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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에 얽힌 정조의 고민

Gijuzzang Dream 2009. 3. 6. 00:08

 

 

 

 

 

 

 안경에 얽힌 정조의 고민

 

 

 

 

한때 TV 드라마로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이산(李祘)’은 정조의 본명이다.

조선의 22대 임금이었던 정조는

뛰어난 통치력과 포용력으로 수백 년간 이어온 파당 정치를 해소한 현군이었다.

그런 정조에게도 말년에 개인적인 고민이 하나 있었다.

시국 문제로 좌의정 이병모와 차대(次對)하는 자리에서 정조는 그 고민을 슬그머니 털어놓았다.

“나는 본래 잡된 책을 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삼국지> 등과 같은 책도 한 번도 들여다 본 적이 없다.

평소에 내가 읽는 책은 성인과 현인들이 남기신 경전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점점 눈이 어두워지더니 올봄 이후로는 더욱 심하여

글자의 모양을 분명하게 볼 수가 없다.

정사의 의망에 대해 낙점을 하는 것도 눈을 매우 피로하게 하는 일인데,

안경을 끼고 조정에 나가면 보는 사람들이 놀랄 것이니,

6월에 있을 몸소 하는 정사도 시행하기가 어렵겠다.” <1799년(정조 23년) 5월 5일자 정조실록>

TV에서 방영된 드라마 '이산'에서

안경을 쓴 정조의 모습 


그의 고민은 다름 아닌 안경을 끼고 조정에 나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 당시 정조의 나이가 48세이니 노안이 찾아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더구나 정조는 조선의 어느 임금보다 책을 열심히 읽었다.

25세 때 왕위에 오른 그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며,

과거에 합격해 등용된 관리들에게 자신이 직접 공부를 가르치기도 했으니

평소 얼마나 피나는 공부를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눈이 나빠진 것은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세월의 훈장쯤으로 치부해도 좋을 만하다.

그런데 정조는 왜 신하들 앞에 안경을 끼고 나타나는 것에 대해 그토록 예민한 반응을 보였을까.

당시 예법에 의하면 정조의 고민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안경과 관련한 예법은 매우 까다로웠다.

자신보다 나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 앞에서 안경을 쓰면 안 되고,

대중이 모인 자리거나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안 되었다.

한 임금일지라도 신하들과 함께 정사를 보는 자리에서는 안경을 쓰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음독자살로 막 내린 조병구 사건

그런 인식이 얼마나 강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로 조병구의 자살 사건을 들 수 있다.

조선 제24대 왕 헌종의 외삼촌이자 이조판서를 지냈던 조병구는 고도근시여서

안경을 써야만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어느 날 안경을 쓴 채 입궐한 그는 헌종이 마주 오는 것도 모르고 그대로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던 헌종은 자기 앞에서도 안경을 벗지 않은 그에게

“아무리 외척의 목이라고 해서 칼날이 들지 않을까”라며 뼈 있는 말을 던졌다.

헌종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이 어리다고 신하가 무시해 안경을 끼고 있다고 생각한 것.

그 일이 있은 후 조병구는 친여동생인 조대비(신정왕후)를 만난 자리에서 안경을 낀 채 앉아 있다가

헌종과 우연히 마주침으로써 또 다시 큰 책망을 받았다.

결국 조병구는 두려움에 휩싸여 그날 밤 끝내 음독자살을 하고야 말았다.

한편 지독한 근시였던 순종도 아버지인 고종을 만날 때는 안경을 꼭 벗어야 했다.

이처럼 엄격한 예법은 외국인의 눈에서 볼 때 이해하지 못할 이상한 행동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영국의 여성 탐험가 이사벨라 버드는 한국에 와서

고종과 당시 왕세자인 순종을 뵙고 함께 사진을 찍었을 때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세자는 건강에 결함이 있어 보이며 강도의 근시안으로 몸을 잘 가누지 못할 지경인데도

예법상 상감 앞에서 안경을 써서 안 된다 하니 보기에 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같은 예법은 외국인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었다.

공식적으로 조선 조정의 관리가 된 최초의 외국인인 독일 외교관 묄렌도르프는

안경 없이 잘 걸을 수도 없는 지독한 근시였다.

