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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가며(자료)

한여름의 얼음 사치와 빙고청상(氷庫靑孀)

Gijuzzang Dream 2009. 3. 12. 14:42

 

 

 

 

 

 한여름의 얼음 사치와 빙고청상(氷庫靑孀) 

 

 

 

 

여행과 사냥을 취미로 삼고 있던 미국 농무부의 생물표본 수집 담당직원

클라렌스 버즈아이(Clarence Birdseye)는 1923년 알래스카로 출장을 갔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자신의 인생을 뒤바꿔 놓을 만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에스키모들이 예전에 먹다가 남겨 놓은 생선이 그때까지 신선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

더구나 생선은 막 잡아 올린 것처럼 싱싱해 2개월 전의 것이라는 대답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 냉동법을 발명하여 돈방석에 오른 클라렌스 버즈아이 

알래스카의 강추위에서 꽁꽁 얼어붙어 있었으니 생선이 신선도를 유지한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버즈아이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후 아이스크림 공장 한구석을 빌려 연구실을 차렸다.

자금은 달랑 7달러뿐이었고 장비라곤 선풍기 한 대와 소금물, 얼음조각이 전부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연구에 매달렸다.

1925년 버즈아이는 마침내 급속 냉동기계를 발명해 냈다.

처음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는 특허출원을 마치고 성능이 더 좋은 자동 냉동기계도 발명했다. 그리고 1929년 대공황이 찾아오기 직전 식품저장에 고심하던 제너럴 푸드사에서 드디어 버즈아이의 특허권을 샀다.

그 금액은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인 2천2백만 달러나 되었다.

그 후 버즈아이는 그 돈으로 연구비 걱정 없이 풍요로운 삶을 누리며 1956년 70세로 사망할 때까지 250여 건의 특허를 남겼다.

버즈아이로부터 식품냉동법 특허를 사들인 제너럴 푸드사 역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냉동식품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버즈아이의 냉동법 발명은 지금까지도 우연한 관찰을 적절히 응용한

우수 발명사례로 거론되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추운 지역에서 살고 있는 에스키모들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이미 식품의 냉동 유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안동 은어를 냉동한 채로 한양까지 진상 

향긋한 수박향이 나는 은어 중에서도 특히 낙동강 칠백 리 물길을 거슬러 올라와 안동에서 잡히는 것은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때문에 안동 은어는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는 진상품으로도 유명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은어는 7월 초 산란 전의 것을 최고로 쳐준다.

그 무더운 여름에 잡은 은어를 서울까지 운송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은어는 여름마다 어김없이 임금에게 진상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양의 권세가들에게까지 진상되어 뇌물로서의 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한여름의 은어 운송 비결은 바로 조빙궤(造氷櫃)라는 특수 궤짝에 있었다.

은어처럼 말리지 않고 생으로 먹어야 맛이 나는 식품은

얼음으로 속을 채워서 만든 조빙궤에 담아 한양으로 보내졌다.

안동 은어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내로라하는 진상품들은 여름철에 모두 이같이

얼음을 꽉꽉 채운 조빙궤에 담겨져 신선한 상태로 한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대체 조선시대의 한여름에 얼음을 어디서 구할 수 있었던 걸까? 답은 간단하다.

한겨울에 강에서 꽁꽁 얼어붙은 얼음을 잘라내 얼음을 넣어두는 창고인 빙고(氷庫)에 보관하고는

다음해 여름에 꺼내 쓰는 것이다.

얼음을 저장해 두고 사용한 우리나라 빙고의 역사는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3대 노례왕(24~57년) 때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에도 신라 22대 지증왕 6년(505)에 왕이 얼음을 보관토록 명령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에 두 종류의 빙고를 두었는데,

창덕궁 안에 있던 내빙고와 사대문 밖의 외빙고가 그것이다.

궁궐 전용의 얼음 창고인 내빙고에는 약 3만여 정의 얼음이 저장되었다.
외빙고는 서빙고와 동빙고의 2개가 있었는데,

서빙고는 1396년(태조 5) 둔지산 아래(지금의 용산구 서빙고동)에 지어졌다.

동빙고는 한강 하류 두모포(지금의 옥수동 한강변)에 위치했는데,

현재의 용산구 동빙고동은 다만 서빙고동의 동쪽에 있다 해서 붙여진 지명일 뿐

동빙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서빙고에 보관한 얼음 양은 13만여 정쯤 되고, 동빙고에는 1만여 정쯤 저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서빙고가 동빙고보다 13배나 많은 양의 얼음을 저장한 셈인데,

실제로 동빙고의 창고는 1동이었던 것에 비해 서빙고는 8동이나 되었다.

