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최초, 100 년 전 흉부외과 기록 발견
이재명의 칼에 찔린 이완용이 첫 환자
‘대한의원’ 진료 후 감정서 발행
2009년은 이재명 의사(義士)의 ‘이완용 살해 미수 사건’이 있은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09년 이 지사의 칼에 찔린 이완용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가까스로 살아났는데, 당시 이완용이 대한의원 의사들에게 진료받은 기록이 필자에 의해 처음 공개됐다. 대한의원 의사가 재판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감정서는 국내 최초의 흉부외과 진료기록이다.
대한의원이 발행한 이완용 상해감정서 (원문 5장) 1909년 12월22일 오전 11시,
경성 종현 천주교회당(지금의 명동성당) 앞.
20대 초반의 한 청년이 긴장된 표정으로 교회당 근처를 배회하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11시30분경, 대한제국의 고관대작으로 보이는 인물이 인력거를 타고 황급히 천주교회당을 빠져나왔다. 인력거 앞뒤로는 무장 경관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호위하고 있었다.
인력거가 천주교회당의 언덕길을 내려와 바로 청년의 앞을 지나가려는 순간, 청년이 갑자기 비수를 꺼내 들고 인력거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를 제지하려던 인력거꾼은 청년의 칼을 맞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곧이어 청년은 깜짝 놀라 몸을 숙이는 고관의 왼쪽 어깨를 찔렀다.
어깨를 찔리면서 부상한 고관이 중심을 잃고 인력거에서 굴러 떨어지자
자객은 재차 그를 공격해 오른쪽 등을 칼로 찔렀다.
주변은 순식간에 유혈이 낭자한 피바다가 됐다.
그것도 한순간, 자객 청년은 고관을 경호하던 호위경관의 장검에 허벅지를 찔려
현장에서 체포됐다.
엇갈린 생과 사
당시 칼을 맞은 고관대작의 이름은
대한제국의 학부대신이자 을사오적의 대표 격인 이완용.
그는 1905년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게 한 을사조약에
고종 대신 도장을 찍은 원흉 5인 중 한 사람이었다.
‘이완용 암살미수 사건’으로 불리는 이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이재명(1888~1910 · 일명 수길) 지사. 당시 20대 초반의 청년 이재명은
이듬해인 1910년 9월13일 일제에 의해 사형을 당했다.
이재명은 이완용을 찌른 후 그가 혼수상태에 빠진 것을 확인하고
암살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완용은 많은 출혈로 상태가 중했으나 생명을 유지한 채 서울 옥인동 집으로
옮겨졌다. 연락을 받고 한성병원의 일본인 의사가 급히 도착했고,
이어서 당시 최고의 의료기관이던 대한의원 원장 기쿠치 쓰네사부로(菊池常三郞)가 두 명의 의사와 두 명의 간호원을 데리고 달려왔다.
궁전 전의(典醫) 두 명도 도착했다.
이완용은 밤새 이들 의료진의 치료를 받아 고비를 넘긴 다음,
이튿날 대한의원으로 옮겨져 오후 3시50분부터 50분 정도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고 이완용은 대한의원 홍화당 제5호실에 입원했다.
(현재 서울 종로구 연건동 소재 서울대학교병원 시계탑 건물 2층)
이후 이완용은 순조롭게 회복되면서 입원한 지 33일 만에 혼자 보행이 가능했고,
53일이 지난 1910년 2월14일에 퇴원할 수 있게 됐다.
한편 이재명은 ‘이완용 암살미수 사건’ 직후 현장에서 체포돼
인근 구리개(지금의 을지로)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과 심문 과정을 거친 뒤
이듬해인 1910년 1월29일 재판에 공식 기소됐다.
당시는 이미 대한제국의 사법권이 일본에 넘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재판은 통역이 배석한 가운데 일본인 재판관에 의해 진행됐다.
이재명은 재판 과정 내내 기개를 잃지 않고 거사의 정당성을 항변하며
의연한 모습을 보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열린 몇 차례 공판 결과 이재명은
1910년 5월18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어 7월20일 열린 2심에서도 사형이 선고됐고
8월13일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후
9월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재명의 삶과 죽음
문제는 오늘날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義士)의 이름뿐 아니라
이완용이 칼을 맞고 구사일생으로 되살아난 사연을 아는 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스물둘의 젊은 나이로 꽃다운 삶을 마친 지사 이재명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실 이재명에 대해선 정확하게 알려진 자료가 거의 없다.
