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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가며(자료)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국새(황제어새, 皇帝御璽)

Gijuzzang Dream 2009. 3. 18. 00:32

 

 


 

 국외에서 찾아온 대한제국 국새

 

'독립 호소' 외교친서에 고종이 직접 찍어 의미 커

1903~1907년 러시아 · 독일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찍혀
박물관 “황제어새, 재미동포 소장자가 연락해와 구입”

 

 

 

 

 

 

 

 

국립고궁박물관이 공개한 고종 황제의 국새(왼쪽).

밑바닥 인면(찍는 면)에 ‘皇帝御璽(황제어새)’란 글자가 돋을새김되어 있다(오른쪽).

 

 

 

 

 

비운의 황제 고종(재위 1863~1907)이

독립을 지켜달라고 호소하는 외교 친서에 직접 찍은 국새(國璽)가 발견되었다.

정계옥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장은

“고궁박물관 측의 해외반출 중요우리문화재의 국내 환수 일환으로, 유물 구입 공고를 보고

지난 2008년 11월 한 60대 재미교포가 '내가 고종이 쓰던 국새를 소장하고 있다. 이를 구입하겠느냐'고

국립고궁박물관측에 문의해왔으며, 유물구입 과정과 소장자 신분 등은 공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며

다만 60세가 넘는 미국 거주 개인소장가가 먼저 제의해왔고,

2008년 12월 일반적인 추측보다는 상당히 낮은 가격에 사들였다”고 전했다.

 

정종수 국립고궁박물관장은 “기존 문헌에 제작 기록이 없어 고종이 내밀하게 썼던 국새로 파악된다”며

“이 국새가 언제 유출되었는지, 일본강점기 때인지, 한국전쟁 시기인지 등은 알 수 없다.

소장했던 재미교포도 유출경로를 모른다”고 말했다.

 

이 국새는 고종황제가 친서에 사용한 현존하는 유일한 대한제국시대의 국새이며,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자료에 유리원판사진으로만 전해지던 분실된 바로 그 국새이다.

국사편찬위가 소장한 유리원판 자료에는

이 ‘황제어새’ 목제 원형과 글씨 원본, 국새와 인영, 외함과 국새 등의 사진이 전해지는데,

분실된 외함을 제외하고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입수한 ‘황제어새(皇帝御璽)’는 역사적 가치가 훨씬 크다.

임금이 행정 문서에 찍는 실무용 도장인 국새는 ‘칙명지보(勅命之寶)’ 등

고종이 사용했던 3과(顆: 도장을 세는 단위)가 남아 있지만,

이 국새인 '황제어새'는 조선왕조 수많은 국새 중 분실됐다가 되찾은 네 번째 국새이자,

실제로 사용했던 사례가 확인된 것은 ‘황제어새’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국새가 실제 사용한 현존 문서와 함께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국보급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새는 보관통 중의 하나인 외함(보록, 寶籙)은 분실되고 내함(보통, 寶筒)만 남아 있는 상태로 발견됐다.

하단에는 인주(印朱)를 넣고 윗단에 국새를 넣게 돼 있다.

국새가 들어가는 상단은 두께 0.5㎝의 소나무로 내곽을 만든 뒤 붉은 천을 붙여 마무리했고,

뚜껑은 네 면을 경사지게 꺾어 마무리하고 하단과 뚜껑의 내부는 붉은 비단을 직접 접착해 마무리했다.

 

 

바깥을 황동(黃銅)판으로 덮었으며, 전체 높이 4.8㎝, 가로 · 세로 5.3㎝이며 무게는 794g이다.

정교한 금은제 거북이 모습이 조각되고 비단실로 짠 술(寶綬, 보수)이 달린 손잡이(보뉴, 寶紐)가 있다. 

 

 

성분분석결과, 거북형 손잡이(보뉴, 寶紐)의 성분은 은(銀)과 금(金)의 비율이 81대 18이며,

몸체(보신, 寶身)는 57대 41의 비율로 은(銀)이 많이 사용되었고,

몸체는 6대 4 정도로 손잡이와 몸체가 따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국새 제원표

 *재질구성 - 寶紐(보뉴)  은 : 금 = 81 : 18 / 寶身(보신)  은 : 금 = 57 : 41

   

 

 

국새의 정사각형 인장면(도장을 찍는 면)에는 '皇帝御璽(황제어새)'라고 양각되어 있는데

글씨 중 황제의 ‘皇(황)’자는 일반적으로 ‘白’아래에 ‘王’을 쓰지만,

이 ‘황제어새(皇帝御璽)’에는 '皇'을 ‘自’에 ‘王’ 으로 표기하고 있다.

당시에 제작된 각종 고종의 친필 비석군(碑石群), 어보(御寶), 의궤(儀軌) 등에서도

‘皇(황)’자는 모두 ‘自+王’으로 적혀있음을 확인했다.

    

 

 

 

■ ‘황제어새’의 가치

‘황제어새’는 국정 문서에 임금이 사용한 사례가 실물로 확인되는 유일한 국새다.

1954년 되찾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 중인 칙서용인 ‘칙명지보(勅命之寶)’와

국립전주박물관에 있는 군(軍) 인사용인  ‘대원수보(大元帥寶)’,

공문서용인 ‘제고지보(制誥之寶)’,

이 3과의 국새는 모두 국방, 관직 임명 등에 관련된 국새지만,

실제로 국새가 찍힌 문서들이 전하지 않는다. 


고종이 썼던 다른 국새들.

왼쪽부터 칙명지보(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대원수보, 제고지보(이상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손잡이가 용 조각이다.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대한제국 선포 과정을 기록한

<대례의궤,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에는

국새 13과가 등장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황제어새’는 보이지 않는다.

