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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그림 - 랭부르(Limbourg) 형제의 ‘베리공의 호화로운 기도서'

Gijuzzang Dream 2009. 3. 8. 14:37

 

 

 

 

 

 서양의  달력화

 

 

 

 랭부르(Limbourg) 형제의 필사본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기도서> 

 Limbourg Brothers,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

 c.1410-1416, Musée Conde, Chantilly(프랑스 샹티이 꽁데박물관)  

 

 

 

 

○ 운명을 점치는 일종의 달력

 

플랑드르미술의 중심은 회화였다.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엽 이 지방과 프랑스에서 활약한 미니아튀르 화가의 대부분은

플랑드르 출신으로, 얀 반 브뤼케, 앙드레 본뵈, 장 말루엘 등은

문양직(文樣織)의 밑그림, 성서의 삽화, 제단화 등에 자연주의풍의 독자적인 작풍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베리公의 화려한 기도서>(샹티이 콩데미술관)의 작가 랭부르(림부르크) 3형제가

특출하였다. 그들은 주로 파리와 디종에서 활약하였고

고딕의 전통에서 나왔으면서도 생활과 풍토와 밀착된 소박하나 정밀한 관찰에 입각,

새로운 사실주의를 지향하여 그 후에 나타나는 플랑드르회화의 신선미의 원천이 되었다.

 

15세기 초에 그려진 랭부르 형제의 <베리公의 풍요로운 시절> 소장자였던

베리 공작(장 드 프랑스, 1340~1416)은 일명 선량왕이라고 불리는 장 2세의 셋째 왕자로 태어났다.

샤를 5세는 그의 큰 형이다. 그는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정치적인 욕망이 별로 없는 대신

예술품 수집에 남다른 열정과 집착을 보였다고 한다.

예술품의 소유가 자신이 지닌 권력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프랑스왕의 궁전보다 더 화려하고 잘 갖춰져 있다는 부르고뉴公의 궁정은

그가 얼마나 아름다움에 공을 들였나 알 수 있다.

그는 프랑스 전체의 약 3분의 1가량 되는 국토를 직접 통치했는데

형제들과의 세력다툼이나 농민반란 등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영위했지만

예술작품에 대한 관심이 유별나서 막대한 자금을 갖가지 예술작품을 구입하는데 쏟아 부었다.

베리公은 책 수집에도 열심이었는데,

<베리公의 화려한 기도서>는 그의 장서 가운데 최고의 명품으로 알려져 있다.

 

중세의 카톨릭 신도들은 기도에 필요한 교본인 시도서(時禱書, horae)를 가지고 있었다.

성당에서 종소리가 울리면 그 소리에 맞춰 기도를 올렸는데

세 시간마다 한번씩, 하루 8회 행해졌다고 한다.

당시에 성모 마리아 숭배와 성인들을 위한 축제가 한창이던 때에 시도서는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가정에 중요한 물품이었다.

이러한 시도서는 귀부인과 공주들의 혼수 예물로 제작되어 호화로운 미장본을 남겼는데,

그 중 1410년경에 만들어진 베리 공의 시도서는 그 첫 부분이 1년 12개월의 달력으로 꾸며졌다.

시도서의 삽화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이 작품은 1년 12달의 생활풍속과

자연풍경의 변화에 따라 춘하추동의 논과 밭, 남녀 구별 없는 농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달력 그림인데 화면 윗부분 크게 부각된 반원형의 천관에서 내려다본 장면으로 그려졌다.

 

귀족과 농부들의 계절에 따른 활동을 풍경화와 함께 묘사하여 일종의 달력 그림을 만들었는데,

12달의 생활풍속을 담은 달력 그림들은 그림마다 위쪽에 반원형의 천체 이미지를,

아래쪽에 사각형의 일상풍경을 배치하여

세월의 흐름과 삶의 순환, 일상과 자연의 대화를 하나의 호흡으로 보여주고 있다.

