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첨단 5만원 지폐 공개… 2009년 6월 발행
신사임당 도안… 여성 인물론 처음 위폐 확인 쉽게 할 수 있는 장치 도입 |
한국은행은 신사임당(申師任堂 : 1512~1559) 초상이 들어간 5만원권 도안을 일반에 공개했다. 이 고액원 지폐는 2009년 6월 발행돼 시중에 유통될 예정이다. 5만원권 도안은 지난 2007년 12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확정됐으며 화폐도안 자문위원회와 전문가 개별 자문 등을 거쳐 시제품이 확정됐다.
앞면에는 <신사임당 초상>과 함께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묵포도도(墨葡萄圖)>와 <초충도수병(草蟲圖繡屛, 보물 595호)> 가운데 가지 그림을 사용했다. 국내 지폐에 여성 초상이 독자적으로 사용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신사임당 초상은 강릉 오죽헌에 보관된 표준 영정을 바탕으로 신사임당 생존 당시의 두발과 복식 등에 관한 전문가 자문을 거쳐 조폐공사 디자인연구실에서 새로 제작한 것이다. 신사임당 표준영정은 1960년대에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렸다. 이와 함께 바탕 그림은 왼쪽에 <난초와 기하학 무늬>, 오른쪽에는 <고구려 고분벽화 무늬>를 함께 배치했다. |
뒷면에는 조선 중기 화가인 어몽룡의 <어몽룡의 ‘월매도(月梅圖)’>와
<탄은 이정의 ‘풍죽도(風竹圖)’>의 매화나무와 대나무 그림을 사용,
세로로 디자인하고 바탕은 바람 무늬를 이용했다.
현재 1000원권 앞면에는 퇴계 이황과 함께 명륜당 · 매화,
5000원권 앞면에는 율곡 이이와 함께 오죽헌 · 대나무,
1만원권 앞면에는 세종대왕과 함께 '일월오봉도'가 그려져 있다.
5만원권의 크기 (가로 154㎜, 세로 68㎜)는
현행 1만원권과 비교해 세로 길이는 같고, 가로 길이가 6mm가 길다.
화폐 색상은 황색 계열을 사용해 녹색 계열인 1만원권과 차별화 했다.
◇ 위조방지, 신기술 3가지 등 총 16가지
한국은행 이내황 발권국장은 "위조 방지를 위해 3가지 새로운 최첨단 장치가 사용됐다"고 말했다. 한국은행 이내황 발권국장은 "5만원권이 발행되면 10만원권 수표 대체효과가 커 수표 발행, 보관 등에 따른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며 "고액권이 발행되면 위조 유인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액권에는 여러가지 최신 기법을 이용한 위조방지 장치를 적용했다"고 말했다.
일반인들이 쉽게 위조 여부를 구분할 수 있도록 띠 홀로그램과 입체형 부분노출 은선, 가로확대형 기번호 등의 위조방지 장치도 새로 도입했다. 색변환 잉크, 숨은 그림은 물론 돌출 은화, 요판잠상 등의 기존 기술도 강화했다.
왼쪽 끝 부분에 처음 도입된 특수필름 띠인 띠형 홀로그램은 보는 각도에 따라 색상이 변하는 태극, 우리나라 지도, 4괘의 무늬가 겹쳐져 띠의 상. 중. 하 3곳에 각각 배치돼 있고 무늬 사이에는 액면 ‘50000’ 이라는 숫자가 들어가 있다. 각각 각도에 따라 색상이 변한다. 이 기술은 지난 2000년 이후 신권으로 교체한 유럽 국가 등에서 도입하고 있다. 입체형 부분노출은선(모션) 기술도 처음 도입됐다. 앞면 중앙 청회색 특수필름 띠에 연속으로 새겨진 태극무늬가 은행권을 상하로 움직이면 좌우로, 은행권을 좌우로 움직이면 상하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멕시코와 스웨덴 등에 이어 미국의 100달러 신권에도 적용될 예정인 신기술이다.
최근 해외에서 적용이 늘고 있는 가로확대형 기번호는 앞면 우측 하단에 10자리의 문자와 숫자 크기가 오른쪽으로 갈수록 커지는 기술로 역시 처음 선보인다.