이 국새의 제작기록이 보이진 않지만 <고종실록>의 1901년(광무 5) 11월16일조에

‘문화각(文華閣)의 옥새와 책문(冊文) 등을 보수하도록 하다’ 라는 기록이 나오는 점으로 미뤄

1901~1903년 사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국권수호 운동에 나선 황제가 그 과정에서

직접 썼던 국새가 현물로 나타났다는 그 자체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황제어새'를 진품으로 확인한 결정적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유리원판 사진이다.

 

   

'황제어새(皇帝御璽)'의 바닥면 인영(印影)

 

 

나무새(璽)와 인영(印影) - 유리원판 사진

 

국사편찬위가 소장한 유리원판 자료에는

이 ‘황제어새’ 목제 원형과 글씨 원본, 국새와 인영,

외함과 국새 등의 사진이 전해지는데,

분실된 외함을 제외하고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국새와 인영(印影) - 유리원판사진

 

 

 

 

 

 

내, 외함과 국새 - 유리원판 사진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일제시대 유리원판 사진 속 국새 ‘황제어새’ 모습.

이번에 발견된 국새와 내함뿐 아니라 분실된 외함까지 함께 있는 모습이다. 
(사진 문화재청 제공)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일제 때의 유리원판 사진으로 확인한 결과,

고종 황제의 '황제어새' 국새는 1903년부터 1906년까지 이탈리아, 러시아, 독일 황제에게 보낸

10여 통의 외교친서가 지금까지 발견되었으며,

이 중 국새와 그 국새가 사용된 문서가 함께 확인되기는 '황제어새'가 처음이다.

 

이들 외교친서에는 2종류의 ‘황제어새’를 사용한 것으로 확인된다. 

 

한 종류(제1유형)는

1903년 11월 이탈리아 군주에게 보낸 친서 1통,

1904년 9월/ 1904년 11월/ 1905년 4월 러시아황제에게 보낸 친서 3통,

1906년 10월영국인 허치슨(Hutchison)에게 재가한 문서 등

고종황제가 사용한 당시 친서들에서 사용기록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데,

글씨체가 둥글고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고종이 광무 7년(1903)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러일전쟁을 앞두고 나라의 중립을 지키도록 도와달라는 호소를 담은

내용 말미 부분에 ‘황제어새(皇帝御璽)’가 찍혀 있다.

원본은 없고 국사편찬위원회 유리원판 사진으로 남아 있다.

 

“가까운 시일 내 극동 만주지역에서 러일전쟁이 일어나려는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혹시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나라는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우리 국력은 이에 못 미치므로, 이 전쟁을 예방할 수 없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전적으로 중립에 설 것입니다.

폐하께 이 사실을 낱낱이 적으니 서로 상조하여 깊은 배려를 해 줄 것을 바랍니다.

광무 7년 11월. 폐하의 좋은 형제."

 

  

 

다른 하나(제2유형)는 1906년 러시아 · 독일 황제 등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된 것으로

글씨체가 각이 지고 반듯하다.

그러나 이 국새는 현재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유리원판사진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광무 8년(1904) 11월 20일 러시아황제에게 보내는 위문친서.

여기에도 '황제어새(皇帝御璽)' 위에 황제의 이름을 표시하였다.

 

고종 황제는 독일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쓰기 전에 초고본을 써서 이를 일부 손질해 보냈는데

그 초고본을 찍은 유리원판을 국사편찬위원회가 갖고 있었던 것.

또 국사편찬위원회는 최근 독일에 있는 이 친서의 원본을 촬영해 왔으며

전문가들이 감정한 결과 초고본과 원본, '황제어새'가 모두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설명이다.

 

 

고종황제가 1906년 독일 황제에게 '황제어새'를 찍어 보낸 친서

 

"짐은 대덕국의 호의와 지원을 항상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짐에게 파국이 닥쳐왔습니다.

이웃 강대국(일본)의 공격과 강압성이 날로 심해져 마침내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독립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짐은 폐하에게 이런 고통을 호소하고 다른 강대국들과 함께

약자의 보호자로서 본국의 독립을 보장해 줄 수 있는 폐하의 우의를 기대합니다. "

이렇게 된다면 짐과 조선의 신민은 귀하의 성의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을 하늘에 두고 맹세합니다.

광무 10년(1906) 1월 경운궁에서, 폐하의 좋은 형제”


대한제국 고종 황제는 광무 10년(1906년) 1월 경운궁에서 독일 황제에게 이 같은 내용의 친서를 썼다.

그리고 편지 말미에 황제의 국새(國璽) '황제어새(皇帝御璽)'를 찍었다.

‘대덕국(大德國=독일) 황제 폐하’라고 적힌 봉투에 담겨 전달된 친서는

전문 2쪽과 고종황제의 국새(皇帝御璽)로 구성되었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1905)의 부당함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1906년 5월 독일 빌헬름 2세에게 보낸 친서는

당시 고종황제의 측근이던 프랑스인 정무 고문 트레믈러를 통해 독일 외교부에 전달되었다.

한문으로 쓰인 이 친서는 독일 외교부 중앙국 담당 관리들이 검토하고, 

중앙국에선 정부 비밀자문관인 동양어 전문 포르케 교수가 독일어로 번역,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당시 독일 외교부는 독일에 불리한 국제정세를 이유로 밀서를 빌헬름 2세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독일정부는 고종의 '황제어새'를 감정한 결과 진짜로 확인했다.

이 친서는 1907년 5월 이준열사 등을 통해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보냈던 밀서보다

1년1개월 빠른 것이다.

  

                    

'황제어새' 위에 적힌 한자는 고종의 이름 '형’이라고 읽는다.

