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조선시대 문과백서> - 조선시대 문과방목(文科榜目) 분석

Gijuzzang Dream 2009. 3. 4. 12:53

 

 

 

 

 

 

「와그너-宋 문과방목(文科榜目) 프로젝트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지배 엘리트는 공리공론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조선시대 文科 급제자 1만4,600명 분석한 宋俊浩 교수 인터뷰

 

 

 

 

  ● 榜目이란 무엇인가

  榜目이란 과거급제자에 대한 합격자 명단이다.

  국조방목은 그 중에서도 文科 합격자만을 수록한 명단이다.

  조선시대의 榜目은 단순히 과거 합격자 명단으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조선이 어떠한 시대였고, 그 사회가 어떤 사회였으며, 그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들이

  어떤 가치관이나 인생관을 가지고 살았던가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조선시대에는 과거 시험이 끝나고 합격자가 발표되면,

  국왕(國王)의 이름으로 발급되는 합격증을 수여한다.

  그 합격증을 文科나 武科의 경우는 '홍패(紅牌)'라 했고

  생원 진사試의 경우는 '백패(白牌)'라 했으며,

  합격증을 수여하는 예식을 '방방(放榜)'이라고 했다.

 

  방방의 예식이 끝나면 합격자들이 중심이 되어 '방목(榜目)'을 편찬한다.

  방목(榜目)에는 과거 시험의 종류에 따라

  文科방목, 武科방목이 있으며 생원 진사試 방목, 雜科榜目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문과나 무과를 대과(大科)라고 했기 때문에 '大科방목'이라 불렀고,

  생원진사시 방목(榜目)은 '小科방목'이라 불렀다.

  이 小科방목을 다른 이름으로 '사마방목(司馬榜目)'이라 한다.


 

 

 

급제자 신상 카드 10萬장

 

韓美 두 老학자가 30여 년 걸쳐 연구한 조선조 500년간의 지배 엘리트 연구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이름하여 「와그너-宋 문과방목 (Wagner-宋 朝鮮文科榜目) 프로젝트」.

에드워드 와그너 前 하버드大 교수와 宋俊浩(송준호) 전북대 명예교수가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만4,600여 명의 인맥지도를 새로 만든 것이다.

 

와그너-宋 프로젝트는

조선시대 관료 임용시험이었던 文科(문과), 그 전 단계 시험인 生員(생원), 進士(진사)시험 합격자는 물론,

이들의 명부에 등장하는 친인척 등 10만여 명에 대한 출생 연도, 사망연도, 친가 · 외가 · 처가 기록,

급제자의 字(자)와 號(호), 本貫(본관), 급제자를 비롯한 친인척의 최고 관직, 거주지를

각종 자료를 통해 찾아내 완벽한 조선시대 지배 엘리트 인명록을 완성한 것이다.

두 학자의 연구결과는 내년 초(2005년)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에서 6권의 책으로 간행되며,

이 내용을 CD-ROM에 담는 작업은 한국의 동방미디어가 담당키로 했다.

 

와그너-宋 두 교수가 조선시대 지배 엘리트를 탐색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은 1967년.

조선왕조가 수립된 직후인 1392년부터 과거제가 폐지된 1894년까지

생원 · 진사시험 합격자는 4만649명, 문과 급제자는 1만4,607명이다.

그런데 합격자의 신상정보가 기록된 사마방목(司馬榜目)에는

출신지와 거주지, 친인척 관계가 명확치 않은 것이 상당수에 달했다.

 

두 교수는 문과 급제자 1만4,600명을 대상으로 개개인의 신상카드를 작성했다.

이렇게 해서 작성된 카드가 10만여 매.

이 기초자료를 가지고 해당 집안의 족보와 문집, 실록, 읍지(邑誌) 등 관련자료를 총동원하여

일일이 확인작업을 진행했다. 조선시대를 지배했던 양반들의 혼맥, 인맥구조를 통해

권력구조를 파헤치는 작업에 34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宋교수는『30여 년간 정식 연구비를 단 한번도 지원받지 못한 채 이 작업을 진행했다』고 말한다.

 

조선사회 지배계층의 인맥지도를 완성하는 데는 동방미디어 이웅근회장의 도움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두 교수는 작업 초기에 연구 결과를 전산화하면서 컴퓨터상에서 漢字가 지원되지 않아

일일이 한자를 그려서 입력해야 했다. 李회장은 자신의 회사에서 개발한 한자입력시스템을

두 교수에게 지원해 방대한 전산화 작업이 손쉽게 해결됐다.

또 태평양을 넘나드는 두 교수의 연구 성과를 컴퓨터로 주고받을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30여 년에 걸친 두 老교수의 노력에 의해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들의 신상정보가 완성되면서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는 일부 씨족이 독점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만4607명 중 200명 이상 급제자를 배출한 씨족은 12개.

전주 李씨가 844명으로 으뜸을 차지했고,

다음이 안동 權씨(358명), 파평 尹씨(338명), 남양 洪씨(322명), 안동 金씨(309명), 청주 韓씨(275명),

밀양 朴씨(258명), 광산 金씨 253명, 연안 李씨(243명), 여흥 閔씨(234명) 순이다.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특정 가문에서 대량의 급제자가 배출됐다는 점.

안동 金씨 金克孝(김극효)의 후손에서 130명, 반남 朴씨인 朴紹(박소)의 후손에서 129명,

대구 徐씨인 徐(서성)의 후손에서 120명, 풍산 洪씨인 洪麟祥(홍인상)의 후손에서 111명이 문과 급제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조선사회는 오늘의 우리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다.