여백부분에 숨은 그림, 두께 차이를 이용해 오각형 무늬와 그 안에 숫자 5가 보이는 돌출은화, 앞면 오른쪽에 액면 숫자 5를 숨겨 인쇄하는 요판잠상, 앞면 오른쪽에 빚을 비추면 보이는 특수필름 띠인 숨은 은선, 앞뒷면 인물 초상이나 월매도는 물론 문자와 숫자의 볼록 인쇄, 중앙 위쪽의 동그란 원 속의 무늬의 앞뒷면 맞춤 등의 기존 기술도 적용됐다. 앞뒷면 상단과 하단을 무늬가 연결되는 엔드리스 무늬, 앞뒷면의 중앙 하단에 여러 색이 나타나는 무지개 인쇄 등도 있다.
전문가들을 위한 위조 방지 장치로는 자외선이나 X선을 비추면 녹색 형광이 드러나는 형광잉크, 여러 형광 색상의 짧은 실선이 나타나는 비가시 형광은사도 갖췄다. 특수 필터를 올려놓으면 액면숫자가 나타나는 필터형 잠상, 확대경을 이용해 확인할 수 있는 미세문자도 있다. - 2009-02-26
|
|
신사임당 초상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연산군 10-명종 6)
시 · 글씨 · 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이이(李珥)의 어머니로
사대부 부녀에게 요구되는 덕행과 재능을 겸비한 현모양처로 칭송된다.
본관은 평산. 아버지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명화(名和),
이이는〈행장기〉를 지어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순효한 성품 등을 기록했다.
사임당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뜻의 당호이며,
이밖에 시임당(媤任堂) · 임사재(妊思齊)라고도 했다.
강릉 외가에서 자랐으며, 19세에 덕수이씨 원수(元秀)와 혼인했다.
그뒤 친정에 머물다가 38세에 시집살이를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
사임당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그림은 40폭 정도인데,
산수 · 포도 · 묵죽 · 묵매 · 초충 등 다양한 분야의 소재를 즐겨 그렸다.
산수에서는 안견파 화풍과 강희안 이래의 절파 화풍을 절충한 화풍으로,
16세기 전반에 생겨난 산수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사임당의 화풍은 넷째 아들인 우(瑀)와 맏딸인 매창(梅窓) 이부인(李夫人)에게 전해졌다.
글씨는 초서 6폭과 해서 1폭이 남아 있다.
1868년 강릉부사 윤종의는 사임당의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했다.
강릉을 떠나 대관령을 넘어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과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思親)> 등의 시가 유명하다.
1504년(연산 10년) 10월 29일. 출생
현재의 강릉시 죽헌동 외가인 오죽헌에서 신명화공의 둘째 딸로 태어나다.
1510년(중종 5년). 7세
어려서 외조부 이사온이 교훈과 어머니의 훈도 아래서 자랐다.
안견의 화풍을 받아 산수, 포도, 풀벌레 등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유교의 경전에 통하고 글씨와 문장에도 능할 뿐 아니라 자수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이다.
1516년(중종 11년). 13세
부친 신명화공이 진사 시험에 오르다.
1522년(중종 17년). 19세
덕수이씨 원수공에게 출가하다. 출가후 그대로 친정에 머물러 있던 중 11월 친정 부친이 별세하다.
1524년(중종 19년). 21세
서울에서 맏아들 선이 태어나다.
1529년(중종 24년). 26세
맏딸 매창이 태어나다.
1536년(중종 31년). 33세
이른 봄 밤 꿈에 동해에 이르니 선녀가 바닷속으로부터 살결이 백옥 같은 옥동자하나를 안고 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주는 꿈을 꾸고 아기를 잉태하다.
다시 그해 12월 26일 새벽에도 검은 용이 바다로 부터 날아와 부인의 침실에 이르러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아기를 낳으니 그가 바로 율곡선생이다.
율곡이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고 한다.
1541년(중종 36년). 38세
강릉 친정에서 어머니를 하직하고 서울로 올라가며 대관령에서 시를 읊다.
서울 수진방(지금의 청진동)에서 시집의 모든 살림을 주관하다.
네째 아들 우가 태어나다. 서울에 살며 홀로 계신 친정 어머니를 그리며 시를 읊다.
1550년(명종 5년). 47세
여름에 부군 이원수공이 수운 판관이 되다.
1551년(명종 6년). 48세
5월 17일 새벽, 병상에서 별세하다.
세곡을 운반하는 일로 평안도에 갔던 부군과 두 아들은 그날 서강에 도착하여
부인의 별세한 소식을 듣다.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사 지내다.
신사임당 - 묵포도도(墨葡萄圖)
이율곡은 어머니 사임당의 그림에 대하여 이렇게 술회한다.
