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술진흥재단 제2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 강좌’
김호동 서울대 교수(역사학)
(1) ‘실크로드’ 이해... 지금까지 편향돼 왔다
농경민 중심 역사관, 유목민의 역할 지나치게 간과해
실크로드(Silk Road)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은
독일의 지리학자였던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 1833~1905)이었다.
그는 1877년 ‘중국(China)'이란 5권의 대작을 출판했는데,
1권 후반부에서 고대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 교통상황을 설명하면서,
고대 중국과 그리이스· 로마 문화권 사이의 교섭이
주로 비단의 교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인도 혹은 서방으로 연결되는 교역로를
‘비단길들’이란 의미를 지닌 ‘자이덴슈트라센(Die Seidenstrassen)’이라고 명명했는데,
이 명칭이 ‘실크로드’, ‘견가도(絹街道)’, ‘사주이로(絲綢之路)’ 등 다양한 이름으로 번역돼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 인문강좌 (3/14) |
그런데 이 실크로드의 개념이 계속 확장되고 있다.
3월14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김호동 서울대 교수(역사학)는 ‘실크로드와 유목제국’이란 제하의 강연을 통해,
20세기 이후 각종 연구를 통해 ‘실크로드’의 범위가 계속 확대되고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1910년 허만(Albert Hermann)이란 미국 학자가 이 루트의 서쪽 경계를 인도에서 시리아로 확장한 이후,
실크로드의 서쪽 끝이 시리아가 아니라 로마라고 하는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동쪽으로는 중국의 장안(長安)이 아니라 한국의 경주, 심지어 일본의 나라(奈良)란 주장까지
이어지고 있다.
교역로 역시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지역을 동서로 관통하는 ‘초원루트’ 외에
사막지대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경유하는 ‘사막루트’,
남지나해와 인도양을 관통하는 ‘해양루트’ 등을 포괄하고 있다.
아프로유라시아 세계의 여러 문명과 지역들을 연결하는 다양한 루트들이
모두 ‘실크로드’란 이름 속에 들어가 있는 셈이다.
최근 들어서는 실크로드를 더 이상 선(線)으로만 파악하지 않고,
면(面)으로 이해하려는 관점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김호동 서울대 교수(역사학) |
“동서 간의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그것이 지나가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해서는 그 자체가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라는 인식을 하지 못한 채, 그야말로 통과 지역에 불과하고,
실크로드를 통해서만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은 부차적 세계라는 착각을 갖게
되는데, 학계를 통해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그 결과 “중앙아시아는 이제 더 이상 실크로드의 ‘경유지’가 아니라,
동서의 정치, 문화, 경제적인 요소들이 만나서 교류되고,
변용된 뒤에 그런 요소들을 다시 주변의 다른 지역으로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던,
말하자면 그 자체를 하나의 역동적인 역사세계로 파악하려는 것이
최근 학계 중요한 흐름”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실크로드를 선의 관점이 아닌 면의 관점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실크로드 메커니즘에서 유목민의 역할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했는지 새롭게 인식하려는 시도가
최근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유목민의 역할 재조명받기 시작해
지금까지의 실크로드 연구에서 유목민이 완전히 배제됐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아무래도 부차적인 의미밖에는 지니지 못했다는 것이 학계 일반적인 견해라고 밝혔다.
유목민들은 국제상인들을 때로는 약탈하는 존재로,
혹은 가끔씩 대가를 받고 안전을 보증해주는 존재로 묘사되고는 했는데,
이제는 많은 학자들이 유목민들의 역할을 농경민과 함께 실크로드 메커니즘이 있게 한
‘필수적인 요소’, 말하자면 세계사를 움직인 두 개의 수레바퀴 중 하나라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
실제로 실크로드를 통한 세계사 전개 과정에서 주변 유목민들이 끼쳤던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었다고
김 교수는 주장했다.
기원전 2세기 후반 장건(張騫, ~ 기원전 114년)이 한무제(漢武帝)의 명을 받아
수도 장안을 출발, 멀리 아프간 지방까지 다녀온 것은
원거리 교역을 통해 경제적 이윤을 얻기 위함 보다는
북방의 위협세력인 흉노(匈奴) 등 유목제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7세기에 당태종(唐太宗)이 대군을 서쪽으로 파견해 투르판을 점령하고,
쿠차에 안서도호부(安西 都護府)를 설치해 중앙아시아를 장악했던 까닭도
몽골리아 초원의 강적 돌궐(突厥)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18세기 청의 건륭제(乾隆帝)가 중앙아시아로 진출해 신강을 정복한 것도
유목세력인 준가르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고 말했다.
중국이 실크로드를 통해 여러 가지 진기한 물품과 동식물들을 들여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라고는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외국에서 들여온 많은 물자들이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었던 것은
중국의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이 경제적인 측면보다
정치, 군사, 이념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았다.