과연 조선을 지배했던 통치 엘리트들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토록 질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차별의 근원은 무엇이며,

혈연 · 지연 · 학연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의 뿌리는 무엇인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전북 전주에 위치한 宋俊浩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보았다.

 

먼저 宋교수는 작업의 동반자였던 와그너 교수가 건강이 악화된 것을 아쉬워하며

그의 연구업적에 대한 소개로 말문을 열었다.

"와그너 교수는 한 논문에서 「한국 사학계는 유명 학자가 새로운 학설을 제시하면 실증적인 면에서

의심스러운 점이 있어도 그대로 수용되어 정설화(定說化)하는 경향이 있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와그너 교수는 국내 학자들처럼 기존의 정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확인과정을 거쳐 진위 여부를 가려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조선 8道를 1,000명의 관료가 통치

 

― 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조선시대 지배 엘리트는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느냐를 규명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질문에 宋교수는 『조선시대 엘리트의 실체를 규명하기 전에,

그 시대 엘리트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을 알아야 한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조선시대를 지배했던 엘리트들은 민족이나 국가 개념보다 우선하는 가치관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의관지제(衣冠之制), 다른 말로 하면 禮나 도덕, 혹은 성현지도(聖賢之道)지요.

우주 운행의 이치가 있듯이 사람의 세계에도 우주의 이치를 받들어 聖人이 마련한 이치가 있으니,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시대 지배 엘리트들의 행동규범이었습니다』

이러한 성현지도를 앞서서 익히고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士大夫였다는 것이다.

『조선이 망할 무렵 강화도에 외국 군함이 포탄을 퍼부을 때 올린 지식인들 상소를 보면

「임금께서 성현의 道를 따라 나라를 다스리면 침략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대목이 보입니다.

이것은「성현지도를 실천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그들 나름의 세계관의 반영이라고 봐야죠』

 

― 조만간 출간될 와그너-宋 프로젝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조선시대 지배 엘리트의 실체를 심층적으로 파악해 보자는 목적이었습니다』

 

― 조선시대의 지배 엘리트의 실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무엇입니까?

『관리의 수가 놀라울 만큼 적다는 점입니다.

전라도와 제주도를 통치한 관리의 수가 100여 명에 불과할 정도였어요.

서울을 제외하면 조선 8도를 통치한 일선 관리의 숫자는 1,000명이 채 안 됩니다.

소수의 관리들이 국가 살림을 이끌어 간 것이죠』

 

― 조선시대에 배출된 문과 급제자는 1만4,600여 명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을 조선사회를 대표하는 엘리트로 규정해도 될까요?

『그들이 전부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이들이 대표성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보는 데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현실적으로 이 정도의 관리들만으로 국가 통치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 공백을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지방의 명망가나 지역사회 엘리트들이 분담한 겁니다』

 

― 조선시대에 지배 엘리트층에 속하려면 어떤 자격 요건이 필요했을까요?

『조선시대는 무엇보다 개인의 혈통을 우선했습니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가문 출신이라는 혈통의 고귀성이 최고의 가치였어요.

다음으로 개인의 학문적 성과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과거급제 여부, 관직을 어디까지 지냈느냐 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조선시대 지배 엘리트로 인정받으려면 혈통 · 학문 · 科擧 · 관직 등 네 가지 조건이 요구됐어요』

 

― 조선시대의 엘리트 사회에서 혈통을 중시한 이유는?

『우리 조상들은 통치기구에 참여하여 국가 지도자로 활동한 사람, 왕이나 왕조 치하에서 벼슬한 사람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孟子(맹자) 이전부터 이어온 중국의 전통적 관념이죠.

역사를 보면 어떤 왕조를 막론하고 폭력을 동원하여 왕조가 성립되면

왕권의 정통성 확립과, 그 존재를 신성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 과정에서 왕족이나 벼슬한 사람을 귀하게 보는 전통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 귀한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을 귀족, 양반이라 부르는 겁니다.

혈통이 귀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기 위해 姓을 쓰기 시작했고,

같은 姓씨들이 한 장소에 오래 살면서 씨족집단이 생겨났어요.

세월이 흘러 씨족집단의 수가 점차 늘자 본관(本貫)이란 것을 사용하여 다른 성씨와 차별화를 시도했고,

세월이 더 흐르면 같은 本貫 속에서도

어느 마을의 어떤 가문이냐를 가름하는 제2의 본관제도가 생겨난 겁니다』

 

 

서울 거주 名門에 유리했던 과거제도

 

― 결국 조선은 「한 번 양반은 영원한 양반」이라는 식의 엄격한 신분사회였다는 설명이 되겠는데요.

조선조 500년 동안 신분제도 타파를 위한 계급혁명이나 민중해방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조선은

신분질서가 너무 엄격했고, 그 모순도 컸기 때문에 10년, 아니 1년을 지탱하기 어려운 체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년이나 왕조가 유지된 이유는 그만큼 신분제도가 뿌리깊은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요. 요즘도 누구의 몇대 손이란 사실을 따지지 않습니까?』

 

― 宋교수의 「과거제도를 통해서 본 중국과 한국」이라는 논문을 보니까

특정 씨족에서 문과 급제자가 대량 배출됐더군요.

특정 가문이 국가 요직을 독점한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중국에서는 과거 응시자를 지역적으로 안배하여 특정지역의 독점현상을 막았습니다.