양이 적은 동빙고의 얼음은 오직 왕실의 제사를 지낼 때에만 사용했고,

서빙고에 보관한 얼음은 종친이나 당상관 이상의 고급 관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처럼 얼음을 나누어주는 것을 ‘반빙(頒氷)’ 또는 ‘사빙(賜氷)’이라 했으며,

임금이 내린 나무로 된 빙표(氷票)를 빙고에 가져가 얼음을 받았다.



의금부 죄수들에게도 얼음 지급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한여름에 빙고의 얼음을 먹을 수 있었던 이는

고관대작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죄수들에게까지 그 혜택이 돌아간 것을 알 수 있다.

1494년(성종 25) 5월 29일자의 ‘성종실록’을 보면

날씨가 매우 덥고 옥중에 갇힌 자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임금이

내관과 사관 등을 보내 의금부와 전옥을 조사하게 했다고 되어 있다.

▲ 한강에서의 얼음 채취

조선시대 얼음 채취는 음기가 가장 강한

12월에 이루어졌다. 

조사를 마친 관리들이 의금부와 전옥에 얼음과 약 등이 없어 죄수들이 고생한다고 아뢰자, 성종이 의금부에 연유를 물어보니 5월에는 얼음을 받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이에 성종은 5월 15일 이후부터는 날씨를 관찰하여 얼음을 받도록 하라는 전교를 내린다.

<경국대전>의 ‘예전 반빙조’에 의하면 빙고에 보관된 얼음은 해마다 여름철 끝달(음력 6월)에 여러 관사와 종친, 당상관, 70세 이상의 퇴직 당상관에게 나누어주게끔 명시되어 있다. 즉, 아무리 날씨가 덥다 해도 음력 6월 이전과 입추 이후에는 얼음을 받을 수 없었다.

이는 조선시대의 얼음 용도가 요즘처럼 실용적인 측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를 꾀하는 음양오행설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시경’을 보면 빙고를 능음(凌陰)이라 했는데, 이는 ‘음을 저장하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즉, 음기가 가장 강한 12월에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하는 것은

한겨울의 동장군을 지하에 잡아 가둔다는 의미를 지닌다.

또 양기가 가장 강한 한여름에 얼음을 나누어주는 것은

음의 얼음으로 극에 이른 양기를 억제하여 자연의 조화를 회복시킨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더워도 음력 6월 이외에는 빙고에 가득 찬 얼음을 함부로 반빙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동빙고는 예외였다. 왕실의 제사에 공급되는 동빙고의 얼음은

음력 3월 1일부터 된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상강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조상을 섬기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그만큼 왕실의 제사 음식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는 의미인 셈.

그러나 이에 대해 시비를 걸고 나선 용감한 사대부가 있었다.

1546년(명종 1) 8월 2일자의 ‘명종실록’에 의하면

예조참판을 지낸 김광준이 그에 대한 폐해를 임금에게 아뢰었다.

이야기인즉슨, 자신이 태조 이성계의 비인 신의왕후 한씨를 모신 문소전을 관리할 때 보니

신위 앞의 구리 쟁반에 얼음을 담아 놓는 소위 ‘조빙(照氷)’으로 인해

얼음이 녹아 흘러서 자리가 흥건해지고 진흙이 질척거려 사당이 쉽게 더러워진다는 것.
따라서 김광준은 겨울에는 추위를 막는 준비가 별로 없으면서 여름에만 그렇게 하는 것은

허례허식에 불과할 뿐더러, 빙고 작업으로 백성에게 끼치는 폐가 적지 않으므로

조빙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달라는 취지의 말을 아뢴다.

이에 대해 명종은 대신과 의논해 보라며 심드렁하게 대한다.

 

섣달 한겨울에 얼음을 채취하는 것을 벌빙(伐氷)이라 했는데,

빙고에 저장하는 얼음은 두께가 12㎝ 이상 되어야만 했다.

벌빙시에는 보통 가로 70~80㎝, 세로 1m, 높이 60㎝ 정도의 크기로 얼음을 잘라 빙고로 보냈다.

그런데 벌빙은 매우 고된 노동이었다.

엄동설한에 강가에서 며칠이고 유숙하면서 얼음이 두껍게 얼기를 기다려야 했으므로,

동상을 입는 빙부들이 허다했고 삼하게는 얼어죽는 이들도 있었다.
때문에 겨울만 되면 한강변에 사는 백성들 중 벌빙 부역을 피해 도망가는 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빙고청상(氷庫靑孀)’이란 말의 유래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즉, 벌빙 부역을 피해 남편이 도망감으로써 뜻하지 않게 생과부가 된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한겨울만 되면 한강 주변의 민가에는 갑자기 빙고청상들이 생겨났고,

매서운 강바람을 타고 한겨울밤 생과부들의 한숨소리가 스산하게 울려 퍼지곤 했다.

▲ 경주 석빙고

특성상 목빙고는 부식되어 없어졌고,

조선시대 석빙고만 한반도에 7개가 남아 있다. 