몽골제국, 세계사 통합에 결정적 역할
강좌를 듣기 위해 객장을 꽉 메운 인파. 실크로드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을 반영했다. |
유목민의 역할은 중국 역사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영토 측면에서 대중국(大中國)과 소중국(小中國)을 시계추처럼 반복했는데, 한(漢) 제국의 약화 이후 6세기 후반에 이르는 350년간의 대혼란기를 종식시키고, 대중국인 수·당제국을 건설한 장본인들은 북방에서 남하한 ‘한화(漢化)된 호인(胡人)’이었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소중국(한인 왕조)에서 분열시대, 그리고 대중국(이민족과의 혼혈왕조)로 이어지는 패턴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13세기 몽골제국은 서하(西夏) · 금(金) · 남송(南宋) 삼국정립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대중국인 원(元)을 세웠으며, 17세기 만주인들은 소중국인 명(明)을 멸망시킨 후 또 다시 대중국인 청(淸)을 복원했다고 말했다.
오늘날의 중국은 지난 2천여 년의 역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대중국’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직접적으로는 중국의 영역을 최대한으로 확장시키고 300년 가까운 지배를 실현했던
청 제국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특히 몽골제국이 건설한 원나라는
군사력과 국제상인들이 결합해 실크로드를 존속시킨 매우 중요한 힘이었으며,
또한 세계사 통합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주역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중국의 농경민족 중심의 역사관은 역사의 실상을 왜곡하고,
유목민들의 역할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었다며, 실크로드를 통한 세계사의 전개 과정에서
유목민들이 농경민과 함께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축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념해줄 것을 당부했다.
김 교수는 “역사적으로 실크로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도
기존의 실크로드가 ‘동서 문명의 가교’였다는 식의 막연한 이해 수준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크로드는 단순한 교역루트가 아니라, 여러 지역과 문명을 연결하는 ‘면’들의 연속이었고,
또한 그것을 무대로 삼던 국제 상인들의 활동의 ‘장’이었으며,
동시에 북방 유목세계와 긴밀한 연관 관계 속에서 전개, 발전됐던 메커니즘이었다”며,
그동안 실크로드에 대해 단편적인 이해를 가졌다면, 수정을 가해줄 것을 주문했다.
- 이강봉 편집위원
- 2009. 03.16 ⓒ ScienceTimes
(2) ‘실크로드’ 열풍... 석학 인문강좌에 인파 대거 몰려...
3월21일 정오가 지나자 서울역사박물관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선 채,
오후 3시부터 열리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주 토요일(14일) 강좌를 듣지 못한 많은 시민들이
이번 주에는 2~3시간 일찍 찾아와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실크로드, 몽골제국, 세계사의 탄생’이란 주제로 진행되고 있는 서울대 김호동 교수(역사학)의 강좌를
듣기 위해 많은 인파가 몰렸지만 박물관 강당의 규모는 256석에 불과.
못 들어간 청중들로부터 항의가 잇따르자 주최 측에서는 입구 공간에 스크린을 설치했다.
강연장 입구 화상스크린 앞에 모인 청중들 |
그리고 스크린을 통해 강당에서 진행된 강좌 영상을 방영했는데,
강당 안팎에서 김 교수의 강좌를 시청한 인원은 500명을 훨씬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100~200명의 인원이 강좌를 듣지 않고 돌아간 것을 감안하면,
더 많은 인파가 이번 강좌에 몰린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김호동 교수는 물론 주최 측도 매우 놀라는 분위기.
김 교수는 강연에 앞서 자신의 강좌에 이처럼 큰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청중들에게 거듭 감사를 표명했다.
주최 측 관계자도 당초 이처럼 많은 인파가 몰릴지 예상치 못했다며, 다음 주에는 대형 스크린을 설치,
참석 희망자 모두 실크로드에 대한 강연을 들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실크로드에 대해 한국인들이 얼마나 높은 관심을 갖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크로드 열풍은 일찍이 일본에서도 일어났다.
70년대 말 중국의 개방정책과 맞물려 일본에 불기 시작한 실크로드 열풍은
1980년 NHK에서 방영한 다큐시리즈 ‘실크로드’로 인해 일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후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은 대중적인 단계로 확산됐고, 수많은 서적과 화보들이 홍수를 이루면서
가히 ‘실크로드 붐’이라 할 만한 사회적 현상들이 줄을 이었다”는 것이 김호동 교수의 설명이다.
일본에서의 실크로드 열풍은 이전까지 주춤했던 실크로드 연구에 또 다시 불을 붙였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른바 ‘실크로드 논쟁’이라는 것이 벌어졌고,
일본에서 세계로 확산된 이 논쟁은 지금까지 뜨겁게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21일 실크로드 강연에 몰린 인파는
한국 역시 일본에 버금가는 실크로드 열풍이 확산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김 교수는 일본 실크로드 열풍의 원인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분명치는 않지만,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 실크로드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21일 ‘세계를 제패한 몽골제국’이란 주제로 진행된 김호동 교수의 강연은
인류 최대의 육상제국을 건설한 몽골제국 역사에 집중됐다.