“평소에 그림 솜씨가 비범하여 일곱 살 때부터 안견(安堅)의 그림을 모방하여
드디어 산수화를 그렸으며 또 포도를 그렸으니, 모두 세상에서 견줄 만한 이가 없었다.
그분이 그린 병풍과 족자가 세상에 많이 전해졌다.”
어숙권(魚叔權)이 엮은 <패관잡기>에도 “신 씨가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으니,
그가 그린 포도화와 산수화는 더욱 뛰어나서 평하는 자들이 안견에 버금간다고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묵포도(墨葡萄)’는
커다란 포도송이 때문에 축 늘어져 있는 넝쿨이 인상적이다. 다람쥐나 거미가 그려진 포도도도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인 ‘포도도(葡萄圖)’엔 화가 정선(鄭敾)의 가까운 벗으로
진경시(眞景詩)를 즐겨 지은 시인 이병연(李秉淵)의 칠언시가 올려져 있다.
“사람들이 그녀의 포도 그림만 좋다고 하나/ 또한 부녀 중의 이영구(李營丘)라 일컬어진다.”
이영구란 중국 북송 때 수묵산수화의 대가인 이성(李成)을 이른다.
이런 신사임당의 묵포도 그림은
오늘날 조선 전기 묵포도도의 전통을 이끈 선구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또다른 신사임당의 포도그림에 대해 전해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마을에 혼인잔치가 열려 신사임당은 이웃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음식을 나르던 하인이 그만 손님으로 참석한 부인의 치마에 음식을 엎게 되었다.
얼룩진 치마를 보고 당황한 하인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이때 이를 지켜보던 신사임당이
‘그 치마를 제게 주세요’하더니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붓을 들어 포도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얼룩진 치마는 포도알과 넓은 잎사귀와 넝쿨로 변하여 주변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신사임당 - 초충도수병(草蟲圖繡屛, 보물 595호), 동아대박물관소장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이 수병은 소재와 표현기법이 그의 여러 초충도와 매우 흡사하여 이 자수의 밑그림이 신사임당의 초충도와 무관하지 않다. 율곡 선생 문집 ‘선비행장’에 신사임당은 "어릴 때부터 경전에 통하고 글짓기에 능하고 침선과 자수에 이르기까지 정묘치 않은 것이 없었다. 7세 때부터 안견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사도를 익히고 또 초충, 영모, 포도를 잘 그려 적수가 없었다" 라고 하였다.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8폭의 수병풍인데, 병풍의 뼈대와 장황은 훼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잘 알 수 없으나 보존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며 2,3,6폭의 상단 여백과 왼쪽편이 약간 훼손되었으나 작품 전체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으며 흑색 공단 수지에 청록색의 명주실로 화초와 곤충들을 수놓은 수사(繡絲)는 반푼사를 사용하여 평수기법으로 매우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수놓은 작품이다. 우리 전통자수가 원색적인 것이 많고, 꼰 실로 수놓고 있는 것에 비하면 다소 이색적인 작품이다. 아름다운 색실과 섬세하고 숙련된 솜씨가 일품인 이 자수그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의 하나로 복식공예의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신사임당의 다른 초충도들은 당채로 된 채색화인 데 비하여, 이 병풍은 적색과 홍색이 배제되어 있어 특징이 되고 있다.
각 폭에 그려진 내용은, 1폭 - 오이, 산국(山菊), 개구리, 잠자리, 벌 2폭 - 맨드라미, 도라지, 도마뱀, 벌, 나비, 반디 3폭 - 골잎원추리, 산국(山菊), 여치, 벌, 나비 4폭 - 꽈리, 나비, 들쥐 5폭 - 민들레, 패랭이, 벌, 나비, 여치 6폭 - 수박, 산국(山菊), 패랭이, 여치, 벌, 나비 7폭 - 가지, 벌, 나비 8폭 - 국화류(황국, 백국), 나비
동아대박물관 소장의 ‘초충도수병(草蟲圖 繡屛)’ 중 7폭의 '가지그림' 자수품이
5만원권의 앞면 신사임당 영정 옆 보조소재로 사용된다.
가지그림의 이 자수는 검은 비단(墨貢緞)에 색실로 풀ㆍ꽃ㆍ벌레ㆍ나비 등을 아름답게 수놓아 만든
8폭짜리 병풍 가운데 7폭에 있는 작품이다. 병풍의 크기는 8폭 각각 가로 40cm, 세로 65cm이다.