 

 

 

1월 - 물병좌

 

2월 - 물고기좌

 

3월 - 숫양좌

 

 

4월 - 황소좌

 

5월 - 쌍둥이좌

 

6월 - 게자리

 

7월 - 사자좌

 

8월 - 처녀좌

 

9월 - 천평좌

 

 

10월 - 전갈좌

 

11월 - 사수좌

 

12월 - 산양좌

  

랭부르 형제의 그림은 이런 천문학적 배경과 점성술적인 요소가 결합한 일종의 달력으로

모두 12장의 그림에 각각 2개씩의 별자리를 그렸다.

별자리를 통해 나타난 태양의 운동과 달, 행성은 점성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림에서 나타나는 이들 별자리는 30도씩의 등간격을 이룬다.

이들 별자리는 태양이 지나는 길(황도)의 배경에 나타난 별자리를 나타낸다.

천문학자들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일 때 태양의 위치(춘분점)에 있는 별자리를 시작으로

태양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별자리 12개(황도 12궁)를 정하고 점성술에 사용했다.

  

달력에는 달마다 바뀌는 일, 즉 씨를 뿌리고 사냥을 하고 추수를 하는 등의 작업 광경들이

세부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달력은 당시 사람들이 자연을 그릴 때 생명력과 관찰력을 어느 정도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편, 베리公이 살던 시대는 이미 도시문화가 형성되고 발달되었는데도,

이미 해체된 장원(莊園)의 특징으로 그리면서

당시 도시의 시민, 장인들의 모습은 달력은 물론 <베리의 화려한 기도서>전체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지는데 세로 40×가로 30㎝, 모두 412페이지에 이르는 대형본이다.

7~10세기의 사본은 필사가 중심이었으나

11~13세기에 이르면 삽화와 머리문자를 장식하는 채색화가 중심이다.  

 

베리公이 네델란드 출신의 채색화가였던 랭부르 3형제를 만난 것은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극적인 만남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세밀화가 폴(Paul), 엘망(Herman), 장(Jean) 랭부르(Limbourg) 3형제가 이 기도서를 제작한다.

 

랭부르형제 모두 생애도, 생년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각가였던 아버지가 죽은 뒤

부르고뉴公의 궁정화가였던 백부 말루엘 밑에서 자랐다.

형제는 처음에 파리의 금은세공사 밑에서 공부하고,

1402년 디종의 부르고뉴公의 궁정에서 일하다가 파리에서 부르고뉴 공작을 위해 일했는데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성서 교훈(Bible moralisée)>에 삽화를 그려 넣은 것으로 짐작된다.

1404년 부르고뉴가 죽은 지 얼마 후 이들은 부르고뉴의 형제인 베리公의 궁정화가가 되었고,

1416년 당시 유행병에 걸려 형제가 차례로 죽었다.

작품으로는 <아름다운 기도서, 1403-13>와

<베리公의 화려한 기도서(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 1414-16> 두 작품만이 알려져 있다.

<베리公의 화려한 기도서>는 형제들의 사망으로 중단되어 1416년 미완인 채 남겨졌으나

1485년 장 콜롱브 드 부르제(장 콜롱베)에 의해 완성되었다.

 

 *** 장 콜롱베, <베리 공작의 기도서>, 가나의 혼인장치,

                    28×20㎝, 1404-8년, 파리국립도서관

결혼식 신부가 그림 한복판에 뻣뻣하게 앉아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예수님은 마법의 지팡이를 자주 사용하지만

여기에서는 축복의 몸짓 하나로 기적을 행하신다. 마리아는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 그림에서는 북유럽 특유의 덧셈식 원근법적 공간처리가 눈길을 끈다.

 

 

<베리公의 화려한 기도서>는 채식 사본(Illumination)미술에서

역사적인 의의를 갖는 작품의 하나이며, 국제 고딕 양식 중 최고의 것으로 꼽힌다.

랭부르 형제는 특정한 풍경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이 작품은 세세한 부분의 사실적인 묘사와 전체적인 장식 효과가 잘 결합된,

우아하고 세련된 궁정양식이다.