몽골제국의 세계 정복 역사는 한마디로 ‘파괴와 살육’이라는 용어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분석이다.
1220년~1221년 사이에 있었던 칭기스칸의 서아시아 정복을 직접 체험했던
아랍의 역사가 이븐 알 아씨르(1160~1233)는 후일 과거를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이 사건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꺼려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으로부터 몸을 움츠렸고,
자꾸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났다. … 그러나 마침내 나는 그것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어느 누구에게도 유익이 되지 않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 내가 말하건대 이 사건은 모든 인류에게 덮쳤던 가장 거대한 재단이자 가장 무시무시한 재앙이었다.
… 적그리스도라 할지라도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은 파괴시켜도 추종자들의 목숨은 살려두겠지만,
이 타타르인들은 아무도 남겨두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를 학살하고,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갈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죽였다.
… 이 재앙이 일으킨 불꽃은 멀리 또 넓게 날아가서 그것이 입힌 상처는 사방을 덮었다.
그것은 마치 바람에 휘몰려가는 구름처럼 대지를 덮고 지나갔다. …”
몽골군에 대한 이와 비슷한 묘사들은 동서양사 기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쥬베이니(1226~1283)가 쓴 ‘세계정복자의 역사’란 글에는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던 메르브(현재 투르크메니스탄의 마리)가 맞은 최후가 기록돼 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 안에 피신해 있었는지 모두 다 나오는 데에만 나흘 낮밤이 걸렸다고 쓰고 있다.
몽골인들은 들판으로 몰린 사람들 가운데 먼저 장인과 노예로 쓸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골라냈다.
그리고 나머지 남녀노소를 구별할 것도 없이 도륙했는데,
쥬베이니는 이때 메르브에서 살해된 사람의 숫자가 130만 명에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
몽골군의 대량 학살은 중국 측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칭기스칸이 북중국의 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하는 1213~1214년 동안 90여 군을 파괴하고,
“하동, 하북, 산동 수천 리의 사람들을 모두 살해한 뒤, 금과 비단, 자녀, 소와 양과 말들을 모두 끌고 갔다”
고 적고 있다.
또 집은 모두 불태우고, 성곽은 흙더미로 변화시켰는데,
특히 하북성 보주를 함락한 몽골군은 주민들을 성 밖으로 끌고 나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도륙했으며, 수십만에 이르는 시체가 쌓여 성벽과 거의 같은 높이가 됐다고 할 정도였다.
칭기스칸이나 몽골인에 대해 막연하지만 ‘야만적’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까닭은
이들이 전쟁에서 보여준 파괴와 살육 때문일 것이라고 김 교수는 말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과연 ‘인도주의적’인 혹은 ‘문명적인’ 전쟁이라는 것이 존재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고 말했다.
600만 명 가까운 유태인들을 칼 하나 안 대고 가스실에서 죽이는 행위나,
원자폭탄 하나로 십여만 명을 한순간에 없애버린 행위,
일본군이 자행했던 남경대학살 등이 덜 야만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강연장을 꽉 메운 청중들 |
김 교수는 몽골인의 살육도 인간이 저지르는 전쟁이 다 그러하듯이
‘야만적’이고, ‘잔혹한’ 것임에는 분명하나,
문명이 발전한 나라들의 전쟁이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살육을 저질렀고,
몽골인의 살육만 더 ‘야만적’이라고 말해야 할 이유는 없으며, 그것은 편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 같은 편견이 몽골인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낳고 있다고 말했다.
몽골인의 세계 정복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또한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을 지배했던 거대제국은 어떻게 운영됐으며,
그들의 세계지배가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
이제는 당시의 농경민들이 가졌던 몽골인에 대한 편견과 악의에서 자유로워져
13~14세기라는 상황을 보다 더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한걸음 더 나아가 몽골인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려는 노력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럴 때 비로소 몽골세계제국 출현의 실제적인 역사 규명이 이루어지고,
동시에 제국 출현이 갖는 세계사적인 의미를 드러낼 수 있으며,
또한 실크로드 연구에 있어서도 큰 진전이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 이강봉 편집위원
- 2009. 3.23 ⓒ ScienceTimes
(3) 몽골 대여행의 시대가 열리다
유라시아를 연결, 정치·경제·문화권 통일
3월28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된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서울대 김호동 교수(역사학)는
몽골제국의 건설이 결코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칭기스칸이 오논 강가에서 부족 통일국가의 깃발을 펄럭인 것이 1206년이고,
쿠빌라이가 항주를 함락함으로써 남송을 무너뜨린 것이 1276년이라면,
몽골제국이 건설되는 데 적어도 70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
▲ 1200~1480년 몽골제국의 영토 |
그동안 세계 각지에서 진행된 정복 전쟁이 얼마나 많은 파괴와 피해를 가져왔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몽골군은 도시와 농촌 등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을 닥치는 대로 파괴한 것은 물론,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비가 부족한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건조지대에서는 운하와 수로를 굴착하고,
그것을 정기적으로 보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몽골군은 도시를 공격하기 위해 강둑을 막고, 제방을 터뜨리는 전술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초기의 대대적인 정복전이 끝난 후에도 작은 규모의 약탈과 파괴는 끊이질 않았다.