이 병풍은 수본(繡本) · 수사(繡絲) · 침법(針法) 등 한국의 전통적인 자수기법으로 만들어져
아름답고 섬세하며 정성을 다한 사실적인 초충도수병의 빼어난 작품이다.
조선 전기의 초충도수병 작품도 간혹 남아 있지만
대부분의 자수품이 그렇듯이 이 자수병풍도 18세기 이후의 병풍이다.
그러나 고상하고 청아하면서도 사실적이어서 궁중이나 대가택(大家宅)에서 쓰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이것과 비슷한 자수병풍이 창덕궁에 여러 틀 남아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고매한 여성의 조용한 분위기를 이루는 이 8폭짜리 수병풍에서 볼 수 있는 그림은
가지 · 야국(野菊) · 황국(黃菊) · 백국(白菊) · 잡초 · 민들레 · 패랭이 · 맨드라미 · 도라지 · 원추리 ·
꽈리 · 벌 · 나비 · 여치 · 개구리 · 잠자리 · 반딧불 등 20여 종이나 된다.
신사임당(申師任堂 · 1512∼1559)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초충도수병은
한국 여성의 뛰어난 손재주를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8폭〈초충도〉중에서 '가지'를 살펴보면, 화폭의 중앙에 곡선진 가지의 두 줄기가 좌우대칭을 이루며
서 있고, 섬약한 줄기들에는 밤색과 흰색의 가지들이 곱게 열려 있다.
가지 주변에는 종류가 다른 화초와 곤충들이 배열되어 있어 그림에 생동감을 더해준다.
안정된 구도, 몰골법(沒骨法)으로만 이루어진 묘사, 아담하고 음영을 살린 설채법 등이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을 보여준다.
어몽룡 <묵매도>
어몽룡(魚夢龍, 1566-?)은 조선 중기의 선비 화가다.
명종 21년인 1566년에 태어났으며 사망 연도는 명확하지 않으나 1617년(광해군 9)이란 설이 있다.
본관은 함종(咸從)이며 호는 설곡(雪谷), 설천(雪川)이다.
조부가 판서, 부친이 군수를 지낸 양반 가문이며 그도 1604년(선조 37) 충청도 진천 현감을 지냈다.
그는 먹으로 그린 매화인 묵매(墨梅)로 유명하다.
동시대 사람이며 임진왜란 때 왜병의 칼에 오른팔을 다친 뒤로 왼손으로만 대나무 그림을 그렸다는
이정(李霆, 1541~1622), '포도의 화가'로 이름을 떨친 황집중(黃執中, 1533~?)과 함께
당시의 '삼절(三絶, 재주가 뛰어난 세 사람)'로 불렸다.
어몽룡의 대표작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월매도(月梅圖)'는 당시
유행했던 흰 매화를 수묵으로만 그리는 풍조를 대변하고 있다.
김원용, 안휘준 공저 <한국미술의 역사>는 이 작품에 대해
"늙은 가지는 꺾어진 모습으로, 어린 가지는 하늘을 향해 높이 치솟는 모양으로 묘사돼 대조를 보인다. …줄기에 가해진 농묵의 점법(點法, 먹물이나 물감을 찍어서 나뭇잎 · 풀 · 산 등을 나타내는 방법)도
매화 가지의 형태를 마무리 지어 주고 생기를 불러일으킨다." 하였다.
어몽룡의 대표 작품으로 꼽히는 '월매도'는 한자 그대로 매화와 달이 같이 그려져있는 그림으로
비단 바탕에 수묵으로 처리, 예술성이 대단히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의 묵매는 부러진 굵은 가지와 새로 돋아난 곧고 가는 어린 가지들을 대조시켜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며, 매화 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곧게 솟아 있는 구도와
부러진 굵은 가지를 비백(飛白)으로 처리한 단촐한 형태를 띄고 있다.
또 굵은 가지 주변에 크고 작은 짙은 점을 찍어 강조한 점 및 고담한 분위기 등을 특징으로 한다.
그의 화풍은 조선 초기 묵매의 전통을 토대로 형성된 것으로,
이후 조속(趙涑) · 허목(許穆) · 오달제(吳達濟) · 조지운(趙之耘) 등에게 이어져
조선 중기 묵매의 한 전형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탄은 이정 '풍죽도'
<풍죽도>, 17세기 초, 견본수묵, 127.5×71.5cm, 간송미술관 소장
탄은 이정(灘隱 李霆, 1541-1622, 중종 36-광해군 14). 1541(중종 36)∼1622(광해군 14).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종친 사대부 묵죽화가. 자는 중섭(仲燮), 호는 탄은(灘隱).
