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흔히 신들의 고향이라고 한다.
제주에는 1만 8천이나 되는 신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며
아직도 여전히 신앙행위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의 셈할 수 있는 최대 수치가 1만 8천이며,
셀 수 없이 많다 혹은 오래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또한 제주인들의 삶이 척박하여 초월적인 신(神)의 힘을 빌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제주인들의 삶의 반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전통사회에서 제주사람들의 신앙생활의 중심을 이룬 것은 무교(巫敎)라고 할 수 있다.
무교란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신앙으로
비인격적인 자연을 인격화하고 조상을 신성시하는 믿음체계의 하나로 민간신앙의 하나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혹은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면서 그 의미가 많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현재까지도 존재하고 있는 제주의 신당(神堂)의 수는 무려 300여 곳에 이른다.
'절(寺)오백, 당(堂)오백’이라 일컬을 정도로 당(堂)이 많다.
제주의 면적과 인구수에 비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신당은
제주인의 생활의식과 생활문화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코드의 하나이다.
물론 마을에 따라서는 신당이 없기도 하고, 신당이 있으나 신앙민이 적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마을에는 신당에 여전히 신앙민(信仰民)들이 찾아오며
심지어 어떤 마을에는 7~8개의 신당이 존재하기도 한다.
신당은 크게 본향당과 일담(黕)당, 여드렛당, 해신당, 산신당 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각 당들은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진다.
예를 들면 본향당은 마을의 중심당으로
마을사람들의 생산(生産), 물고(物故), 호적(戶籍) 등을 관장하는 곳이다.
본향당 여신이 마을의 안녕과 평안, 생업의 풍요를 가져다 준다고 믿는다.
일담(黕)당은 제일이 7일, 17일, 27일로 매 7일날 당을 찾는 날이다.
여기에 좌정한 신은 육아와 치병(治病)을 담당한다.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나 제주의 풍토병의 하나인 피부병이 발병하면 여기와 치성 드린다.
여드렛당은 매 8일이 제일로 이 당은 주로 뱀을 모시는 당이다.
제주는 주로 밭농사와 관련이 깊고 곡식을 갉아먹는 쥐는 퇴치해야할 주 대상이었다.
쥐의 천적은 뱀이고 그러니 뱀은 제주사람들에게 곡식을 지켜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뱀을 부(富)을 가져다주는 존재, 즉 부군칠성이라 하여 위한다.
해신당과 산신당은 생업과 관련된 이들이 주로 다니는 당으로
제주의 신당들은 이렇게 기능적으로 구분되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마다에는 한쪽 고즈넉하고 아늑한 자리에 신당이 위치해 있다.
신과의 은밀한 대화를 하는 곳이니 만큼 고즈넉해야 할 것이며,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만큼 아늑해야만 하는 곳이 바로 신당이다.
신당은 마을의 크고 작은 일,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일일이 당신(堂神)께 고할 정도로
마을 사람들의 중심적인 생활권이 되곤 한다. 이렇게 볼 때 제주도의 무교는 그 어느 지역보다 강하게
지역민의 종교로서 그 생활세계를 지배했던 하나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제주의 신당에는 정초가 되면 마을마다 일정한 날을 정하여 마을 제사가 이루어지며
한해 마을 주민의 무사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축제가 벌어지곤 한다.
우리가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 알고자 한다면 제주인들의 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그리고 현재에도 여전히 제주인의 정신과 문화에 살아 숨쉬고 있는 무교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제주문화를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제주의 신당은 우리 할머니들과 어머니의 고단하고 척박한 삶 속에서도
언제나 정신의 의지처로 삼았던 신들이 좌정한 곳이며,
그곳은 가족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신성한 장소이고,
그곳에서 제주의 척박한 삶과 환경을 극복하는 지혜와 공동운명체로서의 마을의식을 길러왔던
장소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이렇게 제주인의 삶을 관통하여 전승되어온 정신의 의미를 되묻는 것이
오늘 우리가 신당을 찾는 이유인 것이다.