'황제어새'는 주로 밀서에 찍혔는데,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비해 러시아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조·러 연합작전을 제안하는 등 특급 국가기밀을 다룬 문서에만 찍힌다.

'황제어새'와 함께 ‘한성에서 이형’ 또는 ‘경운궁에서 이형’ 이런 사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이 독일 빌헬름 2세에게 보낸 문서에서도 같은 형식을 취했다

 

한편 1914년 12월 독일황제에게 보낸 비밀친서에서

"나의 국새를 일본이 빼앗아가서 내가 사적으로 사용하는 '주연(珠淵)'이라는 호()를 새긴 도장을

쓸 수밖에 없다"하는 문구가 마지막에 나오는데서

1910년 8월 29일에서 1914년 12월 사이에 이 '황제어새'가

일본측에 의해서 빼앗기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국새는 상서원(尙書院)에서 보관 · 관리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황제어새(皇帝御璽)’는 제작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고,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등이 주로 사용되던 공문서, 내치(內治)보다는

대부분 열강에 호소하는 외교용 친서에 주로으로 쓰였다는 점에서

비밀리에 제작되어 고종황제가 이 국새를 직접 소지하고 은밀하게 관리한

‘휴대용 비밀 국새’의 성격이었던 점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이나 긴장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국립고궁박물관 정계옥 유물과학과장은 덧붙였다.

 

 

 

■ 국새의 수난사

 

 

 

고종 13년(1876) 11월4일, 경복궁 교태전의 화재로 

이곳에 보관하던 임금의 도장인 국새(國璽) 대부분 소실되거나 손상됐다.

이에 고종은 나흘 뒤에 "화재로 소실한 옥새(玉璽)와 인장(印章)을 새로 만들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때 고종은 옥새와 인장을

"다시 주조하고 만들되 수리하는 일은 본소(本所=무위소, 武衛所)와 호조(戶曹)에서 하도록 하라"

명령을 덧붙였다. 보인(寶印) 즉, 임금이 사용하는 각종 도장은 원래 호조에서 제작을 담당했으나,

고종 11년(1874)에 이르러 흥선대원군(이하응)으로부터 실질적 통치권을 넘겨받은 뒤

이 일을 자신이 창설한 군대조직인 무위소(武衛所)에 맡겼던 것이다.


이러한 교태전 화재와 더불어 진행된 새로운 보인 제작의 상세한 과정은

장서각이 소장한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라는 기록에 보인다.

이에 의하면 새로운 보인(寶印)은 그 해 12월27일까지 모두 11과(科=개)가 제조돼 고종에게 헌상됐다.

이때 만든 '임금 도장'을 보인소의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대보(大寶) ▲시명지보(施命之寶) ▲유서지보(諭書之寶) ▲세자궁옥인(世子宮玉印)

▲조선왕보(朝鮮王寶) ▲대조선국주상지보(大朝鮮國主上之寶) ▲소신지보(昭信之寶)

▲이덕보(以德寶) ▲과거지보(科擧之寶) ▲선사지기(宣賜之記) ▲무위소(武衛所).

그런데 이때는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기 전이었으므로

황제가 아닌 '조선왕'의 신분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각종 도장을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그러다가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다.

따라서 각종 도장 또한 황제의 위상에 걸맞게 새로 만들어야 했다.

이때 새로 제작한 '황제 도장'은 모두 13과였음이

그의 황제 즉위 과정을 기록한 <대례의궤'(大禮儀軌.1897)>라는 문헌에 보인다.
13과는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칙명지보(勅命之寶),

제고지보(制誥之寶), 시명지보(施明之寶), 대원수보(大元帥寶), 원수지보(元帥之寶) 등이었다.

이 중 고종황제가 외국 원수에게 친서 등을 보낼 때 직접 사용한 국새는

'대한국새'와 '황제지새' 등이었으며,

나머지는 황제가 국내에서 신민들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군통수권을 행사할 때 사용한 것이었다.
 

고종 때 만든 왕실 도장 자료집인 <보인소의궤> <대례의궤> 등을 보면

조선시대의 국새는 '조선국왕지인', '대조선국주상지보', '조선왕보' 등 11~13종에 이른다.

하지만 대한제국 이전 국새는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모두 고종 말년에 만든 것들만 전해진다.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 뒤인 1903~1907년 당시 왕실도장인 보인(寶印)을 망라해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叢數)>라는 자료집을 냈는데,

황제용 40과와 영친왕용 1과 등 69개의 왕실용 도장, 국새와 어보 등 100여 과에 달하는

각종 보인(寶印)을 만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고종의 사례에서 보듯이 '조선왕'이건 대한제국 '황제'이건 관계없이

조선시대 군주는 많은 국새를 제작해 여러 가지 용도에 맞춰 사용했는데,

조선왕조 518년 동안 27명의 왕이 사용한 국새는 그 정확한 통계수치는 없지만

엄청나게 많았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현재 조선시대 국새는 거의 실물이 남아있지 않다.
지금 실물로 남은 국새는 국립박물관에 있는 3과에 불과하며 나머지 것들은 대부분 행방이 묘연하다.