세종의 현손으로 익주군 지(益州君 枝)의 아들이다.
석양정(石陽正 : 正이란 비교적 가까운 왕손에게 준 작호로 정3품 堂下에 해당)에 봉해졌으며,
뒤에 석양군(石陽君)으로 승격되었다.
묵죽화에 있어서 그는 유덕장(柳德章) · 신위(申緯)와 함께 조선시대 3대화가로 꼽힌다.
그는 임진왜란 때 적의 칼에 오른팔을 크게 다쳤으나 이를 극복하고,
회복 후에는 더욱 힘찬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 초기의 묵죽화들이 대개 수문(秀文)의 묵죽화와 같이 줄기가 가늘고 잎이 큰
특징을 보임에 반하여, 그의 묵죽은 줄기와 잎의 비례가 좀 더 보기 좋게 어울리며,
대나무의 특징인 강인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는 특히 굵은 통죽(筒竹)을 잘 그렸는데, 통죽의 굵은 입체감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였다.
즉, 통죽의 마디를 묘사함에 있어서 양쪽 끝이 두툼하게 강조된 호형선(弧形線)으로 마디의 하단부를
두르고, 거기에서 약간의 간격을 떼고 아랫마디를 짙은 먹으로 시작해서 점차로 흐려지게 하였다.
이 기법은 조선 후기의 여러 묵죽화가들에 의하여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는〈풍죽도〉에서 대나무의 줄기와 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대나무의 탄성(彈性)을 잘 나타내었다.
화면의 공간감(空間感)을 살리기 위해 짙은 먹과 흐린 먹의 구별이 뚜렷한 대나무들을 대조시켰다.
한편, 그는 묵죽화 또는 묵란화에서 토파(土坡)를 묘사함에 있어서는 당시의 산수화의 주류인
절파화풍(浙派畵風)의 영향을 받아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를 많이 사용하였다.
같은 시대의 최립(崔岦)과 허균(許筠)은 그의 묵죽화의 자연스러움과 사실성을 칭찬하였으며,
이정구(李廷龜)는 “소동파(蘇東坡)의 신기(神氣)와 문동(文同)의 사실성을 모두 갖추었다.”고 하였다.
그가 접할 수 있었던 중국의 묵죽화는 송대(宋代)의 것보다 명대(明代)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더 많다.
따라서 그는 소동파나 문동의 묵죽양식도 하창(夏昶)이나 또는 그 뒤를 따른 주단(朱端) 등의
명대 화가들에 의하여 변형된 것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강한 필력과 잘 잡힌 구도를 보이며, 조선 묵죽화의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기년작(記年作)으로는 간송미술관소장인 검은 비단 바탕에 금니(金泥)로 그린 <죽도(竹圖)>가
만력갑오(萬曆 甲午=1594년)에 해당하여 연대가 가장 이른 작품이다.
그의 만년작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우죽도(雨竹圖)>가 있으며,
여기에는 천계임술(天啓 壬戌=1622년)의 연대가 적혀 있다.
이밖에도 낙관이 있는 묵죽화는 많이 전한다.
그가 인물화를 그렸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절파양식을 강하게 보이는 인물화〈문월도(問月圖)〉두 폭이
개인소장으로 알려져 있다.
5만원권 그림구경
6월부터 선보이는 5만원권 지폐에는 초상 1점과 회화 4점이 등장한다.
앞면에는 신사임당(1504-1551)초상이 오른쪽에 큼지막하게 배치되고
왼편에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묵포도도(墨葡萄圖, 간송미술관)’와
‘초충도수병(草蟲圖繡屛, 동아대박물관)이 도안으로 사용됐다.
신사임당 얼굴은 일랑 이종상화백(71)이 그렸는데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낸 그는
수묵 중심의 전통화단에서 드물게 채색화를 그리는 작가다.
37세 때 5000원권의 율곡에 이어 34년만에 그 어머니까지 그렸으니
현존 화폐에 초상 두 점을 남기는 진기록이다.
육척장신과 활달한 성품에 카리스마가 있고, 독도지키기 등 사회운동도 활발하다.
새 초상화가 표준영정과 딴판이라는 일부 주장에 대해
“화폐에서 좌우대칭은 금기여서 옆으로 약간 각도를 틀면서 생긴 일”이라며 일축했다.
왼편의 ‘묵포도도’와 ‘초충도수병’은 인물과 짝을 맞추기 위해서다.