이런 조치가 가능했던 이유는 황제 권한이 막강했기 때문이죠.

반면에 조선에서는 지역 안배를 위한 시도는 있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어요.

3년마다 한 차례씩 열리는 정기 과거(式年試)의 경우

지방에서 치르는 初試(초시)에는 지역안배가 고려됐습니다만,

임시로 치러지는 비정기 과거는 이것이 완전 무시된 채 서울 거주자를 대상으로 실시됐습니다.

때문에 서울, 혹은 서울 인근에 거주하는 세도 높은 가문이 유리했고, 응시 기회도 많았습니다.

이것이 특정 가문의 후예들이 대거 국가 요직에 등용된 이유라고 봐요』

 

― 宋교수 논문을 보니까 조선시대에 시행된 과거에서

정기시험인 식년시 文科는 168회, 임시 특별시험인 비정기 文科는 581회,

정기와 비정기의 비율이 22대 78로 비정기가 월등 우세합니다.

반면 중국에서는 3년에 한 번씩 정기시험만 원칙대로 시행됐습니다.

『중국의 과거제는 3년마다 치러지는 정기시험이 전부였습니다만,

조선은 기회가 날 때마다 임시 과거가 시행됐어요.

특별 시험은 나라의 경사를 지식층과 함께 기뻐하자는 뜻에서 「慶科(경과)」라고 불렀고,

유생들을 위로한다는 페스티벌 성격이 강했어요.

그것은 왕권(王權)이 집권 양반층에게 타협을 강요당했다는 증거입니다』

 

― 과거제의 본질은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널리 人材를 구해 관리로 등용시키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특정 지역, 특정 가문의 독점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과거가 100% 공정한 제도였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나름대로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봅니다.

특정 가문, 특정 지역 독식 현상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강해집니다.

제도 자체가 경색화된 결과죠. 그러나 조선시대에 발표된 어떤 규정을 봐도

「양반이 아니면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과거의 문호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고,

본인의 능력이 뛰어나면 얼마든지 급제 기회는 주어진 셈입니다.

이것이 다른 봉건제 사회와는 달랐던 특징입니다』

 

 

관리들은 실무능력에 어두웠다

 

― 그렇지만 과거 준비를 위해서는 평균 20년의 수학기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오랜 기간 비생산적인 학문에 매달리기 위해서는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중요한 변수가 됩니다. 경제적 富가 당락을 좌우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법률적 제약이 아닌, 현실적 제약으로 봐야죠.

조선시대의 과거에서 현실적 제약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 또 한 가지 의문 나는 것은 과거 급제 성적이 아무리 우수하다 해도

혈통이 뛰어나지 않은 사람이 국가 요직에 등용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국가 요직일수록 혈통의 중요성은 최우선의 고려사항이었습니다.

科擧 성적이 요직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았어요』

 

― 조선시대에는 관직의 수에 비해 과거 급제자들이 너무 많아

과거에 급제하고도 보직을 받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는 주장도 있더군요.

그렇다면 선발 인원을 줄이거나 시험 횟수를 줄여 인사 적체를 조정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조선시대의 생원 · 진사시는 관직 등용과는 직접 관련이 없었고, 문과 급제자는 관직에 등용됐습니다.

조선 500년 동안 배출된 문과 급제자 총원은 1만4,600여 명, 1년 평균 30명이 채 안됩니다.

이번 연구 과정에서 조사해 보니 문과에 급제하고도 관직을 받지 못한 사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武科는 사정이 전혀 달랐어요. 조선시대 武科 급제자는 18만 명 정도 되는데,

이들은 급제하고도 관직에 오르지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 科擧는 국가 통치를 담당하는 지도자, 관료를 등용하는 장치였습니다.

그런데 宋교수께서 발표한 「조선 후기의 과거제도」란 논문을 보면 

「조선시대의 과거는 유교 경전과 중국 역사에 관한 지식 및 그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詩文(시문)의 창작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암송하는 능력이 뛰어난 선비들이

정치 실무나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국가 운영이 가능했을까요?

『조선시대 관리들이 실무능력이 뛰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올바른 사고일 것입니다.

이 문제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조선시대로 사고의 틀을 전환해야 합니다.

당시 국가 지도부는 물론,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은

修身(수신) 齊家(제가) 治國(치국) 平天下(평천하)의 길이 유교 경전에 담겨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배우고 실천하면 세상사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 외에는

현실 돌아가는 것을 몰랐다고 봐야죠』

 

― 조선의 지도자들이 유교 경전을 달달 외워서 국가가 부강해지고 자주독립을 실현하여

국리민복(國利民福)을 달성했다면 문제는 달랐겠지요. 그러나 조선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유교밖에 몰랐다」고 해서 그 시대 지도자들이 역사의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 당시 우리는 너무 폐쇄적인 삶을 살았고, 밖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전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처럼 온실 속에서 산 민족이 없어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제외하고 안팎으로 200년은 너무나 평화가 난만해서 유교 경전을 암송하고,

그 가르침대로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었다고 믿었던 겁니다』

 

 

인간 차별이 심했던 사회

 

― 요즘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 인사를 보면 地緣(지연) · 學緣(학연) · 血緣(혈연)에 크게 좌우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유산으로 봐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그 중에서도 혈연이 가장 중요시됐어요』

 

― 혈통이 중시된 사회는 다른 뜻으로 말하면 인간 차별이 대단히 심했다는 뜻 아닙니까?

