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 '터럭 한 올'이 달라도 그 사람이 아니다
초상화는 인물화의 하나로 어느 특정인물을 그린 그림이다.
초상화는 다른 종류의 그림에 비해 실제와 꼭같게 표현해야 하는 '사실성'이 매우 중요시되는 분야이다.
그러나 초상화의 진정한 의미는 인물의 겉모습을 닮게 표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성격, 학식, 인품 등 정신적인 면까지 담아내는 데에 있으며
이는 동서양의 공통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한국의 전통 초상화는 '터럭(毛) 한 올이라도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의식 아래
대상 인물의 겉모습과 내면세계까지 표현하고 자 노력했기에 매우 높은 기량과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이렇게 대상인물의 정신적인 면까지 담아내고 있는 초상화는
옛 조상들에게 있어 기록이나 예술작품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우리 조상들은 비록 그림이지만 초상화를 선조(先祖)와 동일하게 여겼던 것이다.
때문에 초상화 제작 단계부터 정성을 다했고
완성 후에는 봄가을 볕좋은 날을 택해 바람을 쐬여(거풍, 擧風) 해충이나 습기를 제거했다.
왕실에서는 화재로 인해 왕의 어진이 소실되었을 때
왕은 소복(素服)을 입고 신하들과 함께 3일간 곡(哭)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난리를 만나 피신할 때 안전하게 싸서 같이 피하고,
불이 났을 때 사당으로 뛰어들어가 안에 걸려 있는 초상화를 구했다는 일화를 보면
우리 조상들이 초상화를 어떻게 생각했고 어떻게 지켜왔는지 짐작케 해준다.
우리나라 초상화의 자세는 왜 모두 비슷할까
한국의 초상화는 이웃인 일본이나 중국에 비교해 볼 때 전체적으로 단순한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대상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자연스럽고 담백하게 표현했다는 특징이 있다.
초상화에 등장하는 자세 역시 단정함을 넘어 대부분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손은 공손히 앞으로 모은 채 반쯤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자세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얼핏 보면 요즘 '얼짱' 각도와 유사한 이런 자세가 유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마한 것처럼 초상화는 후손들이 생전의 조상처럼 모시고 기리던 그림이기도 했다.
따라서 초상화에는 다른 사람들이 우러러볼 수 있는 주인공의 반듯한 내면세계가 표현되어야 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런 자세가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가장 적합하게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이라고 이해한 듯하다.
<심환지 초상> 부분, 보물 제1480호.
조선, 19세기 초, 족자, 비단에 채색, 149.0×89.2㎝(213.5×103.0㎝)
청송심씨종중 기증, 경기도박물관 소장
우리나라에 여성과 아이의 초상이 드문 이유
고구려 고분벽화의 부부초상이나 고려시대의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까지는 초상화 주인공의 경우 남녀의 큰 구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왕비의 초상화가 모셔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초상화의 주인공은 거의 남성으로 한정되었다.
남녀구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남성 화가 앞에서 여성이 얼굴을 드러내며 초상화를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반면 여성화가 또는 화원(畵員)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초상화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는 초상화를 제작하는 주요 목적 중 하나가 대상인물을 모셔두고 숭배하는 것에 있었는데
부모보다 일찍 죽은 불효자식을 기린다는 것은 그 당시 사회 관념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초상화 기증에 얽힌 몇 가지 일화
기증은 박물관에서 유물을 수집하는 방법 중 가장 핵심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기증유물은 다른 유물보다 더 정확한 정보, 즉 보관 경위나 연유를 가지고 있으며
지역과 관련된 것이 많기 때문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외국과 비교할 때 우리나라의 기증문화는 아직 미미한 단계이지만
문화재를 더 영구히 보존하고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도록
소중한 유물을 박물관에 기꺼이 기증하는 분들이나 집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경기도박물관의 초상화 역시 기증된 작품이 많다. 따라서 기증에 얽힌 사연도 가지가지이다.
그 첫 번째 사연.
어느 날 경기도박물관 관계자가 TV 채널을 돌리다 유물의 진위를 감정하고 가격을 매기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평소 그 프로그램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마침 초상화 한 점이 소개되고 있어 흥미를 느끼고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초상화 소장자가 "국공립 박물관에 기증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박물관 관계자는 떨리는 가슴으로 방송사에 전화를 걸어 소장자와 연락해 결국 기증을 받았다.
이 초상화가 바로 <허전 초상>으로 올해 이택당 물산영당으로부터 기증받아
2008년 6월21일-9월28일까지 <초상, 영원을 그리다> 전시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 작품은 연로한 유학자의 모습과 꼿꼿하고 위엄있는 성품이 적절히 표현된 수작(秀作)이다.
이번 특별전의 포스터, 도록, 현수막의 메인 이미지로 활용되기도 했다.
<허전 초상>
조선, 19세기, 비단에 채색, 136.0×71.5㎝(182.0×85.5㎝)
이택당 물산영당 기증, 경기도박물관 소장
그 두 번째 사연.
지난 2006년 정래정 선생(포은영당)으로부터 기증받은 <정몽주 초상>의 경우,
기증받을 당시 훼손이 심각해서 펴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전시는 고사하고 과연 보관이나 가능할까 싶을 정도였던 것이다.
초상화가 훼손되면 모사본을 제작하고 구본(舊本)은 태우거나 땅에 묻었던 사례와 비교해 볼 때,
그 상태로 현재까지 보관 전승되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증 후 보존처리와 모사본 제작을 마친 초상화는 몰라볼 만큼 말끔한 상태가 되었고
덕분에 <초상, 영원을 그리도> 특별전에도 전시될 수 있었다.
이 초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 중인 보물 제1170호 <정몽주 초상>보다 70여 년이나 앞선 그림이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원본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다.
후손들의 보관, 보존의 노력과 박물관의 보존처리로 소중한 문화재를 살려낸 귀한 사례이다.
지금 우리는 나 자신과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지만
옛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남기기 위해 또는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초상화를 남겼다.
금방 찍고 금방 확인할 수 있는 사진과 달리
초상화는 짧게는 5일에서 길게는 2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정성을 기울여야 했다.
옛사람들은 초상화에 무엇을 담고 무엇을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500-6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전해오고 있는 초상화 속에서
그 특별한 의미와 아름다움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 이소희, 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사
- 경기도 문화나루, 창간호,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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