이들이 당시 가장 진보적인 국제 양식, 특히 이탈리아의 양식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들 형제 중 1명은 이탈리아를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미술은 15세기초 네덜란드 미술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1416년 베리公이 페스트로 인해 세상을 떠날 무렵 랭부르형제도 사망했다.

   

<베리公의 화려한 기도서>에는 12개월의 달력그림이 유명하며

거기에는 다달의 노동을 묘사한 12매의 미니아튀르가 곁들여있는데

풍경묘사의 참신함은 회화사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무대장치처럼 전경(前景) 중경(中景) 원경(遠景)을 평행으로 그려

원근법적 환상을 주는 독특한 수법으로 우첼로의 <바티글리아>에 계승되어

이탈리아회화의 원근법을 낳게 하였다.

원경 속에 정확히 그려 넣은 루브르, 방센, 소뮈르 등 프랑스 각지의 성(城)은

당시의 면모를 전하는 귀중한 자료이며 파종, 수확, 수렵 등의 노동풍경은 중세의 풍속자료이다.

 

<장원(莊園)의 주인 - 영주>

영주는 성채 안에서 가족과 하인, 기사단을 거느리고 생활하였다.

성채가 처음 시작한 것은 카롤링거 왕조 때로 이때는 주로 변경지역에 세워졌다.

처음의 성(城)은 왕의 권력을 상징하였고,

성주(城主)는 왕의 대리인자격으로 재판권과 조세권을 행사하였다.

그런데 지방분권 체제하에서는 성의 소유주인 영주가 그 스스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성은 이제 왕의 권력이 아니라 영주의 권력을 상징하게 되었다.

이처럼 중세시대의 성(城)은

단순히 영주의 거주지 혹은 방어와 피신을 위한 대피소 외에도 그 지역 최고 권력의 상징이었다.

영주는 자신의 장원(莊園)에 거주하는 농민들에게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권한은 영주재판권이었고

그 외에도 시설독점 및 강제사용권, 추적권 등이 포함되었다.

게다가 영주는 조세징수권, 화폐주조권과 같은 국가 대권까지 행사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가 지배하는 장원은 작은 국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기도하는 사람 - 성직자>

중세 프랑스에서 교회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교회는 자체 교회법을 가지고 독자적인 재판권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광대한 영지를 가진 대토지소유자였다. 또한 그 토지에서 나오는 지대한 교구와

‘십분의 일’ 세금까지 거두어들임으로써 막강한 재력을 보유하였다.

그리고 칠성사(七聖事, 신의 은총이라는 교회의 많은 성사들 가운데 세례, 견진, 성체, 고해, 종부(병자),

혼인, 신품 등 일곱 가지 성사)를 관장하여 일반인들의 일상생활을 하나하나 통제하였다.

이처럼 교회가 출생과 결혼, 사망 등을 통제했기 때문에

일반인 중세교회조직은 교황을 정점으로 추기경과 대주교, 주교, 교구사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황은 추기경 회의를 통해 선출되었고, 추기경은 주교 중에서 교황이 임명하였다.

그리고 주교는 성당 참사회에서 선출되어 그들에 의해 보좌되었다.

이들 고위성직자들은 대개 귀족가문 출신들이었지만,

교구사제와 같은 하위성직자들은 일반농민이나 농노 출신들이 많았다.

 

<일하는 사람 - 농노>

중세 프랑스 농민은 이민족의 침략을 피해 스스로 영주의 보호 아래에 들어간 사람들로

신체의 자유가 없는 농노의 신분이었다.

그들은 고대의 노예와는 달리 일정한 토지를 가지고 가족을 거느릴 수 있었지만,

토지에 결박된 부자유한 신분으로 이동의 자유가 없었으며 영주에게 인두세를 바쳐야 했다.

또한 영주가 원하면 언제든지 전투에 보병으로 출정해야 하며 성의 보초를 서야했다.

이외에도 농노들은 영주에게 각종 공납의 의무를 졌다. 농노들의 삶의 터전은 장원(莊園)이었다.