『조선시대처럼 인간 차별이 심했던 사회도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조선과 동시대의 중국에서는 상인들도 科擧 응시는 물론, 저술활동도 활발히 하는 등

선비들보다 출세길이 빠른 사례가 많았습니다. 중국이 조선과 달리 개방사회로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끝없는 이민족의 침략으로 사람이 죽고, 나라를 오랑캐에 빼앗기는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유교 경전만 가지고 세상일이 다 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거죠.

그 결과 중국은 서자 차별도 없고, 本貫 제도도 없앴고, 상인 천시 사고방식도 사라졌습니다.

사회 각 분야에서 외부 침략에 대응을 하다 보니 개방된 것이죠.

조선은 이런 역사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할 때까지 오로지 유교 경전에 매달린 겁니다』

 

― 이번 와그너-宋 프로젝트는 문과 급제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 특징입니다.

武科 급제자를 연구 대상에서 제외한 이유는?

『文科에 비해 武科는 급제자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나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요.

저와 와그너 교수가 각종 史料를 수집 분석해서 武科 급제자 1만명에 대한 인명사전을 만든 바 있습니다. 이것은 전체 급제자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 연구한 결과 조선시대 武科 급제자는 약 18만명,

그러니까 문과 급제자의 13배나 됩니다. 임진왜란 중에는 1만5,000명을 한꺼번에 뽑은 적도 있어요』

 

― 宋교수께서 한국사 시민강좌에 발표한 「나의 책을 말한다」라는 글을 보니

「조선시대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제나 양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사실을 수차 강조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부 학자들이 이 두 가지를 무시하니까 안타까워서 그렇게 쓴 겁니다.

조선을 지배한 것은 양반이고, 국가 고위관리 선발제도가 과거였습니다.

얼마 전부터 우리 학계에 「민중이 주역이었지 양반이 뭐가 중요한가」하는 주장들이 제기됐고,

나아가 양반 연구자들에게 비난과 공격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반을 도외시한 조선의 역사는 존립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 그렇다면 양반이란 무엇이며, 어떤 사람을 양반이라고 하는지 개념부터 설명해 주십시오.

『양반이란 귀한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

다시 말하면 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한 사람이나 그들의 후손을 말합니다』

 

 

돈, 권력으로 안 되는 그 무엇이 있었다

 

― 조선을 대표하는 것이 양반문화 내지는 선비정신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한마디로 정의하신다면….

『양반이나 선비란 지위는 아무리 강한 국왕의 권한이나 황금으로도 만들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임진왜란 이후 신분질서가 문란해져 하층민들이 돈을 주고 족보를 사서 양반으로

신분상승이 가능했다고 주장하는데,

어떤 자료를 봐도 이런 가설을 사실이라고 뒷받침하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양반이나 선비가 아닌 사람을 양반이나 선비로 만들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돈이나 권력으로도 안 되는 그 무엇인가가 선비정신이요, 양반문화였던 겁니다』

 

― 조선의 양반에 접근하다 보면 과거제와, 씨족, 족보라는 필터를 통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씨족제도는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아직도 씨족사회적 속성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씨족제도의 폐단을 솔직히 인정하고, 씨족제도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민주주의를 건전하게 살리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겁니다.

씨족제도의 폐단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씨족제도의 장점,

이를테면 내 조상을 알기 위한 노력, 부모를 섬기는 노력까지 버릴 필요는 없지요』

 

― 와그너-宋 프로젝트는 조선시대를 이끈 「지배자의 역사」를 밝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을 이끌어 온 지배 엘리트가 중국, 일본에 비해 어떤 특성을 갖고 있다고 보십니까?

『일본은 武士계급이 권력을 독점했고, 중국은 조선보다 개방적인 사회였습니다.

지배 엘리트를 선발하는 科擧로 시야를 좁힌다면,  科擧는 그 관문을 통과하기가 지극히 어려웠지만,

모든 지식층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와그너 교수는 「과거가 선비들에게 기회를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즉, 과거는 성공의 사다리였던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제가 사회 안정에도 이바지했다고 봐요』

 

― 우리나라는 외국에 비해 士農工商의 위계질서가 엄격하고

다른 직업에 비해 남을 다스리고 가르치는 직업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대 중국에서 생겨난 전통사상의 여파입니다. 孟子에도 나오는 얘기입니다만

노동의 분업이란 측면에서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業으로 삼는 정신 노동자를 귀하게 본 것이죠.

사회나 국가의 존립과 운영을 위해서는 「士」 계층이 農工商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크고 소중한 공헌을

하고 있다는 사회 공통의 인식이 있었던 겁니다』

 

― 조선시대에는 양반 지위의 유지 계승을 위해 혼맥(婚脈)이나 외가(外家)를 이용하는 경우가 상당수

발견됩니다. 조선 후기에 안동 金씨 세도정치가 가능했던 것은 안동 金씨 세력이 강했던 이유도 있지만,

이들과 혼맥을 이룬 潘南(반남) 朴씨, 대구 徐씨와 같은 세력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올바른 지적입니다. 중앙 정계는 말할 것도 없고 지방에서도 양반 집안의 혼맥이 서로 얽히고 설켜

끼리끼리 안 걸리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요.

이런 신분적 배타성이야말로 당연히 타파됐어야 할 폐습입니다』

 

― 조선시대의 과거제나 양반제도, 지배계급의 특성을 규명하다 보면

국왕의 권한 문제와 연결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중국의 황제와 비교할 때 조선의 국왕은 과연 왕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왕권이 미약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양반들의 왕권에 대한 견제 제도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죠.