고아로 가난한 양부 밑에서 자라 동향의 여자와 결혼은 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후손이 없다는 점을 보면 결혼에 대해서도 의문점이 남는다.
출생년도조차 정확하지 않아, 일반적으로는 1888년 4월8일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1886년 또는 1890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현재 명동성당 앞 언덕길 밑에 설치된 이재명 의사 표지석에도 출생년도가 1890년으로 적혀 있다. 지금껏 학계의 연구로 검증된 그의 이력만 살펴보면 대충 이렇다. 평안북도 선천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 부친을 잃고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후 재가한 모친을 따라 계부 밑에서 지냈으나 모친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계부 밑을 떠나 한동안 남의 집 사환 노릇을 하고 살았다. 16세 되던 해(1904년)그는 미국노동이민사의 하와이 노동 이민자 모집에 지원해 그 후에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자로 생활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그는
도산 안창호가 회장으로 있던 ‘한인공립협회’에 회원으로 가입했으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을 벌여나갔다.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로 파견됐던 이준 열사의 순국 소식을 접한 그는
비분강개한 나머지 결국 매국노를 숙청하기로 결심하고 그해 가을 급거 귀국한다.
이후 동지를 규합하며 기회를 엿보던 그는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시도했지만
그에 앞서 10월26일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가 처단되자 11월 하순경 목표를 바꿔 평양에서 동지들과 합세해 이완용, 이용구 등을 처단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이때 이재명의 동지들 중에는 당시 대한의원 의학원(경성의전의 전신) 학생이던
김용문과 오복원도 포함돼 있었다.
이재명은 12월12일 상경해 이미 한성에 와 있던 김용문, 이동수, 김병록 등과 함께
거사 기회를 엿보던 중 이완용이 12월22일 오전 종현 천주교회당에 나타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미리 가 기다리다 거사를 실행에 옮겼다.
1962년 뒤늦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지만
안중근 의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를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올해는 그가 거사를 실행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완용의 상처와 감정서
필자는 이재명 의사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밝혀나가던 중
우리 의학사에서 귀중하게 취급되어야 할 의학적 기록을 찾아냈다.
이재명의 칼에 찔린 이완용의 흉부외과적 진료와 치료 기록이 그것이다.
정확하게는 이재명의 재판을 위해 당시 대한의원 의사가 작성해 법원에 제출한
‘상해 감정서’다.
대한의원의 의관이던 스즈키(鈴木講之助)에 의해 작성된 감정서의 내용은
한국사 최초의 흉부외과 관련 기술이다.
한자와 일본어로 작성된 감정서를 번역하면 아래와 같은데,
이 감정서가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 이완용의 상처가 어떠했으며, 어떻게 치료됐는지가 밝혀진 것도 최초다.
감정서 (鑑定書)
이완용을 칼로 찌른 이재명 의사(義士).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53세
명치 42년 12월22일 이완용의 창상에 관하여
경성지방재판소 검사 이토(伊藤德順)에 의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감정하도록 명을 받아
1. 창상의 위치 및 심천, 2. 흉기의 종류,
3. 창상의 경과,
4. 예후의 양부를 감정한 바는 다음과 같다.
1. 창상의 위치 및 깊이(深淺)
(갑) 좌견갑골 내측 상부의 자창
폭 7 cm 깊이 6 cm, 제2, 제3 늑간을 자통하면서 제2 늑골의 하연을 잘라 늑간동맥을 절단하여 과다 출혈을 일으키고 또한 폐를 손상해 창공으로부터 출혈 및 호흡에 수반된 공기 출입이 있었다.
(을) 오른쪽 등(右背) 제11 늑골 견갑연부(肩胛緣部)에 있는 자창
폭 3 cm 깊이 6 cm, 다행히도 신장의 손상은 없었다.
(병) 오른쪽 등(右背) 제12 흉추에서 우방으로 4 cm 떨어진 곳의 자창
폭 2.5 cm, 깊이 5 cm
(을병) 창상은 하나의 자창으로서 부상의 찰나에 신체를 회전함으로써 칼끝이
제12 늑골에 닿을 듯 말 듯한 후에 외피 아래쪽으로 뚫고 나온 것으로
일견 2개의 상처로 보이지만 완전히 하나의 자창으로
이는 수술을 시행할 당시 발견된 것이다.
2. 흉기의 종류
흉기는 창상의 상태로부터 추정한바 예리한 첨도(尖刀)로 생각됨
3. 창상의 경과
창상 앞부분은 2개소로 바깥은 좁고 속은 깊었다.