정치적인 우위에 있었던 유목민은 농경민의 입장을 무시한 채 강압적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몽골인들은 이 같은 행동이 어느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몽골 지배층 약탈, 파괴에서 평화 시대 선언
농경민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생산 활동을 방해하지 말아야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와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269년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 가문에 속한 세 울루스(부족) 대표들이 탈라스 강가에 모여
몽골인들의 약탈적 파괴에 대해 엄한 처벌로 다스리겠다는 내용에 합의한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큰 면적을 차지했던 몽골제국의 평화시대가 시작된다.
14세기 유럽의 역사가들은 이를 ‘팍스 몽골리카’, 즉 몽골의 평화라고 불렀는데,
다른 어느 때보다 안전하게 동서양을 여행할 수 있는 신 실크로드 시대가 열렸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평화시대를 번창하게 한 것이 역참제도다.
몽골인들은 수백 km가 넘는 장거리를 이동하기 위해
중간 중간에 휴식을 취하거나 말을 갈아 탈 수 있는 일종의 릴레이 시스템,
즉 역참이라는 것을 설치했는데, 그것을 몽골어로 ‘잠'이라고 불렀다.
김 교수는 몽골인들의 역참이 언제 처음으로 건립되었는지를 밝히기는 어려우나,
이미 칭기스칸 시대에 역참을 활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역참제도를 제국의 기간 교통망으로 완성시킨 장본인은 2대 군주였던 우구데이였다고 말했다.
우리는 사신들이 달릴 때 백성들(이 사는 곳을) 따라 달리게 한다.
(그렇게 되면) 달리는 사신의 이동도 지체된다. 나라 백성들에게도 고통이다.
이제 우리는 완벽하게 정비하여 방방곡곡의 천호로부터 역참지기와 역마지기를 내어,
자리자리마다 역참을 두어 사신이 쓸데없이 백성를 따라 달리지 않고,
역참을 따라 달리게 하면 옳지 않겠는가? [유원수 역, ‘몽골비사’ 중에서]
우구데이는 역참루트를 확장해 제국 전역을 커버하는 광역적 교통 네트워크로 변모시켰다.
그의 치세 때는 제국의 영토가 서쪽으로 더욱 확대돼 러시아까지 그 지배 아래 들어오게 되었기 때문에,
역참망도 중앙 아시아를 거쳐 저 멀리 흑해 연안의 초원까지 연장됐다.
몽골 칸이 수도사를 통해 로마 교황에게 전달한 편지 |
또한 중국과의 전쟁을 원활히 수행하고, 그곳에서 거둬들이는 공납물자를 몽골리아로 수송하기 위한 역참망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역참망은 우구데이가 새로이 건설한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으로 집중됐다.
북중국과 카라코룸 사이에는 30km마다 역참 하나씩을 설치해
모두 37개 역참을 두었는데, 이것을 이용, 매일 식량과 음료를 가득 실은 500량의 수레가 카라코룸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 같은 역참망은 이후 몽골제국 확장과 더불어 더욱 확장됐으며, 마침내 유라시아 대륙을 대부분 커버하는 역사상 초유의 거대 교통망이 탄생한다.
몽골제국은 상이한 여러 민족이 서로 만나고 뒤섞이며 살아가던
‘다민족 제국’이었다. 몽골제국은 인종이나 언어에 관계없이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통치의 협력자로 받아들이는 데 전혀 거리낌을 두지 않았다.
칭기스칸이 처음 부족들의 통일 위업을 달성했을 때 몽골인들의 숫자는 모두 합해도 100만 명을 넘지 않았다.
그 정도의 인구로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통치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당연히 함께 통치할 파트너를 필요로 했고, 그 파트너는 중국인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눈 색깔이 있는 사람들’, 즉 ‘제색목인(諸色目人)’에까지 확대됐다.
제색목인에 속하는 집단으로는 티베트, 위구르, 킵착, 강글리, 알란 등이 있었고
이란, 아랍 계통의 무슬림들도 많았다. 유럽인들도 없지는 않았으나, 수적으로 다수는 아니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던 몽골제국은
다양한 언어와 문자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몽골의 지배층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번역과 통역의 정확성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어떤 학구적인 태도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지배자의 명령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몽골제국 전역에서 언어사전 등 다양한 책자들이 편찬됐다.
쿠빌라이 치세 때는 몽골어와 중국어 단어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지원역어(至元譯語)’가 편찬됐다.
