담아 올린다.
착준(著尊, 저준이라고도 함)
***희준과 상준은 봄과 여름 제사에 쓰이며, 산뢰는 사계절 제사에 모두 쓰인다.
***착준과 호준은 가을과 겨울 제사에 쓰인다.
착준(著尊, 저준이라고도 함)은 양(陽)의 기운이 내려와서
땅에 부착하는 형상(땅에 달라붙어 발이 없는 형상)이라 이름한 것이다.
호준(壺尊)
가을과 겨울 제사에는 희준과 상준 대용으로 쓰이는 착준(著尊)과 호준이 있다.
호준(壺尊)은 음(陰)의 기운이 빙 둘러서 만물을 감싸는 형상이기 때문에
가을과 겨울 제사에 사용한다고 한다고 하였다.
산뢰(山籟)
산뢰는 산과 구름의 형상을 그린 준으로 구름과 우뢰가 널리 혜택을 베푸는 것이
마치 임금이 은혜를 여러 백성들에게 두루 미치게 한다는 형상과 같다 하여 이름하였다.
종헌례(終獻禮) 때 올리는 현주(玄酒)와 청주(淸酒)를 담는다.
사계절 제사에 모두 쓰인다.
⑤예로부터 예(禮)를 소중히 했던 우리 조상은 선조를 모시는데 소홀함이 없었는데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이 바로 전촉자(剪燭子)이다.
전촉자는 타고난 초의 심지를 자르는 것이어서 심지가위라고도 불린다. 잘라낸 심지는 전촉기에 담았다.
운현궁 유물 중에는 전촉자가 3점 남아 있는데
심지를 자른 후에 깔끔하게 처리하기 위해 날 끝에 둥근 운두를 세운 것이 특징이다.
전촉자(剪燭子) Scissors for cutting a candle wick
19세기, 놋쇠, 28.9×16.6
촛불의 심지를 자르기 위한 가위이다. 크기가 일반 가위에 비해 약간 큰 편이다.
손잡이는 타원형이고 가위날은 직선으로 곧게 뻗어있다.
날의 끝부분에 둥근 운두를 세워 잘린 심지를 정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톱니바퀴 모양의 장식판과 원형 못으로 2개의 가위날을 고정시켰다.
⑥작세(爵洗)
향교나 사당에서 술잔을 씻는데 사용한 작세는 몸체는 크고 둥글며 깊게 주물되었다.
몸체에는 3줄씩의 줄무늬가 2군데 음각으로 둘러져 있다.
형태는 바닥에서부터 거의 수직으로 올라가다 구연부는 외반되었는데
양쪽에 반달형 손잡이가 달려있는데 몸체의 겉과 안쪽에 손잡이를 둥근 못으로 고정시켰다.
굽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이며 중간에 1줄의 음각선이 둘러져 있다.
밑에는 3군데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작세(爵洗) Ritual Bowl for washing goblet
19세기, 놋쇠, 35.8×24.4×18.9
향교나 사당에서 술잔을 씻는데 사용한 작세이다. 몸체는 크고 둥글며 깊게 주물되었다.
몸체에는 3줄씩의 줄무늬가 2군데 음각으로 둘러져있다.
형태는 바닥에서부터 거의 수직으로 올라가다 구연부는 외반되었다.
양쪽에 손잡이가 달려있는데 몸체의 겉과 안쪽에 손잡이를 둥근못으로 고정시켰다.
굽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이며 중간에 1줄의 음각선을 돌려 장식하였다.
굽의 하단부에 3군데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⑦촛대
운현궁 유물 중 촛대는 모두 9점이 남아 있다.
촛대는 향로와 향합과 함께 ‘구삼벌’이라 하여 제기로도 쓰였다.
간주(間柱)의 형태에 따라 죽절형(竹節形) 촛대와 원기둥형 촛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기로 쓰였는지, 불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쓰였는지 구분할 때
죽절형 촛대는 간주의 마디를 어떻게 표현했느냐에 따라 세분할 수 있는데,
마디를 여러 개로 표현했느냐, 아니면 간략히 외마디로 한 개만 표현했느냐가 기준이 된다.
크기가 작은 것은 제기라기보다는 서안 등의 소가구에 놓아 쓰던 것으로 생각되며,
외마디 간주인 촛대는 총 4점인데
대체로 마디는 간주는 중간부분에 위치하고 양쪽 가장자리로 멀어질수록 가늘어지는 형태이다.