창상 내의 삼출물 및 응혈을 치료해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12월23일 양창을 상하좌우로 절개해 내용물을 제거하였다.
외과학의 제칙에 따라 치료를 시행함으로써 점차 원하는 결과를 거두고
6주 만에 창면(創面)을 완전히 치료할 수 있었다.
부상 당시 엎어져서 좌 흉부를 강하게 타박당했으므로
왼쪽 가슴의 후액와연(後腋窩緣)에 제 4 늑간에서 제 7 늑간에 걸쳐 손바닥 크기의 피멍이 생겼는데 수일 만에 암자색으로 변했다.
압통 및 타진(打診, 가슴을 두드려 진단함)상 탁음이 들리고,
청진기상으로는 호흡음이 미약했는데, 1월20일 이학적 증상이 더욱 현저해져
속이 빈 가는 침을 몸속에 찔러 넣어(천자술) 혈성장액 700ml 를 배출했다.
상태는 점차 좋아졌으나 타진상 탁음을 남기고 있고 때때로 발열이 있는바
전기(前記) 증상은 외상성 늑막염에 기인한 것이다.
4. 예후의 양부(良否, 좋음과 나쁨)
창상은 이미 치유돼 뚜렷한 장애를 남기지 않았지만
앞서 말한 외상성 늑막염에 따른 증상은 예후에 큰 관계가 있다.
즉 염증성 삼출물의 흡수가 전혀 흔적이 없을 정도로 이루어지면
후유증이 없을 수도 있으나, 이는 좀 더 시일이 경과해야만 만성질환으로 남을지
건강상태로 회복될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당장은 예후의 좋고 나쁨(良否)을 단언하기 어렵다.
이 감정서에는 명백하게 늑골하연 자상, 늑간동맥 출혈, 폐 손상, 좌흉부 타박상, 외상성 늑막염 등의 흉부외과 전문 병명이 언급되어 있으며 또한 기흉과 혈흉을 의미하는 서술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폐를 손상하여 창공으로부터 출혈 및 호흡에 수반된 공기 출입이 있었다) 그리고 ‘흉부 천자술에 의한 혈성 삼출액 배출’이라는 외과적 시술에 관해서도 분명히 기록돼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술들이 바로 한국사(史) 최초의 흉부외과 관련 기술로 생각되는 부분들이다.
100년 전의 의료 현실
따지고 보면 ‘처음’ 또는 ‘최초’라는 말만큼 매력이 있는 단어도 흔치는 않다.
모든 분야에서 처음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고,
이는 학문세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간혹 최초 업적에 대한 인간적 공명심으로 부질없는 다툼을 벌이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학문 분야에서든 처음에 관련된 초기의 모습을 추적해보는 것만큼
흥미로운 작업도 많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과연 한국사에서 흉부외과에 관련된 기술이 언제 최초로 시술됐을까?’라는 의문은
흉부외과, 나아가 의학에 관련된 사람으로선 의미 있고,
흥미진진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흉부외과가 임상과로 공식 독립한 것은 1950년대지만
이전에 이미 각종 관련 수술들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는 비록 외부의 힘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지만
현대의학 기법의 소개로 늑골카리에스(주로 결핵균에 의한 늑골의 심한 염증 상태)나 농흉(폐를 둘러싼 흉막이 염증으로 농이 차 있거나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상태)에 대한 외과적 치료가 일부 이뤄졌고,
따라서 이에 관한 기록도 노력하면 단편적이나마 일부라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전의 흉부외과 관련 기록은 지금껏 발견하지 못했다.
‘이완용 암살미수 사건’의 와중에서 발행된 상해 진단서의 발견은
그래서 의미가 크다 하겠다. 100년 전의 흉부외과적 진단, 진료 기록은
당시 국내 전반적인 의료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 상태였는지를 방증한다.
당시는 대한제국의 국호 아래 정치적으로 일본제국의 한반도 완전 지배의 야욕이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사회 전반의 크고 작은 분야에서도 일제의 영향이 곳곳에 침투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은 일찍이 서구문화와 함께 서양의학을 받아들였고
1876년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이후 서양 근대의학을 조선에 소개하고 있었다.
미국 역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의료시술을 통한 본격적인 선교의료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서양 근대의학은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선교의사 앨런이
성공적으로 치료함으로써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됐다.