1308년에는 쿠빌라이 시대 때 만들어진 ‘국자(國字)’,
즉 파스파 문자로 한자를 표기하기 위한 ‘몽고자운(蒙古字韻)’이라는 책이 편찬됐다.
‘사림광기(事林廣記)’도 중국의 100가지 성씨의 정확한 음을 파스파 문자로 어떻게 표기하는지를 적어서
리스트로 만든 것이다. 1998년 한국의 대구에서는 ‘노걸대(老乞大)’의 원나라 시대 간본이 발견됐는데,
이것은 고려 말기 사역원에서 중국어 학습을 위해 편찬한 것이었다.
유라시아 서부 지역에서도 다언어 사전들이 편찬됐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가디맛 알 아답’이라는 사전인데,
이는 12세기 페르시아 학자인 알 자막샤리가 아랍-페르시아-투르크어 사전으로 만든 것인데,
후에 차가타이어와 몽골어가 추가됐다.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전반에 걸쳐 만들어진 '코덱스 쿠마니쿠스'는
페르시아어-이태리·라틴어-중세 고지 독일어 단어들을 병렬시켜 놓은 사전이었다.
몽골이 지배하던 13~14세기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대여행의 시대’였다.
15~16세기 ‘대항해의 시대’가 열렸던 것은 이전의 ‘대여행의 시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도 비슷한 여행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동서를 넘나든 장건(張騫)을 비롯해
많은 불승들, 기독교인들, 그리고 상인들의 여행은 몽골시대 여행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몽골시대 여행의 특징은
"유리시아 대륙의 끝에서부터 끝까지를 잇는" 사상 최초의 여행이 가능했다는 점에 있었다.
즉 유럽인들이 몽골리아와 동아시아를 방문한 것이었다.
카르피니, 루브룩, 몬테 코르비노와 같은 선교사들이 그랬고, 마르코 폴로와 같은 상인들이 그랬다.
대여행의 시대에서 대항해의 시대로
이들이 남긴 여행기록은 유라시아에서 아프리카까지 새로 포함시키는 새로운 세계관을 낳게 했다.
몽골시대에 중국은 유럽과 아프리카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됐으며,
이슬람권에서는 중국의 역사·의학·농업 분야 서적들을 번역했으며,
무엇보다 유럽은 처음으로 지중해권 너머 동방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처럼 동서양을 넘나드는 여행이 가능했던 것은 ‘팍스 몽골리아’, 즉 몽골의 평화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유라시아 전체가 하나의 정치적 시스템으로 포용된 적은 없었다.
더구나 해상을 통한 여행길도 열려 있었다.
그리고 이 대여행의 시대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여행, 랍반 사우마의 유럽여행,
이븐 바투타의 동서양을 넘나든 대여행을 가능하게 했다.
동서양의 교류도 급속히 확대됐다.
특히 무슬림의 상업 활동은 내륙 실크로드뿐만 아니라 해상로까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육상교역을 좌우했던 무슬림 상인들은 무엇보다 몽골 귀족층이 좋아하는 사치품들을 취급했고,
그 중에서도 보석류는 막대한 이윤을 보장해주었다.
특히 이란어로 ‘랄’이라 불리던 루비는 중국에서도 ‘랄’이라고 불리면서 매우 높은 가격에 거래됐다.
인도양을 거쳐 말라카 해협을 건너서 중국의 동남해안으로 이어지는 해상로 역시
아랍, 페르시아 상인들로 넘쳐났다.
나침반의 발명, 조선술의 발달, 해도 제작 등으로 항해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결과였다.
해상을 통해 거래되는 상품들은 육상로보다 훨씬 다양했다.
곡식과 같은 농산물이 포함되기는 했지만 상인들이 무엇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직물, 자기, 금속제품과 일상 제품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상품은 자기였다.
1976년 전라남도 신안 앞 바다에서 발견된 선박에서 모두 2만2천여 점의 물건이 발견됐는데,
이 중 1만8천여 점이 청자 · 백자 · 청백자였다.
- 이강봉 편집위원
- 2009. 3.30 ⓒ ScienceTimes
(4) 신대륙 발견의 일등공신은 몽골제국
세계지도와 세계사 편찬으로 대항해시대 출범
13세기 초 건설된 몽골제국은 70년에 가까운 끊임없는 정복전쟁을 통해
유럽과 인도 일부를 제외한 유라시아 대륙 거의 대부분을 석권했다.
이후 몽골제국은 역사상 전례 없는 광역의 교통망을 구축한다.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문물을 교류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한 것이다.
‘대여행의 시대’를 맞아 동서남북 간 교류가 급증했다.
이전까지 무지와 설화의 영역으로 전해졌던 대륙의 가장 먼 지역까지 소상한 정보가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402년 조선에서는 세계가 놀랄 만한 지도 한 장이 만들어진다.