예를 들면 홍문관이나 사간원 같은 국가 요직의 관리를 임명할 때 집권 양반층이 국왕의 결정을

일일이 체크를 하고 반대했습니다. 그보다 더 엄격한 통제장치는 이념상의 견제였어요.

「그것은 성현의 예법에 어긋납니다」라고 말하면 국왕도 어쩔 수 없이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유교에서는 天子나 국왕은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널리 구하여

그들과 더불어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말하자면 통치권은 황제나 국왕에게 주어졌지만, 통치권의 행사는 신하들과 분담해야 한다는 뜻이죠』

 

― 그렇게 모순이 많은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한 왕조가 500년이나 유지될 수 있었다고 보십니까?

『짐 팔레라는 학자는 조선이 500년이나 유지된 이유는 첫째 상호견제가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이며,

둘째는 급진적인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임시방편으로 민심을 달랬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조선의 모든 계층, 모든 지역과 단위마다 「어른」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기본 질서를 지키는 것이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있었고,

그 어른을 섬기는 것이 생활 윤리로 존재했기 때문에

조선은 소수의 관리(官吏)들을 가지고도 500년이나 왕조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봐요』

 

― 조선시대를 관통한 유교, 즉 性理學(성리학) 朱子學(주자학)이

우리 사회에 준 긍정적 영향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복잡한 이론체계를 떠나 주자학, 유교가 우리 사회에 끼친 긍정적 영향은

질서 유지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입니다.

조선 500년을 평화가 난만한 시대로 만든 것은 왕권이 강해서도 아니요,

집권 양반층의 통치력이 뛰어났기 때문도 아닙니다.

 비록 그 이념이 수백 년 지속되면서 경색으로 인한 폐단이 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자학의 긍정적인 면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 과거제가 세계의 보편적인 관리등용 방식이 아니라 유교 국가에서만 운영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과거제는 세습 귀족이 독점하던 정치운영권을 광범위하게 분담하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인류사에 획기적인 제도였습니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국가운영은 국왕이나 귀족의 독점하에 세습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입니다.

유교문화권에서는 과거제를 통해 지배 엘리트를 공개 채용하여 국가운영의 문호를 개방했기 때문에

사회 전반에 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겁니다. 세계의 학계는 침략전쟁을 통한 역사발전이 아니라,

상호 인정하에 사대교린으로 평화를 정착시킴으로써 인류의 이상적 패턴을 보여준 유교적 질서를

높게 평가하는 추세로 나가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사관이라든가 민중주의자들, 또 일부 언론인이나 군인들은

유교 · 양반 · 사대주의가 나라를 망친 주범(主犯)이라고 주장합니다.

『유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했던 조선이 나라의 멸망으로 귀결됐으니 누군가는 그 책임을 져야겠죠.

유교와 양반은 비난을 받아도 싸지만 事大주의는 의미가 다릅니다.

지식인들은 뭐도 모르면서 事大를 나쁜 뜻으로만 해석을 하는데,

사대란 국경이나 민족을 초월한 원리 원칙이었습니다.

유교 관념 속에는 국가나 민족이라는 개념이 희박했어요.

다시 말하면 聖賢之道에는 국경이 없으며, 성현지도가 통하는 곳까지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봤던 겁니다』

 

― 조선의 지도층은 사대주의라는 관점에서 국경이 없다고 생각했던 겁니까?

『茶山 정약용이 글을 쓰기를 「일본에서 오는 책을 보니 그들이 경서에 조예가 깊다.

聖賢의 책을 이렇게 깊이 공부했으니 함부로 남의 나라를 쳐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어요.

茶山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지배 엘리트들은 이러한 성현지도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 천하의 진리라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건국된 후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국이 망해 오랑캐의 나라가 됐으니 우리가 성현지도의 전통을 이어간다」 하여

小中華(소중화)를 주장한 겁니다』

 

 

전쟁이 신분제도 더 강화시켜

 

― 조선시대의 지도층들은 양반의 자손들만 글공부를 시켰지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보통 교육을

확대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그 결과 문맹(文盲)이 심해져 자생적인 발전세력이 만들어지지 못했던 것 아닐까요?

『유교사회라 해서 모든 구성원들이 논어나 맹자를 공부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수의 엘리트들만 학문세계에 뛰어들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일반 백성들이 글공부를 못했어도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와 사이좋게 지내고

어른을 섬기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는 생활윤리는 광범위하게 퍼졌습니다』

 

― 그렇게 유교 전통이 뿌리 깊었는데도 불구하고 이해가 안 가는 점이 많습니다.

유교가 뭔지도 모르고 자란 일본 사람들은 오늘날 예의 바르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유교적 성향이 몸에 익은 반면,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 아닙니까?

『우리나라에서 이어져 온 윤리는 등급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부모에게 인사하는 것과 낯선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이 다릅니다.

특정한 관계에 특정한 윤리가 적용된 겁니다. 그 결과 같은 혈족이나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는 친절하지만

그 범위를 벗어난 사람에게는 거부감을 가집니다.

반면 일본은 씨족이라는 배타적 혈족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똑같이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사고가 강했어요』

 

― 서양의 사회 지도층의 불문율은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책임도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 사고 속에도 이런 전통이 있었다고 보십니까?

『소설가 이문구씨의 「관촌수필」이란 작품을 보면 동네 어른이 그 사회의 복잡다단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는 모습이 나옵니다. 동네 유지, 지역사회 지도자, 국가 지배 엘리트들은

서양의 사회 지도층 이상으로 제반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의무감으로 실천에 앞장섰습니다.