제주의 신당은 그 수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신당을 형태적으로 본다면 와흘리에는 아름드리 신목으로 그 위세를 자랑하는 당도 있는데,
와흘당에는 남신을 의미하는 '하로산당'과 여신을 의미하는 '노들당'이 있다.
상귀리의 황다리궤는 제주의 화산지형의 특징의 하나인
커다란 궤형(그 깊이가 깊지 않아 얕은 동굴모양을 취한다)인 바위형태의 당도 있다.
그리고 주로 바닷가 지역에는 원형의 돌담을 쌓아 소박하게 신을 모신 신당도 있다.
신의 형상인 경우 위패로 모시거나
일정한 신상을 모시는 경우, 또는 신의(神衣)가 당신으로 좌정한 경우도 있다.
이런 신상들 가운데 대표적인 돌미륵형태의 신상을 모신 곳이 바로 '윤동지영감당'이다.
윤동지영감당은 제도종교인 불교와 제주의 민간신앙이 합쳐진 독특한 당이다.
물론 제주시 동회천 화천사에는 5기의 미륵불(오석불)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사찰에서 모시는 경우이고
민간신앙으로 신성시 되는 경우는 윤동지영감당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제주시에서 자동차로 동쪽을 향하여 20분 정도 가다 보면 화북동 해안가 마을에 위치한 당으로
지금도 윤씨 집안과 바다를 생업으로 하는 어부들이 다닌다.
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마치 제주의 민가를 찾아가는 입구인 올레를 연상시키는 길고 구부러진 돌담이 둘러져있다.
그래서 당은 길에서 굽어들어야만 볼 수 있다.
입구에 다다르면 정사각형에 가까운 돌담이 쌓아져 있고 또한 네모난 궤를 만들어 신상을 모시고 있다.
그 신상은 온몸을 한지로 둘러져 있으며, 신상 앞 오른쪽 앞에는 작은 석상 하나가
머리에 한지를 두르고 마치 주 신상을 수호하듯 얌전히 앉아있다.
신당의 내력담을 제주에서는 본풀이(근본을 푼다는 뜻으로 즉 신화이다)라고 하는데
거기에 의하면 이곳의 신상이 이곳에 좌정하게 된 연유와 옷을 입히게 된 이유들을 알 수 있다.
제주도 무가본풀이사전(진성기 저, 민속원, 1991)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미륵상 모셔진 내력이 나오는데 미륵은 경상북도 안동의 절에 있던 부처님으로
제주의 관음사(觀音寺)에 모시려고 가져오다 배가 좌초되는 바람에 바다에 유실되었다가
윤동지영감 낚시에 걸린 것이라 한다. 그리고 윤동지영감은 미륵상이 걸리자
처음에는 다시 바다에 빠뜨렸더니 세 번이나 걸려 올려지니 뱃머리에 두었다 한다.
그랬더니 고기가 잘 잡혀 만선(滿船)하여 돌아 왔다.
그러나 포구에 닿자 그 미륵을 방치한 채 두고 와 버렸다.
어부들이 닻줄을 매어 놓는 용도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석상미륵 허리춤에 닻줄이 매어지니
윤씨 할아버지는 몸에 부스럼이 나기 시작하고 병명을 알 수 없어 점(占)을 치니
석상미륵을 방치하여 낮에는 볕이슬 맞히고, 밤에는 찬이슬 맞힌 조화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윤씨 집안에서는 이 미륵상을 모시기 시작했고 조상으로 생각하여 지금까지 모시고 있다.
이 조상을 위해서 특별히 준비하는 것이 있는데 자손들은 창호지 두 장을 가지고 가서
한 장으로는 송낙을 만들어 씌우고, 또 한 장으로는 허리에 두르게 한다.
이 신상이 옷을 입게 된 내력까지 본풀이에서는 소상하게 전하여 주고 있다.
윤씨 집안에서 미륵상을 모신 후부터 집안이 일어나고 자손들이 성공하게 되자
점차 마을로 퍼져나가 점점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 마을에서 모시는 당신이 되어 갔다.