13~14세기 세계 국가 현황. 몽골은 이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면서 육로와 항로에 걸쳐 전대미문의 대 교통망을 완성했다. |
태종 2년에 만들어진 이 지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란 명칭을 갖고 있었다. ‘혼일강리도’란 약칭이 붙여진 이 세계지도에 대해
국내에서는 보통 “처음으로 만들어진 귀중한 문화유산 정도”로 알려져 있다.
조선 ‘혼일강리도’에 역사학계 큰 관심
4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김호동 서울대 교수(역사학)는
“그러나 이 지도가 역사상 최초로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모습을 담고 있었던 세계지도였다”고 말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이 지도에는 아프리카 방면에 15개의 지명이 표기돼 있었다는 것.
외국의 많은 학자들이 이 지도를 보고 매우 놀랐다.
학자들의 관심은 15세기 초 조선에서 먼 서방에 관한 지리적 정보를 어떻게 입수했느냐는 것이었다.
지도 하단의 씌어진 발문에는
좌정승 김사형(金士衡)과 우정승 이무(李茂)가 중국에서 입수한 두 개의 지도,
즉 오문(吳門, 蘇州)의 이택민(李澤民)이 그린 ‘성교광피도(聖敎廣被圖)’와
천태승(天台僧) 청준(淸濬, 1328~1392)이 그린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를 살펴본 뒤,
검상관(檢詳官 )인 이회(李薈)에게 이 둘을 자세히 합쳐서 하나의 지도를 만들게 했다고 적혀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
이 발문을 토대로 외국의 학자들의 조사가 시작됐다.
그 결과 청준의 지도는 명대의 엽성(葉盛, 1420~1474)이라는 사람이 쓴 ‘수동일기(水東日記)’에 ‘광여강리도(廣輿疆理圖)’란 이름으로 언급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에서 밝혀졌다.
‘광여강리도’는 일본의 미야 노리코(宮紀子)가 미국 의회도서관에 소장된 ‘수동일기’ 최고본에서 발견했는데, 그 목판본 지도의 명칭은 ‘광여강리도’가 아니라 ‘광륜강리도(廣輪疆理圖)’였으며, 지도의 서쪽 끝은 현재 신강의 서쪽 끝 부분인 ‘호탄’에서 끝나고 있었다.
한편 이택민의 지도는 명대 가정(嘉靖) 34년(1555)에 나홍선(羅洪先)의 ‘광여도(廣輿圖)’란 책에 언급돼 있음이 밝혀졌다.
나홍선은 원대 주사본(朱思本)의 ‘여지도(輿地圖)’와 이택민의 ‘여지도’를 참고로 ‘광여도’를 제작했는데,
이 광여도 안에 ‘동남해이도(東南海夷圖)’와 ‘서남해이도(西南海夷圖)’가 첨부돼 있고,
거기에 조선의 ‘혼일강리도’에 보이는 아프리카 남단의 모습이 동일하게 묘사돼 있는 것이 확인됐다.
원나라, 방대한 분량의 ‘대원일통지’ 제작
아프리카 대륙의 전모가 처음으로 그려진 세계지도는 조선의 ‘혼일강리도’였지만,
그것과 유사한 내용의 지도들은 많이 있었다.
명대에 만들어진 지도로 ‘대명혼일도(大明混一圖 )’, ‘대명국지도(大明國地圖)’, ‘대명국도(大明國圖)’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1303년 쿠빌라이의 후계자인 테무르의 치세 때 총 600책, 1천300권으로 완성된
‘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와는 그 규모와 내용 면에서 비교가 안 되는 것들이다.
이 책은 명대에 대부분 사라져버렸고, 후일 학자들에 의해 극히 일부분이 전해지고 있을 정도지만,
원나라가 통치하고 있는 직할령의 상황을 채색지도와 함께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원일통지’가 완성된 직후 이를 보완해 ‘천하지리총도(天下地理總圖)’란 명칭의
그야말로 세계 최초의 골격을 갖춘 세계지도가 만들어진다.
이 지도 역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지 않지만, 지도 제작을 둘러싼 기록들을 보면
이 지도가 당시 중국인들이 알 수 없었던 먼 서방의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서방뿐만 아니라 인도, 서아시아, 아프리카 등 다른 지역에 있어서도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전한다.
세계지도의 제작과 함께 세계 최초의 세계사가 편찬되기 시작했다.
라시드 앗 딘(Rashid ad-Din, 1240~1319)이 편찬한 ‘집사(集史)’라는 책은
학자들이 ‘세계 최초의 세계사’라고 칭해도 결코 과장했다고 볼 수 없을 만큼 체계를 갖추고 있다.
‘집사’의 구성, 서술체계, 내용을 살펴보면
그것이 종래의 역사서와 다르며, 명실상부한 세계사임을 알 수 있다.
이 역사서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제1부는 투르크, 몽골 부족들의 계보와 역사에서 시작해 가잔 칸의 죽음까지 몽골제국사를 다루고 있다.