이런 정신이 있었기에 조선이 500년을 지탱할 수 있었던 거죠』

 

― 宋교수께서 발표한 논문을 보면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신분질서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신분제도가 강화됐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학설과 상당히 다른 주장입니다.

『壬亂(임진왜란)이나 胡亂(호란)으로 인한 파괴나 타격이 적지 않았지만

전쟁이 사회의 주역이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양란(兩亂) 이후 사람들이 각지로 흩어졌는데,

흩어진 사람들이 족보를 만들어 「내가 누구의 자손이다」라는 것을 더욱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혈통의 중요성이 사회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제1조건이었기 때문입니다』

 

― 그간 宋교수와 와그너 교수는 「민중의 시대에 양반을 연구하는 보수 반동주의자」라는

비난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나보고 반동 보수주의자니 식민지 사관이라고 비판하는데, 저는 그런 학자들에게 이렇게 반문합니다.

내 연구 논문의 어느 부분이 사실과 어떻게 다르다고 학문적 근거를 밝혀달라는 겁니다.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제 논문을 보고 그런 지적을 하는 학자는 없었습니다』

 

 

현장․ 현물을 보면 全體가 보인다

 

― 북한의 지배구조를 연구한 학자들은 金日成 · 金正日 父子의 정치적 특성은

제왕적 통치 형태라고 말합니다.

조선시대 제왕적 통치, 유교적 통치 시스템을 북한이 답습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북한의 통치 시스템을 억지로 유교와 관련시키자면

유교적 통치의 나쁜 면, 즉「자비로운 독재」를 이어받았다고 봐요.

독재를 통해 생살여탈권을 쥔 상황에서 어버이로서 자비를 베푸는 방식입니다.

북한에선 지도자를「어버이 수령」이라고 표현하는데,

국가 지도자를 어버이로 여기는 개념은 유교에서 나온 겁니다』

 

― 문과방목 프로젝트 연구에 30년이 더 걸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가치가 있는 일이었습니까?

『저는 해방 전부터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고

일찍부터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교양을 받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될 수 있으면 현장에서 배우고, 현장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또 하나는 실제 자료를 통해서 연구를 하는 것입니다. 현장, 현물을 보면 전체가 보이죠』

 

 

●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는 누구인가?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 Wagner) 교수는

美 하버드大에서 학부 과정을 마친 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했고,

1959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논문 제목은 「李朝士禍(이조사화)」.

그의 논문은 1974년에 하버드大에서 「李朝士禍」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저서는 조선시대 사화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필독서로 인정받고 있다.

박사학위를 마친 와그너 교수는 하버드大 東아시아 역사과의 조교수로 임명되어

한국어와 한국사 강의를 담당했다. 미국 내 대학에서 한국학 강좌가 정식 개설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얼마 후에는 부인 김남희여사가 합류하여 한국어 강좌를 담당했다.

당시 하버드大 東아시아 역사과에는 중국학에 페어뱅크, 일본학에 라이샤워라는 두 석학(碩學)을

수장(首長)으로 하는 여러 교수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와그너 교수는 35년 넘게 하버드大에서 한국학의 개척과 발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그가 이끄는 한국학 강좌와, 그의 노력으로 축적된 한국학 자료실이

同 분야에 있어 세계적인 本山으로 그 지위를 굳히는 데까지 이르렀다.

 

와그너 교수는 국내에서는 李基白 교수의 「한국사新論」을 영역(英譯)한 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한국사 관련 서적으로는 외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텍스트라고 한다.

와그너 교수의 학문 자세가 얼마나 치밀한가 하는 점은 이 영역본에 붙여진 색인 편에 잘 나타나 있다.

출판사측에서 색인을 작성하여 교정을 봐달라는 취지에서 와그너 교수에게 넘겼는데,

색인 원고가 돌아오기까지 1년 이상이 걸렸다고 한다.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여 진정한 색인이 될 수 있도록 항목 하나하나를 체계적으로 짜고

꼼꼼하게 엮어가느라 그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와그너 교수의 논문 대부분은 조선시대의 과거제도, 사회신분제도, 씨족제도,

그리고 사림(士林)에 관한 문제, 잡과(雜科) 중인계급에 대한 문제들을 다룬 것이다.

 

宋俊浩교수는『와그너 교수의 논문 어느 것을 보더라도 기본 史料에 대한 검토의 치밀성,

주제를 보다 넓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송준호교수는, 전북대 사학과 교수, 하버드대 객원교수(하버드 옌칭연구소), 하버드대 연구교수,

원광대 사학과 교수 역임. 전북대 명예교수. 저서로 「조선 사회사 연구」 등 다수.

- 김용삼 月刊朝鮮 부장대우 (dragon03@chosun.com)

- 월간조선 2004년 4월호

 

 

 

 

 

 

조선시대 문과백서》上 / 2008년/ 도서출판 삼우반

 

 

《조선시대 문과백서》개요와 편저자

 
이 책의 편저자인 송준호(宋俊浩) 교수는 평생의 지우이자 미국 내 한국학 연구의 권위인

하버드 대학의 와그너(Edward W. Wagner) 교수와 공동으로

모든 문과 급제자와 생원진사시(生員進仕試) 합격자 및 그 친인척 등 10만여 명의

생몰 연도, 본관, 출신지, 거주지, 최고 관직, 인척 관계 등의 정보를 종합하는

“와그너-송 조선문과방목(Wagner-宋 朝鮮文科榜目)”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1966년부터 30여 년간 진행된 이 작업은 그러나 그 완성을 앞두고

와그너 교수가 2001년에, 그리고 송준호 교수가 2003년에 각기 타계함으로써 일시 중단되었다. 
 