장원(莊園)이란 봉건제가 정착되면서 영주가 다스리는 봉토 안에 형성된

자급자족이 가능한 경제생활의 기본 단위를 말한다.

장원의 구조는 영주나 그 관리인이 거주하는 장원청, 제분소와 제빵소, 창고 등 같은 공동시설물과

교회, 농가들, 그리고 그 주변의 경작지와 공동목장, 목초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랭브르 형제의 <베리(Berry)公의 화려한 기도서> 또는 <베리公의 화려한 시도서(時禱書)>

   : <베리 공작의 귀중한 성무일과〉에 수록된 삽화,

   : 29ⅹ21cm, 프랑스 샹티이 꽁데미술관(Conde Museum) 소장

    : 플랑드르의 화가 Limburg(Limbourg라고도 씀) 3형제

      - Paul(폴), Herman(헤르만, 또는 엘망), Jehanequin(예하네쿠인, 또는 장)

 

1월

베리公의 신년축하연

새해를 맞아 봉건 영주의 성에서는 호화로운 향연이 열리고 있다.

지난해의 풍년을 만끽하고 새해를 맞은 봉건 영주들의 표정은 즐겁다.

술잔을 나르는 하인과 빵 굽는 사람의 모습도 보인다.

당시 65세의 베리公을 20대의 모습으로 그렸고 그의 애견까지 등장시켰으나

귀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귀부인의 우아한 모습은 봄과 더불어 등장한다.

   

이 그림은 식탁에 앉은 베리 공작 주변으로 가신들과 조신들이 빙 둘러서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큰 잔치가 열리면 귀족들은 성이나 궁전의 커다란 홀에 음식을 차리게 했다. 그리고 공개된 장소에 임시로 단을 설치한 뒤 식탁을 놓고 특별히 초청된 손님들과

함께 식사를 했는데, 베리公의 오른쪽 사람은 식탁 뒤편에서 손님들에게 외치고 있다.

그의 머리 위에 새겨진 글귀는 '오세요, 오세요' 라는 뜻.

이 그림에서는 오직 성직자 한 사람만 베리 공작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당시에는 귀족들 역시 영주에게 복종하는 뜻으로 식사 시중을 들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중세사회의 먹고 마시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들은 도적적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고, 감각적 쾌락, 성적인 의미, 성서적 비유 등을 나타내기도 한다. 

 

 

 

(1월) LIMBOURG Brothers(Herman, Jean, Paul)

Les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 Janvier(January)

1412-16. Illumination on vellum, 225×136㎜, Musée Condé, Chantilly

 

 

 

2월

겨울의 농가.

서양미술사 최초의 설경(Snow)으로 농민들의 소박한 삶이 평화롭게 그려졌다. 유럽의 2월에는 눈이 많이 오므로 집안에서 쉬면서 추위를 이겨 지내라는 뜻이다.

화면의 왼쪽아래 출입문으로 들어온 여인은 손을 불며 따뜻한 방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위쪽에는 땔감을 위해 나무를 패는 남자와 당나귀에게 땔감을 지우고 언덕을 넘어가는 남자가 한겨울에도 분주했던 농촌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

 

 

(2월) LIMBOURG Brothers(Herman, Jean, Paul)

Les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 Fevrier(February)

1412-16. Illumination on vellum, 225×136㎜, Musée Condé, Chantilly

   

 

  

3월

밭 경작과 포도나무 손질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농부와 포도 덩굴을 전지하는 장면을 나타낸다.

   

(3월) LIMBOURG Brothers(Herman, Jean, Paul)

Les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 Mars(March)

1412-16. Illumination on vellum, 225×136㎜, Musée Condé, Chantilly

 

 

 

4월

뜰에서의 혼약 

대개 귀족들의 그림에서는 결혼식 장면을 나타내는데,

4월에 과수의 접을 붙이면 활착이 잘 되므로 결혼식도 이때 치렀다.