제2부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가잔의 뒤를 이은 울제이투 칸의 역사를,
다른 하나는 “아담 이후 사도들과 칼리프들의 역사 및 지구상 각 종족들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한마디로 세계 민족사라고 할 수 있다.
제3부는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당시 세계 지도와 지리지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대미문의 본격적인 ‘세계사’ 편찬
이런 방식의 역사서술 방식은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이전에 이슬람권에서 아담 이후의 인류 역사를 기술한 글들이 있기는 했으나,
그 지리적 범위는 이슬람권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집사’는 당시 각 지역의 정보를 연결시켜 종합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세계 최초의 진정한 세계사였다.
라시드 앗 딘이 편찬한 세계역사 '집사(集史)'의 한 부분 |
김호동 교수는 이 같은 몽골제국의 유산은 1405~1433년까지 28년 동안 7차례에 걸쳐 진행된 명나라 정화(鄭和, 1371~1434)의 해양 대원정, 그리고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정화가 이끄는 선단은 총 18만5천km를 항해했는데, 매번 출항할 때마다 승선 인원은 평균 2만7천명을 헤아렸다. 함대는 남지나해와 인도양을 거쳐 아프리카 동부해안을 따라 남하해, 마다가스카르 섬까지 진출했다.
구체적인 증거는 없지만 아메리카 신대륙, 심지어 남극과 북극에까지 도달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떻게 이처럼 대규모 해상 원정이 가능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것은 몽골 지배기에 확립된 해양장악력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즉 한인이 건설한 왕조들과는 달리 몽골 지배층은 해외무역에 개방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고, 해상활동을 적극 후원한 결과 많은 항해가 이루어졌다.
서아시아와 인도의 선박들이 중국 동남해안에 자주 입항했으며,
중국의 항구를 떠난 배들 역시 말라카 해협을 지나 인도양에 다수 진출하고 있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역시 몽골 대항해시대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오늘날의 쿠바를 마르코 폴로가 말한 황금의 땅 ‘지팡구’임에 틀림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배를 타고 가서) 열흘 쯤 떨어진 곳에 있는 대륙,
즉 오늘날의 북미대륙을 ‘그란 칸’이 살고 있는 본토라고 의심치 않고 있었다.
대칸을 만나러 간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콜럼버스는 그란 칸이 있는 퀸사이 시로 가서 두 국왕의 친서를 전달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콜럼버스가 처음 상륙한 섬들이 ‘서인도 제도’로 불리는 까닭은 그가 그곳을 ‘인도’라고 믿었기 때문이지만,
당시의 ‘인디아’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와는 다른 개념이었다.
콜럼버스 시대에 ‘인디아’는 동방을 칭하는 다른 이름이었고,
마르코 폴로의 글에 나오듯이 몽골의 대칸은 바로 그 ‘인디아’를 지배하는 군주였다.
콜럼버스는 자신의 배가 바로 그 대칸이 지배하는 ‘인디아’에 상륙한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정화의 대원정이나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모두 몽골제국 시대에 이루어진 인도양 항해, 혹은 세계관 확대를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후 세계사를 뒤바꿔놓는 계기를 마련한다.
콜럼버스의 뒤를 이어 동서양, 신대륙을 잇는 항해가 이어지면서 본격적인 대항해시대가 열리기 시작한다.
콜럼버스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출항할 당시 유럽은 항해기술, 지리적 지식, 경제력 등
어느 면에서도 아시아 다른 지역보다 더 월등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이 항해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세계사는 유럽 주도로 흐르게 된다.
유럽이 세계사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것이다.
몽골제국이 이룬 대항해의 역사적인 성과가 유럽 국가들에게 전달된 것이다.
반면 원나라를 통해 대항해 시대의 기반을 마련한 중국은 15세기 들어 내부적인 갈등에 몰입한 나머지
대항해를 통한 세계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역사적인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 이강봉 편집위원
- 2009. 4.0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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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몽골 정복전쟁 "더 야만적이지 않았다"
김호동 교수, 몽골이 유럽 근대화에 결정적 기여
흔히 역사는 어렵다고 한다.
특히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지배했던 몽골제국의 역사를
세계사의 한 부분으로 다루는 작업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11일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종합토론에서는
‘실크로드, 몽골제국, 세계사의 탄생’이란 주제로 지난 4회에 걸쳐 열띤 강연을 가진
김호동 서울대 교수(역사학)에 대한 감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실크로드, 몽골제국, 세계사 등과 관련된 역사해석을 놓고 다양한 분야에서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실크로드. 현재의 중국 시쿠안. |
토론자로 참석한 고려대 김택민 교수는
칭기스칸과 그의 후예들이 벌인 정복전쟁이
“특별히 더 야만적이라고 말해야 할 이유가 없고, 그것은 편견일 뿐”이라는
강연자 김호동 서울대 교수의 평가에 대해 “이런 역사의식이 자칫 독자들,
특히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에게 침략자를 영웅시하는 ‘영웅사관’을 심어줄 염려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16세기 이후) 몽골제국의 유목민 전통을 계승했는가, 그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웠는가가
유럽과 비유럽 세계를 다른 길로 가게 한 1차적 원인이었다”는 김 교수의 평가에 대해
“16~19세기 이루어진 서양 근대화는 그리스의 지적 전통이 강하게 작동한 결과였다”며
역사평가에 대해 다른 견해를 보였다.