그 결과로 우리나라엔 그 이듬해인 1885년 4월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 광혜원이 설립됐다.
그러나 1895년 청일전쟁, 1904년 노일전쟁에서의 잇따른 승리에 힘입은
일본의 정치 군사적 위세는 의료분야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됐고,
이후 한반도에서 근대의학의 유입은 일본에 의해 주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
당시의 한반도는 전반적으로 전통의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근대의술의 혜택을 받는 사람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었으며 의술 자체도 답보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근대의학의 개념 아래 실시되는 외과적 시술의 경우
더더욱 그 대상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설사 외과적 시술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오늘날까지 제대로 된 의료기록이
남아오는 사례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이는 대체로 역사적인 기록 자료들의 보관, 계승 노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우리나라의 그간 사정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유난히 굴곡이 많았던 우리의 근현대사와도 무관치 않다.
사건이 벌어진 종현 천주교회당 (지금의 명동성당) 앞 . 상해감정서의 역사적 가치
이런 측면에서 이완용 사건에 관련된 의학 기록은 참으로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어떻게 보면 지금 비슷한 상태의 환자가 오더라도 이런 정도의 기술(記述) 이상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는 이완용이라는 인물이 당시의 정국에서 한일 양국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당시 일본 의료진은 가능한 한 정확하고 상세한 의료 기록을 남기려고
애를 썼을 게 분명하다. 더욱이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이 감정서가 대역죄인을 처벌할 수 있는 큰 증거였으므로
보다 정확하고 상세한 기록을 요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록이 일제 강점기를 거쳐 100년 세월 동안 온전히 보관된 것도
그러한 역학관계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이 병원 진료 기록이 일반인의 것이었다면
벌써 폐기되거나 훼손됐을 가능성이 크다.
명동성당 앞 언덕길 아래에 있는 이재명 의사 추모 표지석 상해 감정서는 여러 가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데, 이재명이 ‘이완용에 대한 암살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착각한 이유도 나름 추측할 수 있다. 감정서는 먼저 이완용이 입은 중요한 손상으로 ‘자상에 의한 늑간동맥 절단’을 지목하고 있다. 즉, 우리 몸의 갈비뼈 사이(늑간)에 있는 동맥이 칼에 의해 절단됐다는 뜻이다. 이는 이완용이 감정서의 언급대로 ‘과다출혈을 일으킬’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일반적으로 동맥이 절단되면 적절한 지혈 치료를 하지 않을 경우 상당량의 출혈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로써 당시 사건 현장에서 어떤 응급 처치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각종 기록에서 보이는 ‘유혈이 낭자했다’는 표현은 증명이 된 셈이다. 이재명이 이완용의 죽음을 단정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편 감정서에 기록된 병의 경과를 미뤄 짐작해보면 당시 의료진은 절단된 늑간동맥을 직접 잇는 수술은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완용의 출혈이 멈춘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뜻이다.
감정서에는 의학적으로 의문이 드는 대목도 있는데, 폐 손상에 대한 기술이 그것이다.
감정서는 ‘폐를 손상해 창공으로부터 출혈 및 호흡에 수반된 공기 출입이 있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당시 폐 손상이 실제로 있었는지에 대해선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직접적인 폐 손상 없이 단순히 폐를 둘러싸고 있는 흉막이 자상에 의해 열리는 것만으로도 호흡에 따른 공기 출입이 있는 것 같은 현상이 생길 수 있는데다, 피가 나온 것도 흉막이 열리면서 주위 혈관을 손상시켰거나 앞에서 설명한 늑간동맥 절단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 의료 현장에서 임상적으로 흔히 관찰되는 소견 중 하나다.
또 하나, 만일 당시 실제 의학적으로 유의미한 폐 손상이 있었고
이로 인한 외상성 기흉이 있었다고 쳐도 의문은 남는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완용에겐 상당한 정도의 호흡곤란이 왔어야 하고,
그로 인해 그의 회생은 거의 불가능했어야 이치에 맞다.
외상성 기흉이란 폐를 둘러싸고 있는 흉막강 내에 외상으로 인해 공기가 차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폐를 압박함으로써 호흡곤란을 일으킨다.
이를 치료하려면 보통 흉관이라고 불리는 굵은 관을 흉막강 내에 삽입해
공기를 먼저 배출해야 한다.