 

(4월) LIMBOURG Brothers(Herman, Jean, Paul)

Les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 Avril(April)

1412-16. Illumination on vellum, 225×136㎜, Musée Condé, Chantilly

 

 

 

5월

새잎 따기

중세 유럽의 5월 1일은 봄 축제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성장을 한 귀족들이

머리에 나뭇잎 관을 쓰고 트럼펫을 부는 사람들의 인도를 받고 축제의 장소로 가고 있다. 배경의 환상적인 성의 아름다움이나 드넓게 펼쳐진 숲은 마치 한 편의 동화세계 느낌이다.

귀족들의 머리와 목 언저리를 장식한 것은 자작나무의 새잎이다.

남성이 새잎으로 장식하면 ‘사랑을 쏟으리라’는 고백이 되고

여성이 하면 사랑을 비치는 뜻을 지닌 ‘5월아씨(May Queen)'가 된다.  

 

  

 

 

(5월) LIMBOURG Brothers(Herman, Jean, Paul)

Les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 Mai(May)

1412-16. Illumination on vellum, 225×136㎜, Musée Condé, Chantilly

 

 

 

6월

마른 풀 베기

건초를 만드는 농부들을 나타낸다.

5월까지 자란 풀을 베어서 사일로에 잘 저장하여 겨울에 말을 먹일 준비를 해야 한다. 말의 숫자와 이 건초의 양이 맞지 않으면 겨울나기가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6월) LIMBOURG Brothers(Herman, Jean, Paul)

Les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 Juin(June)

1412-16. Illumination on vellum, 225×136㎜, Musée Condé, Chantilly

 

 

 

7월

보리수확과 양털 깎기  

보리를 수확하여 군마의 사료로 비축한다. 당시에는 지력을 보호하기 위한 영농법으로 삼포제라 하여 농지를 3등분하여 번갈아 짓는 법이 있었기 때문에 지난해 겨울에 파종한 보리를 7월에 수확했다.

무더운 8월이 오기 전에 양털을 깎는 일도 잊지 않아야 하는데, 더 늦게 양들이 털갈이한 후에 깎게 되면 털이 덜 자라 양모의 양이 적을 뿐만 아니라 양들이 털이 짧아 겨울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7월) LIMBOURG Brothers(Herman, Jean, Paul)

Les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 Juillet(July)

1412-16. Illumination on vellum, 225×136㎜, Musée Condé, Chantilly

 

 

 

8월

매 잡기

작년에 갈지 않고 쉬게 한 휴경지에는 봄에 밀을 파종하여 농민들은 일년의 식량인 밀을 그해 8월에 수확했다. 귀족들은 매사냥놀이를 한다.

떨어진 밀 이삭은 농민들이 줍지만 줍고 남은 것들을 먹으러 온 들새(비둘기, 꿩, 참새 등)를 사냥하면 전쟁에 대비한 훈련도 된다.

귀족들은 운동이 부족했던 말들을 몰고 사냥을 하는데 귀족들이 전쟁에 대비한 훈련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고 이때를 위하여 사냥감인 짐승과 새를 농노들이 범하지 못하도록 했다. 귀족들은 전쟁 때 기병으로서 몸소 전쟁에 나가 농노들을 보호했으므로 당연히 훈련용 사냥감을 해치지 못하게 규제할 권리가 있었다.

 

상징의 세계였던 중세를 염두에 두고 이 그림을 보면 쌍쌍의 귀족과 귀부인이 말을 타고 가는 목적이 숲속 나무그늘 아래에서의 사랑을 속삭이는데 있음을 암시한다는데, 중세의 ‘사랑의 뜰’에서 매는 ‘남성’을 상징하며 털이 긴 강아지는 ‘여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짝이 없는 한 귀부인을 합친 ‘5’라는 숫자는 사랑의 충족을 상징하는 오감을 또한 나타낸다.  

 

(8월) LIMBOURG Brothers(Herman, Jean, Paul)

Les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 Aout(August)

1412-16. Illumination on vellum, 225×136㎜, Musée Condé, Chantilly

 

 

 

9월

포도수확

포도를 수확하는 장면을 나타내는데, 포도를 수확하여 포도주를 담근다.