 

그렇다면 그 많던 국새들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다른 것은 실마리조차 없지만 고종의 국새가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는 기록이 남아있다.
<순종실록> 1911년 3월3일(양력) 기록에 의하면

일본의 차관(次官)인 고미야 사보마쓰(小宮三保松)라는 사람이

"옛 국새(國璽)와 보새(寶璽)를 총독부에 인계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역을 이 <순종실록>은

대한국새(大韓國璽) 1과, 황제지새(皇帝之璽) 1과, 대원수보(大元帥寶) 1과, 제고지보(制誥之寶) 1과,

칙명지보(勅命之寶) 1과, 칙령지보(勅令之寶) 1과 등 총 6과의 국새를 조선총독부에 인계했다고 적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일제시대 이래 숱한 왕실도장들이 망실되거나 유출되는 운명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제고지보'와 '대원수보', 그리고 '칙명지보'의 3점은 광복 뒤 일본을 점령한 미국 맥아더 미군정 시절 

1946년 일본으로부터 환수한 ‘대한국새(大韓國璽)’ 등 국새 8과를 전시까지 했다는

<조선일보>의 기사 등이 있지만, 이마저 한국전쟁으로 분실했다가

1954년에야 국립중앙박물관이 3과=칙명지보(勅命之寶), 대원수보(大元帥寶), 제고지보(制誥之寶)를

다시 거두어 현재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은 '대외용'이 아니라 '국내용'으로 실제 사용된 흔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외적으로 대한제국을 대표하면서 왕권 그 자체를 상징하는 '대한국새'와 '황제지새' 등은

그동안 실물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번에 국립고궁박물관이 고종황제가 친서 등을 보낼 때 실제 사용한 국새 '황제어새'를 입수한 것이다.
 

 

■ 국새(國璽)와 어보(御寶)는 어떻게 다른가

국새는 국가를 표상하는 도장이다.  

한편 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대부분의 임금도장은 ‘어보(御寶)’의 종류로

임금이 죽은 뒤 종묘에 안치하기 위해 제작한 ‘의례용’ 이며 왕이 생전에 실제로 사용한 국새는 아니다.

 

왕조의 임금이나 황제의 도장은

공문서나 친서 등에 실제로 사용한 실무용 '국새'와

왕실의 영속성을 상징하는 의례용 '어보'로 나뉜다.

 

 

동시기에 만들어진 의례용 어보(御寶)와 실무용 국새(國璽)를 비교해보면,

어보의 무게는 3.4㎏으로 국새의 4배에 달하며 크기에도 큰 차이가 있다.

어보(御寶)는 은과 구리가 주성분인 합금으로 23대 54의 혼합으로

높이는 9.6㎝, 무게도 4㎏에 달해 크기도 어보가 국새보다 4~5배나 된다.

크기가 크기 때문에 기법이 굵고 덜 정교하며

반면, 국새는 은과 금의 합금으로 금과 은의 성분은 41대 57,  높이 4.6㎝, 무게 794g 정도였다.

조각기법이 섬세하고 정교하게 제작되어

의례용과 실제 사용에서 구별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국새는 실무용이기 때문에 궁내부(宮內府)의 내대신(內大臣) 제도 아래 관리 사용되었다.

어보는 왕이나 황제가 죽은 뒤 종묘에 의례용으로 안치하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실제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어보는 넓게 왕실 왕족의 도장 전체를 가리키지만,

좁게는 종묘 등에서 의식용으로 만들었던 임금 또는 왕후와 세자, 세손들의 도장을 일컫는다. 

왕실의 영원한 대를 이어간다는 영속성을 의미하며 내용도 왕과 왕비의 존호 시호 등을 새겼다. 

왕족들의 주요 의식 때마다 만들었기 때문에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수량만도 330여 점이나 된다.

 

그러나 국새는 조선의 역대 왕들이 많이 만들어 썼음에도

오늘날고종 황제가 사용한 4점만 확인된 상태다.

 

- 2009년 3월17일

- 일간신문 등에서 기사, Gijuzzang 종합 정리

 

 

 

 

 

 

 

 

 

 

[밀착취재]  고종 황제어새 “가짜 가능성 크다”

 

1차 평가 참여했던 평가위원 주장… 국립고궁박물관 태도도 석연치 않아

국립고궁박물관이 구입하여 공개한 황제어새의 인장면(도장을 찍는 면)과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유리원판 사진 속 인장면.

정충락 · 정병례씨 등 전각 전문가들은 두 인장면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위: 문화재청·고궁박물관>

<아래: 김문석 기자>

"사라졌던 고종 황제 국새 찾았다.”
3월 17일부터 1주일여간 주요 언론을 장식한 기사다.

문화재청과 국립고궁박물관이 한 재미교포로부터 구입한 ‘황제어새(皇帝御璽)’가 진짜 국새였다는 발표였다.

현존하는 대한제국의 유일한 국새라는 주장도 나왔다.

한일강제합방문서에서 사용한 국새인 ‘대한국새(大韓國璽)’의 현존 여부가 아직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보로 지정하는 절차를 밟겠다는 발표도 있었다. 하지만 이 국새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것도 평범한 사람이 아닌 감정에 관한 당대 최고전문가의 지적이다.

“용어 선택이나 발표 절차가 석연찮은 문제가 있다. 만약 ‘진품으로 볼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로 발표했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런데 틀림없는 진품이며, 또 국보 지정까지 성급히 운운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진짜를 가짜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무슨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연구자료로 소장가치는 있다”

 

농산 정충락(66)씨는 이번 ‘황제어새’ 1차 평가에 참여했다.

유명 서예평론가이기도 한 정씨는 전각 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정씨는 ‘안품(가짜)일 가능성이 있다’와 ‘안품이다’ 둘 중에서 결론을 내린다면 ‘안품이다는 쪽으로 기운다’고 말했다.

정씨는 근거가 되었던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유리원판 사진과 인면(도장이 찍힌 면) 바닥의 새김이 최소 5군데 이상 차이가 있으며,

손을 탄 옆면에 비해 글씨가 거의 닳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황제어새’가 안품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소견서에 ‘왜정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적었는데,

대한제국기가 아니라 왜정시대라고 한다면 알아들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덧붙였다.