고종을 처음 알현한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관복을 입고 안경을 벗은 채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큰절을 올렸다.

대한제국 당시 통리아문 참의벼슬을 한 독일인 묄렌도르프(한국명 목인덕) 

그리고 모국어로 미리 발음을 적어서 외워둔

조선의 인사말을 더듬거리며 읊조렸다.

이에 고종은 흡족하여 안경을 쓰도 좋다는 하명을 내렸다.

일반적으로 옛날 사람들은 현대 사람들보다 시력이 좋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조선시대의 임금과 대신들이 예법을 고민해가며 착용했을 만큼 안경의 인기는 왜 그처럼 높았던 걸까.

거기에는 나름대로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안경이 처음 발명된 서양보다는 유전적으로 동양인들의

근시 발병률이 더 높다는 통계 결과가 그것이다.

2007년 6월 호주의 대학 연구팀이 어린이 2천여 명을

대상으로 근시 발병률을 조사한 결과,

놀랍게도 서양인보다 동양인 그룹에서 근시 환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연구 결과에서도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근시가

전체 인구의 40% 정도지만

한국과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지역은 70% 이상이라는 통계가 제시되고 있다.

그 대신 서양인들은 근시보다 원시가 훨씬 많은 편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근시가 많은 것은 흔히들 독서나 텔레비전 탓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근시는 그런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생기지는 않는다.

근시란 시력이 정상 수준에 이르면 안구의 성장이 멈춰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계속 성장해

안구가 길쭉해진 상태다. 따라서 책이나 텔레비전처럼 가까이 있는 사물을 많이 본다고 해서

눈이 그 환경에 적응해 먼 거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근시는 조상 탓일까 환경 탓일까

실제로 지난 2004년에는 근시를 유발하는 변이 유전자가 발견되기도 했다.

영국의 세인트 토마스 병원 연구진은 일란성 쌍둥이와 이란성 쌍둥이 221쌍의 DNA를 조사한 결과,

근시를 가진 아이들의 경우 제11번 염색체에 있는 PAX-6 유전자에 결함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렇다고 해서 근시가 생긴 원인을 반드시 조상 탓으로 돌릴 수만도 없다.

이스라엘 연구진의 보고에 따르면 일반 공립학교의 학생들에게서는 근시가 30% 정도 증가한 반면,

경전을 읽는 것을 강조하는 종교학교의 학생들에게서는 근시가 80% 증가했다고 한다.

이는 유전적인 요인보다는 독서 시간이 증가하는 등의 생활 습관 변화로 인해

근시가 생긴다는 단적인 증거가 된다.

또 식습관 때문에 안구가 비정상적으로 길어지면서 근시가 될 확률이 커진다는 연구 보고도 있다.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학의 코데인 박사는 빵이나 시리얼처럼

정제된 전분이 많이 함유된 식품을 과도하게 섭취하면 근시 위험이 높아진다고 발표했다.
정제된 녹말이 인슐린 수치를 높여 안구가 비정상적으로 길어지는 등

안구 발달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런데 빵이나 시리얼ㆍ백미처럼 정제된 녹말을 많이 먹게 된 선진국은

독서와 TV, 컴퓨터, 공기오염 등 시력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들도 덩달아 증가했다는 데

문제점이 있다.

800년대 중반의 우각 꺽다리 안경

(사진 출처 : 안경박물관) 

따라서 연구진은 비교적 문명의 손길이 덜 뻗쳤고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근시가 거의 없던 남태평양의 섬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근시 발생 현황을 조사했다.

그 결과 남태평양의 섬 중 서구식 식생활을 도입한 섬의 주민들은 현재 50% 정도가 근시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하루 8시간씩 학교 교육을 받는 등 생활양식은 비슷하지만 음식만은 서구식 식사를 도입하지 않은 다른 섬의 주민들은 근시 발생률이 2%에 불과했다.

한편 출생월과 시력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연구결과도 발표되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 연구진이 30만 명을 대상으로 근시와 출생월과의 연관성에 대해 조사한 결과,

6월과 7월에 태어난 사람들이 12월과 1월에 태어난 사람에 비해

근시에 걸릴 확률이 24%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연구진은 출생 후 초기에 발생하는

자연광에의 노출이 근시가 될 확률을 높이는 것으로 분석했다.