이렇게 제주에는 한 집안의 조상신이 마을신앙으로 전이되는 경우도 흔히 있는 일이며
특히 어부에 종사하는 자들이 바다의 풍요와 만선을 기원하며 찾는 해신당의 성격을 갖는 당이다.
제주에는 입춘을 전후해서 마을마다에는 한해의 무사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마을제가 열리고,
새해를 시작하는 개인들도 또한 자신의 기원을 담아 신당을 찾는다.
윤동지영감당을 돌아보며 곧 어제 새로 입혔을 법한
윤동지영감의 새 옷이며 허리에 두른 소지(소원을 담은 하얀 백지)를 보며
제주인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기원처가 신당임을 새삼 확인한다.
- 장혜련, 문화재청 제주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문화재청, 2009-02-23
흔히 제주도는 신들의 땅이라고 한다
제주도에만 존재하는 신구간이 이를 증명해준다
신구간은 매년 대한(大寒) 후 5일, 입춘(入春) 전 3일까지 기간을 말한다
"제주도의 세시풍속 중 가장 독특한 것이 바로 이사 풍습을 가리키는 신구간이다.
이는 ‘신구세관교승기간(新舊歲官交承期間)’의 줄임말로 여기에서 관(官)은 신(神)을 말한다.
산과 바다, 마을과 가정, 목축과 농경을 관장해 오던 온갖 신들이
서로 임무를 교대하는 기간이라는 것이다.
옛부터 이 기간에는 조왕신(부엌신), 문전신(문을 다스리는 신) 등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제주의 1만 8천명의 모든 신이 지난 한해 동안 있었던 일을 옥황상제에 보고하고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기 위해 하늘에 올라가 머무르기 때문에 집을 옮기거나 수리해도
동티(토신의 성냄으로 인한 재앙)가 나지않는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제주도에는 신당의 고향이다. 옛부터 제주는 당오백, 절오백이라고 했다.
그러던 것이 제주목사에 의해서 일부 몰살을 당하고 근현대사 거치면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지만
지금도 마을마다 제주도 전역에 380여 개의 신당이 존재한다.
마을의 수호신을 본향, 신을 모신 신당을 본향당(本鄕堂)이라고 하는데,
특히 송당리는 당신(堂神)의 원조가 되는 남신 '소로소천국'과 여신 '백주또'가 좌정하고 있는 곳으로
둘이 결혼하여 9명을 낳고 이들이 제주지역의 당신이 된다.
'소로소천국'은 목축과 수렵, '백주또'는 오곡을 가져와 제주전역에 전파하게 된다.
이곳 본향당은 여신 백주또신을 모신 곳이다.
한편, 한림, 금악 일대가 옛날에는 목축을 하여 제주도의 부자마을이었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벼농사를 하는 한경면과 서귀포 강정땅을 소유했을 정도였다.
금악할망의 셋째딸이라는 상명리 본향당만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쌀밥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 말 목축이 쇠퇴하고 이 지방 사람들이 빈촌으로 전락하게 되었는데
이후에 이시돌 목장이 들어서면서 돼지를 키워 삶이 나아지게 되었다지만
삶에 여유를 가져다 준 이시돌목장을 통해 자연스럽게 카톨릭을 접하게 되고
이후에는 당을 멀리하게 되어 찾아오는 이 별로 없는 잊혀지는 존재가 되었다.
- 제주도 신당기행기 -
한라산신
"하로산또(‘한라산신’을 뜻하는 제주도 방언), 하로산또, 무사무탈하게 끝날 수 있도록 살펴줍서…."
한라산에 솟아있는 오름 중의 하나인 해발 1,169m의 어승생악 정상.
수십 명의 사람들이 한라산신께 정성스럽게 절을 하고 있다.
모두 제주도 신당기행을 떠나려고 모인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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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바다라는 환경과 맞서 살아야 했기에,
어느 지역보다도 민간 신앙에 대한 믿음이 깊었던 제주도.
그 신앙의 깊이만큼 제주도 곳곳에는 많은 신당들이 존재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미신’이라는 낙인과 함께 신당은 사라져 갔다.