중앙대 박환영 교수는 인류학과 민속학적인 입장에서 ‘실크로드’란 용어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당시 문화 교류 중심에는 차와 같은 음식문화 교류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한때에만 교류가 성행했던 실크만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다소 어폐가 있다며
‘실크로드’란 명칭을 ‘티(tea) 로드'로 바꾸는 방안을 제시했다.
김호동 서울대교수 |
한국외국어대 이평래 교수는
김호동 교수가 말한 15세기 이후 동서양의 운명 가설, 즉 몽골제국의 유목민,
대항해로 이어진 몽골 유산을 이어받은 유럽이 번영했으며,
그렇지 않은 비유럽은 쇠락했다는 가설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문화적인 요인보다 경제적인 요인이 더 컸지 않았겠냐며 김 교수의 답변을 요구했다.
다음은 토론자들과 김호동 교수와의 일문일답 내용.
▲ 몽골을 중심으로 한 문화교류사를 말할 때 ‘실크로드’도 중요하겠지만
‘차(茶)로드’와 같은 개념은 어떤가.
“사실 ‘실크로드’라는 말은 한때 비단이 동서 간 교역에서 중요한 상품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다른 품목들이 비단을 대신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차는 대단히 중요한 아이템이었다. 적절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본다.”
▲ 소중국 송나라를 정복하고 세운 대중국 원나라는 중국과 몽골 중 어느 나라 역사인가.
“몽골의 역사이자 중국의 역사다.
중국의 역사라 함은 현재 중국 영토에서 벌어진 역사이기 때문이지
요즘 문제시 되고 있는 ‘역사분쟁’과는 별도의 차원이다.”
▲ 몽골의 정복전쟁이 특별히 더 야만적일 것이 아니냐는 김 교수의 주장이 자칫 독자들,
특히 어린이들이나 청소년에게 침략자를 영웅시하는 ‘영웅사관’을 심어줄 가능성이 있다.
“어떤 면에서 일부 ‘통속적인’ 주장들이 그것을 ‘미화’하고 ‘영웅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저 역시 몽골의 정복전쟁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대부분의 전쟁에서 잔혹하고 야만적인 행위들이 발생했고,
그런 점에서 몽골의 정복전쟁도 다른 전쟁들에 비해 ‘특별히 더 야만적’일 것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종합토론 |
▲ 16~19세기 유럽의 근대화 과정을 보면 과거 그리스 전통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몽골제국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한 것은 아닌지.
“그렇다. 고대 그리스·로마 전통과 기독교 전통은 유럽의 근대화 변모과정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다만 내가 반대하는 것은 과거 구미의 학자들이 막연히 믿어왔던 생각, 즉 근대 유럽의 대두가 이미 그리스 · 로마시대 이래로 ‘운명적’으로 결정돼 있었다는 주장이다.
근대성의 씨앗이 그리스·로마시대에 이미 뿌려졌는데, 중세 ‘암흑시대’에 잠재해 있다가
16세기 이후 그것이 ‘발아’해 꽃을 피우게 됐다는 식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 몽골제국의 유산인 유목적인 습속을 이어받은 유럽은 이후 큰 번성기에 들어선 반면
그렇지 못한 비유럽은 쇠퇴기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목적인 습속보다 경제적 이유 때문 아닐까.
“상당수의 서구학자들이 그렇게 말한다. 유럽이 근대국가를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국가들 간의 경쟁체제’였다는 주장이다. 마땅히 수긍할 만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중국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만주에서 시작해 내외 몽골, 티베트와 신강까지 삼켜버린 청제국이 해양으로 진출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유럽은 달랐다. 각국 간 경쟁과 전쟁은 각국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았고, 결국 해상진출이 불가피했다.”
▲ 몽골 칸이 교황에게 보낸 서신내용은 무엇인가.
“몽골의 유럽 침입을 합리화하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거부하는 내용이었다.
그 후 몽골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선교사들이 파견됐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 세계를 제패한 몽골이 비교적 짧은 기간에 패망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 원인을 놓고 학계에 논란이 많다. 14세기 중반 거의 동시에 붕괴 조짐이 나타났는데,
흑사병의 창궐, 황하의 범람 등 자연재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견해도 있고,
또 경제적인 파탄과 연결시키는 해석도 있다.”
▲ 오늘날 유목국가는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힘을 잃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기마전쟁의 우세가 총포와 화약에 의해 무너졌기 때문이다.”
- 이강봉 편집위원
- 2009. 4.1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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