이런 여러 연구 결과들은 감안할 때 근시는

유전과 환경의 영향을 동시에 받아 생기는 대표적인 질병으로 볼 수 있다.

좀 더 정확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근시는 유전적 요인이 89%, 환경적 요인이 11%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건 시력이 떨어지면 다른 어느 질환보다도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오죽하면 '몸이 천냥이면 눈이 구백냥'이란 말까지 나왔을까.

하지만 나이가 들어 자연스레 생기는 노안의 경우 그렇게 비극적으로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제껏 책에서 얻은 지식이 아닌, 경험에서 우러난 경륜과 혜안으로 세상을 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안경의 착용 여부에 대해 고민하던 다음해, 그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800년(정조 24년) 6월 28일 유시(오후 6시경)에 정조는 창경궁의 영춘헌에서 승하했다.

그날 실록에 의하면

“양주나 장단 등의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상복을 입은 벼’라고 했다”는 등

정조의 죽음을 예고하는 징후가 나타나 있다.

 현존하는 국내 최초인 학봉 김성일의 안경 

독살설 등 정조의 죽음에 대해 논란이 많은데, 정조의 죽음에 대한 징후는 이미 시력이 급속도로 나빠진 이후인 1년 전부터 거론되고 있었다.

좌의정 이병모와 차대하는 자리에서 안경을 끼고 조정에 나가느냐 마냐의 문제를 놓고 고민한 지 두 달 후 정조는 다시 시력과 안경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나의 시력이 점점 이전보다 못해져서 경전의 문자는 안경이 아니면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안경은 2백 년 이후 처음 있는 물건이므로 이것을 쓰고 조정에서 국사를 처결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이다.

요즘 일기 등 문서를 상고해 볼 일이 있었는데 역시 마음대로 훑어보기가 어려웠다.

이는 예사로운 눈병이 아니어서 깊은 생각을 한다거나 복잡한 일이 있을 경우 어김없이 이상이 생겨

등골의 태양경(太陽經)과 좌우 옆구리에 횃불이 타는 듯한 열기가 있는데

이것이 눈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1799년(정조 23년) 7월 10일자 정조실록>

이 기록을 살펴볼 때 정조는 이때부터 이미 건강에 이상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눈병이라 일컬을 만큼 시력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정조는 이 기록에서 우리나라에 안경이 유래한 시점을 알려주고 있다.

200년 이후부터 처음 있은 물건이라고 했으니

안경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6세기 말 무렵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유럽 최초의 안경

안경의 최초 기원에 대해서는 대체로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동양기원설로서 1250년경 몽골 지방을 여행하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윌리투브크가

몽골 사람들이 안경을 끼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는 설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윌리튀브크는 동료 수도사인 베이컨에게 그 사실을 전했고,

그 후 1268년 베이컨이 유럽 최초의 안경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13세기 말 이탈리아의 유리공들이 안경을 처음으로 발명해 보급하기 시작했다는 설이다.

그것이 실크로드를 통해 원나라 때부터 중국에 전파되었고,

16세기에 이르러 널리 보급되면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람에 의해 조선에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 중엽의 문신인 임방의 초상화. 서탁 위에 놓인 안경을 볼 수 있다. 

여러 역사적 사실들도 16세기 말 무렵에 안경이 조선에 유래되었다는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조선 중기 실학의 선구자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을 보면

임진왜란시 강화협상을 위해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 심유경과 일본 승려 현소가 작은 글씨를 볼 때마다 안경을 끼고 읽는다고 적고 있다.

또한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안경은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 사정을 탐지하고자 파견된 김성일의 것이다.

이 안경은 경북 안동에 거주하던 그의 14대손이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서 1984년 발견되었다.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형식이며, 끈으로 귀에 걸게 되어 있다.

이 안경은 우리나라 안경의 역사가 최소한 임진왜란 전임을 증명하고 있다.

한편 제주도 정의현감으로 있던 이종덕은 풍랑을 만나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서양사람들이 안경을 끼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안경을 처음 본 그는 ‘마치 게눈깔이나 벌의 눈두덩 같았다’고 표현했다.