8월 27, 28일 양일간, 잊혀져 가는 신당을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직접 만나보려는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읍내 송당마을에서 시작해
송당마을 주변 신당과 송당마을 본향당을 답사해 내려갔다.
# 신당 기행의 중심 송당 마을
신당기행을 떠나려고 모인 출발지에는 예상 밖에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제주도의 문화를 지키려는 시민단체 사람들과 자신의 지역문화에 대해 알고자 참여한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제주도에 여행 왔다가 우연히 이번 행사에 동참하게 된 관광객,
어린 딸에게 옛날 신당을 구경시켜주고자 온 주부까지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번 행사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송당마을 어르신들도 헛기침을 하며 서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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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이 머물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가장 먼저 만든 마을이 송당마을이야.
물론, 제일 먼저 신들이 좌정한 곳도 송당 본향당이지”하는,
송당마을 어른들의 송당 본향당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실제로 각종 기록에는 송당마을의 신에서 갈라져 나온 아들과 딸들이
제주도 각지의 신당과 신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송당마을을 제주신들의 본향이라고 여기고, 이번 신당기행도 송당마을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 한라산신에게 고하기
신당 기행은 한라산신께 ‘신당 기행’을 고하는 일로 시작 되었다.
하지만, 산신을 뵙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라산 중턱인 어리목에서 차에서 내린 뒤 1.3km의 산길을 30여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비로소 한라산신을 ‘알현’할 수 있는 어승생악 정상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만나려고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중생을 귀엽게 여기셨는지,
한라산신은 굽이굽이 모퉁이 마다 한라산의 절경을 마련해 두셔서 올라가는 일이 고되지 만은 않았다.
어승생악 정상에 이르자 의외의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 넓지는 않지만, 산신제를 올리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만한 넓이였다.
일행이 모두 정상에 오르자, 한라산신을 위한 상이 준비됐다.
소주와 배, 사과, 귤등의 과일로 이루어진 정성이 깃든 음식들이었다.
제단이 마련된 후에, 대표자가 나와서 산신들을 자리에 청하는 ‘초감제’를 행했다.
신들을 모신 후에 일동은 정성스레 절을 함으로써 이번 신당기행의 성공을 기원했다.
# 주변신당 둘러보기
어승생악 정상에서 내려온 후에, 본격적으로 제주도 마을에 남아있는 신당을 둘러보기 위해 나섰다.
기행할 신당은 제주시 회천마을의 새미당, 북제주군 조천읍 와흘리의 본향당,
북제주군 구좌읍 김녕리의 궤네깃당과 본향당 이었다.
제주도의 신당은 따로 집 모양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수 백 년 수령의 나무인 ‘신목’을 중심으로,
그 앞에 신들에게 제물을 올릴 제단을 마련해 둔 형태였다.
거기에다가 모시는 신이 여신일 경우에는 ‘물색’을 둘러둔다.
물색이란 여신의 옷감을 마련해 준다는 의미로 신당에 걸어두는 빨강, 노랑, 보라색등의 천을 말한다.
제주도 민속학자 강정식씨의 안내로 각 신당마다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었다.
와흘리 본향당에는 원래 여자 신이 먼저 내려와서 좌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 신이 네 발달린 고기를 먹었다 하여,
뒤에 이 신당을 찾은 남자신이 여자신을 내쫓고 신당의 주인이 되었다.
나중에 들어온 신이 먼저 자리 잡고 있던 신을 내쫓은 격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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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송당신의 여섯 번째 아들을 당신으로 모신 신당에서는
항상 돼지를 통째로 제물로 올려야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신은 식성이 너무 좋아서 돼지를 통째로 먹었기 때문이다.
신의 아버지도 육식을 즐기지 않았는데, 여섯 번째 아들만이 고기맛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설명을 들은 일행 중의 한명이
“그럼 그렇지. 나도 도새기(돼지의 제주도 방언) 하루만 안 먹으면 생각나는데,
신이라고 별 수 있나?”하면서 모두를 웃음 짓게 했다.