사임당의 진작(眞作)을 두고도 굳이 전칭작(傳稱作)을 쓴 것은
화폐의 사회성에 맞추려는 실용적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탐관오리를 꾸짖는 ‘수박과 들쥐’를 돈에 넣기는 곤란했을 테니까.
이에 비해 포도그림은 주렁주렁 열매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화폐용으로 적합하다.
먹의 농담으로 열매와 잎, 줄기 등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어 사군자 다음으로 애용된 소재다.
‘초충도수병’은 검은 비단에 색실로 자연을 수놓은 여덟폭짜리 병풍인데,
이중 일곱 번째를 장식한 가지 그림이 점지됐다.
이번에는 돈의 뒷면, 어몽룡(1566-?)의 ‘월매도(月梅圖, 국립중앙박물관)’가 선명하고
이정(1541-1622)의 ‘풍죽도(風竹圖, 간송미술관)’가 엷게 깔렸다.
어몽룡은 충청도 진천현감을 지낸 선비화가로 조선중기 매화그림의 절창으로 꼽힌다.
그림에서 보듯 매화나무의 헌 가지는 꺾이고,. 새 가지는 하늘로 치솟아 생명의 순환을 노래한다.
이정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왕실출신이다.
임진왜란 때 왜병의 칼에 오른팔을 상한 뒤 왼손만 사용하면서도 대나무 그림에서 일가를 이뤘다.
그의 ‘묵죽도’는 바위 주변에 자생하는 대나무 모습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돈 속의 그림은 웬만큼 즐겼으니, 진짜 돈을 취할 일만 남았다.
- 손수호 논설위원
- 2009년 3월2일, 국민일보[한마당]
오는 6월, 한국 여성 위인의 대명사인 신사임당이 들어간 5만원권 화폐가 선보인다. 인물도 정해졌고, 도안도 나왔지만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신사임당을 선정한 관점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에, 5만원권에 들어간 신사임당의 초상화도 문제가 많다는 비판이 나온다. 역사 대중화에 앞장서 온 사학자 이덕일씨가 신사임당이란 역사 인물에 대한 의견을 내놨다. 신사임당 시절의 실제와 달리 남성 중심적 생각으로 만들어진 현모양처로 그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문제 지적이다. 한국화가 우승우 화백은 신사임당 초상화를 둘러싼 미술적인 부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만들어진 현모양처, 신사임당
신사임당(1504~1551)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사료는 셋째 아들 율곡 이이가 쓴 ‘나의 어머니 일대기’(선비행장)이다. 부친 이원수의 행장을 쓰지 않은 이이가 모친의 행장을 쓴 것은 그만큼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이의 글을 보면 많은 의문이 생긴다. 아들이 그린 신사임당의 실제 모습은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신사임당이 중종 17년(1522) 이원수와 혼인한 곳이 외가의 외가인 강릉이란 사실부터가 심상치 않다. 게다가 사임당은 혼인 3년 후에야 시어머니 홍씨를 처음 만났다. 혼인 직후 세상을 떠난 부친 신명화의 삼년상을 치르고 나서야 상경했던 것이다. 이 무렵 조선은 혼인 방식을 중국식 친영례(親迎禮)로 바꾸려는 왕실·사대부들과 오랜 혼인 전통을 유지하려는 민간 풍습이 충돌하며 진통을 겪고 있었다. ‘장가(장인집)간다’는 말처럼 신부의 집에서 식을 치르고 상당 기간 머물러 사는 것이 전통 혼례 풍습이었다. 반면 왕실·사대부들은 신부집에는 인사만 하고 당일 본가로 돌아오는 친영례로 바꾸려 했다.
세종 17년(1435) 파평군 윤평이 태종의 서녀 숙신옹주와 혼인할 때 최초로 친영례를 실시했다고 <세종실록>은 전하고 있다. 사임당 혼인 무렵의 임금인 중종이 재위 10년(1515) “혼인은 만세(萬世)의 시작인데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는 것은 천도에 역행하는 것이니 어찌 옳겠는가?”라고 비판한 것은 혼인 방식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위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중국식 친영례로 바꾸는 사대부가가 늘어났지만 사임당과 그 부모는 전통 혼례 방식을 고집한 것이다.