진품이다 안품이다 단언할 수 없는 분위기여서 돌려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소견서에 다만 “연구자료로서 소장가치는 있다고 썼다”고 밝혔다.

평가위원으로 참여했던 고암 정병례(62)씨 역시 비슷한 평가를 내렸다. 그 역시 전각 최고 권위자다.

정씨는 “인문(印文)도 차이가 뚜렷했고, 그때 시대의 것이 맞는지, 황제가 정말 썼는지

그것도 알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국새라고 볼 수 없다’고 소견서에 분명히 쓰고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과반수 가까이 이건 잘 모르겠다고 점잖게 이야기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덧붙였다.

두 평가위원의 의견을 종합하면 1차 평가에 참여한 매듭 전문가도 도장의 매듭을 보고

“진짜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라고 평가했다.

이밖에도 손잡이 부분의 거북이 등의 육각형 문양이 유리원판 사진과 조금씩 다르다는 의견도 나왔다.

평가위원으로 참여한 ㅇ교수 역시 모인 자리에서 의구심을 드러냈다는 데 두 위원은 의견이 일치했다.

ㅇ교수는 “지금은 입장을 표명하기 곤란하다”며 ‘노 코멘트’ 입장을 밝혔다.

 


‘의구심’ 가진 평가위원 많아


이번에 공개된 황제어새가 가짜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는 서예·전각 전문가 정충락씨. <정용인 기자>

1차 평가에 참여한 인사들 중 일부가 현장에서 진짜가 아닌 것 같다고

의견을 밝힌 것은 사실로 보인다.

성인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 역시

1차 평가에 평가위원으로 참여했다.

성 연구원은 “당시 유물로 볼 때 위조로 보이지 않는다는 의견을

개진했는데 어떤 분은 더 봐야 한다고 말하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니

박물관 측에서 소견서를 주면 그것을 보고 참고하겠다고 했다”라며

“나중에 다른 평가위원의 전화를 받고 담당 과장에게 전화를 해볼까

했는데, 괜히 이의를 제기하는 것 같고 그래서 걸려다 말았다”고

덧붙였다.

물론 1차 때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견해도 있다.

최공호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고고학)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유물임에 틀림없다”고 소견서를 적어냈다.

적어도 성연구원과 최교수는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최교수는 “실제 도장과 인주를 묻혀 찍은 ‘인영’은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고 평가했다.

그런데 1차 평가에서 대체적으로 부정적이었던 의견이 2차 평가 이후 뒤집혔다.

어떻게 된 일일까. 2차 평가 과정에 참여했던 손환일 경기대 연구교수는

“처음 평가 때는 관련 기록도 얼마 안 되고 해서 신중한 분위기였다면

검증 과정에서 헐버트 기념사업회 문서에 찍힌 인문이 발견되는 등의 우여곡절이 있었다”라며

“이밖에도 내함 통에 붙어 있는 융이 어보를 만들 때 쓴 견(명주실)과 같은 종류라는 것이 밝혀지는 등

근거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손 교수는 “문제 제기를 한 분들은 1차 평가를 한 분들이니

못 봤을 수 있지만 나는 ‘파이널 인펙터’로 20쪽가량의 내부 문건을 봤기 때문에 전 과정을 안다”

라고 덧붙였다.

만약, 이게 가짜라면 누가, 어떤 목적에서 가짜를 만들었을까.

정충락씨는 “사실 그런 도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실물을 볼 수 있었던 소수의 사람 중 하나일 것”이라며

“나쁜 목적은 아니고, 고종 황제 사후에 뜻을 규합해 어떤 일을 도모할 목적으로 만들었을 것”

이라고 추정했다.

이번 발표를 총괄한 국립고궁박물관의 태도도 석연치 않는 부분이 적지 않아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번 발표를 총괄한 정계옥 유물과학과 과장은 “유물 감정 과정에서 항상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1~2명의 사람이 반대의견을 내는 것은 다반사”라고 말했다.

하지만 본지가 취재한 결과, 가짜라고 단언까지는 아니더라도

평가 과정에서 의구심을 밝혔던 평가위원은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그렇다면 진품 결정은 누가, 어떻게 내린 것일까.

정 과장은 “자신은 조선시대·대한제국기 유물과 관련해서 비전문가”라고 누차 강조하면서도

“선생님들은 쉽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공무원 입장에서는 목이 왔다갔다 하는 문제다.

진품임을 확신한다”고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했다.

정 과장은 진품 판단의 근거를 제시해달라는 기자의 요구에

“관례 상 공개할 수 없지만 (선생님들도) 소견서에는 그렇게 쓰지 않았다.

실제 ‘하’ 등급을 매긴 사람도 10명 중 한 사람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평가위원들의 주장은 다르다. 평가위원들은

“상 · 중 · 하 등급은 진품과 가품의 기준이 아니라 유물의 보존 상태 등을 표시하는 항목이었다”

라고 밝혔다.

고궁박물관 측의 의혹은 이뿐 아니다.

소견서라는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남긴 평가위원들이 그후 박물관 측으로부터 일언반구도

듣지 못했다는 것이 찬반을 떠난 대다수 평가위원의 주장이다.

평가위원들이 자신이 낸 소견서와 배치되는 결론이 내려진 것에 대해

박물관으로부터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었다는 것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도 발견 발표 몰라

 
박물관 측은 비파괴 검사 등을 통해 재질이나 제작 연도를 파악하는 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험 결과나 소견서의 주장들은 충분히 검토했고, 관련 근거자료는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정 과장은 이와 관련해 손 교수가 봤다고 언급한 ‘내부 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이번 황제어새 발견 발표는 문화재청 관계자도 모르게 진행돼 의혹을 사고 있다.