《조선시대 문과백서》는 송준호 교수의 3남인 전주대 송만오(宋萬午) 인문과학연구소 교수가

그 유업()을 이어 “와그너-송 조선문과방목”의 후속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부친 송준호 교수가 평생에 걸쳐 정리한 역대 문과 급제자 14,607명의

성명과 본관(本貫), 거주지, 부명(父名) 등 신상 정보를 제시하고

748회 문과시험 각각에 대해 그 실시 시기와 실시 배경, 출제 문제 및 관련 사건을 해설한 노작이다.

 

송만오 교수가 작업을 이어받았을 때 합격자에 대한 기본 정보는 모두 입력이 끝난 상태였다.

그러나 748회의 시험이 언제, 어떻게 실시됐는지 등을 소개하는 설명문은 50개 정도만 완성돼 있었다.

송 교수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타계한 두 교수의 원문을 최대한 살리면서 작업을 마무리했다.

고 와그너 교수의 부인인 김남희 여사는 하버드대 옌칭연구소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도록

도움을 줬다. 아들은 책의 첫 장에 ‘이 책을 와그너 교수님과 아버님의 영전에 바칩니다’라고 썼다.

학계는 이 책을 조선의 엘리트 계층 연구에 크게 기여한 저작으로 평가한다.

급제자들의 신상 기록뿐 아니라 광해군 8년 때 시험감독관이 문제를 지인들에게 사전 유출해

물의를 빚었던 일, 인조 4년에 시험감독관이 부정한 방법으로 친지들을 합격시켜

급제자 전원의 합격이 취소된 일 등 과거시험에 얽힌 일화들에 대한 기술도 눈길을 끈다.

 

방대한 분량의 “와그너-송 조선문과방목”의 축쇄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조선시대 문과백서》는

상/중/하 전3권으로 출간될 예정이며, 《조선시대 문과백서》상권에는 (관련 기록이 남아 있는)

태조 2년(1393)부터 인조 27년(1649)까지 250여 년 동안 치러진 300회 시험에 대한 해설과

급제자 5,729명의 신상 정보를 수록하고 있다.

 


이 책의 의의: 조선조 지배층 연구의 기본 자료이자 아이디어의 보고

 

지난해 7월 로스쿨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을 때,

많은 언론들은 한국 사회에서 정부 관리의 충원 방식이 고려 광종 9년(958)에 과거제도가 도입된 이래

1,000년만에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과거제도는 정부 관리를 출신 신분이 아니라 실력을 기준으로 등용한다는 점에서

전근대 사회에서 시행된 가장 획기적인 제도로 평가받고 있으며,

세계사적으로 중국 및 베트남과 더불어 한국만이 시행했다는 점에서 한국사의 자랑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과는 대조적으로 고려시대는 물론이고

조선시대에 대해서도 과거제도 및 그 시행과 결과에 대한 연구는

의외로 활발하지 못한 것이 우리 학계의 현실이라고 한다.

하물며 전문 연구자들이 아닌 일반 독자들의 경우에는 과거시험이 어떻게 시행되었고,

시험에서는 어떤 문제가 출제되었으며, 어떠한 사람들이 급제하였고,

또 그 과정에서 어떠한 일화들이 일어났는지 등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책 《조선시대 문과백서》 전3권은

태조(太祖) 원년(1392)에 처음 시행되어 고종(高宗) 31년(1894)에 폐지될 때까지

조선시대 500년간에 걸쳐 748회가 실시되어 총 14,607명의 급제자를 배출한 문과 과거시험에 대한

각종 정보와 일화를 담고 있다.

748회 실시된 문과 시험이 매 시험별로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배경에서 치러졌으며,

어떠한 문제가 출제되었고, 어떠한 출신 배경의 사람들이 선발되었고,

또 시험이 치러지는 과정에서 어떠한 주목할 만한 사건들이 일어났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산재해 있는 개별적인 정보나 자료를 하나의 기준에 따라 총망라하여 편찬하는 작업은

그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만,

그 결과로 의외의 사실이나 의미가 밝혀지고 새로운 쟁점이 부각되기도 한다.

조선시대 500년간에 걸쳐 문과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인물을 종합 정리한 이 책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우선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문과 급제자 명단은 단순한 합격자 명단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와그너-송 조선문과방목”의 자료를 토대로 이 책에 수록된 명단에는

급제자의 성명과 본관, 거주지 및 父名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와그너 교수와 송준호 교수는 평생에 걸쳐 추진한 작업,

즉 급제자 개개인에 대해 일일이 기존 사료에서 잘못된 부분이나 빠진 부분을 바로잡고 찾아내 채우고

일련번호를 매긴 업적의 산물이다.

그 결과 문과 급제자들 가운데 동명이인(同名異人) 여부를 바로 확인할 수 있음은 물론,

두 번 이상 합격한 급제자들, 급제자들의 동기생 관계 및 지역적 혈연적 출신 배경 등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요컨대 이 책의 문과 급제자 명단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지배 계층의 인맥 지도를 정밀하게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 점에서 이 책은 조선조 지배층 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자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전문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일반 독자들의 경우에도 이 책은 대단히 흥미로운 독서 대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명문가를 자부하면서도 자기 집안의 문과 급제자가 누가 있으며,

몇 명이나 되는지도 모르는 경우라면 이 책을 통해 그러한 의문을 해소할 수가 있으며,

그 조상이 당대에 어디에 거주하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도 새롭게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보학(譜學)적인 관심과는 별도로 이 책의 매 시험별 해설만 읽는 것으로도

‘문과’시험이라는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조망하는 새로운 경험을 만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책은 전문 연구자들에게는 새로운 연구 주제를 착안하는 데,

그리고 일반 독자들에게는 역사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본다.