포도주는 알칼리성 식품으로 베이컨 등 육류섭취로 인하여

체질이 산성화하기 쉬운 유럽인들에게는 꼭 필요한 술이다. 

  

   

 

(9월) LIMBOURG Brothers(Herman, Jean, Paul)

Les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 Septembre(September)

1412-16. Illumination on vellum, 225×136㎜, Musée Condé, Chantilly

 

 

 

10월

밀 파종 

가을보리를 수확하고 밭을 가는 그림인데,

특히 9월과 10월 그림의 배경이 루브르 궁전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10월) LIMBOURG Brothers(Herman, Jean, Paul)

Les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 Octobre(October)

1412-16. Illumination on vellum, 225×136㎜, Musée Condé, Chantilly

 

 

 

11월

돼지에게 도토리를 주다

돼지를 산으로 몰고가서 도토리를 털어 먹이는데,

도토리를 먹게 하여 살찌운 돼지를 씨돼지만 남기고는 모두 잡는다.

월동용 사료를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잡은 돼지는 소금에 절여 베이컨을 만들어 보관하고 일 년 동안 먹게 된다.

이때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에서 나는 냄새를 없애기 위해 후추가 필요했으며, 후추는 유럽에서 꼭 필요한 주요교역품의 하나였다.

 

(11월) LIMBOURG Brothers(Herman, Jean, Paul)

Les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 Novembre(November)

1412-16. Illumination on vellum, 225×136㎜, Musée Condé, Chantilly

 

 

 

12월

멧돼지 사냥

겨울밭에 보리를 씨뿌리고, 귀족들은 사냥개를 데리고 멧돼지 사냥을 나간다. 일 년을 무사히 보내고 즐겁게 노는 계절이다.

   

(12월) LIMBOURG Brothers(Herman, Jean, Paul)

Les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 Décembre(December)

1412-16. Illumination on vellum, 225×136㎜, Musée Condé, Chantilly

 

 

 

 

<랭부르 삼형제의 세밀화 - 베리 공작의 기도서>

 

서양 중세는 기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대였다.

개인의 일상도 예외가 아니어서 글을 읽을 줄 아는 식자나 귀족들은 모두 접을 수 있는

간이 기도서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개인적으로 기도나 미사를 드릴 때 사용하곤 했다.

많은 귀족들, 특히 귀부인들은 이런 기도서 이외에도 작은 크기의 초상화를 갖고 다니기도

했는데 이런 초상화 뒷면에는 속세의 삶이 허망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을 그려넣은 이른바 바니타스화가 들어가 있곤 했다.

하지만 이런 식자층은 실제로는 극소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적었다.

 

말 그대로 일자무식의 문맹이었던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라틴어로 쓰여진 성경책을 읽을래야

읽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종이도 발명되기 전의 중세시대에는 성경책이 어디서나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중세의 모든 고딕성당은 성경의 내용을 묘사한

조각으로 뒤덮여 있어 그 자체로 성경책 역할을 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서 번역 작업과 동시에 일어났고

가톨릭에 반기를 든 프로테스탄트들이 성상을 파괴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귀족들이 가지고 다니는 기도서는 흔히 장식이 들어가기 마련이어서

어떤 이들은 화려한 채색의 세밀화로 장식을 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달력처럼 일년 12달을 그림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현재 남아있는 중세의 이런 기도서 중 미술사적으로 의의가 있는 것이

바로 랭부르 형제가 베리 공작을 위해 그린 세밀화 기도서이다.

현재 이 그림은 진귀한 고서화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파리 상티이 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랭부르 형제의 기도서>는 휴대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크기가 작아 위의 별자리를 그린

반원형의 상단부를 제외하면 가로 13.6×세로 15.4㎝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기도서들은 넓게는 민화 계열의 그림으로 볼 수도 있지만,

묘사력이나 색채감각 등에 있어 중세 성화에 버금가는 빼어난 미학을 보여준다.

또 사실적 묘사로 인해 당시 풍습이나 생활상 그리고 건축 등을 되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의 역할도 하게 된다.