문화재청 동산유물과 관계자는 “유물의 구입이나 감정 절차 등은 해당 박물관에 위임한다”라며

“솔직히 우리도 관련 보도자료가 나와서야 황제어새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 누군가의 성급한 과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심증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은 “상당한 의혹이 제기된 만큼 소견서나 감정결정 경위,

그리고 특히 구입 과정과 관련한 모든 정보를 당장 공개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고궁박물관 측 정 과장은 “우리가 소견서의 내용을 공개할 의무는 없다.

기자의 의도에 말려드는 것 같다. 이제부터 이야기를 공문으로 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국새라는 표현 써도 되나

3월 17일 문화재청과 국립고궁박물관이

공개한 황제지새와 어보. 앞의 작은 도장이 이번에 공개된 황제어새다. <김문석 기자>

“대한이나 조선이라는 국호라면 몰라도 황제라고 적혀 있는데 나라 국(國)자 국새라고 할 수 있는가.”
정충락씨의 주장이다.

전각 전문가들은 무엇보다도 국새라는 표현을 함부러 써선 안 된다고 말했다.

 

정충락씨는 ‘황제인(皇帝印)’ 또는 ‘왕인(王印)’이라면 또 몰라도 이번에 발견된 ‘황제어새’를 국새로 봐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정병례씨의 의견도 마찬가지다.

정병례씨는 “소견서에도 적었지만 가장 먼저 시정해야 하는 것이 국새가 발견되었다는 식으로 주장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각 전문가들이 이번 발표에 대해 반발하는 가장 큰 이유도 그 때문이다.

반면 지난해 ‘조선시대 인장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성인근 연구원은 ‘황제어새’를 국새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성 연구원에 따르면,

국새라고 할 때 조건은 인문 안에 국명이나 황제 그리고 새(璽)자가 들어가야 한다.

두 번째 근거는 대외용으로 사용해야 한다.

성 연구원에 따르면, 이 시기 국새로 이견이 없는 것은 현존 여부가 불투명한 ‘대한국새’다.

현재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원수지보’ 등은 내치, 군수통치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국새로 볼 수 없다. 반면 ‘황제어새’는 대외 외교용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조건을 충족한다.

그는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국새를 받아왔던 조선시대나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국새와 관련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라며 “대한제국 시기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몇몇 사료에서 보이듯 일제가 국새를 강탈한 상황에서

고종 황제가 비밀리에 별도로 국새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황제어새를 실제 고종황제가 국새로 인식하고 있었을지의 문제가 남는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는

“엄밀하게 협의의 의미에서 국새라면 대한국새밖에 해당하지 않는다”라면서도

“사인이 아니라 국정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도장이라는 의미에서 광의의 의미에서

황제지새 역시 국새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의 논리에 따르면 내치를 위해 만든 것도 국새다.

그는 “당시 고종 황제가 국한문을 섞어 북경에 있는 독일공사에 보낸 편지가 있는데

원문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국새들을 뺏겼다’는 독일어 표현에서

광의의 국새 개념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솔직히 학술적으로 아직 국새나 어새 혹은 어보의 분류 기준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현재의 기준으로 당시의 특수한 상황을 무시하고 단정지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  2009 04/07   위클리경향 819호

 

 

 

 

 

 

 

 (1) 어새 진위 의혹 관련당국 ‘묵묵부답’


문화재청 “입장 밝힐 의무도 없고, 앞으로도 계획 없다”

고종이 각국 국왕에 보낸 친서에 찍힌 ‘황제어새’는 최소한 두 종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각각 제1유형(사진 왼쪽)과

제2유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몇몇 언론이 이번에 공개된 황제어새의

바닥면과 2유형 인명을 별다른 설명 없이 붙여

공개하면서 일부 국민 사이에서도

‘도장과 인문이 다르다’는 주장이 나왔다.

<문화재청·국립고궁박물관>

‘황제어새’ 진위 논란에 대한 본지 보도에 독자 반응이 뜨거웠다. 기사를 꼼꼼히 읽어봤다는 한 독자는 본지로 전화를 걸어 ‘구입 과정과 검증 절차를 당장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견 일치가 안된 감정 결과로 섣불리 국새로 단정짓는 당국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인터넷 포털에 올라온 기사 반응이다.

하지만 논란의 당사자인 문화재청과 국립고궁박물관은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보도에 대한 입장을 밝혀달라는 본지 요구에 문화재청 대변인실 관계자는 “우리가 입장을 밝혀야 하는 의무는 없지 않나”며 “앞으로도 입장을 밝힐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국민들의 의구심뿐 아니라 평가위원으로 참여한 이들의 주장이 나왔는데도 그냥 묵살하겠다는 태도다.

본지는 국립고궁박물관 측에 지난 보도 기사를 바탕으로 한 7개 문항의 질문을 공문으로 발송했다.

그제야 국립고궁박물관 측은

“국회 답변 준비로 바쁘다. 답변서를 보낼지 여부는 다음 주에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당국 대응 논란 덮으려는 책임회피”

 
“결국 논란을 유야무야 덮으려는 책임회피성 발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내 소신껏 입장을 밝혔을 뿐이다.” 1차 평가위원으로 참여한 농산 정충락씨의 말이다.

그는 ‘Weekly경향’과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이번에 공개된 황제어새는 ‘안품’(가짜)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본지는 ‘황제어새’ 공개 기자회견 후 진위 여부를 추적하다

정씨를 비롯한 ‘황제어새’ 감정에 나선 평가위원들을 차례로 접촉해 평가 과정의 논란을 취재했다.