이로 인해 세종 때는 사간원에서 벌빙 부역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달라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또 중종 때는 빙고 근방에 사는 백성들이 벌빙 부역을 꺼려서 다른 부역으로 옮기는 경우가 많아 그에 대한 단속 지침을 내렸던 적도 있었다.

벌빙 부역으로 인한 백성의 고통을 가장 아프게 받아들였던 임금은 정조였다.

그는 벌빙에 동원되는 노동력과 배ㆍ말 등에 대해 모두 대가를 지불하도록 했으며, 관아에서 사용하는 얼음의 양을 줄이라는 명을 내렸다.

또한 정조는 재위 13년 무렵 내빙고를 아예 없애버렸다.

한편 합리주의적인 과학관을 지닌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은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즉, 벌빙 부역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얼음을 자르고 실어나르는 불편이 없도록 궁궐 안에 직접 얼음을 얼리는 방법을 고안한 것.

곡산부에 관리로 나가 있을 때 정약용은 응달진 곳에 큰 움을 파서 사방은 돌로 쌓고

그 틈에다 회를 바른 다음 제일 추운 시기에 샘물을 길러다 그 안에 쏟아 넣게 했다.

물이 꽁꽁 얼면 외풍이 들지 못하게 보관하여 다음해 여름에 열어보니

그때까지 얼음이 돌같이 단단해 도끼로 깨뜨려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약용은 이 방법을 자신의 저서 ‘경세유표’에 상세하게 적어놓았는데,

그의 실용과학 정신은 다름 아닌 백성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빙낭을 껴안고 더위 식힌 세도가들

이에 비해 조선시대 상류층들은 한여름에 얼음으로 각종 사치를 누렸다.

 

삼복더위에 빙고에서 찾아온 얼음으로 봉황새나 상서로운 짐승을 조각한 후 비단 매듭으로 치장하고는

상에 올려놓고 시원함을 즐기며 식사를 하곤 했다.

▲ 2005년 홍성에서 국내 최초로 발굴된 목빙고 유적 

또 얼음으로 여자 형상을 조각한 뒤 비단옷을 입힌 ‘빙낭’이라는 물건도 있었다. 세도가들은 외출에서 돌아온 후 빙낭을 껴안고 땀을 식혔다.

이밖에도 얼음을 병풍처럼 둘러치는 빙병이 있었는가 하면, 얼음으로 방을 차게 하는 호화 냉방도 있었다.

얼음을 갈아서 화채나 꿀물에 넣어 먹기도 했는데, 이를 '진주음(珍珠飮)'이라고 불렀다.

얼음 사치를 누린 대표적인 임금이 연산군이었다.

1504년(연산군 10) 6월 25일자의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은 대비의 생일을 맞아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사면에 구리놋으로 만든 큰 얼음 쟁반을 설치하고는 승지들이 따서 얼음 쟁반에 받쳐주는 포도를 맛있게 먹었다고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올곧았던 선비들은 빙고의 얼음을 백성의 눈물이라는 의미에서 ‘누빙(淚氷)’이라 부르며, 한여름에 얼음 받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빙표가 있어도 빈궁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얼음을 가져오지 못하는 관리들도 있었다. 가난해서 하인이 없는 관리들은 양반 체면에 직접 빙고로 가서 얼음을 가져올 수 없었으므로 아까운 빙표를 그냥 집에다 묵힐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사정을 눈치 챈 약삭빠른 상인들은 가난한 관리들이 묵혀둔 빙표를 사서

얼음을 받아다 시장에서 비싸게 팔았다.

그로 인해 당상관이 아닐지라도 돈만 많으면 한여름에 얼음을 사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일반인들도 얼음을 이용하면서 점차 얼음의 수요가 늘어나자

개인 소유의 사설 빙고까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18세기 영ㆍ정조 시대 이후에는 어선의 생선보관용 얼음을 공급하던 사설 빙고가

상업 활동이 활발했던 한강변에만 30여 개소가 설치되었다.
이 중 한 곳이 지난 1994년 발견되었다. 서울 마포구 현석동의 한 지하실에서 발견된 이 사설 빙고는

영ㆍ정조 시대의 석빙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경북 경주와 안동ㆍ청도ㆍ현풍, 경남의 창녕과 영산, 북한의 황해도 해주 등지에

빙고가 남아 있다. 이는 모두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석빙고로서,

신라나 고려 때 만든 빙고는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사실 조선시대 빙고는 서울에 있던 내ㆍ외빙고를 비롯해 거의가 나무로 만든 목빙고였다.

그런데 목빙고는 특성상 쉽게 부식되므로 현재는 석빙고만 남아 있는 상태다.