 

랭부르 형제가 베리 공작을 위해 제작한 기도서 중 2월을 묘사한 그림을 보면

기록으로는 대할 수 없는 당시 풍습과 생활상 등을 알 수 있다.

 

추운 겨울 많은 눈이 내려 마을을 뒤덮고 있다.

멀리 크리스마스카드에나 나올 것 같은 눈에 덮인 성당의 뾰족탑이 보인다.

그림 전면에는 한 소작농의 누추한 집 내부가 서툰 솜씨로 마치 투시도를 보는 것 같이

묘사되어 있다. 나귀등에 장작을 잔뜩 싣고 한 사내가 마을로 향하고 있다.

다른 사내는 땔감을 얻기 위해 나무를 패고 있다.

집안의 난로에서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고 세 사람이 불가에 모여 불을 쬐고 있다.

눈에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몸을 빨리 덥히기 위해서인지 모두 겉옷을 들고

있고, 특히 귀부인처럼 보이는 맨 앞의 여인 뒤에 있는 남자와 여자는 민망스럽게도 속살까지

드러낸 채 불을 쬐고 있다.

어쨌든 2월 그림은 전체적으로는 고요하고 평온한 프랑스 중세의 한 농가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평온한 모습은 겉모습만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그림을 자세히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그림이 그려진 15세기 초엽 사람들은

이 그림에서 전혀 목가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농민들에게 추운 겨울은 기아와 동사(凍死)를 의미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림이 그려진 1408년에서 1416년까지 프랑스는 샤를르 6세가 치매에 걸리는 바람에

왕위를 노리는 대공들이 각축을 벌리던 내란의 시기였고

게다가 영국까지 왕위를 요구하고 나서 잔 다르크가 출현하는 백년전쟁 말기이기도 했다.

느닷없이 창궐하는 전염병과 끝도 한도 없는 전쟁, 그리고 출몰하는 비적들로 인해

일반 민중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이 그림을 그린 랭부르 삼형제도 1416년 전염병으로 병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멀리 보이는 성당의 종탑만 해도 비적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리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당시 힘없는 민중들에게는 목가적인 은은한 종소리를 연상시키는 종탑일 수가 없었다.

나귀등에 실린 나무들은 잔가지들이 아니라 제법 두꺼운 장작들이다.

당시에 농민들은 이러한 큰 통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귀부인께서 방문을 했기 때문에 가난한 소작농의 집 난로에

오랜만에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귀를 몰고 가는 사람이나 장작을 하는 사람 모두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모피나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있지 않다.

모피나 가죽옷은 당시 민중들에게는 금지되어있던 옷들이었기 때문이다.

 

중세는 세 가지 신분이 존재했다. 귀족, 성직자 그리고 평민이었다.

귀족은 일반적으로 군인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전쟁을 하는 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였다.

이들을 칼을 찼다는 뜻으로 ‘대검 귀족’이라 불렀다.

성직자는 신의 말씀을 전파하고 기도하는 이들이었고, 그 대가로 십일조와 땅을 받았다.

평민은 위의 두 계급을 먹여 살리는 계층이었다. 평민 밑에 일일 노동자나 종들이 있었다.

전체 인구의 90% 정도가 평민과 그 이하의 하층민들이었다.

이들의 생활은 나무를 지고 가는 나귀와 진배없이 비참하기만 했다.

이들을 흔히 ‘자크’라고 불렀는데,

이 ‘자크’라는 이름은 한국의 머슴 이름인 ‘돌쇠’에 해당하는 이름 아닌 이름이었다.

프랑스史에서 농민반란을 ‘자크리’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추운 겨울 밖에서 나무를 하고 있는 사내 곁에는 원통형의 건물이 하나 있다. 비둘기집이다.

중세에 비둘기는 비둘기 똥을 거름으로 사용하기 위해 사육되었다.