 


정기 시험보다 부정기 시험이 훨씬 많았다! 도대체 왜?

 
많은 자료를 종합하면 의외의 새로운 쟁점이 부각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이 책은 조선조 500년간에 걸쳐 치러진 문과 관련 정보를 총망라하고 있는 만큼

그 활용에 따라 앞으로 여러 가지 쟁점이 제기될 소지가 다분하다.

여기서는 이 책에 의거하여 새롭게 검토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중요한 한 가지 문제를

조선시대 과거제도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소개하기로 한다.

조선시대의 과거에는 문과(文科, 혹은 大科) 외에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혹은 小科, 監試, 司馬試), 무과(武科), 잡과(雜科)의 네 종류가 있었고,

정기시(定期試)와 부정기시(不定期試)의 구분이 있었다.

정기시는 3년마다 한 번씩 실시하는 식년시만이 있었으며,

이 때 생원진사시, 문과, 무과, 잡과가 개설되었다.

그 중 문과의 예비 시험 성격인 생원진사시는 초시(初試), 복시(覆試, 혹은 會試) 두 단계로,

문과는 초시, 복시, 전시(殿試)의 세 단계로 시험을 치렀다.

한편 이 책의 본문에 자주 보이는 별시(別試)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인재의 등용이 필요한 경우에 부정기적으로 실시된 특별 과거를 말한다.

세자의 탄생 · 입학 · 관례 · 책봉, 임금의 친경(親耕), 부태묘(附太廟), 명나라 황제의 등극,

명 황태자의 탄생과 책봉 등의 경우에 실시하였으나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빈번하게 실시되기에 이른다.

식년시와 달리 문무과만 열고 생원진사시와 잡과는 개설하지 않았으며,

초시와 전시 두 단계의 시험에 의하여 급락(及落)을 정하였다.

별시는 또 넓은 의미로 식년시 이외의 모든 부정기시를 총칭하기도 하는데,

국왕의 즉위나 30년 등극을 기념한 증광시(增廣試)나

기타 알성시(謁聖試), 정시(庭試), 춘당대시(春塘臺試) 등이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과거, 특히 문과에서는

부정기시인 각종 별시가 정기시인 식년시에 비해 빈번하게 설행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총 748회의 문과가 치러져 14,607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그중 식년시 문과는 160여 회 실시되어 6,000여 명의 급제자를 배출한 반면에,

각종 별시는 580여 회 실시되어 8,500여 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문과 실시 회수에 있어 정규 시험이 약 22%, 비정규 시험이 약 78%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급제자 수에서도 비정규 시험의 급제자가 2,500여 명 더 많은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부정기시가 빈번하게 치러진 점은 중국의 경우와 비교해 대조적이다.

명청(明淸)대 중국에서도 과거(조선의 문과에 해당하는 진사과)는 3년에 한 번씩이라는

원칙 하에 운영되었다. 그런데 명대의 경우 치세 270여 년(1368∼1644) 동안 진사과가 총 90회

실시되었지만, 비정규 진사과 설행은 단 1회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이러한 각종 별시는 어느 정도 설행의 예측이 가능한 증광시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지방 유생의 참여가 거의 불가능하거나 극히 어렵게 운영되었다.

사전에 충분한 예고 기간도 없이, 그리고 각 지역별로 실시하는 초시를 생략한 채

처음부터 서울에서 한두 차례의 시험으로 급제자를 선발하였기 때문이다.

원래 각종 별시는 국가에 크고 작은 경사가 있을 때마다

그 경사를 기념해 유생들을 위열(慰悅)한다는 명목으로 실시하는 이른바 ‘경과(慶科)’였다.

그런데 그 설행 배경에는 조정(朝廷) 기구를 통한 기존 관료들의 압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즉 문과의 실제 운영은 서울과 인근 지역에 기반을 둔 기득권 양반층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각종 별시가 거의 예외없이 그런 정치적 사회적 배경에서 설행되었다는 사실을

바로 이 책의 매 시험별 해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부정기 시험이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은

왕권(王權)이냐 신권(臣權)이냐 하는 오래된 문제와 관련하여 조선시대 국왕의 통치권이

양반관료층의 견제 하에서 대체로 허약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조선시대 문과백서》에는 프로젝트의 방대한 내용 중

748회의 과거가 언제, 어떻게 실시됐는지, 어떤 부정행위가 있었고 어떻게 처벌하거나 구제했는지

등에 대한 설명문과 문과시험 합격자 1만4607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출판사 측은 프로젝트 전체 내용을 CD롬으로 만들 예정이다.
- 2008년 4월, 출판사 서평에서



 

 

 

 


신참례(新參禮) - 조선시대 신입관리 신고식

     : http://blog.daum.net/gijuzzang/7605808

 

● 성균관(成均館)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353



● 반촌(泮村) - '서울의 게토(ghetto)'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778


● 조선시대 신고식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272  


● 대사례 - 영조 19년(1743) : http://blog.daum.net/gijuzzang/4338430

 

● 고문서 - 과문(科文)=시권(試卷)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