정씨는 본지 인터뷰 직후 담도수술을 받고 현재 병원에 입원 중이다.

황제어새 진위 의혹은 ‘국새가 발견됐다’는 고궁박물관의 발표 직후 일부 독자도 제기했다.

이번에 공개된 황제어새 바닥면의 인영과 고종이 보낸 각종 편지 속 ‘황제어새’ 속 인영이

다르다는 것이다. 독자들의 주장은 일정 부분 사실이다.

몇몇 언론이 보도했지만 황제어새는 최소 두 종류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고궁박물관 측은 이것을 각각 제1유형과 제2유형으로 구분했다.

제1유형 어새의 글씨체가 전반적으로 ‘둥글고 부드러운 분위기’라면

제2유형 어새의 글씨체는 ‘각지고 반듯한 분위기’라는 것이다.

이번에 공개된 황제어새는 제1유형의 어새와 일치한다는 것이 고궁박물관 측 발표다.

이탈리아에 보내는 대한제국 황제 친서.

이 문서에 사용된 황제어새는 제1유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국립고궁박물관>

황제어새를 진품으로 평가했던 한 평가위원은

“전각전문가들이 제2유형의 사진을 보고

다르다고 문제제기한 것이 아닐까 싶다”라고

본지에 밝혔다. 즉 육안으로도 구분되는

제2유형의 인영을 보고 전각전문가들이

오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이다.

하지만 다른 유형의 황제어새 인영이 존재한다는

것은 1차 평가 당시 이미 검토된 사안이었다.

정충락씨는 평가 당시 “도장이 전부 다 다른데

(황제어새)가 서너 개는 되겠다고

고궁박물관 과장에게 말했다”며

“회의 당시 고궁박물관 측은 가지고 온 사람의

신분이 믿을 만하다는 것을 누차 강조했는데,

도장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은 눈치였다”고 말했다.

본지는 정충락씨와 함께 경향신문이 찍은 황제어새 공개 기자회견 당시의 바닥면 인영과

국사편찬위원회의 유리원판 사진 속 인영을 비교했다. 모두 제1유형의 인영이다.

정씨는 “인문이 찍히면 압력 때문에 획이 굵어지거나 얇아질 수도 있지만

새긴 각도가 달라지진 않는다”라며

▲‘황’자의 받침 王 맨 윗변과 중간변의 간격 ▲‘어’자의 의 모양 ▲‘새’자의 오른쪽 X의 길이 등

최소 5군데 이상 차이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정씨는 이밖에도 바닥 면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주물로 제작한 인뉴(도장 손잡이)의 거북 등 육각형 문양 등이

사진 속 황제어새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거북 등 문양 차이는 본지가 취재한 다른 평가위원도 평가 당시 지적했던 것으로 확인된 사항이다.

 

박물관 측 “가지고 온 사람 신분 확실” 주장

 
문화재청과 국립고궁박물관이 제공한 보도자료는 공교롭게도 바닥면의 인영 사진이 빠져 있다.

아래아 한글로 작성한 보도자료에는

원래 비트맵(bmp) 파일로 만든 인영 사진이 첨부되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문화재청 홈페이지 등을 통해 공개되어 있는 자료에는 현재까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뒷 장 첨부사진 참고)

본지는 한 관계자로 부터 문화재청이 제공한 이미지 원본과 지난 기사에서

정 과장이 존재 여부를 부인했던 20쪽짜리 ‘국새 설명자료’를 입수했다.

이와 함께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 측에서 공개한 편지에 찍힌 인영 사진을 비교 검토했다.

일반인이 봤을 때 두 인영은 흡사한 것으로 보인다.

‘Weekly경향’은 전각학회의 임원과 함께 인영을 다시 검토했다.

전각학회는 이 분야의 공신력 있는 공식 단체다.

전각전문가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 정도로 정교하게 위조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 전각학회 임원은 “전각을 처음 공부할 때, 대개의 입문자가 중국 한나라시대 때 만들어진

도장 인영을 참고삼아 모각(模刻) 즉, 흉내내서 조각하는 것부터 배운다”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면 거의 일반인의 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의

위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99% 이상 재현한다고 하더라도

새긴 사람의 의도나 어떤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는지, 또 그날의 컨디션이 어땠는지에 따라

결과물이 다를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즉 아무리 모각한다고 하더라도 원래 작업한 사람의 마음이나 흥취까지 따라하기는 어렵다는 것.

그는 “비전문가 입장에서는 똑같이 보이더라도 전문가라면 획 하나를 보더라도

그 차이를 찾아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임원은 논란의 황제어새를 어떻게 평가할까.

1시간 이상 꼼꼼이 두 인영을 검토한 끝에 그가 지적한 ‘차이’는

정충락씨가 지적한 부분과 대부분 일치했다.

그는 이번 기사와 관련해 정충락씨와 연락을 취하거나 의견을 주고받지 않았다.

 


“일반인 육안으론 식별 거의 불가능”

 

이 임원은 이밖에도 글자를 둘러싼 격변의 차이, 찍힌 인영을 고려할 때

원래 도장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흠결 등이

이번에 공개된 황제어새의 인면에는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는 “사진이나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의 문서에 찍힌 인영의 경우 ‘차분하다’는 인상을 받는 반면,

이번에 공개된 인영은 상당히 예민하며 선 자체가 경직되어 있고 부자연스럽다”는 의견을 냈다.