문제는 당시에는 이런 의료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욱이 사건 현장이나 이완용의 집에서 이뤄진 응급치료 수준으로는
이완용의 회생은 어림도 없다. 물론 외상성 기흉의 정도가 경미했다면
이후 일정 기간에 걸쳐 폐에 가득 찬 공기가 자연 흡수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적어도 감정서에 주어진 소견만 가지고선
폐 손상이 있었다는 단정적인 표현을 하기는 어렵다.
감정서가 바로잡은 잘못된 ‘史實’
감정서는 또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史實)을 수정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완용의 상처에 관한 후세의 많은 기술에는
이완용이 이재명에게 찔린 상처가 세 군데 또는 그 이상 찔렸다고 돼 있다.
한 발 나아가 복부도 찔렸다고 기록한 백과사전도 있다.
하지만 감정서는 오른쪽 등에 있던 두 군데 상처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동일 자상에 의한 상처라고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이완용이 입은 자상은 주 손상 부위인 왼쪽 어깨 부분과 함께
오른쪽 등 쪽의 두 군데 뿐이다. 복부 자상에 대한 후세 기록은 수정돼야 한다.
이완용에 대한 대한의원의 처치방식은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손색이 없다.
사건 당일 자택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이완용은
이튿날인 12월23일 대한의원으로 옮겨지는데, 감정서는 입원 당일 의사들이
‘상처의 원활한 회복을 위해 창상으로부터 혈액과 삼출물을 빼줬다’고 밝히고 있다.
감정서 창상의 경과에 나온 기술은
현대 외과적 원칙에 비춰보아도 적절한 처치라 할 수 있다.
감정서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대목이 발견된다.
이완용의 입원 약 한 달 후인 1910년 1월20일,
대한의원 의사들은 타진 및 청진 소견에 따라 흉부 천자술을 시행하는데,
빼낸 혈성 장액의 양이 무려 700ml에 달했다고 한다.
여기서 흉부 천자술이란 가슴에 주삿바늘 또는 관을 삽입해 흉막강 내에 고여 있는 피 또는 액체를 빼내는 시술을 말한다.
100년 전에 타진과 청진만으로 흉막강에 피가 섞인 액체가 고여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아내고 흉부 천자술을 시행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혈성 장액, 즉 피가 섞여 있는 액체의 존재 자체는 이전의 늑간동맥 절단이나
인근 혈관의 손상에 따른 출혈의 후유증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소량의 혈액만으로도 전체 삼출액이 혈성으로 보일 수 있음을 감안하면
당시 배출된 액체 대부분은 외상에 의해 이차적인 반응으로 생긴 삼출액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감정서 역시 배액된 혈성 삼출액을 외상성 늑막염에 의한 결과로 진단한다.
의사들은 최종 예후의 판단에서
‘외상성 늑막염의 치유 여부가 완전 회복의 관건’이라고까지 기술하고 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완용은 입원 53일 후인 1910년 2월14일에
자상에서 완전히 회복된 상태로 퇴원할 수 있었다.
‘최초’ 논란에 대한 입장
이재명에 의한 이완용 암살 기도 사건은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그 상징적 의미는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다.
이는 이재명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매우 빈약한 현실에서도
후세 사람들이 그에 대한 재평가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재명에 대한 사실 기록은 양도 적지만 부정확한 것도 많다.
출생년도, 이완용 암살 기도 날짜 등 기본적인 자료에서부터
거사 당일 군밤장수로 위장했느냐 여부와 기타 개인 신상 및 거사 동지들에 대한
기록 등에서 많은 혼선이 발견된다.
따라서 ‘이완용 암살기도 사건’과 관련한 의학적 기술에도
상당한 오류가 발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는 그간 사용됐던 참고 기록의 부정확성에 기인한 면이 크다.
하지만 설사 상해감정서가 발견됐더라도
흉부 외과적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이 보면 이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혹자는 당시 사건에서 이완용에 대한 치료 주체가 일본인이었고
상해감정서 역시 일본인에 의해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한국사 최초의 흉부외과 관련 의학기록’이라는 표현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엄연히 한국을 무대로 벌어진 한국의 역사적 사건에 관련해
기술된 의학 기록은 그 기록의 주체가 누구였든지 간에
한국사 관련 의학 기록임을 부정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이재명 사건에 대한 대목 중 많은 부분이 박상우의 소설 ‘칼’ 집필후기를 근거로 했다는 점과, 이를 기반으로 여러 가지 자료를 참고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 김원곤, 서울대학교병원 흉부외과 교수
- 신동아, 2009.02.01 통권 593호(p580~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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