따라서 비둘기 역시

평화의 상징이거나 성서에 나오는대로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비둘기 똥은 다른 짐승들의 똥보다 거름으로서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유럽의 농촌에서 비둘기집이 사라지고 비둘기들이 도시로 이주해가 수백 마리씩 공원으로

몰려다니며 관광객들이 주는 과자부스러기를 먹게 된 것은 화학비료가 생산된 이후의 일이다.

땅이 넓을수록 큰 비둘기집을 갖고 있었다.

비둘기의 수에 따라 거름의 생산량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보통 비둘기집 내부에 파는 구멍에는 암수 한 쌍이 들어가는 것으로 계산했고

한 구멍당 할당된 농지는 1에이커 정도였다.

현재 비둘기집이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은 루아르강 인근의 빌사생 城으로

1,500개의 구멍을 가지고 있는 탑이 있다. 이 성의 주인이 비둘기 3,000마리를 기를 수 있었고,

1,500에이커의 땅, 다시 말해 600헥타르의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에서 비둘기집은 오직 귀족만이 갖고 있을 수 있는 특권 중 하나였고

이 특권 역시 프랑스대혁명 이후에야 다른 특권과 함께 폐지된다.

 

비둘기집 앞에는 벌통이 놓여있다. 설탕은 수입품으로 귀족들만 입에 댈 수 있는 사치품이었고,

꿀만이 유일한 당분원이었다. 게다가 밀랍은 초를 만드는 중요한 원료이기도 했다.

그 앞에는 양(羊)우리가 보인다. 중세에는 양이 가장 많이 사육된 가축이었다.

젖, 가죽, 고기를 모두 제공했을 뿐 아니라 척박한 땅에서도 잘 사육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양을 치는 목자로 비유하는 것도

헐벗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오직 양만을 사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농가에서는 수 백 마리의 양과 십 여 두의 소를 키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잔 다르크도 양을 치는 양치기소녀였다.

 

소작농의 집안에는 세 사람이 불을 쬐고 있으며,

그 중 두 사람은 대담하게도 속살까지 드러내 놓고 있는 장면은

림을 그리기 위해 실제와는 달리 과장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랭부르 형제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묘사한 것이다.

당시 기록을 보면 여름에는 속옷도 걸치지 않은 채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의 성관습은 대개의 경우 인간의 육체를 멀리했던 신부들이

남긴 자료에 의거한 것으로 당시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 많다.

특히 한 방에 대식구가 사는 일반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을 염두에 둔다면

성이 문란할 수 없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보는 앞에서 섹스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손으로 음식을 먹다가 포크가 처음으로 개인 식기로 사용된 것도 16세기 들어서였고

언어와 옷 등의 예법이 지금처럼 다듬어진 것도 17세기 베르사유 궁이 들어서면서부터이다.

17세기의 기록을 보면, 여전히 계단이나 창가에서는 용변을 보지 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역으로 궁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조차도 그러한 무례를 많이 범했다는 것을 일러준다.

집안에 있는 사람 중 치마만 약간 들어 올린 여인은 귀부인이고,

그 뒤 남녀는 귀부인의 몸종으로 보인다. 난로에서의 거리도 신분을 일러주지만,

속옷을 들어 올린 자세에서도 짐작이 가능하다.

농민들은 모두 추운 겨울임에도 밖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림에는 비적의 모습도 전투 장면도 또 돌림병에 쓰러지는 비참한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랭부르 형제들은 베리 공의 城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눈에 덮인 목가적인 풍경을 떠올릴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뜻한 성에서 지냈던 화가들 역시 농민들의 삶이 처해있는 비참한 모습은

흰 눈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또 보였다고 한들 귀족의 기도서에 그런 비참한 모습을 굳이 그려 넣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 LES VACANCES WORLD CITY GUIDE 

 

 

 

-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권, 이광주, 한길아트, 2001

- 이야기프랑스사, 윤선자, 청아출판사, 2007

- 한 권으로 배우는 세계의 미술가, 메리앤 F 콜 킴 솔가, 맑은 가람, 2008

 

 

 

 

 

 

 

 - 데이드림(Daydream) / '평화의 숲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