이어 이 임원은 “실제 실물을 본 적이 없으므로 뭐라고 단정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진위가 어떻든 간에 좀 더 신중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황제어새 1차 평가위원이었던 고암 정병례씨는 본지 보도 후

“나는 그렇게 봤다는 생각을 밝혔을 뿐이지 내 생각이 무조건 관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건 아니다”

라며 “평가하기 위해 여럿이 모였다면 설혹 잘못봤더라도 상호 조정하고

다수 사람이 토론을 통해 결정할 필요가 있는데 그런 과정이 부족했다는 것이 아쉬운 대목”이라고

말했다. 정병례씨는 “적어도 (국립고궁박물관 측이) 전화라도 한 통화 해서

이런 과정을 거쳐 이렇게 결정했는데 다시 한 번 볼 수 있겠냐,

또는 이런 증거가 나와 이렇게 결정했다라고 메일이라도 보냈어야 하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구입 과정이나 입수 경위를 공개하지 않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는 의견도 나왔다.

앞에서 언급한 전각학회 임원은 “황제어새를 제공한 사람이 진위 여부도 알 수 없었고,

본인이 공개를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되었든 외국에 팔지 않고

국내로 다시 가지고 들어왔다는 점에서 오히려 칭찬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며

“‘진위 여부를 알 수 없어서 싸게 구입했다’라고 만 말할 것이 아니라,

진짜로 밝혀졌다면 앞으로 다른 유물 반환의 경우에서도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추가 포상하고 떳떳하게 그 과정을 밝히는 것이 옳다”라고 말했다.

의혹은 해소되지 않을 뿐 아니라 커지고 있다. 만약 본지 보도가 틀렸다면

그 근거를 밝히는 것은 관련 기자회견을 열어 ‘국보지정’까지 거론한 담당관청이 응당 해야 할 의무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공개 기자회견 당시 가짜 여부를 묻는 언론들의 질문에

“다각도로 검토한 결과 도저히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확신에 도달했다”라고 밝혔다.

정종수 국립고궁박물관 관장은 한술 더 떠

“이것이 가짜라면 이를 만든 사람은 인간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그 자신감의 근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문화재청과 국립고궁박물관이 답변해야 할 차례다.
-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2009 04/21   위클리경향 821호

 

 

 

 


 

 

 (2) 황제어새 논란 해명에도 ‘의혹’

 

 

국립고궁박물관 “여러 부서가 관여해 구입했다”는 답변 사실과 달라

본지가 국립고궁박물관 측에 보낸 공문(왼쪽)과 국립고궁박물관의 회신.


 

'Weekly 경향’은 지난 두 차례 기사를 통해

국립고궁박물관이 내놓은 황제어새 진위에 대한 논란을 다뤘다.

하지만 국립고궁박물관과 문화재청은 평가위원으로 참여한 이들의 문제제기를 묵살했다.

“문서로만 답하겠다”는 고궁박물관 담당과장의 입장에 따라

‘Weekly 경향’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총 7개 문항의 질문지를 작성해 공문으로 발송했다.

▲평가위원들의 문제제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본지 취재 결과 평가위원 중 최소 4명이 진위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는데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각종 언론과 인터뷰에서 “다각도로 검토한 결과 가짜일 가능성은 없다”라고 했고

정종수 관장은 “가짜라면 만든 사람은 인간문화재”라고 말했는데 발언의 근거는 무엇인가

▲황제어새의 인면과 함께 매듭·거북 등의 육각문양이 다르다는 지적에 대한 입장

▲황제어새가 최소 두 종류 이상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 황제어새의 인면과 인문,

그리고 사진과 문서에 찍힌 인문을 비교 검토했는지

▲평가 과정에 참여한 전문가들에게 적절한 해명이나 연락을 했는지

▲대한제국기 유물과 관련해 비전문가인 담당과장이 전체 과정을 총괄한 것은 적절했는지

▲구입 경위와 평가위원의 소견서, 검토 결과 문서를 공개할 의향은 없는지,

언론에 공개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제3의 검증위원회’를 구성하여

발표 경위를 점검할 용의는 없는지 등이다.

4월 14일 고궁박물관 측은 회신을 보내왔다.
고궁박물관은 이 회신에서

“관련 분야 전문가에 의한 실물 검토,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유리원판 사진과 비교 검토,

어새에 새겨진 글자 모양의 특징 비교 검토, 어새 성분의 과학적 분석,

어새함 내부 직물의 과학적 분석 등을 말한다”라며

“국사편찬위원회 유리원판 사진의 어새와 비교 검토 결과 거북 등의 육각형 모양,

매듭의 수법 및 형태가 동일함을 확인했고, 이를 다른 전문가들도 확인했다”고 말했다. 
 


평가위원 “공식 문제제기 하겠다”

 

하지만 고궁박물관 측의 회신은 구체적인 근거를 밝혀달라는 ‘Weekly 경향’의 요구에

검토의 주체가 누구며 검토를 언제 했는지 밝히지 않았다.

거북 등 문양 등에 대해 동일함을 확인하고 다른 전문가도 확인했다고 밝혔지만 어떻게 확인했으며,

제기했던 의혹을 어떻게 해소했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평가위원들의 문제제기에 대해 “직접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한 바 없다”고 했으며,

해명 필요성 지적에 대해서도 “해명한 사례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고궁박물관 측은 구입 과정에서 여러 부서 관계자가 참여했다고 주장했지만,

‘Weekly 경향’이 취재한 결과 “유물과학과 과장이 전적으로 주관한 일이기 때문에 전혀 모른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유물과학과 직원조차 “담당과장이 총괄해서 구체적인 것은 잘 모른다”고 답변,

사실과 다르게 주장했다.

황제어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정충락씨는 현재 병원에 입원 중이다.

그는 “몸을 추스르는 대로 관련 자료를 챙겨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내 의견과 맞지 않다고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처신이 잘못됐다는 것”이라며

“물론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지만 잘못 본 부분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2009 04/21   위클리경향 82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