이이가 신사임당이 서울 시댁에 정착한 때라고 전하는 중종 36년(1541)은 혼인 19년 후였다. 서울에 정착한 이유도 “시어머니 홍씨가 이미 늙어 가사를 돌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어머니가 가사를 돌볼 수 있었다면 사임당은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임당의 모친인 이씨도 혼인 후 16년 동안이나 친정에서 따로 살았다. 상경 후에도 사임당은 “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란 유명한 시구대로 친정을 그리워했다.
이이가 ‘나의 어머니 일대기’에서 “아버지께서 혹시 실수하는 일이 있으시면 반드시 옳은 도리로 간하셨다”고 적은 것처럼 신사임당은 여필종부보다는 때로는 남편도 꾸짖는 여인이었다. 신사임당의 꾸짖음은 이원수가 윤원형과 함께 사림을 탄압한 이기와 어울리는 것에 대한 훈계로 해석된다. 이 때문에 이원수는 이기와 발길을 끊었다지만, 그가 종5품 수운판관에 임명된 명종 5년(1550)에 이기는 영의정이었다는 점에서 의문이 있다. 이이가 부친의 행장은 쓰지 않은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신사임당은 서울에 올라온 지 10년 만인 1551년 마흔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이이는 사임당이 “어려서부터 경전에 통달했고 문장에 능했다”고 썼지만 글은 전해지지 않고 그림만 전한다. 이이는 “어머니의 그림을 모사한 병풍이나 족자가 세상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고 예술가 신사임당을 회상했다.
사임당은 어떻게 현모양처가 되었나?
신사임당에 대한 거의 유일한 1차 사료인 ‘나의 어머니 일대기’에서 현모양처로 그리지 않은 신사임당은 어떻게 현모양처의 전형이 되었을까? 이이의 제자인 사계 김장생이 편찬한 <율곡연보>는 이이가 다섯 살 때 사임당이 아프자 몰래 외할아버지 사당에 들어가 기도했다고 적었다. 외가 강릉에서 나고 자란 이이가 강한 외가 종속성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기록이다.
이후 김장생의 제자인 우암 송시열이 ‘사임당이 그린 난초에 발하다’라는 글에서 신사임당 모자를 “상곡군 집안만이 앞에서 홀로 빛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비교하면서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상곡군은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송나라 정호를 뜻하는데, 그 모친 후씨가 정호 형제를 배출한 것이 신사임당과 같다는 발상이다. 중국과 조선의 성리학자 모자를 나란히 높여 성리학을 조선의 유일사상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끼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송시열의 제자인 노론 계열 유학자들이 다수 사임당 예찬에 가담했다. 김창협의 문인 신정하는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보고 “그린 분은 석담(이이)의 모부인인데 나는 선생과 모부인을 존경한다”라고 썼고, 송상기는 “선생은 백세의 스승이다. 세상에 그 스승을 섬기면서 그 스승의 모친께 불경한 자가 어찌 있겠는가?”라고 이이와 사임당을 동일시했다. 물론 이이의 글을 통해 사임당이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눈을 감았다.
신사임당은 이렇게 조선 후기의 집권당 노론에 의해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혼인 19년 후에야 시댁에 정착한 데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노산 이은상은 1960년대에 쓴 <사임당 편>에서 ‘남편을 큰 인물로 만들기 위해 10년 뒤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강릉 지방 전설을 인용해 합리화했다. 물론 사임당을 현모양처로 만들기 위해 후대에 창작된 전설이다.
신사임당이 화폐 인물로 선정된 이유에 대한 궁금증이 여전하다.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선정했다면 실제 사실과 맞지 않다. 또 아들이 화폐 인물인데 모친까지 선정해야 할 정도로 한국사에 인물이 없느냐는 의문도 생긴다. 여성예술가로서 선정했다면 그럴듯하지만 허난설헌·황진이 등 다른 예술가들은 왜 탈락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현대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자아실현형 여성은 없는가란 의문도 생긴다. 여성 화폐 인물 선정이란 시대의 목소리에 부응하는 듯한 겉모습 뒤에 현모양처라는 전통 여성상에 이 시대의 여성을 묶어두려는 속의 잣대가 작용한 결과가 아니길 바라면서 이 문제에 대한 공론의 장이 다시 열리기를 기대한다. - 이덕일/사학자
한국 돈에 또 일본풍 그림
오만원권 화폐 인물인 신사임당 초상화에 대한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필자는 한국화가의 한 사람으로서 문제를 제기해 보고자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해방 60년이 지난 한국 사회가 일본식 초상화의 영향에서 벗어난 우리 전통의 초상화가 실린 화폐를 가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일제 강점기 전통 미술이 큰 타격을 입는데 그 영향이 현재 화폐 속 인물들에게도 미쳤다. 미술사가인 고 오주석 선생이 <한국의 미 특강>에서 ‘지금 우리 화폐 속의 세종대왕과 이황·이이 선생 등의 초상은 모두 일본풍의 그림’이라고 비판한 것이 이런 현상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초상화들은 모두 이당 김은호 계보의 화가들이 그렸는데, 이당은 1937년 조선 여성들이 금비녀를 모아 조선총독에게 헌납하는 모습 등을 그렸던 화가이다. 일본풍 그림을 이 땅에 크게 확산시킨 화가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당이 그린 신사임당 표준 영정을 배제했다면서 어떤 이유인지 그 제자에게 초상화 제작을 맡긴 것이다.