뒤집어보면 간주와 나팔형으로 받침을 연결한 못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외관상으로 볼 때 유심히 살피지 않는다면
간주와 받침의 이음새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촛대들이 얼마나 숙련되고 뛰어난 기술로 만들어졌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원기둥형태의 촛대는 무게가 꽤 무거워 쉽게 옮겨질 수 있는 용도는 아닌 것으로 판단,
따라서 사당과 같은 곳에 놓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촛대(燭臺) Candlestick
19세기, 백동, 14.7×9.2×71.3
구리와 니켈의 합금인 백동으로 만들어진 촛대이다.
상반과 바람막이판, 간주와 굽 4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상반과 바람막이판, 연봉형 장식, 바람막이판과 간주 연결대 모두 분리가능하다.
상반과 굽을 연결하는 간주는 가운데가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으며
끝에 침봉형의 초꽂이가 함께 만들어졌다.
간주와 초꽂이 사이에 턱을 만들어 작은 8엽의 화형(花形) 상반을 받치게 하였다.
바람막이판도 역시 8엽화형이며 2개의 반원형 장식이 붙어있다.
바람막이판과 간주를 연결시켜주는 연결대는 쌍희(囍)자문을 투각하여 장식하였는데
360도 회전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쌍희자문 장식 옆으로 긴 세로대를 만들어
바람막이판 아래에는 가락지매듭 모양의 장식을 하였고, 맨 위에는 연봉형 장식으로 마무리하였다.
굽은 6엽의 화형으로 제작되었다.
촛대(燭臺) Candlesticks
19세기, 놋쇠, 11.7×7.5×36.3
전형적인 죽절형(竹節形) 촛대로
받침과 기둥, 초꽂이는 하나로 주물 되고 상반만 분리되도록 만들었다.
받침은 나팔형이고, 기둥은 중간에 홈이 파인 죽절형이며 초꽂이는 침봉형이다.
상반은 밑지름이 약 6.2㎝이며 외곽에 전을 만들어 돌렸다.
향로(香爐) Incense Burner 19세기, 놋쇠, 전체높이 18.9, 뚜껑높이 4.2, 뚜껑지름 12.4, 뚜껑최대너비 18 향을 피우던 향로이다. 노신(爐身)은 둥근형이며 3개의 타원형 문양대와 호족형의 다리가 3개 달려있다. 타원형인 문양대의 외곽은 음각으로 새기고 그 안은 서로 다른 문양을 양각하였다. 첫 번째는 구름과 파도문에 거북과 나무와 바위를, 두 번째는 산과 나무와 학을, 세 번째는 산과 나무와 사슴을 각각 새겼다. 양쪽에 달린 두 귀(兩耳)는 살짝 외반되었다. 뚜껑은 크고 작은 꽃모양(李花)으로 투각되어 있다. 뚜껑의 가운데에는 십자(十자) 형장식이 있으며 꼭지는 결실되었다. 향로(香爐) Incense Burner 19세기, 놋쇠, 25.3×21.3×18.0
일반 향로와 다르게 화로와 비슷한 형태의 향로이다. 노신(爐身)은 원형이고 그 위에 약 4㎝의 전이 달려있다. 전의 가장자리를 두툼하게 처리하고 노신의 가운데는 양각으로 2줄의 선을 돌렸다. 다리는 하나로 중간에 둥근 마디가 있고 아랫부분의 종(鐘)형으로 만들었다. 받침은 둥근형으로 노신보다 넉넉하게 만들고 운두를 세웠으며 굽을 만들었다. 제주기(祭酒器) Ritual Kettle 19세기, 놋쇠, 16.2×20.7×24.7 크기가 큰 주기로 일상용기라기 보다는 제례와 같은 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굽은 위로 갈수록 점차 줄어드는 형태로 굽의 위와 아래를 띠를 두른 것처럼 표현하였고 가운데에 음각으로 2줄의 선을 새겼다. 또한 굽에 3개의 구멍이 뚫려있다. 몸체는 둥근형으로 2개를 이어 만들었다. 이음새를 두꺼운 띠로 장식하여 가렸다. 주구는 S자형이며 따로 주물하여 4개의 못으로 고정시켰다. 양쪽에 달린 손잡이가 달려있으며 뚜껑은 결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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