그런데 지난 2005년 3월경 충남 홍성읍 오관리 세광아파트 부지에서

국내 최초로 목빙고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곳은 옛날부터 ‘빙고재’라는 이름으로 불려오고 있었는데,

정말로 목빙고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그 유래가 밝혀진 셈이다.
진상품 보관을 위해 17세기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목빙고는

바닥의 길이가 23.8m, 너비 5.5m로서

윗면에서 바닥까지 가장 깊은 곳이 1.5m로 추정되는 반지하 구조이다.

더불어 기와처럼 구워서 만든 원통형 관의 배수시설과

짚ㆍ갈대ㆍ왕겨 등이 축적된 유기물 층도 발견되었다.



석빙고의 과학적 구조

옛날 빙고에 얼음을 저장할 때는 얼음끼리 서로 붙지 않도록

왕겨나 솔잎 등을 1~2㎝ 정도 넣은 다음 얼음을 층층이 쌓았다.

그럼 빙고가 한여름까지 더워지지 않고 얼음을 그대로 저장할 수 있는 원리는 과연 무엇일까.

▲ 석빙고의 아치형 천장

사이마다 빈 공간이 있어 더운 공기를 가두었다 

현재 완벽하게 남아 있는 석빙고의 구조를 살펴보면 그 해답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장치는 더운 공기를 가두는 에어포켓이다. 빙고의 천장을 살펴보면 같은 크기의 돌을 아치로 쌓아올려 무지개 모양으로 잇대어 완성한 아치 구조로 되어 있다.

보통 석빙고의 천장은 1~2m의 간격을 두고 4~5개의 아치형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아치형 천장 사이사이마다 움푹 들어간 빈 공간이 있다. 그것이 바로 석빙고 내부의 더운 공기를 가두는 에어포켓인 셈이다.

날씨가 따뜻해짐에 따라 석빙고 내부에는 조금씩 더운 공기가 생기고, 여름에 얼음을 꺼내기 위해 문을 열면 밖에서 더운 공기가 들어온다.

이와 같은 더운 공기는 기체의 대류 현상에 의해 위로 뜨게 되는데,

위로 뜨는 순간 에어포켓에 꼼짝없이 갇혀버린다.

그런 다음 위쪽의 환기 구멍을 통해 더운 공기는 빠져나가게끔 설계되어 있다.

더운 공기를 밖으로 빼내는 환기구는 보통 30×30㎝ 크기로 2~3개씩 설치되어 있는데,

두껑돌을 얹어 빗물이나 직사광선이 들어가지 못하게끔 만들어졌다.

얼음이 조금씩 녹는 것에 대비한 배수시설도 완벽하다.

빙고의 바닥은 경사지게 만들어져 얼음이 녹아서 생긴 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도록 되어 있으며,

홍성 목빙고에서 발굴된 원통형 관처럼 내부의 물과 습기를 빨리 빼낼 수 있는 배수구가 설치되어 있다.

또 빙고 외부의 봉토에는 잔디를 심어 태양 복사열로 인한 열 손실을 막고,

외곽으로는 담장을 설치하여 외기를 차단했다.

봉토를 조성할 때 진흙과 회를 섞어서 건축함으로써 방수에도 단단히 신경을 썼다.

얼음 사이사이뿐만 아니라 벽과 천장 사이에도 볏짚과 왕겨, 갈대 등을 채워 넣었다.

특히 볏짚의 경우 현대 건축에서 단열재로 사용하고 있는 스티로폼처럼

내부에 비어 있는 공간이 많아 열을 차단하는 효과가 높다.

▲ 아치형 공간 사이에 갇힌 더운 공기를 밖으로 빼내는 역할을 하는 환기구 

충남대학교 장동순 교수팀의 실험에 의하면 빙고에 얼음을 약 50% 넣은 다음 짚을 채워 넣었을 경우 3개월 후 약 0.04%, 6개월 후 약 0.4%의 얼음 양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짚을 채워 넣지 않은 경우에는 3개월 후 약 6.4%, 6개월 후 약 38.4%의 얼음 양이 감소되었다. 짚을 넣고 넣지 않음에 따라 얼음 저장의 성공 여부가 판가름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빙고에는 특별한 냉각 장치가 하나 더 달려 있었다.

보통 추운 겨울철이라 해도 사방이 가로막힌 지하실은 영상 10℃ 이상의 따뜻한 기온을 유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경주 석빙고의 겨울철 내부 온도는 영하권을 유지한다.

그것은 석빙고 출입문 옆에 세로로 붙어 있는 날개벽의 역할 때문이다.

겨울에 부는 찬바람이 이 날개벽에 부딪히면 소용돌이로 변해

빙고 내부까지 더욱 빠르고 힘차게 밀려들어가 안을 꽁꽁 얼어붙게 만드는 것이다.

- 이성규 기자, [이야기과학실록]

- 2009.0213 / 02.20.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