이종상 화백은 ‘이당의 초상화에서 얼굴 부분만 따온 것이고 머리와 복식은 고증을 받아 다시 작업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바탕은 이당의 그림이니 결과적으로 이당이 그린 영정이 되살아나는 모순이 발생했다.
일본 인물화는 장식성이 강하며 감각적 미감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인물의 내면세계를 읽어내기 힘들다. 얼굴은 경직되어 표정이 없고 감정은 베일 속에 가려진 듯 알 수 없다. 짙은 화장으로 가리는 게 일본의 미감이기 때문이다.
조선식 초상화는 있는 그대로의 외모를 세밀하게 보여주면서 그 내면세계까지 묘사하는 특징이 있다. 이채 초상이 보여주듯 검버섯까지 그려 현대 의사들이 병명까지 알 수 있으며, 채제공 초상이 약간 사시인 눈까지 그대로 표현하듯 극사실주의 전통이 흐른다. 거기에 인물의 내면세계까지 표현해 인물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면 맑고 담담한 색채가 감상자를 깊이 빠져들게 하다가도 어느 순간 뒤로 물러서게 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세밀한 외형과 정신세계를 함께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많은 화가들이 이십대부터 초상화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초상화가 시력과 직결된 문제라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은 초상화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도화서 화원은 중인 출신이지만 국왕 어진의 작품성이 인정되면 현감 직위까지 오를 수 있는 특혜를 주었다. 어진화사는 명성이 높아 초상화 주문도 잇따랐음은 물론이다. 조선의 어진화사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젊은 화가들이 많이 선정되었다.
국민 모두가 사용하는 화폐 인물을 그리는 화가 선정은 조선시대 어진화사 선정보다 투명하고 객관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런 절차가 생략되었기 때문에 뒷말이 많은 것이다. 한국은행은 지금이라도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 우승우/한국화가
한은 가라사대 “신사임당 업적은 효성…내조…교육…”
한국은행은 2007년 11월 10만원권과 5만원권의 인물을 각각 백범 김구와 신사임당으로 결정하면서 신사임당으로 선정한 이유를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의식 제고와 여성의 사회참여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문화 중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자녀의 재능을 살린 교육적 성취를 통하여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등의 효과가 기대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은이 당시 낸 보도자료 중 참고 자료의 ‘인물 주요 업적’을 보면 ‘현모양처’ 측면을 중시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나온다. 이 자료는 신사임당을 “사림파 집안에서 태어난 사임당은 각별한 훈도를 받아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자수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으며, 남편 이원수를 격려하여 벼슬길로 나아가게 하고 항상 정도를 걷도록 내조하는 등 높은 덕과 인격을 쌓은 어진 아내의 소임을 다하였다. 또한 사랑과 엄격한 교육으로 네 아들과 세 딸을 모두 훌륭하게 길러냈는데…(중략) 영재교육에 남다른 성과를 보여주었다”고 설명한다.
한편 한은은 논란이 되고 있는 신사임당 화폐 초상의 원화는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승윤 발권정책팀장은 “이종상 화백이 그린 원화는 화폐를 만들기 위한 기초자료로 화폐에 들어간 도안은 이 원화를 고쳐 그린 것”이라고 설명하고 “원화를 공개할 필요도 없고 공개해 혼란스럽게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 2009-04-17 한겨레
|
'나아가는(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경에 얽힌 정조의 고민 (0) | 2009.03.06 |
---|---|
스테디셀러 <태백산맥> 누가 읽을까 (0) | 2009.03.05 |
지리산 천은사 (0) | 2009.02.26 |
정신의 의지처이자 기원을 담아내는 곳 - 제주 신당(神堂) (0) | 2009.02.25 |
새해 첫 날, '떡국' (0) | 2009.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