그 후 게눈깔은 좀 더 고상한 이름인 ‘애체(靉靆)’로 불렸다.

중국어 표기에서 따온 것으로 짐작되는 이 말은

‘눈에 구름 같은 것을 끼고 희미한 것을 밝게 보여준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안경의 또 다른 명칭으로는 ‘왜납(矮納)’이라는 말이 있었다.

이는 페르시아어의 애낙(Ainak)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한다.



착용하면 시원해지는 경주남석안경

조선 후기 언어학자 황윤석이 남긴 문집 중에는

오랜 연륜을 자랑했던 ‘경주남석안경’과 관련된 기록이 나온다.

즉, 경주부윤 민기가 1630년경 경주에서 만들어진 남석안경을 착용했다는 것.


경주남석안경은 경주 남산에서 생산되는 수정을 가공해 만든 것으로,

당시 경주 지역의 특산품으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이 안경을 착용하면 눈의 피로가 사라지고 더운 곳에서도 시원하며

기온 차에 의한 서리가 끼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수정렌즈가 유리렌즈보다 온도에 따른 변화가 적었기 때문에 나온 말로 짐작된다.


따라서 외국인들에게까지 알려졌는데, 미국인 선교사 제임스 게일이 쓴 ‘코리언스케치’라는 책에

그 일화가 남아 있다. 그 책에 의하면 게일은 조선의 한 양반으로부터 경주남석안경을 30냥에 구입했는데,

이는 당시 환율로 6달러 정도였다. 게일은 이 안경의 원래 가격이 15달러 정도라고 밝히며,

조선 가정의 두세 달치 수입을 몽땅 털어야 이 안경을 구입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경주남석안경은 경주 남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수정 채굴이 전면 금지되고

마지막 남은 안경제작 기술 전수자가 사망하면서 현재는 맥이 완전히 끊긴 상태이다.

이처럼 비싼 안경으로 인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씁쓸한 소동이 일어난 적도 있다.
1898년 8월 일본 전 총리대신 이토가 내한하자 외부에서 축하연을 열었다.

그런데 잔치 후 상 위에 놓아두었던 이토의 안경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

이토가 화를 내고 돌아가자 조정에서는 심부름을 했던 하인과 하급 관리들을 잡아들여 신문했고

수십 명이 옥에 갇히기까지 했다. 그 소문이 퍼지자 장안의 여론이 들끓었고

험악해진 분위기 탓에 일본인들에 대한 외출금지령까지 내려졌다.

열흘 후 결국 하인 한 명이 그 안경을 훔쳤다는 발표가 났고, 범인은 안면도에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후에 그날 잔치에 기생으로 차출된 궁녀 한 명이 일본에 대한 저항으로 일으킨 것임이 밝혀졌다.


안경에 얽힌 조선의 추억

1891년에도 일본인의 안경 때문에 조선인이 유배되는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다.

새로 부임해온 일본 오이시 공사가 고종을 알현하려 대전에 들려는 순간

당시 궁정통역관인 배정자의 남편 현영운이 그를 급히 불러 세웠다.

오이시가 안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영운은 임금 앞에서 안경을 벗는 것이 조선의 예절이라며 안경을 벗기를 청했지만,

오이시 공사는 그 말을 듣지 않은 채 고종 앞으로 나아갔다.

이를 놓고 후에 사대부들이 들고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결국 죄도 없는 현영운을 유배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 김득신이 그린 '밀희투전'에도 안경을 쓴 인물이 등장한다 


그러고 보면 조선의 안경에 대한 추억은 모두 일본과 연관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안경의 주인공인 김성일은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다온 후

왜군의 침략 정황을 전혀 엿볼 수 없었다는 어긋난 보고를 올린 장본인이다.

또 안경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인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등장하는 안경 착용자도

일본 승려 현소와 임진왜란 강화 협상을 하기 위해 온 명나라 장수이다.

그리고 조선 말엽 오이시 공사의 무례함과 이토 전 총리대신의 안경 분실 사건….

시력과 건강이 급속히 악화된 정조가 그토록 안경의 착용 여부를 놓고 고민했던 것도 

왠지 이를 예견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 이성규 기자 [이야기 과학실록]

- 2009.02.27 /03.06ⓒ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