# 테우리코사
몇 군데 마을의 신당을 둘러 본 후 찾은 곳은, 영화 ‘이재수의 난’이 촬영되었던 아부오름이었다.
여기에서 행해지는 제사는 ‘테우리코사’였다.
테우리란 말이나 소를 키우는 ‘목동’을 뜻하고, 코사는 ‘고사’를 의미하는 제주도 방언이다.
현대화되기 전에 제주도의 주요 수입원은 목축이었다.
그만큼 제주도에서 테우리들은 특별한 존재였다.
중요한 지위의 테우리들이 목축신에게 지내는 테우리코사니,
얼마나 공들여 제사를 올렸을 지 짐작할 수 있다.
유명한 제주도의 바람을 맞으며 오른 아부오름 정상에서는 제사상 준비에 한창이었다.
제단에는 닭과 달걀, 조기찜 등 기름진 음식에다가 수박, 사과, 배등 과일은 물론이며,
제일 높은 신이 먹는다는 넓죽한 모양의 돌래떡이 준비되고 있었다.
테우리코사는 제주도 전통 복식인 갈옷과 도롱이를 차려입은 테우리 후손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제주도의 전통 의상에 신당기행에 참여한 일행의 카메라가 연신 찰칵거렸다.
제단이 준비된 후에 테우리들은 키우는 가축들의 건강과 번창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하면서
절을 올렸다.
테우리들의 목축신에 대한 제사가 끝나자, 준비된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음복시간이 있었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 신당을 돌아다닌 탓에 잔뜩 시장해진 일행은 제사 음식을 마음껏 맛볼 수 있었다.
섬이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었지만,
낯선 사람들에게 까지 부족함 없이 제사음식을 나누어 주는 넉넉한 마음을 지닌 분들이었다.
# 송당마을의 마블림제
테우리코사도 보고 넉넉하게 요기도 한 일행은 이번 기행의 마지막 코스이자,
제주도 신들의 본향인 송당마을로 행했다.
송당마을에서는 마을 주민으로 구성된 연의패가 풍악을 올리면서 마을을 돌고 있었다.
이것은 다음날 본향당에서 있을 ‘백중마불림제’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거리공연이라고 한다.
저녁 나절 내내 계속된 연의패들의 흥겨운 연주는 벌써부터 송당마을 전체를 들썩거리게 했다.
처음으로 제주신들을 뵈었던 신당기행의 첫째 날은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둘째 날이 밝자, 이번 신당기행의 핵심인 송당마을 본향당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제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마불림제를 위한 제단에는 벌써 정성스레 신을 위한 음식이 마련되어 있었다.
바닷생선으로 만든 생선찜을 중심으로, 포도, 배, 귤등의 과일과 돌래떡등이 제단 가득 차려져 있었다.
그 사이엔 초와 향을 피워 경건함을 더했다.
색색의 천들이 당집을 두르고 있었고, 길다란 대나무에 노란, 파랑, 빨간색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어서
토속적이면서도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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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신당에서 제사를 올리는 경우는 주로 마을에 큰 일이 있을 때이다.
바닷가 마을의 경우에는 고기잡으러 나가는 배가 있을 시기에 운항의 안정을 기원하면서
제사를 올렸다. 중산간 마을은 씨 뿌릴 때나 수확할 때 풍년을 고대하는 제사를 행했다.
이번에 송당마을 본향당에 행해진 제사는 ‘백중마불림제’ 였다.
이는 여름의 바쁜 농번기를 보내고 가을 추수를 기다리는 기간(백중)에,
장마철 내내 신의 옷에 묻었을 곰팡이(마)를 불어 없애는(불림) 것을 기원하는 제사였다.
여름이 끝나갈 때쯤에 신의 옷에 피어있는 곰팡이를 닦아 냄으로써,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는 것이다.
본향당에는 벌써부터 마불림제를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여러 사람의 소망과 기대 속에서, 마침내 송당마을 본향당에서 백중마불림제가 시작되었다.
제사를 주관하는 ‘수심방’이 붉은 빛 저고리를 입고 춤을 추면서 등장한다.
춤의 움직임은 신을 맞이하는 듯한 동작이다.
제단 주위에는 수심방을 도와 제사를 진행하는 ‘소미’들이 징, 북, 꽹가리를 울리면서
수심방의 움직임에 장단을 맞춘다.
수심방의 경건하면서도 익살스러운 춤사위와 소미들의 소리가 어우러지면서,
제사 전의 굿판은 점점 달아오른다.
굿판이 한참 뜨거워지자, 수심방은 신들에게 기원할 내용을 ‘본풀이’에 실어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처음엔 잘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수심방은 이네 관객을 고려한 내용의 기원문도 노래하기 시작한다. “회장님네가 우덜 마을을 잘 살피게 해 주십서.
관광 온 분들 많은데 자동차 사고 안나게, 저기 기자 분들 많은데 글 좀 잘 써지게 해줍서.
외국간 사람, 군대간 소년 모두 무사히 보호해 줍서”
하지만, 수심방의 너스레가 빠진다면, 굿판의 묘미는 반감되는 법.
“이번에 부디 콩 농사 잘 되게 해줍서. 누군지 우리 집 콩들 건드리감 해봐라 어디!”
좌중은 일순간 폭소를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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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신당의 제사 의식은 지역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짜임은 유사하다.
이번 행사에 참여한 제주전통문화연구소의 문무병씨의 말에 따르면, 신당 제사의 구성요소는 이렇다.
일단 마을의 이장을 비롯한 원로들로 구성된 마을대표가 신에게 절로 인사드리면서 제사가 시작된다.
그 다음에는 ‘제청신독’이라 하여, 떠돌아다니는 신을 청하여 자리에 앉도록 하는 순서가 있다.
그렇게 신들을 불러들인 후에는 ‘본풀이’에 들어간다.
본풀이란 무속신의 일생을 노래로 만든 것인데, 가락에 맞추어 사연을 이야기하는 형식이다.
그 후엔 부정을 내 쫓는 의미의 ‘세다림’과,
하늘에서 오는 신을 오리 밖까지 나가서 마중하는 ‘신청궤’가 행해진다.
수심방의 흥얼거림과 소미들의 가락 장단에 참여한 사람들은 점점 제사 자체에 빠져드는 모습이었다. 수심방이 흥얼거림을 잠시 쉬면서, 소미들이 여음구를 넣으며
꽹가리와 징 등으로 흥을 돋구는 순간에는
어느 새 관객 모두 “어허허야”하는 여음구를 따라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목소리를 모아 하는 여음구 속에는,
바라는 소망이 부디 신에게 전해지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 올리는 제사가 끝날 때쯤엔 한 바탕 춤판이 벌어진다.
제단 주위에 앉아계시던 마을 어르신들이 더덩실 춤을 추면서 굿판은 한층 더 즐거워진다.
마을 신에게 할 일을 다 했다는 홀가분한 마음을 즐기는 것이다.
신명나게 춤을 추고 난 마을 주민은
“신들에게 근심거리를 모두 의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네요”하면서
굿판의 여운을 잊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얼마간 춤판이 이어진 후, 수심방이 마지막 축원문을 고하고서는
마불림제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박수를 치면서 제사가 막을 내렸다.
이렇게 이틀간의 제주도 신당기행이 끝이 났다.
휴가를 보내려고 제주도에 왔다가 이번 신당행사에 참여하게 된 김도연씨는
“도시에서만 살아선지 신당에서 제사 올리는 것을 실제로는 처음 보았는데
천들이 휘날리는 신당 모습이 정말 멋있습니다.
굿판도 TV로 보았을 때는 지루했는데, 막상 직접 와서 보니까 흥겹구요.
제주도의 토속적인 맛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함께 한 일행들도 제주도의 신당들을 맘껏 보고,
덤으로 소망했던 일까지 신께 기원했으니 만족했다는 의견이었다.
- 조선일보, 고병윤.tiec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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